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보장경 제1권
9. 녹녀부인(鹿女夫人)의 인연
부처님께서는 왕사성의 기사굴산(耆闍崛山)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두 가지 법이 있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인간과 천상에 빨리 나서 열반의 즐거움에 이르게 한다.
또 두 가지 법이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세 가지 나쁜 곳에 빨리 떨어져 큰 고뇌를 받게 하느니라.
어떤 두 가지 법이 사람으로 하여금 인간과 천상에 빨리 가서 열반의 즐거움에 이르게 하는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첫째는 부모를 공양하는 것이요,
둘째는 성현을 공양하는 것이다.
어떤 두 가지 법이 사람으로 하여금 세 가지 나쁜 곳에 빨리 떨어져큰 고뇌를 받게 하는가?”
첫째는 부모에게 온갖 선하지 않은 행을 행하는 것이요,
둘째는 성현에게 선하지 않은 행을 행하는 것이다.”
비구들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선악을 빨리 이루는 그 일은 어떠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한량없이 먼 과거 세상에 바라내라는 나라가 있었고, 그 나라에 선산(仙山)이라는 산이 있었다.
어떤 범지(梵志)는 그 산에 살면서 언제나 돌 위에 대소변을 보았다. 뒤에 그의 정기(精氣)가 소변 본 곳에 떨어져 암사슴이 와서 그것을 핥아 먹고 곧 아이를 배었다.
달이 차자 그 사슴은 선인이 사는 곳에 와서 한 계집애를 낳았는데, 얼굴이 단정하고 뛰어나게 묘하였으나 다리만이 사슴 다리를 닮았다. 범지는 그것을 가져다 길렀다.
범지 법에는 항상 불을 받들어 섬겨 그 불을 끊어지지 않게 하는데, 어느날 그 딸 아이는 불을 묻었다가 부주의하여 불이 꺼지게 하였다. 그녀는 범지의 성냄을 두려워하였다.
거기서 1구루사(拘屢奢)[진(秦)나라에서는 5리(里)를 뜻한다]쯤 떨어진 곳에 다른 범지가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 딸 아이는 범지에게 빨리 가서 불을 빌고자 하였는데, 범지가 그 발자국을 보니 발자국마다 연꽃이 있었다.
범지는 그녀에게 말하였다.
‘우리 집을 일곱 번 돌면 너에게 불을 주리라. 또 나갈 때에도 일곱 번 돌아라. 그리고 본래 발자국을 밟지 말고 다른 길로 돌아가라.’
딸 아이는 그 말대로 하고는 불을 얻어 가지고 돌아갔다.
그때 범예국왕(梵豫國王)은 사냥을 나왔다가, 그 범지의 집 주위에 일곱 겹으로 두른 연꽃을 보았다.
그리고 두 길에 두 줄 연꽃이 있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이상히 여겨 범지에게 물었다.
‘못물이 전연 없는데 어떻게 이런 묘하고 좋은 연꽃이 피는가?’
범지가 대답하였다.
‘저 선인이 사는 곳에서 어떤 딸 아이가 불을 빌러 내게 왔었는데 그 애 발자국마다 연꽃이 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만일 불을 얻고자 하거든 우리 집을 일곱 번 돌고 갈 때에도또 일곱 번 돌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연꽃이 둘러 있습니다.’
왕은 곧 꽃 발자국을 따라 범지의 처소에 이르러 그 여자를 청하였는데, 그녀의 단정한 모습에 반하여 범지에게 그 딸을 달라고 청하였다.
범지가 곧 왕에게 딸을 주니, 왕은 그녀를 세워 둘째 부인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여자는 어릴 때부터 선인이 길렀기 때문에 그 받은 성질이 단정하고 곧아 부녀들의 애교에 대한 일은 알지 못하였다.
그 뒤에 그녀가 아이를 배자 관상장이는 점을 치고는,
‘장차 아들 천 명을 낳으리라’고 하였다.
큰 부인은 그 말을 듣고 시기하고 질투하여 차츰 계교를 부렸다. 그리하여 은혜를 두터이 하여, 그 녹녀(鹿女) 부인의 좌우 시종을 불러 달래고 재물과 보배를 넉넉히 주었다.
그때 녹녀는 달이 차서 천 송이 연꽃을 낳았다.
그런데 아이를 낳으려 할 때에 큰 부인은 어떤 물건으로 그의 눈을 흐리게 하여 보지 못하게 하고, 다 썩은 말 허파를 임부 밑에 바쳐 두고, 천 송이 연꽃은 함 안에 담아 강물에 띄워 버렸다.
그리고는 눈을 풀어 주면서 말하였다.
‘네가 낳은 아기를 보아라. 한 덩이 썩은 말 허파뿐이구나.’
왕은 사람을 보내어 물었다.
‘무엇을 낳았는가?’
‘다 썩은 말 허파를 낳았습니다.’
그때 큰 부인은 왕에게 말하였다.
‘왕은 미혹하시기를 좋아하십니까? 축생이 낳고 선인이 기른 그 여자는 이 상서롭지 못한 썩은 물건을 낳았습니다.’
왕의 큰 부인은 둘째 부인의 지위를 물리치고 다시는 눈 앞에 보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오기연왕(烏耆延王)은 여러 시종과 부인과 미녀들을 거느리고 강 하류에서 놀다가, 누런 구름 일산이 강 상류에서 물을 따라 흘러 내려오는 것을 보고,‘
저 구름 일산 밑에는 반드시 신비한 물건이 있으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을 보내어 누런 구름 밑으로 가서 살피다가 함이 하나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건져 와서 열어 보았다.
거기는 천 송이 연꽃이 있는데,꽃 한 송이마다 아이 하나씩이 있었다.
그것을 데려다 길렀는데, 그들은 차츰 자라나 모두 큰 역사의 힘이 있었다.
오기연왕은 해마다 늘 범예왕에게 공물을 바쳐 왔다.
그래서 여러 가지 공물을 모아 싣고 사자를 보내어 떠나려 할 때, 여러 아들들이 물었다.
‘무엇하려 하십니까?’
왕이 대답하였다.
‘저 범예왕에게 공물을 바치려고 하는 것이다.’
아들들이 모두 말하였다.
‘우리 한 아들로도 천하를 항복 받아, 모두 와서 공물을 바치게 할 수 있거늘, 하물며 우리 천 명 아들이 있으면서 어찌 남에게 공물을 바치겠습니까?’
그들은 군사를 거느리고 여러 나라를 차례로 항복 받으면서 범예왕의 나라로 갔다.
왕은 그 군사가 온다는 말을 듣고 온 나라에 영을 내렸다.
‘누가 저 도적을 물리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물리칠 사람이 없었다.
둘째 부인이 그 부름을 받고 와서 말하였다.
‘제가 물리칠 수 있습니다.’
왕은 물었다.
‘어떻게 물리칠 수 있는가?’
부인은 대답하였다.
‘다만 나를 위해 백 발[丈] 되는 대(臺)를 만들어 주소서. 내가 그 위에 앉으면 틀림없이 물리칠 수 있습니다.’
대를 다 만들자 둘째 부인은 그 위에 앉았다.
그때 천 명 아들은 활을 들어 쏘려 하였으나 손이 저절로 들리지 않았다.
부인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삼가 부모를 향해 손을 들지 말라. 나는 너희들의 어머니다.’
그들은 물었다.
‘무슨 징험으로 우리 어머니인 줄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대답하였다.
‘내가 만일 젖통을 눌러 한 젖통에서 5백 줄기씩 젖이 나와 너희들 입에 각각 들어가면 그것이 어머니인 표요, 만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어머니가 아니다.’
그는 곧 두 손으로 젖통을 눌렀다. 한 젖통에서 5백 줄기 젖이 나와 천 명 아들 입에 들어가고, 다른 군사들은 아무도 얻어 먹지 못하였다.
천 명 아들은 항복하고 부모를 향하여 참회하였다.
이에 여러 아들들은 서로 화합하고 두 나라는 원한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권하고 이끌어, 5백 아들은 친 부모에게 주고 5백 아들은 양부모에게 주었다.
그때 두 나라 왕은 염부제를 나누어 가지고, 각기 5백 아들을 길렀느니라.”
부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알고 싶은가? 그 때의 천 명 아들은 바로 저 현겁(賢劫)의 1천 부처요, 질투하는 부인으로 눈을 흐리게 한 이는 바로 저 교린(交鱗)의 눈 먼 용이며, 그 아버지는 바로 백정왕(白淨王)이요, 어머니는 바로 저 마야부인이었느니라.”
비구들이 아뢰었다.
“그 여자는 어떤 인연으로 사슴 뱃속에서 나와 발 밑에 연꽃이 났으며, 또 어떤 인연으로 왕의 부인이 되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여자는 지난 세상에 빈천한 집에 태어났는데, 모녀 둘이서 밭에서 김을 매다가 어떤 벽지불이 발우를 들고 걸식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그 딸에게 말하였다.
‘나는 집에 있는 내 밥을 가져다 저 쾌사(快士)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
그 딸도 말하였다.
‘저도 제 몫을 가져다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는 곧 집으로 돌아가 두 사람 몫을 가지고 와서 그 벽지불에게 주기로 하고 떠났다.
그 동안에 딸은 그를 위해 풀을 베어 풀자리를 펴고 꽃을 따서 위에 흩어 깔고는 벽지불이 앉기를 청하였다.
딸은 그 어머니가 더디 오는 것을 이상히 여겨 높은 곳에 올라가 멀리서 오는 어머니를 바라보고 말하였다.
‘사슴이 달리듯 왜 빨리 오지 않습니까?’
어머니가 이르자 그 더딘 것을 미워해 원망하면서 말하였다.
‘내가 어머니 곁에서 난 것은 사슴 곁에서 난 것보다 못합니다.’
그 어머니는 두 몫으로 나눈 음식을 벽지불에게 주고 나머지는 모녀가 같이 먹었다.
벽지불은 다 먹고 나서 바리를 허공에 던지고 그것을 따라 허공에 올라 열여덟 가지 신변을 나타내었다.
그때 그 어머니는 매우 기뻐하면서 서원을 세웠다.
‘나로 하여금 장래에 거룩한 아들을 낳되 지금 저 성인과 같게 하소서.’
이런 인연으로 그 뒤에 5백 아들을 낳아 모두 벽지불이 되었는데, 한 쪽은 양모가 되고 한 쪽은 생모가 된 것이다.
또 그 어머니를 사슴 달림에 비유하여 말한 인연으로 사슴 뱃속에서 나서 다리는 사슴 다리 같았으며,
꽃을 따서 벽지불에게 흩었기 때문에 그 발자국에서 천 송이 꽃이 났고,
또 풀을 깔았기 때문에 항상 왕의 부인이 된 것이다.
그 어머니의 후신은 범예왕이 되었고, 딸의 후신은 연화 부인이 되었다.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그 뒤 현겁의 1천 성인을 낳았고, 그 서원의 힘으로 항상 성현을 낳았느니라.”
비구들은 이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