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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형 전업농부·작가
소금물로 볍씨 가리기
볍씨 포대를 꺼낸다. 지난가을 여러 다랑이논 가운데 알곡이 가장 충실했던 논에서 수확한 볍씨다. 볍씨를 꺼내면 비로소 한 해가 시작되는 느낌이다. 달력의 새해가 시작된 지 이미 넉 달이나 지났지만 농부의 한 해는 볍씨가 출발점이다.
볍씨 한 가마가 이뤄낼 가을의 성과를 상상하는 일은 직장인일 때 가졌던 연봉의 기대감과 사뭇 다르다. 소득이 노동력 투여량에 비례하지 않고, 자연재해의 불확실성과 맹목의 정치에 영향받으며, 최선의 노력이 최선의 결과로 이어질지 미지수인 직업이 농부지만, 그럼에도 한 해 농사를 앞두고 볍씨를 매만지는 마음은 설렌다. 이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 장악하고 경쟁하고 앞서려는 강박 없이 오직 보살피고 아끼고 북돋는 과정이 농사니까. 그래서일까, 볍씨가 이룰 가을의 성과는 통장의 숫자가 아니라 쌀밥의 무게로 온다. 이 심리적 든든함을 남들이 이해할지 모르겠다.
볍씨 소금물 가리기.
볍씨를 소금물에 담가 종자를 가리는 일을 염수선(鹽水選)이라 한다. 소금물의 농도는 계란을 띄워 수면 위로 오백원 동전 크기만큼 떠오를 정도이니, 장 담글 때만큼이나 진하다. 소금물에 볍씨를 담가 휘저으면 까락과 쭉정이, 부실한 볍씨가 우르르 뜨는데, 이것들을 뜰채로 건져서 내버리고 가라앉은 볍씨만 종자로 쓴다. 염수선은 병든 볍씨를 가려내 소독 효과를 높이는 중요한 과정이다. 소금물에 종자를 너무 오래 담그면 발아율이 떨어지니 최대한 빨리 건져서 맑은 물로 여러 번 헹군다. 염수선을 하기 전에 농업기술센터에서 빌려주는 종자탈망선별기로 까락과 쭉정이를 일차 걸러주면 더 좋다.
뜨거운 온탕에 볍씨를 담그다
종자 소독은 필수다. 소독을 소홀히 하면 키다리병, 도열병, 벼잎선충 등 병해충 발생 위험이 높다. 종자 전염병인 키다리병은 특히 위험하다. 모판의 어린 묘가 정상보다 1.5배 이상 웃자라다 1~2주 내에 말라죽는 병인데 전염성이 매우 강하다. 감염된 모가 논에 들어가면 벼꽃이 피지 않고 말라죽는데, 반경 50m의 다른 벼들을 감염시켜 다음해 종자에서 키다리병을 발생시킨다.
우리가 하는 소독법은 온탕소독이다. (관행농에선 보통 소독약품을 사용한다.) 60~62℃의 뜨거운 물에 볍씨를 10분간 담갔다가 다시 찬물에 10분 이상 담그는 방법이다. 60℃는 맨손을 넣기 힘들 만큼 뜨거운 온도다. 그 뜨거운 물에서 볍씨가 삶아지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게 참 신기하다.
온수히터를 사용한 고무통 온탕소독.
볍씨 소독하는 날, 이른 아침부터 화덕에 불을 지펴 물을 끓인다. 대형 고무통에도 따로 물을 받아 온수히터를 담근다. 물 양이 많으니 60℃까지 온도를 높이는 데 두어 시간 걸린다. 볍씨는 그물망 자루에 7~8kg씩 나눠 담는다. 볍씨 한 가마가 자루 10개에 담긴다. 고무통의 물이 60℃로 뜨거워지면 볍씨 자루를 넣는다. 볍씨가 들어가면 물 온도가 뚝 떨어지므로 화덕의 뜨거운 물을 갖다 부으며 최대한 60℃를 맞춰준다. 담근 지 10분이 되면 건져서 재빨리 찬물에 담근다. 뜨끈한 볍씨 자루를 빠르게 식히기 위해 호스로 계속 수돗물을 공급한다. 온탕소독 시 물과 볍씨 비율은 10:1이다. 물 양에 맞춰 볍씨 자루를 조금씩 넣어야 하니, 이른 아침 시작한 온탕소독이 점심 무렵에야 끝난다.
농업기술센터의 온탕소독기.
여러 해 동안 이런 방식으로 온탕소독을 해왔는데, 지금은 농업기술센터의 온탕소독 서비스 덕에 종자 소독이 매우 간편해졌다. 볍씨 자루를 농업기술센터에 가져가면 적정온도가 상시 유지되는 대형 온탕소독기에 담글 수 있다. 기술센터의 온탕소독기는 가정용 고무통보다 몇 배 크다. 설정된 시간에 맞춰 기계가 볍씨 자루를 빼면 곧바로 찬물이 담긴 대형 통으로 이동해 식힌다. 집에서는 한나절이 걸리던 온탕소독이 30분 만에 끝난다. 종자 소독, 미생물 액비 공급, 농기계 대여 등 농사에 필요한 농업기술센터의 서비스가 참 고맙다.
옛날엔 볏줄기로 모를 묶었지
소독을 마친 볍씨는 발아시켜서 파종한다. 낮 동안 큰 대야 물에 푹 잠기도록 볍씨 포대를 담그고 밤에는 꺼내는 일을 일주일간 계속한다. 물은 매일 갈아준다. 습도 유지를 하면서도 볍씨가 썩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
벼의 발아에 필요한 적산온도(積算溫度)는 100℃이다. 적산온도란 작물의 생육에 필요한 열량 지표로, 생육일수와 일평균기온을 곱한 값이다. 예를 들어 일평균기온이 20℃라면 5일, 15℃라면 약 7일이 소요된다. 볍씨 발아기를 사용할 경우 32℃로 온도를 맞춘 물에 3일간 볍씨를 담근다. 볍씨 발아기는 온도 유지와 산소 공급을 동시에 하므로 밤마다 볍씨를 건져내지 않아도 볍씨가 썩지 않는다.
파종하기 좋을 만큼 발아한 볍씨.
볍씨가 발아하는 동안 상토를 준비한다. 상토는 아기 볍씨가 자랄 요람의 첫 흙이다. 옛날에는 마사토나 황토를 체에 내리느라 힘이 들었는데 지금은 가볍고 질 좋은 상토를 포대로 살 수 있다. 흙을 체로 치는 수고를 덜었을 뿐만 아니라 가벼운 상토 덕에 모판의 무게도 가벼워져 못자리하는 노고가 많이 줄어들었다.
파종은 컨베이어벨트로 돌아가는 파종기를 사용한다. 파종기는 총 4단계로 되어 있다. ① 모판 바닥에 상토를 깐다. ② 그 위에 물을 뿌린다. ③ 볍씨를 뿌린다. ④ 볍씨 위로 상토를 덮는다. 하지만 우리가 사용할 파종기는 ②~④까지만 있는 3단계 파종기라 ①번 ‘상토 깔기’는 수작업으로 해야 한다.
수작업으로 상토 깔기.
파종 전날, 비닐집 안에서 모판에 상토 깔기 작업을 한다. 깊이를 맞춘 도구로 상토를 반듯하게 밀어내어 모판 바닥에 상토를 채운다. 상토가 깔린 모판은 트럭에 차곡차곡 싣는다. 모판이 많은 만큼 시간이 꽤 걸린다.
“플라스틱 모판이 없던 옛날엔 모를 어떻게 옮겼지?” 상토를 깔다 보니 그 시절 못자리가 궁금하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옆사람이 말한다. “볏짚을 물에 적셔서 훑어내면 볏줄기만 남거든. 어른들이 그거 모아서 한 묶음씩 허리춤에 차고 못자리로 들어가. 못자리에서 모를 찌어(어린 모가 다치지 않게 조심스레 뽑는 일) 허리춤에서 한 가닥씩 뺀 볏줄기로 한 뭉치씩 묶어. 그걸 모내기할 논까지 바지게로 날랐어. 어른들이 줄 맞춰 모를 심을 때 애들은 어른들 사이로 모 뭉치를 옮겨놓는 일을 해. 모내기하는 날엔 학교 안 가거든.”
삶의 최대치를 소진하기를
파종은 심 이장댁 마당에서 다 같이 한다. 해마다 어린이날이 파종일이었는데 올해는 4월 말일로 조금 당겼다. 팔순의 할머니부터 열두 살 막내딸까지 심 이장네 온 식구가 다 모였다. 파종 작업엔 최소한 6명이 필요하다. 상토 깔린 모판을 갖다주는 사람, 모판을 기계에 넣는 사람, 볍씨 넣으며 파종 상태를 점검하는 사람, 상토 붓는 사람, 나오는 모판을 꺼내는 사람, 완성된 모판을 옮겨 쌓는 사람. 이 가운데 볍씨 넣는 위치가 가장 중요하다. 베테랑 농부 심 이장이 그 자리를 지킨다. 파종을 마친 모판은 차곡차곡 쌓은 후 비닐로 덮어 사나흘쯤 놓아둔다. 초기 볍씨 성장을 촉진하는 방법이다. 벼의 싹이 상토를 뚫고 올라오면 못자리로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