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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의보살경 제2권
[정진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 다함없다]
그때 사리불이 무진의 보살에게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선남자여, 그대가 이미 보살의 인욕바라밀의 다함없음을 명쾌하게 말하였으니,
그대가 다시 보살의 정진[毘梨耶]바라밀을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보살이 얻는 다함없는 정진바라밀이란 어떤 것입니까?”
무진의 보살이 말하였다.
“사리불이여, 보살은 여덟 가지 일을 원만히 갖추어 수행하고 정진해서 다함이 없으니, 그 여덟 가지란,
큰 장엄을 내되 다함이 없음이요,
용맹정진을 쌓고 모으되 다함이 없음이요,
모든 착함을 수행하되 다함이 없음이요,
중생을 교화하되 다함이 없음이요,
수도(修道)를 돕는 공덕이 다함없음이요,
최상의 지혜를 돕되 다함이 없음이요,
위없는 슬기를 돕되 다함이 없음이요,
불법을 모으고 돕되 다함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보살의 다함없는 장엄인가?
모든 나고 죽음에 마음이 지치거나 게으르지 않아서 어느 겁수(劫數) 동안 마땅히 불도를 성취하겠다고 계산하지 않으므로 약간의 겁 동안은 장엄을 짓기도 하고 약간의 겁 동안은 장엄을 짓지 않기도 해서, 보살이 장엄하면서 지나는 겁수는 헤아릴 수 없으니,
예를 들면 오늘부터 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를 하루 낮, 하룻밤으로 삼고, 이와 같은 30일을 한 달로 삼으며, 열두 달을 한 해로 삼아서, 이 백천만 년 동안에 한결같이 도 닦을 마음을 내어 한결같이 부처님을 봅니다.
이와 같이 발심하여 보게 되는 부처님들은 항하의 모래 수와 같으며, 그 부처님이 계신 곳에서 바야흐로 모든 중생의 심행(心行)을 알고, 이와 같이 모든 중생의 심행을 알고서도 오히려 물러서지 않으니,
이것을 게으르지 않는 장엄, 다함이 없는 장엄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을 보고 발심하여 다른 중생의 마음이 행하는 바를 아는 때를 지나면서 항상 보시바라밀과 지계바라밀과 인욕바라밀과 정진바라밀과 선정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을 닦아 원만히 갖추고, 보리를 돕는 모든 법을 닦으며, 상호[三十二相八十種好]와 열 가지 힘[十力]과 네 가지 두려움 없는 법[四無畏法]과 부처님 외엔 누구도 같지 않은 열여덟 가지 법[十八不共法]을 갖추어 닦고, 그 외에 일체 모든 불법을 갖추어 닦기 때문에
이것을 게으르지 않은 장엄, 다함이 없는 장엄이라고 합니다.
만약 어떤 보살이 이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 보살은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알아야하니, 이것을 보살의 다함없는 장엄이라고 합니다.
어떤 것이 보살의 다함없는 용맹정진인가?
만약 삼천대천세계가 타오르는 불길로 가득 차있더라도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이 불을 뚫고 지나가며, 법을 듣고 중생을 교화하여 중생들을 선법(善法)에 편히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도 또한 이와 같이 불을 뚫고 지나갈 것이니,
이것을 보살의 다함없는 용맹정진이라고 합니다.
무슨 인연으로 용맹정진이라고 하는가?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하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을 고요하게 하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을 조복하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의 번뇌를 다 없애기 때문이며,
항상 게으르거나 자만하지 않고 굳건히 물러나지 않아서 마음이 대비(大悲) 가운데 편안히 머물러 언제나 부지런히 정진함은 중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용맹정진이라고 합니다.
보살은 다닐 때 걸음걸음 마음을 모으되 다 보리를 향함은 항상 중생을 관찰하여 교화하려 하기 때문이며, 비록 이렇게 관찰하더라도 번뇌를 일으키지 않으니,
이것을 보살의 다함없는 용맹정진이라고 합니다.
어떤 것을 보살의 닦아 익힘이 다함없다고 하는가?
일어나는 모든 착한 마음이 항상 보리를 원하므로 이것을 보살의 닦아 익힘이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근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여 애초부터 다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여,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한 방울의 빗물이 큰 바다 속에 떨어질 때 그 한 방울의 물이 비록 적기는 하지만 끝내 없어지지는 않는 것처럼
보살이 선근을 보리에 회향하길 원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여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선근을 닦아 모은다는 것은 이른바 바른 회향으로 선근을 닦아 모으며,
중생을 옹호하기 위해서 선근을 닦아 모으며,
중생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따르기 위해서 선근을 닦아 모으며,
일체지(一切智)를 성취하고자 하기 때문에 선근을 닦아 모으는 것이니,
이것을 보살의 닦아 모음이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어떤 것을 보살의 교화가 다함이 없다고 하는가?
중생의 성품은 헤아릴 수 없으므로 보살은 그것을 마땅히 헤아리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하루 동안에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중생을 교화한다고 말하여 이렇게 계산할 수 있는 숫자로부터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고 칭량할 수도 없는 겁수에 이르기까지 중생을 교화한다면,
비록 이와 같이 교화된 중생의 수를 칭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다 하더라도
중생의 부분에 있어는 백분ㆍ천분ㆍ백 천만분에서 나아가 산수(算數)의 비유로써 알 수 있는 중생에 이르기까지 아직 교화되지 않았으니,
왜냐하면 이 중생의 성품이 한량없고 그지없고 칭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보살이 이런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 보살은 정진을 부지런히 닦는 이라고 알 것이니,
이것을 보살의 교화가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어떤 것을 보살의 도를 돕는[助道] 공덕이 다함이 없다고 하는가?
보살이 닦은 도를 돕는 공덕이 한량없고 그지없으므로 보살이 그것에 대해 마땅히 제한하거나 헤아리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중생이 가지고 있는 과거 미래 현재의 공덕과 성문ㆍ연각이 가지고 있는 공덕은 부처님에게 있어서는 비로소 한 털구멍의 공덕을 성취한 것에 불과하니,
이와 같이 하나하나의 털구멍이 가지고 있는 공덕으로부터 모든 털구멍의 공덕에 이르기까지 모두 모아 성취하여야 비로소 여래의 한 수형호(隨形好:相好)를 성취하며,
이와 같이 하나하나의 수형호로부터 나아가 모든 수형호의 공덕에 이르기까지 모두 모아 성취하여야 여래의 한 모양[相]을 성취하며,
이러한 하나하나의 모양으로부터 나아가 서른 가지의 모양을 모으고 이 서른 가지 모양의 백 배 공덕으로 비로소 여래의 눈썹 사이에 있는 흰터럭의 모양을 이루고,
나아가 이 흰터럭 모양의 백 천 공덕을 배로 닦아 모아야 비로소 여래의 볼 수 없는 정수리 모양을 이루니,
이것을 보살의 조도 공덕이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어떤 것을 보살의 지혜를 도움[助智]이 다함이 없다고 하는가?
보살이 닦은 지혜를 도움은 한량없고 그지없으므로 보살은 그것에 대해 마땅히 수를 제한하지 않으니,
만약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중생이 한 가지 신행(信行)으로 지혜를 성취한다하더라도
이러한 신행을 하나의 법행(法行)으로 성취한 지혜와 비교한다면 백분ㆍ천분ㆍ백천분ㆍ백천만분에서 나아가 어떤 산수(算數)의 비유로도 미칠 수 없습니다.
만약 삼천대천세계의 중생이 모두 법행을 성취하더라도
한 팔인(八忍)을 성취한 지혜와 비교한다면 백분 천분 백 천만분에서 나아가 어떤 산수의 비유로도 미칠 수 없습니다.
만약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중생이 모두 팔인의 지혜를 성취한다하더라도
한 수다원(須陀洹)이 성취한 지혜와 비교한다면 백분ㆍ천분ㆍ백천분ㆍ백천만분에서 나아가 어떤 산수의 비유로도 미칠 수 없습니다.
만약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중생이 모두 수다원의 지혜를 성취한다하더라도
한 사다함(斯陀含)이 성취한 지혜와 비교한다면 백분ㆍ천분ㆍ백 천분ㆍ백 천만분에서 나아가 어떤 산수의 비유로도 미칠 수 없습니다.
만약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중생이 모두 사다함의 지혜를 성취한다하더라도
한 아나함(阿那含)이 성취한 지혜와 비교한다면 백분ㆍ천분ㆍ백천만분에서 나아가 어떤 산수의 비유로도 미칠 수 없습니다.
만약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중생이 모두 아나함의 지혜를 성취한다하더라도
한 아라한(阿羅漢)이 성취한 지혜와 비교한다면 백분ㆍ천분ㆍ백천분ㆍ백천만분에서 나아가 어떤 산수의 비유로도 미칠 수 없습니다.
만약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중생이 모두 아라한의 지혜를 성취하였더라도
한 연각(緣覺)이 성취한 지혜와 비교한다면 백분ㆍ천분ㆍ백천분ㆍ백천만분에서 나아가 어떤 산수의 비유로도 미칠 수 없습니다.
만약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중생이 모두 연각의 지혜를 성취한다하더라도
한 백 겁 동안에 보살이 성취한 지혜와 비교한다면 백분ㆍ천분ㆍ백천분ㆍ백천만분에서 나아가 어떤 산수의 비유로도 미칠 수 없습니다.
만약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중생이 모두 백 겁 동안 보살이 성취한 지혜를 성취한다하더라도
인욕을 얻은 한 보살이 성취한 지혜와 비교한다면 백분ㆍ천분ㆍ백천분ㆍ백천만분에서 나아가 어떤 산수의 비유로도 미칠 수 없습니다.
만약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중생이 모두 인욕을 얻은 보살이 성취한 지혜를 성취한다하더라도
물러남이 없는 한 보살이 성취한 지혜와 비교한다면 백분ㆍ천분ㆍ백천분ㆍ백천만분에서 나아가 어떤 산수의 비유로도 미칠 수 없습니다.
만약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중생이 모두 물러나지 않는 보살의 지혜를 성취한다하더라도
한 생을 지난 뒤 반드시 부처님 지위에 오를 한 보살이 성취한 지혜와 비교한다면 백분ㆍ천분ㆍ백천만분에서 나아가 어떤 산수의 비유로도 미칠 수 없습니다.
만약 한량없고 그지없는 세계의 중생이 모두 한 생을 지난 뒤 반드시 부처님 지위에 오를 보살이 성취한 지혜와 같게 되더라도
한 여래의 시처비처지력(是處非處智力:진리와 진리 아닌 것을 아는 힘)의 지혜와 비교한다면 백분ㆍ천분ㆍ백천분ㆍ백천만분에서 나아가 어떤 산수의 비유로도 미칠 수 없습니다.
통틀어서 말하면 여래의 열 가지 힘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과 열여덟 가지 다른 중생과 같지 않은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
만약 보살이 이런 말을 듣고서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 보살은 부지런히 정진하는 사람인 줄 알아야합니다.
이것을 보살의 지혜를 도움[助智]이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또 어떤 것을 보살의 지혜를 도움[助慧]이 다함이 없다고 하는가?
모든 중생이 소유한 심행(心行)은 다할 수 없으므로 보살은 그 가운데서 마땅히 숫자를 헤아리지 않으니,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중생이 소유한 심행을 만약 어떤 사람이 한 생각 가운데서 이러한 삼세 중생이 소유한 심행을 갖추고, 이와 같이 생각 생각마다 모두 이러한 갖가지 심행을 갖추어서,
마치 한 사람의 마음 가운데 갖추어진 심행과 같이 일체의 한량없고 그지없는 모든 중생도 다 이와 같은 것입니다.
만약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중생이 소유한 탐욕과 음심(婬心)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온갖 번뇌를 어떤 사람이 한 생각 중에 이러한 삼세 중생의 모든 번뇌를 갖추고,
이와 같이 생각 생각마다 모두 또 이러한 온갖 한량없고 그지없는 번뇌를 갖춘다면,
한 사람의 마음 가운데 갖추어진 온갖 번뇌와 같이 한량없고 그지없는 중생들도 모두 또한 이와 같습니다.
보살은 그 가운데서 지혜의 광명을 내되 한 생각의 지혜 광명에는 아무런 티끌이나 가림이 없어서
과거ㆍ미래ㆍ현재 중생의 번뇌와 마음이 반연하는 모든 경계와 나고 머물고 사라지는 모양을 남김없이 다 비추니,
이 보살은 모든 중생이 삼세(三世)에 서로 응하는 번뇌를 다 알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사리불이여, 마치 허공이 덮어주지 않는 곳이 없는 것처럼
보살의 지혜 광명도 그와 같아서 비추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만약 보살이 이런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 보살은 정진을 부지런히 행하는 사람인 줄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을 보살의 지혜를 도움이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어떤 것을 보살이 불법을 도움을 닦아서 모음이 다함이 없다고 하는가?
보살이 행하는 불법을 도움을 닦는 일은 한량없고 그지없으므로 보살은 그 가운데에서 마땅히 양(量)을 제한하지 않으니,
처음 발심할 때로부터 도량에 앉을 때까지 그 중간에 6바라밀을 수행하여 원만히 갖추고 모든 조도법(助道法)을 수행하여 원만히 갖춥니다.
이와 같이 발심하여 수행한 모든 선근(善根)은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으며 모두 불법을 도우니,
이것을 보살이 불법을 돕는 수행을 하여 다함이 없다고 하며,
보살이 여덟 가지 일로 수행 정진하여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의 정진도 다함이 없습니다.
몸의 선업(善業)이거나 입의 선업이거나 뜻의 선업이거나 항상 부지런히 하여 게으르지 않으니, 왜냐하면 보살이 정진하는 일은 언제나 몸과 입과 뜻과 서로 응하며, 비록 몸과 입으로 정진하더라도 모두 마음에서 연유하니, 마음이 증상(增上)이 됩니다.
어떤 것을 보살의 마음 정진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마음의 시작과 마음의 끝이니,
마음의 시작이란 처음으로 마음을 일으켰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보리의 마음이 적멸(寂滅)하기 때문이며,
마음의 시작이란 모든 중생에게 대비를 일으키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나와 남이 없기 때문이며,
마음의 시작이란 모든 중생을 거두어주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모든 법을 갖지 않기 때문이며,
마음의 시작이란 생사를 싫어하지 않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삼계가 없기 때문이며,
마음의 시작이란 가진 것을 버리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깔봄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시작이란 계를 받아 지니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계를 지니지 않기 때문이며,
마음의 시작이란 인욕을 수행하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성냄과 싸움이 없기 때문이며,
마음의 시작이란 모든 선(善)을 일으켜 수행하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홀로 섞이지 않기 때문이며,
마음의 시작이란 선정을 닦아 모으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이며,
마음의 시작이란 많이 들어도 싫어함이 없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잘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시작이란 이치를 닦아 익혀 질문하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법에는 말함이 없기 때문이며,
마음의 시작이란 지혜를 구하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희론(戱論)을 끊기 때문이며,
마음의 시작이란 네 가지 범행(梵行)을 닦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참된 지혜를 버리기 때문이며,
마음의 시작이란 다섯 가지 신통을 갖추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번뇌가 다함을 갖추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시작이란 마음이 머무는 곳[念處]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생각에 사유(思惟)가 없기 때문이며,
마음의 시작이란 바르게 힘씀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선(善)과 불선(不善)을 통합하기 때문이며,
마음의 시작이란 여의분(如意分)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과보 얻음을 갖추기 때문이며,
마음의 시작이란 모든 감관[根]의 방편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모든 감관의 법을 관찰하기 때문이며,
마음의 시작이란 모든 힘을 모으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지혜가 결코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며,
마음의 시작이란 보리 돕는 법[助菩提分]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모든 배움의 방편을 잘 알아서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시작이란 도는 돕는 법을 구하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나아감이 없기 때문이며,
마음의 시작이란 적멸을 구하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마음이 영원히 적멸하기 때문이며,
마음의 시작이란 지혜를 일으키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법을 잘 알기 때문이며,
마음의 시작이란 인(因)을 대략적으로 알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인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시작이란 다른 이로부터 듣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모든 법에 대해 방일(放逸)함이 없기 때문이며,
마음의 시작이란 장엄한 꾸밈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몸의 성품을 알기 때문이며,
마음의 시작이란 입을 장엄하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성스럽게 침묵하기 때문이며,
마음의 시작이란 삼해탈(三解脫:空ㆍ無相ㆍ無願解脫)을 행하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조작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시작이란 네 마구니[四魔:陰魔ㆍ煩惱魔ㆍ死魔ㆍ天子魔]를 조복하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번뇌와 습기를 버리기 때문이며,
마음의 시작이란 방편을 알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지혜에 통달하기 때문이며,
마음의 시작이란 발심(發心)을 잘 알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제도(濟度)를 잘 알기 때문이며,
마음의 시작이란 세간의 습속을 알기 때문이고 마음의 끝이란 참된 이치를 알기 때문이니, 이것을 보살의 마음 정진이라고 합니다.
이 마음은 정진을 원만히 갖추어 다함이 없으므로 처음과 끝을 말하나,
보살은 이와 같이 조작하는 모양을 원만히 갖추되 마음은 언제나 조작하는 업에 머물지 않으니, 이것은 보살이 모든 업의 모양에 대해 알고서 일부러 조작하기 때문입니다.
왜 보살은 알면서 일부러 조작하는가?
모든 선근(善根)을 위하기 때문이니,
모든 중생을 위해 대비를 닦기 때문에 함이 있음[有爲]을 여의지 않으며,
모든 부처님의 참되고 묘한 지혜를 행하기 때문에 생사에 떨어지지 않으므로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정진바라밀이 다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법을 연설할 때 칠십 나유타의 모든 하늘과 사람들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고, 3만 2천의 보살마하살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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