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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영락경 제2권
5. 법문품[2]
[여섯 가지 영락법]
이때 부처님께서 무정상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족성자여. 여래 앞에서 능히 사자후(獅子吼)를 내었으니, 이제 반드시 그대를 위하여 낱낱이 분별해 말하리라. 살펴 듣고 살펴 들어서 잘 사유하고 생각하여라.
보살마하살이 처음 뜻을 발할 때부터 성불에 이르기까지 항상 마땅히 몸ㆍ입ㆍ뜻에 대한 단속을 충분히 갖추고, 6바라밀을 장엄하여 색(色)의 본래 없음을 요달해서 색의 근본을 보지 않는다.
그리하여 색을 장엄하는 여섯 가지 영락법에서 여래의 깊은 곳간의 영락을 얻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여섯 가지 영락법인가?
선남자나 선여인아, 만일 눈으로 색을 본다면 저 일어난 색을 아나니,
중생의 음행과 성냄과 어리석음도 나아가야 할 때 문득 나아가고 물러나야 할 때 문득 물러난다.
눈은 저 색이 아니며 색도 곧 눈이 아니다.
저 색을 없애려고 생각해서 눈의 상념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나니,
이것을 첫째의 법 청정영락(法淸淨瓔珞)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야, 색의 성품은 자연이고 식(識)도 또한 자연이다.
저 색과 나의 식은 번뇌를 일으키지 않으며,
저 속박을 빨리 풀어서 나의 유(有)에 물들지 않으니,
이것을 둘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야, 갖가지 선의 근본은 색의 형상 없음을 분별하고 사유하는 것이다. 근본이 청정하면 색도 또한 청정하나니,
이것을 셋째의 법 청정영락이라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야, 색에 집착해서 욕심에 물듦은 색에 욕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색의 성품은 본래 없거늘 하물며 음욕이겠는가?
이것을 넷째의 법 청정영락이라 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야, 색을 항상하다고 계교하는 것은 눈의 경계가 아니다.
의식의 분별이 문득 망설임을 일으켜서 항상함과 무상함, 나아가 무아(無我)까지 계교한다.
색의 성품은 텅 비고 적멸해서 영원히 일어나고 멸함이 없나니,
이것을 다섯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야, 색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요, 안식(眼識)은 머물면서 받는 것이다.
유색(有色)의 유위와 유색의 무위, 유위의 색과 식은 문득 도의 뿌리를 망가뜨리고, 무위의 색과 식은 과보를 성취한다.
유(有)와 무(無)의 모습을 사유하고 분별하는 것을 여섯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스스로 색과 식을 거두는 여섯 가지 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여, 스스로 색과 식을 거두는데, 다시 여섯 가지 일[六事]이 있느니라.
어떤 것을 여섯이라 하는가?
족성자야, 식의 모습은 형상이 없어서 만단(萬端)으로 달리면서 흘러간다.
앞에 바깥 티끌이 있으면 문득 번뇌[塵勞]를 내나니, 선이면 선한 식이고 악이면 악한 식이다. 악한 식에는 선이 없고 선한 식에는 악이 없다.
보살이 뜻을 거두어서 선과 악의 식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첫째의 법 청정영락이라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여, 안식으로 공(空)을 관찰해서 있는 바가 전혀 없다면, 문득 공의 상념[空想]을 내서 선악의 과보가 없다.
금생(今生) 뒤에 다시 과보를 받음을 보지 않고, 그 가운데에서 뜻을 거두어 뒤바뀐 상념을 일으키지 않나니,
이것을 둘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여, 식(識)으로 무아(無我)를 구별해서 어느 때에는 근문(根門)의 깨끗하지 못함을 보고서도 청정함이 있다고 계교하며,
혹은 다시 근문에 깨끗함이 있다고 생각하고도 깨끗하지 않음을 계교하는데,
이 가운데에서 뜻을 거두어 두 가지 상념을 일으키지 않는 것,
이것을 셋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여, 식(識)으로 저 성냄[恚]에 선(善)과 불선(不善)이 있다고 보면서 선은 늘 선이라 말하고 불선 또한 마찬가지이니,
그 가운데서 뜻을 거두어서 인욕을 갖추는 것을
넷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야, 식(識)으로 중생에게는 선으로 나아가는 자와 선으로 나아가지 않는 자가 있고,
굳건한 주(住)ㆍ행(行)ㆍ지(地)와 굳건치 못한 주ㆍ행ㆍ지가 있음을 아는데,
그 가운데 뜻을 거두어 마음이 불퇴전인 것을
다섯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여, 식(識)으로 앞의 색(色)에 도(道)가 있고 속(俗)이 있음을 관찰하지만, 도를 보고도 도인 줄 알지 못하고 속을 보고도 속인 줄 알지 못하는데, 그 가운데서 뜻을 거두어 도와 속을 잘 분별하는 것을
여섯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이식이 상념을 일으키는 여섯 가지 일]
이식(耳識)이 상념을 일으키는데, 다시 여섯 가지 일이 있느니라.
무엇을 여섯이라 하는가?
족성자여, 귀로 소리를 듣는데 열여덟 가지 변동이 있나니,
혹은 바람 소리나 나무와 산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혹은 때로 새ㆍ짐승ㆍ음악의 소리도 있다.
소리에는 선과 악이 있고, 기록할 것과 기록하지 못할 것이 있는데,
그 가운데 뜻을 거두어서 이식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을
첫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여, 어느 때에 중생이 문득 세속을 통째로 사무치게 들을 수 있어서 혹은 백 유순, 2백 유순에서 무수한 온갖 부처님 국토에까지 이르는데,
마치 맹웅세존(猛雄世尊:부처님)이 도량에 나아가 등정각을 이루고자 하시는 것과 같다.
이때에 하늘과 땅이 여섯 번 반복해서 진동하는데, 음향을 분별하니 모조리 허공으로 돌아간다.
이 가운데서 뜻을 거두어 상념의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둘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여, 이식이 소리를 들으면 본래 있는 바가 없는데도 문득 온갖 상(想)을 내고 약간의 염(念)을 일으키는데,
그 가운데서 뜻을 거두어 삿된 생각이 없는 것을
셋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여, 이통(耳通)이 청정해서 그가 받는 형상에 청정함도 있고 탁함도 있음을 알지만,
탁한 것을 보아도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맑은 것을 보아도 도의 마음을 내지 않는다.
이 가운데에서 뜻을 거두어서 상대와 나[彼我]의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넷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여, 어느 때에 이식(耳識)으로 타방의 다른 찰토(刹土)의 연설을 들었는데,
5분법신(分法身)이 현재 어머니 태에 처했으되 티끌 욕심에 물들지 않았고,
다시 현재 출가하였으되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보리수[樹王] 밑에서 등정각을 이루었다.
이 가운데에서 뜻을 거두어서 도(道)와 속(俗)을 분별하는 것을
다섯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여, 이식으로 시방 국토의 모든 부처님이 굴리시는 허공 법륜을 들어 살피고,
손가락을 튀기는 사이에 한량없는 중생의 무리를 제도하면서도 내가 제도한 바 있다고 스스로 칭하지 않으니,
이 가운데서 뜻을 거두어 교화된 중생을 세지 않는 것을
여섯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부처님이 다시 무정상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이식에 의거해 닦는 여섯 가지 법]
“저 이식(耳識)에 의거해 여섯 가지 법을 닦아 행해야 하느니라.
무엇이 그 여섯인가?
족성자여, 권도의 방편을 행하여 본래 지은 바를 기록하고 영락을 닦아 익혀서 차례를 넘지 않으니,
이것을 첫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여, 행의 무아(無我)에 의지하여 몸의 근본을 헤아리지 않으니,
이것을 둘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여, 여섯 가지 법을 갖추어서 계의 성품을 헐지 않으니,
이것을 셋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여, 이식의 현묘한 비침[玄鑑]이 무애를 통달해서 큰 서원과 크게 인자한 마음을 버리지 않으니,
이것을 넷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여, 이식이 진취적인 행보로 이 법은 선도(善道)인가, 이 법은 악도인가, 이 법은 유위인가, 이 법은 무위인가를 요달해 아는데,
이 가운데에서 분별하여 이식을 그르치게 하지 않으니,
이것을 다섯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여, 이식으로 온갖 부처님 세계를 분별하여 특수하고 깊고 미묘한 법을 듣고서 낱낱이 모든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니,
이것을 여섯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닦아 행하는 여섯 가지 법]
다시 여섯 가지 법이 있으니, 마땅히 닦아 행함을 생각하여야 한다.
어떤 것이 여섯인가?
부처님의 색신은 청정하여서 애욕의 몸이 아니니, 몸으로 갖가지 향을 놓아서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에 널리 두루하고, 낱낱의 향기는 모두 한량없는 영락법문을 연설하는데, 중생에 의지하면서도 중생의 상념이 없다.
이 가운데서 비식(鼻識)의 구족함을 성취하니,
이것을 첫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여, 부처님의 한량없는 향의 세계는 계덕(戒德)의 향으로써 시방 항하모래 수효의 국토에 널리 두루하니,
그 가운데에서 한량없는 중생을 거두어 취하는데,
이것을 둘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여, 다시 비식으로 저 향의 세계를 살핌으로써 응당 3악도로부터 온갖 속박과 집착을 끊어서 비식이 응당 행하는 근본을 잃지 않으니,
이것을 셋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여, 저 비통(鼻通)이 한량없는 심제(審諦)의 교법을 연출함으로 인해서 비식이 청정하여 뭇 행을 충분히 갖추니,
이것을 넷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여, 비식이 셋이 있으니, 경계의 밖으로부터 안의 식에 들어오는 것과, 선악의 냄새를 맡는 것과, 여덟 가지 도와, 열여섯 가지의성현의 자취를 분별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섯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여, 비식으로 한 생각, 한뜻을 냄새 맡아서 저 중생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법을 알아서 낱낱이 한량없는 법문을 펼치니,
이것을 여섯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무정상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법 청정영락 여섯 가지]
“다시 마땅히 여섯 가지 법을 갖추어야 하느니라.
부처의 모습은 모습이 없으므로 수호해 지닐 수 없으니, 성도(成道)의 장엄도 스스로 장식하느니라.
어떤 것들이 여섯 가지인가?
족성자여, 부처님이 나무 아래 앉아 한 모습[一相]을 닦아 익혀서 중생의 행실이 차이 없음을 보시고는 도솔천으로부터 신(神)을 어머님 태에 내리셨는데,
비록 속(俗)으로 변하였지만 현성(賢聖)은 잃지 않으셨고, 여래의 금계(禁戒)의 덕향(德香)은 한량없는 세계에 널리 두루하였으니,
이것을 첫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여, 비식(鼻識)의 모습을 닦아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 세계를 널리 알고,
가서 태어나되 형상 받음이 같지 않음을 알고는 다시 신족으로 교화하니,
이것을 둘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야, 비식의 분별로 모습 모습마다 싫어함이 없고,
다시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를 관찰해서 다 일생 보처보살을 보는데 향기가 시방세계에 두루 가득 찼다. 그 가운데에서 뜻을 거두어 분산시키지 않으니,
이것을 셋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여, 처음에 부처님이 나무에 앉아서 속으로 스스로 사유하시길 ‘이제 나의 성불은 필연이라서 의심이 없지만, 어떻게 증험해야 할까?
하늘ㆍ용ㆍ귀신 나아가 시방 여러 부처님으로 하여금 내가 지금 보리수 밑에 앉아있음을 알게 해야겠다’하고는,
곧 모든 털구멍 하나하나에서 온갖 향을 놓아서 시방세계를 다 오게 하여 보살이 성불할 때까지 호위하고 옹호케 하였다.
이것을 넷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야, 보리수[樹王] 밑에서 이미 등각을 이루고 나시니, 온갖 모습을 갖추셨고 하룻밤 새에 세 가지 밝은 지혜를 이루셨다.
초야(初夜)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지나간 세상의 항하의 모래 수효 같은 부처님들이 여기서 성도(成道)하셨는데, 무슨 법을 먼저 펴셨고 어떻게 교화하셨는가?’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사유하면서 다시 한밤이 되자,
‘옛적의 모든 부처님이 여기서 성도하여서 한량없는 바라밀들을 모두 설하였는데, 나도 이제 응당 모든 부처님의 법과 같이 하리라’고 생각하셨다.
그리고는 문득 온갖 향으로 형상이 없는 정의(定意)에 드시었다.
다시 선정에서 일어나시어 또 생각하시길
‘옛적의 여러 부처님이 비록 이곳에서 성불하시었지만, 누구를 먼저 제도하시고 어떻게 법을 설하시었나?’라고 하였는데,
그때 문득 시방세계의 온갖 뭇 향기를 맡으시니, 각각 응당 제도할 이를 제도하라는 향기가 있었다.
다시 그곳에서 낱낱이 사유하면서 후야(後夜)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물러서지 않으면서 향의 경계를 빠트리지 아니하셨나니,
이것을 다섯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여, 이미 코의 모습을 얻고 나서 속으로 스스로 사유하시길
‘세상의 향기는 무상하여 나고 죽는 법을 심는다. 무슨 방편으로 도덕의 향기를 구할까?’라고 하여서,
문득 스스로 선정에 들어가 지혜와 선정의 5분법신을 분별하는데, 식(識)으로 가서 구별하였다.
즉 계(戒)의 향으로 몸을 거두어 잡으시고, 정(定)의 향으로 뜻을 거두어 잡으시고, 혜(慧)의 향으로 혼란함을 거두어 잡으시고, 해혜(解慧)로 뒤바뀐 소견을 거두어 잡으시고, 도지(度知)로 무명을 거두어 잡으셨다.
이것을 여래가 5분 법향으로 그 몸을 영락하셨다고 말하니,
이것이 여섯째의 법 청정영락이니라.”
[법 청정영락 다섯 가지]
부처님께서 다시 무정상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여래의 혀의 모습은 온갖 모습[相] 중에서도 묘하다.
언교(言敎)를 연설하면서도 네 가지 허물이 새지 않고, 본래 지은 바의 원으로 설법하여 교화하느니라.
입으로 교화하심이 청정하여 설식(舌識)을 잃지 않으시니,
이것을 첫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여, 본래 청정함을 닦아서 세 가지 행을 수호하고,
저 중생의 신식(神識)이 나아가는 바를 알아서 문득 법을 설하여 차서(次緖)를 잃지 않고 설식이 청정하니,
이것을 둘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여, 비록 입으로 법을 설하지만 가르침이 있고 소리가 있다.
말이란 식(識)으로부터 발해져서 밖에서 문득 교화를 받고,
다시 저 말을 따서 법을 설하게 되니, 그 가운데서 설식의 청정함을 스스로 거두어 잡느니라.
이것을 셋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야, 혀에 여러 가지 모습이 있는데 모습 모습마다 같지 않다.
하나하나 식(識)으로 화하여 법을 설함이 무궁하면서도 네 가지 변재를 잃지 않고 설식이 청정하고,
나아가 한량없는 항하 모래의 찰토까지도 말은 언어의 쓰임새에 따라 믿음을 받지 않음이 없다.
이것을 넷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여, 어느 때 어떤 사람이 저 설법을 듣고서
혹은 선(善)하기도 하고, 혹은 불선(不善)하기도 하고,
혹은 삿된 소견[邪見]을 말하기도 하고, 혹은 바른 소견을 말하기도 하면,
오히려 능히 힐난해서 의취(義趣)를 찾아 궁구하고 그 가운데에서 갖추어 혀의 의식을 잃지 않나니,
이것을 다섯째의 법 청정영락이라고 말하느니라.
[언교의 행ㆍ지혜ㆍ취향]
다시 다음으로 족성자야, 지나간 세상의 여러 부처님이 설하신 언교는 행이 있고 지혜가 있고 취향(趣向)이 있으며,
오는 세상의 여러 부처님도 행이 있고 지혜가 있고 취향이 있으며,
지금 세상의 여러 부처님도 행이 있고 지혜가 있고 취향이 있다.
어떤 것이 지나간 세상의 여러 부처님이 행이 있고 지혜가 있고 취향이 있는 것인가?
족성자야, 지나간 세상의 여래는 집착하는 바 없는 평등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몸이 멸하고 모습[相]이 멸하고 색(色)이 멸하시었다.
어떤 것이 몸이 멸한 것인가?
지나간 세상의 여래는 몸이 항상 머물러 있지 않아서 색신(色身)이 변하고 바뀌기를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며 생생(生生)에 스스로 멸하느니라.
비록 다시 오래오래 멸진(滅盡)하지만 오히려 몸이 있는 걸 이름하여 멸하지 않는다고 하나니, 이 유위의 몸은 무위의 경계에 들어가지 않는다.
‘여래의 몸’이란 5분(分) 법성(法性)으로서 부처가 있든 부처가 없든 항상 일정해서 변하지 않는다. 이것을 몸은 멸하지만 5분의 몸은 멸하지 않는다고 말하느니라.
이른바 모습이 멸한다는 것은 모습이 있고 색이 있음과 모습은 있지만 색은 없음이니라.
어떤 것이 모습이 있고 색이 있으며, 모습은 있지만 색은 없음인가?
안식의 경계는 바깥의 6입(入)의 근본이니, 이것을 모습이 있고 색이 있다고 말하느니라.
‘모습은 있지만 색이 없다’는 여러 유위법(有爲法)ㆍ무위법(無爲法)ㆍ정법(定法)ㆍ정하지 않은 법[無定法]이 안식의 경계가 아니니, 이것을 모습은 있지만 색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여섯 가지의 법 청정영락, 색의 세 가지 품]
이른바 ‘색의 멸함’에 대해서 색에 세 가지 품[三品]이 있는데, 형상이 있는 색ㆍ형상이 없는 색ㆍ더 커지는 색이다.
어떤 것이 형상이 있는 색인가?
입으로 뱉는 가르침, 심식(心識)이 지은 행은 앞에 따라 물들어 집착하니,
이것을 형상이 있는 색이라 말하느니라.
어떤 것이 형상이 없는 색인가?
바로 지금 설한 말처럼 선(善)도 있고 악도 있어서 뒤에 과보가 있음을 아는 것은 필연으로 의심하지 않는다.
지금 현재에 처해서 과거와 미래의 행을 짓지만 지금 안식에 보이는 바는 아니니, 이것을 형상 없는 색이라 말하느니라.
어떤 것이 더 커지는 색인가?
색에 다하지 않음이 있고 비색(非色)에 다함이 있으며, 색이 있음도 다하고 색이 없음도 다하니, 이것을 더 커진 색이라 말하느니라.
이와 같이 족성자여, 문득 여섯 가지의 법 청정영락을 갖추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