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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자량론 제3권
[보살의 복과 보리]
【문】
보살은 몇 가지 복으로써 능히 보리를 얻는가?
【답】
조금씩 조금씩 모은 복으로는
보리를 얻을 수 없다.
수미산 백 개 분량의 복을
모아야 능히 획득할 수 있다.
보리(菩提)란 말하자면 일체지지(一切智智)이다.
그 지혜는 응지(應知)와 동등하고, 응지는 허공(虛空)과 동등하며, 허공은 한계가 없기 때문에 응지 역시 한계가 없다.
한계가 있는 복으로 한계가 없는 지혜를 얻을 수 없으니, 이 때문에 조금씩 조금씩 모은 복으로는 보리를 얻을 수 없다.
어떻게 하든지 수미산 백 개 분량에 해당하는 복을 모아야 능히 얻을 수 있다.
보리자량론 제4권
【문】
만약 그렇다면 수미산 백 개 분량에 해당하는 복이 모이는 일은 없기 때문에 한 사람도 능히 보리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답】
비록 작은 복덕(福德)을 짓는다 하여도
이 또한 방편이 있으니
모든 중생의 처소에
응당 전부 반연을 일으켜야 한다.
만약 이 보살이 비록 작은 복을 짓는다고 하여도 방편이 있기 때문에 큰 복의 모임을 성취한다.
혹은 음식을 중생에게 베풀어 주기도 하고, 혹은 꽃ㆍ향(香)ㆍ만(鬘) 등을 여래의 형상에 받들어 바치는데, 그 모든 복덕이 모든 세계가 포섭하는 모든 중생의 처소에 전부 반연이 된다.
“나는 이 복으로써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게 하고자 합니다.
다시 이 복으로써 모든 중생과 더불어 그것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와 같은 등의 복을 모든 중생과 함께 보리로 회향하는데, 이것을 보살의 방편이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회향하면 그 복이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고, 한계가 없다.
그러므로 저 일체지지는 비록 한계가 없다 할지라도 되돌아서 이 모습의 한계 없는 복 때문에 능히 얻을 수 있다. 다시 다른 의미가 있다.
나에게 모든 움직임과 작용이 있는 것은
항상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함이다.
이와 같은 등으로 마음이 행한다면
누가 능히 그 복을 헤아리리오.
보살은 밤낮으로 항상 다음과 같은 마음의 행상[心行]을 일으킨다.
‘가령 나의 모든 움직임과 작용인 선한 몸ㆍ입ㆍ마음의 행위는 모든 중생을 제도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중생을 해탈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중생을 소생[穌息]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중생을 적멸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일으킨다. 또 중생으로 하여금 일체지지를 만족시키고 일체지지에 도달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가 이와 같은 대비를 구족하고 선교방편에 안주한다면, 그 모든 복의 모임을 모든 부처님을 제외한 어느 누가 능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복을 구족하면 능히 보리를 획득한다.
[보살의 복이 한량없는 까닭]
【문】
어찌하여 이 복이 다시 한량이 없는가?
【답】
자신의 친척과 몸과 목숨과
재물을 애착하지 않고
자재천(自在天)과 범천의 세계와
그 밖의 하늘나라를 탐내어 좋아하지 않고
또한 열반을 탐내지 않으니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직 중생만을 생각하니
그 복을 누가 능히 헤아리리오.
이 중에서 보살은 6도(度: 波羅蜜)의 수행을 행할 때 자기의 남자와 여자 및 친척, 혹은 금과 은 등의 재물, 혹은 자신의 수명, 혹은 신체의 사지와 관절, 혹은 구족된 몸, 혹은 몸과 마음의 즐거움, 혹은 하늘 사람의 자재함, 혹은 브라만의 몸을 갖는 하늘[梵身天], 혹은 무색천(無色天), 나아가 열반에 이르기까지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모두 애착하지 않으면서 오직 중생을 연민할 뿐 저버리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어린아이 같은 범부, 즉 눈 먼 장님처럼 지혜 없는 중생들로 하여금 삼계(三界)의 감옥을 벗어나서 항상 즐거운 열반의 두려움 없는 성[無畏城] 중에 머물게 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이 보살은 이롭고 즐거운 일을 행해서 모든 중생을 이유 없이 사랑하니, 그 모든 복덕을 어느 누가 능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또 게송에서 말한다.
의지[依]와 보호[護]가 없는 세간에
그 고뇌를 구호하려고
이와 같은 마음의 행을 일으키니,
그 복을 누가 능히 헤아리리오.
이 보살은 항상 대비로써 다음과 같이 생각을 한다.
‘지금 이 세간에는 구제함도 없고 보호함도 없어서 두루 6취(趣)를 다니면서 세 가지 괴로움[三苦]의 불 속으로 들어가며, 귀의할 곳이 없어서 이리저리 치달리며, 몸과 마음의 모든 질병 때문에 항상 고뇌한다. 의지하고 보호할 곳이 없는 자에게 나는 마땅히 의지할 곳이 되어서 그들의 몸과 마음으로 감수하는 모든 고뇌를 구제해야 한다.’
이러한 마음의 행을 일으키는 모든 복덕을 어느 누가 능히 헤아릴 수 있는가?
지도(智度)를 익혀서 상응하는 것이
우유(牛乳)를 당겨 짜는 동안이나
한 달[一月]과 다시 여러 달[多月]이 되면
그 복을 누가 능히 헤아리리오.
이 반야바라밀은 능히 모든 부처님과 보살을 낳고 또 모든 부처님 법과 보살 법을 성취한다.
보살이 만약 우유를 당겨 짜는 동안 사유하고 수습(修習)하면 그 복의 모임도 오히려 한량이 없는데, 하물며 하룻밤ㆍ이틀 밤ㆍ사흘 밤 나아가 이레 밤ㆍ반 달ㆍ한 달이나 다시 여러 달 동안 수습하여 상응하는 모든 복의 모임을 어느 누가 능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부처님께서 찬탄하시는 깊은 경전을
스스로 읽고 또한 타인에게 가르치며
또 그를 위하여 분별하여 말하면
이것을 복덕의 모임이라고 이름한다.
매우 깊다는 것[甚深]은 매우 깊은 경전을 말한다. 공(空)과 상응하여 세간을 벗어나는 것, 그것이 매우 깊은 것이다. 또한 연기하여 생하는 것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연기하여 생함이 곧 법이며, 법은 곧 여래의 몸[如來身]이다. 저 여래의 몸과 상응하는 것이 매우 깊은 경전으로서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찬탄하시는 바이다.
혹은 경전을 스스로 읽거나 혹은 타인으로 하여금 읽게 하거나 혹은 타인을 위하여 해설하면서도 바라는 마음이 없으니, 단지 여래의 몸이 사라지지 않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여래의 몸은 곧 법의 몸[法身]이니, 영구히 머무르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복을 누가 능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한량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보리를 위하여 발심(發心)하게 하면
복의 창고[福藏]가 다시 증대하고 수승해져
마땅히 부동지(不動地)를 얻으리라.
여기에 있는 선교방편을 구족한 보살은 먼저 4섭사(攝事)로써 모든 중생을 거두고, 그 중생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인 것을 알고 난 뒤에는 가르침으로 보리심을 발생하게 한다.
이와 같이 선교방편을 구족한 보살은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보리심을 발생하게 하는데, 그 모든 복을 능히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한량이 없기 때문이다.
또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보리심을 발생하게 하기 때문에 복의 창고가 다시 증대하고 수승해진다. 복의 창고라고 말하는 것은 복이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능히 다함없음에 도달하기 때문에 다할 수 없는 것이다. 부동지(不動地)라는 것은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부동지라고 이름한다.
이 중에서 보살은 타인으로 하여금 보리심을 발생하게 하기 때문에 세세생생 보리심이 움직이지 않고 소실하지 않으면서도 타인으로 하여금 보리심을 발생하게 하기 때문에 이 마음이 곧 부동지의 원인이 된다.
부처님께서 굴리시는
가장 수승한 법의 바퀴[法輪]를 따라 굴리며
모든 악한 해침[惡刺]을 적멸(寂滅)시키는
이것이 보살의 복의 창고[福藏]이다.
부처님 세존께서 바라나성(婆囉奈城: Bārānasi)의 선인(仙人)이 거처하는 사슴 동산[鹿林]에서 법의 바퀴를 굴리신 것처럼,
그 가장 수승한 법의 바퀴를 수순하여 굴리는 것을 또한 복의 창고로 삼는다. 법의 바퀴를 수순하여 굴리는 이러한 것에 세 가지 인연이 있다.
말하자면 여래께서 설하신 매우 깊은 경전에서 공과 상응하여 세간을 벗어나는 것인데, 혹은 지니고, 혹은 말하고, 또 법에 수순하여 법을 행하고, 혹은 이와 같은 등등의 경전을 지니어 유실하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첫 번째 법의 바퀴를 수순하여 굴리는 것이다.
근기(根器) 있는 중생을 위하여 (경전을) 분별하여 연설하는 것이 두 번째 법의 바퀴를 수순하여 굴리는 것이다.
저 경전에서 설한 것처럼 법에 의거하여 수행하는 것이 세 번째 법의 바퀴를 수순하여 굴리는 것이다.
‘모든 악한 해침을 적멸시킨다’는 것을 말해 보자.
불교(佛敎)에 대한 악한 해침은 외도(外道)의 삿된 견해 및 악마(惡魔)가 욕계(欲界)에서 자재하여 해탈을 증오하는 것이다.
만약 사부대중[四衆] 속에서 어떤 이단의 사람이 법이 아닌 것을 법이라고 말하고, 계율이 아닌 것을 계율이라고 말하고, 스승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스승의 가르침이라고 말하면, 이것이 불교 안의 악한 해침이다.
마땅히 법에 따라 그것들을 꺾어 항복시키고 교만을 깨뜨리고 견해를 부수어서 법이 치성하게 타오르게 해야 한다.
이것을 모든 악한 해침을 적멸시킨다고 이름한다.
악한 해침을 적멸시키기 때문에 보살의 복의 창고라고 이름한다.
중생을 이롭고 즐겁게 하기 위하여
지옥의 큰 괴로움을 인내하거니
하물며 그 밖의 작은 괴로움이랴.
보리는 오른손[右手]에 있도다.
가령 보살은 견고한 갑옷을 걸치고 항상 중생을 이롭고 즐겁게 하기 위하여 근면하게 정진하는 마음을 발한다.
한 중생을 해탈시키려 하기 때문에 비록 아비지대지옥(阿毘至大地獄) 속에 머물면서 겁(劫)이 지나도록 괴로운 고통을 받아도 감내하며 흔들리지 않는데, 하물며 그 밖의 작은 괴로움쯤이랴. 보살이 능히 이와 같은 등의 괴로움을 인내하면, 마땅히 보리가 오른손 안에 머무는 것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작용을 일으켜도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오직 중생을 이롭고 즐겁게 함이니,
모두가 대비(大悲)를 말미암기 때문에
보리는 오른손 안에 있도다.
보살이 일으키는 온갖 작용으로 보시 등은 대비를 말미암기 때문에 오직 중생을 이롭고 즐겁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중생으로 하여금 열반을 얻게 하려고 끝내 자신에게는 미미한 즐거운 일조차 하지 않으니, 그 또한 대비자(大悲者)이다.
이와 같은 대인(大人)은 마땅히 보리가 그 오른손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혜로 희론(戱論)을 여의고
정진으로 게으름을 여의며
베풀어 보시하여 인색함을 여의면
보리가 오른손 안에 있도다.
[모든 바라밀을 다시 해석하는 까닭]
【문】
앞에서 이미 다나(陀那) 등 모든 바라밀을 해석하였다.
지금 다시 해석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답】
앞에서는 주로 수행하는 자를 위하여 해석하였고,
지금은 얻을 바 없는 인의 지혜가 빛나는 자[無所得忍智光者]를 위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하나의 길의 모습[一道相]을 깨달아 알기 때문에 저 지혜는 희론을 멀리 여읜다.
멍에[軛]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저 정진은 게으름을 멀리 여읜다.
탐욕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저 보시는 인색함을 멀리 여읜다.
이와 같은 보살은 마땅히 보리가 그 오른손 안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의지함도 없고 지각도 없는 선정[定]과
원만해서 잡되지 않은 계(戒)와
좇아서 생겨남이 없는 인(忍)에는
보리가 오른손 안에 있도다.
만약 보살이 선나바라밀을 잘 성취하고 나면, 이 선정[定]은 삼계(三界)에 의지하지 않고 그 모습은 적정해서 사념과 지각이 없다.
또 원만한 시라(尸羅)는 잡됨이 없고 혼탁함이 없어서 보리로 회향해도 마멸되는 일이 없다.
또 반야바라밀을 잘 성취하고 나면 연기(緣起)하여 생하는 법 중에서 무생인(無生忍)에 안주한다. 그
리하여, 근본이 수승하기 때문에 퇴전하는 일이 없으니, 마땅히 보리가 그 오른손 안에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
[큰 복을 성취하는 방편]
【문】
수행으로 인(忍)을 얻은 보살이 모든 복전(福田)을 쌓아 모으고, 이 복의 모임이 능히 보리를 얻는다는 것을 이미 설명하였다.
어떻게 처음 발심한 보살이 모든 복전을 쌓아 모으고, 이 복의 모임이 능히 보리를 얻게 되는가?
[참회]
【답】
현재 시방(十方)에 머무시는
모든 정각(正覺)께
저는 그 분 앞에다
저의 선하지 않은 짓을 진술합니다.
만약 현재의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시방의 세간에서 장애되는 일이 없고, 본원(本願)의 힘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머무신다면, 이제 실증자(實證者)인 그분들 앞에다 모든 죄를 이렇게 털어 놓을 것이다.
“만약 제가 무시(無始)로부터 유전한 이래로 지난 세상과 현재까지 스스로 악한 업을 짓기도 하고, 혹은 타인에게 시키거나 혹은 따라 기뻐하면서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으로 몸ㆍ입ㆍ마음의 업을 일으켰다면, 저는 모두 진술하여 감히 덮어 두지 않을 것이고 전부 영원히 단절해서 끝내 다시는 짓지 않겠나이다.
[서원[
저 시방세계에서
만약 부처님께서 보리를 얻으셨는데
법을 연설하시지 않는다면
나는 법의 바퀴를 굴리시기를 청하리라.
만약 부처님 세존께서 큰 서원을 만족시켜서 보리수(菩提樹) 아래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증득하시고는 잠시 적정함에 안주하고자 세간을 위하여 법의 바퀴를 굴리시지 않으면,
나는 마땅히 저 부처님 세존께 불법의 바퀴를 굴리심으로서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을 안락하게 하고, 세간을 연민하여 대중을 위하고, 하늘나라와 인간을 이롭고 즐겁게 하실 것을 권청하겠나이다.
현재 시방세계에
계시는 모든 정각(正覺)께서
만약 생명의 활동[命行]을 버리고자 하시면
머리 숙여 예배하며 머물기를 권청해야 한다.
만약 부처님 세존께서 세간에 걸림 없이 시방에 계시면서 보리를 증득하고 법의 바퀴를 굴리어 바른 법에 안주하면서 마땅히 교화하여 제도시킬 중생을 교화하여 제도시키고 난 후에 생명의 활동을 버리고자 하시면,
나는 마땅히 저 부처님 세존께 머리 숙여 예배하면서 오랫동안 머무시면서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을 안락하게 하고, 세간을 연민하여 대중을 위하고, 하늘나라와 인간을 이롭고 즐겁게 하실 것을 권청하겠나이다.
[기뻐함]
가령 모든 중생들의
몸ㆍ입ㆍ마음으로부터 생겨나는
보시와 지계의 복(福)과
나아가 사유의 수행까지
성인 및 범부가
과거ㆍ현재ㆍ미래 세상에서
쌓아 모은 모든 복에 대하여
나는 모두 따라서 기뻐해야 한다.
혹은 모든 중생이 보시ㆍ지계ㆍ수행 등으로 짓는 복된 일, 즉 몸ㆍ입ㆍ마음으로부터 생겨난 것으로서 이미 모았고 현재 모으고 앞으로 모을 것과 성문ㆍ독각ㆍ모든 부처님ㆍ보살ㆍ모든 성인들 및 범부가 소유하는 모든 복에 대하여 나는 모두 따라서 기뻐하겠나이다.
이와 같이 선수자(先首者)ㆍ승주자(勝住者)ㆍ수이자(殊異者)ㆍ최상자(最上者)ㆍ승섭자(勝攝者)ㆍ미묘자(美妙者)ㆍ무상자(無上者)ㆍ무등자(無等者)ㆍ무등등자(無等等者)를 따라서 기뻐해야 하나니, 이와 같이 따라서 기뻐하는 것을 수희(隨喜)라고 이름합니다.
만약 나에게 있는 복을
모두 한 덩어리[一搏]로 삼아
모든 중생에게 회향하여
바른 깨달음을 얻게 할 것이다.
혹은 내가 무시로부터 유전한 이래 부처님ㆍ법ㆍ승가 및 개별적인 사람의 주변에서 소유한 복의 모음, 나아가 축생에게 한 덩어리의 음식을 베푼 것, 혹은 귀의하는 선근, 혹은 과오를 참회하는 선근, 혹은 권청하는 선근, 혹은 따라서 기뻐하는 선근, 이런 것들을 모두 헤아려 함께 한 덩어리로 삼습니다.
[회향]
그리고 나는 모든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보리로 회향하여 다 베풀어 주고, 이 선근으로써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증득하고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얻게 하겠나이다.
나는 이와 같이 허물을 참회하고
권청하고 복을 따라 기뻐해서
급기야 보리로 회향하니
모든 부처님과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혹은 내가 모든 중생을 위하여 보리로 회향하는 선근, 혹은 과오를 참회하는 선근, 혹은 법의 바퀴를 굴릴 것을 권청하는 선근, 혹은 장수(長壽)를 권청하는 선근, 혹은 따라서 기뻐하는 선근, 이런 것들을 모두 헤아려 한 덩어리로 하고 난 후에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보살이셨을 때 이미 회향하시고 장차 회향하시듯이
나 또한 이와 같이 모든 선근으로 보리에 회향하고, 이 회향의 선근으로 나와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마땅히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증득하게 하겠나이다.
나는 이제 다시 요약하여 설명하겠나이다.
나의 죄악(罪惡)을 말하여 참회하고
부처님께 청하고 복을 따라서 기뻐하며
보리에 회향하는 것이
가장 수승한 이[最勝]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자신이 지닌 죄악을 남김없이 모두 말해서 참회하고, 또 부처님께서 법의 바퀴를 굴리시면서 오래 머무시기를 권청하고, 모든 복을 따라서 기뻐하고, 복 등을 회향하겠나이다.
보리를 위하기 때문에 앞에서처럼 회향하겠나이다.
가장 수승한 분[最勝人]께서 말씀하신 바처럼 마찬가지로 회향하겠나이다.”
【문】
또 그 회향은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
오른쪽 무릎은 땅에 대고
한쪽 어깨에 상의(上衣)를 단정히 걸치고
낮과 밤 각각 세 때[三時]에
합장하며 이와 같이 한다.
마땅히 스스로 청정하게 하여 정결한 의복을 걸치고, 손과 발을 깨끗이 씻고, 군의(裙衣)를 원만하게 정리하고, 한쪽 어깨 위에다 위에 걸치는 옷을 정리하고 나서,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며 한 마음으로 분별하는 생각을 여의어야 한다.
혹은 여래의 탑이 있는 곳이나, 혹은 형상이 있는 곳이나, 혹은 허공에서 모든 부처님께서 앞에 머무시는 것처럼 반연한다.
이러한 생각을 한 후에 앞에서 설명한 했듯이 낮이나 밤 각각 세 때에 행한다.
한 때 행하여 짓는 복에
만약 형색(形色)이 있다면
항하사 수효의 대천(大千)도
또한 능히 수용하지 못하리.
저 설해진 여섯 때[六時]의 회향 중에서 만약 한 때 짓는 가운데 생기는 복덕을 분별한다면, 여실하게 보시는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는,
“그것에 만약 곡식 등이 모인 것처럼 형색이 있다면 이 복의 모임은 한량이 있기 때문에 비록 항가강의 모래수와 같은 큰 삼천세계가 그 한계를 다한다 해도 또한 수용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다.
그 회향의 복은 허공계(虛空界)와 동등한 회향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 때의 회향조차 오히려 이와 같은 복의 모임이 있는데, 하물며 여러 번의 회향이랴. 비록 처음 발심한 보살일지라도 회향하는 힘으로 말미암아 또한 큰 복을 성취하며, 다시 이와 같은 모양의 복이 모임으로써 점차 능히 보리를 얻게 된다.
[복의 사용을 보호하는 방편]
【문】
모든 보살이 큰 복을 성취하는 방편을 이미 설명하였다.
이제 복의 사용[福用]을 보호하고자 하면, 어떠한 방편이 있어야 하는가?
【답】저 처음 발심했던
모든 작은 보살[小菩薩]에 대하여
마땅히 존중하여 사랑하기를
마치 스승님이나 부모님처럼 해야 한다.
저 처음 발심한 보살이 만약 자신의 선근 및 자신을 보호하고자 한다면, 모든 처음 발심한 보살에 대하여 마치 일체지의 스승이신 세존과 자신을 낳으신 부모님처럼 마땅히 지극한 존중과 애경(愛敬)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이와 같이 처음 발심한 보살을 으뜸으로 삼고, 모든 보살에 대해서도 또한 마땅히 이와 같이 지극한 애경과 존중을 해야 한다.
만약 이것과 다르다면 곧 자신 및 선근이 모두 다 소멸하여 버린다. 세존께서 경전 가운데 일찍이 말씀하신 바와 같다.
“보살에게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 말고는 보살을 장애하고 또 선근을 소멸하여 버리는 다른 한 법도 나는 보지 못하였다.
만약 보살이 백 겁(百劫) 동안 선근을 쌓아 모았다고 하여도 보살에게 성내는 이러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모두 다 소멸하여 버린다.”
그러므로 모든 보살에 대하여 마치 교사(敎師)처럼 마땅히 존중해야 한다.
보살에게 비록 과오가 있어도
오히려 말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물며 사실이 아닌 일임에랴.
오직 여실하게 찬탄해야 한다.
만약 보살이 대승을 행하는 사람의 죄과(罪過)를 비방하여 악명(惡名)을 얻게 하면, 세세생생 소유한 선한 법이 모두 다 소멸하여 버리고 백법(白法)을 증장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보살들에게 비록 죄과가 있다 하여도 스스로 선근의 명[善根命]을 보호하기 위하여 마땅히 나타내어 말하지 말아야 한다.
하물며 사실이 아닌 일임에랴. 비유하면 왕의 죄[王罪]와 같으니, 경전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보살에게는 청정한 삶[活命]이 있을 뿐 비방할 것이 없다.”
그런데도 저 달마(達摩)비구는 그 악함을 망령되게 말했기 때문에 70겁 동안 지옥의 과보를 받고, 또 6만 번의 생애 동안 빈궁한 사람이 되고, 항상 장님ㆍ벙어리ㆍ문둥병ㆍ악성 종양을 받는다.
그러므로 보살의 처소에서 악함이 있든 악함이 없든 모두 말하지 말 것이며, 그에게 진실한 덕이 있다면 오직 칭찬해야 한다.
자신의 선근을 증장시키기 위함이고, 또한 그 밖의 사람에게 믿음을 생하게 하기 위함이다.
만약 사람이 부처가 되기를 발원해서
퇴전하지 않게 하고자 한다면
시현(示現)하고 또 치성(熾盛)하게 하고
또한 희열(喜悅)을 생하게 하여야 한다.
혹은 어떤 중생이 이미 보리를 구하고자 발원해서 오직 퇴전하지 않게 하고자 하였는데,
어리석고 성 잘 내고 탐욕 많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붕당(朋黨) 때문에 이와 같은 말을 한다.
“어찌하여 오랜 동안 보살의 어려운 수행을 행하는가?
저 열반의 즐거움은 평등하고 비슷하니 성문행(聲聞行)을 행하여 신속하게 열반을 획득하자.”
이것에 대해 나중에 마땅히 그 과보를 설명할 것이다.
만약 갖가지 비유로 부처님의 공덕을 나타내서 그 마음으로 들어가게 하면, 이것을 시현(示現)이라고 한다.
그로 하여금 모든 보살행을 구족하여 정진하게 하면, 이것을 치성(熾盛)이라고 한다.
정진을 다시 증장하여 신속하고 예리하게 하고자 해서 바른 깨달음의 공덕과 크게 신통한 일을 말하면, 이것을 희열(喜悅)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그로 하여금 보리심(菩提心)을 버리지 않게 한다.
아직 매우 깊은 경전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부처님 말씀[佛說]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만약 이와 같은 말을 하면
가장 괴로운 나쁜 과보를 받으리라.
‘매우 깊은 경전’이란 소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과 상응하여 한량없는 단견(斷見)과 상견(常見) 등의 치우친 견해를 제거하고, 자아[我]와 인간[人]과 중생(衆生)과 수자(壽者) 등의 자성(自性)을 소멸하며, 여래의 큰 신통과 희유한 공덕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경전과 율전에 대하여 아직 증득해 알지 못하면서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왜냐하면 부처님 세존께서
“만약 여래가 설한 경전을 비방하면 가장 괴로운 나쁜 과보를 받는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무간(無間) 등의 모든 죄를
전부 한 덩어리로 하여
앞의 두 가지 죄에 비교해도
몇 분의 일에도 능히 미치지 못한다.
세존께서는 불퇴륜경(不退輪經)에서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다섯 가지 업[五無間業]의 모든 죄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가령 삼천대천세계 속에서 모든 중생의 목숨을 끊는 죄의 과보, 혹은 항가강의 모래 수와 동등한 부처님 세존께서 멸도하시고 난 후에 존재하는 모든 지제(支提)를 파괴하거나 태우는 일, 혹은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의 법안(法眼)을 장애하는 죄의 과보 등 이와 같은 죄과를 모두 다 모아서 덩어리로 만든다고 하자.
가령 깊은 경전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집착을 일으켜서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고 말하거나, 또는 보살이 보리에 대한 서원을 일으키고 나서 보리심에서 물러나게 된다고 하자.
앞의 무간지옥에 떨어질 다섯 가지 죄를 모아서 이 두 가지 죄와 비교 하면 백 분의 일[百分]에도 미치지 못하고 또 천 분의 일[千分]에도 미치지 못하며, 나아가 수분(數分)ㆍ가라분(柯羅分: 털 하나의 백분의 일)ㆍ산분(算分)ㆍ비유분(譬喩分)ㆍ우파니사다분(優波尼沙陀分: 지극히 미세한 것)에도 또한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죄상(罪相) 때문에 자신과 자신의 선근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 두 가지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