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비바사론 하권
3. 분별심소법품[2], 즐거운 느낌(2), 괴로움
[즐거움이 있다고 말하는 연유]
이 뜻을 관하여야만 할 것이다.
마치 건달박(乾達縛)에게 먹는 일[食]ㆍ명색(名色)ㆍ식(識)의 세 가지가 화합하는 것과 같다.
또한 계경에서
“부모의 교합이 있어야 건달박이 바로 현재에 존재할 수 있으나, 어떤 때는 부모의 교합이 없어도 건달박이 현재에 존재한다.
가령 습생(濕生) 및 화생(化生)으로 태어나는 것들은 태생(胎生)과 난생(卵生)의 두 가지 유정의 존재들과 달리 부모의 교합을 떠나서 태(胎) 가운데에 들어가는 뜻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경전에서
“세 가지가 화합한 것을 목숨[壽]ㆍ따뜻함[暖]ㆍ식(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무색계에는 비록 따뜻함이 없으나 목숨과 식이 있다.
욕계와 색계가 아닌 세계는 따뜻함을 떠난 목숨과 식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경전에서
“몸은 식주(食住)에 의지하고, 색계와 무색계의 두 가지 세계가 아닌 것은 세 가지 식[三食]으로 말미암아 머무른다.
욕계 또한 그와 같다.
욕계가 아닌 것 가운데서는 네 가지 식[四食]으로 말미암아 머무른다.
그 위의 세계도 역시 같다”고 말한 것과 같다.
또한 경전에서
“명색은 식을 연하고, 식은 명색을 연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무색계가 아닌 것은 비록 색이 없으나 명(名)과 식이 전전(展轉)하여 서로 연이 된다.
욕계와 색계 가운데서도 역시 이 뜻이 있게끔 한다.
이 가운데서도 역시 그와 같다.
만약 기쁨이 있는 곳이라면 기쁨이 있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가볍고 편안함이 있음을 얻는다.
만약 기쁨이 없는 곳이라 할지라도 가볍고 편안함이 역시 있다면,
나머지 연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틀렸다고 비난받지 않는다.
어떤 것들을 ‘나머지 연’이라고 말하는가?
먼저 욕계에는 수승한 기쁨의 느낌이 있어 미지정(未至定)을 이끌어서 가볍고 편안함이 일어나도록 한다.
초정려(初靜慮)와 제2정려에는 수승한 기쁨의 느낌이 있어 그 위의 경지까지 이끌어서 가볍고 편안함이 일어나도록 한다.
만약 기쁨이 전혀 없다면 가볍고 편안함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증거로 말미암아 즐거운 느낌이 결정코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처음의 과보가 위의 두 가지 세계에 있어 비록 그 과보를 얻을 수 없으니, 그들은 아라한(阿羅漢)의 과보를 얻는다. 앞의 힘이 이끌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응당 그러하니 마땅히 틀렸다고 비난받지 않는다.
또한 지팡이로 먼저 수레를 막아두었다가 후에 지팡이를 빼내었을 때 그 수레가 굴러가는 것처럼, 이것도 역시 이와 같다.
먼저 기쁨의 힘이 뒤의 가볍고 편안함을 이끌어오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가볍고 편안함은 기쁨이 있음으로 생겨남을 알아야 한다.
기쁨은 곧 기쁜 느낌과 즐거운 느낌에 포섭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즐거운 느낌이 실제로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즐거운 느낌으로 말미암아 희망(希望)이 있기 때문이다.
계경에서
“만약 즐거움이 있다면 법(法)에 대해서 희망이 있다.
만약 즐거운 느낌이 없다면 법에 대해서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까닭에 즐거운 느낌이 실제로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좋아할 만한 업[可愛業]에는 과보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즐거운 느낌이 없다면, 모든 좋아할 만한 업은 마땅히 공(空)하여 과보가 없다.
모든 좋아할 만한 업은 반드시 즐거운 느낌을 그 과보로 삼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좋아할 만한 업은 모든 즐거운 도구를 이숙과(異熟果)로 한다고 말할 수 없다.
즐거운 도구는 다만 증상과(增上果)이기 때문이다.
모든 즐거운 도구는 증상과이지 이숙과가 아니라고 말한다.
어찌된 까닭인가?
즐거운 도구는 다른 이들과 함께 받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숨이 끊어져도 깨어져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즐거운 도구를 다른 유정들과 함께 받아 이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모든 이숙과는 다른 이들과 함께 받아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 결코 없다.
자신의 상속에 떨어져 다른 이들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즐거운 도구는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더라도 마치 코끼리와 말 등과 같이 오히려 깨어져 없어지지 않는다.
모든 이숙과는 몸과 목숨이 함께 한다.
몸과 목숨이 만약 없다면 그들은 반드시 깨어져 없어진다.
그러므로 좋아할 만한 업에 만약 즐거운 느낌이 없다면 마땅히 공하여 결과가 없다.
이 이치는 결정되어 있다.
또 포섭하는 이익 때문이다.
만약 즐거운 느낌이 없다면 모든 감각기관의 대종(大種)들도 마땅히 포섭하는 이익(攝益)이 없을 것이다.
만약 ‘포섭하는 이익은 모든 유정이 대상인 바깥 경계를 분별하기 때문이고 즐거운 느낌 때문은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이치 역시 그렇지 않다.
포섭하는 이익은 마치 괴로운 느낌과 같이 손해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바른 가행(加行)은 반드시 과보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즐거운 느낌이 없다면 바로 바른 가행은 마땅히 공하여 결과가 없다.
바른 가행이란 것은 마땅히 괴로운 느낌으로서 이숙과를 삼아야 한다.
즐거운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삿된 가행처럼 반드시 괴로운 느낌으로서 이숙과를 삼기 때문이다.
바른 가행은 마땅히 즐거운 느낌으로서 이숙과를 삼는다.
이들은 다시 밝음과 어둠, 빛과 그림자 등처럼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또한 즐거운 느낌으로 말미암아 악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약 즐거운 느낌이 없다면 악행도 마땅히 없을 것이다.
모든 유정들이 즐거운 느낌에 탐착하기 때문에 모든 악행을 저지르고 괴로운 느낌의 결과를 감수한다.
악행이 만약 없다면 괴로운 느낌도 마땅히 없을 것이다.
괴로운 느낌이 이미 있으므로 악행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미 악행이 있으므로 즐거운 느낌도 반드시 있다.
또한 법수(法受) 때문이다.
계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네 가지 법수가 있으니,
혹은 현재는 즐겁지만 뒤에는 괴로운 법의 느낌이 있는 것,
혹은 현재는 괴롭지만 뒤에는 즐거운 법의 느낌이 있는 것,
혹은 현재도 즐겁고 뒤에도 즐거운 법의 느낌이 있는 것, 혹
은 현재도 괴롭고 뒤에도 괴로운 법의 느낌이 있는 것이다.
만약 즐거운 느낌이 없다면 법의 느낌도 마땅히 한 가지이고, 네 가지일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은 등등의 갖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즐거운 느낌이 반드시 있다.
[세 가지 괴로움]
【문】만약 즐거운 느낌이 있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즐거운 느낌과 어긋남이 있을 것이다.
경에는 어떠한 이치가 있는가?
【답】다른 이치가 있다.
또한 처음 경전에서
“모든 지닌 느낌은 괴로움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그 경전에 의지하여 세 가지 괴로움을 말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어떤 것 등을 세 가지 괴로움[三苦]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고고(苦苦)이고,
둘째는 괴고(壞苦)이고,
셋째는 행고(行苦)이다.
만약 모든 괴로운 느낌이라면, 고고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괴로움이라고 한다.
모든 즐거운 느낌이라면, 괴고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괴로움이라고 한다.
모든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라면, 행고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괴로움이라고 한다.
마치 계경에서
‘영원하지 않기[無常] 때문에 괴롭다’고 말한 것과 같다.
그 경전들은 이러한 이치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