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보살경 제2권
[살인자가 깨달음을 얻은 전생의 인연]
이때 무리 가운데 있던 무번천자(無煩天子)는 곧 제천(諸天)의 만다라화(曼陀羅華)를 부처님 위에 뿌리고 합장하고 공경하고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인연으로서 이 나쁜 마음을 다스리기 어려운 살인자(殺人者)가 이와 같이 지혜의 근기가 날카롭고 지혜가 미묘하여 능히 이와 같이 속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까?”
이 말을 마치자, 부처님께서는 무번천자에게 말씀하셨다.
“천자여, 분명하게 들어라. 이 나쁜 마음을 다스리기 어려워 사람을 살해하는 사람은 과거세(過去世)에 이미 5백 생(生)이 있었다.
독사의 몸을 받아서 생물을 보면 곧 해쳤는데, 그는 몸을 받고서도 밤낮으로 많은 중생들이 그로부터 해를 입었다.
굶주림과 괴로움으로 인해 모두가 그를 먹었지만 더욱 만족하지 않았다. 먹기를 마치면 소멸(消滅)하여 모두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는 먹이를 구하느라고 잠도 잘 수 없었다. 몸은 편안하지 아니하여 나쁜 마음은 더욱 더해졌다.
혹은 하루 낮과 밤, 반 달과 한 달을 지나고, 혹은 해를 지나서 나쁜 마음으로 인하여 목숨이 다하고 곧 아비지옥(阿鼻地獄)에 떨어지고 그곳에 태어나 커다란 고뇌를 받은 것은 백천(百千) 구지(俱胝) 나유타(那由他)의 세월이었다.
혹 그 몸을 버리면 다시 보기만 하면 해를 입는 독사 가운데 태어났었다.
이와 같이 차례로 5백 세(歲)를 지나서는 보기만 해도 해를 입는 독사의 몸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만약 그가 그 몸을 버리면 다시 아비지옥에 떨어졌으니, 그 악이 모여서 이와 같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생에 있어서 그는 독사인 어머니의 사랑에 묶였기 때문에 약간의 벌레를 죽여서 그에게 주워 먹게 하였다. 먹기를 마치자 배가 불러 몸이 편안해졌고, 곧 잠들어 밤낮 깨지 않았다.
그가 잠들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그를 위하여 많은 여러 가지 벌레를 죽였는데, 그 수가 수천에 이르렀다. 그 끊은 목숨을 좌우에 늘어놓아 주위를 둘러싸놓고, 또 그의 입가에 두어 모두가 커다란 더미를 이루었다.
그는 잠에서 깨어 그 벌레더미를 먹고 몸이 윤택하고 포만하여 다시 편안함을 얻었으며 이어서 다시 잠들어 이레를 지났다.
그의 어머니는 다시 이레 밤낮으로 수많은 벌레를 죽여 그의 입가에 두었는데 커다란 더미를 이루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나 그 벌레더미를 먹었다. 그러나 아직도 다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의 어머니가 온갖 벌레를 죽여가지고 와 모아 하나의 더미를 이룬 탓이었다.
그것을 보고 그는 곧 생각하였다.
‘기이하구나, 내 어머니는 능히 여러 가지 일을 잘 하는구나.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벌레를 구해 내가 먹도록 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만족할 줄 모른다. 그리고 먹기를 그치지 않고 끝을 모른다.
나는 지금 마땅히 내 어머니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내 먹이를 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나는 지금 어머니에게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겠는가?’
그는 어머니에 대해 자애심(慈愛心)을 일으키고 이로운 곳이 있는 것을 알았으며, 은혜가 있음을 알아 곧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만족한 생각을 내었다.
그는 먹고 몸이 윤택해지자 또 어머니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이 일어나서 더욱 부드럽게 되었다. 그리하여 곧 잠들어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때 나무와 풀을 베는 사람들 모두가 함께 이를 보고 곧 날카로운 도끼로 그의 목숨을 끊으니 그의 목숨이 다하였다.
전다라(旃陀羅: 망나니)가 있었는데 이름을 기허(氣噓)라 하였다. 그의 아들의 집에 태어났지만 도리어 원한[惡心]이 있었다. 그때 조부 기허는 죽은 뒤였고, 기허의 아들이 망나니 일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허의 아들도 뒤이어 죽었다. 그가 죽은 뒤 드디어 이 업(業)이 끊어졌다. 사형을 당해야 할 사람이 있어도 사형을 집행할 사람이 없었다.
이때 대신(大臣)이 왕에게 말하였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아셔야 합니다. 그 형벌을 주관한 자의 이름은 기허라 합니다. 그의 목숨은 이미 다하였고, 그에게 아들이 있었지만 그의 목숨 역시 다하였습니다.
대왕이시여, 지금 죽음을 당해야 할 사람은 있어도 죽일 사람은 없습니다.’
이때 왕이 대신에게 말하였다.
‘그 기허의 문중에 혹 일족이 있어서 그의 세업(世業)을 이어받아 살아갈 만한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
대신이 왕에게 아뢰었다.
‘기허의 가문에 지금 고아(孤兒)가 있어서 세업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왕이 신하에게 분부하였다.
‘너희는 가서 그 고아로 하여금 와서 나를 보게 하라.’
대신은 왕의 명령을 받아 그를 이끌고 와서 왕에게 보였다.
왕이 말하였다.
‘동자(童子)야, 너는 이미 기허의 세업(世業)을 받아 살고 있다.
어찌하여 죽여야 할 자를 형살(刑殺)하는 일을 익히지 않는 것이냐?’
그가 왕에게 대답하였다.
‘존경하옵건대 왕의 가르침과 같이 하고자 하지만 저에게는 친족이 있어 제가 죽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종래의 명령에 따르게 하고자 하신다면 잠깐 저를 집에 들어가도록 해 주십시오. 곧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동자야, 너는 때를 잘 알아서 마땅히 빨리 돌아와야 한다.’
그는 집에 이르러 거느린 처자와 모든 권속의 목숨을 모두 끊어버리고 왕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왕에게 아뢰었다.
‘대왕이시여, 마땅히 아십시오. 저의 친족 모두를 남김없이 죽였습니다. 제가 죽이는 것을 막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직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저에게 할 바를 명령 해주십시오.’
이에 곧 칼과 곤장, 죽이는데 쓰이는 도구를 주었다.
그러나 그는 비로 받지 않았다.
왕이 다시 말하였다.
‘너는 지금 어찌하여 칼과 곤장을 받지 않느냐?’
그가 왕에게 대답하였다.
‘대왕이시여, 지금 저는 이미 형살(刑殺)을 집행하는 사람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습니다.
저에게 이[牙齒]가 있으니 칼이나 곤장을 빌리지 않겠습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아십시오. 만약 이가 없다면 그 칼과 곤장을 쓰겠습니다.
저에게 이가 있고 죽음에 합당한 자가 있다면 저는 제 이를 가지고 그의 목숨을 끊겠습니다. 그의 피를 마셔 나의 몸을 윤택하게 하고 기력을 더하겠습니다.’
이에 곧 죽음에 합당한 사람의 목 줄기를 이로 물어뜯어 목숨을 끊고 이어 그 피를 마시었다.
그 피를 다 마시더니 기력이 갑절이나 더해져 위세가 삼엄하고 치성하여 악행을 갑절이나 더하였다.
선남자여, 사람을 죽이는 것을 다스리기 어려운 자[彼難調伏殺害人者]는 그때 많은 중생들을 죽여 그들의 피를 마시고 나쁜 마음이 더욱 치성했고, 마음의 지혜는 더욱 맹렬하고 날카로워졌다.
이처럼 지혜가 날카로운 득문(得聞: 불법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의 보살은 이름이 무소유(無所有)였다.
세존께 공(空)의 뜻을 여쭈어 번뇌[漏]를 끊고, 번뇌와 전도(顚倒)된 분별을 일으키지 않았다.
진에(瞋恚: 눈을 부릅뜨고 화를 냄)된 마음[意]과 질투와 간탐(慳貪)을 끊어버렸다.
은의(恩義)가 없는 곳을 남김없이 능히 깨뜨리고 없애 무언설(無言說)을 얻었으며 부처님이 있는 곳을 따라 해설을 들을 때, 듣고 나서는 다시 날카로운 지혜가 더하였다.
또 모든 부처님의 대신통사(大神通事)에 들었다. 때문에 이처럼 승리(勝利)의 공덕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