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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밀해탈경 제3권
9. 성자미륵보살문품(聖者彌勒菩薩問品) ①, 대승의 사마타ㆍ비바사나
그때 성자 미륵보살마하살이 사마타(奢摩他)ㆍ비바사나(毘婆舍那)에 포섭되는 법의 모습[法相]에 의지하여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어떠한 법에 의지하시고, 어떠한 법에 주지(住持)하시며 대승에서 사마타ㆍ비바사나를 수행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미륵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미륵이여, 모든 법의 차별된 모습을 말하는 데 의지하며, 능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에 머문다.
미륵이여, 내가 말한 네 가지 관법(觀法)과 같이 보살은 그 네 가지 관법에 의지하여 대승의 사마타ㆍ비바사나를 수행해야 한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분별관(分別觀)이며,
둘째는 무분별관(無分別觀)이며,
셋째는 사별(事別)이며,
넷째는 소작성취(所作成就)이다.”
미륵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몇 가지 사마타관(奢摩他觀)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미륵이여, 오직 한 가지 사마타관만이 있으니, 이른바 무분별관이다.”
“세존이시여, 비바사나관(毘婆舍那觀)은 몇 가지가 됩니까?”
“미륵이여, 오직 한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차별관이다.”
“세존이시여, 이 두 가지 관법에 몇 가지 이름이 있습니까?”
“두 가지 있으니,
첫째는 사별(事別)이며,
둘째는 사성취(事成就)이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면 보살이 이 네 가지 법에 의지하여 사마타ㆍ비바사나를 수행하며, 사마타ㆍ비바사나를 잘 알게 됩니까?”
“미륵이여, 내가 모든 보살에게 말한 차별된 법상과 같으니,
이른바 수다라ㆍ기야(祇夜)ㆍ화가라(和伽羅)ㆍ나가타(那伽他)ㆍ우타나(憂陀那)ㆍ니타나(尼陀那)ㆍ아바타나(阿婆陀那)ㆍ이제우타가(伊帝優陀伽)ㆍ사다가(闍多伽)ㆍ비불략(毘弗略)ㆍ아부타단마(阿浮陀檀摩)ㆍ우바제사(憂婆提舍)이다.
미륵이여, 모든 보살은 이러한 수다라에 자세히 잘 듣고, 입은 항상 잘 외우고, 마음은 항상 잘 알고, 지혜는 항상 잘 관찰하고, 슬기는 항상 잘 깨쳐야 한다.
미륵이여, 모든 보살이 수다라에 대하여 잘 생각한 뒤에 비고 한가한 곳에 홀로 앉아서 관찰하고 안으로 항상 수순해야 하니,
이렇게 관찰하는 마음이 끊이지 않으면 그 보살은 몸의 즐거움과 마음의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미륵이여, 이것이 내가 말하는 보살 수행 사마타법이다.
저 보살이 몸과 마음의 즐거움을 얻은 뒤에는 몸과 마음의 즐거움에 의지하여 말한 법을 관찰하되, 아까와 같이 일체 법을 생각하고, 속마음의 삼매경계상[內心三昧境像]을 관찰하면 능히 모든 법은 생각을 여읜 줄 믿게 될 것이다.
미륵이여, 모든 보살이 이와 같이 삼매경계상을 관찰하면 가히 저 뜻을 알 것이며,
깨닫고 관찰하고 생각하여 참고[忍], 바라고[怖], 보고[見], 뜻[意]하면 지각(知覺)이 나타날 것이니
미륵이여, 이것이 내가 말한 보살의 비바사나를 수행함이다.
미륵이여, 모든 보살은 이와 같이 비바사나를 잘 알아야 한다.”
그때 성자 미륵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마음속에 삼매의 그림자를 얻지 못하고 몸의 즐거움도 얻지 못하고 마음의 즐거움도 얻지 못하면, 부처님께서는 그 관법(灌法)을 무슨 관법이라 말씀하십니까?”
“미륵이여, 사마타가 아니며, 사마타를 수순함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마타를 수순하고 믿는 것이라 말한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몸의 즐거움과 마음의 즐거움을 얻지 못하고 내신삼매(內身三昧) 경계를 보아 그 법을 생각하면,
이러한 관법의 마음을 부처님께서는 무슨 관법이라 하십니까?”
“미륵이여, 나는 그 관법이 비바사나가 아니며, 비바사나를 수순하고 믿는 것이라 한다.”
“세존이시여, 사마타의 행과 비바사나의 행이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나는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미륵이여, 무슨 까닭으로 내가 다르지 않다 하는가?
비바사나관이 사마타를 여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르지 않다.
미륵이여, 무슨 까닭으로 다르다 하는가?
분별된 경계의 그림자가 차별된 것을 보는 까닭이다.”
“세존이시여, 비바사나 삼매의 경계는 마음과 다른 것입니까, 마음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까?”
“미륵이여, 나는 다르지 않다고 한다.
어찌하여 다르지 않다고 하는가?
오직 이 마음으로 저 경계의 그림자를 보기 때문이다.
무슨 뜻인가?
나는 다만 마음과 뜻과 알음알이의 관찰로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만일 마음의 경계인 그림자가 마음과 다르지 않다면,
어떻게 마음으로써 마음을 보겠습니까?”
“미륵이여, 그곳에는 한 법도 능히 관찰할 법이 없지만 그 마음이 남으로써 그와 같이 현전에 보는 것이다.
미륵이여, 비유하자면 청정하고 밝은 거울이 경계의 물상에 의지하여 능히 경계의 그림자를 나타내거니와
내가 경계의 그림자를 나타낸다는 마음을 내지 않고 경계의 그림자에 의지하여 경계의 그림자를 나타냄과 같다.
미륵이여, 그 마음이 나되 마음을 여의지 않는데, 마음을 여의고 경계를 보면 저 삼매의 거울에는 버젓이 경계가 나타난다.”
“세존이시여, 일체 중생의 마음 법[心法]과 색 따위의 경계는 마음과 다릅니까,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까?”
“미륵이여, 마음과 다르지 않지만 모든 범부는 잘못된[顚倒] 지혜로 취착(取着)하여 다만 마음 법뿐임을 알지 못한다.
저 가지가지 경계의 그림자를 여실히 알지 못하는 까닭에 잘못된 생각으로 잘못된 법을 취한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면 보살이 한결같이 비바사나를 수행한다고 합니까?”
“미륵이여, 만일 보살이 저 마음 모습[心相]을 수순하여 관찰하기를 끊이지 않으면
이러한 보살은 한결같이 비바사나를 수행한다고 한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면 보살이 한결같이 사마타법을 관찰한다고 합니까?”
“미륵이여, 만일 보살이 그 마음 모습을 수순하여 관찰하기를 끊이지 않으면
이러한 보살은 한결같이 사마타법을 관찰한다고 한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면 보살이 사마타와 비바사나 두 법을 화합하여 한 때에 수행한다고 합니까?”
“미륵이여, 만일 보살이 마음을 관찰하되 일심으로 하면
그는 사마타ㆍ비바사나를 한때에 수행한다고 한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마음 모습[心相]입니까?”
“이른바 삼매의 경계인 그림자를 분별하거나 비바사나를 관찰하는 것이 마음 모습이라고 한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마음의 끊임없음[心無問]입니까?”
“미륵이여, 이른바 그림자를 관찰하는 마음의 사마타관이니,
이를 마음의 끊임없음이라고 한다.”
미륵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마음이기에 한마음[一心]이라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미륵이여, 이른바 삼매의 경계인 그림자를 관찰하여 마음임을 깨닫고,
마음을 깨달은 뒤에는 진여관(眞如觀)을 닦는 것이 한마음이다.”
“세존이시여, 비바사나의 행은 몇 가지가 있습니까?”
“미륵이여, 비바사나는 세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모양[相]이며,
둘째는 수행이며,
셋째는 관(觀)이다.
어떤 것이 모양의 비바사나인가?
이른바 삼매의 경계만을 관찰하여 경계인 그림자를 분별하는 것이 모양의 비바사나이다.
어떤 것이 수행의 비바사나인가?
이른바 지혜로써 여러 가지[彼彼] 법의 모습을 잘 관찰하는 것이 수행의 비바사나이다.
미륵이여, 어떤 것이 관찰의 비바사나인가?
이른바 여러 가지 법에 대하여 지혜로써 여러 가지 법의 모습을 관찰하되 적멸과 해탈을 증득하지 않는 것이다.
미륵이여, 이것이 잘 관찰하고 수행하는 비바사나이다.”
“세존이시여, 사마타행은 몇 가지가 있습니까?”
“미륵이여, 앞의 법문에 의지하여 뒤의 세 가지도 그러하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다시 미륵이여, 사마타는 여덟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초선(初禪)의 사마타와 이렇게 하여 2선(禪)ㆍ3선ㆍ4선ㆍ무변공처(無邊空處)ㆍ무변식처(無邊識處)ㆍ견소처(見少處)ㆍ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이다.
또 미륵이여, 사마타는 네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자(慈)의 사마타ㆍ비(悲)의 사마타ㆍ희(喜)의 사마타ㆍ사(捨)의 사마타이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사마타와 비바사나에 의지하는 것과 사마타ㆍ비바사나에 의지하지 않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의지하는 법이며, 어떤 것이 의지하지 않는 법입니까?”
“미륵이여, 들은 법대로 법의 모습[法相]을 수순함이니,
미륵이여, 이것이 법에 의지하는 사마타ㆍ비바사나이다.
미륵이여, 들은 법을 떠나서 생각대로 법을 취하고 다른 가르침에 의지하여 사마타ㆍ비바사나의 뜻을 관찰하니,
이른바 여러 가지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희고 냄새나고 썩는 것과, 일체 유위의 행이 무상하고 괴로움과, 일체 법은 아(我)가 없음과, 일체 법은 고요함과, 일체 법은 열반임을 관찰할 것이니,
이러한 사마타ㆍ비바사나는 미륵이여, 법에 의지하지 않는 사마타ㆍ비바사나라 한다.
미륵이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른바 법에 의지하는 사마타ㆍ비바사나는 내가 법의 모습에 수순하는 이근(利根) 보살을 위하여 말한다.
미륵이여, 법에 의지하지 않고 다른 이를 따르는 것은 내가 연근(軟根) 보살을 위하여 말한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차별로 관찰하는 사마타ㆍ비바사나의 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차별로 관찰하는 사마타ㆍ비바사나이며,
어떤 것이 차별 없이 관찰하는 사마타ㆍ비바사나의 법입니까?”
“미륵이여, 만일 보살이 낱낱 수다라의 법을 관찰하고 들은 대로 취한 대로 모든 법을 생각하여 사마타ㆍ비바사나를 수행하면,
이는 차별되게 관찰하는 사마타ㆍ비바사나 법이라 한다.
미륵이여, 만일 보살이 저 수다라 따위 법을 한 갈피ㆍ한 부분ㆍ한 무더기로 생각하되
이것이 일체 법이라 하고 진여에 수순하며, 진여에 흘러 향하며, 진여에 따라 향하며[隨向], 그 진여를 수순하며,
보리를 수순하며, 열반에 수순하며, 마음과 알음알이를 수순하며,
법을 수순하며, 법을 따라 향하여 한량없는 아승기의 선한 법의 모습을 여실히 아는 것이다.
미륵이여, 이것이 차별 없이 관찰하는 사마타ㆍ비바사나의 법이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적은 모습 차별[少相差別]로 관찰하는 사마타ㆍ비바사나 법과 큰 모습 차별[大相差別]로 관찰하는 사마타ㆍ비바사나 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적은 모습 차별로 관찰하는 사마타ㆍ비바사나 법이며 또 어떤 것이 큰 모습 차별로 관찰하는 사마타ㆍ비바사나 법입니까?
어떤 것이 무량한 모습 차별[無量相差別]로 관찰하는 사마타ㆍ비바사나 법입니까?”
“미륵이여, 만일 보살이 수다라의 하나하나와 나아가 우바제사(憂婆提舍)까지를 차별되게 관찰하되 한 조각이라는 생각을 지으면,
미륵이여, 이는 적은 모습의 차별로 관찰하는 사마타ㆍ비바사나 법이다.
미륵이여, 만일 보살이 저들 수다라 따위에 대하여 차별되지 않은 한 덩어리란 생각을 지으면,
미륵이여, 이는 큰 모습 차별로 관찰하는 사마타ㆍ비바사나 법이다.
미륵이여, 만일 보살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량한 법과 무량한 명자(名字)와 무량한 글귀와 무량한 상상(上上) 지혜와 즐겨 말하는 변재(辯才)를 한 덩어리로 생각하면
이는 무량한 모습으로 차별되게 관찰하는 사마타ㆍ비바사나 법이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면 보살이 차별되게 관찰하는 사마타ㆍ비바사나 법을 성취합니까?”
“미륵이여, 다섯 가지 관법으로 저 법을 관찰하는 것이 있으니,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이른바 사마타ㆍ비바사나를 생각하여 생각마다 일체 번뇌를 없애는 것과,
몸의 가지가지 모습을 여의고 법락(法樂)의 기쁨을 얻는 것과,
시방의 끝이 없음을 여실히 알고 무량한 법의 광명을 아는 것과,
소작성취(所作成就)와 서로 응하는 청정한 부분의 분별없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과,
법신을 성취하여 보다 높고훌륭한 인(因)을 얻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어느 곳에서 차별되게 관찰하는 사마타ㆍ비바사나 법을 수행하며,
어느 곳에서 차별되게 관찰하는 사마타ㆍ비바사나 법을 깨칩니까?”
“미륵이여, 초환희지(初歡喜地) 보살마하살이 수순하여 조금 깨치고, 제3 광명지(光明地) 보살이 잘 증득하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미륵이여, 처음 배우는 보살도 이 차별되게 관찰하는 사마타ㆍ비바사나 법을 수행하니,
배우고 생각하기를 쉬지 않는 까닭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사마타ㆍ비바사나가 각(覺)이 있고 관이 있는[有觀] 삼매이며,
어떤 것이 각은 없고[無覺] 관만 있는[有觀] 삼매이며,
어떤 것이 각도 없고 관도 없는 삼매입니까?”
“미륵이여, 만일 보살이 들은 바에 따라 모든 법을 포섭하고 일체 법, 각관(覺觀)하는 모습을 추하고 미세하게 수순하여 능히 사마타ㆍ비바사나 법을 내면 이는
각이 있고 관이 있는[有覺有觀] 삼매라 한다.
미륵이여, 만일 보살이 저 법의 모습[法相]에 대하여 거칠고 미세한 모습을 분명히 하지는 못했으나 그 법을 수행하여 그 법의 광명과 바른 생각을 얻고 사마타ㆍ비바사나를 수순하여 자세히 관찰하면,
미륵이여, 이는 각이 없고 관이 있는[無覺有觀] 삼매이다.
미륵이여, 보살이 일체 모습을 여의고 자연히 법에 수순하며, 사마타ㆍ비바사나를 생각하고 관찰하면,
이는 각도 없고 관도 없는 [無覺無觀] 삼매이다.
또 미륵이여, 처음으로 사마타ㆍ비바사나를 수행하면 이는 각이 있고 관이 있는[有覺有觀] 삼매이다.
미륵이여, 만일 보살이 일체 법을 관찰하면 이는 각이 없고 관이 적은[無覺少觀] 삼매이다.
미륵이여 만일 보살이 차별 없는 법의 삼매를 관찰하면 이는 각도 없고 관도 없는[無覺無觀] 삼매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사마타의 모습이며, 어떤 것이 취(取)하는 사마타의 모습이며, 또 어떤 것이 사마타의 버리는 모습[捨相]입니까?”
“미륵이여, 만일 보살이 흔들리는 마음과 의심하는 마음에 놀랍고 두려운 생각을 내거나, 혹은 멀리하려고 하여 모든 법 생각하기를 끊어지지 않게 하면 이는
사마타의 모습이다.
미륵이여, 만일 보살이 마음이 혼침(昏沈)하거나 혼침할 것을 의심하여 법을 생각하고 환희한 마음을 내면
이는 모양을 취하는 사마타이다.
미륵이여, 만일 보살이 한결같은 사마타의 길에서나 한결같은 비바사나의 길에서 두 갈래 그 두 법을 관찰하되
번뇌가 마음에 물들지 않으며, 자연히 생각하며, 자연히 법에 수순하며 수행하면,
이는 사마타의 버리는 모습[捨相]이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보살이 사마타ㆍ비바사나 법을 수행하되 여실히 법을 알고, 여실히 뜻을 알라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보살의 법을 아는 것이며, 뜻을 아는 것입니까?”
“미륵이여, 만일 보살이 다섯 가지 관법(觀法)을 알면 여실히 법을 안다 하니,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이름[名]이며,
둘째는 글귀[句]이며,
셋째는 글자[字]이며,
넷째는 차별이며,
다섯째는 같음[同]이다.
어떤 것이 이름인가?
이른바 더러운 법과 맑은 법에서 자체의 모습이나 설법의 모습을 보는 것이니,
미륵이여, 이것이 이름이다.
미륵이여, 어떤 것이 글귀인가?
법의 가지가지 이름과 이름의 모임인 물든 법과 맑은 법의 뜻은 이름이며,
작용이 의지하며 머무는 것은 글귀이다.
미륵이여, 어떤 것이 글자[字]인가?
곧 이름과 글귀가 그 한 가지 법의 이름에 의지하니 이것이 글자이다.
미륵이여, 어떤 것이 차별인가?
이른바 낱낱 법이 다르다고 관찰하는 것이 차별이다.
미륵이여, 어떤 것이 같음인가?
이른바 차별 없는 관법을 같음이라 한다.
미륵이여, 만일 보살이 이렇게 관찰하면 여실히 법을 안다 한다.
미륵이여, 어떤 것이 보살의 관찰하는 뜻인가?
보살의 관찰하는 뜻이 열 가지 있으니,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마땅히 수행할 것을 수행함이며,
둘째는 수행하여 구경의 곳에 도달함이며,
셋째는 능히 취하는 뜻을 알고,
넷째는 가히 취할 뜻을 알고,
다섯째는 머무르는 뜻을 알고,
여섯째는 수용하는 뜻을 알고,
일곱째는 뒤바뀐 뜻을 알고,
여덟째는 뒤바뀌지 않은 뜻을 알고,
아홉째는 물든 뜻을 알고,
열째는 청정한 뜻을 아는 것이다.
미륵이여, 만일 보살이 물들고 깨끗한 법 가운데서 여러 가지 종류의 차별된 것,
즉 음(陰)의 다섯 가지와, 안의 입[內入] 여섯 가지와, 밖의 입[外入] 여섯 가지를 차별되게 수행하면,
이러한 차별된 수행을 보살이 마땅히 수행할 것을 수행한다고 한다.
미륵이여, 만일 보살이 물들고 깨끗한 법 가운데서 여실히 진여를 알면,
미륵이여, 이를 보살이 수행하여 구경의 곳에 이르렀다 한다.
또 미륵이여, 진여에 일곱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일곱 가지인가?
이른바 비롯함이 없는 유위(有爲)인 행상 진여(行相眞如)와 모습진여[相眞如],
이른바 아(我)가 공하고 법(法)이 공한 것과 오직 식뿐인 진여[唯識眞如],
즉 유위의 행상이 마음뿐임을 아는 것과 집착의 진여[執着眞如],
즉 내가 말한 괴로움의 진리[苦諦]와 삿된 행의 진여[邪行眞如],
이른바 내가 말한 모이는 진리[集諦]와 청정한 진여[淸淨眞如],
이른바 내가 말한 멸하는 진리[滅諦]와 바른 수행의 진여[正修行眞如],
즉 내가 말한 도의 진리[道諦]이다.
미륵이여, 행상 진여와 집착의 진여와 사행의 진여, 이 세 가지 진여는 일체 중생에게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미륵이여, 모습 진여와 식의 진여, 이 두 가지 진여는 일체 법에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미륵이여, 청정의 진여는 성문ㆍ연각ㆍ보살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미륵이여, 수행 진여는 만일 묘한 법을 들으면 차별되게 사마타ㆍ비바사나를 관찰하여 반야를 섭취함에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미륵이여, 보살이 취하는 뜻을 안다 함은
이른바 다섯 가지 입(入)의 모습과, 마음[心]과 뜻[意]과 의식(意識)과, 마음에 따르는 법[心數法]이니,
이것을 능히 취하는 것을 안다고 한다.
미륵이여, 가히 취할 것을 안다 함은
이른바 밖의 여섯 가지 입(入)이다.
미륵이여, 능히 취하는 뜻이 곧 가히 취하는 뜻이니,
이것이 능히 취하는 뜻과 가히 취할 뜻을 안다고 한다.
미륵이여, 보살이 머무르는[住持] 뜻을 안다 함은
이른바 세계의 중생들이 머무는 곳이니,
그 머무는 곳에 의지하여 중생을 본다.
이른바 취(聚)ㆍ낙(落)ㆍ전(田)ㆍ지(地), 그 백 취락, 그 천 취락, 그 천만 취락인 바닷가에 까지 다한 땅과,
그 백천, 그 백천인 염부제와,
그 백천, 다시 그 백천만인 1천 세계와,
그 1천 세계의 백 배, 그 백 배, 천 배, 그 천 배, 백천 배인 2천 중천세계와,
그 2천 중천세계의 백 배, 천 배, 백천 배인 3천대천세계와,
그 3천대천세계의 백 배, 다시 그의 천 배, 다시 천 배, 다시 백천만 배, 그 백천만 배인 1억과 그 1억의 백 배, 그 백 배의 다시 천 배, 그 천 배의 다시 1억 배, 그 1억, 다시 백천억 배인 1아승기와, 그 백억, 천억, 그 천억, 그 다시 천억, 백천억 아승기, 그 아승기, 그 백 아승기, 천 아승기, 그 백천 아승기, 백천만 3천대천, 백천만 아승기 세계와,
백천만 미진 수효의 시방세계와 무량한 세계이다.
미륵이여, 이것이 보살이 머무는 뜻을 아는 것이라고 한다.
미륵이여, 어떤 것이 보살이 자생(資生)의 뜻을 아는 것인가?
이른바 내가 중생을 위하여 가지가지의 수용(受用)하는 바 자생을 말했기 때문이다.
미륵이여, 어떤 것이 보살이 뒤바뀜의 뜻을 아는 것인가.
미륵이여, 그들이 수용을 취할 적에, 무상한 가운데 항상한 모습[常相]의 뒤바뀜과, 마음 모습[心相]의 뒤바뀜과, 보는 모습[見相]의 뒤바뀜을 내고,
괴로움 가운데 즐거운 모습[樂相]의 뒤바뀜을 내고,
부정한 가운데 깨끗한 모습[淨相]의 뒤바뀜을 내고,
아(我)가 없는 가운데 아라는 모습[我相]의 뒤바뀜과, 마음 모습의 뒤바뀜과, 보는 모습을 낸다.
미륵이여, 이것이 보살이 뒤바뀜의 뜻을 아는 것이다.
미륵이여, 어떤 것이 보살이 뒤바뀌지 않는 뜻을 아는 것인가?
미륵이여, 삼계 안에 세 가지 물든 모습[染相]이 있으니,
이른바 번뇌의 물듦[煩惱染]과 업의 물듦[業染]과 생의 물듦[生染]이다.
미륵이여, 이것이 보살이 깨끗함을 아는 뜻인가?
미륵이여, 저 세 가지 물듦을 여의고 보리분법을 수행함이니
미륵이여, 이것이 보살이 깨끗함을 아는 뜻이다.
미륵이여, 이 열 가지 뜻이 일체의 뜻을 섭취하였음을 알아야 하니
미륵이여, 이것이 보살이 여실히 뜻을 아는 모습이다.
또 미륵이여, 만일 보살이 다섯 가지 법을 알면 그 보살은 뜻을 잘 안다고 한다.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가히 알[可知] 경계요,
둘째는 가히 알 뜻[義]이요,
셋째는 아는 법[知法]이요,
넷째는 아는 것에 의지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이요,
다섯째는 여실히 그 법을 받는 것이다.
미륵이여, 어떤 것이 가히 알 법인가?
미륵이여, 일체 경계이니 이른바 5음과 안의 모든 입(入)과 밖의 모든 입들이니,
이것이 알 경계이다.
미륵이여, 어떤 것이 가히 알 뜻인가?
미륵이여, 무량한 종류의 관법으로 여실히 저들 법을 아는 것이니,
이른바 세간 진리[世諦]와, 제일의제와,
공덕의 법과, 허물의 법과,
인연법과, 삼세법과,
나는[生] 법과, 머무는 법과, 멸하는 법과, 병드는 법 따위 모든 법과,
고(集)ㆍ집(苦) 따위 법과,
진여법과, 실제법과, 법계법[法界法]ㆍ
간략한 법[略法]ㆍ넓은 법[廣法]과,
한결같이 차별되게 묻고 대답하는 법[一向差別說問答法]과, 대답을 두는 법[置答法]과,
비밀한 법[秘密法]과, 바로 말하는 법[直說法]이다.
미륵이여, 이러한 것들이 가히 알 뜻임을 알아야 한다.
미륵이여, 어떤 것이 아는 법인가?
미륵이여, 능히 저들을 내고 37품을 아는 것이니, 이른바 4념처와 나아가 8정도이다.
미륵이여, 이것이 아는 법이다.
미륵이여, 어떤 것이 보살이 앎을 의지하여 깨닫는 것인가?
이른바 탐ㆍ진ㆍ치ㆍ번뇌를 소멸하며, 탐ㆍ진ㆍ치ㆍ번뇌를 멀리하고 네 가지 사문(沙門)의 과위를 얻으니,
이른바 내가 성문ㆍ여래ㆍ세간ㆍ출세간 일체 공덕을 말하면 그 모든 공덕을 여실히 깨치니
미륵이여, 이것이 보살이 앎을 의지하여 깨침을 얻는 것이라 한다.
미륵이여, 어떤 것이 보살이 저 법을 여실히 받는 것인가?
미륵이여, 그가 증득한 법으로 해탈을 알며, 해탈을 받아 지니고, 다시 일체 중생을 위하여 널리 설명하고 보여서 드러낸다.
미륵이여, 이 다섯 가지 법이 일체를 거두는 것이다.
또 미륵이여, 보살이 네 가지 관법을 알면 여실히 뜻을 안다 하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이른바 마음이 나는 뜻을 알고,
마음이 따르는 뜻을 알고,
수용하는 뜻을 알고,
물들거나 깨끗한 뜻을 아는 것이다.
미륵이여, 보살이 필경에 네 가지 뜻을 알면 일체 뜻도 섭취한다고 하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미륵이여, 보살이 여실히 세 가지 법을 알면 여실히 뜻을 안다 하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이른바 글자의 뜻[字義]ㆍ뜻의 뜻[義義]ㆍ경계의 뜻[界義]이다.
미륵이여, 어떤 것이 글자의 뜻인가.
이른바 이름 몸[名身] 따위이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미륵이여, 이것이 글자의 뜻이다.
미륵이여, 어떤 것이 뜻의 뜻인가?
미륵이여, 뜻의 뜻이란 열 가지가 있으니,
그 열 가지란 이른바
실다운 모습[實相]과, 아는 모습[知相]과,
여의는 모습[遠離相]과, 깨닫는 모습[證相]과, 수행하는 모습[修行相]과,
저 실다운 모습 따위의 가지가지 차별된 모습[種種差別相]과,
의지하는 것[依止]과 의지할 바[所依止]에 서로 응하는 모습[依止所依止相應相]과,
저 아는 모습 따위의 장애되는 모습에서 법에 수순하는 모습[隨順法相]과,
허물을 모르는 모습[不知過咎相]과, 이익을 아는 모습[知利益相]이다.
미륵이여, 이것이 보살이 뜻과 뜻의 모습을 아는 것이다.
미륵이여, 어떤 것이 경계의 모습을 아는 것인가?
미륵이여, 경계의 뜻과 모습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세계와, 중생계[衆生界]와, 법계와,
교화할 수 있는 경계[可化界]와,
방편으로 가히 교화할 경계[可化方便界]이다.
미륵이여, 이 다섯 가지 경계가 일체의 뜻을 섭취하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때 미륵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른바 듣는 지혜[聞慧]와 생각하는 지혜[思慧]와 사마타ㆍ비바사나의 세 가지 수행이 있다고 하니,
이 세 가지 지혜는 어떻게 차별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미륵이여, 듣는 지혜로 수행하는 이는 명자(名字)에 의지하니,
들은 대로 하고 뜻[意]에 맞게 하지 않으며, 현전에 해탈하지는 않으나 해탈에 수순한다.
미륵이여, 이것이 듣는 지혜로 수행하는 뜻이다.
미륵이여, 생각하는 지혜로 수행하는 이는,
미륵이여, 또한 명자에 의지하니, 오직 들은 대로 하되 그렇게 마음을 수순하지 않으며,
현전에 해탈하지는 않으나 더욱더 해탈에 수순한다.
미륵이여, 이것이 생각하는 지혜로 수행하는 것이다.
미륵이여, 닦는 지혜로 수행하는 이는,
보살이 명자에 의지하거나 명자에 의지하지 않거나,
들은 대로 의지하거나 들은 대로 의지하지 않거나,
마음을 수순하거나, 지혜로 가히 알 수 있는 법을 수순하거나,
삼매 경계의 그림자가 나타나면 더욱더 해탈을 수순하고 해탈을 자라게 한다.
미륵이여, 이것이 세 가지 지혜의 다른 모습이다.”
미륵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사마타ㆍ비바사나를 수행함에 어떤 것이 지혜이며, 어떤 것이 소견[見]입니까?”
“미륵이여, 내가 무량한 지혜와 소견을 설명할 것이나 요약하여 말하리라.
차별된 법 가운데 사마타ㆍ비바사나의 반야(般若)는 지혜이며,
모든 법의 차별 없는 모습을 관찰하면 이는 소견이라 한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사마타ㆍ비바사나를 수행하되 어떤 마음으로써 어떠한 법을 관찰합니까?”
“미륵이여, 진여를 관찰하는 마음[眞如觀心]으로 법의 모습과 뜻의 모습을 수행하되,
또한 이름[名]을 보지 않으며
또한 이름의 체상(體狀)도 보지 않으며
또한 명자의 원인 모습[因相]도 보지 않으며
이와 같은 구절과 글자 따위의 일체 뜻도 마땅히 알아야 하며,
나아가 18계 자체의 모습도 보지 않으며
또한 그의 원인 모습도 보지 않고
사마타ㆍ비바사나를 수행하는 뜻이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진여의 의상(義相)을 수행하되 또한 그 모습을 수행하는 것입니까?”
“미륵이여, 진여의 형상을 모양으로 보지 못하니 만일 모양이 없으면 어떻게 수행하겠는가.
미륵이여, 보살이 진여의 모습을 수행하는 것은 일체 법과 일체 의상을 항복받는 것이다.
그러나 저 모든 법은 진여의 의상을 항복시키지 못한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그릇이 청정하지 못하거나 거울이 청정하지 못하면 모든 물은 흐리고 얼굴이 나타나지 않거니와,
청정한 그릇 따위는 능히 얼굴 모양을 나타낸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존이시여, 여실한 마음을 수행하지 않는 이는 능히 일체 법을 보지 못하거니와
수행한 사람은 능히 본다고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심관(心觀)과 어떠한 진여관(眞如觀)에 의지하여 이러한 뜻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미륵이여, 나는 세 가지 관법에 의지하여 이러한 뜻을 말하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이른바 듣는 지혜[聞慧]ㆍ생각하는 지혜[思慧]ㆍ닦는 지혜[修慧]이다.
이 세 가지 관법으로 능히 진여를 아니 미륵이여, 나는 이러한 뜻에 의지하여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이렇게 모든 법을 알고 수행하되, 몇 가지 법상(法相)을 수행하기 어려우며, 어떠한 법과 어떠한 관으로써 그 수행하기 어려운 것을 관찰해야 합니까?”
“미륵이여, 열 가지 닦기 어려운 행상이 있으니
열여덟 가지 공한 관[空觀]에 의지하여 수행하기 어려운 행상을 관찰해야 한다.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미륵이여, 법과 뜻의 모습[法義相]과 가지가지 명자의 모습을 관찰하되,
일체 법이 공함에 의지하여 저 수행하기 어려운 모습을 끊는다.
미륵이여, 여실한 의상의 수용, 즉 나는 모습[生相]ㆍ멸하는 모습[滅相]ㆍ머무는 모습[住相]ㆍ달라지는 모습[異相]ㆍ상응하는 행상을 취하되
모습의 공상(空想)과 무시공(無始空)에 의지하여 수행하기 어려운 모습을 끊는다.
미륵이여, 능히 취하는 모습, 즉 몸에 의지하는 모습[依身相]과 나에 의지하는 모습[依我相]을 취하되
안의 공[內空]과 보이지 않는 공[不見空]에 의지하여 저 수행하기 어려운 모습을 끊는다.
미륵이여, 가히 취할 모습[可取相], 즉 살림살이[資生]의 모습을 취하되
밖의 공[外空]에 의지하여 수행하기 어려운 모습을 끊는다.
미륵이여, 수용하는 뜻인 남녀의 모습들 가지가지 살림살이 즉 안과 밖이 청정한 모습을 취하되
안과 밖의 공[內外空]과 자성공에 의지하여 그 수행하기 어려운 모습을 끊는다.
미륵이여, 머무는[住持] 뜻을 취함에 무량한 모습이 있으니
큰 공[大空]에 의지하여 저 수행하기 어려운 모습을 끊는다.
미륵이여, 무색계 수행의 모습과 안으로 고요한 해탈의 모습을 취함에
유위(有爲)의 공을 의지하여 저 수행하기 어려운 모습을 끊는다.
미륵이여, 진여의 모습과 뜻, 즉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이 오직 마음인 제일의의 모습을 취하되
본래의 공과, 물건[物]이 없어진 공과, 자체의 공과, 체성이 없는 자체의 공과, 제일의공(第一義空)에 의지하여 저 수행하기 어려운 모습을 끊는다.
미륵이여, 청정한 진여의 함이 없는[無爲] 모습을 취하면 모든 모습을 여의고 다른 모습이 없으니,
함이 없는 공과 다르지 않은 공에 의지하여 저 수행하기 어려운 모습을 끊는다.
미륵이여, 함이 없는 공과 다름이 없는 공을 취하고는 그 공의 모습을 끊기 위하여 함이 없는 공[無爲空]과, 다르지 않은 공[無異空]을 대치하니,
공공(空空)에 의지하여 저 두 가지 공을 끊는다.”
“세존이여, 보살이 이와 같이 열 가지 행상을 수행하면 어떠한 속박에서 해탈을 얻습니까?”
“미륵이여, 삼매의 경계를 수행하되 형상과 그림자의 모습을 보는 물듦과 얽매임과 번뇌에서 해탈을 얻으니,
즉 저 거울의 그림자를 보고 경계의 모습을 취하지 않는 것이 저 수행하기 어려운 모습을 끊는 것이다.
미륵이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차별되게 말하건대 이 모든 공 따위로 열 가지 모습을 대치하되, 낱낱의 공이 아니면 능히 대치하여 열 가지 모습을 끊지 못한다.
미륵이여, 비유하자면 무명이 능히 생(生)을 내지 못하며 나아가 노(老)ㆍ사(死)ㆍ번뇌를 내지는 못하나, 다만 근본에 의지하여 말하되 무명의 반연으로 행이 생겼다 하니, 가까운 인연에 의지하는 까닭에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미륵이여, 이 뜻도 그러하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요약한 공 모습[略空相]입니까? 보살이 그 모습을 알면 일체 공의 모습을 잃지 않으며, 일체 교만의 공 모습[憍慢空相]을 여읠 것입니다.”
그때 세존께서 미륵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좋은 말이다, 미륵이여. 참으로 좋은 말이다,
미륵이여. 그대가 능히 모든 보살들이 공의 모습을 잃지 않게 하려고 이렇게 물었으니, 참으로 좋은 질문이다.
왜냐하면 미륵이여, 만일 보살이 ‘공’의 모습을 알지 못하면 일체 대승법을 잃을 것이다.
미륵이여, 그대는 자세히 들으라.
내가 지금 요약한 모습[略相]과 공한 모습을 말하리라.
미륵이여, 남의 힘 모습[他力相]과 제일의 모습인 일체 법 가운데 물들거나 깨끗한 모습과 저 허망하게 분별하는 모습이 없다.
항상 저러한 모습을 여의고, 모습이란 보이지 않는 것이 대승 가운데서 말하는 요약한 공의 모습이다.”
“세존이시여, 사마타ㆍ비바사나는 몇 가지 삼매를 포섭합니까?”
“미륵이여, 내가 말한 모든 삼매, 즉 성문과 보살과 여래의 삼매는 일체 삼매를 섭취(攝取)하니 그렇게 알라.”
“세존이시여, 사마타ㆍ비바사나가 능히 어떠한 법인(法因)을 이룹니까?”
“미륵이여, 능히 청정한 계의 인을 이루며 능히 듣는 지혜[聞慧]ㆍ생각하는 지혜[思慧]의 소견의 인[見因]이 된다.”
“미륵이여, 능히 청정한 계와 듣는 지혜ㆍ생각하는 지혜의 인은 어떠한 과를 얻습니까?”
“미륵이여, 능히 마음이 청정한 과를 이루며, 지혜가 청정한 과를 이룬다.
또 미륵이여, 능히 일체 세간ㆍ출세간의 착한 법과, 일체 성문ㆍ보살ㆍ모든 부처님의 사마타ㆍ비바사나의 과를 이루니 그렇게 알아야 한다.”
“세존이시여, 사마타ㆍ비바사나는 어떠한 업을 짓습니까?”
“미륵이여, 두 가지 속박을 멀리한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이른바 모습의 속박[相縛]을 여의고 번뇌의 속박[煩惱縛]을 여읜다.
미륵이여, 이것이 사마타ㆍ비바사나의 업이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다섯 가지 장애에 몇 가지가 사마타를 장애하고, 몇 가지가 비바사나를 장애하고, 몇 가지가 두 가지를 장애합니까?”
“미륵이여, 몸을 아끼고 삶을 돕는 두 가지는 사마타를 장애한다.
미륵이여, 성인께서 말씀한 일체 착한 법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 것은 비바사나를 장애한다.
미륵이여, 떠드는 곳을 기뻐하고 적은 것을 얻고도 만족하게 여기면 이는 두 가지로 사마타ㆍ비바사나를 장애한다.
미륵이여, 떠드는 곳을 즐기면 수행하는 법을 일으키지 못하고 적은 것을 얻고 만족히 여기면 능히 끝가는[究竟] 곳에 이르지 못한다.”
미륵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다섯 가지 덮임[蓋]은 몇 가지가 사마타의 장애이며, 몇 가지가 비바사나의 장애이며, 몇 가지가 둘을 향하는 장애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미륵이여, 도거(掉擧)와 뉘우침[悔]은 사마타의 장애이며,
잠[昏]과 의심은 비바사나의 장애이며,
욕심과 진심은 두 가지를 향해서 장애가 된다.”
“세존이시여, 어찌하면 능히 사마타의 도를 청정히 합니까?”
“미륵이여, 수면을 잘 조복하면 이것이 능히 잘 청정하게 하는 사마타의 도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잘 청정하게 하는 비바사나의 도입니까?”
“미륵이여, 만일 능히 도거와 후회, 두 가지의 덮임을 끊으면 이것이 잘 청정하게 하는 비바사나의 도이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사마타ㆍ비바사나를 수행할 적에 몇 가지 법이 능히 마음의 산란, 즉 서로 응하지 않는 것임을 알겠습니까?”
“미륵이여, 보살이 다섯 가지 법을 아니,
이른바 바른 생각의 산란[正念散亂]과, 바깥 마음의 산란[外心散亂]과, 안 마음[內心]의 산란과, 모습의 산란[相散亂]과, 번뇌의 산란[煩惱散亂]이다.
미륵이여, 만일 보살이 바른 생각, 즉 대승과 상응하는 모습을 버리고 성문이나 벽지불과 상응하는 생각을 따르면,
미륵이여, 이는 보살의 바른 생각의 산란이라 한다.
미륵이여, 만일 보살이 밖의 5욕을 애착하거나, 떠드는 곳을 즐기거나, 모든 깨닫고 살피는 것을 집착하거나, 번뇌의 생각을 따르면,
이는 바깥 마음의 산란이다.
미륵이여, 만일 보살이 졸음 때문에 이롭지 못하여서 마음으로 삼매와 다른 삼매와 삼마발제(三摩鉢提)에 애착하거나 물든 바[所染]에 물드니,
미륵이여, 이것이 안 마음의 산란이다.
미륵이여, 만일 보살이 바깥 모양에 의지하여 안 몸[內身]의 삼매 경계를 생각하면
이는 마음의 산란이다.
만일 보살이 안 마음에 의지하여 인연을 생각하고 깨닫고 관찰하는 번뇌를 내되 이러한 마음이 나[我]라고 하면 미륵이여,
이는 번뇌의 산란이라 한다.”
“세존이시여, 사마타ㆍ비바사나는 처음의 보살 지위로부터 여래 지위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허물을 대치합니까?”
“사마타ㆍ비바사나는 첫 지위에서 나쁜 갈래의 업과 생(生)과 번뇌의 물듦[煩惱染]을 대치하고,
제2지(地)에서 미세한 허물을 대치하고,
제3지에서 좋은 법 얻으려는 허물을 대치하고,
제4지에서 삼마발제를 사랑하는 마음의 허물을 대치하고,
제5지에서 세간의 열반이 한결같이 나타나거나 한결같이 나타나지 않는 허물을 대치하고,
제6지에서 모든 모습이 운행하는 허물을 대치하고,
제7지에서는 미세한 모습의 운행의 허물을 대치하고,
제8지에서는 모양 없는 운행과 자연(自然) 운행의 허물을 대치하고,
제9지에서는 일체 종류의 설법에 자재하지 못한 허물을 대치하고,
제10지에서 법신(法身)의 만족을 얻지 못한 허물을 대치한다.
미륵이여, 제11지에서는 미세하고 극히 미세한 지혜의 장애[智障]를 물리친다.
미륵이여, 보살이 저 일체 장애를 끊고 나서는 장애 없는 일체 지혜를 얻고 구하려는 법을 성취하며, 청정한 법신(法身)을 성취한다.”
미륵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면 보살이 사마타ㆍ비바사나를 수행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미륵이여, 보살이 사마타ㆍ비바사나를 수행하되 7종의 진여에 의지하여 근본을 삼을 것이니,
들은 법과 생각한 법대로 선정의 마음에 들어 그 법을 생각하되,
듣는 지혜와 생각하는 지혜와 같이 하며,
안 마음의 차별을 잘 생각하여 진여를 관찰하라.
보살이 저 진여의 법을 관찰하면 미세한 수행의 마음도 오히려 버리는데 하물며 거친 법이겠는가.
미륵이여, 어떤 것이 미세한 수행의 마음인가?
이른바 내는 심식[生心識]과 받는[受心識] 심식과 물들고 맑은 식[染淨識]과,
안과 밖과 저 두 가지와,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려고 수행하는 것과,
[진여의] 지혜[인], 괴로움과 모임과 멸함과 도와,
유위와 무위와, 항상[常]과 무상과,
괴로움이나 모임이 자성의 업과 다르지 않은 유위의 모습과,
일체 인무아(人無我)ㆍ법무아(法無我)의 모습[과],
이런 따위의 법을 수행하여서 버리는 마음이다.
[所謂生心識, 受心識, 染淨識, 內, 外及彼二, 彼行利益一切衆生, 眞如智――苦, 集, 滅, 道, 有爲, 無爲, 常, 無常, 苦集不異自性, 業有爲相, 一切人無我, 法無我相――如是等法修行捨心.]
미륵이여, 보살이 이렇게 마음을 내고 이렇게 수행하고 이렇게 많이 수행하면 찰나마다 일체 덮임을 여의고 청정한 마음을 얻을 것이다.
청정한 마음을 얻으면 일곱 가지 진여에 들어가 안 몸[內身]으로 저 일곱 가지 깨닫는 모습을 증득할 것이니, 그런 줄 알라.
미륵이여,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잘 얻는 견도(見道)이다.
보살이 견도의 지혜를 얻으면 결정된 무리[定聚]의 보살이라 하니,
부처의 집에 태어나 초지(初地)의 이익과 환희를 수용할 것이다.
이 보살이 먼저부터 사마타ㆍ비바사나의 도를 수행하고 이에 비로소 일에 구경(究竟)된 관법을 얻는다.
이 보살이 다시 높고 높은 지위에서 수행하되 저 두 가지 관법을 생각하는 까닭에 모든 미세한 모습을 여읜다.
미륵이여,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공교하게 가는 말뚝으로 굵은 말뚝을 뽑는 것과 같다.
미륵이여, 보살의 수행도 그러하여서 안 마음의 모습을 관찰하여 일체의 물든 모습을 여읜다.
물든 모습을 여의고는 일체 좋은 법 취하는 모습을 여의고,
일체 좋은 법 취하는 모습을 여의고는 일체 모습을 여읜다.
이와 같이 높고 높은 지위에서 비슷한 법을 생각하면 안 마음이 청정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를 깨치며, 지은 바 수행과 관행 성취함을 얻을 것이다.
미륵이여, 보살이 이렇게 수행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