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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문보살십주제구단결경 제3권
9. 정의품(定意品)
이때에 최승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무엇을 항상 청정한[常淨] 보살이 제9지(地)에서 그 주(住)를 청정하게 한다 하나이까?”
[청정한 보살의 행]
그때에 세존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선정]
“9주 보살은 정의(定意)의 일심해문(一心解門)과 삼매정수를 닦아 익혀서 줄어들지 않고 청정하거나 청정하지 않은 데에 언제나 마음이 한결같으며,
비록 진로(塵勞)의 성냄과 원한[恚恨] 가운데에 처한다 하더라도 어지러운 생각이나 약간의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중생이 마음[心]ㆍ뜻[意]ㆍ의식[識]으로 집착하는 인연과 맺힌 고뇌로 얽매이게 되어서 그로 인한 보응으로 이런 과환[患]에 이르게 된다고 관하여 아느니라.
[방편의 권도]
또 방편과 권도로 속임[權詐]의 법을 구하되 어떠한 교묘한 방편으로 영원한 적멸[寂滅]에 이르러서 제도되고 해탈되어야 하나니,
이때에 제9의 보살 대사는 다시,
‘이 모든 생각과 집착은 모두가 바른 법의 생각을 수순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무명(無明)과 행(行)으로부터 이런 인연의 과보에 이르게 된다’라고 사유해야 하느니라.
[진로(塵勞)의 우환의 원인]
오직 한 마음[一心]만으로 그 도(道)에 대한 생각을 내되,
불(佛)ㆍ법(法)ㆍ중(衆)과 계율ㆍ보시ㆍ천념(天念)을 생각하고,
안반(安般)으로 몸을 가다듬고 죽어 없어진다는 생각에까지 미쳐야 할 뿐이며,
온갖 것을 수호하면서 번거롭고 어지럽지 않게 하고,
부지런히 정진을 행하는 것이 마치 화재(火災)를 구제하듯 하며,
체득한 공덕은 온갖 것에 충만하고.
속으로 품고 있는 뜻과 소원은 도과에만 두며,
모든 신통과 지혜를 행하되 두루 알지 않음이 없고,
언제나 온갖 것을 가엾이 여기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무엇으로 말미암아 중생은 진로(塵勞)의 우환이 있는 것인가?
진실로 그 근원을 찾아보면 모두가 무명으로 말미암아 행(行)의 과보에 이른다는 것을 관찰하느니라.
행의 과보가 생김으로써 곧 식신(識神)이 있고 식(識)에는 이미 굴(窟)이 있나니,
이를테면 명색(明色)이라 하며,
명색이 이미 생기면 6입(入)이 갖춰 이루어지고,
안과 밖이 서로 인(因)하여 곧 갱락(更樂)을 일으키며,
마음이 이미 염착하면 바뀌어 다시 통(痛)이 생겨,
괴로움과 즐거움을 환히 알면서 이에 애(愛)의 뜻이 생기고,
애의 뿌리가 이미 생기면 함께 서로 생(生)ㆍ노(老)ㆍ병(病)ㆍ사(死)와 수우(愁憂)ㆍ고뇌(苦惱)를 받아들여 점차로 욕애(欲愛)의 보응이 더욱 자라느니라.
제9 보살은 이런 보응을 관하고 깊이 생각하면, 진로(塵勞)의 속박이 텅 비면서 진실하지 않고 참으로 실제의 것이 없고 스스로 인연의 보응인 줄 관하게 되느니라.
다시 중생이 분별하는 과실(果實)을 알면 도무지 처소가 없어서 응(應)하되 응하는 바가 없고 갚되 갚는 바가 없으며,
다시 청정한 진관(眞觀)의 법으로써 그 중생으로 하여금 청정한 데에 이르게 하고 언제나 부지런히 힘쓸 것을 생각하여 정의(定意)를 부지런히 닦느니라.
[한 부처님 세계를 관하다]
먼저 권편(權便)으로써 한 부처님 세계를 관하느니라.
얼마의 중생이 견고한 서원을 세워 공덕을 짓고 위없음[無上]을 쌓고 닦아 도의 나무[道樹]를 장엄하고 있는가?
얼마의 중생들이 선(禪)으로 적정(寂定)에 들어가고 신족으로 변화하며 권도[權]로 나타냄이 견줄 데 없는가?
또 얼마의 중생들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남의 중한 임무를 맡아 대신 괴로움을 건져 주어 고뇌를 받지 않게 하는가?
얼마의 중생들이 세 가지 결사(結使)를 끊고 도의 자취를 갖추어 성취함이 있는가?
얼마의 중생들이 세 가지 때[垢]가 이미 얇아져 빈래의 도[頻來道]를 얻고 영원히 괴로움과 이별하고 있는가?
얼마의 중생들이 오하분(五下分)의 얽매이는 재난이 없고 다시 갔다왔다하면서 이 세계에 이르지 않는가?
얼마의 중생들이 상오결(上五結)을 끊고 모든 해탈에 노닐면서 스스로 재미 있게 즐기는 것인가?
[신통과 5안]
다시 신통과 5안(眼)으로써 깊숙이 숨고 법이 없어져서 다한 모든 곳에는 당연히 어떤 연각(緣覺)이 산 숲에 살고 있으면서 수시로 인간에 출현하여 교화한다고 관찰해야 하며,
보살은 또한 다시,
‘그곳은 친근할 수 있는 데인가? 친근할 수 없는 데인가?’를 생각하느니라.
어떻게 족성자(族姓子)는 한 뜻[一意]으로 한 부처님 경계의 중생들이 세운 것이 견고하여 공덕의 업을 짓고 위없음을 닦아 나아가 도의 나무를 장엄한 것을 자세히 보는가?
이때에 족성자인 9주 보살은 만일 중생에게 견고한 마음이 있는 것을 보면,
곧 권방편을 시설하여 선지식이 되어 주고 수시로 양육하여 정진을 더하게 하며,
뜻을 다하여 견고하면서 무너뜨릴 수 없음을 옹호하고 성취시키어 권유하여 나아가 열어 보이고 깊은 법을 알게 하며,
멀거나 가깝거나 험난한 가운데의 일은 염려하지 않느니라.
바로 앞에서 화재(火災)로 인하여 훨훨 타서 한 부처님 세계를 태워 일체를 녹게 할 적에 그 가운데를 지나 다른 지방의 세계에 이르니,
거기에 계신 부처님께서 도법(道法)을 알기 쉽게 연설하시는데,
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으며 늙어 죽는 법도 없다 함을 듣고,
곧 앞으로 나아가 몸을 없애면서 스스로 귀의하면,
안온하게 거기에 이르러 몸이 불에 타지도 않고 또한 뜨거운 고뇌도 없으며,
그 부처님을 뵈옵게 되어 예배하고 섬기고 공양올리면,
공덕과 특수한 법을 합쳐 쌓아 곧 성취하게 되고 또한 물러나는 일도 없느니라.
만일 큰 바다의 깊은 물로 한 부처님 세계의 위아래와 둘레가 똑같아 다름이 없게 될 적에, 그 가운데서 서원을 세우고 스스로 몸을 던져 능히 귀의하면,
또한 겁이 나거나 어렵지도 않고 세운 바의 공덕과 뜻한 서원이 견고하여 동요하거나 옮아가지 않나니,
이것은 바로 9주 보살이 큰 자비에 머물러 온갖 것을 버리지 않고 중생들을 섭취하기 때문이니라.
어떻게 9주 보살은 그 중생이 선적(禪寂)으로 정(定)에 들어가고 신족과 변화로 알맞게 하여 견줄 데 없다고 관하는가?
이때에 보살이 어떤 중생이 멀리 깊은 산 사람이 없는 곳에 살고 있으면서 뜻을 붙잡아 사유하되,
첫째의 4선(禪)이나 둘째의 4선이나 셋째의 4선이나 넷째의 4선에 들어간 것을 보게 되는데,
이때에 보살은 그 중생이 다시 넷째의 4선으로부터 일어나서 셋째의 4선이나 둘째의 4선이나 첫째의 4선에 들어간다고 보기도 하며,
이때에 보살은 다시 중생이 다만 1선에만 들어가고 이ㆍ삼ㆍ사에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보기도 하며,
혹은 2선에만 들어가고 일ㆍ삼ㆍ사에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보기도 하며,
혹은 3선에만 들어가고 일ㆍ이ㆍ사에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보기도 하며,
혹은 4선에만 들어가고 일ㆍ이ㆍ삼에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보기도 하느니라.
이때에 보살은 또한 중생이 공처(空處)와 식처(識處)와 불용처(不用處)에 들어갔다고 보기도 하고,
혹 때로는 보살은 중생이 다만 공처에만 들어가 있고 식처에 들어가 있거나 불용처에는 들어가 있지 않았다고 보기도 하며,
혹 때로는 유독 식처에만 들어가 있고 공처에 들어가 있거나 불용처에는 들어가 있지 않았다고 보기도 하고,
혹은 때로는 유독 불용처에만 들어가 있고 공처에 들어가 있거나 식처에는 들어가 있지 않았다고 보기도 하며,
혹 때로 넷째의 4선에만 있고 위아래 세 곳의 선(禪)에는 있지 않는 것을 보기도 하느니라.
9주 보살은 곧 가서 그에게 이르러 좋은 벗[善祐]이 되어 주어서 공덕을 이루게 하고 게으르지 않게 하나니,
중생으로 하여금 반드시 견고한 이가 되게 하여야 비로소 9주라고 일컫게 되느니라.
무엇을 말하여 9주 보살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남의 중한 임무를 맡아 언제나 대신 고통을 구제하면서 고뇌를 받게 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이때에 보살은 권방편으로 가서 5도(道)에 들어가고 때에 따라 의복ㆍ음식ㆍ평상ㆍ침구와 병[病瘦]을 치료하는 의약을 알맞게 하여 주며,
만일 3도(塗) 8난의 처소에 있으면 곧 몸소 가서 제도하고 나아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고통을 받지 않게 하며,
혹은 지옥이나 아귀 중에 들어가서 널리 베풀어 주어 저마다 배부를 수 있게 하기도 하나니,
이것이 바로 제9 보살이 중생을 위하여 무거운 짐을 짊어진다고 하는 것이니라.
어떻게 보살은 앞 사람에게 권하고 타일러서 세 가지 결사(結使)를 끊고 도의 자취를 이루게 하며, 점차로 과증(果證)을 얻어서 영원히 괴로움과 이별한다고 하는가?
이때에 보살은 권방편을 가지고 약간의 변화를 나타내며 그를 위하여 성문이나 연각의 가르침을 말하기도 하고, 열반의 즐거움과 고요하면서 함이 없음[寂然無爲]을 말하기도 하며,
혹 때로는 그를 위하여 보살 대사의 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는 허무(虛無)한 법을 말하기도 하느니라.
그 중생의 생각을 잘 안 뒤에는,
먼저 대승 방등(大乘方等)의 법요와,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일심(一心)ㆍ지혜와,
대자(大慈)ㆍ대비(大悲)와 4선(禪)ㆍ4등(等)과, 근(根)ㆍ역(力)ㆍ각의(覺意)ㆍ8현성도(賢聖道)와, 3범당(梵堂)을 논하게 되며,
그 사람은 그것을 들은 뒤에 마음과 뜻이 숙연하여지고 옷과 털이 모두 곤두서나니,
그 그릇에 따라 권하여 나아가게 하면 도증(道證)을 이루느니라.
혹은 때로 보살은 그 중생이 본래는 보살이 되려는 뜻을 내었다가 스스로 싫증을 내어 얻지 못할 것이라고 헤아려,
곧 물러나 성문의 도에 들려고 하는 것을 보면,
보살은 그때에 다시 그에게로 가서 말하느니라.
‘그대는 덕을 쌓은 이래로 이제 이미 이룩되어 빛나는 상(相)과 종호(種好)로 몸이 장엄되려 하므로 널리 중생을 운용하여 부처님 국토를 닦고 다스려야 하겠거늘, 어찌하여 물러나서 소승의 길[小道]로 나아가려 하는가?’
그 사람이 들은 뒤에 갑절 더 자책하고 뉘우치면서,
‘안타깝구나. 면목이 없는 일이며 참으로 부끄럽구나’라고 말하느니라.
이에 보살도를 환히 통한 이에게서 원망과 책망을 당하게 되고서는,
‘나는 이제 스스로 격려하여 반드시 용맹스럽게 공을 쌓고 뜻을 세워서 큰 서원을 지녀야 하며 온갖 것을 위하여 본래의 서원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라고 하느니라.
[악마]
뜻을 낸 보살이 이런 생각을 할 적에,
천지는 여섯 가지 변화로 진동하고 악마의 궁전은 흔들려 본래의 자리가 안전하지 못하나니,
이때에 못된 악마는 스스로,
‘아까 천지가 여섯 가지 변화로 진동하였는데 이것은 누구의 서응(瑞應)으로 이런 일을 나타내 보인 것일까?
아마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이 세간에 출현한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하느니라.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욕심 없는 사람이 아라한이 되었는지라, 그 서응이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겠구나.
설령 이런 이가 없었다 하여도,
이것은 뜻을 낸 보살이 견고한 서원을 세워 대승의 뜻을 일으켜 부처님이 되어 삼계에 홀로 거닐며, 위험과 액난[危厄]을 가엾이 여기고 시방을 제도하려 한 것이라면,
나의 경계는 텅 비게 되고 시위(侍衛)하는 이조차 없게 되겠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128격자죄왕(鬲子罪王)이 지옥에 가 나서 도리에 맞게 다스리고 교화하여 마음에 더하거나 덜함이 없는지라,
혹여 이것은 그의 신변(神變)의 감응이기도 하리라.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나에게 만 명의 아들이 있어 용맹하고 씩씩하며 재주가 보통이 아닌데,
나의 좌우에 있으면서 6천(天)을 통솔하고 다루거니와,
나의 맨 끝 막내 아들 악자(惡子)는 받은 성품이 흉포하고 행실에는 인자함이 없으므로 나는 사신으로 보내어 지옥 일을 맡게 하였더니,
선악을 가리고 현우(賢愚)를 분별하며 역시 신족이 있어 천지를 감동하게 하고,
이제 죄를 다스리는 법왕[治罪法王]이라 일컬으며,
높낮이가 없이 다스리니 아마 그 신령한 감응(感應)이 아닐까?’
악마는 다시,
‘나의 하인 아방(阿傍)이 있는데 역시 변화와 위덕을 한량없이 나타낼 수 있다.
그가 태어나던 날 천지가 크게 진동하였으므로 그가 목숨을 마칠 적에도 땅이 크게 진동할 터인데, 혹시 그가 서괴(瑞怪)를 나타낼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할 것이니라.
[수다원]
이와 같이 악마왕은 여러 가지 생각을 일으키고 곧 천안(天眼)으로써 삼천대천세계를 자세히 살펴보다가 때에,
곧 욕심 끊은 사람이 수다원의 도를 얻어야 되는데,
이제 다시 마하연(摩訶衍)의 마음을 낸 것을 보고는,
‘바로 이 사람이 나의 지경을 텅 비게 하려는구나.
방편을 써서 그의 착한 마음을 무너뜨려야겠다’고 하느니라.
못된 악마는 스스로 병사들을 거느리고 선남자의 처소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항상 청정한[常淨] 9주 보살임을 보고 마음이 저절로 두려워져 모든 털이 곤두서는지라,
곧 물러나며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느니라.
이것이 바로 항상 청정한 보살의 신령한 덕이요 감응이어서,
도의 자취가 고요하며 위없는 도를 이루게 하고,
서원을 세우고는 끝내 굴복하거나 물러나지 않는 것이니라.
[사다함]
무엇을 말하여 9주 보살은 중생의 무리에서 세 가지 결박(結縛)을 관하여 알아 사다함을 얻고,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 없으며 영원히 괴로움과는 이별한다고 하는가?
이에 보살은 그 중생이 오랜 옛적으로부터 쌓은 공덕으로 근성이 예리한 이[利根者]가 있다는 것을 관찰하느니라.
만일 그 중생의 마음과 뜻이 순수하게 성숙하여 도과를 거의 이루게 되고 뜻이 되돌릴 수 없음을 보면, 대도에 이르게 하느니라.
만일 무딘 근성을 보면 권하여 정진하게 하고 온갖 덕의 근본과 도과의 보(報)를 갖추면,
보살은 돕고 인도하여 마음이 게으르지 않게 하며,
곧 네 가지 도(道)의 깨달음[證]을 성취하게 하며,
혹은 어떤 이가 초월하여 제4과(果)를 취하고 멈추지 않고 아나함에 머무르게 하기도 하나니,
모두가 이것은 제9의 항상 청정한 덕으로 일찍이 크게 서원한 마음을 어기거나 버리지 않은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부지런히 정진을 닦음이니,
칭량할 수 없고 보응이나 12인연을 헤아리지도 않는 것이니라.
9주 보살은 항상 청정함을 닦고 익히어 청정에 이르며,
혹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유순법(柔順法)을 들으면 안으로 자기 자신을 반성하여 그 법에 상응하도록 생각하고,
오로지 한 마음으로 뜻은 배우고 묻는 데 두고,
언제나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에 있으면서 심란한 데 처하지 않으며,
그 방편의 적연(寂然)한 정의(定意)를 알고 사람의 근기[根]를 알아 끝내 허망하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사다함에 대하여 더욱 이익이 있게 하는 것이니라.
[아나함]
어떻게 보살은 중생을 부접(扶接)하여 다섯 가지 결사(結使)와 얽어 맴[纏縛]의 우환을 끊고 곧 그 천상에서 멸도하도록 권하며, 또한 왔다갔다하지 않고 이 세계에 도착한다고 말하는가?
이때에 보살은 그 천상에 가서 그를 위하여 생기는 것도 없고 아주 없어지는[斷滅] 것도 없는 법을 연설하며,
곧 그 앞에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 취한 멸도를 나타내면,
거기에 있는 아나함 하늘들은 저마다 마음을 내어 함께 서로 힘쓰고 무여열반계[無餘泥洹界]에서 반열반[槃泥洹]하느니라.
보살은 비록 자못 특이한 법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마음은 또한 변하거나 약간의 생각도 있지 않고,
스스로 오래 전 수없는 겁 동안의 일을 알며,
움직이게 되고 나아갈 바를 모두 다 분명히 아나니,
가는 것을 보지도 않고 또한 되돌아오는 것도 없고,
또한 다시 머물러 있는 것도 보지 않으며,
생기는 바도 없고 본래부터 처소가 없는 줄 관하면서,
스스로 청정하고 탄연(坦然)한 무위(無爲)에 이르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아나함에 대하여 더욱 이익이 있게 하는 것이니라.
[아라한]
어떻게 보살은 다시 중생을 관찰하되, 배우는 이를 길러서 집착 없는[無着] 데에 이르게 하는가?
이때에 9주 보살 대사는 천안(天眼)으로써 삼천대천세계에서 누가 번뇌가 다하여 도과를 거의 다 얻게 되는가를 관찰하느니라.
이렇게 관한 뒤에는 혹은 열 사람이 있고 백 사람이 있고 천 사람이 있으며 더 나아가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이 있어,
결사(結使)를 끊어 없애고 같은 때 같은 날에 상응하게 때가 없음[無垢]을 성취하여 아라한을 증득하는 것을 보느니라.
이때에 보살은 신족의 힘으로써 하루 동안에 두루 삼천대천세계에 권방편을 채움으로써 그 사람을 옹호하여 저마다 뜻에 알맞게 집착이 없으며,
영원히 생사를 여의고 고요한 무위(無爲)에 이르게 하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아라한에 대하여 더욱 이익이 있게 하는 것이니라.
[연각승]
어떻게 보살은 연각승(緣覺乘)에 권유하여 집착이 없음을 얻게 하는가?
이때에 보살은 다시 천안으로써 모든 세계의 높은 산이나 평지에 깊숙이 숨어 안 보이는 곳에서 고요히 혼자 머물러 잠을 자듯 43지(止)의 정의(定意)의 법으로 사유하는 것을 살펴보느니라.
이때에 보살은 그가 있는 곳으로 가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풀을 깔고 결가부좌(結跏趺坐)하여 뜻을 앞에 매어 두고,
또한 삿됨을 보지 않고 안으로는 스스로 사유하며 권방편으로 변화를 나타내되,
혹은 천둥과 번갯불이며 벼락치는 소리를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나무끼리 서로 함께 비벼 대어 그 안에서 불길을 내되 불빛보다 더 뛰어난 것을 나타내기도 하며,
혹은 날짐승ㆍ길짐승과 슬피 우는 난새[鸞] 소리를 내기도 하느니라.
그때에 보살은 그들 앞에 있으면서 홀연히 그 형상을 바꾸어 허공에 솟아 올라가 18가지 변화를 짓되 나고 죽는 것이 자유자재하며,
32상(相)과 80종호(種好)가 있고 몸에서는 물과 불을 내되 상처나 피해가 없느니라.
그 연각의 사람들은 곧 특수하고 기이한 변화를 보고 저마다,
‘우리들도 반드시 속히 부처님 도를 이루어야겠다.
또한 다시 온갖 상호로 몸을 장엄하도록 함께 부지런히 닦고 정진하되 게으름이 있지 않게 하여야겠다’라고 생각하느니라.
때에 그 사람들은 다시 다른 날에 그 산림에서 나와 마을로 가서 집집마다 구걸을 하면서 스스로 중생을 구제하느니라.
그때에 혹은 종이나 북이나 음악 소리를 듣기도 하고, 혹은 큰 소리로 슬피 우는 소리가 나타나나니,
마음속으로 몹시 슬퍼함이 마치 불에 타듯 하여 환하게 스스로 깨달으며 번뇌가 다하고 뜻이 풀리나니,
이 때문에 집착이 없는 연각[無着緣覺]이라 하느니라.
[9주 보살의 공덕]
이와 같이 9주 보살이 행하는 바는 지혜가 환히 통달하여서 끝이 없느니라.
연각은 비록 빛나는 상호의 공덕은 있더라도 본디 여래의 한 터럭만큼의 공덕보다 못하고,
다시 온몸의 뼈마디를 다 합쳐 그 낱낱의 털구멍으로 지은 바 공덕을 헤아려도 본디 여래의 눈썹 사이의 공덕보다 못하며,
다시 그의 모든 것을 취하여 헤아려도 여래의 정수리만큼의 공덕보다 못하느니라.
바로 삼천대천세계 안의 중생들이 모두 돈독하게 부처님을 믿고 법을 믿고 스님들을 믿되 가령 그 믿는 마음이 백천만 배(倍)가 되게 한다 하여도 본디 믿음을 지니면서 법을 받드는 사람에 미치지 못함이 백천만 배이며,
다시 믿음을 지니고 법을 받드는 사람들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차서 지혜와 견문[聞]과 보시로 지은 공덕을 합쳐 모은다 하여도 본디 도의 자취를 얻은 사람이 지은 덕의 근본보다는 못하며,
다시 도의 자취를 얻은 이로부터 낱낱이 다 헤아려서 이에 때 없는[無垢] 이에 이르기까지 그들 지혜보다 백천만 배라 하여도 한 연각의 지혜 공덕보다 못하느니라.
바로 삼천대천세계 안에 연각으로 가득 채워도 역시 뜻을 낸 한 보살의 지혜 공덕보다 못하며,
다시 삼천대천세계의 안에 뜻을 낸 보살의 지혜와 문혜(聞慧)로 백천만 배를 가득 채워도 다시 한 아유월치(阿惟越致)가 지은 공덕보다 못하며,
다시 대천(大千)세계 안에 아유월치 보살을 다 합쳐 모인 이들의 지혜를 백천만 배로 가득 채워도 다시 일생보처(一生補處) 보살이 지은 공덕보다 억백천 배나 못하고,
다시 삼천대천세계 안에 일생보처가 다 가득 찼다 하여도 다시 한 여래의 지혜 힘의 공덕보다는 못하느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9주 보살은 마음이 밝아 삼세(三世) 중생의 마음과 뜻을 통달하여 알므로 병에 따라 치료하여 제도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나는 스스로 기억하건대 9주로 있을 동안에 백성들을 제도 해탈시킨 것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9지에 이르기까지 그 동안에 제도하여 아라한이 된 이들도 1아승기나 되고,
마음의 때[心垢]를 제거하고 영원히 조그마한 흐림[噎]도 없는 수다원으로부터 아나함에 이르기까지도 다시 1아승기나 되며,
널리 4제를 수행하여 생각[想]을 익히고 멸(滅)을 알며 다시 중생에게 보살의 뜻을 내도록 권하여 뜻이 저마다 견고해져서 불퇴전에 선 이도 1아승기나 되느니라.
나중에 강신(降神)하여 도솔천에 올라가 나려 할 때는,
반드시 19가지 이루지 않아야 할[不成] 사(思)와 진욕(塵欲)의 우환을 제거하고,
변재가 용맹하면서 두려운 바가 없으며,
온갖 식신(識神)이 머무르는 곳을 덜어 버리고,
모든 번뇌의 거짓된 법을 다하여 무루의 마음으로써 해탈을 닦고,
지혜의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서 진세의 욕심[塵欲]을 베어 없애며,
신통의 깨달음을 얻어서 그 행을 받들어 좇아 생사가 이미 끊어졌고 범행(梵行)을 이미 세워 할 일을 다 마치고 다시는 유(有)를 받지 않고 그것을 사실대로 알며,
보살이 닦을 대애(大哀)의 법과 위의와 예절에도 또한 결루(缺漏)가 없으며,
견고한 공덕의 지혜 안에 머물렀느니라.
모든 악마나 외도로서는 보살의 행업(行業)을 궁구하여 알 수도 없고,
모든 욕루(欲漏)의 중생들을 위하여 번뇌가 없으며[無漏] 생멸이 없는 법[無生滅法]을 강(講)하기 위하여 모든 생각과 집착을 없앴으니, 제한이나 장애가 없었느니라.
[다함이 없는 지혜, 등정각]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때에 나는 생각하여 다함이 없는 지혜[無盡慧]에 들어가 과거 부처님께서 생을 받은 법을 관하였는데, 행한 바가 평등하였으며 또한 치우침이 없으셨나니,
범부의 법과 성현의 도와 학(學)과 무학(無學)과 연각과 보살과 모든 부처님들이 수행한 법이 모두 다 평등하였고,
세속과 도(道)와 수효가 있는[有數] 것과 수효가 없는[無數] 것과 유위와 무위와 유루와 무루가 이 모든 법에서는 다 평등하였으니,
때문에 일컬어 등정각이라 하느니라.
평등한 법이란 그와 나[彼我]가 평등하고, 이것은 똑같이 자연(自然)이며 일어나거나 소멸한 것을 보지 않아야 하느니라.
스스로 생각하여도 수행한 바는 새거나 벗어남[漏脫]이 많이 있으므로 마땅히 금제(禁制)하면서 평등한 법을 넓혀야 하느니라.
만일 마음이 착란하면 오로지 정묘하게 할 수 없으므로 마땅히 뜻을 제어하여 내닫게 하지 않아야 하며,
산란과 안정[亂定]은 모두 있는 바가 없고 두루 평등하여 똑같은 자연인 줄 통달하여 아느니라.
만일 또 품고 있는 생각이 참괴(慙愧)가 없을 때에는 마땅히 방편을 일으켜 두려움이 생기게 하여야 하며,
만일 또 어떤 때에 몸과 입과 뜻이 악(惡)하여 착하지 못한 법을 행하면 다시 생각하되 멸하여 다하게 하고 더욱 증장함이 없게 하여야 하느니라.
만일 또 마음에 질투나 어리석음이나 뚫려 새는 법[穿漏法]이 생각나면 다시 교묘한 방편을 구하여 영영 남은 것이 없게 하고,
만일 또 살생ㆍ투도ㆍ음행ㆍ망언ㆍ음주의 생각이 일어나면 다시 재앙과 패퇴의 근원을 생각하여야 하느니라.
만일 또 호존(豪尊)을 탐착하고자 하는 생각이 나서 공경하는 뜻이 없고,
어떤 사람이 청하고 구하여도 경법(經法)을 숨기고 아끼거나,
금계를 가벼이 무너뜨리면서 율법에 수순하지 않거나,
선정에 들도록 가르쳐 주는 데도 정(定)의 법을 따르지 않거나,
끝내 불ㆍ법ㆍ승을 생각하지 않고 마음으로 높은 체 뽐내고 법사(法師)에게 교만하거나,
가령 이런 일이 있게 되면,
모두가 성도(聖道)에 방해가 되므로 친근하거나 닦아 익히지 말아야 하느니라.
[10 교만한 뜻]
만일 또 생각에 모든 교만한 뜻[慢意]으로서,
첫째 자대(自大)와, 둘째 심만(甚慢)과,
셋째 만만(慢慢)과, 넷째 아만(我慢)과,
다섯째 사만(邪慢)과, 여섯째 등만(等慢)과,
일곱째 무아등만(無我等慢)이 일어나면,
마땅히 지혜롭게 뜻을 붙잡아 영원히 나지 않게 하며,
아무것도 없어 모두 생기는 바도 없고 평등하여 둘이 없으며,
또한 약간의 것도 없고 이 모두는 자연(自然)이어서 처소가 없는 줄 아나니,
이것이 보살의 평등한 정각[平等正覺]이니라.
[10 어지러운 생각]
만일 마음에 생각이 생기되 어지러운 생각[亂想],
즉 첫째 사견(邪見)과, 둘째 사념(邪念)과,
셋째 사어(邪語)와, 넷째 사업(邪業)과,
다섯째 사치(邪治)와, 여섯째 사방편(邪方便)과,
일곱째 사의(邪意)와, 여덟째 사정(邪定)을 일으키면,
언제나 마음을 쉬면서 손감되지 않게 하여야 하느니라.
만일 또 어떤 때에 마음이 멋대로 일어나되,
‘나는 언제나 공경하는데도 업신여기고 지금 현재도 다시 업신여기는지라 혹 장래에도 속임수를 쓸 것이다’라고 하거나,
’나는 항시 시새우는데도 그대는 이제 공경하고 있고 지금 나의 앞에서도 공경하고 있으니, 장래에도 역시 공경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며,
다시 거듭 ‘옛날부터 일찍이 나를 속였고 지금 현재 나의 앞에서도 다시 속임수를 쓰거늘 어찌 장래에는 속이지 않을 것을 알겠는가?’라고 생각하느니라.
가령 마음이 이와 같이 되고 이런 생각이 있게 되면 곧 성도(聖道)의 뿌리를 심는 것을 망가뜨리고 뒤바뀐 데에 떨어져서 더욱 그늘[陰蓋]이 생기며,
사견(邪見)이나 은애(恩愛)의 찌꺼기에 의지하면 곧 스스로 망하고 상실하여 영원히 인도(人道)를 여의게 되느니라.
[10악]
만일 또 어떤 때에 마음으로 10악(惡)의 착하지 못한 행과 방일(放逸)한 길을 생각하되,
첫째 살생과, 둘째 도둑질[盜竊]과, 셋째 음행[淫泆]과,
넷째 망언(妄言)과, 다섯째 양설[離別彼此]과, 여섯째 악구(惡口)와, 일곱째 꾸미는 말[綺語]과,
여덟째 성내고 원망함[恚恨]과, 아홉째 질투(嫉妬)와,
열째 사견(邪見)이니라.
이 몸과 입과 뜻의 법이 갖추 생기면, 모두 멀리 여의고 그런 인연을 짓지 않으며, 이런 법을 제거하여 장애가 없게 하여야 하느니라.
[선과 악]
다시 악은 무엇으로 인하여 소멸하고 선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가를 사유하되,
선과 악은 모두 다 있는 바가 없고 텅 비어서 진실이 아니며 이 모두는 평등하여 둘이 없는 줄 통달하여 알아야 하느니라.
보살이 비록 9주의 처소를 얻었다 하더라도 언제나 이것은 모두 더럽고 흐린 것이다.
‘내가 지금 위없는 도를 이루고 보살의 기별(記莂)을 받는 까닭도 모두가 어리석어 10악(惡)을 지은 바로 말미암았으니,
5분법신(分法身)을 구족하게 얻어 곧 하나의 도[一道]에 이르는 것이요 또한 약간의 것도 없다’라고 생각하고,
낱낱이 공ㆍ무상ㆍ무원을 분별해야 하느니라.
[4의지]
다시 부지런히 행하여 4의지(意止)를 닦는 것이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네 가지는 곧 신(身)ㆍ통(痛)ㆍ의(意)ㆍ법(法)이니라.
공관(空觀)을 분명히 통달하여 뜻[意]이 4선(禪)ㆍ4등(等)ㆍ4공정(空定)ㆍ8유무(維無)ㆍ9차제선(次第禪)에 노닐며,
다시 방편을 구하여 생기는 바를 여의고 생기는 바가 없는 데로 들어가야 비로소 평등한 현성(賢聖)의 도라 하느니라.
모두가 다 다함이 있고 다함이 없는 것이니, 다함이 있거나 다함이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생김이 없는 것에 상응하느니라.
모든 진로(塵勞)를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만일 다시 일으키지 않으면 이른바 다함이 없는 것이요,
욕애(欲愛)와 박결(縛結)을 보살은 다하였느니, 만일 생기지 않으면 이른바 다함이 없는 것이니라.
성냄[瞋恚]과 간탐(慳貪)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만일 이것이 없으면 이른바 다함이 없는 것이요,
헷갈림의 도를 보살은 다하였느니, 만일 헷갈림이 없으면 이른바 다함이 없는 것이요,
해탈문이 있는 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 해탈이 없으면 이른바 다함이 없는 것이니라.
의지의 끊는 법[意止斷法]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의단(意斷)이 없으면 이른바 다함이 없는 것이요,
근(根)ㆍ역(力)ㆍ각(覺)ㆍ도(道)를 보살은 다하였느니, 만일 이것이 없으면 이른바 다함이 없는 것이요,
사문의 4과(果)를 보살은 다하였느니, 4과가 없으면 이른바 다함이 없는 것이요,
연각의 도[緣覺道]가 있는 이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 연각이 없는 줄 알면 이른바 다함이 없는 것이요,
보살도가 있는 이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 만일 이것이 없으면 이른바 다함이 없는 것이니라.
평등한 정각을 보살은 다 마쳤으니, 평등한 정각이 없으면 이른바 다함이 없는 것이요,
부처님 도를 이루기에 이르는 이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 이룸이 있는 것을 보지 않으면 이른바 다함이 없는 것이요,
모든 불수(佛樹)에 가는 이것을 보살은 다 마쳤으니, 머물러 있음이 없으면 이른바 다함이 없는 것이니라.
이를테면 상호를 닦고 부처님 국토를 청정하게 하는 이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인민을 교화하고 법요를 드날리는 이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공ㆍ무상ㆍ무원의 법을 행하는 이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희망한 바가 있어 오로지 덕의 근본[德本]만을 행하는 이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모든 공덕을 지어 대도(大道)를 널리 유포하는 이것을 보살은 다 마쳤느니라.
보살이 처한 데는 높고 낮음도 없고 또한 다시 안팎과 중간을 보지도 않는 이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범부가 닦는 바의 행을 보지도 않고 또한 다시 현성(賢聖)의 행도 보지 않는 이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비록 생사에 있다 하더라도 오염되는 법에서 염착을 보지 않는 이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보살이 멸(滅)을 말하고 멸을 관하면 생기는 것이 없고 또한 멸에서 영원히 멸도를 취하지 않는 이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진제(眞際)를 환히 통달하고 또한 수순하지도 않는 이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모든 악마의 경계를 멀리 여의려고 하지 않는 이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지혜의 업[慧業]을 넓힘으로써 하열하다고 여기지 않는 이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언제나 행(行)을 익히되 때를 아는 행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모든 연기(緣起)에 대하여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 이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진제(眞諦)로써 하지 않으면서 진제가 있지 않은 것도 아닌 이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선탈문(禪脫門)에서 정(定)과 산란[亂]을 보지 않는 이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비록 인간 세상에 있어도 한가히 사는 것과 다르지 않는 이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시끄러운 데 있을 적에 세속을 따라서 들어가 위의를 가다듬지 않는 이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선적(禪寂)에 있으면서 몸과 뜻이 멸하지 않는 이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보시를 보지 않되 보시가 있지 않은 것도 아니며,
지계ㆍ인욕ㆍ정진ㆍ일심(一心)ㆍ지혜에서도 행(行)이 있는 것을 보지 않되 행이 있지 않은 것도 아닌 이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스스로 3명(明)을 깨달아 눈[眼]이 생기고 지혜[智]가 일어나며, 모든 신통에 노닐되 진로(塵勞)가 생기는 것과 멸하는 것을 보지 않고, 언제나 애욕에 처하나 또한 싫어하거나 게으르지 않는 이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수다원에 있어 도의 자취를 닦되 또한 다시 대도(大道)의 행이 멸하지 않는 이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불법이 없어지는 것을 보아도 진실로 두려워함이 있지 않고 다시 겁수의 길고 짧음도 보지 않는 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구체(句體)ㆍ자체(字體)ㆍ미체(味體)와 이것은 곧 수(數)가 있고 이것은 곧 수가 없다고 보지 않는 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근(根)으로는 진리의 행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법인(法忍)을 일으키지 않고 생김이 없는 지혜에 이르는 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욕계(欲界)와 사상(思想)이 없는 9중생거(衆生居)를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인간의 군현(郡縣)ㆍ국읍(國邑)과 천궁ㆍ용궁의 모든 신묘한 궁전에 노닐고 있으면서 그가 닦는 바의 위의와 예절에서 친근할 만한 것과 친근할 만하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을 보살은 다하였느니라.
최승아, 이것이 바로 9주 보살의 다함이 있고 다함이 없는 법문이니,
보살은 행한 바가 다함이 있고 다함이 없는 해탈의 법요를 두루 갖추지 않음이 없느니라.
중생이 고(苦)를 익히면 보살도 역시 익히며, 곧 그를 위하여 괴로움의 진리[苦眞諦]의 성품을 말하느니라.
만일 눈으로 빛깔을 볼 적에 괴로움이 있고 즐거움이 있어도 안식(眼識)은 모두가 다 텅 비고 고요하다고 사유하느니라.
평등으로써 닦아 근심과 해로움[患害]을 소멸시키느니라.
보살은 바른 법으로 언제나 중생을 교화하되 고요하고 함이 없으면[無爲],
이것이 바로 보살이 고통받는 중생을 위하여 고의 지혜[苦慧]를 연설하는 것이니라.
태어나는 괴로움[生苦]ㆍ늙는 괴로움[老苦]ㆍ병든 괴로움[病苦]ㆍ죽는 괴로움[死苦]과 근심하고 슬퍼하고 번거로운 괴로움[憂悲惱苦]ㆍ원수끼리 만나는 괴로움[怨憎會苦]ㆍ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괴로움[恩愛離苦]과 바라는 바를 얻지 못하는 괴로움[所欲不得苦]이니, 요점을 들어 말하면 5음이 치성하여 일어나는 괴로움[五陰盛苦]이니라.
이런 괴로움이 역시 일어나거나 없어지는 것이 없다고 통달하여 알면,
이것이 바로 보살의 다함이 있고 없는 법문이니라.
[습(習)의 중생]
만일 다시 보살이 습(習)의 중생을 보면 곧 그를 위하여 애착하는 근본을 연설하되,
애착하는 마음이 깊고 굳어 깊이 집착하여 제도하기 어려우면,
‘나는 먼저 서원이 있었으므로 반드시 없애어 다할 것이니,
만일 없애지 못하면 끝내 증득을 취하지 않겠다’라고 하느니라.
이때에 보살은 차츰차츰 얼굴을 쳐다보는 법의 관[瞻顔法觀]으로 들어가, 그 중생 앞에서 그 용모를 나타내면 보는 이들은 탄식하고 순종하여 받들지 않음이 없느니라.
잠깐 동안에 몸이 누추하게 변하면, 보는 이들은 마음이 변하여 덧없다는 생각을 일으키어 이 몸은 진실이 아니고 견고함이 없다.
‘우리들의 얼굴 모습은 세간 사람보다 뛰어나지만 이러한 것도 오래지 않아서 망가질 것이므로 마땅히 스스로 수행하여 연모나 애착을 버리고 은애(恩愛)에 처하지 않아야겠다’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이 보살은 습(習)의 중생을 위하여 더욱 이익이 있게 하느니라.
[진(盡)의 중생]
만일 다시 보살은 진(盡)의 중생을 보면 권방편으로써 그를 위하여 설법하느니라.
‘태어나는 이는 없어지는 데로 돌아가고 성공한 이는 또한 패망할 것이며,
아무리 수명이 억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겁[恒沙劫]을 산다 하여도 이 모두는 다한 데로 돌아가 오래 존재할 수가 없다.
모든 족성자(族姓者)들아, 덧없어서 변천하는 법이라 마치 요술과 같고 허깨비와 같으며, 또한 진실이 없는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하느니라.
보살은 진실이 없는 줄 분명히 알아야 비로소 청정한 데에 상응하고 또한 더러움에 물듦이 없으며, 습(習)이 쌓이고 모임을 말미암아 드디어 이것을 버리지 않아도 다하여 멸하는 법[盡滅法]으로써 아무것도 없다고 관찰하며,
또한 다시 일어나거나 없어지는 곳이 있다고 보지도 않느니라.
만일 마음에 교만이나 어리석음이나 항상하다거나 항상하지 않다는 것이 생기게 되면,
다시 공혜(空慧)와 무상(無相)ㆍ무원(無願)으로써 그것을 분별하느니라.
[일곱 가지 곳의 수관]
혹은 때로 보살은 그들을 위하여 마지막에 이른 하나의 도[一道]를 말하여 모든 족성자들에게 가르쳐 주되 마땅히 일곱 가지 곳의 수관[七處受觀]을 사유해야 하느니라.
만일 5음이 있어 이루어지고 흩어짐을 분별하면,
중생은 이로 말미암아 음험하고 못된 근심[陰弊患]에 이르러 낱낱이 색(色)으로 일으킨 바 앞에 있는 색의 모양[色相]에서,
‘나는 식(識)을 낸다’라고 생각하고 집착하며,
이 식으로 인하여 통(痛)이 생기나니,
같이 서로 받아들이고 뜻을 일으켜 생각을 냄으로써 차츰차츰 행(行)의 업을 이루는 것이니라.
바로 하나의 색을 말미암아 드디어 다섯 가지 법을 이루나니,
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만일 또 보살은 앞의 중생이 18가지 음쇠(陰衰)의 독(毒)을 일으켜 사람의 마음을 번거롭고 딱딱하게 하여 장애가 있게 하여 저 언덕[彼岸]에 이르지 못한 것을 보면 점차로 선근으로써 온화하게 수순하여 도와주며 반드시 권방편을 베풀어 마침내는 성취하게 하여 타락하지 않게 하며,
만일 또 보살은 이 중생이 마음에 언제나 애욕이 다하는 생각 안에 놀고 있으나 여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또한 여의는 바가 없는 것을 보나니,
이것을 바로 일곱 가지 관법(觀法)을 두루 갖춘다고 하느니라.
관행(觀行)하는 법에 대하여 망령되이 버리지도 않고 그 더디고 빠른 것을 자세히 살펴 그 차고 더운 것을 분별하며,
자기 자신이 두루 갖추어 다시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행하게 하여 이룩할 수 있게 하느니라.
[지관(止觀)의 법]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9주 보살은 지관(止觀)의 법을 행하면,
두려워함이 없고 제석ㆍ범왕ㆍ사천왕ㆍ용ㆍ사문ㆍ범지와 악마ㆍ악마의 아들이 지관의 행을 안 보이게 하거나 막지 못하며 정각(正覺)의 법에 머물되 어렵게 하지 못하나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보살은 온갖 법이 모두 다 평등하다는 것을 환히 통달하여 알기 때문이니라.
범부의 법과 성현의 도에도 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역시 치우침이 없고, 학(學)과 무학(無學)의 법과 성문ㆍ연각ㆍ보살과 부처님의 법에서도 역시 모두가 평등하느니라.
만일 또 어떤 때에 유루의 법과 무루의 법을 보거나 세속과 세속을 뛰어나는 법을 분별하거나 누(累)나 집착을 모두 없애야 비로소 보살의 도를 이루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공(空)으로써 관하기 때문에 본디 자연(自然)이라 하니,
오는 것이 왕성하여도 자연이요 멸하는 것이 왕성하여도 자연이며,
빈 것[空]과 진실은 평등하고,
모양이 없는 것[無相]과 모양은 평등하며,
소원이 없는 것[無願]과 소원도 평등하니,
삼계 가운데서는 똑같은 자연이니라.
또 생기는 바가 없는 것도 생기는 바와 평등하고,
행(行)이 없는 법의 관(觀)도 법을 관하는 것과 평등하며,
의지하는 것과 의지함이 없는 것과,
평등한 것과 평등함이 없는 것과,
일으키는 것과 일으키는 바가 없는 것,
이 모두 자연이니,
존재한[有] 것이 아닌 자연도 삼계에서는 똑같아서, 욕계ㆍ색계ㆍ무색계를 보지 못하느니라.
보살은 다시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길과 명(明)과 지혜[慧]도 모두가 다 자연이며,
애욕과 속박과 해탈과 이에 도(道)를 이루고 열반의 경계에 들어가는 것도 모두 다 둘이 없고 평등하여 자연인 줄 분명히 아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대자애(大慈哀)를 행하면서 중생을 위하는 것임을 생각하느니라.
여러 가지 인연을 베풀어서 중생들이 그 근원에 따라 건립하여 저마다 그들을 위하여 알맞게 분별하고 연설해 주어서 널리 온화하고 순종하여 대승에 머무르게 하며 모조리 고뇌의 근본을 소멸하게 하느니라.
그때에 보살은 대중 안에 있으면서 홀로 두려워하는 바가 없고 뛰어나서 벗할 이도 없고 짝할 이도 없으며 온갖 덕의 근본으로 자신의 몸을 영락(瓔珞)이 되게 하느니라.
보살이 만일 대중 가운데 있을 때는 높은 부처님 도를 널리 펴면서 성문이나 아직 상지(上智)에 도달하지 못한 이를 가엾이 여기고,
비록 번뇌를 다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머무르는 곳을 떠나지 않고 오직 스스로 속박과 광대함이 없는 마음만을 이해하느니라.
다시 연각의 크게 이롭게 함이 없는 뜻을 생각하고 성스러운 지혜와 변재로 청정하여 하자가 없고,
또한 사람의 근원과 나아가는 바를 능히 알고 오직 자신은 청정하지 못한 국토를 지키고 머물러 있을 뿐이니라.
그러므로 보살은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뛰어나며 다 잘 분별하여 높은 부처님 도에 이르러 시방(十方)이 감동하여 구제되는 바가 끝이 없으며,
마음은 항시 도에 미치지 못한 이를 가엾이 여기고 용맹스런 힘으로써 외도를 항복시키니,
언제나 법륜을 굴려 끊어지지 않게 하여 특수하게 미묘한 큰 법[大法]이 세간에 유전하게 하느니라.
[권현(權現)으로 알맞게 교화하다]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9주 보살은 권현(權現)으로 알맞게 교화하되 들어가지 않는 바가 없으며,
열반과 열반과 같은 모양을 이해하고 아나니,
이를테면 진실한 이치[眞諦]가 있는 것과 진실한 이치가 있지 않는 것이니라.
공혜(空慧)는 주인이 없고 또한 머무르는 곳도 없나니, 때문에 무위(無爲)요 자연스러운 쾌락이며,
또한 거기에 있지도 않고 또한 여기에 있지도 않으면서 도무지 처소가 없으며 형상도 없고 대(對)할 수도 없으며 볼 수도 없느니라.
머무르되[住] 머무르는 바가 없나니, 이것이 바로 머무르는 것이어서 법계의 머무름[法界住]이라 하고 이것이 바로 다한 것이며,
생기는 바가 없다[無所生]고 하며 이것이 바로 열반이니, 고요히 사라지고[寂滅] 함이 없는[無爲] 것이며,
오직 34가지 미세한 지말의 결(結)이 존재할 뿐이요 그 밖의 모든 진로(塵勞)는 걸리는 바가 없느니라.
[정각(正覺)에 이를 때에는]
9주 보살이 정각(正覺)에 이를 때에는,
현재에도 네 가지를 멸하고 미래에도 네 가지를 멸하며, 과거에도 네 가지를 멸하고,
불수(佛樹) 아래에 앉아 악마를 항복한 뒤에는,
인(忍)을 가지고 뜻을 고르며 형상 없는 정[無形定]에 들어가고 삼천대천세계에서 모두,
‘나는 이 5탁(濁)의 세간에서 부처가 되어 구할 것을 다 구하였고 다시는 의심이나 어려운 것이 없게 되었다.
나는 이제 마땅히 스스로 권방편을 가지고 중생들을 위하여 도의 뜻을 널리 펴고 모든 번뇌의 결[漏結]을 다하겠다’라고 관하나니,
마치 나의 오늘날과 같아서, 다름이 없느니라.
이때에 시방에 계신 모든 여래ㆍ무소착(無所着)ㆍ등정각(等正覺)께서는 각기 그 지방에서,
‘오늘 아무 방향 아무 국토에 부처님이 출현하셔서 32가지 대인(大人)의 상(相)과 80종호(種好)로 그 몸을 장엄하였으며, 광명은 깊숙하고 어둔 데까지 비추고 음성은 애처로이 우는 난새와 같으시니 장하도다, 부처님의 종자가 끊어짐이 없구나’라고 먼 곳에서 찬탄하시느니라.
시방의 부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때에, 삼천대천세계는 여섯 가지로 진동하여 변하며,
모든 천ㆍ용ㆍ신ㆍ건답화ㆍ아수륜ㆍ가류라ㆍ진타라ㆍ마휴륵과 사람과 사람 아닌 이와 악마와 악마의 하늘은 각기 깜짝 놀라 본래 있던 처소가 편안하지 못한지라,
모두가 함께 구름처럼 모여 부처님의 처소에 이르러 머리 조아려 예배드리며 공경하고 스스로 귀명(歸命)하고는,
여래ㆍ성최정각(成最正覺)을 모셔 호위하고 모두 다 청정함을 느끼며,
원한이 없어지고 모두가 존중하고 감로의 성(城)에 이르며,
온갖 선[衆善]이 두루 갖추어져서 도법(道法)에 흠이 없고 마음에 용맹을 일으켜 모든 해탈에 노닐며,
중생을 관찰하여 그에 알맞는 생각으로 때에 따라 나타나 저마다 그의 처소를 얻느니라.
진로(塵勞)를 멸하고 영원히 고요한 무위를 위하며 중생으로 하여금 나[吾我]가 제거되게 하며,
피차(彼此)를 버리되 약간의 생각도 없고,
법에 의지하는 것도 보지 않으며, 법이 아닌[非法] 것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의지함이 있지 않은 것도 아니고, 의지함이 없지 않은 것도 아니며,
평등하여 모든 법이 황홀해서 마치 허공과 같고 메아리와 같으며 또한 허깨비와도 같아서 진실이 없는 줄 통달하여 아나니,
그는 곧 생사의 언덕을 건너게 되어 다시는 오가거나 생사에 돌아다니지도 않느니라.
이것이 바로 9주 보살이 공조(功祚)가 흥왕하고 도업(道業) 또한 끝이 없는 것이며,
닦은 바가 진실로 바르고 의심을 품지 않으며,
모든 무루에서도 흠이 없고 모든 흠이 있는 것은 받아 취하는 것을 보지 않으며,
영원히 욕계ㆍ색계ㆍ무색계를 건너고 모두 다 생기는 바가 없는 지혜로 돌아가며,
다시 널리 연설하고 유포하여 두루 듣고 알게 하느니라.
[9주 보살이 수행한 업(業)의 위신]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9주 보살이 수행한 업(業)은 위신(威神)이 높이 뛰어나서 세간을 초월하나니,
만일 대중 안에 들어가면 위의를 지니고 예절을 잃지 않고 거동과 보는 것이 정법(正法)을 수순하며, 입는 옷도 또한 곱게 꾸미지 않느니라.
만일 나라의 주군(州郡)이나 현읍(縣邑)에 들어가고자 하면,
법의(法衣)를 입고 응기(應器)를 가지고서 뜻은 언제나 점잖고 조용하며,
걷고 그치고 오가면서 돌아다니는 것과 앉고 눕고 일어나고 서는 데에,
마음은 한결같이 자상하며 하는 말은 부드러워 거칠지 않고 널리 펴는 바는 마치 허공과 같아서, 생각이나 집착이 없으며,
마지막까지 고행하되 보답의 인연을 짓지 않고 그가 시설한 바는 오직 부처님의 도[佛道]에만 있을 뿐이니라.
이것이 바로 최승아, 9주 보살을 1주(住)라 하고 9주가 아니라 하는 것이다.
8ㆍ7ㆍ6ㆍ5 나아가 초지(初地)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 주(住)가 아니라고 하느니라.
보살은 제10지의 법까지 나아가 닦아야 지성의 자리[誠地]요, 진리의 자리[諦地]요, 두려움이 없는 자리[無恐懼地]이며,
또한 다시 여래의 자리[如來地]요, 도의 자리[道地]요, 정의 자리[定地]요, 두려울 바가 없는 자리[無所畏地]요, 관하는 자리[觀地]요, 지혜의 자리[慧地]요, 자연 성품의 자리[自然性地]라고 하나니,
보살이 이 열 가지 법에 이르면 곧 보살이라는 이름은 없어지고 당연히 명호가 여래ㆍ지진(至眞)ㆍ등정각(等正覺)ㆍ명행성위(明行成爲)ㆍ선서(善逝)ㆍ세간해(世間解)ㆍ무상사(無上士)ㆍ도법어(道法御)ㆍ천인사(天人師)요 불(佛)중우(衆祐)라 해야 하고 또한 견줄 이도 없느니라.
18가지 특수한 법을 완전히 갖추고 연설하는 것은 곧 변재여서 때에 맞지 않음이 없으며,
온갖 행[衆行]이 원만하게 갖춰져서 도솔천에 가 나되 청정하고 흠이 없으며,
혹은 강신(降神)을 나타내기도 하여 중생을 접하면서 제도하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제9지에서 그 행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