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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너스> 미국 이야기
재미있는 미국 이야기
1. 미국의 독립전쟁
콜럼버스는 1492년 첫 항해를 시작으로 3회에 걸쳐 아메리카 대륙을 찾아가지만 죽을 때까지 인도(印度)인 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을 인도인이라는 의미로 인디언(Indian), 스페인어로 인디오(Indio)라고 불렀다. 1502년에는 또 다른 스페인의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풋치(Amerigo Vespucci)도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는데 이곳은 인도가 아닌 새로운 대륙(New World) 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America)라고 명명한다.
아메리카 대륙은 60여 개의 원주민(Native American) 부족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유럽 각지에서 이민자들이 몰려들게 되면서 원주민과 이민자들 간의 알력이 시작된다. 이민자들은 중에는 탐험가들이 있는가 하면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오는 사람, 범죄를 짓고 도망을 오는 사람 등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몰려오게 된다. 1620년에는 종교박해를 피해 오월의 꽃(Mayflower)이라는 배를 타고 영국으로부터 청교도(Protestant /Pilgrim Fathers)들도 종교의 자유를 찾아 몰려온다.
<1> 미 대륙 식민지(植民地) 쟁탈전
랄리 요새 / 랄리 경 / 길버트 경 / 엘리자베스 1세
아메리카 대륙도 처음에는 스페인의 세력권에 있었지만, 스페인의 국력이 약해지면서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지게 된다. 당시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I)이 통치하던 최전성기였는데 1578년 길버트 경(Sir Humphrey Gilbert)과 1584년에는 랄리경(Sir Walter Raleigh)에게 스페인에 맞서 미국에 식민지를 개발하게 하고 정착할 권리를 부여한다. 1585년 랄리 경은 버지니아를 탐험하고 평생 독신으로 보낸 엘리자베스 여왕을 기려서 처녀라는 의미의 버지니아(Virginia)라고 명명했다.
1607년 버지니아를 시작으로 식민지를 넓혀나가기 시작한 영국은 버지니아와 뉴잉글랜드, 프랑스는 캐나다, 네덜란드는 뉴욕 일대를 차지했고, 러시아는 알래스카를 차지했다.
그러나 당시 유럽 열강들 중에서 군사력으로 가장 우위를 점했던 영국은 종내는 당시 중남미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스페인 세력까지 몰아내고 미대륙 전체를 영국의 식민지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스페인은 아메리카대륙에서는 밀려나지만 중남미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고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차지한다.
미국은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 동쪽 대서양 해안을 따라 식민지가 13개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영국의 통치하에 있었다.
그 13개의 식민지를 열거해 보면, 북부지역이 뉴햄프셔(New Hampshire), 마세추세츠(Massachusetts), 로드아일랜드(Rhode Island), 코네티컷(Connecticut)이고 중부지역은 뉴욕(New York), 뉴저지(New Jersey),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 델라웨어(Delaware), 남부지역은 메릴랜드(Maryland), 버지니아(Virginia),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사우스캐롤라이나(South Carolina), 조지아(Georgia)였다.
<2>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
1754년부터 6년간 오하이오 강(Ohio River) 주변의 인디언 영토를 두고 영국과 프랑스가 쟁탈전을 벌인 전쟁인데 우여곡절 끝에 협상으로 전쟁은 끝난다.
그뿐만 아니라 1757년, 유럽에서 거의 모든 나라가 참전하여 7년간의 전쟁이 벌어지는데 포메라니아 전쟁(Pomeranian War), 또는 일명 7년 전쟁이라고 부른다.
포메라니아 전쟁(7년 전쟁)은 슐레지엔(Schlesien) 지방을 빼앗긴 오스트리아가 그곳을 되찾기 위해 프로이센과 벌인 전쟁을 말하는데 오스트리아-프랑스-작센-스웨덴-러시아가 동맹을 맺어 프로이센-하노버-영국의 연합군에 맞서 벌였던 유럽대륙 전체의 전쟁이었다.
영국은 미 대륙과 유럽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르느라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된다. 국가 경제가 어려워진 영국은 미국 식민지 주민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게 되고, 또 개척정신이 강한 이주민들이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서부로 가려고 하자 영국은 이 지역을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설정하고 나가지 못하게 법으로 금지하여 자주 분쟁이 발생하였다.
서부로 가는 미국인들이 현지의 원주민(인디언)들과 자주 분쟁이 발생하자 인디언 식민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영국은 군대를 파견하게 되는데 군사비용 일부를 식민지에 부과하여 심한 반발에 불을 지르는 꼴이 된다.
<3> 보스턴 차(茶) 사건
보스턴 차(茶) 사건 / 제1차 대륙회의
1770년 보스턴에서 시가행진을 하던 영국군과 시민이 충돌하여 보스턴 시민 5명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나 극도로 감정이 악화되는데, 1773년 독립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한다.
1773년 12월, 홍차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물자를 실은 영국 배가 보스턴 항구에 들어오자 인디언 복장으로 위장(僞裝)한 식민지 사람들이 배에 올라가 홍차를 바다에 던져버린 사건이다.
영국의 압력이 거세어지자 영국의 횡포에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식민지 대표들은 1774년 필라델피아에 모여서 대책을 의논하는데 이것이 제1차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이다.
이어 제2차 회의도 열려 논의사항을 영국에 건의하지만, 영국의회에서 건의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영국과의 완전 분리를 결정하게 된다.
<4> 미국 독립전쟁의 시작
1775년 4월, 영국 정규군과 미 민병대가 보스턴 근교 렉싱턴(Lexington)에서 충돌한 것이 첫 전투인데 양측이 큰 피해를 입었고, 자신감을 얻은 미 민병대들은 계속 공격하여 영국군을 곤경에 몰아넣는다.
결국, 영국의 윌리엄 하우(William Howe)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은 1776년 3월에 보스턴에서 철수한다.
1775년 6월, 제2차 대륙회의에서 아메리카 군(軍) 총사령관으로 워싱턴(George Washington)을 임명했으며, 임시정부 수립, 화폐 발행, 차관, 우편업무 개시, 해군 창설 등 일련의 중대한 결정을 한다.
1776년 7월 2일 식민지연합(United Colonies)의 각 주는 자유가 보장된 독립된 주(州)임을 선언하고 이틀 뒤 독립선언서(Declaration of Independence)를 채택한다. 1776년 7월 4일 독립을 선언하는데 이날이 바로 미국의 독립기념일(Independence Day)이다.
이 독립선언으로 영국과의 전투는 내란(內亂)이 아니라 정식으로 전쟁, 즉 선전포고가 된 것이다.
<5> 새러토가(Saratoga) 전투
트렌턴 전투 / 조지 워싱턴 / 호레이쇼 게이츠 / 존 버고인
미 민병대는 거듭된 패배에도 물러서지 않고 줄기차게 공격을 감행하자 1776년, 영국은 하우 제독을 파견하여 식민지 대표와 협상을 할 것을 제의한다. 그러나 미국 임시정부는 평화제의를 거부한다.
1776년 12월 24일, 미국의 워싱턴(George Washington) 장군은 트렌턴(Trenton)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 수비대를 공격하여 1,000여 명의 포로를 잡는 전과를 올린다.
또 프린스턴에서는 영국군 3개 군단을 격파하는데 이것이 독립군 최초의 승리로 ‘트렌턴·프린스턴 전투(Battle of Trenton Princeton)’라고 한다.
1777년, 미 독립군 호레이쇼 게이츠(Horatio Gates) 장군은 새러토가(Saratoga)의 베이스고지 전투에서 마침내 영국군 존 버고인(John Burgoyne)의 항복을 받아내고 협정을 체결한다.
<6> 해외 각국의 도움
유럽 여러나라들이 직·간접적으로 미 독립군을 돕는데, 가장 결정적인 도움을 준 나라가 프랑스이다.
1778년 프랑스는 해군 함대와 육군을 파견하고 영국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한다. 그 외에도 스페인과 네덜란드에서도 무기와 물자를 제공했고, 러시아, 프로이센, 덴마크는 무장 선박을 보내 군수물자 운송을 직접 도와주기도 하였다.
<7> 요크타운(Yorktown) 전투
1781년 영국군 장군 콘월리스(Cornwallis)는 요크타운 요새에 있었는데 미국의 워싱턴 장군과 프랑스 로샹보(Rochambeau) 백작의 연합군이 요새를 포위하여 꼼짝을 못하게 하였고, 영국의 토머스 그레이브스 제독이 이끄는 영국함대는 프랑스 함대에 밀려 뉴욕항으로 피신해야 했다. 결국, 24척의 프랑스 함대와 지상 연합군의 공격을 견지지 못해 콘월리스는 전 병력을 이끌고 나와 항복하였다.
<8>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 탄생
그리하여 1783년, 파리에서 종전 강화조약을 맺었고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정식으로 승인하였다.
미국은 1787년 헌법을 제정하고 1789년 정식으로 아메리카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 연방공화국(聯邦共和國)이 탄생하였다.
아메리카 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은 미 독립군 총사령관이었던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 선출된다.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날이 1776년 7월 4일이므로 7월 4일이 독립기념일이고, 아메리카 합중국이 정식으로 출범한 것은 1798년이다.
2. 미국의 남북전쟁
남북전쟁 / 흑인 노예시장 / 스토우 부인
미국의 남북전쟁은 미국이 북부와 남부로 갈려져 만 4년에 걸쳐 벌인 내전으로, 격전 끝에 결국 북부가 승리한 전쟁이며 수많은 사상자와 엄청난 재산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북부를 대표하는 공화당 출신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이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노예해방 문제가 남북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지만 각 지역 간의 이해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州) 정부와 연방(聯邦)정부의 갈등, 남-북은 물론 동-서 지역의 이익이 엇갈리는 등 수많은 갈등이 전쟁의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
1850년, 학교 교사이던 스토우(Harriet Beecher Stowe) 부인은 흑인 노예들의 참상을 그린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을 반 노예제 신문인 내셔널 에라(National Era)지에 연재하였다.
연재소설에서 흑인노예들의 참상이 부각되어 북부에서는 흑인 노예들에 대한 동정심이 커진 반면, 남부에서는 스토우 부인의 이름이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노예는 공업이 발달한 북부지방에서는 필요성이 크지 않았지만, 목화재배 등 농업이 주된 산업인 남부는 노예가 꼭 필요하였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연재를 끝내고 단행본으로 나오자 미국 각 지역에서 엄청난 호응을 얻은 것은 물론, 23개 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미국 흑인 노예들의 참상이 알려지게 되었다.
링컨 대통령이 인도적 차원에서 노예를 해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결국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어찌 보면 이 책이 남북전쟁의 발단이요, 북군 승리의 열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전쟁이 끝나고 에이브러햄 링컨은 스토우 부인을 백악관에 초대하여 식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스토우부인의 손을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가냘픈 손으로 수많은 노예들을 해방시켜 주셨군요!”
<2>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의 경과
섬터(Sumter) 요새 / 리(Lee) 장군 / 미드(Meade) 장군 / 그랜트(Grant) 장군
전쟁은 처음 앨라배마, 플로리다, 조지아,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사우스캐롤라이나, 텍사스 등 7개 주가 링컨이 이끄는 연방정부로부터 떨어져 나올 결의를 굳히고 1861년 2월 버지니아주 리치몬드를 본부로 하는 『미국 남부연합』을 조직하면서 구체화 되었다.
1861년 4월,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주도 찰스턴 항구에 있는 『섬터 요새(Fort Sumter)』에 식량을 보내려 하였는데 남부연합은 연방정부가 남부를 공격하려고 지원하는 것으로 보고 섬터 요새에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중립적 태도이던 아칸소,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 버지니아 등 4개 주가 남부연합에 가담하게 되어 총 11개 주가 되었는데, 버지니아주는 두 쪽으로 갈라져 서쪽 웨스트버지니아는 북부편이 되는 등 혼란이 가중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경제력이 든든하고 유능한 군인인 『리(Robert Edward Lee) 장군』이 버틴 남부가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위기에 처한 북부의 링컨 대통령은 국민 총동원령을 내리는 등 맞대응을 펼쳐 크고 작은 전투가 끊임없이 벌어졌다.
<3> 전쟁의 참상
마지막 최대의 격전지가 된 『게티즈버그(Gettysburg) 전투』가 1863년 7월 1부터 7월 3일까지 펜실베니아 남부 게티즈버그에서 벌어졌는데 7월 4일에는 「리 장군」이 이끄는 남부군이 밀려서 포토맥(Potomac) 강까지 후퇴하였다. 이때 계속 공격하였으면 남부군이 전멸하고 전쟁이 끝났을지도 모르는데 북부군을 이끌던 「미드(George Gordon Meade) 장군」은 평소에 친했던 「리 장군」과의 우정을 생각하여 포토맥강을 건너갈 수 있도록 공격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북군은 곧 총사령관이 「그랜트(Ulysses S. Grant) 장군」으로 바뀐다. 그러나 후일 미드장군은 제18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이 게티즈버그 전투로 남군은 2만 5천 명, 북군은 2만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고 하는데 결국 1865년 4월 12일 「그랜트장군」과 「리 장군」이 만나 정식으로 남군이 항복함으로써 결국 북군의 승리로 전쟁은 끝나게 된다. 이 4년간의 전투로 북부는 총동원 200만 명 가운데 36만여 명이 사망하였고, 남부는 70만 명 중에서 25만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11월, 미국 남북전쟁의 격전지였던 펜실베니아주 게티즈버그에서 링컨 대통령이 한 연설은 약 3분 정도의 짧은 연설이었지만 지금까지 미국에서는 가장 훌륭한 연설로, 가장 완벽한 글로 기억되고 있다. 1865년 불리하던 전쟁을 북부군의 승리로 이끌어낸 것도 이 연설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링컨의 연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For the People, Of the People. By the People)』는 민주주의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고 한다. 전쟁의 결과는 너무도 참혹하였다.
엄청난 인명과 재산의 피해 외에도, 전쟁이 끝나고 이틀 후인 1865년 4월 14일 링컨 대통령은 암살된다.
남부는 전쟁으로 인하여 대부분 황폐해졌는데 링컨이 약속했던 관대한 남부 재건안도 물거품이 되었으며 남부는 거의 북부의 식민지로 떨어지게 되었다. 특히 자부심이 강한 미국 남부 사람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굴욕이었고, 사사건건 무조건 북부를 반대하는 전통은 지금까지 남아있어 북부 정당인 공화당은 무조건 반대하고 남부 정당인 민주당을 무조건 지지하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미국여행의 추억<2005년>
나이아가라 폭포 / 스모키 국립공원 / 스모키산(미시시피주) / 링컨상(뉴욕) / 자유의 길(보스턴)
2005년 여름, 딸이 미국 남부 테네시주의 멤피스(Memphis)에 살고 있을 때 딸의 성화에 못 이겨 20박 21일간 미국여행 기회가 생겼다. 기왕 미국을 가는 김에 날짜를 넉넉히 잡아 미국 전역을 돌아보기로 하고, 집사람과 누님(69세)까지 모시고 셋이 떠난 여행이었다.
먼저 미국 서부(西部)를 7박 8일간 패키지여행을 했는데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라스베이거스, 요세미티 국립공원,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을 둘러보았고, 디즈니랜드, 유니버셜 스튜디오 등을 관광한 후 곧바로 시카고(Chicago)를 경유, 딸이 사는 테네시(Tennessee)주 멤피스(Memphis)로 갔다.
딸 가족은 오리건(Oregon)주에 살다가 사위가 박사과정을 하면서 1년 전(2004년) 이곳으로 왔다.
미시시피 강가에 있는 오래된 도시인 멤피스 시내를 두루 구경한 것은 물론 딸 부부는 모처럼 휴가를 내고 굉장히 먼 거리인 스모키(Smoky) 국립공원 관광을 시켜주었는데, 우선 공원 안의 작은 관광도시 갯링버그(Gatlinburg)로 갔다. 그곳에 예약해 둔, 기가 막히게 아름답고 쾌적한 환경의 산장(Sweet Home Tennessee)에서 3박을 하며 인근을 두루 구경할 수 있었다. 테네시주는 가로로 길게 누워있어서 서쪽 끝부분의 멤피스에서 동쪽 끝부분인 갯링버그까지는 승용차로 10시간 정도 걸린다.
그레이트 스모키 국립공원(Great Smoky Mountains)은 테네시주와 노스캐롤라이나주의 경계에 있는 국립공원으로 미국 중부와 동부의 경계를 이루는 애팔래치아(Appalachian Mountains) 산맥의 끝부분이다.
멤피스를 떠나서 테네시주 주도(州都)인 내쉬빌(Nashville)과 낙스빌(Knoxville)을 지나 갯링버그까지 엄청난 거리이고, 같은 주인데도 시차(時差)가 1시간이나 난다.
연중 통계를 보면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국립공원이 이곳 그레이트 스모키 국립공원(Great Smoky Mountains)이라 하는데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국립공원으로, 동식물 분포가 가장 다양하고 또 보존이 잘 된 공원이라고 한다. 거기다 사람들이 많이 사는 미국 동부에 위치하다보니...
계곡을 내려다보면 항상 운무(雲霧/Smoke)가 그윽이 끼어있고 까마득한 산봉우리들이 아물거린다.
이곳은 너무도 환경친화적으로 관리하여 그런지 야생 곰을 조심하라는 문구가 가는 곳마다 붙어있고 실외에 있는 음식 쓰레기통은 야생 곰이 열지 못하도록 튼튼한 자물쇠로 잠가 놓았다.
이곳에서 사흘 동안 산 정상까지의 트레킹, 산장 테라스에 설치한 핫터브(Hot Tub)에서 스모키 계곡을 바라보며 즐기는 따뜻한 목욕, 실내에 설치된 자쿠지(Jacuzzi/뜨거운 거품이 나는 일본식 욕조), 인근에 널려있는 미국 남북전쟁의 요새들을 둘러보니 인상 깊었고, 특히 공원 안에 있는 체로키인디언 보호구역(Cherokee Indian Reservation)을 둘러보노라니 미국 원주민(Native American:인디언)들의 슬픈 역사와 비참한 현실이 눈에 들어와 가슴이 쓰렸다. 멤피스로 돌아오면서 테네시주의 주도인 내쉬빌(Nashville)에 들러 이곳저곳 둘러보기도 하였다.
다시 동부로 훌쩍 떠나서는 뉴저지(New Jersey)에 사는 조카네에 짐을 풀고는 맨해튼(Manhattan)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센트럴 파크, 월스트리트를 비롯한 뉴욕의 심장부를 구경하였다. 자유의 여신상은 유람선을 타고 관광을 하였는데 관광이 끝나고, 점심시간에는 맨해튼에서 보석상을 하는 고등학교 시절의 단짝 친구도 만나서 회포를 풀었다.
다음에는 뉴욕에서 다시 패키지로 떠나는 2박 3일짜리 나이아가라폭포 버스투어를 하였다. 나이아가라폭포의 위용도 놀라웠지만, 캐나다로 건너가 몬트리올에서는 아이스바인(Ice Wine) 포도농장과 포도주 공장을 방문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이민자들의 초기 도시인 필라델피아(Philadelphia), 보스턴(Boston)도 둘러보았고, 뉴헤이븐(New Haven)에서는 하버드(Harvard), 예일(Yale), 캠브리지(Cambridge), 마사추세츠 공대(MIT) 등 미국의 유명대학을 둘러본 것도 즐거웠던 추억이다. 특히 보스턴(Boston)에서 걸어본 『자유의 길(Freedom Trail)』이 기억에 남는데 초기 이민자들의 희망과 활기에 찬 모습, 정착이 힘들어 좌절하는 모습들을 조각 작품으로 만들어 세워놓았는데 그 희망과 절망이 너무도 생생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워싱턴(Washington)에서는 맑고 수량이 풍부한 포토맥 강, 우뚝 솟은 워싱턴 기념탑, 국회의사당, 링컨기념관을 비롯한 볼거리들을 조카 가족과 같이 둘러보았다.
서부 패키지여행에서 가이드 녀석이 제법 우스갯소리를 잘 했는데 하나를 옮겨 본다.
칠순의 한국 할머니 한 분이 미국 구경을 하고 귀국했는데 친척들이 둘러앉아 여쭈어보았다고 한다.
‘할머니, 미국 가시니 좋던가요? 어디를 구경하셨소?’
‘말도 마라, 나는 미국 가서 벨끄 다 보구 왔다. 나이가 든 간나도 보구, 그래두 개년도 보구, 요새 미친년도 봤다.’
요게 뭔 소린고 하니 나이아가라 국립공원(나이가 든 간나),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그래두 개년), 요세미티 국립공원(요새 미친년)을 보고 왔다는 이야기였단다.
미국사람들에게 미국 내에서 제일 가고 싶은 관광지를 꼽아 보라고 했더니 1위가 그랜드캐니언이고 2위는 나이아가라폭포, 3위가 디즈니월드(플로리다 올랜도에 있는)였다고 한다.
3위가 좀 웃기는데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디즈니랜드와는 달리 플로리다(Florida)의 올랜도(Orlando)에 새로 꾸며진 디즈니월드는 규모도 훨씬 크고 어른들이 놀 것도 많다고 한다. 그래도 그렇지 성인들이 놀이공원이라니!! 그런데 정작 1년 동안 미국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국립공원은 테네시주에 있는, 우리가 갔던 스모키(Smoky) 국립공원이라고 한다.
미국은 한마디로 너무나 광활하고 풍요로운 나라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20여 일의 강행군과 수도 없이 비행기로 이동하는 것이 조금 지루하기도 했지만, 매우 뜻깊은 여행이었다.
할아버지, 같이 자고 싶어요.
미국 멤피스(테네시주)에 살고있는 외손녀는 올 8월에 만 6세가 되는데 9월 1일에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미국은 9월 입학이라 이미 지난 5월에 유치원을 졸업하였고 지금은 초등학교 예비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 딸 내외가 돌잡이를 집사람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바람에 1년여 우리가 맡아 길렀는데 아이가 워낙 영리하여 눈치도 빠를뿐더러 덩치도 또래에 비하여 크고, 모든 사물을 보고, 익히고, 이해하는 것이 무척 빠른 아이였다. 두 돌 지날 즈음, 딸 내외가 그런대로 미국에서의 생활이 안정되어 데리고 갔다. 한국에 있을 때 우리 부부는 외손녀가 행여 다치기라도 할세라 노심초사 보듬고 살았건만 엄마가 미국에서 데리러 왔을 때의 그 행동을 잊을 수가 없다.
일 년 동안 떨어져 살아서 행여 엄마를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을 했었는데 공항 출구로 엄마가 나오자 한참 빤히 쳐다보다가는 천방지축 뒤뚱거리며 달려가 안겨서는 목을 끌어안고 놓지를 않는 것이 아닌가? 차로 이동하면서도 잠시도 엄마 눈을 놓치지 않으려 하고, 집에 와서는 잠시 화장실이라도 들어가 눈에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고 행여 다시 떼어 놓고 가버릴까 하여 그런지 몹시도 불안한 모습을 내내 보이곤 해서 우리 부부는 한편으로 조금 서운한 감도 없지 않았었다.
재작년 8월 딸 부부가 조르기도 했고, 나도 아직 미국 구경을 하지 못해서 큰맘 먹고 집사람과 3주일 정도 미국여행을 했었다. 일주일 서부 관광은 패키지로 하고 집사람과 둘이 멤피스로 날아가 미시시피 강과 스모키국립공원을 관광했다. 테네시주는 그다지 큰 면적이 아닌데도 서쪽 끝부분의 멤피스에서 동쪽 끝부분의 스모키산이 있는 갯링버그(Gatlinberg)까지 승용차로 8시간이나 걸리고 시차도 한 시간이나 나서 시계를 돌려놓던 기억이 난다. 스모키 공원에서는 『Sweet Home Tennessee』라는 기막힌 시설의 산장에서 2박 3일을 꿈결 속에서 보냈고, 인근의 체로키인디언 보호구역을 둘러보고 서글픈 인디언의 역사와 인디언의 현실을 돌아보기도 하였다.
그때에도 몰라보게 성큼 자란 외손녀가 서툰 한국말로 우리 부부 앞에서 갖은 재롱을 피우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다음 우리 부부는 다시 동부로 떠나 캐나다 몬트리올에서부터 나이애가라를 거쳐 보스톤, 필라델피아, 뉴욕, 워싱턴까지 두루 돌아보고 돌아왔었다.
엊그제 딸과 통화를 하다가 손녀가 할아버지를 바꾸어 달란다고 하여 통화를 했는데 몇 마디 인사말을 주고받다가 뜬금없이 「할아버지, 같이 자고 싶어요.」라고 떠듬떠듬 말해서 첨엔 당황했었다.
‘응, 그래 할아버지도 지원이와 자고 싶어요.’하고는 대화를 몇 마디 더 주고받다가 전화를 끊었다.
끊고 나서야 외손녀의 말을 이해하고는 가슴이 아팠다. 한국에서 우리 부부가 키울 때 둘 사이에다 눕히고 껴안고 재울라치면 이쪽저쪽 번갈아 돌아누우면서 귀도 만지고, 볼도 싸쥐면서 잠들고는 했었다. 재작년 미국을 갔을 때 저녁 여덟 시만 되면 ‘지원아, 잘 시간이다’하면 ‘네’하고는 엄마 아빠한테 굿나잇 키스를 하고는 자기 방으로 자러 가고, 잠시 있다가 엄마가 가서 이불을 챙겨 덮어 주고는 불을 끄고.....
몇 가지 더 신기하던 것은 식당에 갔을 때 아이가 있으면 종업원은 즉시 보조 의자를 얹어 아이들이 편히 앉게 해 주고, 크레욘과 밑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서너 장 가져다주면 꼼짝 않고 앉아서 열심히 색칠하던 모습과 음식이 나올 때까지, 또 음식이 나온 후에도 절대로 떠들거나 돌아다니지도 않고 보채지 않던 4살배기 손녀딸의 모습이었다. 그런가 하면 교회 갈 때 입는 드레스와 구두와 모자는 항상 깨끗하게 보관하는데 이 옷만 입히면 걸음걸이부터 다소곳해지고, 교회 안에서는 절대로 떠들거나 돌아다니는 일이 없었다. 제법 지루할 한 시간 정도를 용케도 잘 참아내며 앉아있는 모습이 신통할 정도였다. 조금이라도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찡그리는 모습이라도 보이면 사정없는 사나운 눈길로 다그치는 모습이었다.
미국에서 가정교육이 가장 형편없기로는 빈민가의 흑인, 라틴아메리카인, 중국인, 그다음으로 한국인을 꼽고, 가정교육이 잘 이루어지는 것은 상류층의 백인, 일본인, 유럽인을 꼽는다고 한다.
사위는 엄격한 상류층 백인의 가정교육이 마음에 든 모양인지 가정교육을 엄격히 하는 모양이고, 딸도 그에 못지않은 것 같았다. 이따금 나에게 문제행동에 대한 교정방법을 전화로 물어오곤 하는데 내 대답은 한결같이 이런 식이다.
『지원이는 아직 어른이 아니고 아이다. 그런 것은 아이들 때 나타나는 공통현상으로 너도 어릴 때 똑같았다. 너의 어린 시절 모습이 궁금하거든 지금 네 딸을 보면 된다. 타이르고, 보듬어라.』 그러면
『에이, 그런 조언이 어디 있어요? 』 매양 이런 식이다.
실제로 손녀딸의 생긴 모습과 하는 행동이 딸의 어린 시절 모습과 너무도 똑같아서 집사람과 이따금 이야기하며 웃곤 한다.
「할아버지, 같이 자고 싶어요.」
손녀딸은 미국에서 4년여 사는 동안 미국 유아원(Daycare), 유치원(Kindergarten), 예비학교(pre-school)를 다니면서 미국 생활에 제법 익숙했겠건만 한국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서 귀와 볼을 만지면서 잠들던 그때를 잊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엄격한 미국 백인 상류층의 가정교육 방식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은 모양이다.
손녀딸은 유치원 때는 Asian Beauty로, 유치원 졸업식 때는 Genius라고, 또 예비학교에서는 Intelligent라는 평가를 받았다니 뛰어난 아이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어느 날 딸이 유치원에 아이를 데리러 갔더니 모여 앉았던 흑인, 백인 꼬마들이 일제히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소리쳐서 딸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지원아, 사랑해...! (지원이 2023년 현재: 텍사스 영재대학(Honors Collage 생명공학과 전액 장학생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