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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사론 제3권
7) 오개처(五蓋處)
오개(五蓋:밝은 마음을 덮고 있는 다섯 가지 덮개)라 하는 것은,
욕애(欲愛)와 노여움[瞋恚]과 수면(睡眠)과 흔들리고 후회함[調悔]과 의심[疑]을 말한다.
[문] 오개에 어떤 성질이 있는가?
[답] 욕애는 욕계(欲界)의 다섯 가시 육식신(六識身)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노여움도 욕계의 다섯 가지 육식신에서 일어난다.
잠자고 흔들림[睡調], 두 가지는 모두 삼계(三界)의 다섯 가지의 불선(不善)과 무기(無記)와 모든 오염된[染汚] 마음을 그 가운데서 얻을 수 있다.
이 가운데 불선은 오개 속에 세워질 수 있으나 무기(無記)는 오개 가운데 세워지지 않는다.
잠자는 일[眠]은 욕계의 다섯 가지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에서 일어나며,
그 가운데 불선은 개(蓋) 가운데 세워지나 선과 무기는 개 가운데 세워지지 않는다.
후회[悔]는 욕계에서 깊은 생각으로 끊는 선과 불선이며,
이 가운데 불선은 개(蓋) 가운데에 세워지지만 선은 개 가운데 세워지지 않는다.
의심[疑]은 삼계의 네 가지 불선ㆍ무기에서 일어나며,
이 가운데 불선은 개 가운데 세워지나 무기는 개 가운데 세워지지 않는다.
이 서른 가지가 오개(五蓋)의 성질인 것이다.
[문] 거기에는 어떤 모습[相]이 있는가?
[답] 그 성질이 곧 모습이다. 또한 모습이 곧 성질이다.
모든 법 가운데서는 그 성질을 떠나서 모습을 말할 수는 없다.
존자 바수밀(婆須蜜)은 설명하기를,
“그 가운데서 욕을 얻고자 하면 문득 욕과 애가 일어나고,
이 애가 중생들의 마음과 서로 어긋나게 하기 때문에 노여움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마음이 가라앉는[沒] 까닭에 졸음[睡]이 일어나며,
졸음으로 마음이 가라앉아 움직이지 아니하면 곧 쉬지 아니하고 잠들게 된다.”라고 하였다.
모습[相]이라 하는 것은 조심(調心:흔들리는 마음) 가운데서 생기는 한(恨)이며, 한에는 갖가지 한(恨)이 있어 그것이 짓는 악(惡) 때문에 후회가 생긴다.
마음 가운데 아직 행(行)이 이루어지지 아니하였고 생각이 정해지지 아니한 까닭에 문득 의심이 생긴다.
이미 말한 한(恨)의 모습을 설명하자면 마땅히 행을 설명하여야 하나니, 왜냐하면 개(蓋)를 설명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문] 개(蓋)에 어떤 뜻[義]이 있는가?
[답] 장애[障]라는 뜻과 허물어진다[壞]는 뜻과 깨진다[破]는 뜻과 타락한다[墮]는 뜻이 곧 개(蓋)의 뜻이며, 눕는다[臥]는 뜻이 개라는 말의 뜻이다.
가로막는 것[障]이 곧 개라 함은 이것이 성인의 도에 장애가 되고 또한 성인의 도의 방편과 선근(善根)에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저 계경(契經)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세상의 나무에 있어서 큰 나무는 열매는 작을지라도 나무가 크면 다른 작은 나무들을 덮는다고 말한다.
다른 나무를 덮게 되면 허물어지고 깨지고 떨어져 내리고 눕게 되니, 이것은 어째서일까?
첫째 천사나(千闍羅) 나무와 둘째 가빈사라(伽賓闍羅) 나무와 셋째 이설다(伊說多) 나무와 넷째 폐발라(閉鉢鑼) 나무와 다섯째 필루우(必樓又) 나무와 여섯째 우담발라(優曇跋羅) 나무와 일곱째 니구류(尼拘類) 나무와 여덟째 나리가라(那梨伽羅) 나무, 이 나무들은 열매는 작으나 큰 나무라서 다른 작은 나무를 덮는다.
그런데 다른 나무들을 덮게 되면 작은 나무들은 허물어지고 파손되고 떨어져 내리고 눕게 된다.
가령 큰 나무가 작은 나무를 덮게 되면 꽃도 생기지 아니하고 꽃이 전환하여 점차 열매를 맺지도 못한다.
이와 같이 욕계에서 중생들도 마음의 나무가 덮어씌우면 깨달음과 생각이라는 꽃도 생기지 아니하고 또한 점차 사문(沙門)의 과보(果報:沙門 四果를 말함)도 이루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장애하고 허물어지고 파손되고 떨어져 내리고 눕는다는 뜻이 개의 뜻이 된다.
[문] 만약 이 오개가 성인의 도와 성인의 도를 얻는 방편인 선근(善根)에 장애가 되는 것이라면 모든 결(結)도 역시 성인의 도와 성인의 도에 이르는 방편ㆍ선근에 장애가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오개만을 세우고 다른 것은 세우지 않는가?
[답] 이에 관해서는 세존의 그 외의 말씀ㆍ간략한 말씀ㆍ수행케 하고자 하신 말씀들이 있다.
세존께서는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때에 따라서는,
“법에 있어서 부처님ㆍ세존만이 진리이며, 나머지 다른 진리는 어느 것도 이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없다.”라고 하셨고,
“그는 법상을 모두 알고 행을 모두 안다.”라고 하셨으니,
즉 오개의 모습이 있으면 오개 가운데 세워짐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삼계(三界)에서 욕을 제거할 때 극히 장애가 되나,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라고 하셨고,
다시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정수(正受)에 장애가 되며 과보에 장애가 된다.”라고 하셨다.
여기서 정수에 장애가 된다고 하는 것은 아홉 단계의 정수에 장애가 된다는 것이며,
과보에 장애가 된다고 하는 것은 아홉 가지의 번뇌를 끊는 지혜의 과보에 장애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 말씀하셨다.
“욕애란 욕을 떠난 가운데 있으면서 거기에서 멀리 벗어나는 것을 말하며,
진에(瞋恚) 즉 노여움이란 악을 떠난 가운데 있으면서 멀리 벗어난 것을 말하며,
수면(睡眠)이라 하는 것은 관(觀) 중에서 멀리 벗어나는 것을 말하며,
조회(調悔:掉悔)는 지(止)에서 멀리 벗어나는 것을 말하며,
그것이 멀리 벗어나게 되면 욕과 악을 벗어나거나 지관(止觀)을 잃어버리게 되니, 곧 마음 가운데 의심이 생겨 ‘악법(惡法)의 보(報)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라고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또 말씀하시기를,
“욕애와 노여움은 계율을 지키는 몸을 허물고, 수면(睡眠)은 지혜의 몸을 허물며, 조회(調悔)는 선정(禪定)의 몸을 허문다.
그것이 이 세 가지 몸을 허물게 되면 마음속에 문득 의심이 생겨,
‘악법의 보(報)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라고 의심하게 된다.”
다시 말씀하시기를,
“욕애와 노여움이 계율을 허물게 되고, 수면(睡眠)은 관(觀)을 허물게 되고, 조회(調悔)는 지(止)를 허물게 된다.
그것이 이 세 가지 법을 허물게 되면 마음속에 문득 의심이 생겨,
‘악법의 보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하고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욕계의 중생들은 행하는 것마다, 그 가운데는 거의가 만(慢)에서 일으키는 행과 편견(偏見)에서 일으키는 행이다.”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지옥 안에서는 어떻게 만을 행하겠는가?
“나는 극도로 불에 타고 있으나 너는 모른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모든 축생들에게 어떠한 견해[見]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존자(尊者)ㆍ구사(瞿沙)도 역시 그렇게 말하였나니,
즉 “이 욕계의 중생들은 행동마다의 허물을 보지 못하므로 그들에게 허물을 보게 하고자 오개(五蓋)를 말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것이 인(因)을 지을 때 장애가 되면 과를 받을 때도 역시 장애가 된다.”라고 하였다.
인할 때 장애가 된다고 하는 것은,
만약 오개가 현재 앞에 나타나 있다면 그 때는 선의 유루(有漏)의 마음도 앞에 나타날 수 없는데 하물며 무루(無漏)가 나타날 수 있겠는가?
과보를 받을 때 장애가 된다고 하는 것은,
만약 악취(惡趣:三惡道) 안에 태어나 악한 보를 받을 때 그 때를 맞으면 일체의 모든 공덕에 장애가 생기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부처님은 계경(契經)에서 오개를 세우고 다른 것은 세우지 않으신 것이다.
[문] 오개라 이름 지은 종류에 몇 가지가 있는가?
[답] 오개라 이름한 종류에는 일곱 가지가 있다.
욕애ㆍ노여움ㆍ의심의 세 가지는 이름도 역시 셋이며 종류도 역시 세 가지다.
수면(睡眠)은 명칭은 하나이며 종류는 두 가지이다.
조회(調悔)는 명칭은 하나지만 종류는 두 가지이다.
이와 같이 오개에는 명칭은 다섯 가지가 있으나 종류는 일곱 가지가 있다.
이름도 같고 종류도 같은 것은 이와 같이 이름의 수와 종류의 수가 있고,
이름도 다르고 종류도 다른 것은 이름이 구별되면 종류도 구별되는 것도 있어 이름을 깨달으면 종류도 깨닫게 되나니, 이와 같이 추리하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문] 만약 개(蓋)의 종류에 일곱 가지가 있다면 어찌하여 오개라고 이름을 세웠는가?
[답] 세 가지의 일 때문이다.
하나는 그것이 먹고 사는 식(食)이며,
또 하나는 그것을 다스리는 치(治)이며,
이 두 가지가 동등한 임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식(食)이고, 또 하나는 치(治)라 한다면, 욕애는 무엇을 식으로 삼아야 하는가?
즉 청정한 생각[淨想]이 그것이다.
무엇을 치(治)로 하는가?
부정한 생각[不淨想]이 그것이다.
그것이 일식(一食)ㆍ일치(一治)와 같기 때문에 욕애를 하나의 개로 내세운 것이다.
또한 노여움은 무엇을 식으로 삼아야 하는가?
서로 어긋나는 생각이 그것이다.
무엇을 치로 하는가?
즉 자애로움[慈]이 그것이다.
그것인 일식ㆍ일치와 같은 까닭에 노여움을 하나의 개로 내세운 것이다.
또한 수면(睡眠)은 무엇을 식으로 삼는가?
근심ㆍ걱정 그리고 즐겁지 아니하면 음식을 먹고 싶지 않나니 마음이 가라앉은[沒]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치(治)로 하는가?
관(觀)이다.
그것이 하나의 식ㆍ하나의 치와 같은 까닭에 두 가지를 함께 하나의 개로 내세운 것이다.
또한 조회(調悔:掉悔)는 무엇을 식으로 삼는가?
친척이 있는 마을 생각ㆍ나라 생각ㆍ온갖 생각과 본래 장난치고 웃던 생각ㆍ과거의 기억ㆍ지금의 기억ㆍ미래에 대한 생각 등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치로 하는가?
지(止)가 그것이다.
그것이 일식ㆍ일치와 같은 까닭에 두 가지 모두를 함께 하나의 개로 세운 것이다.
의심은 무엇을 식으로 삼는가?
앞에 있던 인(因) 때문에 주저하게 되고 뒤에 올 인 때문에 머뭇거리며 그 중간의 인 때문에 머뭇거린다. 마음 안에도 또한 머뭇거리는 것이 있다.
무엇을 이 머뭇거림이라 하며, 어찌하여 이렇게 머뭇거리게 되는가?
중생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무슨 인으로 존재하며 어찌하여 존재하는 것인가?
이것이 의심의 식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치로 하는가?
연기(緣起)의 법을 관(觀)하는 것이다.
그것이 일식(一食)ㆍ일치(一治)와 같은 까닭에 의심을 하나의 개로 세운 것이며, 그런 까닭에 일식ㆍ일치를 말하게 되는 것이다.
무거운 짐[重擔]이라 한 것은 동등하게 욕애ㆍ노여움ㆍ의심 등의 개가 있으나,
개별적으로 개의 무거운 짐은 동등하게 수면과 조회(調悔)의 두 가지가 함께 개를 이루어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이 능히 홀로 재목을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을 짊어지지만,
홀로 짊어질 수 없는 사람은 두 사람이 함께 재목을 짊어지게 되는 것과 같다. 짊어진다는 것은 예를 들면 저 지붕에 서까래를 펼 때, 강한 나무는 한 개만 깔지만 약한 나무는 두 개를 까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욕애ㆍ노여움ㆍ의심은 다 같이 홀로 성립되는 개이며,
무거운 짐이 되는 것들은 수면과 조회의 두 가지 개로 함께 무거운 짐에 해당한다.
이 세 가지 일 때문에 오개란 이름을 세운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욕애(欲愛)의 개를 앞에 말씀하시고 뒤에 이르러서야 의심의 개를 말씀하셨는가?
[답] 다른 사람의 말에 따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에 따라 그 내용[味]에 응하였고, 차례로 순서를 지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이 순서에 따라 설법하신 까닭에 다른 사람도 또한 순서에 따라 받아들였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이와 같이 순서에 따라 설법하셨고, 받아들인 법문도 이와 같이 순서에 따라 이루어졌다.”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본말(本末:시작과 끝)의 순서라는 것은 욕애가 먼저 생긴다.
때문에 부처님은 욕애를 먼저 말씀하셨고, 마지막에 의심하기에 이르기 때문에 부처님은 의심을 마지막에 설법하셨다.”라고 하였다.
존자 바수밀(婆須蜜)은 말하기를,
“사랑이란 즐거움의 경계이기 때문에 처음 욕애가 일어나고,
만약 즐거움의 경계를 잃게 되면 노여움이 생기며,
이미 사랑하고 즐거움의 경계를 잃게 되면 근심과 슬픔이 생기니,
이것이 졸음[睡]이 되고 이미 졸음에 집착하게 되면 곧 잠자게[眠] 된다.
잠에서 개고 나면 문득 흔들리는 마음[調]이 생기고,
마음이 흔들리게 되면 곧 후회가 일어난다.
후회의 뒤를 따라 다음에는 의심이 생겨서,
‘선(善)한 법에 과보가 있는 것일까, 과보가 없는 것일까?’라고 의심하게 된다.
이것은 근본과 끝이 순서를 따르기 때문에 부처님이 계경에서 먼저 욕애의 개를 말씀하시고, 마침내 마지막에 의심의 개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계경에서 오개를 설법하신 열 가지 내용이다.”라고 하였다.
[문] 무엇 때문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오개를 열 가지로 설명하셨는가?
[답] 세 가지 일 때문이니, 안과 밖이 있기 때문이고, 종류 때문이며, 또 선(善)과 불선(不善)의 구별이 있기 때문이다.
안과 밖의 구별이라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부처님은 계경에서 설법하시기를 내부의 욕애(欲愛)가 있고 외부의 욕애가 있다고 하셨다.
내부의 욕애 경우, 그것은 곧 개(蓋)이며, 이는 지혜가 아니고 등각(等覺)이 아니어서 점차 열반을 이루지 못한다.
또한 외부의 욕애 경우도, 역시 개이며 지혜도 아니요, 등각도 아니어서 점차 열반을 이루지 못한다.
또 내부의 노여움이 있고 외부의 노여운 생각이 있다.
내부의 노여운 생각일 경우, 그것이 곧 개이며 지혜도 아니요, 등각도 아니어서 점차 열반을 이루지 못한다.
또 내부의 노여운 생각일 경우, 이것도 곧 개이며 지혜도 아니요, 등각도 아니어서 점차 열반을 이루지 못한다.
다음 종류[種]라 하는 것에는 졸음[睡]이 있고 잠드는 것[眠]이 있다.
졸음의 경우, 그것이 곧 개이며 지혜도 아니요, 등각도 아니어서 점차 열반을 이루지 못한다.
잠드는 경우도, 그것이 곧 개이며 지혜도 아니요, 등각도 아니어서 점차 열반을 이루지 못한다.
또한 흔들림[掉:調]이 있고 후회함이 있다.
흔들림의 경우, 이것이 곧 개이며 지혜도 아니요, 등각도 아니어서 점차 열반을 이루지 못한다.
또 후회[悔]의 경우, 이것이 곧 개이며 지혜도 아니요, 등각도 아니어서 점차 열반을 이루지 못한다.
또한 선(善), 불선(不善)이 있다고 하는 것에는, 선한 법을 의심하는 경우가 있고 또 불선의 법을 의심하는 경우가 있다.
선한 법을 의심하는 경우, 이것이 곧 개이며 지혜도 아니요, 등각도 아니어서 점차 열반을 이루지 못한다.
또한 불선법을 의심하는 경우도 이것이 곧 개이며 지혜도 아니요, 등각도 아니고 점차 열반을 이루지 못한다.
이 세 가지 안팎과 종류와 선ㆍ불선의 법의 구별 때문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오개를 열 가지로 구별하여 설법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칠사(七使) 가운데 무명사(無明使)는 개(蓋) 가운데는 세우지 않고,
만사(慢使:오만심에서 일어나는 번뇌)도 개 가운데는 세우지 않으며,
견사(見使:편견에서 일어나는 번뇌)도 개 가운데는 세우지 않는다.
또 색계ㆍ무색계(無色界)의 결(結)도 개 가운데는 세우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문] 무슨 까닭에 무명(無明)을 개 가운데 세우지 않는가?
[답] 다 같이 동등하게 무거운 짐이 되는 까닭에 오개를 세우시만, 무명은 지극히 무거운 짐이다.
[문] 만사(慢使)는 무슨 까닭에 개 가운데 세우지 않는가?
[답] 개라 하는 것은 마음을 덮고 있는 것이고,
자만심[慢]이라 하는 것은 마음이 받아들여 일으킨, 자신이 유능하고 높은 경지라 생각하는 일이다.
[문] 견사(見使)는 왜 개 가운데 세우지 않는가?
[답] 개라 하는 것은 지혜를 소멸하는 것이며,
견이라 하는 것은 그 성격이 지혜에 속하며 지혜로 지혜를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문] 이 논 가운데는 다슨 다른 논이 나온다.
왜냐하면, 개는 지혜만 멸하고 다른 것은 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답] 묘한 말이며 묘한 내용이 있나니, 모든 품계(品階)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묘한가 하면 그것은 지혜이다.
개(蓋)는 이 지혜도 소멸시킬 수 있는 데 하물며 다른 것을 멸하지 못하겠는가?
마치 하나가 천 가지 일을 감당하고도 더 뛰어난 것과 같나니, 무릇 작은 것에 무슨 생각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개는 지혜마저도 멸하는데 하물며 다른 것을 멸하지 못하겠는가?
[문] 색계와 무색계의 결(結:번뇌)은 무슨 까닭에 개 가운데는 세우지 않는가?
[답] 개라 하는 것은 삼계에서 욕을 제거할 때 장애가 될 수 있는 것이지,
색계와 무색계의 결(結)이 아니며, 삼계의 결을 제거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개라 하는 것은 정수(正受)에 장애가 되고 과(果)에 장애가 되는 것이지,
색계와 무색계의 결(結)과 정수와 과에 장애가 되는 것은 개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개라 하는 것은 아홉 가지 번뇌를 끊는 지혜와 도과(道果)에 장애가 되는 것이지,
색계와 무색계의 결(結)이 아홉 가지 번뇌를 끊는 지혜와 도과에 장애가 되는 것을 개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개라고 하는 것은 아홉 단계의 정수에 장애가 되는 것이지,
색계와 무색계의 결에 의한 아홉 단계의 정수에 장애는 아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개라고 하는 것은 사사문과(四沙門果)에 장애가 되는 것이지,
색계와 무색계의 결로 인만 사사문과(四沙門果)의 장애는 아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개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 삼매[三三昧:空ㆍ無相ㆍ無願]의 장애가 되는 것이지,
색계와 무색계의 결에 의한 세 가지 삼매의 장애는 아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개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 경지[三地]에 장애가 되는 것이지,
색계와 무색계의 결에 의한 세 가지 경지의 장애는 아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개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 근[三根]의 장애이지,
색계와 무색계의 견에 의한 세 가지 근[三根]의 장애는 아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개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 도[三道:見道ㆍ修道ㆍ無學道]에 장애가 되는 것이지,
색계와 무색계의 결에 의한 삼도의 장애는 아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개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 지혜[三慧]의 장애이지,
색계와 무색계의 결에 의한 세 가지 지혜의 장애는 아니다.”라고 하였다.
[세 가지 지혜란] 듣는 지혜[聞慧]ㆍ생각하는 지혜[思慧]ㆍ깊이 생각하여 추리하는 지혜[思惟慧]를 말한다.
이와 같이 설명하고 이와 같이 생각하고 이와 같이 요점을 추려 보면 곧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세 가지 정수의 장애이지,
색계와 무색계의 결에 의한 세 가지 정수의 장애는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이와 같이 세 가지 계율[三戒]ㆍ세 가지 사유[三思惟]ㆍ세 가지 법신[三法身]과 결부시켜도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개라고 하는 것은 오로지 불선(不善)이지,
색계와 무색계의 결의 불선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존자 구사(瞿沙)도 역시 그렇게 말하고 있나니,
“모든 번뇌는 응당 불선인 것이다.
그 이유는 성인의 도와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다만 개는 허물이기 때문에 오로지 불선이다.”라고 말한다.
부처님이 계경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명(無明)에 덮이고 애(愛)에 얽매이니, 이와 같은 어리석음을 이 몸에서 얻는다. 지혜란 것도 역시 그렇다.”
[문] 가령 무명(無明)도 밝은 마음을 덮을 수 있고 또한 얽매이게 할 수도 있으며 애도 얽매이게 할 수도 있고 밝은 마음을 덮을 수도 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무명은 개(蓋)라 말하고 애(愛)는 결(結)이라 하는가?
[답] 응당 그렇게 말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말하지 아니할 경우는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 다른 말씀이 있으셨을 것이다.
내용을 나타내는데 내용[義]의 문(門)ㆍ략(略)ㆍ도(度)가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문(二門)ㆍ이략(二略)ㆍ이도(二度)ㆍ이거(二炬)ㆍ이명(二明)ㆍ이광(二光)을 나타냄으로써 둘이라는 숫자로 나타낸다.
이와 같이 무명(無明)을 설명할 때도 그것을 개(蓋)라 말하기도 하고 결(結)이라 말하기도 하며,
또 애를 설명할 경우에도 그것을 결이라 말하기 도 하고 개라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문ㆍ이략ㆍ이도ㆍ이거ㆍ이명ㆍ이광으로 나타내서 설명하여 둘이라는 숫자로 나타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앞에서 이미 장애물이 곧 개(蓋)라는 뜻이라고 하였으니, 여기에 다시 결이 따로 있지 않다.
이 장애물은 중생들의 지혜로운 눈[慧眼]에 장애가 생기게 하는 것이다.
무명의 경우는 앞에서 이미 속박[縛]이란 뜻이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결이란 뜻이며,
이밖에 또 다른 결은 없으며 이것이 중생들을 생사윤회 속에 얽매이게 하는 것이다.
또 애의 경우에는 가령 이것이 중생들이 무명 때문에 눈 먼 소경이 되고 애에 얽매이게 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열반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이다.
마치 어떤 사람에게 두 원수 집안이 있는데 한 집안이 몸 가까이 와서는 흙을 한 줌 손에 쥐고 그의 눈에 바르면, 두 번째 원수 집안이 가까이 와서 손발을 묶는 것과 같다.
그는 눈이 소경이 되고 손발이 묶여 있으니 어디에도 갈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이 이 중생들도 무명 때문에 소경이 되고 애 때문에 몸이 묶이니 이와 같이 되면 열반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게송(偈頌)에서 말했다.
무명은 소경이 되게 할 수 있으며
애는 생사윤회에 얽매이게 하나니
그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악한 불선법이니라.
이 가운데서 인나(隣那:귀신 이름)와 마숙(摩儵:귀신 이름)의 비유를 말하게 된다.
두 도적이 있는데 한 도적은 인나며, 또 한 도적은 마숙이다.
이들이 도적질을 하고자 할 때, 한 도적이 가까이 와서는 한 줌의 흙을 그의 눈에 바르고, 두 번째 도적은 가까이 와서 손발을 묶는다.
그는 눈먼 소경이 되어 몸이 묶여 있으니, 어디에도 갈 수가 없게 된다.
이와 같이 중생들도 무명 때문에 소경이 되고 애 때문에 몸이 묶이게 되니,
그들은 이미 소경이 되었고 이미 몸이 묶여 있으니 열반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게송을 말하게 된 것이다.
게송은 앞에서 말한 게송과 같으므로 중복해서 베껴 쓰지 아니한다.
이 가운데서 인나(隣那)와 마숙(摩儵)의 비유를 말하게 된다이 내용도 역시 위에서 말한 내용과 같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무명을 개라 하고 애(愛)를 번뇌라 하신 것이다.
오개처(五蓋處)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이것으로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