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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바수밀보살소집론 제3권
2. 심건도(心揵度)
또 세존께서 “저 마음과 뜻이 집지(執持)하여 손에서 떠나가지 아니하며 두 마음[二心]과 같지 않다”과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마음과 뜻이 이 집지하여 손에서 떠나가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셨는가?
마하승기(摩訶僧耆)는 “마음이 자연적으로 가짐이다”라고 말하였다.
[문] 불선(不善)을 껴잡은 마음은 선(善)이 아니어서 불선을 껴잡습니까?
담마굴(曇摩啒)이 “마음과 상응하는 지혜가 껴잡는다”고 말했다.
[문] 불선인 마음은 착한 지혜에 해당하는가, 착하지 않은 지혜에 해당하는가, 불선인 마음과 상응하는가?
미사새(彌沙塞)존자는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지혜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문]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지혜는 마음도 아니고 뜻도 아니면서 말한 바와 같이 마음과 뜻에 해당되는 것인가?
지발차자(持跋次子)는 “사람 마음을 집지(執持)한다”고 말했다.
[문] 사람에게 마음과 뜻이 없으면서 말한 바와 같이 마음과 뜻을 껴잡는가?
어떤 이는 “불선(不善)인 마음을 닦을 적에는 착한 마음의 인연이 곧 끊어지나니, 그와 같이 저 마음이 끝내 나지 아니하며, 그와 같이 저 마음이 곧 껴잡는 바가 있다”고 말했다.
[문] 불선인 마음으로 불선인 마음을 닦을 적에는 착한 마음의 인연이 끊어지는데, 착한 마음으로 불선인 마음을 이루게 하려는 것인가?
[답] 불선인 마음으로는 착한 마음의 인연을 알지 못한다. 어떤 이는 “생각이 증가해지면 마음이 청정하지 못함이 마치 애욕에 묶인 바가 되었을 적에 애욕을 생각하면 애욕이 청정하지 못하나 저 애욕은 차츰 줄어드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문] 애욕과 청정하지 못한 것, 그 두 가지 사실이 다르지 않다.
어떤 이는 “생각하고 헤아려 비교하니 마음이 산란해지기도 하며 생각하여도 산란함이 있지 않기도 하나니, 그와 같이 저 마음에 곧 해당된다”고 말했다.
[문] 생각 하지 않아 청정하지 않음과 마음에 산란 있는 것이 곧 평등하게 청정한 것인가?
어떤 이는 “마음과 뜻이 생길 적에 현재의 마음에 반연하나니, 그와 같기에 응당 마음이 껴잡는 것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 마음이 이미 생겼거나 아직 생기지 않았거나 간에 아직 생기지 않은 것에는 반연하지 못하는가?
어떤 이는 “불선(不善)인 마음과 뜻이 큰 방편을 만들며 불선인 마음에 순조롭게 머물거나 그 하나의 인연만을 취하지 않으면서 그와 같이 저 마음을 껴잡는다”고 말했다.
[문] 만일 불선인 마음이 방편을 만들지 않는다면 그 방편과 같아서 불선인 마음이 없을 것이니, 그러므로 방편은 일정한 곳이 없다.
어떤 이는 “과거의 불선인 마음과 뜻은 처소가 있으며 더럽고 미운 것을 싫어하여 사용하지 않고 마음으로 항상 그를 피하나니, 그와 같은 저 마음은 곧 껴잡음이 있다”고 말했다.
[문] 그 내용은 그렇지 아니하니 두 사람이 서로 기대는 것과 같아서 사람 사람마다 집지(執持)한다.
[답] 다시 그 두 마음이 함께 평등하여 의혹과 착란 없는 것이 등불을 켜고서 밝음을 보는 것과 같다.
다시 응당 선지식(善知識)을 친근해야 할 것이니, 중생들이 바른 법을 듣고 생각하거나 헤아려 비교하면 그 착한 마음의 인연이 더욱 더해진다. 속박이나 집착이 이리저리 서로 의지하여 차츰차츰 많아지면 그와 같은 것들은 상응하는 힘이 더하게 되나니, 저 힘은 불선인 마음에만 이롭게 하여 널리 수행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착한 마음을 수행하면 드디어 불어나게 되나니, 그와 같은 저 마음은 곧 집지함이 있다.
[문] 말한 바와 같이 “마음이 넓으면 너그러운 느낌[覺]이 있고 마음이 미세하면 미세한 느낌[觀]이 있다”고 하는데, 어떤 것을 마음이 넓음이라고 하는가?
어떤 이는 “너그러운 느낌이 있으면 마음이 치성해지고 마음이 치성해지면 곧 넓어지나니, 그러므로 마음이 넓어지매 너그러운 느낌이 있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5식신(識身)은 넓고, 의식신(意識身)은 미세하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불선인 마음은 넓고 선유루(善有漏)는 미세하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수행하지 않는 마음은 넓고, 수행하는 마음은 미세하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진리를 보는 데서 끊을 마음은 넓고, 생각함에서 끊을 마음은 미세하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지음과 저 지음이 넓은데도 곧 미세함이 있나니 욕계에 상응하는 마음은 넓고 색계에 상응하는 마음은 미세하여, 색계에 상응하는 마음은 넓고, 무색계에 상응하는 마음은 미세하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지옥의 마음은 넓고 축생의 마음은 미세하며, 축생의 마음은 넓고 아귀(餓鬼)의 마음은 미세하다. 그와 같은 모양은 유상천(有想天)과 무상천(無想天)에도 그와 같다고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아비담(阿毘曇)에서 “삼계를 선택하는 마음이 이리저리 생기어 작위가 넓고, 비추어 밝아 깨달음 있는 것이 범천(梵天)과 더불어 상응하고 다시 범천 위에 뛰어나지 못한다”고 말하였으니, 그것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 무슨 까닭으로 5식신(識身)은 욕애(欲愛)가 있어 무욕(無欲)이 아닌가?
어떤 이는 “계경(契經)에서 말한 바와 같이 눈으로 빛깔을 보고 좋은 빛깔에 애착한다”고 말했다.
[문] 눈으로 빛깔을 보고 의식(意識)에서 그 본 것과 같이 애착한다. 저 계경을 연설하되, 눈으로 빛깔을 보면 눈 감관이 보는 것을 성취하고 부정하게 생각하고 헤아려 비교한다고 하나니, 5식신으로 하여금 애욕이 없게끔 하는가?
어떤 이는 “이 6애신(愛身)과 안경애(眼更愛)와 나아가 의(意)를 말한 것과 같다”고 말했다.
[문] 안경(眼更)의 인연이 의지애(意地愛)를 일으키고 거기에 안경애가 있나니, 현재에 말한 바와 같은 사유(思惟)인 6식행(識行)은 5식신으로 하여금 기쁨이 있도록 하는가?
어떤 이는 “5식신은 3매(昧)의 마음이 없으니, 삼매의 마음이 없어 그 중에 맺히면 곧 치성해지므로 삼매의 마음이 해탈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5식신은 욕심이 있으니, 욕심이 없는 것이 아니다.
[문] 일체가 동등하게 욕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일체에 모두 있다면 아라한도 또한 애욕이 생기는 것이 있을 것이니, 저 아라한이 5식신 중에 삼매가 있지 않으므로 마음과 뜻을 수행하였으나 곧 욕애가 생길 것이며, 저 색애(色愛)와 무색애(無色愛)도 기뻐하는 일체 10대지(大地)와 서로 상응할 것이다. 5식신 중에 삼매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이는 “방편으로 구하지 아니하여도 5식신에는 곧 결사(結使)가 있나니, 방편으로 구하지 아니하여 애욕으로 하여금 생기지 않도록 한다. 그러므로 5식신은 애욕이 있고 애욕이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 만일 우리들이 부지런히 구하지 않는다면 이런 까닭으로 애욕이 있을 것이니, 온갖 것 다한 모양은 방편으로 구함에 있다. 그러므로 온갖 것을 다한 그것은 애욕을 성취한다.
어떤 이는 “어떤 처소에 5식신이 생기거나 결사(結使)가 또한 생기는 것이 곧 있지 아니하며, 애욕 있는 것이 곧 애욕 다함이 있는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5식신은 애욕이 있고 애욕 없는 것이 아니다. 이것 역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색욕(色欲)을 관찰하매 곧 속박되고 눈의 인식[眼識]이 회전하여 그 중간에서 널리 벗어나는 내용이 아니기에 방편으로 7각의(覺意)을 닦아 애욕이 없는 것을 구하나니, 그러므로 5식신은 애욕이고 애욕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5식신 중에는 차례를 넘지 않고 친근하여 함께 중간에 머무르게 되매 그 중간에 의식(意識)이 생기나니, 거기에는 곧 애욕이 있다. 그는 모두가 5식신이 온전히 차례를 넘은 것이며, 그는 5식신이 휴식한 것이다. 5식신은 깨끗하지 못한 애욕임을 관찰하여 애욕을 없애도록 하나니, 그러므로 5식신은 애욕이 있고 애욕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몸은 다한 애욕이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애욕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왜냐 하면 세존께서 또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과 같다.
여섯을 맡은 증상왕(增上王)이
염욕(染欲)에 몹시 물들고 있다.
물들지 않으면 곧 염욕이 없나니
물드는 이를 어리석다고 말하네.
[문] 내가 그 말을 듣고서 염욕을 생각하면 곧 염욕이 있고, 염욕 아닌 것을 생각하면 곧 염욕이 없다. 그러기에 계경에서 말한 “5식신은 또한 애욕이 있지 아니하고 또한 애욕도 없지 않다”는 그 내용은 어떠한가?
[답] 만일 5식신을 관찰하여 기뻐함이 없으면 염욕을 생각하면 곧 염욕이 있고, 염욕이 없는 것을 생각하면 곧 염욕이 없나니, 그러므로 이 계경에서 말한 5식신은 또한 애욕이 있지 아니하고, 또한 애욕이 없지 않다.
어떤 이는 “5식신은 착란하지 않는다. 만약 착란하지 않는다면 애욕이 있기도 하고 애욕이 없기도 하나니, 그러므로 5식신은 또한 애욕이 있지 않고 또한 애욕이 없지 않다”고 말했다.
[문] 저 상응하는 법은 착란함이 있으나 무색계에는 착란함이 없는데, 그로 하여금 또한 애욕이 있고 또한 애욕이 없다고 하려는 것인가?
[답] 온갖 상응하는 법은 혹 착란이 있기도 하고 혹 착란이 없기도 하나니, 그 내용이 어떠한가? 무색계에서도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 곧 애욕이 있다.
다시 제 모양에 소속된 5식신은 제 모양에 애욕이 있느니, 애욕이 없느니 하고 말하지 않나니, 그러므로 5식신은 또한 애욕이 있지 않으며, 또한 애욕이 없지도 아니하여 마치 심소념법(心所念法)이 함께 상응하여 생기는 것과 같다. 어떤 것이 상응하는 내용인가? 일부러 말하기를 “타고 싣는 내용이 곧 상응하는 내용이다”라고 했다.
[문] 눈 인식[眼識]이 의식(意識)을 불러 일으키나니, 눈 인식으로 하여금 의식과 상응한다고 하는 것인가?
[답] 그것은 딴 것에도 의지하나니 그와 동일하지 않다.
[문] 말한 바와 같이 타고 싣는 내용이 곧 상응하는 내용이라고 한 그 사실은 옳지 않다.
어떤 이는 “이동하지 않는 내용이 곧 상응하는 내용이다”라고 말했다.
[문] 4대(大)는 이동하지 않나니, 그것으로 하여금 제각기 상응하게 하려는 것인가?
[답] 그것은 인연이 아니다.
[문] 말한 바와 같이 이동하지 않는 내용이 곧 상응하는 내용이라고 하는 그 사실은 옳지 않다.
어떤 이는 “인연 있는 것이 곧 상응하는 내용이다”라고 말했다.
[문] 눈의 인식이 의식에 반연하여 인연이 있는데, 그로 하여금 상응하게 하려는 것인가?
[답] 그것은 딴 것에 의지한다.
[문] 말한 바와 같이 이동하지 않는 내용이 곧 상응하는 내용이라고 한 그 사실은 옳지 않다.
어떤 이는 “인연 있는 것이 곧 상응하는 내용이다”라고 말했다.
[문] 눈의 인식이 의식에 반연하여 인연이 있는데, 그로 하여금 상응하게 하려는 것인가?
[답] 그것은 딴 것에 의지한다.
[문] 말한 바와 같이 이동하지 않는 내용이 곧 상응하는 내용이라고 한 사실은 옳지 않다.
어떤 이는 “한 인연의 내용이 곧 상응하는 내용이다”라고 말했다.
[문] 많은 중생들이 달이 처음 떠오르는 것을 관찰하는 일이 있는데, 그를 “동일한 한 인연과 상응한다”고 하게 하려는 것인가?
[답] 그것은 딴 것에 의지한다.
[문] 말한 바와 같이 한 인연의 내용이 곧 상응하는 내용이라고 한 그 사실은 옳지 않다.
어떤 이는 “있는 바 희망의 내용이 곧 상응하는 내용이다”라고 말했다.
[문] 수명이 따뜻한 기운으로 생기는데 그로 하여금 상응함이라고 하려는 것인가?
[답] 그것은 인연이 없다.
[문] 말한 바와 같이 수명이 따뜻한 기운과 상응한다는 그 사실은 옳지 않다.
어떤 이는 “함께 생기는 내용이 곧 상응하는 내용이다”라고 말했다.
[문]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행[心不相應行]이 평등하게 생기는데, 그로 하여금 상응하게 하려는 것인가?
[답] 그것은 인연이 아니다.
[문] 말한 바와 같이 평등하게 생기는 내용이 곧 상응하는 내용이라고 한 그 사실은 옳지 않다.
어떤 이는 “하나의 일어남과 하나의 머무름과 하나의 다함인 그것이 상응함이다”라고 하나니, 그것 역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어떤 이는 “하나의 희망과 하나의 인연과 한 때에 만들어진 그것이 상응함이다”라고 말했다.
[문] 그 내용은 어떠한가?
[답] 하나의 인연에 의지하여 한 때에 만들어진다.
어떤 이는 “하나의 사실에서 필요로 하는 내용이 곧 상응함의 내용이다”라고 말했다.
[문] 앎[忍]과 지혜[智]가 곧 하나이니, 그것으로 하여금 상응하게 하려는 것인가?
[답] 그것은 한 때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문] 말한 바와 같이 하나의 사실인 내용이 상응함인 내용이라고 하는 그 사실은 옳지 않다.
어떤 이는 “열의 내용[十義]이 곧 상응함의 내용이니 인식이 가는 곳에는 각각 서로 길을 열어주고 피하며, 심소년법에는 곧 계산함이 있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상응함이 있지 않다. 왜냐 하면 저것은 일체가 아니며 함께 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문] 말한 바와 같이 “심소념법이 마음과 더불어 상응한다”고 하나 마음과 더불어 속박되어 집착하고, 마음에 의지하여 회전하므로 그것은 어긋남이 있다. 또한 “함께 생기는 느낌 생각이다”라고 말하나, 저 말한 바는 그와 더불어 상응하지 않고 또한 함께 생기지도 않는다. 그와 같이 저 없다 함은 상응함이 없다는 것만 말한 것이며, 또한 진리를 보는 믿음이 무너지지 않는 지혜와 상응함을 말한 것이다.
[문] 만일 “서로 상응한다”고 말한 것이라면 두 비구가 또한 “조금이라도 말다툼하는 일이 있으면 함께 더불어 상응한다”고 말하나니, 그를 함께 상응함이라고 하게 하려는 것인가? 만일 이미 소리 들은 것을 생각하는 것이 곧 생각이라면 또한 “눈과 빛깔이 두 가지 인연으로 생각함의 법과 인식과 느낌과 지어감[行]과 인연을 낸다”고 말할 것이니, 인식을 생각이라고 하게 하려는 것인가?
만일 소리와 더불어 함께 생긴다면 또한 “비구의 마음이 함께 생긴다”고 말해야 한다. 비마질(毘摩質) 아수라[阿須倫]가 목에 다섯 묶임이 있어 그것을 스스로 보나니, 그것을 마음이 함께 생김이라고 하게 하려는 것인가? 무엇이 의식(意識)에 의지하는가?
어떤 이는 “5식신(識身)은 이미 생긴 의지가 다 없어졌다”고 말했다.
[문] 무색계에서는 의식이 생기지 아니하나니, 거기에는 5식신이 없는가?
어떤 이는 “6식신에 의지한다”고 말했다.
[문] 물질에 증감이 있는 그것을 알 수가 없는가?
어떤 이는 “마음이 4대(大)를 좌우하면서 의식에 의지한다”고 말했다.
[문] 그는 4대가 증감이 있지 않다고 보았는가?
어떤 이는 “온갖 몸의 4대가 의식에 의지한다”고 말했다.
[문] 만들어진 물질에 증감이 있지 않는가?
[답] 저 4대에 곧 의지하는 명자(名字)가 있다.
승가밀(僧伽蜜)존자는 “제 감관과 의지인 몸과 인식이 낱낱의 마음과 온갖 제 감관과 몸과 마음이 짓는 바의 여러 곳에 수승함이 있는 것을 본다”고 말했다.
다시 마음에는 함께 4대가 있나니 인식에 의지한다고 말해야 된다. 인식이 저 4대와 더불어 각각 서로 의지함이 노끈과 띠와 같다.
보살이 꿈에 다섯 가지 사실을 본 것에 대해서는 저 인식이 무엇에 의지한 것인가?
어떤 이는 “보고 듣고 기억하고 아는 그것이 그의 인연이다”라고 말했다.
[문] 그는 처음에 이와 같은 큰 꿈을 꾸지 않았을 것인가?
꿈에 붉고 고운 나무가 배꼽에 나 있는 것을 보았다.
[문] 나는 아수라가 그와 같이 큰 침구를 만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또한 바수제바(婆修提婆) 배꼽에 큰 연꽃이 생겼다고 들었다.
어떤 이는 “옛적에 부처님께서 그와 같은 큰 꿈 꾸신 것을 아무개가 수기 받을 적에 들었으므로 그것이 곧 인식의 인연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저 인식이 보거나 듣거나 기억하여 알며, 본래 또한 겪었던 일이므로 그것이 인연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낮에 생각하던 일을 밤에 꿈꾸게 된다. 그러므로 저 꿈과 저 인식을 뒤바뀜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뒤바뀜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가?
어떤 이는 “마땅히 뒤바뀜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본래 없던 것을 지금에 조작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뒤바뀜이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등정각(等正覺)의 과위이기 때문이다. 보살은 말한 바와 같이 차분하게 어머니 태중에 내려오셨으며 차분하게 멈추어 계셨으며 차분하게 어머니 태에서 나오셨다.
어떻게 보살이 어머니 태중에 내려오셨으며 어떻게 멈추어 계셨으며 어떻게 어머니 태에서 나오셨는가?
어떤 이는 “그 분이 강림하실 적에 ‘내가 어머니 태중에 있구나’라고 아셨으며, 멈추어 계실 적에도 ‘내가 어머니 태중에 머물러 있구나’라고 곧 스스로 아셨다. 뒤에 태중에서 나오실 적에도 ‘내가 어머니 태에서 나오는구나’라고 곧 스스로 아셨으며, 다음에 강림하실 적에도 또한 ‘내가 최후의 자리에 있구나’라고 곧 스스로 아셨다. 다음에 강림하실 적에도 또한 ‘내가 최후의 자리에 있구나’라고 스스로 아셨으며, 어머니 태중에 머무르실 적에도 ‘최후에 머무르고 다시는 또 머무르지 아니하리라’라고 스스로 아셨으며, 어머니 태에서 나오실 적에도 또한 ‘다시는 어머니 태중에 들어가지 않으리라’라고 스스로 아셨다”고 말했다.
저 차분한 마음을 상응함이라고 말해야 되는가? 상응함이 아니라고 말해야 되는가?
어떤 이는 “마땅히 상응함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그 말한 것과 같이, ‘내가 차분하게 강림하는구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문] 집착하여 내는 마음과 집착하지 않음이 곧 차분함인가? 어찌 집착함이 집착하지 않음과 상응하는가?
어떤 이는 “마땅히 상응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 하면 마음을 내면 물들어 집착하게 되고 물들어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 곧 차분함이니, 그러므로 집착함이 집착하지 않는 것과 더불어 상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문] 어찌하여 지금에 차분하게 강림하셨는가?
[답] 스스로 몸과 뜻을 아셨으니, 말한 바와 같이 먼저 차분한 마음을 일으키고 다음에 물드는 마음을 낸다.
다시 본래에 또한 차분함이 있었고 중음(中陰)의 마음과 더불어 상응하여 몸이 차츰 성장함을 관찰했다.
마음을 내는 것이 어떠한 집착과 더불어 상응하는가?
어떤 이는 “애욕과 더불어 상응한다”고 말했다.
[문] 만일 그렇다면 지옥에 들어가는 일이 없겠다.
어떤 이는 “혹 애욕과 더불어 상응하기도 하고 혹 성냄과 더불어 상응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나쁜 갈래[惡趣]에 태어나는 그는 애욕ㆍ성냄과 더불어 상응하며, 좋은 갈래에 태어나는 이는 그가 물들어 집착하는 때와 더불어 상응하지 않고 착한 마음에서 곧 천상에 난다”고 말했다.
다시 모든 때[垢]와 집착으로 더불어 상응하지 않고 마음을 내는 것이 본래의 행[本行]과 더불어 상응하는 것이 질그릇 바퀴와 같나니, 마땅히 그러한 관찰을 해야 한다.
무엇 때문에 “몸 감관[身根]은 몸 인식[身識]의 인연이고 원인이 아니다”라고 말하는가?
어떤 이는 “성냄이 있는 것은 몸 감관이고 성냄이 없는 것은 몸 인식이니 성냄이 성냄 없는 것의 인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 성냄 있는 것이 곧 4대(大)이고, 성냄 없는 것은 가르침이 없는 인연과 함께한 것인가?
어떤 이는 “모이는 것이 몸 감관이고, 모이는 것 아님이 몸 인식이니, 모이는 것이 모이는 것 없는 것의 인연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 모이는 것 없는 그것은 아주 미세한데, 미세한 그것이 마음으로 인한 것이라고 하고자 하는 것인가?
어떤 이는 “빛깔은 몸 감관이고, 빛깔 없음은 몸 인식이니, 빛깔이 빛깔 없는 것의 인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 만일 빛깔이 있으면 곧 원인이 있다. 착한 마음과 착하지 않은 마음은 빛깔이 없는데, 착한 것을 착함 아닌 것의 원인이라고 하고자 하는 것인가?
어떤 이는 “처소는 곧 몸 감관이고 처소 없음은 곧 몸 인식이니, 처소가 처소없음의 인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경계 없음은 곧 몸 감관이고, 경계 있음은 곧 인식이니 경계 없음이 경계의 인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만일 몸 감관이 곧 몸 인식의 인연이라면, 더 나아가 몸 감관 그것에 곧 몸 인식이 있을 것이니, 그러므로 한 감관이 있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만일 몸 감관이 몸 인식의 인연이라면 몸 인식을 낼 것이니, 그러므로 몸 감관에 어긋남이 있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만일 몸 감관이 곧 몸 인식의 인연이라면 곧 인연인 처소가 있을 것이니, 인연이 있지 아니하고 증상연(增上緣)만 있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자연인 원인[自然因]에는 자연인 몸 감관과 몸 인식이 없다”고 말했다.
다시 그는 자성(自性)이 아니며, 또한 회전(廻轉)이 아니며, 딴 중생의 회전도 아니다.
온갖 마음이 네 가지 인연으로 생기는 것처럼 아라한(阿羅漢)의 최후연(最後緣)이 마음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아라한의 최후 마음은 불환(不還)인가?
어떤 이는 “차제(次第)인연ㆍ중간(中間)인연ㆍ희망(希望)인연인 그것은 뒷마음[後心] 차제인연이 아니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희망 인연이 있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생기는 바 원인이 희망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저 뒷마음에는 4인연과(因緣果)가 있나니 저 수(數)에 대해서 응당 다음과 같은 말을 하되, “중간에 무명(無明)이 있지 아니하고 애욕[愛]이 있어서 장래에 그런 좋지 않은 인연을 받는다. 말하자면 아라한은 보는 법이 있어서 마음과 뜻이 회전하는 것으로 그와 같이 몸이 무너진다”고 말했다.
무슨 까닭으로 아라한의 착한 마음과 무기(無記)인 마음은 마침내 불환(不還)인가?
어떤 이는 “중간연(中間緣)에 희망이 있다”고 말했고, 어떤 이는 “희망과 어김이 있다”고 말했으며, 어떤 이는 “희망을 원인으로 한다”고 말했다.
다시 두 가지 사실 때문에 현재의 법에서 심성(心性)이 돌아서게 되나니, 혹은 본행(本行)으로써 하기로 하며, 혹은 현재에 짓기도 한다. 장래에 또한 세 가지 사실 때문에 돌아서게 됨이 있다. 지어감의 때[行垢]로 돌아서게 되는 그것인데, 지어감의 때는 자연 그대로이다. 아라한은 지어감의 때가 없나니, 그러므로 아라한은 회전하지 않는다.
마음이 정해짐과 각관(覺觀)의 법과
욕심 없음과 상응하는 뜻이며
수면과 모든 내용이 생기는 것과
만들어 생김과 네 가지 인연이다.
5식신(識身)에게 뒤바뀐 행(行)이 있는가?
어떤 이는 “지팡이를 돌리면 바퀴와 같나니 눈 인식[眼識]을 저 바퀴라 말한다”고 말했다.
[문] 눈 인식이 아닌 것을 저 바퀴라고 말하는가? 물질의 제 모양 경계와 눈 인식과 의식을 저 바퀴라고 말하는가?
어떤 이는 “5식신은 욕심이 있고 뒤바뀐 성질도 욕심이 있나니, 그러므로 5식신을 뒤바뀜이라 한다”고 말했다.
[문] 뒤바뀜이 아니라고 말해야 되는 것이 즐거움의 느낌에 즐거움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가?
어떤 이는 “이동하지 않는 5식신이니, 이동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뒤바뀐 소견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 이동하지 않는 것이 역시 뒤바뀜이니 물질에서 삿된 소견이 나는 것과 같다.
다시 제 모양이 5식신을 포섭하나니 뒤바뀌지 않는 제 모양을 포섭하기 때문에 뒤바뀜은 이동한다.
한결같은 마음이 아닌 데에서 수승함이 있는 것을 선택하여 그를 만들거나 그를 얻는 것과 같다.
어떤 것을 착하지 않은 마음이라 하며, 마음으로 친근하지 아니한 이를 피함이라고 하는가?
착한 위의[善威儀]인 일심자(一心者)일부에서는 승명(僧名)는 “만일 마음과 뜻이 공(空)하여 갈수록 진실함이 있으면 허공인 일심(一心)이니, 거기에는 곧 선택하는 것이 있다”고 말했다.
[문] 일심에서는 선택함이 있지 않다. 이 사실은 다르지 아니하여 곧 더하는 것이 있지만 선택함에서는 더하는 것이 없다.
어떤 이는 “일심에서 선택함에 수승한 뜻이 있거나 선택함이 있는 것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 낱낱 마음에서 선택하지 않는 것처럼 수승한 뜻에도 선택함이 있지 않는가?
[답] 낱낱 마음과 뜻에 많은 것이 있는 것처럼 그와 같이 낱낱 마음에 많은 것이 없고 선택함의 많음만 있다.
어떤 이는 “제일의(第一義)에는 마음이 있지 않고 선택하는 행(行)에 또한 착함 아닌 것이 없고, 곧 착한 마음이 나서 그 중에 노닌다”고 말했다.
다시 착한 마음이 생기게 되면 곧 착함 아닌 마음은 없어진다.
[문] 짓는 것도 그것이요 얻지 못하는 것도 그것인데, 다시 마음에는 선택함이 있는가?
그러한 말을 하지 말 것이니, 나라고 하는 제 성품이 스스로 얽매인 것이다. 중생을 교화하매 곧 화합이 있나니, 짓고 선택하여 공덕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좋지 못한 인연을 피하고 미묘한 행(行)과 착한 위의(威儀)와 어울러 상응한다. 자못 일심이 있지 않으면 이와 그의 제 모양은 앞서거나 뒤서지 아니하고 인연을 짓는다.
어떤 이는 “비유컨대 5욕(欲)이 뜻을 내어 서로 인연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한꺼번에 두루하게 하려고 하는 것인가?
[답] 자연인 5욕이 한꺼번에 두루하는 것은 있지 않다. 만일 마땅히 인연한다면, 곧 세 가지 느낌이 생길 수 있겠다.
어떤 이는 “비유컨대 청청(靑靑)을 청국(靑國)이라고 말한 것과 같이 뜻이 한꺼번에 인연을 짓는다”고 말했다.
[문] 그것은 비유가 되지 않는다. 만일 마땅히 인연을 짓는다면, 청(靑)과 같으면 곧 평등하고, 각(覺)과 같으면, 곧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저것이 있는 따위로 이것이 있는가?
다시 인식을 내어 생각하는 마음은 당연히 없는 것이라고 말해야 된다. 그것은 본래부터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밖의 인식도 한 번 돌아 두 번 구르는 것은 있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인 나만 있을 뿐이니, 그러므로 없다.
일체 중생의 낱낱 마음이 하나의 제 모양 대상에만 회전한다면 과거와 미래의 마음이 기억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리니, 어떻게 가지가지가 둘인 제 모양을 알게 되는가?
어떤 이는 “내용과 설명으로 말미암아 알게 된다”고 말했다.
[문] 설령 다시 내용을 설명한다 한들 어떻게 알게 되는가?
어떤 이는 “그 밖의 각각인 마음이 공하여 거기에는 있는 바가 없으므로 곧 하나의 마음임을 알게 되고 본래 거쳐 나온 바를 기억하나니, 그로 말미암아 알게 된다”과 말했다.
[문] 만일 하나의 마음이 그를 기억하여 곧 푸른 것은 누런 것이 아니라고 기억한다면 하나의 서원이겠는가?
어떤 이는 “낱낱이 제 모양을 취하는데, 화합되어 두 모양을 취하나니, 그로 말미암아 알게 된다”고 말했다.
다시 ‘나’라는 제 성품과 의소(意所)인 낱낱 모양의 방편이 회전한다. 푸른 것에서 누런 것을 내는 것처럼 가지가지 두 모양인 옳지 못한 제 모양의 방편이 있다.
색계에서 죽어 색계에 날 적에 어떻게 욕계와 상응하는 심소념법(心所念法)을 성취하게 되는가?
어떤 이는 “희망이 의심하지 않는 희망을 얻나니, 이 ‘나’라고 하는 그것이 욕계의 심소념법이다”라고 말했다.
[문] 무루(無漏)인 심소념법에 희망이 있나니, 무루인 심소념법을 성취하게 하려는 것인가?
어떤 이는 “얻어 나게 되매 곧 그에 나게 됨이 있어서 욕계의 심소념법을 해탈한다”고 말했다.
[문] 저 무루인 심소념법도 또한 해탈이니, 욕계에서 무루를 성취하게 된다고 하려는 것인가?
어떤 이는 “존재[有] 있는 것이 생기게 됨이 곧 욕계의 심소념법이니, 또한 욕계에 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문] 욕계에 태어나도 무루인 심소념법을 일으키나니, 그로 하여금 무루(無漏)를 얻게 하여 성취시키려고 하는 것인가?
다시 반드시 욕계의 형상으로 변화 될 적에는 욕계의 심소념법이 회전한다.
무색계에서 사라져 색계에 날 적에는 욕계의 심소념법을 성취하게 되는데, 당연히 저 마음을 위의(威儀) 없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당연히 기술(技術)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답] 당연히 그를 기술이라고 말하며, 당연히 위의라고 말할 것이니, 변화로 변화한 형상은 그것이 기술이며, 변화로 머무는 곳에 있어 마음이 이동하지 않는 것은 당연히 위의라고 말해야 한다.
무색계에서 사라지고자 할 적에 색계에 와서 태어나 모든 선근(善根)을 얻는다. 그 선근은 무엇과 더불어 상응하며 어떻게 저 선근을 얻는가?
어떤 이는 “저 선근은 색계와 상응하나니 곧 희망을 얻고서 나게 되며 반드시 나게 되고 결정적으로 나게 됨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시 당연히 욕계와 상응한다고 말하며, 당연히 색계와 상응한다고 말해야 한다. 물질 존재를 얻으면 본래 본 것이 있기 마련이며, 근생(近生)은 과거를 얻을 수 없다. 또한 돌아선다고 관찰할 적에 어떻게 온갖 마음이 10대지(大地)와 상응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가?
어떤 이는 “만일 거기에 느낌이 없다면 곧 느낌의 한계가 없을 것이고 또한 생각이 없다면 곧 마음이 없을 것이며, 만일 생각함이 없다면 곧 무심이 될 것이다. 번갈아 즐길 것이 없다면 이 세 법이 없을 것이고 사유(思惟)함이 없다면 인식이 나지 않을 것이며, 만일 욕심이 없다면 온갖 심소념법이 생기지 아니할 것이다. 만일 해탈이 없다면 곧 해탈하는 것이 없을 것이고 만일 생각하는 것이 없다면 대상이 없을 것이며, 만일 삼매가 없다면 마음이 곧 산란함만 있을 것이고 만일 지혜가 없다면 대상을 분별할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아비담(阿毘曇)에는 반드시 실상(實相)이 있나니, 인연 등에 의하여 모든 법을 내어 상응한다. 낱낱이 상응함과 낱낱이 상응하지 않음은 마음을 관찰한 결과이다.
무슨 까닭으로 마음을 내어도 과보를 얻지 않는가?
어떤 이는 “만일 마음을 내어 과보가 있다면 곧 회전함도 과보로써 과보가 있는 것이 아니며, 그 밖의 유환(有還)도 곧 저것이요 과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 과보에는 복의 과보가 있으나 말한 바와 같이 머무르지 아니하며 나아가 복의 과보가 있는 것과 비추는 바가 있는 것을 지혜로 안다.
어떤 이는 “물들고 집착하여 마음을 내나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는 그 과보이기에 그러므로 과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 물들고 집착하여 과보가 있는 것은 그 말한 바와 같다. 무명(無明)을 수행하여 생각하고 널리 설명하는 것들에 머무름이다. 그와 같이 중생들은 음욕의 생각이 더 많다. 다시 지어감의 때[行垢]인 저 마음은 치열함이 있는데, 어떤 것이 저 과보의 행(行)이며, 자못 한마음이 산란하고 한마음이 안정되는가?
어떤 이는 “혹 산란함과 상응하는 마음에서 마음이 산란하여 삼매와 상응하는 마음에서 삼매로 사색하나니, 하나는 산란함과 상응하는 마음이요, 하나는 삼매와 상응하기에 그러므로 한마음의 산란, 한마음의 삼매라 한다”고 말했다.
[문] 만일 산란과 상응하는 산란이고 삼매와 상응하는 사색이라면, 그는 산란과 상응하며 그는 삼매와 상응하나니, 그러므로 그는 산란이 있고 그는 삼매가 있겠다.
어떤 이는 “착함 아닌 마음은 산란이고 착한 마음은 삼매이니, 하나는 착함이고 하나는 착함 아니기에 그러므로 하나는 산란, 하나는 삼매라 한다”고 말했다.
[문] 착함 아닌 것은 삼매라고 말할 수가 없는가?
어떤 이는 “한마음의 안에는 산란도 있지 않고 삼매도 있지 않지만, 뜻[意]에는 산란도 있고 삼매도 있다. 인연하는 바가 없는 그 마음과 뜻은 그를 산란인 마음과 뜻이라 말하며, 한 인연인 그것을 삼매라 말한다. 오직 하나인 하나의 마음과 뜻에 산란과 삼매뿐인데, 온갖 것에는 낱낱의 분별이 있나니, 그러므로 온갖 마음은 산란도 없고 삼매도 없다. 그것은 미묘한 것이 아니지만, 끝장을 알아낼 수는 없나니, 그러므로 그는 인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 만일 한마음이 산란이고 한마음이 삼매라면 그는 온갖 것을 낱낱이 분별함이니, 그러므로 온갖 마음에도 산란이 있고 삼매가 있다. 그것은 미묘함이 아니니, 그러므로 인연이 아니며 자못 저 마음 산란이 곧 삼매인가?
어떤 이는 “산란과 상응하는 마음이 있고 삼매와 상응하는 마음이 있고 산란과 상응함이 있어서 그는 삼매와 더불어 상응하는 온갖 마음인 10대지(大地)법이니, 그러므로 저것에 산란이 있고 삼매가 있다”고 말했다.
[문] 삼매는 산란과 상응함이 없고 산란도 또한 삼매와 상응함이 없는데, 삼매를 산란과 상응한다 하여 산란을 삼매와 상응한다고 하려는 것인가? 그것은 미묘함이 아니니, 그러므로 인연이 아니다.
어떤 이는 “없다, 착함 아닌 마음이 산란이고 착한 마음은 삼매이니 착함은 착함 아닌 것과 다르다. 그러므로 산란이 다르고 삼매가 다르다”고 말했다.
[문] 착함 아닌 것을 삼매라고 말할 수 없는가?
[답] 착함 아닌 삼매는 있지 않다. 말한 삼매는 무엇인가? 착한 마음만 혼자 자리잡은 것을 말한다. 다시 다음으로 하나인 마음에는 산란이 있지 않고 삼매가 있지 않나니, 그것 역시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멸진삼매(滅盡三昧)는 마음을 일으키매 무엇을 반연하는가?
어떤 이는 “근본이나 지말이 곧 인연으로 말한 바와 같이 본 마음[本心]에 갖추어 일어날 수 있는 것을 이루었나니, 그와 같은 마음으로 여기는 이는 일어나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문] 어떤 것을 아주 끊어진[斷滅] 마음에서 생각하는 바와 인연을 짓는 것이라 하는가?
[답] 착한 생각과 착하지 않은 생각이 아주 끊어진 중간에도 다시 착함 아닌 것을 일으킴이다.
[문] 저 아주 끊어짐이 아닌 마음과 뜻에 곧 속박되고 집착된 마음과 뜻이 있는가?
다시 온갖 있는 그 자리는 불가사의인 것이다. 멸진삼매에서 만일 본심(本心)과 본의(本意)에 아주 끊어진 인연이 있다면 그는 곧 있는 것이나 마음은 원인 없는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연기(緣起)한다.
다시 만일 마음이 차례로 마음을 일으킨다면 저것에 차제연(次第緣)이 일어나려고 할 것이니, 응당 본연(本緣)으로 인한다고 말해야 한다.
무슨 까닭으로 심소념법(心所念法)이 저절로 사라짐을 알지 못하는가?
어떤 이는 “만일 저절로 사라진다면 3등상(等相)에 응당 갱락(更樂)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만일 스스로 안다면 둘이 있지 아니하며 또한 두 인연이 인식을 낸다고 말할 것이니,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이 자연인 단멸(斷滅)과 사견(邪見)을 친근하매 남을 잘 포섭함이 있어 나와 다르지 아니하며, 나머지 방편(方便)과 같아서 괴로움이 곧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무슨 까닭으로 심소념법이 스스로 상응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가?
어떤 이는 “둘이 함께 생기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만일 안다면 생기는 인연이 생김 없고 생김 없는 것이 인연으로 생기고 생기는 인연이 지음 없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허공이 하나 모인 것이니 만일 안다면 공함이 아니요, 곧 무수한 무더기가 한 때 동안에 두 부분의 상응하는 법을 포섭할 것이며, 그 밖의 인연이 있는 것과 같아서 그 밖의 상응하는 법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다음에 하나의 인연을 알지 못한다. 만일 안다면 또한 자연임을 알 것이며, 만일 안다면 인식이 느낌을 반연하고 느낌도 또한 자연을 반연할 것이며, 말한 바와 같아서 슬기인 그것이 느낌이다
무엇 때문에 심소념법(心所念法)이 평등하게 있는 법을 알지 못하는가?
어떤 이는 “이것은 평등하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평등하게 있으나 스스로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다시 만일 돌아서는 자취라면 어찌하여 인연을 저것이 껴잡아 지니는 것이 있으며, 무슨 까닭으로 상응하는 법을 마음이 안으로 드는 법이라 말하고, 그 밖의 상응하는 법은 그러하지 않는가?
어떤 이는 “온갖 안의 마음이 역시 바깥 마음이니 그것이 온갖 마음의 등급이다”라고 말했다.
[문] 들어가는 처소가 없는가?
어떤 이는 “안의 감관과 의근(意根)은 그 밖의 상응하는 법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 뜻으로 생각함과 마음으로 생각하는 감관은 저 낙근(樂根)과 같으며, 나아가 혜근(慧根) 그것인가?
어떤 이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회전하나니 마치 마음이 흘러 달리면서 머무르지 않는 심소념법과 같다”고 말했다.
[문] 둘이 같이 생기는데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게 되는가? 만일 낱낱이 계속하여 생기면 느낌ㆍ인식ㆍ생각으로 말미암아 상(想)이 생기며, 또한 지혜가 생기는가?
어떤 이는 “심소념법은 저 경계와 같나니, 마음이 생기면 저것 또한 생각을 낸다”고 말했다.
[문] 둘이 같이 생기어 어느 곳에 가는가? 만일 낱낱이 계속하여 생긴다면 느낌과 인식 모양인 생각도 또한 생기는가?
어떤 이는 “뜻과 마음의 의지하는 것에 식법(識法)이 있다”고 말했다.
[문] 마음이 또한 마음에 의지하는데 마음으로 하여금 안이 아니라고 하려는 것인가?
[답] 비록 마음이 마음에 의지하기는 하나 마음에 의하여 식법이 있고, 생각은 마음에 의지한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마음이 위의 그 심념법(心念法)을 증가하나니, 이것 역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마음과 뜻은 스스로 없어지지 않고 생각이 곧 없어짐 있는 것이 멸진삼매(滅盡三昧)와 같다”고 말했다.
[문] 생각과 느낌이 거기에서 없어지나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가?
[답] 마음이 거기에서 없어진다. 왜냐하면 마음 지어감과 생각하는 바는 그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지어간 후에 정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또한 “어떤 사람이 생각 있다고 말하는가? 그러한 말은 없고 또한 그런 생각도 없나니, 그 일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다시 생각과 인식의 사라짐이 선택하는 바가 있나니, 응당 안에 드는 법이며, 그 밖에 상응하는 법이며, 의식(意識)이 들고 지니어 항상 머무르고 옮기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다시 인식이 중생에 의지함은 견고하지 않고 견고함은 그 밖의 법과 더불어 상응하나니, 그 중에 과거의 인식을 알 수가 있으므로 응당 안에 들고 그 밖의 법과 상응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세존께서 “무상함이 곧 괴로움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어떤 고통이 무상한 고통인가?
어떤 이는 “만일 항상함이 있으면 그것은 괴로움이고 만일 무상하면 그것은 열반이다”라고 말했다.
[문] 만일 스스로 고통을 알면 그는 스스로 고통을 부름이요, 만일 항상함이 있는데도 그가 스스로 알지 못한다면 항상함이 있는 고통이 아니겠는가?
어떤 이는 “고통이 없어질 때에는 그 밖의 괴로움은 곧 피하게 된다”고 말했다.
무상함이 사라질 적에 그 무상함으로 하여금 낙이라고 하려는 것인가?
어떤 이는 “고통이 생길 때에는 곧 괴로움이 있고 고통이 사라질 때에는 곧 무상함에서 무상함이 생기나니, 그러므로 무상함은 괴로움이다”라고 말했다.
[문] 즐거움인 느낌이 생길 적에 곧 즐거움이 있고 무상함이 생기는데, 그 무상함을 즐거움이라고 하려는 것인가?
어떤 이는 “그것은 무상한 괴로움에 해당하는 바가 아니며, 저 괴로움은 자연이고 저 무상함은 자연인 괴로움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 말한 바와 같아서 만일 무상함은 곧 괴로움이라고 한다면 그 사실은 옳지 않다.
[답] 온갖 무상함이란, 그것은 모두가 괴로움[自然苦]이고 자연인 괴로움[種苦]이 조금 있으며 무상한 괴로움이 조금 있으며 심은 괴로움이 조금 있다.
다시 그것은 무상한 괴로움이 아니니, 무상함의 내용이 다르고 괴로움의 내용이 다르다. 다시 고통이 생길 적에는 무상함에 핍박되는 바로서 자연인 괴로움이 제각기 스스로 모여든다.
또 세존께서 “즐거움의 느낌을 받을 때에 그는 곧 즐거운 느낌을 받는 것을 스스로 안다”고 말씀하셨으니, 어찌하여 즐거운 느낌을 받을 적에 그가 곧 즐거운 느낌 받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는가? 위의 처음 건도(揵度)에서 말한 것과 같이 어떻게 괴로움이 있는 것을 스스로 아는가?
[답] 다시 즐거움의 느낌은 방일한 저 경계에서 의식과 생각을 내나니, 저 의식이 뜻과 더불어 공동으로 나라는 생각을 내므로 곧 내가 즐거움의 느낌을 받는다고 스스로 알거늘, 하물며 다시 중생이 느낌과 소견이 핍박됨에서 마음이 곧 어지러워지겠는가?
[문] 무슨 까닭으로 심소념법이 스스로 그 처소에 의지하지 않는가?
어떤 이는 “스스로 그 처소에 의지함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심소념법과 같다
[문] 빛깔이 있는 물질은 제각기 스스로 친근한가?
[답] 빛깔이 있는 물질과 아주 작은 분자와 또한 아주 작은 분자끼리가 각각 서로 부딪치지 않나니, 그러므로 그것은 물을 것이 되지 않는다.
어떤 이는 “빛깔 없는 것도 또한 서로 부딪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문] 물질과 인식[識]이 서로 주의함이 있어서 스스로 친근하지 않는가?
어떤 이는 “서로 선택하여 부딪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문] 선택함은 주의함도 아니요 스스로 친근함도 아니니, 그러므로 그것은 옳지 않는가?
어떤 이는 “상대함이 없어서 부딪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시 만일 부딪침을 받는다면 곧 미세하고 윤활함이 드는 것이 있을 것이다.
[문] 만일 신근(身根)에 부딪치더라도 그는 갱락(更樂)이 아니니, 그와 같은 저 부딪침은 번갈아 드는 것이 아니다. 자못 근심 걱정 아닌 것에 반연하여 즐거운 느낌을 내기도 하는가?
어떤 이는 “어떤 사람이 그 원수가 죽는 것을 보면 곧 즐거운 느낌을 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문] 저 즐거움인 느낌은 원수를 반연함이 아니고 원수가 저 즐거움의 느낌에 반연한 것이니, 그러므로 저것은 근심 걱정인가?
어떤 이는 “아니다. 그 사실은 정해진 것이 아니니, 근심 걱정 아닌 것에 결정적으로 반연하면 괴로운 느낌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문] 저 인연으로 혹 즐거운 느낌이 나기도 하고 혹 괴로운 느낌이 나기도 하며 혹 둘을 반연하여 생기면 그 인연 때문에 두 가지 사실을 함께 알지 못하는가?
[답] 다시 어떤 인연이 근심 걱정 있음과 근심 걱정 없음을 성취함이 없는가? 만일 그에 혹 근심 걱정이 있거나 혹 근심 걱정이 없거나, 혹 다시 근심 걱정이 있지 않거나 또한 근심 걱정이 없지 않거나 간에, 그는 혹 근심 걱정이 있기도 하고 혹 근심 걱정이 없기도 하며, 혹 또는 근심 걱정이 있지 않기도 하고 또한 근심 걱정이 없지 않기도 하며, 인연이 모이매 혹 즐거운 느낌이 생기기도 하고 혹 괴로운 느낌이 생기기도 하며, 혹 즐겁지 않은 느낌이 생기기도 하고 혹 괴롭지 않은 느낌이 생기기도 한다.
[문] 자못 근심 걱정에 반연하여 괴로움의 느낌을 내기도 하는가?
어떤 이는 “어떤 이가 그 어머니의 죽음을 보고 곧 괴로움의 느낌을 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문] 그 느낌은 어머니를 반연한 것이 아니고 어머니가 그 느낌에 반연한 것이니, 그러므로 그가 근심 걱정한 것이다.
어떤 이는 “아니다. 결정코 근심 걱정 아닌 것에 반연하여 즐거운 느낌을 낸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 그 인연으로써 혹 즐거운 느낌을 내고 혹 괴로움의 느낌을 내는가?
[답] 다시 그런 인연은 근심 걱정 있거나 근심 걱정 없음을 성취한 것이 있지 않으며, 혹 근심 걱정이 있거나 혹 근심 걱정이 없거나 혹은 또 근심 걱정이 있지 않거나 또한 근심 걱정이 없지 않지만, 저 인연이 모이면 혹은 즐거움의 느낌을 내고 혹은 괴로움의 느낌을 내고 혹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낸다.
두 가지 견고함[牢固]과 한 가지 멸진(滅盡)에는 자연인 증상만(增上慢)과 괴로움의 느낌인 뜻이 근심 걱정 없음과 근심 걱정 있음에 서로 부딪치지 않는다.
딴 사람을 아버지로 여겨 즐거움의 느낌을 일으켰다면 저 느낌은 무엇을 반연한 것인가?
어떤 이는 “아버지가 그의 인연이다”라고 말했다.
[문] 그는 친아버지가 아닌가?
[답] 그와 같은 생각[思想]을 일으켰다.
[문] 만일 그것이 나의 느낌이라고 말함이 있다면 내가 바로 그 인연이겠는가?
어떤 이는 “원수가 그 인연이다”라고 말했다.
[문] 그 느낌은 원수가 아니다. 만일 그것이 모든 느낌과 인연을 짓지 않는다면 청(靑)을 만들게 하려는 것인가? 만일 느낌이라면 청(靑)을 반연하지 않는다.
다시 느낌의 내용은 아버지 모양이 그 인연이라고 원수가 바로 그 처소이다.
몸 안의 느낌은 그것이 곧 마음의 느낌인가? 만일 그 마음의 느낌이라면 그것은 몸의 느낌인가?
어떤 이는 “몸 안에 있는 느낌은 저 모든 느낌이 마음과 더불어 상응한다”고 말했다.
[문] 말한 바와 같이 그 두 느낌인 몸의 느낌과 마음의 느낌이 있으면 곧 상위함이 있는가?
어떤 이는 “온갖 느낌은 곧 마음의 느낌이며 더 나아가 다섯 근(根)의 증가함은 곧 몸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물질[色]이 증가함과 나아가서 의근(意根)이 증가하는 그것은 마음의 느낌이며 마음의 증가인가?
어떤 이는 “온갖 이르는 대상이 모든 감관[根]을 껴잡아 내나니 그것을 몸이라 말하며, 사상(思想)이 있지 않음과 온갖 이르지 않는 대상이 세 가지 감관을 껴잡아 생기나니, 그것은 곧 마음이며 사상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온갖 느낌이 몸 감관[身根]에 의하여 안의 갱락(更樂)을 껴잡아 반연하여 생기는 것을 몸의 느낌이라 말하고, 그 중에 그 밖의 느낌이 생기는 그것을 마음의 느낌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문] 다시 온갖 몸의 느낌이 마음과 더불어 상응한다는데, 자못 마음의 느낌이 몸의 느낌 아닌 것이 있는가?
온갖 느낌 외에 만들어진 느낌이 만일 길고 짧음을 안다면, 짧은 것 역시 긴 것을 알 것이니, 저 인식은 무엇을 반연한 것인가?
어떤 이는 “만일 길고 짧음을 안다면 저것이 짧음에 반연함이며, 만일 짧음이 긴 것을 안다면 저것은 긴 것을 반연함이다”라고 말했다.
[문] 긴 것은 짧음이 아니고 짧음은 긴 것이 아니다.
[답] 이것으로써 알 수 있다.
[문] 만일 나[我]가 있음을 안다면 나는 곧 반연인가?
어떤 이는 “만일 길고 짧음을 안다면 그것은 긴 것을 반연함이며, 만일 긴 것을 알면 그것은 짧음을 반연함이다”라고 말했다.
[문] 지금 만들어진 대로 알지 못하고 만일 그 밖의 것을 안다면 인식이 그 밖의 것에 반연함이 있으리니, 푸른 것으로 하여금 청색에 반연함이 아니라고 하려는가?
어떤 이는 “길고 짧음을 알지 못하거나 짧은 것이 긴 것을 아는 것이 있지 않다. 저 인식을 머무름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니, 냄새와 맛, 닿임이 길고 짧은 것을 만들었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맹인(盲人)이 천안(天眼)을 얻지 못하고서도 안식(眼識)으로써 모든 빛깔을 볼 수 있는가?
어떤 이는 “있다. 만일 일찍이 상응하였으면 다음에 결과를 얻는다. 그가 안식이 생기면 눈은 곧 무너진다. 그러므로 맹인이 안식이 생기면 감관이 부패한다. 그러므로 맹인이 안식으로 빛깔을 안다”고 말했다.
[문] 저 눈에 그 밖의 것이 생길 수 있다면 그를 눈이 멀었다고 말하지 못하는가?
[답] 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니, 만일 눈을 본다면 곧 눈이 먼 것이 아니다. 눈먼 것으로부터 생겼으니, 그러므로 눈먼 것이 아니다.
[문] 눈먼 것으로부터 인식이 보는 것이 아니다. 만일 눈이 멀지 않음을 본다면 모든 식(識)의 모양과 상응하여 모든 감각이 있는 것을 알 것이다.
어떤 이는 “만일 눈이 없어질 때에 안식이 생긴다면 저 안식이 무너질 때에 안식이 생길 것이니, 그러므로 맹인이 빛깔을 껴잡는다”고 말했다.
[문] 평등하게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에 인식이 생긴다. 만일 다 사라지고 안식이 생기거나 만약 모두가 사라져서 안식이 생긴다면 그에게는 눈이 생겨도 안식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맹인으로 하여금 안식을 일으키게 하려는 것인가? 눈을 일으켜 안식을 내는가?
다시 끊이지 않는 눈이기에 저 회전함이 있으며 또한 뜨거나 피하는 일이 있다. 문득 안식이 생기면 이미 얻은 인연의 종적이 곧 상응함이 있다. 만일 참으로 상응한다면 안식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또 세존께서 “6진계(塵界)의 비구다”라고 말씀하셨다. 무엇 때문에 의식(意識)을 유루(有漏)라고 말하는가?
어떤 이는 “저 세계는 유루에서 생긴 것이니, 그러므로 유루라 말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유루가 저 세계를 냈으니, 그러므로 유루라 말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저 세계는 지어감의 과보[行報]이기 때문에 유루라 말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저 세계는 곧 사람이 계산한다. 그러나 사람은 무루(無漏)가 아니니, 그러므로 유루라 말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나고 죽음에 헤매어 끝이 없으니, 그러므로 유루라 말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저 세계에서 반연하여 어머니 태중에 내려올 적에 무루(無漏)을 반연하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 내려왔으니, 그러므로 저 세계를 유루라 말한다”고 말했다.
다시 저 세계에서 내가 있다고 말하나니, 이것은 무루가 아니고 참으로 유루를 내나니, 그러므로 저 세계를 유루라 말한다.
또 세존께서 “모든 모양을 껴잡는 비구의 식(識)에 속하는 것으로는 그 때에 목숨이 마치면 나아갈 3악취(惡趣)가 늘 그치지 않으나 지옥ㆍ아귀(餓鬼)ㆍ축생에 나서도 물들지 않는 마음이 생긴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천상에 나게 되는가?
어떤 이는 “모든 결사(結使)로 말미암아 천상에 나게 되고 또한 결사로 말미암아 혹 지옥에 들게 된다”고 말했다.
[문] 어떻게 좋지 못한 행위를 하게 되는가?
어떤 이는 “결사로 말미암아 곧 천상에 나게 되고 성냄 때문에 지옥에 들게 되나니, 성냄의 모양이 그 때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조그만 한 물듦 때문에 또한 천상에 나게 되며 결사가 증가되므로 3악취에 나게 되고, 성냄이 증가하므로 그 때에 목숨이 끊어진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행상(行相)이 중한 누(累)에서 모든 결사가 생기며, 만일 착하지 못한 짓을 하면 곧 나쁜 갈래에 나게 되고, 만일 결사에 얽매여 모든 착한 일을 하면 곧 천상에 나며, 착하지 못한 행위를 일으키고 쇠모(衰耗)가 있으면 그 때에는 목숨이 끊어진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온갖 결사가 모든 착한 뿌리[善根]을 뽑아 버리는데, 선과 악을 행함에 따라 각각 그 갈래에 나아간다”고 말했다.
다시 위에서 와 태어난다는 것은 경의 어구(語句)와 틀리는 것이 있다. 지금 그 요점을 말하겠으니, 배로 저쪽에 건너가는 것과 같다. 이 업보의 행(行)이 생기어 행하면 곧 그 과보를 받는다. 그 때를 당해서는 힘 없는 사람은 착한 근본을 짓지 않나니, 그러므로 처소가 있게 된다. 최후의 식(識)이 합해지면 죽음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시 식은 본행(本行)과 더불어 상응한다.
[문] 또 세존께서 “오랫동안 마음에 의하여 사유하고 수행하며 잘 외고 읽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마음을 오랫동안 수행하는가?
한 마음[一心]인 자일부에서는 승명(僧名)가 말하기를 “한마음으로 오랫동안 수행하고 중다(衆多)한 마음으로 수행하지 말 것이니, 수행하면 태어나게 된다”고 말했다.
[문] 한마음으로 그와 같이 오랫동안 수행하더라도 곧 태어남이 있지 않기도 하고 또한 등급이 없다. 그 등급을 생각해도 다름이 있지 않으며 이리저리 생각을 내면 곧 생각이 있게 되고 이리저리 마음과 뜻이 곧 자라남이 있나니 그러므로 뜻을 내어 오랫동안 사유하는가?
다시 마음에 세 행(行)이 있고 시기가 있지 않으며 목숨을 마치기에 이른다. 그로부터 뜻을 낸 보살이 도를 구하여 그로부터 사유하고 나아가서는 무학(無學)의 도를 얻으며 이익을 얻고 마음으로 이리저리 생각하는 것을 그는 사유를 갖게 되고 일시적으로 생각하는 착한 법에 대해서도 생각을 관찰하고 사유를 한다.
무슨 까닭으로 온갖 상응하는 법에 관한 생각과 식(識)을 먹음[食]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어떤 이는 “저 온갖 것이 곧 먹음이라 함은 세존의 가르침인 말이요 온갖 것이라고 한 것을 곧 온갖 것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문] 식을 말한 것으로써 곧 온갖 것이라고 한 것이 아닌가?
어떤 이는 “저 온갖 것이 곧 먹음이라는 말은 세존께서 권하시고 가르치시는 말씀이다”라고 말했다.
[문] 온갖 상응하는 법은 평등하게 생기는가?
어떤 이는 “그 속에 들이어 먹음과 식(識)의 마음인 두 가지 때문에 씹어 먹는 취식(揣食:摶食)과 즐거움으로 먹는[樂食] 두 방편이 있다”고 말했다.
[문] 모든 상응하는 법에는 혹 느낌이 있기도 하고 혹 느낌이 아니기도 한데, 그 내용은 어떠한가? 다시 상응하는 법에는 혹 먹음의 모양이 있기도 하고 혹 먹음의 모양이 없기도 하나니, 빛깔ㆍ냄새ㆍ맛ㆍ소리ㆍ닿임 같은 것들이다. 두 생색(生色) 그것을 안식(眼識)의 경계라고 하는가?
그 밖(識食ㆍ思食 따위)의 것도 역시 그러하여 다만 스스로 기르려고 하나니, 곧 먹음의 내용이고 취식과는 상위하나 모든 감관과 4대(大)가 자라게 된다. 연하고 아름다운 배부름이기에 그는 그 먹음의 생각으로써 저 세계에 난다.
사유와 상응하는 뜻에 생각하는 바와 저 느낌이 있는 것처럼 그는 한량없이 마음에 느낌이 있는 것과 같이 난다.
만일 모든 법에서 즐김으로써 먹음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는 몸과 감관의 느낌을 내고 받을 것이며, 또한 지어감[行]과 생각[想]을 가지고 마음이 유행하리니, 그는 느낌을 내는 모든 식(識)이 식을 잡아갈 것이며, 나아가 식과 뜻이 몸 감관에 상응하여 심소념법까지 묶이고 집착하리니, 응당 회전하여 피할 수 있는 곳에 먹음이라는 생각을 느낀다고 말해야 한다.
다시 합하고 모이어 짓는 모양이 곧 그 모양이다.
공양과 몸과 이름이여
길고 짧음과 눈 멂과 의계(意界)며
취함과 서로 집착함 아님과
유루와 뜻이 뒤에 있음이다.
그 밖에 상응하는 법이 아닌 법이다. 무엇 때문에 온갖 상응하는 법과 생각과 느낌이 뜻을 지어감[意行]인가?
어떤 이는 “이것은 온갖 뜻 지어감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나니, 그것은 곧 세존께서 권하시고 가르치시는 말씀이니, 그것을 첫머리로 하여 곧 온갖 것을 뜻이라고 말한다.
[문] 하나를 말하면 곧 일체를 말하는가?
어떤 이는 “그것은 세존께서 권하시고 가르치시는 말씀이다”라고 말했다.
[문] 온갖 상응하는 법이 평등하게 힘을 내는가?
어떤 이는 “뜻으로 말미암아 생기나니, 그러므로 뜻 지어감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문] 온갖 서로 응하는 법들이 혹 뜻을 따라 생기기도 하고 혹 뜻을 따라 생기지 않기도 하는데, 그 내용은 어떠한가?
어떤 이는 “그것은 뜻으로 짓는 바이기 때문에 뜻 지어감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문] 온갖 상응하는 법은 혹 뜻으로 짓기도 하고 혹 뜻으로 짓지 않기도 하는데, 그 내용은 어떠한가?
다시 뜻에 얽힌 그와 같은 법은 중간에 회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의식이 이리저리 회전하여 휴식함이 없다.
또 세존께서 “닿임의 관습ㆍ느낌의 관습ㆍ생각의 관습ㆍ지어감의 관습ㆍ이름의 관습ㆍ물질의 관습ㆍ인식의 관습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무슨 까닭으로 온갖 상응하는 법이 닿임의 관습ㆍ느낌의 관습ㆍ생각의 관습ㆍ지어감이 관습ㆍ이름의 관습ㆍ물질이 관습ㆍ식(識)의 관습인가?
어떤 이는 “온갖 상응하는 법은 닿임의 관습과 이름ㆍ물질의 관습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닿임의 수승한 뜻 안에서는 이름ㆍ물질ㆍ식ㆍ닿임이 증가하며, 나아가 느낌이 증가하고 이름ㆍ물질이 증가하며 식이 증가한다.
[문] 평등한 중간에 이것은 묘하기도 하고 이것은 묘하지 않기도 한데, 그 내용은 어떠한가? 하나인 닿임이 서로 마음을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그것은 없다. 닿임이 증가하면 뜻이 곧 증가함이 있는가?
어떤 이는 “눈이 빛깔을 반연하는 인연과 평등한 중간[等尊中間緣]의 인연이 이름과 물질을 반연하여 식이 생기나니, 그 세 가지가 모였기 때문에 닿임이 닿임에 반연하며 닿임에서 곧 느낌ㆍ생각ㆍ뜻을 낸다”고 말했다.
[문] 오직 닿임으로 말미암아 느낌이 생기고 다시 그 밖은 닿임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생기는가?
세존께서 또한 “저 느낌이 있으면 저 느낌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곧 생각이 있다고 말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사실은 그렇지 아니하여 경과 상위함이 있으니, 심소념법이 이리저리 상응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눈이 빛깔을 반연하여 안식(眼識)을 내나니 그 셋이 모이면 닿임이 있으며, 저 식 등이 있으면 곧 느낌이 생기고, 느낌으로 말미암아 곧 생각이 생기고, 생각을 반연하여 곧 뜻이 생긴다”고 말했다.
다시 온갖 상응하는 법인 방편이 곧 수승하나니 두 사람이 함께 하나의 길을 갈 적에 목적지에 반드시 이르게 됨과 같아서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닿임인 싹이 그 둘을 함께 생기게 한다.
증감 있는 것이 사실과 같다.
또 세존께서 “비계라다로해제(毘罽羅多魯奚帝)바라문이라는 한 사람은 몸이 백년을 살고 그 밖의 지어감ㆍ느낌은 일어나 곧 없어지고 생기지 않아 물질이 차츰 상응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으니, 그를 말씀하신 내용은 어떠한가?
어떤 이는 “물질과 물질이 옮겨진다는 것은 세존께서 가르치시는 말씀이다. 세상에서는 이러한 생각을 하되 저 물질이 나의 것이며 ‘내’가 물질에 집착하여 머무른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물질도 또한 옮기어 나고 죽으며 무기(無記)인 뜻도 스스로 회전하며, 심소념법(心所念法)도 선(善)이 있기도 하고 불선(不善)이 있기도 하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물질 또한 옮긴다”고 말했다.
다시 물질이 사람 때문에 회전하고 심소념법이 실체가 있으며 다시 딴 갈래[趣]가 있다.
다시 물질 또한 옮긴다. 그러나 물질은 자연인 것이요 나아가 죽지 않음에 머무르기도 하나니, 가령 스스로 지혜를 일으키거나 다른 이가 스스로 방편을 일으켜 물질을 구하여도 백 년을 머문다.
또, 세존께서 “이 네 가지 뒤바뀜은 생각의 뒤바뀜ㆍ마음의 뒤바뀜ㆍ소견의 뒤바뀜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무슨 까닭으로 온갖 상응하는 법은 느낌의 뒤바뀜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어떤 이는 “그것은 세존께서 가르치시는 말씀이니, 그를 말한다면 모두 느낌이라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 하나를 말씀하시면서 곧 일체를 말씀하신 것인가?
[답] 어떤 이는 “그것은 세존께서 권유하시고 도우시는 말씀이니 위에서 말함과 같이, 일정함이 있음을 맺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 모든 상응하는 법은 권유함과 돕는 것이 있지 않은가?
[답] 어떤 이는 “그는 세존께서 가르치시는 말씀이다. 이 가르침과 세존께서 가르치시는 말씀이며, 이 가르침과 세상의 뒤바뀜ㆍ생각의 뒤바뀜ㆍ마음의 뒤바뀜ㆍ소견의 뒤바뀜인데, 그렇지만 느낌은 뒤바뀜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이것은 온갖 것이 뒤바뀐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작은 생각 뒤바뀜 안에서 마음 뒤바뀜이 소견 뒤바뀜을 증가시킨다. 다시 하나의 뒤바뀐 심소(心所)가 무상하다는 생각을 내고 항상함이 있다는 생각을 내게 되어 온갖 상응하는 법을 얻게 된다.
어떤 이는 뒤바뀜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며, 어떤 이는 “얻을 수 없다니 식(識)의 경계가 회전하면 마음도 또한 회전함과 같다”고 말했다.
[문] 만일 일체가 항상함이 있다면 ‘나’는 일정한 제 모양이고 경계가 없겠다.
[답] 항상함이 있다 함은 식이 항상함이 있다는 것이니, 항상함이 있으므로 느낌의 모양을 알고 생각하는 마음[想心]을 알고 마음[心]을 안다.
[문] 만일 일체가 항상하다면 일체 느낌이 아니고 일체 지혜인가?
어떤 이는 “식의 제 모양에 포섭되나니, 그러므로 그는 뒤바뀐 마음이 아니다. 마음은 또한 뒤바뀌기도 하고 또한 뒤바뀜 아니기도 하다”고 말했다.
착함은 뒤바뀜이 아니다. 그리고 착함이 불선(不善)과 더불어 상응하지 않나니, 그러므로 그것은 옳지 않다.
다시 처소와 서로 반연하고 업(業)과 상응함이 없나니, 그러므로 거기에 온갖 뒤바뀜과 온갖 뒤바뀜 아닌 것이 생기는 것이 있지만 하나도 저절로 만들어진 ‘나’보다 수승한 것은 없다.
또 세존께서 “셋이 모인 닿임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어찌하여 의지(意地)에 셋이 모인 닿임이 있는가?
[답] 의계(意界)일부에서는 승명(僧名)에서는 “뜻의 지님[意持]과 뜻의 경계[意境界] 따위의 닿임이다”라고 말했다.
[문] 두 마음이 함께 평등함을 또한 심(心)ㆍ의(意)ㆍ식(識)이라 말하는가?
하나인 마음에 대하여 그러한 말을 한 것이니, 만일 전전(展轉)한 마음이라면 거기에는 셋의 모임이 없다.
다시 하나인 마음 경계 따위에 의하여 닿임이 있다.
[문] 또한 뜻 인연으로 모든 법과 의식(意識)과 셋의 모임을 낸다고 말한다. 닿임, 그것은 마음과 뜻에 의지하지 않나니, 그러므로 셋의 모임이 없다. 만일 그가 마음에 의지한다면 곧 3심(心)이 있을 것이다.
심성(心性)일부에서는 승명에서는 “마음이 사라질 때에 마음의 경계가 생기나니, 그것이 셋의 모임이다”라고 말했다.
[문] 마음이 생길 적에 미래의 마음은 아직 생기지 아니했으니, 그러므로 셋의 모임이 없다.
다시 과거에 의근(意根)이 있게 되고 현재에 의식 경계가 있게 되며 의식을 두루 비추어 번갈음이 그와 같고 의지(意志)의 셋 모임에 닿임이 있다.
어찌하여 과거와 현재에 모임이 있는가?
[답] 이는 평등한 모임이 아니고 사실 모임이니, 그와 같이 저 사실과 또한 상응하게 된 것이다.
[문] 어찌하여 눈 인식이 착함을 반연하는가?
어떤 이는 “눈 인식의 착한 마음이 평등하게 일어나 몸과 교법에 반연하나니, 그를 눈 인식이 착함을 반연함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만일 저 몸과 교법이 저절로 착하다면 어찌하여 저것들이 일어나 몸을 관찰하지 않는가?
[답] 몸에는 교법의 빛깔[敎色]이 있고 저 바퀴가 없으며 눈이 없고 색상(色相)만이 나타나기 때문에 윤전(輪轉)이라고 말하나니, 그를 몸의 교법이라고 말한다. 만일 몸의 산란이 착함이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읽고 외울 적에는 그와 같지 않은가? 그것은 옳지 않으니, 그러므로 응당 자세하게 관찰해야 한다.
다시 제 모양인 경계의 눈 인식이 아니며 빛깔 제 모양인 경계의 착함이 아니니 그러므로 눈 인식이 착함을 반연하는 것은 있지 않다.
어찌하여 눈 인식이 무기(無記)를 반연하는가?
어떤 이는 “쓸 만한 눈의 인식에 착한 마음과 착하지 않은 마음이 일어나나니, 그 몸의 교법과 그 밖의 빛깔 처소의 인연을 제외한 것을 눈 인식이 무기를 반연함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문] 낱낱이 처소가 있지 않으니,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닿임에 머물러서 그 생기는 처소를 관찰해야 한다.
다시 빛깔은 제 모양 경계이고, 눈 인식[眼識]은 빛깔의 제 모양이 아니며, 착함과 착함이 아님이니, 그러므로 일체 눈 인식은 무기를 반연한다. 선(善)이 눈 인식을 반연함과 불선(不善)이 무기를 반연하는 그 반연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느냐 하면 그것 역시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문] 만일 불선과 무기의 마음이 몸과 교법의 서로 비슷함을 일으킨다면 눈 인식은 차이가 있지 않나니, 좋아하는 것으로써 인식이 있는 제 모양을 짓지 않기 때문이다. 푸름에 반연하는 마음과 심소념법은 푸른 것이 뜻에 좋아하여 갈마들임이 되는데, 그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어떤 이는 “푸른 것을 인식하며 기뻐하는 인식과 푸른 것을 느끼매 기뻐하는 느낌의 생각이 마음의 생각을 안다”고 말했다.
[문] 하나와 둘이 함께 서로 상응하는가?
어떤 이는 “하나의 인식이 둘과 더불어 상응함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시 눈 인식과 푸른 제 모양이 회전하는 느낌과 느낌ㆍ기쁨ㆍ참음은 이 명수(名數) 따위로 만들어진 것이니, 마음도 역시 그와 같다.
다시 그와 같이 말한 것은 하나의 인식이 둘과 더불어 상응함이니, 그러므로 고와 같은 것은 식(識)의 제 성품이 아니다. ‘나’ 하나인 성품, 제 성품은 ‘나’의 제 성품이 아니니, 그러므로 내가 없다. 이 둘은 더러움이 있으니 그러므로 하나인 식이다. 푸른 것이 잘 성취되매 마음으로 조작하고 뜻으로 조작하나니, 그러므로 이 일은 상응하지 않는다. 그가 혹 기뻐함이 있기도 하고 혹 기뻐함이 없기도 하고 또한 기뻐함이 없지 않기도 하나니, 그러므로 혹 기쁨이 있고 혹 기쁨이 없고 혹 기쁨이 있지도 않고 혹 기쁨이 없지도 않으니, 그러므로 이 사실은 상응함이 아니다.
자못 마음이 세 때[時]에 머무르는가?
[답] 아니다. 왜냐 하면 마음은 무너짐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 때에도 무너지지 않고 영원히 다시 무너지지도 않나니, 그러므로 마음은 공(空)하다. 만일 마음이 더하거나 머무름이 있다면 그 인연에는 약간의 모양이 있을 것이며 그 위에 다시 3연(緣)이 있을 것이다. 만일 마음이 세 번째 때에 머무른다면 푸름ㆍ노랑ㆍ붉은 것들이 제 빛깔 모양이 없을 것이며, 빛깔 모양이 있어도 또한 증감이 없고 또한 희망이 없을 것이니 그러므로 마음은 허공이다.
어떤 이는 “마음이 증가하여 머무른다면 혹시 기뻐하여 도를 수행하더라도 그것이 미묘함이 아니니, 그러므로 마음은 허공이다”라고 한다.
어떤 이는 “만일 마음이 세 때에 짓는다고 하면 혹 나쁜 때의 희망하는 경계를 만나면 곧 희망하는 경계가 생길 것이다. 과거의 희망하는 경계와 두 희망하는 경계는 끝장낼 수 없나니, 그러므로 마음은 빈 허공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만일 마음이 자연히 저 세 때에 머무른다면 처음과 두 번째 때가 지나면 곧 증감이 있을 것이며 증감하여 남음이 있을 것이니, 그러므로 마음은 빈 허공이다”라고 말했다.
만일 증감이 없는 중에 끝장이 난다면 또한 허공이니, 그러므로 영원히 다시 무너지지 않는다. 만일 그가 스스로 느껴 알지 못한다면 저 세 때가 무너질 것이다.왜냐 하면 그가 스스로 느껴 알면 처음 때가 곧 무너질 것이니 그러므로 마음은 허공이다.
다시 만일 마음이 세 때의 중간심(中間心)에 머무른다면 중간심은 중간과 상응하여 마음이 상응함에 머무르고 마음이 상응함에 머무르니 또한 허공이다.
중간에 상응하여 머무르지 않으며 중간이 공(空) 아닌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마음은 허공이다.
무슨 까닭으로 마음을 허공이라 말하면서 물질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것 역시 말할 바로서 위의 게송에서 역시 말했다. 소리가 빛깔의 원인이고 생명 따위에 회전 있는 것이 있지 않다.
어떤 이는 “만일 물질이 허공이라면 머물러도 머무름이 있지 않고 생기는 곳에서도 곧 거기서 무너지고 거기에 미묘함이 있지 않을 것이니, 그러므로 최상의 물질이 머무른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물질도 또한 허공인 것이 마음과 같다. 왜냐 하면 만일 물질이 허공이 아니라면 사랑에서 생긴 물질이 머무르는데 성냄이 생기면 성냄이 물질을 낼 것이다. 그러므로 일시적인 공(空)에는 곧 물질이 있지 않고 그것이 미묘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물질이 허공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만일 물질이 증가하여 머무른다면 목숨이 마칠 적에 마음이 물질인 중음(中陰)을 내고 마음이 곧 회전함이 있나니, 이는 미묘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물질은 빈 허공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만일 물질이 저절로 세 때이거나 혹 두 번째 때라면 때[時]가 증가함이 있으면 더욱 증가함이 있을 것이요, 만일 처음 증가할 때나 그 다음에 증가할 때에는 옮겨 더욱 머무를 것이다. 만을 증가하는 공(空)이 없다면 영원히 무너지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그가 스스로 안다면 세 때가 무너질 것이다. 왜냐 하면 곧 그가 스스로 알면 처음 때[時]가 무너진다. 그러므로 물질이 허공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만일 물질이 증가하여 머무른다면 중간과 상응하여 머무를 것이다. 만일 중간과 상응하여 머무른다면 처음 때에도 또한 중간과 상응하여 머무를 것이다. 만일 중간과 상응하여 머무르지 아니한다면 상응함이 곧 허공이 아니고 중간과 상응하여 머무름이 아니며 상응함이 허공 아님이 아니리니, 그러므로 물질은 빈 허공이다.
생각[想]과 느낌[痛]의 두 글자가 있으며
범지(梵志)의 더러운 뜻 마음씨와
눈으로 경계의 푸른 느낌이며
거만한 성질과 또한 허공 그것이다.
말한 바와 관찰한 바와 같이 저것을 보는 것이 곧 눈의 아는 것이라고 하면, 이 식(識)은 어찌하여 눈이 본 것을 식이 인식하는가?
어떤 이는 “눈으로 물질을 보아 그 경계를 포섭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눈에 의하여 인식을 내나니, 눈으로 물질을 보면 식이 인연이 되어 그와 같이 아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눈으로 보는 것이 있지 않다. 설령 본다면 나아가서는 눈만 있으면 곧 볼 것이나 식 따위가 생겨야만 비로소 그와 같이 아나니, 그러므로 눈은 보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눈은 보는 바가 없다. 설령 본다면 나아가서는 물질에 두 모양이 있을 것이다. 눈은 비추는 것만 있나니, 일체 보는 것은 일체 보는 인연이 아니다. 그러므로 눈은 보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 눈은 보는 바가 없고 식(識)은 아는 바가 없다”고 말했다.
다시 눈은 빛깔에 반연하여 눈의 인식을 내나니 저 본다는 생각과 보는 작용을 하는 것은 식에 의해 알 수 있다. 세존께서도 역시 그러한 말씀을 하셨다.
다시 눈은 보는 바가 없다. 설령 눈이 본다면 귀가 들을 바를 코가 냄새를 맡을 것이니, 그러므로 2근(根)의 내용만이 곧 포섭하는 바가 있다. 그러므로 눈은 보는 바가 없다.
보는 것과 인식함이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어떤 이는 “눈은 보는 것만 있고 식은 아는 것만 있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보아 비추는 것은 눈에 해당하고 경계는 곧 식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그 차별이 있지 않다. 보는 것과 인식함이 다름이 있지 아니하여 그것이 곧 동일한 내용이니, 이는 세존께서 가르치시는 말씀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이러한 처소에 보는 것이 다르고 인식하는 것이 달라서 둘 다 함께 같지 아니하여 그를 보고 그를 인식한다. 설령 보는 것과 같이 그 밖의 인식이 같다면 이 눈과 이 인식이 차별이 있지 않을 것이다. 설령 눈이 경계이고 식이 또한 경계라면, 눈으로는 물질을 보나 식은 경계를 섭취할 수단이 없을 것이지만 이 사실은 그렇지 않나니, 그러므로 마땅히 그를 버려야 한다.
눈이 물질을 반연하매 눈의 인식이 생기나니, 저 눈의 인식이 물질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은 아니다. 무슨 까닭으로 저 눈을 식이라고 말하는가?
물질 인식이 아니니, 마땅히 방편으로 말한 것으로서 취건도(聚揵度)의 모든 내입(內入)에 의한 것과 같다.
어떤 이는 “눈의 인식으로 눈을 아는 것을 눈의 인식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거기에는 인식이 없다”고 말했다.
다시 눈이 빛깔에 반연하여 눈 인식을 내나니, 거기에서 10세속(世俗)이라는 생각을 내는 것을 눈 인식이라 말한다. 세존께서도 또한 그러한 말씀을 하셨다.
어떤 이는 “모든 감관과 몸 인식을 닦아야 하나니, 감관으로 말미암아 인식이 있다. 가지가지의 갈래와 한 갈래의 안에서 먹음과 사색으로 말미암아 수시로 제 성품이 모든 감관을 조작하나니, 마땅히 몸 인식[身識]이라 말해야 하며 무색계에 상응하는 모든 심소념법과 같다”고 말했다.
색계는 미묘한데, 높고 낮음과 추하고 미세한 그러한 것들을 생각하고서 어찌하여 그가 무너지는 물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가?
어떤 이는 “거기에는 무너진다는 생각이 있지 않다. 그리고 저 물질은 없어지지 않았다. 설령 물질이 없어진다면 그를 무너진다는 생각이라 말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거기에 무너진다는 생각이 있기는 하나, 그는 물질이라는 생각으로 여기지 않는다. 만일 물질이라는 생각을 떠난 것을 떠났으면 무너지는 물질이라는 생각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다시 그는 무너지는 물질이라는 생각이 아니기에 그는 무색계정(無色界定)에 들어가지 않는다. 만일 무색계정에 들어 그 정을 성취한다면 그는 무너지는 물질이라는 생각이라 말할 것이다.
그와 같은 5식신(識身)은 각기 서로가 의지한 것임을 알지 못하거니와 어찌하여 의식(意識)도 서로 의지한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는가?
어떤 이는 “뜻이 의식에 의지함을 안다. 설령 뜻이 의식을 모른다면 곧 마음과 마음이 서로 보지 못함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자신의 모든 감관이 저 의식에 의지한 것임을 아는 그것은 곧 의식 경계이니 일체 법의 경계가 곧 의식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일체 신체에 두루한 4대(大)가 모두 의식에 의지한 것임을 아는 그것이 곧 의식 경계이다. 설령 알지 못한다면 이것 역시 느낌이 있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알지 못한다. 만일 의식으로써 안다면 곧 3취(聚)가 없을 것이니, 그것은 미묘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알지 못한다. 설령 안다면 곧 둘이 있을 것이니 그러므로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세존께서 또한 “두 인연으로 모든 식이 난다”고 말씀하셨다.
다시 다음으로 모든 감관은 곧 식에 의한다. 설령 의식이 서로 의지한 것을 스스로 안다면 그와 같은 의식에는 곧 무너짐이 있을 것이다.
다시 마음은 함께 생긴다. 그와 같은 4대를 마땅히 식신(識身)에 의지한다고 말해야 하나니, 그것은 의식 경계가 아니다. 6식신이 무너지지 않아서는 무기(無記) 마음인 심소념법에 들매 감관이 자라게 되고 4대가 자라나니, 당연히 얻지 못함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어떤 이는 “얻지 못함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무기인 마음과 심소념법으로써 모든 희망이 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문] 무기 심성(心性)이 회전하면 희망이 곧 무너지는가?
어떤 이는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니, 모든 감관을 살펴보건대 기뻐하는 마음을 지니는 이, 나쁜 마음을 지니는 이, 무기인 마음을 지니는 이가 있나니 그러므로 응당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이곳에 있는 바가 사라지는 무기 마음을 그가 곧 성취한다. 무기마음과 심소념법이 있으매 모든 감관과 4대(大)가 자라게 된가”고 말했다.
우리들에게 사라지는 무기 마음을 말하려고 하는가?
다시 온갖 마음과 물질이 불어나는데, 온갖 마음은 물질에 의하여 이리저리 서로 생김이 있으며, 나아가서는 눈 인식[眼識]이 모든 지어감[行]을 내나니 그는 미세하지 않다. 만일 저 생각을 초월하면 식신(識身)이 눈 인식을 일으키매 또한 구르지 않을 법이 없을 것이며, 모든 감관과 4대는 종자와 같다.
다시 기술과 모든 예능을 성취하며 위의(威儀)와 예절을 모두 이룬 위의심(威儀心)과 무기(無記)가 그와 같은 기술을 알 수가 있다. 무기인 심소념법에서 모든 감관과 4대가 불어나게 되는데, 만일 마음이 갑자기 어지러워지면 저 일체 마음이 해산(解散)되는가? 저 일체 마음이 갑자기 어지러워지는가?
어떤 이는 “만일 마음이 갑자기 어지러워지면 모든 마음이 해산된다. 가령마음이 해산되면 저 일체 마음은 갑자기 어지러워진다. 일체 마음으로 물듦도 역시 갑자기 어지러워지며 또한 해산된다. 저 갑자기 어지러워짐과 상응하는 그것은 곧 해산함이다”라고 말했다.
수심(愁心)인 불선(不善)이 있지 않고 삼매가 없는가?
어떤 이는 “일심(一心)에는 산란하거나 흩어짐이 있지 않으며, 뜻도 역시 산란함과 흩어짐이 없다”고 말했다.
마음이 갑자기 어지러워져도 해산되지 않기도 하는가? 마음에 있는 어떤 인연을 뜻이 껴잡아 지니는 것이 있어서 마음이 해산되면서도 어지러워지지 않는가? 의식은 무수한 인연을 또한 껴잡은 것이 없으며 마음이 어지러워짐도 있고 해산됨도 있는가?
뜻과 성품은 무수한 인연을 또한 껴잡는 바가 있으며, 마음은 갑자기 어지러워지지 않고 해산되지 않으며 하나의 인연의 의식은 껴잡는 바가 없다.
[문] 만일 낱낱이 마음이 갑자기 어지러워지지 않고 해산되지 않는다면 그는 온갖 해산함 아닌가?
[답] 낱낱 마음이 뜻에 있지 않고 많은 뜻이 있는 것처럼 그와 같은 낱낱의 마음에 성냄도 해산됨이 있지 않고 또한 많음이 없다.
다시 만일 마음이 해산된다면 그는 온갖 마음에 산란함이 있는 것이 된다. 자못 마음이 산란해도 해산되는 것은 아니고 한 인연으로 회전하나니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한 길로 달려가는 것과 같다. 5식신(識身)에 반연할 적에 제 모양이 회전하나니, 그와 같은 상상(想像)과 의식(意識)이다.
어떤 이는 “저 회전함과 같아서 그는 상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만일 눈 인식[眼識]이 푸른 것을 인식하면 일정한 의식이 있어서 의식이 또한 푸른 상상의 인식일 것이니, 그를 눈 인식이라 말한다. 그를 의식(意識)이라고 말함은 옳지 못하다”고 말했다.
[문] 상상은 의식이니, 만일 눈이 증가한 것으로 그를 눈 인식이라고 한다면 뜻이 증가한 것이면 그것은 의식인가?
[답] 그러한 것이 있다. 그대의 눈이 증가하여 온갖 상응하는 푸른 것ㆍ누런 것ㆍ흰 것ㆍ검은 것에서 인식을 내고, 집착함도 또한 수승함과 같이 나의 눈도 증가하여 그 상응하는 눈 인식을 낸다. 만일 뜻이 증가하여 상응하는 것에서 생겼다면 그는 곧 의식이다.
어떤 이는 “만일 눈이 증가하거나, 상응하는 푸른 것ㆍ누런 것ㆍ흰 것ㆍ검은 것에서 인식을 내면 그것은 뜻이 증가함이니, 모든 상응하는 푸른 것ㆍ누런 것ㆍ흰 것ㆍ검은 것에서 인식을 내었으므로 상응과(相應果)는 무너졌다”고 말했다.
[문] 눈의 증상과(增上果)와 나아가서 상응하는 뜻을 내는 증상과 그 중에서 그 과(果)가 무너지더라도 눈 푸른 것ㆍ누런 것ㆍ흰 것ㆍ검은 것의 과(果)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대의 눈과 증가하는 온갖 상응하는 푸른 것ㆍ누런 것ㆍ흰 것ㆍ검은 것이 인식을 내는데, 눈의 증가함과 상응함이 아니라고 하려는가? 상응함은 무너지지 않나니, 그러므로 그것은 옳지 않다.
어떤 이는 “저 만든 것과 저 상상과 같지 않다”고 말했다.
[문] 누가 만든 상상인가? 만일 저 경계를 생각하면 그는 곧 반연이요, 만일 생각하지 않는다면 누가 만든 상상이 되는가? 만일 저 경계를 생각하면 그는 곧 인연이요 만일 기억하지 않는다면 곧 무엇인가?
어떤 이는 “저 회전함과 같지 않다. 설령 저 회전함과 같다 해도 곧 둘이며 많은 것이라니, 세존께서도 ‘두 인연으로써 모든 인식이 난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문] 많은 것이 두 인식을 내기도 하고 혹 하나나 둘이 모든 인식을 내기도 하는데, 그대와 같아서는 많음과 둘이 있는 셈이다. 그대는 뜻의 인연으로 생각과 느낌과 인식을 낸다고 하니, 그러므로 그대는 많음과 둘이 있는 셈이다.
어떤 이는 “저 회전함과 같지 않다. 가령 저 회전함과 같다면, 곧 무너지지 않는 받아들임[入]이 이미 정해져 있으리니, 그러므로 저 회전함과 같지 않다”고 말했다.
[문] 이미 얻은(阿羅漢의 경지) 중간에는 물질 받아들임[色入]과 법 받아들임[法入]이 있지 않다. 이미 얻은 중간에서는 눈 인식이 의식을 지니게 되어 지니어 무너지지 않게 한다는데, 그와 같은 온갖 받아들임과 중음(中陰) 중의 처음 마음은 어떤 물질에 의지하는가? 혹 중음이나, 혹 처음 죽음[死]에서 하는가?
어떤 이는 “막 죽어서 낳거나 모든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문] 현재 중음에서는 마음에 의하여 머무름이 아니겠는가?
[답] 마음은 주처가 없어서 마음이 생기면 곧 사라지고 사라지면 짓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그에 의지하는 바가 없고 사라져서 생기지 않는다.
[문] 다시 중음이 물질과 마음에 의지하는가? 염법(念法)도 역시 물질에 의하여 이리저리 서로 생기는가? 대래아라한(大箂阿羅漢) 같은 이는 최후 마음이 어디에 반연하는가?
어떤 이는 “뜻ㆍ목숨 따위의 목숨 생각에 스스로 반연하고 공해탈문(空解脫門)이 앞에 나타나게 되어 열반을 취하게 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온갖 지어감[行]이 바로 그의 반연이니, 온갖 지어감은 깨끗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고,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이 그 앞에 나타나게 되어 열반을 얻는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열반이 곧 그의 반연이니, 열반ㆍ생각 없앰ㆍ생각 없음의 해탈문이 앞에 나타나게 되어 열반을 얻는다”고 말했다.
다시 다음으로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아는 그것이 바로 그의 반연이니, 그는 마음이 무기(無記)여서 스스로 나라는 생각이 없고, 열반을 얻어 본래의 행(行)을 이미 등지고 영원히 사라져서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감관과 인연의 근본이며
뜻에 의해 더욱더 생각과
마음의 넓음, 뜻의 유행함이며
중음과 나한의 마음 그것이다.
존바수밀보살소집론 제2 심건도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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