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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집이문족론 제4권
4. 삼법품 ②
[3심](2)
[문] 전광에 비유하는 마음[電光喩心]이란 어떤 것인가?
[답] 마치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간의 어떤 한 무리의 보특가라는 아련야(阿練若)에 머물러 있거나 혹은 나무 아래 머물러 있거나 혹은 조용한 데에 머물러 있으면서 부지런히 힘써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고요한 마음의 선정을 증득하며,
이 선정의 마음에 의하여 5순하분결(順下分結)을 영원히 끊고 불환과(不還果)를 얻으며,
위의 화생(化生)을 받아 곧 위의 세계에 태어나서 열반하게 되며, 다시는 욕계(欲界)에 도로 와서 나지 않는다.
마치 여름[夏分]이 지나 초가을이 되었을 적에 큰 구름 덩어리 속에서 번갯불이 번쩍하면 잠시 동안 물질의 형상이 나타났다가 도로 사라져 없어지는 것처럼,
어떤 한 무리의 보특가라가 아련야에 머물러 있거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나아가 그런 이가 얻게 된 마음을 번갯불 같다 하여 전광유라 한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문] 무엇 때문에 그런 이의 마음을 전광유라 하는가?
[답] 그의 마음과 뜻과 의식은 불환과를 증득하고서 잠깐 동안 환히 비춰 알면서도 빨리 도로 사라져 없어지나니, 그 때문에 전광유의 마음이라 한다.
[문] 금강에 비유하는 마음[金剛喩心]이란 어떤 것인가?
[답] 마치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간의 어떤 한 무리의 보특가라는 아련야에 머물러 있거나 혹은 나무 아래 머물러 있거나 혹은 조용한 데에 머물러 있으면서 부지런히 힘써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고요한 마음의 선정을 증득하며,
이 선정에 의거하여 마음은 모든 번뇌를 다하여 무루(無漏)의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증득하고 현재 법 가운데 뛰어난 신통과 지혜로써 스스로가 원만한 공덕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아나니,
즉 스스로 ‘나의 생(生)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을 다 마치고 뒷몸[後有]을 받지 않는다’라는 것을 깨달아 안다는 것이다.
비유하면 금강(金剛)은 조금도 다른 물질이 섞여 있지 않아서 쇠나 상아나 조개나 뿔이나 구슬이나 옥석(玉石) 등을 끊거나 뚫거나 깨뜨리지 못할 것이 없는 것처럼,
어떤 한 무리의 보특가라는 아련야에 머물러 있거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나아가 그러한 이가 얻은 마음이 금강과 같다 하여 금강유의 마음이라 한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문] 무엇 때문에 그런 이의 마음을 금강유라 하는가?
[답] 그런 이의 마음과 뜻과 의식은 배울 것이 없는 이의 과위[無學果]를 증득하여 결(結)ㆍ박(縛) 등이 없어서 파괴할 수 없나니, 그 때문에 금강유의 마음이라 한다.
[3보특가라]
3보특가라란,
첫째는 복혜(覆慧)의 보특가라요,
둘째는 슬혜(膝慧)의 보특가라며,
셋째는 광혜(廣慧)의 보특가라이다.
[문] 어떤 이가 복혜(覆慧)의 보특가라인가?
[답] 마치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간의 어떤 한 무리의 보특가라는 법을 듣기 위하여 필추 앞에 앉으면 그 필추는 가엾이 여겨서 그에게 법요(法要)를 말하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나중도 좋으며, 글과 뜻이 교묘하고 순일하고 원만하며, 맑고 깨끗한 범행을 열어 보인다.
그때 그는 법좌(法座)에 있으면서 설한 법에 대하여 처음과 중간과 나중 부분을 모두 다 알지 못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도 설한 법에 대하여 처음과 중간과 나중의 부분도 역시 알지 못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그는 도무지 지혜가 없어서 마치 엎어 놓은 그릇[覆器]과 같고 엎어 놓은 병[覆甁]과 같으니 비록 물을 많이 붓는다 하더라도 끝내 받아들이는 것이 없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어떤 한 무리의 보특가라가 법을 듣기 위하여 필추 앞에 앉지만,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나아가 그는 도무지 지혜가 없나니, 이것을 복혜의 보특가라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복혜의 보특가라라고 하는가?
[답] 그는 이런 지혜가 있어서 법좌에 있을 때에 설한 법에 대하여 처음과 중간과 나중 부분을 비록 모두 알고 싶어 하지만 지혜가 없기 때문에 모두 알지 못하며,
또 그는 이런 지혜가 있어서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도 설한 법에 대하여 처음과 중간과 나중 부분을 비록 모두 알고 싶어하지만 지혜가 없기 때문에 역시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그 때문에 복혜의 보특가라라 한다.
[문] 어떤 이가 슬혜(膝慧)의 보특가라인가?
[답] 마치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간의 어떤 한 무리의 보특가라는 법을 듣기 위하여 필추 앞에 앉으면 그 필추는 가엾이 여겨서 그를 위하여 법요를 설하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나중도 좋으며, 글의 뜻이 교묘하고 순일하고 원만하며 맑고 깨끗한 범행을 열어 보인다.
그때 그는 법좌에 있으면서 설한 법에 대하여 처음과 중간과 나중 부분을 비록 모두 다 알았다 하더라도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는 설한 법에 대하여 처음과 중간과 나중 부분을 모두 다 알지 못하게 된다. 먼저는 비록 받아들였지만 그 뒤에 잊어버린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좋은 음식을 얻어 무릎[膝] 위에 놓아두었는데 깜빡 잊어버리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면 그만 모든 음식이 밑으로 쏟아져 버리는 것과 같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어떤 한 무리의 보특가라가 법을 듣기 위하여 필추 앞에 앉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나아가 나중에는 잊어버리나니, 이것을 슬혜의 보특가라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슬혜의 보특가라라 하는가?
[답] 그가 법좌에 있을 때에는 설한 법에 대하여 처음과 중간과 나중 부분을 알고 싶어하는 것을 따라서 지혜가 생기기 때문에 모두 다 알았었다 하더라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는 설한 법에 대하여 처음과 중간과 나중 부분을 모두 다 알고 싶어하지만 지혜가 없기 때문에 모두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비록 먼저는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잊고 마나니, 그 때문에 슬혜의 보특가라라 한다.
[문] 어떤 이가 광혜(廣慧)의 보특가라인가?
[답]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간의 어떤 한 무리의 보특가라가 법을 듣기 위하여 필추 앞에 앉으면 그 필추는 가엾이 여겨서 그를 위하여 법요를 설하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나중도 좋으며, 글 뜻이 교묘하고 순일하고 원만하며 맑고 깨끗한 범행을 열어 보인다.
그때 그는 법좌에 있으면서 설한 법에 대하여 처음과 중간과 나중 부분을 모두 다 잘 알며,
또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도 설한 법에 대하여 처음과 중간과 나중 부분을 역시 모두 다 분명히 알 뿐더러 설한 이치도 잘 안다.
마치 찰제리(刹帝利) 여인이나 혹은 바라문(婆羅門) 여인이나 혹은 장자(長者)의 여인이나 혹은 거사(居士)의 여인이 맑은 물에 목욕하고는 좋은 향을 몸에 바르고 머리를 빗고 손톱을 깎으며 얼굴과 눈썹을 단장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여러 가지 영락을 붙인 뒤에 팔찌와 가락지로써 잘 장엄하였으나 오직 꽃다발만은 아직 쓰지 않고 있을 적에,
여러 높은 이들이 올발라(嗢鉢鑼)와 첨박가(瞻博伽) 등의 아름다운 꽃다발을 가지고 와서 그녀들의 취향에 따라 나누어 주면, 그 여인들은 그때에 기뻐 뛰면서 공손히 받은 뒤에 머리 위에 쓰고는 몹시 사랑하고 좋아하면서 끝끝내 잃어버리지 않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어떤 한 무리의 보특가라가 법을 듣기 위하여 필추 앞에 앉으면,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설한 이치를 잘 아나니, 이것을 광혜의 보특가라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광혜의 보특가라라 하는가?
[답] 그가 법좌에 있을 때에 설한 법에 대하여 처음과 중간과 나중 부분을 알고자 하는 것에 따라 지혜가 있기 때문에 모두 다 잘 알며,
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도 설한 법에 대하여 처음과 중간과 나중 부분을 알고자 하는 것에 따라 지혜가 있기 때문에 역시 모두 분명하게 알 뿐더러 설한 이치도 잘 아나니, 그 때문에 광혜의 보특가라라 한다.
마치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복혜(覆慧)는 총명하지 않으므로
비록 자주 법을 많이 듣는다 하더라도
지혜가 없어서 환히 모르는 것이
마치 덮여 있는 병이나 그릇에 물을 붓는 것 같다.
슬혜(膝慧)는 이 앞사람보다는 나아서
앉아 들을 때는 비록 잘 안다 하더라도
일어난 뒤에는 모두 잊어버리는 것이
마치 무릎 위에 놓은 물건을 깜빡 잊는 것과 같다.
광혜(廣慧)는 가장 뛰어난 이어서
법좌에 있거나 일어나거나 간에
글 뜻을 다 같이 환히 아는 것이
마치 여인이 꽃다발을 쓴 것과 같다.
염(念)과 변재(辯才)를 두루 감추고
즐거이 정(淨)을 닦고 염(染)을 버리며
교만과 방일을 끊으면
모든 악취(惡趣)를 능히 버리게 된다.
[3상좌]
3상좌(上座)란,
이른바 생년상좌(生年上座)와 세속상좌(世俗上座)와 법성상좌(法性上座)이다.
[문] 어떤 이를 생년상좌(生年上座)라 하는가?
[답] 나이가 많아서 어른이며 늙은이를 생년상좌라 한다.
[문] 어떤 이를 세속상좌(世俗上座)라 하는가?
[답] 법을 아는 부귀한 장자(長者)들이 법제(法制)를 세워 놓고 말하기를,
“모든 법을 알면서 많은 재산[大財]과 높은 지위[大位]와 큰 종족[大族]과 큰 세력[大力]과 많은 권속[大眷屬]과 많은 도중[大徒衆]이 있고 우리들보다 훌륭한 이면 우리들은 모두가 그를 추천하여 상좌를 삼고는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해야 한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런 인연 때문에 나이가 스무 살이나 혹은 스물다섯 살이라 하더라도, 만일 법을 알면서 많은 재산이나 높은 지위나 큰 종족이나 큰 세력이 있고 많은 권속과 많은 도중이 있는 이면 모두가 화합하여 그를 추천하여 상좌를 삼고는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해야 한다.
마치 모든 국토와 성읍(城邑)과 왕도(王都)에서 그가 견문이 많고 잘 알며 산수(算數)나 변재(辯才)나 서인(書印)이나 혹은 낱낱 공교한 업[工巧業]에 따라 다른 사람들보다 훌륭한 이면 모두 함께 화합하여 그를 추천하여 상좌를 삼고는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는 것과 같으며,
장사꾼 가운데서도 재물이 많은 이면 여러 사람들이 화합하여 그를 추천하여 상좌를 삼고는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는 것과 같으며,
또 왕이나 혹은 대신 등의 지위를 얻으면 여러 사람들이 다 함께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장발왕종(長髮王種)의 난타왕(難陀王)이 전쟁을 일으키려고 찰제리종(刹帝利種)의 마승왕(馬勝王)을 불러서 귀중한 보배를 내려 준 뒤에 그로 하여금 갖가지 기능을 나타나게 하고는,
그가 훌륭한 이임을 알고 나서 대신에게 말하기를,
“봉주(封主)여, 마땅히 알아야 하오. 나는 찰제리종의 마승왕의 발에 예배하려 하오” 하자,
대신이 말하기를 “천왕께서는 찰제리종의 마승왕의 발에 예배하면 안 되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보좌하는 신하이기 때문입니다. 임금이 신하의 발에 예배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러한 등의 사례는 한량없이 많이 있다. 지금 여기에서의 뜻은 장발왕종의 난타왕을 그때의 세속 상좌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 어떤 이를 법성상좌(法性上座)라 하는가?
[답]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여러 기구(嗜舊)나 장로(長老)들을 법성상좌라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런 이도 바로 생년상좌(生年上座)이다. 왜냐하면 부처님께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은 이를 참된 삶[眞生]이라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만일 어떤 필추가 아라한이 되어서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하여 이미 할 일을 다 마치고 일을 다 이룬 뒤에 모든 무거운 짐을 버리고 자기 이익을 체득하며,
모든 유(有)와 결(結)을 다하고 바른 지혜로 해탈하며,
마음이 자재(自在)해서 이러한 가운데 뜻으로 말하는 분이니,
이와 같은 이를 법성상좌라 한다.
세존께서 상좌에 대한 게송을 말씀하신 것과 같다.
마음이 들뜨면 솜씨 있는 말[綺語]이 많고
뜻에 물이 들어 생각함이 산란하면
오래도록 동산 숲에 숨어 산다 하더라도
그런 이는 진실한 상좌가 아니다.
구족계와 지혜와 바른 기억이 있고
고요해서 마음이 해탈하면
그런 이라야 법을 능히 관(觀)하나니
그를 진실한 상좌라 한다.
[3취]
3취(聚)란,
이른바 사성정취(邪性定聚)와 정성정취(正性定聚)와 부정취(不定聚)이다.
[문] 어떤 것이 사성정취(邪性定聚)인가?
[답] 5무간업(無間業)이다.
[문] 어떤 것이 정성정취(正性定聚)인가?
[답] 배울 것이 있는 이와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법[學無學法]이다.
[문] 어떤 것이 부정취(不定聚)인가?
[답] 다섯 가지 무간업을 제외한 그 밖의 유루의 법[有漏法]과 무위(無爲)이다.
[3거죄사]
3거죄사(擧罪事)란,
이른바 견거죄사(見擧罪事)와 문거죄사(聞擧罪事)와 의거죄사(疑擧罪事)이다.
[문] 견거죄사(見擧罪事)라고 하였는데, 어떤 것이 견(見)이고, 어떤 것이 거죄(擧罪)이며, 어떤 것이 사(事)이기에 견거죄사라 하는가?
[답] 견(見)이란,
어떤 필추가 일부러 생명 있는 것을 죽이고 주지 않는 물건을 가졌으며, 범행이 아닌 음욕의 법을 행하고 바르게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며, 일부러 부정(不淨)을 저지르고 때 아닐 적[非時]에 먹으며, 모든 술을 마시고 자기 손으로 땅을 파며, 초목을 부러뜨리고 노래하고 춤추고 풍악을 울리며, 꽃다발을 머리에 쓰고 제멋대로 거리낌 없이 놀았던 것 등을 본 것[見]이니, 이것을 견이라 한다.
거죄(擧罪)란,
이른바 다섯 가지로 죄를 들추는 것[擧罪]이니,
첫째는 각찰(覺察)의 거죄요, 둘째는 억념(憶念)의 거죄며, 셋째는 응고갈마(應告羯磨) 거죄요, 넷째는 포쇄타(布灑他) 때에 늘어놓는 거죄며, 다섯째는 자거(恣擧) 때에 늘어놓는 거죄이다.
[문] 어떤 것이 각찰(覺察)의 거죄인가?
[답] 어떤 필추를 깨닫고 살피게[覺察] 하면서 말하기를,
“구수(具壽)여, 그대는 이미 이러이러한 죄를 범하였으니, 마땅히 드러내 알리고 감추지 않아야 한다. 드러내 알리면 곧 안온해지지만 드러내 알리지 않으면 그 죄는 더욱더 깊어질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니, 이것을 각찰의 거죄라 한다.
[문] 어떤 것이 억념(憶念)의 거죄인가?
[답] 어떤 이가 다른 이에게 가르쳐 주면서 스스로가 기억[憶念]하게 하며 말하기를, “구수여, 그대는 일찍이 이러이러한 죄를 범하였으니, 마땅히 드러내 알리고 감추지 않아야 한다. 드러내 알리면 곧 안온해지지만 드러내 알리지 않으면 그 죄는 더욱더 깊어질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니,
이것을 억념의 거죄라 한다.
[문] 어떤 것이 응고갈마(應告羯磨)의 거죄인가?
[답] 마땅히 고하여[應告] 말하기를,
“구수여, 나로 하여금 그대가 잠자코 있음을 깨닫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머무르는 곳에 나가 있어라. 나는 구수에게 할 말이 있다”라고 하는 것이니,
이것을 응고갈마의 거죄라 한다.
[문] 어떤 것이 포쇄타[布薩] 때에 늘어놓는 거죄인가?
[답] 포쇄타 때에 차출되어 죄를 들추는 이가 말하기를,
“이 필추 대중은 화합하여 함께 앉아 포쇄타를 짓고 있다. 나 아무개 필추는 포쇄타를 위하여 차출되어 죄를 들추어내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니,
이것을 포쇄타 때에 늘어놓는 거죄라 한다.
[문] 어떤 것이 자거(恣擧) 때에 늘어놓는 거죄인가?
[답] 자거 때에 차출되어 죄를 들추는 이가 말하기를,
“이 필추 대중은 화합하여 함께 앉아 자거의 일을 짓고 있다. 나 아무개 필추는 자거의 대중을 위하여 차출되어 죄를 들추어내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니,
이것을 자거 때에 늘어놓는 거죄라 한다.
사(事)란, 이른바 곧 앞에서 본 범죄의 일[事]이니, 이것을 사라 한다.
이와 같은 것을 합하여 견거죄사(見擧罪事)라 한다.
[문] 문거죄사(聞擧罪事)라 하였는데,
어떤 것이 문(聞)이고, 어떤 것이 거죄(擧罪)이며, 어떤 것이 사(事)이기에 문거죄사라 하는가?
[답] 문(聞)이란, 이른바 어떤 필추가 일부러 생명 있는 것을 죽이고 주지 않는 물건을 가졌으며, 범행이 아닌 음욕을 행하고 바르게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며, 일부러 부정(不淨)을 내고 때 아닐 적에 먹으며, 모든 술을 마시고 자기 손으로 땅을 파며, 초목을 부러뜨리고 노래하고 춤추고 풍악을 울리며, 꽃다발을 머리에 쓰고 제멋대로 거리낌 없이 놀았다는 것 등을 들은 것[聞]이니, 이것을 문이라 한다.
거죄(擧罪)란, 이른바 다섯 가지로 죄를 들추는 것이어서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나니, 이것을 바로 거죄라 한다.
사(事)란, 이른바 앞에서 들었던 범죄의 일[事]이니, 이것을 사라 한다.
이와 같은 것을 합하여 문거죄사라 한다.
[문] 의거죄사(疑擧罪事)라고 하였는데,
어떤 것이 의(疑)이고, 어떤 것이 거죄(擧罪)이며, 어떤 것이 사(事)이기에 의거죄사라 하는가?
[답] 의(疑)란, 이른바 다섯 가지 일에서 의심[疑]을 내는 것이다.
첫째는 빛깔[色]로 말미암아서이고,
둘째는 소리[聲]로 말미암아서이며,
셋째는 냄새[香]로 말미암아서이고,
넷째는 맛[味]으로 말미암아서이며,
다섯째는 접촉[觸]으로 말미암아서이다.
‘빛깔로 말미암아서’란,
필추가 때 아닐 적에 마을로 들어가고, 때 아닐 적에 마을로부터 나오거나, 혹은 여인과 우거진 숲으로 들어가고 나오거나, 혹은 외도(外道)와 허물없이 친하거나, 혹은 선체(扇搋)나 반택가(半擇迦)와 허물없이 친하거나, 혹은 필추니와 허물없이 친하거나, 혹은 음녀(淫女)와 허물없이 친하거나, 혹은 어린 사내아이와 허물없이 친하거나, 혹은 큰 여인과 허물없이 친하거나, 혹은 과부와 허물없이 친한 것을 보았을 적에,
이와 같이 의심할 만한 일들을 보고 나서 곧 의심하기를,
‘이 구수가 실제로 청정하지 못한 사문(沙門)으로서 해서는 안 될 수순이 아닌[非隨順] 행을 행하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구수는 틀림없이 이미 범행이 아닌[非梵行] 법을 범했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니,
이것을 빛깔로 말미암아 의심을 낸다고 한다.
‘소리로 말미암아서’란,
필추가 때 아닐 적에 마을로 들어가고, 때 아닐 적에 마을에서 나왔다는 말을 들었거나, 혹은 여인과 우거진 숲으로 들고 나고 하였다는 말을 들었거나, 혹은 외도와 허물없이 친하고, 혹은 선체와 반택가와 허물없이 친하며, 혹은 필추니와 허물없이 친하고, 음녀와 허물없이 친하며, 어린 사내아이와 허물없이 친하고, 큰 여인과 허물없이 친하며, 과부와 허물없이 친하는 것을 들었을 적에,
이와 같이 의심할 만한 일들을 들은 뒤에 곧 의심을 내기를,
‘이 구수는 실제로 청정하지 않고 사문으로서 해서는 안 될 수순이 아닌 행을 행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러한 구수는 틀림없이 이미 범행이 아닌 행을 범했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니,
이것을 소리로 말미암아 의심을 낸다고 한다.
‘냄새로 말미암아서’란,
어떤 필추가 혹은 손을 씻기 위해서거나, 혹은 얼굴을 씻기 위해서거나, 혹은 물을 마시기 위해서거나, 혹은 어떤 한 가지 인연으로 다른 필추가 머물러 있는 곳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 냄새를 맡는 것이니,
이른바 여인의 향내나, 혹은 술과 고기 냄새나, 혹은 바르고 쏘이는 향내나, 혹은 그 밖의 어느 한 가지의 음탕[婬泆]한 냄새이다.
이런 냄새를 맡은 뒤에 곧 의심하기를,
‘지금 이 구수가 머무르는 곳에서는 벌써 이러한 청정하지 않고 사문으로서 해서는 안 될 순수하지 못한 냄새들이 나고 있으니, 틀림없이 그는 이미 범행이 아닌 법을 범했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니,
이것을 냄새로 말미암아 의심을 낸다고 한다.
‘맛으로 말미암아서’란,
마치 어떤 필추가 혹은 손을 씻기 위하여, 혹은 얼굴을 씻기 위하여, 혹은 물을 마시기 위하여, 혹은 어떤 한 가지 인연으로 다른 필추가 살고 있는 곳에 들어가서 그 필추가 여러 가지 맛난 것을 먹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니,
이른바 탐포라(耽飽羅)ㆍ용뇌(龍腦)ㆍ두구(荳蔲)나 혹은 그 밖의 어떤 한 가지 음탕[淫泆]한 맛이다.
그 필추가 이런 맛을 보고 있는 것을 보고 곧 의심하기를,
‘지금 이 구수는 혀가 깨끗하지 않고 사문으로서 해서는 안 될 순수하지 못한 맛을 보고 있구나. 틀림없이 이미 범행(梵行)이 아닌 법을 범했을 것이다’라고 하나니,
이것을 바로 맛으로 말미암아 의심을 낸다고 한다.
‘접촉으로 말미암아서’란,
마치 어떤 필추가 혹은 손을 씻기 위하여, 혹은 얼굴을 씻기 위하여, 혹은 물을 마시기 위하여, 혹은 어떤 한 가지 인연으로 다른 필추가 살고 있는 곳에 들어가서 그 필추가 쓰고 있는 평상 자리가 보배 향으로 장식되었고 얇고 부드러운 채색 있는 고운 비단이 깔렸으며,
평상의 양끝에는 똑같이 붉은 베개가 놓여 있고, 가릉가(迦陵伽)의 천으로 그 위가 덮인 것을 보며, 또한 그가 사는 곳에서 어떤 여인이나 혹은 단정한 소년이 앉아 있기도 하고, 혹은 누워 있는 것을 보기도 하면,
이런 일을 본 뒤에 곧 의심하기를,
‘지금 이 구수는 청정하지 않고 사문으로서 해서는 안 될 순수하지 못한 접촉을 하고 있구나. 틀림없이 이미 범행이 아닌 법을 범했을 것이다’라고 하나니,
이것을 접촉으로 말미암아 의심을 낸다고 한다.
이와 같은 것을 의(疑)라고 한다.
거죄(擧罪)란, 이른바 다섯 가지로 죄를 들추는 것이니,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것을 거죄라 한다.
사(事)란, 곧 앞에서 범했으리라고 의심하는 일[事]이니, 이것을 사라 한다.
이와 같은 것을 합하여 의거죄사(疑擧罪事)라 한
다.
[3불호]
3불호(不護)란,
이른바 모든 여래의 세 가지 업[三業]은 허물이 없으므로 감추거나 다른 이가 알까 두려워할 만한 일이 없기 때문에 수호하지 않는다[不護]고 한다.
어떤 것이 3불호인가?
첫째는 여래께서 지니고 계신 온갖 신업(身業)은 청정하게 현행(現行)하는 것이므로 행여나 청정하지 않게 현행하는 신업이 있어서 다른 이가 알까 두려워하거나 감추거나 또는 수호해야 할 필요가 없다.
둘째는 여래께서 지니고 계신 온갖 어업(語業)은 청정하게 현행하는 것이므로 행여나 청정하지 않게 현행하는 어업이 있어서 다른 이가 알까 두려워하거나 감추거나 또는 수호해야 할 필요가 없다.
셋째는 여래께서 지니고 계신 온갖 의업(意業)은 청정하게 현행하는 것이므로 행여나 청정하지 않게 현행하는 의업이 있어서 다른 이가 알까 두려워하거나 감추거나 또는 수호해야 할 필요가 없다.
[문] 어떤 것이 여래께서 지니고 계신 신업이 청정하게 현행하는 것인가?
[답] 신업이 청정하게 현행한다는 것은, 이른바 생명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물건을 취하지 않으며, 음욕의 삿된 행동을 여의는 것이다.
또 생명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물건을 취하지 않으며, 범행이 아닌[非梵行] 행을 여의는 것이다.
또 배울 것이 있는 이[學]의 온갖 신업이 청정하게 현행하는 것과 배울 것이 없는 이[無學]의 온갖 신업이 청정하게 현행하는 것과 배울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울 것이 없는 것도 아닌 이[非學非無學]의 착한 신업이 청정하게 현행하는 것이니,
이것을 통틀어서 신업이 청정하게 현행한다고 한다.
이 이치 속에서 말하는 뜻은 여래께서 지니고 계신 온갖 배울 것이 없는 이로서의 신업이 청정하게 현행하는 것과 온갖 배울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울 것이 없는 것도 아닌 이로서의 착한 신업이 청정하게 현행하는 것이다.
여래께서는 이와 같이 신업이 청정하게 현행하는 것을 완전히 갖추셨고 원만하게 성취하셨기 때문에 여래께서 지니고 계신 신업은 청정하게 현행한다고 한다.
[문] 어찌하여 여래에게는 청정하지 않게 현행하는 신업이 없으신가?
[답] 청정하지 않게 현행하는 신업이란,
이른바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는 물건을 취하며, 음욕의 삿된 행을 하는 것이다.
또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는 물건을 취하며, 범행이 아닌 행을 하는 것이다.
또 온갖 착하지 않은 신업과 온갖 이치에 맞게 이끄는 것이 아닌[非理所引] 신업과 온갖 신업으로서 선정[定]을 장애하는 것이다.
이것들을 통틀어서 청정하지 않게 현행하는 신업이라 한다.
여래께서는 이런 청정하지 않게 현행하는 신업에 대하여 이미 끊으셨고 두루 아셔서 마치 풀뿌리와 다라수(多羅樹)의 끝을 잘라 버린 것처럼 영원히 뒤에 나지 않는 법을 이루신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여래께서는 숨기거나 가리거나 또는 수호해서,
“다른 이가 나의 이 더러운 신업을 보지 않게 해야 한다”라고 하실 만한 일이 없기 때문에,
“여래에게는 청정하지 않게 현행하는 신업이 없으시다”라고 하신다.
[문] 어떤 것이 여래께서 지니고 계신 어업이 청정하게 현행하는 것인가?
[답] 어업이 청정하게 현행한다는 것은,
이른바 거짓말[虛誑語]을 하지 않고 이간하는 말[離間語]을 하지 않으며, 추악한 말[麤惡語]을 하지 않고 잡스럽고 더러운 말[雜穢語]을 하지 않는 것이다.
또 배울 것이 있는 이의 온갖 어업이 청정하게 현행하는 것과, 배울 것이 없는 이의 온갖 어업이 청정하게 현행하는 것과, 배울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울 것이 없는 것도 아닌 이의 온갖 착한 어업이 청정하게 현행하는 것이니,
이것을 통틀어서 어업이 청정하게 현행한다고 한다.
이 이치 가운데서 말하고 있는 뜻은 여래의 배울 것이 없는 이로서 온갖 어업이 청정하게 현행하는 것과, 배울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울 것이 없는 것도 아닌 이로서 온갖 착한 어업이 청정하게 현행하는 것이다.
여래께서는 이와 같은 어업이 청정하게 현행하는 것을 완전히 갖추셨고 원만하게 성취하셨기 때문에 여래께서 지니고 계신 어업은 청정하게 현행한다고 한다.
[문] 어찌하여 여래에게는 청정하지 않게 현행하는 어업이 없으신가?
[답] 청정하지 않게 현행하는 어업이란,
이른바 거짓말을 하고 이간하는 말을 하며, 추악한 말을 하고 잡스럽고 더러운 말을 하는 것이다.
또 온갖 착하지 않은 어업과 온갖 이치대로 이끄는 것이 아닌 어업과 온갖 어업으로서 선정을 장애하는 것이니,
이것들을 통틀어서 청정하지 않게 현행하는 어업이라 한다.
여래께서는 이런 청정하지 않게 현행하는 어업에 대하여 이미 끊으셨고 두루 아셔서 마치 풀뿌리와 다라수 끝을 잘라 버린 것처럼, 영원히 뒤에 나지 않는 법을 이루신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여래께서는 숨기거나 가리거나 또는 수호하여,
“다른 이가 나의 이 더러운 어업을 보지 않게 해야 한다”라고 하실 만한 일이 없기 때문에,
“여래에게는 청정하지 않게 현행하는 어업이 없다”라고 한다.
[문] 어떻게 여래께서 지니고 계신 의업이 청정하게 현행하는가?
[답] 의업이 청정하게 현행한다는 것은,
이른바 탐냄이 없는 것[無貪]과 성냄이 없는 것[無瞋]과 바른 소견[正見]이다.
또 배울 것이 있는 이의 온갖 의업이 청정하게 현행하는 것과, 배울 것이 없는 이의 온갖 의업이 청정하게 현행하는 것과, 배울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울 것이 없는 것도 아닌 이의 온갖 착한 의업이 청정하게 현행하는 것이니,
이것들을 통틀어서 의업이 청정하게 현행하는 것이라 한다.
이 이치 가운데서 말하고 있는 뜻은 여래의 배울 것이 없는 이로서 온갖 의업이 청정하게 현행하는 것과 배울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울 것이 없는 것도 아닌 이의 온갖 착한 의업이 청정하게 현행하는 것이다.
여래께서는 이와 같은 의업이 청정하게 현행하는 것을 완전히 갖추셨고 원만하게 성취하셨기 때문에,
“여래께서 지니고 계신 의업은 청정하게 현행한다”라고 한다.
[문] 어찌하여 여래에게는 청정하지 않게 현행하는 의업이 없으신가?
[답] 청정하지 않게 현행하는 의업이란, 이른바 탐내는 것[貪]과 성내는 것[瞋]과 삿된 소견[邪見]이다.
또 온갖 착하지 않은 의업과 온갖 이치에 맞게 이끄는 것이 아닌 의업과 온갖 의업으로서 선정을 장애하는 것이니,
이것들을 통틀어서 청정하지 않게 현행하는 의업이라 한다.
여래께서는 이런 청정하지 않게 현행하는 의업에 대하여 이미 끊으셨고 두루 아셔서 마치 풀뿌리와 다라수 끝을 잘라 버린 것처럼 영원히 뒤에 나지 않는 법을 이루신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여래께서는 숨기시거나 가리시거나 또는 수호하시면서,
“다른 이가 나의 이 더러운 의업을 보지 않게 해야 한다”라고 하실 만한 일이 없기 때문에,
“여래에게는 청정하지 않게 현행하는 의업이 없다”라고 한다.
세 번째 올타남(嗢柁南)으로 말하리라.
세 번째 세 가지 법에는 아홉이 있나니
이른바 세 가지씩의 애(愛)와 누(漏)와 구(求)와
그리고 유(有)와 흑암신(黑闇身)과
포(怖)와 수(受)와 고(苦)와 만류(慢類)이다.
3애(愛)와 3루(漏)와 3구(求)와 3유(有)와 3흑암신(黑闇身)과 3포(怖)와 3수(受)와 3고성(苦性)과 3만류(慢類)이다.
[3애]
3애(愛)라 함은,
첫째는 욕애(欲愛)요, 둘째는 색애(色愛)며, 셋째는 무색애(無色愛)이다.
[문] 욕애(欲愛)란 어떤 것인가?
[답] 모든 욕심[慾]에 대하여 모든 탐(貪)하는 것과, 같이 탐하며[等貪] 깊이 간직하고[執藏] 막아 수호하며[防護], 즐겨 달라붙고[耽著], 좋아하여 물드는 것[愛染]을 욕애라 한다.
또 욕계에 매인[欲界繫] 18계(界)와 12처(處)와 5온(蘊)의 모든 법에 대하여 모든 탐하는 것과, 같이 탐하며 깊이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즐겨 달라붙고 좋아하여 물드는 것을 욕애라 한다.
또 아래로는 무간대지옥(無間大地獄)으로부터 위로는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이르기까지 이 사이에 딸린 물질[色]ㆍ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의식[識] 등 모든 법에 대하여 모든 탐하는 것과, 같이 탐하며 깊이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즐겨 달라붙고 좋아하여 물드는 것을 욕애라 한다.
[문] 색애(色愛)란 어떤 것인가?
[답] 모든 형상[色]에 대하여 모든 탐하는 것과, 같이 탐하며 같이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즐겨 달라붙고 좋아하여 물드는 것을 색애라 한다.
또 색계에 매인[色界繫] 14계(界)와 10처(處)와 5온(蘊)의 모든 법에 대하여 모든 탐하는 것과, 같이 탐하며 깊이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즐겨 달라붙고 좋아하여 물드는 것을 색애라 한다.
또 아래로는 범중천(梵衆天)으로부터 위로는 색구경천(色究竟天)에 이르기까지 이 사이에 딸린 물질ㆍ느낌ㆍ지어감ㆍ의식 등 모든 법에 대해 모든 탐하는 것과, 같이 탐하며 깊이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즐겨 달라붙고 좋아하여 물드는 것을 색애라 한다.
[문] 무색애(無色愛)란 어떤 것인가?
[답] 형상이 없는 것[無色]에 대하여 모든 탐하는 것과, 같이 탐하며 깊이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즐겨 달라붙고 좋아하여 물드는 것을 무색애라 한다.
또 무색계에 매인[無色界繫] 3계(界)와 2처(處)와 4온(蘊)의 모든 법에 대하여 모든 탐하는 것과, 같이 탐하며 깊이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즐겨 달라붙고 좋아하여 물드는 것을 무색애라 한다.
또 욕계ㆍ색계 같은 데서는 처소의 위아래 차별이 결정되어서 서로가 뒤섞이지 않지만 무색계 가운데서는 이러한 일이 없다.
그러나 선정에 의거하여 나는 곳이 낫고 못함에 의하여 아래와 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아래로는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으로부터 위로는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에 이르기까지 이 사이에 딸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의 모든 법에 대해 모든 탐하는 것과,
같이 탐하며 깊이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즐겨 달라붙고 좋아하며 물드는 것을 무색애라 한다.
마치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탐애가 있는 모든 사람은
오랜 세상 동안 유전(流轉)하면서
자주자주 태(胎) 속의 괴로움을 받으며
모든 유(有) 가운데를 오고 가고 한다.
탐애를 끊은 모든 유정들은
폭류(瀑流)를 이미 끊었기 때문에
탐애의 윤생(潤生)을 끊었기 때문에
다시는 후유(後有)에 유전하지 않는다.
또 3애(愛)가 있나니,
첫째는 욕애(欲愛)요, 둘째는 유애(有愛)며, 셋째는 무유애(無有愛)이다.
[문] 욕애(欲愛)란 어떤 것인가?
[답] 모든 욕심[欲]에 대해 모든 탐하는 것과, 같이 탐하며 깊이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즐겨 달라붙고 좋아하여 물드는 것을 욕애라 한다.
[문] 유애(有愛)란 어떤 것인가?
[답] 색계와 무색계에서 모든 탐하는 것과, 같이 탐하며 깊이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즐겨 달라붙고 좋아하여 물드는 것을 유애라 한다.
[문] 무유애(無有愛)란 어떤 것인가?
[답] 유가 없는 것[無有]을 기뻐하는 이가 유가 없는 것에 대해 모든 탐하는 것과 같이 탐하며, 깊이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즐겨 달라붙고 좋아하여 물드는 것을 무유애라 한다.
이것은 또 어떤 것인가?
마치 어떤 한 무리가 두려움에 핍박받고 두려움에 시달리며, 근심과 괴로움에 핍박받고, 근심과 두려움에 시달리면서 괴로운 느낌[苦受]의 접촉 때문에 생각하기를,
‘어떻게 하면 장차 나의 몸으로 하여금 죽은 뒤에는 아주 없어져서 유(有)가 없게 해야 할까. 영원히 많은 병[衆病]이 끊어지면 어찌 즐겁지 않겠느냐?’고 하고,
그는 유가 없는 것을 기뻐하며, 그 유가 없는 것에 대하여 모든 탐하는 것과, 같이 탐하며 깊이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즐겨 달라붙고 좋아하여 물드는 것을 무유애라 한다.
마치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탐애에 집착하고 있는 유정은
마음이 유(有)와 무유(無有)를 탐하면서
악마의 멍에를 목에 얹고 있으므로
몸은 언제나 안락하지 못하다.
모든 유(有)의 가운데에 유전하고
태어난 뒤에는 늙고 죽고 하는 것이
마치 송아지가 젖을 좋아하면서
어미 소를 떠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3루]
3루(漏)란,
첫째는 욕루(欲漏)요, 둘째는 우류(有漏)며, 셋째는 무명루(無明漏)이다.
[문] 욕루(欲漏)란 어떤 것인가?
[답] 욕계에 매인 무명(無明)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욕계에 매인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ㆍ수번뇌(隨燔惱)ㆍ전(纏) 등을 욕루라 한다.
[문] 유루(有漏)란 어떤 것인가?
[답] 색계와 무색계에 매인 무명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색계와 무색계에 매인 결ㆍ박ㆍ수면ㆍ수번뇌ㆍ전 등을 유루라 한다.
[문] 무명루(無明漏)란 어떤 것인가?
[답] 삼계(三界)에서 지혜 없는 것[無智]을 무명루라 한다.
마치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만일 필추가 이미
욕루와 무명루를 끊었으면
번뇌[漏]가 영원히 다한 까닭에
그림자조차 없이 열반하게 된다.
[3구]
3구(求)란,
첫째는 욕구(欲求)요, 둘째는 유구(有求)며, 셋째는 범행구(梵行求)이다.
[문] 욕구(欲求)란 어떤 것인가?
[답] 욕유(欲有)에 머무르는 이가 욕계의 법에 대해서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하여 모든 구(求)하는 것과 따라 구하고[隨求] 평등하게 따라 구하며[平等隨求], 두려워하면서 구하고[怖求] 기꺼이 구하며[欣求], 생각하여 구하고[思求] 부지런히 구하는 것[勤求]을 욕구라 한다.
[문] 유구(有求)란 어떤 것인가?
[답] 색유(色有)와 무색유(無色有)에 머무르는 이가 색계와 무색계의 법에 대해서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하여 모든 구하는 것과 나아가 부지런히 구하는 것까지를 유구라 한다.
[문] 범행구(梵行求)란 어떤 것인가?
[답] 두 사람의 교회(交會)를 여읜 것을 범행(梵行)이라 하며, 8지성도(支聖道)도 또한 범행이라 한다.
이 이치 가운데서 말하고 있는 뜻은 8지성도를 범행이라 한다.
이 모든 8지성도에 있어서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하여 모든 구하는 것과 나아가 부지런히 구하는 것까지를 범행구라 한다.
또 욕구(欲求)란,
죽은 뒤에 장차 날 곳의 모든 유(有)를 구하는 것은 아니로되,
현재 뜻에 맞는 모든 빛깔[色]ㆍ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감촉[觸]과 의복ㆍ음식ㆍ침구와 병에 대한 의약이며 모든 살림하는 기구들에 대하여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하여 모든 구하는 것과 나아가 부지런히 구하는 것까지를 욕구라 한다.
유구(有求)의 유(有)는, 이른바 5취온(取蘊)이다.
어떤 것이 5취온인가?
이른바 물질의 쌓임[色取蘊]과 느낌의 쌓임[受取蘊]과 생각의 쌓임[想取蘊]과 지어감의 쌓임[行取蘊]과 의식의 쌓임[識取蘊]이다.
마치 어떤 한 무리가 생각하기를,
‘어떻게 하면 나로 하여금 미래 세상에 이와 같은 종류의 물질ㆍ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얻게 할까?’ 하고,
그는 죽은 뒤에 장차 태어날 모든 유(有)의 물질 등 5온에 대해 모든 구하는 것과 나아가 부지런히 구하는 것까지를 바로 유구라 한다.
범행구(梵行求)란,
세제일법(世第一法)으로부터 고법지인(苦法智忍)에 나아갈 때에는 범행구는 있지만 범행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여덟 가지 성도를 말하여 범행이라 하나니, 그는 그때에 아직 그것을 얻지도 못하고 아직 가까이 얻지도 못했으며, 아직 있지도 못하고 아직 나타나 있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고법지인으로부터 고법지(苦法智)에 나아갈 때는 범행구도 있고 또한 범행도 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여덟 가지 성도를 말하여 범행이라 하며,
그는 그때에 이미 얻었고 이미 가까이 얻었으며, 이미 있고 이미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고법지로부터 고류지인(苦類智忍)으로 나아가고 고류지인으로부터 고류지(苦類智)에 나아가며,
고류지로부터 집법지인(集法智忍)에 나아가고 집법지인으로부터 집법지(集法智)에 나아가며,
집법지로부터 집류지인(集類智忍)에 나아가고 집류지인으로부터 집류지(集類智)에 나아가며,
집류지로부터 멸법지인(滅法智忍)에 나아가고 멸법지인으로부터 멸법지(滅法智)에 나아간다.
멸법지로부터 멸류지인(滅類智忍)에 나아가고 멸류지인으로부터 멸류지(滅類智)에 나아가며,
멸류지로부터 도법지인(道法智忍)에 나아가고 도법지인으로부터 도법지(道法智)에 나아가며,
도법지로부터 도류지인(道類智忍)에 나아가고 도류지인으로부터 도류지(道類智)에 나아가며, 도류지로부터 도류지에 나아간다.
혹은 그 밖의 무루지(無漏智)에 나아갈 때는 범행구도 있고, 또한 범행도 있다.
왜냐하면 여덟 가지 성도를 말하여 범행이라 하며, 그는 그러할 때에 이미 얻었고 이미 가까이 얻었으며, 이미 있고 이미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또 만일 세간의 도[世間道]에서 일래과(一來果)와 불환과(不還果)를 증득할 때에 범행구는 있지만 범행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여덟 가지 성도를 말하여 범행이라 하는데 그는 그러할 때에 아직 그것을 얻지 못하고 아직 가까이 얻지 못했으며, 아직 있지 못하고 아직 나타나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무루의 도[無漏道]에서 예류과(豫流果)를 증득하고 혹은 일래과ㆍ불환과ㆍ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할 때에는 범행구도 있고 또한 범행도 있다.
왜냐하면 여덟 가지 성도를 말하여 범행이라 하므로 그는 그러할 때에 이미 그것을 얻었고 이미 가까이 얻었으며, 이미 있고 이미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기억[念]과 선정[定]을 갖추고 바르게 아는[正智]
모든 부처님의 진실한 제자는
바르게 알아서 성도(聖道)를 구하므로
끝내 그 밖의 일은 구하지 않는다.
만일 바라고 구하는 것이 이미 소멸하면
성도로 장차 나아감[當趣]이 다하리니
필추는 구하는 것이 다한 까닭에
그림자조차 없이 열반하게 된다.
[3유]
3유(有)란,
첫째는 욕유(欲有)요, 둘째는 색유(色有)며, 셋째는 무색유(無色有)이다.
[문] 욕유(欲有)란 어떤 것인가?
[답] 만일 업(業)이 욕계에 매이면서 취(取)가 연(緣)이 되어 장차 유(有)를 받는다면, 그 업의 이숙(異熟)을 바로 욕유라 한다.
[문] 색유(色有)란 어떤 것인가?
[답] 만일 업이 색계에 매이면서 취가 연이 되어 장차 유를 받는다면, 그 업의 이숙을 바로 색유라 한다.
[문] 무색유(無色有)란 어떤 것인가?
[답] 만일 업이 무색계에 매이면서 취가 연이 되어 장차 유를 받는다면, 그 업의 이숙을 바로 무색유라 한다.
[3흑암신]
3흑암신(黑闇身)이란,
첫째는 과거의 흑암신이요, 둘째는 미래의 흑암신이며, 셋째는 현재의 흑암신이다.
[문] 과거의 흑암신(黑闇身)이라 하였는데, 어떤 것이 과거(過去)이고, 어떤 것이 흑암(黑闇)이며, 어떤 것이 신(身)이기에 과거의 흑암신이라 하는가?
[답] 과거란,
이른바 모든 행(行)이 이미 일어났고 이미 같이 일어났으며, 이미 생겼고 이미 함께 생겼으며, 이미 옮아갔고 이미 나타났다 옮아갔으며, 이미 모여 쌓였고 이미 출현했던 것이 과거로 사라졌고 다하여 없어졌으며, 떠났고 변한 과거의 성품과 과거의 종류와 과거 세상에 속한 것 등을 과거라 한다.
흑암(黑闇)이란,
이른바 과거의 행(行)에 대해 갖가지로 구하여 이해하되 다른 지혜를 일으키며 나아가 의심[疑]과 망설임[猶豫]의 화살[箭]을 바로 검고 어둡다[黑闇]고 한다.
신(身)이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의심과 상응하는 무명(無明)을 몸[身]이라 한다”라고 한다.
이 이치 가운데서는 곧 의심을 신이라 한다.
왜냐하면 검다[黑]는 것은 지혜가 없다[無智]는 것을 말하며, 검음으로 말미암아 어두운 것[闇]을 말하여 흑암이라 하기 때문이니,
이것이 곧 의심이다.
곧 이 흑암을 말하여 신(身)이라 하나니, 그 때문에 과거의 흑암신이라 한다.
[문] 미래의 흑암신이란, 어떤 것이 미래(未來)이고 어떤 것이 흑암(黑闇)이며, 어떤 것이 신(身)이기에 미래의 흑암신이라 하는가?
[답] 미래란, 이른바 모든 행(行)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아직 함께 일어나지 않았으며, 아직 생기지 않았고 아직 함께 생기지 않았으며, 아직 옮아오지 않았고 아직 나타나 옮아오지 않았으며, 아직 모여 쌓이지 않았고 아직 출현하지 않은 미래의 성품과 미래의 종류와 미래 세상에 속한 것을 미래라 한다.
흑암이란, 이른바 미래의 행에 대해 갖가지로 구하고 이해하되 다른 지혜를 일으키며,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나아가 의심과 망설임의 화살이 있나니, 이것을 흑암이라 한다.
신(身)이란,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의심과 상응하는 무명을 신이라 한다”라고 했다.
이 이치 가운데서는 곧 의심을 신(身)이라 한다.
왜냐하면 검다는 것은 지혜가 없다는 것을 말하며, 검음으로 말미암아 어두운 것을 말하여 흑암이라 하기 때문이니,
이것이 곧 의심이다.
곧 이 흑암을 말하여 신(身)이라 하나니, 그 때문에 미래의 흑암신이라 한다.
[문] 현재의 흑암신이라 하였는데, 어떤 것이 현재(現在)이고, 어떤 것이 흑암(黑闇)이며, 어떤 것이 신(身)이기에 현재의 흑암신이라 하는가?
[답] 현재란, 이른바 모든 행(行)이 이미 일어났고 이미 함께 일어났으며, 이미 생겼고 이미 함께 생겼으며, 이미 옮아왔고 이미 나타나 옮아왔으며, 모여 쌓이고 출현하며, 머물러 있되 아직 과거로 사라지지 않았고, 아직 이미 다하여 없어지지 않았으며, 아직 이미 떠났거나 변하지 않아서 한데 어울려 눈앞에 있는 현재의 성품과 현재의 종류와 현재의 세상에 속한 것을 현재라 한다.
흑암이란,
이른바 현재의 행(行)에 대하여 갖가지로 구하고 이해하되 다른 지혜를 일으키며, 나아가 의심과 망설임의 화살이 있나니, 이것을 흑암이라 한다.
신(身)이란,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의심과 상응하는 무명을 신(身)이라 한다”라고 했다.
이 이치 가운데서는 곧 의심을 신이라 한다.
왜냐하면 검다는 것은 지혜가 없다는 것을 말하며, 검음으로 말미암아 어두운 것을 말하여 흑암이라 하기 때문이니,
이것이 곧 의심이다.
곧 이 흑암을 말하여 신(身)이라 하나니, 그 때문에 현재의 흑암신이라 한다.
[3포]
3포(怖)란,
첫째는 병포(病怖)요, 둘째는 노포(老怖)며, 셋째는 사포(死怖)이다.
[문] 병포(病怖)에서 어떤 것을 병(病)이라 하는가?
[답] 두통(頭痛) 등이니, 자세한 설명은 『법온족론(法醞足論)』에서와 같다. 이것을 병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을 포(怖)라 하는가?
[답] 어떤 한 무리가 다른 이가 병이 들어 아파하는 것을 본 뒤에 몹시 싫어하고 근심하며 생각하기를,
‘나의 몸에도 또한 이런 분한이 있고 또한 이런 성품이 있으며, 또한 이런 법이 있건만 아직 이 법을 초월하지 못하였다’라고 하는 것과 같나니,
이로 말미암아 놀라고 두려움[怖畏]을 내며 당황하면서 몸에 털이 곤두서게 된다.
이것을 포라 한다.
이 병(病)으로 말미암아 두려움[怖]을 일으키기 때문에 병포라 한다.
[문] 노포(老怖)에서 어떤 것을 노(老)라 하는가?
[답] 머리카락이 빠지는 등이니, 자세한 설명은 『법온족론』에서와 같다. 이것을 바로 노라 한다.
[문] 어떤 것을 포(怖)라 하는가?
[답] 마치 어떤 한 무리가 다른 이가 늙은 것을 본 뒤에 몹시 싫어하고 근심하면서 나아가 당황하면서 몸에 털이 곤두서게 된다.
이것을 포라 한다.
이 늙음[老]으로 말미암아 두려움[怖]을 일으키기 때문에 노포라 한다.
[문] 사포(死怖)에서는 어떤 것을 사(死)라 하는가?
[답] 저 여러 유정들은 또 다른 여러 유정들의 몸 덩어리[聚]가 변해서 파괴되며 없어지는 것을 보나니, 자세한 설명은 『법온족론』에서와 같다.
이것을 사라 한다.
[문] 어떤 것을 포(怖)라 하는가?
[답] 마치 어떤 한 무리가 다른 이가 죽는 것을 본 뒤에 몹시 싫어하고 근심하면서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나아가 당황하면서 몸에 털이 곤두서게 된다. 이것을 포라 한다.
죽음[死]으로 말미암아 두려움[怖]을 일으키기 때문에 사포라 한다.
마치 세존께서 설명하신 것과 같다.
모든 이생(異生)들은 비록
병들고 늙고 죽는 법을 싫어한다 하더라도
사실대로 이 소의(所依)의 몸을 싫어할 수 없다.
나는 이 몸을 싫어할 수 있고
깊이 이 법을 분명하게 아나니
그 때문에 오래 살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속히 무여의(無餘依)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온갖 종류를 자세히 살피건대
소년(少年)의 목숨보다 빠른 것이 없으며
병들고 늙고 죽어서 파괴되나니
오직 벗어남[出離]만이 안온할 뿐이다.
나는 이미 부지런히 정진해서
마지막[究竟]의 자취를 통달했나니
모든 욕심을 익히지 않는다 하더라도
버리고 범행(梵行)을 닦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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