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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5권
3. 변차별품(辯差別品)①
3.1. 22근(根)
[22근] 안근(眼根)ㆍ이근(耳根)ㆍ비근(鼻根)ㆍ설근(舌根)ㆍ신근(身根)ㆍ의근(意根)ㆍ 남근(男根)ㆍ여근(女根)ㆍ명근(命根)ㆍ 낙근(樂根)ㆍ고근(苦根)ㆍ희근(喜根)ㆍ우근(憂根)ㆍ호근(護根)ㆍ 신근(信根)ㆍ정진근(精進根)ㆍ염근(念根)ㆍ정근(定根)ㆍ혜근(慧根)ㆍ 미지근(未知根)ㆍ이지근(已知根)ㆍ무지근(無知根) |
1) 근의 본질과 작용
이와 같이 계(界)에 근거하여 이미 온갖 근(根)에 대해서도 열거하였다.
이제 여기서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세존께서는 어떠한 이유에서 ‘근’이라는 명칭을 별도로 설하시게 되었던 것인가?
내계(內界,즉 6근과 6식) 전부와 법계의 일부에 증상(增上, 탁월하고 뛰어남)이 존재하기 때문에 ‘근’이라는 명칭을 별도로 설하게 되었다. 즉 그러한 존재 중에는 증상력이 획득되기 때문이다.1) 비록 제법이 모두 ‘증상’의 뜻을 가질지라도 지극히 탁월하고 뛰어나기 때문에 바야흐로 ‘근’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엇이 무엇에 대해 지극히 탁월하고 뛰어나다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다섯 가지 근은 네 가지 일에 대해
네 가지의 근은 두 가지 일에 대해
다섯 가지와 여덟 가지의 근은 염오와 청정에 대해
각기 별도의 증상력이 있다.2)
논하여 말하겠다.
일체의 근은 모두 한 가지 일에 대해서만 지극히 탁월하고 뛰어난 증상력을 갖는 것이 아니다.
즉 안(眼) 등의 5근은 각기 네 가지 일에 대해 능히 증상의 작용이 있으니,
첫째는 소의신을 장엄하는 일[莊嚴身]이며,
둘째는 소의신을 이끌고 기르는 일[導養身]이며,
셋째는 식 등을 낳는 일[生識等]이며, 그리고
넷째는 공통되지 않은 일[不共事]이다.
여기서 ‘소의신을 장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5근 가운데 어느 한 근이라도 결여될 경우 몸이 누추해지기 때문이다.
‘소의신을 이끌고 기른다’라고 함은, 이를테면 보고 들음으로 인해 험난한 곳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며, 아울러 단식(段食,4식의 하나로, 분할되어 섭취되는 에너지. 곧 음식물)을 능히 수용할 수 있기 때문으로,3) 향ㆍ미ㆍ촉의 세 가지는 모두 단식을 이루는 것들이다.
이는 곧 어떤 게송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비유하자면 밝은 눈의 사람이
능히 현재의 험난한 곳을 피할 수 있듯이
세간에 대해 총명함이 있는 자는
능히 미래의 괴로움과 악을 떠나니
많이 들어[多聞] 능히 법을 알고
많이 들어 능히 죄를 떠나며
많이 들어 무의미한 것을 버리고
많이 들어 열반을 획득하라.
몸은 먹을 것[食]에 의해 지탱되고
목숨[命]은 먹을 것에 의탁하여 부지되며
먹고 난 연후에야 마음이
즐거워지고 편안하게 되는 것이리.
‘식 등을 낳는다’고 함은, 5식과 상응법(곧 심소)을 낳는 것을 말하니, 이는 소의(所依)인 근에 따라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통되지 않은 일’이라고 함은, 근은 각기 자신의 대상만을 취하는 것을 말하니,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등은 각기 그 대상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안근과 이근은 능히 생신(生身)과 법신(法身)을 수호함에 있어 순서대로 증상의 작용을 가지니,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가타(伽他,게송)가 바로 이를 증명한다”고 하였다.4)
또한 어떤 이는 설하기를,
“안근과 이근은 생신과 법신 두 가지를 능히 함께 수호하니, 어진이[善士]를 가까이 하고 정법(正法)을 청문하는데 안근과 이근은 각기 하나의 증상력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여근ㆍ남근ㆍ명근ㆍ의근은 각기 두 가지 일에 대해 증상의 작용이 있다. 바야흐로 여근과 남근의 두 가지 증상이란,
첫째는 유정의 다름[有情異, 구역어는 衆生差別]이고,
둘째는 분별의 다름[分別異, 구역어는 相貌差別]이다.
유정의 다름이란, 태초의 유정은 형태가 모두 같았지만 이 두 근이 생겨남에 따라 여자와 남자의 유형에 차별이 있게 된 것을 말한다.
분별의 다름이란, [이러한 두 근이 생겨남에 따라] 거동이나 말소리, 유방(乳房), 상투 등에 차별이 생겨나게 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남녀 사이에는] 용감하고 겁내는 것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유정의 다름이 있다고 하였고, 의복이나 치장하는데 차별이 있기 때문에 분별의 다름이 있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것(여근ㆍ남근)은 염오함과 청정함 두 가지에 대해 증상력이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일에 대해’라고 말하였다.
곧 불율의(不律儀,즉 惡戒를 말함)를 받아 지니고 무간업(無間業)을 일으키며, 선근을 끊기 때문에 염오함에 대해 증상력이 있다고 말한 것이며, 능히 율의를 받아 지니고, 성도(聖道)에 들어 그 과보를 획득하며, 아울러 이욕(離欲)하기 때문에 청정함에 대해 증상력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반택가(半擇迦,paṇḍāka) 등에는 이와 같은 일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5)
‘명근이 두 가지 일에 대해 증상력이 있다’고 함은,
이를테면 명근 즉 목숨으로 말미암아 온갖 근과, 근의 차별을 시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이 있어야 그러한 온갖 근도 있을 수 있으며, 이것이 없으면 그러한 온갖 근도 없기 때문이다.
혹은 중동분(衆同分)을 능히 상속하게 하고, 아울러 능히 유지하게 하기 때문이다.6)
무색계에서는 요컨대 명근이 있어야 비로소 태어날 곳이 결정되기 때문이다.7)
즉 그곳에서 선하거나 염오한 마음을 일으키고, 혹은 여타의 다른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근이 두 가지 일에 대해 증상력이 있다’고 함은,
이를테면 능히 후유(後有)를 상속하고, 또한 자유자재로 따라 행하기[自在隨行] 때문이다.
여기서 ‘능히 후유를 상속한다’고 함은, 세존께서 아난다에게 고하여 말씀하신 바와 같다.
즉 “식(識)이 만약 어머니 태속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정혈(精血,정액과 胎血)이 갈라람(羯羅藍)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성취할 수 없을 것인가? 성취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8)
그리고 ‘자유자재로 따라 행한다’고 함은 계경에서 말한 바와 같다.
마음이 능히 세간을 이끌며
마음이 능히 세간을 두루 섭수하니
이와 같이 마음 하나[一法]에
모든 것은 자유자재로 따라 행하는 것이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의근은 염오함과 청정함에 대해 증상력이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일에 대해 [증상력이 있다]’고 말한 것이니,
계경에서 ‘마음이 잡염(雜染)하기 때문에 유정이 잡염하고,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유정이 청정하다’고 설한 바와 같다.”고 하였다.
낙(樂) 등의 5수근(受根)과 신(信) 등의 여덟 가지 근은 염오함과 청정함에 대해 증상력이 있다.9) 여기서 낙 등의 다섯 가지가 염오함에 대해 증상력이 있다고 말한 것은, 그것이 탐 등의 수면(隨眠)의 소의가 되기 때문이다.10)
그런데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러한 5수근은 염오함과 청정함의 두 가지 모두에 대해 증상력이 있으니, 출리(出離)의 소의로서 탐기(貪嗜)하는 것이라고 [경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낙(樂)으로 인해 마음은 정(定)에 들게 되고,11) 고(苦)는 신(信)의 소의(所依)가 된다’12)는 등으로 계경에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13)
그리고 ‘신(信) 등의 여덟 가지 근은 청정함에 대해 증상력이 있다’고 함은, 계경에서
“나의 성스러운 제자들은 믿음[信]의 담장과 참호를 갖추고, 부지런함[勤]의 세력을 갖추고, 기억[念]의 방위(防衛)를 갖추고 마음이 안정[定]되어 해탈하리라. 지혜[慧]를 날카로운 칼로 삼고(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설한 바와 같다.
그리고 이 계경에서는 바로 뒤의 세 가지 근(즉 3무루근)도 포섭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도 청정함에 대해 결정적으로 증상력이 있는 것이다.14)
자신의 대상과 모든 대상을 요별하는데
증상력이 있어 6근을 설정한 것이며
신근에 따라 두 가지의 근을 설정함은
여성ㆍ남성의 증상력이 있기 때문이다.
동분(同分)을 지속시키고, 잡염과
청정의 증상력이 있기 때문에
명근과 5수근과 신(信) 등을 세워
‘근’이라고 하였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리라.
미지당지근과 이지근과
구지근도 역시 그러하니
각기 그 다음 다음의 도와
열반 등을 획득하는데 증상력이 있기 때문이다.
2) 근의 설정조건
만약 증상력을 갖기 때문에 ‘근’으로 설정한 것이라고 한다면, 수(受)ㆍ상(想)의 두 가지 법은 애(愛)ㆍ견품(見品)의 온갖 번뇌에 대해 증상의 작용이 있으므로 ‘상’ 역시 ‘수’와 마찬가지로 마땅히 ‘근’으로 설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온갖 번뇌도 선품(善品) 등을 능히 손상시키고 허무는데 증상의 작용이 있으므로 마땅히 ‘근’을 성취해야 할 것이다.
또한 ‘가장 뛰어난 것[最勝]’이기 때문에 온갖 근으로 설정하였다면, 일체법 중에서 열반이 가장 뛰어난 것인데 어떠한 이유에서 열반은 ‘근’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인가?
또한 가비라(迦比羅)는 입[語具]과 손과 발과 항문[大便處]도 역시 ‘근’으로 설정하였으니, 이는 말하고, 잡고, 걷고, 배설하는데 증상의 작용 있기 때문이다.15)
15) 가비라(迦比羅,Kapila)는 상캬(Saṁkhya,數論)학파의 개조.
그는 사고기관[意]과 다섯 가지 감각기관[知根]과 다섯 가지 행동기관[作根]등 11근(根)을 설정하였는데, 여기서 입 즉 발성기관 등은 생식기관[小便處]과 함께 다섯 가지 행동기관에 속하는 것이다.
생식기관은 쾌락의 뛰어난 작용을 갖는다.
이와 같은 따위의 일은 마땅히 ‘근’으로 설정해서는 안 될 것이니, 근으로 인정하려면 다음과 같은 특상을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마음의 소의가 되고, 이것의 차별이 되며
이것의 지속[住]이 되며, 이것의 잡염(雜染)이 되며
이것의 자량이 되며, 이것의 청정이 되니
이러한 근거[量]에 따라 ‘근’을 설정한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마음의 소의’란 안(眼) 등의 6근으로서, 이러한 내(內) 6처는 바로 유정의 근본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소의가 서로 차별되는 것은 여ㆍ남의 두 근에 의한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소의는 명근에 의해 일기(一期) 동안 지속한다.
또한 이러한 소의가 잡염(雜染)을 성취하게 되는 것은 5수근에 의해서이고,
이러한 소의가 청정함의 자량이 되는 것은 신(信) 등의 5근에 의해서이며,
이러한 소의가 청정함을 성취하게 되는 것은 뒤의 세 가지 [무루]근에 의해서이니,
이에 따라 근을 설정하는 일은 모두 끝나게 된다.
따라서 마땅히 여기에다 다시 ‘상’ 등을 설정하여 ‘근’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니, 모든 번뇌 중에서 애(愛)의 허물이 가장 무겁기 때문에 오로지 ‘수’를 설정하여 그것에 대한 ‘근’으로 삼았던 것이다.
여기서 ‘애의 허물이 무겁다’고 한 것은 계경에서 “애는 6처의 생인(生因)이 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상(想)이 견(見)번뇌의 생인(生因)은 아니다.16) 그 밖의 다른 원인이 전도된 소견을 낳고 나서 그릇되게 분별하는 것으로, ‘상’은 [바로 그 같은 전도된 소견을] 지니고 상속함으로써 올바른 대치(對治)를 떠나게 하여 끊을 수 없게 한다.
그래서 [계경에서는] 이 같은 ‘상’을 그것(‘견’)에 대해 원인이 된다고만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수’는 ‘애’의 원인이 될 뿐더러 두 가지(즉 ‘애’와 ‘견’의 원인) 모두와 통하는 것이다. 곧 ‘수’는 허물이 무거운 번뇌(즉 ‘애’)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두 가지 모두의 원인과 통하기 때문에 그것만을 따로 ‘근’으로 설정한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상’은 그 밖의 다른 법에 의해 영탈(映奪)되기 때문에 ‘근’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니, 이를테면 온갖 착한 생각[善想]은 올바른 혜[正慧]에 의해 영탈되며, 온갖 염오한 생각은 전도된 견해에 의해 영탈된다. 곧 증상력을 갖지 않기 때문에 ‘근’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온갖 번뇌도 역시 증상력을 갖지 않으니, 수(受)가 그러한 번뇌에 대한 증상력을 성취하기 때문에 오로지 ‘수’만을 그러한 번뇌에 대해 ‘근’으로 설정할 수 있는 것이다.
혹은 번뇌는 선품(善品)을 손상시키고, 낙과(樂果)를 허물어뜨리는 열등하고 비천하고 더러운 하등의 법인데, 어떻게 ‘근’으로 설정하겠는가?
‘근’이란 바로 세간의 증상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제법 가운데 비록 열반이 뛰어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온갖 근을 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근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니, 이는 마치 온갖 항아리(즉 근)도 깨트려 버리고 항아리 아닌 것(즉 非根)도 깨트려 버린 것과 같은 것이다.17)
또한 [가비라가 주장한] 입[語具,발성기관] 등도 역시 ‘근’이라고 이름할 수 없으니, 부정(不定)과 잡란(雜亂)과 확대 비약[太]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부정의 과실이라고 함은, 입의 무엇을 ‘말을 낳는 근[語根]’으로 설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능히 말소리[言音]을 발하는 것을 일컬어 ‘입’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혀[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심(尋)ㆍ사(伺) 등의 법과 아울러 능히 어업(語業)을 낳게 하는 온갖 바람[風]도 역시 ‘근’으로 설정해야 할 것이니, 그것들도 능히 말을 발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심ㆍ사 등이 입술ㆍ치아ㆍ잇몸ㆍ목구멍 등의 조건에 근거하여 말소리를 낳는 것으로, 다만 혀에 의지하여 낳아지는 것이 아니다. 즉 이것들도 [혀와] 다름없는 원인이기 때문에, 또한 심ㆍ사 등은 말소리를 낳는데 뛰어난 원인이 되기 때문에, 또한 손이나 겨드랑, 관현악기나 숨 등도 모두 능히 원인이 되어 말소리를 낳기 때문에 오로지 혀만을 말을 낳는 근으로 설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색을 요별하는 것도 역시 말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눈만을 단독으로 근으로 설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치상 필시 그렇지가 않다. 즉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인 자는 비록 색에 대한 설명을 들을지라도 청색 등의 차별상을 요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손이, ‘잡는 것’이라고 해서 마땅히 그것을 ‘근’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입 등도 역시 물건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발이, ‘가는 것’이라고 해서 마땅히 ‘근’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뱀이나 물고기 등은 발에 근거하지 않고서도 능히 갈 수 있기 때문이며,
대변을 보는 곳(즉 항문)이, 능히 ‘내버리는 것’이라고 해서 그것을 마땅히 ‘근’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입 등도 역시 능히 뱉어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잡란의 과실이란, 그러한 방식으로 근을 설정할 경우, 마땅히 그 작용이 뒤섞여 버린다는 것이다. 즉 입은 [발성의 작용을 가질 뿐 아니라] 능히 잡을 수도 있고, 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며, 손과 발은 다 같이 잡고 가는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18) [입 등도 역시 ‘근’이라고 말할 경우,] 이와 같은 등의 잡란의 과실이 있게 되는 것이다.
확대 비약의 과실이란, 그러한 방식으로 근을 설정할 경우, 그 수는 마땅히 무한정으로 늘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만약 맛을 보는 기관[舌根]으로서의 혀와 발성기관[語根]으로서의 혀가 서로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후각기관[鼻根]으로서의 코와 호흡기관[息根]으로의 코도 서로 다른 것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혀는 능히 말하는 것이고 코는 능히 숨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저것에 대해 조그마한 작용이라도 가질 것 같으면 응당 ‘근’으로 설정해야 할 것이니, 그럴 경우 목구멍이나 치아ㆍ 입술ㆍ위장 등도 삼키고ㆍ씹고ㆍ물고ㆍ지니는 등의 일에 대해 증상력을 갖기 때문에 마땅히 근으로 설정해야 하는 것이다.
혹은 일체의 원인은 모두 자신의 결과를 낳는 일에 대해 증상력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다 함께 근으로 설정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비라의 주장은 애들 장난과도 같은 것으로, 마땅히 그러한 입(발성기관) 등을 ‘근’으로 인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19)
혹은 유전(流轉)의 소의가 되고
아울러 그것을 낳고 지속하고 수용하므로
앞의 열네 가지를 건립하였으며
환멸(還滅)의 뒤의 것도 역시 그러하다.
즉 유전(流轉)은 식을 본질로 하지만, 6식은 6근을 소의로 삼아 일어나기 때문에 6근은 바로 유전의 소의이다.
또한 이러한 유전은 남여 두 근에 의해 생겨나며, 명근에 의해 지속하며, 5수근에 의해 대상을 영납 수용한다.
그리고 신(信) 등의 5근은 일체의 선법을 낳는 환멸(還滅)의 소의로서, 이러한 환멸은 미지당지근에 의해 생겨나며, 이지근에 의해 지속하며, 구지근에 의해 현법낙주를 수용한다.
근의 뜻과 그것을 설정하게 된 근거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3) 제근(諸根) 각각에 대한 해명
이제 마땅히 온갖 근 하나하나의 본질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안 등의 6근 내지 남근에 대해서는 앞의 품(「변본사품」)과 본 품 중에서 이미 그 특상을 분별하였으니, 이를테면
‘그러한 식의 근거가 되는 다섯 종류의 정색(淨色)을 이름하여 안 등의 5근이라 한다’고 하였으며,20)
‘여ㆍ남의 두 근은 소의신의 일부를 차별하여 설정한 것’이라고 하였다.
명근의 본질은 바로 불상응행(不相應行)이기 때문에 불상응법을 논설할 때(본론 제7권) 응당 분별하게 될 것이며,
신(信) 등의 본질은 바로 심소(心所)이기 때문에 심소법을 논설할 때(본론 제5권) 마땅히 분별하게 될 것이다.
[5수근]
그렇지만 낙(樂) 등의 5수근과 3무루근은 달리 분별하는 곳이 없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마땅히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몸이 즐겁지 않은 것을 고근(苦根)이라 이름하고
이것의 즐거움을 낙근(樂根)이라 이름하며
아울러 제3정려의 마음의 즐거움도 낙근이라 하지만
다른 처(處)에서는 이것을 희근(喜根)이라 이름하며
마음이 즐겁지 않은 것을 우근(憂根)이라 이름한다.
그 중간을 사근(捨根)이라 하는데, 두 가지의 구별은 없다.
견도와 수도와 무학도에서는
아홉 가지의 근으로써 세 가지 근을 설정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몸’이란 신수(身受)를 말하니, 색근(色根)에 의지하여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곧 신수란 바로 5식과 상응하는 수(受)를 말한다.
그리고 ‘즐겁지 않은 것[不悅]’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손상되어 고뇌스럽다[損惱]는 뜻이다. 즉 5식과 함께 일어나는 것으로, 촉(觸)을 영납(領納)하는 ‘수’ 가운데 능히 손상되어 고뇌스러운 것을 일컬어 고근(苦根)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본송에서] 말한 ‘즐거움’이란 바로 섭수하여 이익[攝益]된다는 뜻이다. 즉 5식과 함께 일어나는 것으로, 촉을 영납하는 ‘수’ 가운데 능히 섭수하여 이익되는 것을 일컬어 낙근(樂根)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초정려 중에서 세 가지 식과 구기하는 낙(樂)도 역시 여기에 포섭되니, 그 종류가 동일하기 때문이다.21)
그리고 제3정려의 의식과 구기(俱起)하는 ‘수’로서 능히 섭수하여 이익되는 것도 역시 낙근이라고 이름하니, 그러한 경지에서는 [의식 이외] 다른 식신(識身)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의식과 구기하는 즐거움[悅]을 낙근으로 설정하였다.22)
그런데 의식과 구생(俱生)하는 즐거움의 수[悅受]에는 두 가지가 있다.
즉 제3정려에 존재하는 그것을 설하여 낙수라고 이름하니, 거기서는 희탐(喜貪)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3정려를 제외한 그 아래 세 가지 지(욕계 미지정과 초ㆍ제2정려)의 그것을 설하여 희근(喜根)이라고 이름하니, 여기에는 희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23)
이러한 두 가지 마음의 즐거움은 섭수하여 이익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뜻이 동일한데, 행상에 어떠한 차이가 있어 희근과 낙근으로 나누게 된 것인가?
일어나는 행상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즉 만약 마음의 즐거움으로서 안정(安靜)되어 일어나는 것이면, 그것을 일컬어 낙근이라 하며,
만약 마음의 즐거움으로서 거칠게[麤動] 일어나는 것이면, 그것을 일컬어 희근이라고 한다.
혹은 또한 낙근의 섭수 이익은 그 힘이 뛰어나지만, 희근의 섭수 이익은 그렇지가 않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여러 성자들은 제3정려지의 낙을 ‘탐착되는 처소에 근거한 것[所耽著處]’이라고 설하였던 것이다.24)
그리고 의식과 구생하는 것으로, 능히 손상되어 고뇌스러운 ‘수’는 바로 마음이 즐겁지 않은 상태로, 이를 우근(憂根)이라 이름한다.
이와 같이 몸과 마음의 즐겁거나 즐겁지 않은 ‘수’에 따라 그 행상을 차별하여 네 가지 수근(受根)으로 설정하였다.
[본송에서] 설한 ‘그 중간을 사근(捨根)이라 하는데, 두 가지의 구별은 없다’고 함에 있어, ‘중간’이란 즐거운 것도 아니고 즐겁지 않은 것도 아니다[非悅非不悅]라는 뜻으로, 바로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수를 일컬어 사근(捨根)이라고 이름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신수(身受)와 심수(心受) 중 어떤 ‘수’인가?
이 같은 사수(捨受)는 마땅히 신수와 심수 모두에 통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괴로움[苦]과 즐거움[樂]은 각기 두 가지 근으로 나눈 데 반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不苦不樂]만은 오로지 하나의 근으로 설정한 것인가?
이러한 ‘수’는 몸에 있든 마음에 있든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 즉 마음이 괴롭거나 즐거우면 대개 조급하게 움직이며[躁動], 몸이 괴롭거나 즐거우면 바로 안주(安住)한다.
그러나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몸에 있든 마음에 있든 그 행상에 어떠한 차별도 없으니, 오로지 안주하기 때문이다.
또한 마음에 존재하는 괴로움이나 즐거움은 대개 분별로부터 생겨나지만,25) 몸에 존재하는 괴로움과 즐거움은 그렇지가 않으니, 오로지 대상의 힘[境力]에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라한 등에도 역시 이와 같은 수가 생겨나는 것이다.26)
그러나 사(捨)는 몸에 있든 마음에 있든 다 같이 무분별(無分別)로서,27) 처중(處中)의 행상으로서 저절로[任運] 일어난다.28) 또한 고수나 낙수는 몸에 있든, 마음에 있든 원수진 이나 친한 이에 대해 그 행상을 달리하지만,
불고불락수(즉 사수)는 몸에 있든, 마음에 있든 중용(中庸, 양쪽 모두 아닌 것, 즉 俱非의 뜻)의 대상에 대한 것이기에 행상의 어떠한 차이도 없다. 그래서 괴로움과 즐거움은 각기 두 가지 근으로 나누었던 것이지만,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은 오로지 하나의 근으로 설정한 것이다.
이미 낙 등의 온갖 수근(受根)의 본질에 대해 해석하였으니,
[3무루근]
이제 다음으로 3무루근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각기 개별적인 본질에 대해서는 설할 수가 없으며, 마땅히 세 가지 도(견도ㆍ수도ㆍ무학도)에 근거하고, 아홉 가지 근에 의거하여 전체적으로 설정해야만 한다.
여기서 아홉 가지 근이란 의근ㆍ낙근ㆍ희근ㆍ사근과 신(信) 등의 5근을 말하는데, 이러한 아홉 가지 근이 바로 세 가지 도에서 3무루근이 되는 것이다.
즉 견도에서는 의근 등의 아홉 가지 법이 바로 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의 본질이 되니, 일찍이 알지 못하였던 것을 마땅히 알게 되는 행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수도에서는 의근 등의 아홉 가지 법이 바로 두 번째 무루근인 이지근(已知根)의 본질이 되니, 그 밖의 나머지 수면(隨眠,즉 수혹)을 끊어 없애고자 하기 때문에 이미 안 경계대상[已知境]을 다시금 자꾸자꾸 요지(了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학도에서는 의근 등의 아홉 가지 법이 바로 세 번째 무루근인 구지근(具知根)의 본질이 되니, 스스로 이미 알았음을 알았기 때문에 ‘지(知)’라고 일컬은 것이며, 그러한 ‘지’를 자꾸 익힘으로써 그러한 존재[性,즉 구지근]를 성취하였기 때문에, 혹은 능히 그와 같이 이미 알았음을 아는 ‘지’를 획득하였기 때문에 ‘구지’라고 일컬은 것이다.
이 같이 아홉 가지 근이 상응하여 이러한 3무루근을 함께 성취하므로 의근 등의 여덟 가지도 역시 이러한 명칭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29)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근의 명칭은 비록 스물두 가지이지만, 제근의 본질은 다만 열일곱 가지일 뿐이니,
여ㆍ남의 두 근은 신근에 포섭되기 때문이며,
3무루근은 아홉 가지 근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근의 본질이 동일하지 않음에 대해 이미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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