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고경 하권
[3승, 큰 성의 비유]
가섭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어찌하여 3승이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가섭아, 비유하자면 이런 것이다. 어떤 길잡이[導師]가 용맹하고 호걸스러운데, 모든 권속과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그가 머무는 곳에서 다른 곳으로 가고자 하여, 넓은 들의 험난한 길을 지날 때,
‘이 사람들이 피로하여 물러나 돌아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그들을 쉬게 하려고 그 앞길에 가짜로 큰 성을 만들고,
멀리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사람들에게,
‘앞에 큰 성이 있으니 빨리 갑시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모두 보니 그 성이 가까워지므로 서로 말하기를,
‘이것이 우리들이 쉴 곳이다’라고 했다.
곧 함께 성 안으로 들어가서 휴식하고 즐겼다.
그리고는 그 곳에 머무는 게 마음에 들어 앞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때에 길잡이가,
‘이 모든 사람들이 작은 쾌락을 얻고 곧 만족하게 여겨, 지치고 힘들어 쉬고 싶고 게을러져 더 나아갈 뜻이 없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때에 길잡이가 즉시 가짜 성을 없앴다.
그 모든 무리가 성이 없어진 것을 보고 길잡이에게,
‘이 무슨 일인가? 환상인가? 꿈인가? 진실인가?’라고 물었다.
길잡이가 사람들에게,
‘조금 전의 큰 성은 휴식을 위해 내가 가짜로 지은 것이오.
다른 성이 또 있으니 이제 그곳으로 갑시다.
어서 그 곳에 닿으면 즐겁고 편안할 것이오.’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예, 가르침대로 하겠습니다. 어찌 이 누추하고 좁은 곳을 즐거워하겠습니까?
당연히 편안하고 즐거운 큰 성으로 함께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길잡이는,
‘그렇습니다. 당연히 가야지요.’라고 말하면서,
곧 함께 앞으로 나아가며, 다시 사람들에게,
‘우리가 가려는 큰 성의 모습이 이미 나타났으니, 그대들은 잘 살펴보십시오.
저 앞의 큰 성은 매우 풍요롭고 즐거운 곳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차츰차츰 앞으로 나가니 그 큰 성이 보였다.
그때에 길잡이는 사람들에게,
‘여러분 보십시오. 이것이 말씀드린 큰 성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때에 사람들이 멀리서 큰 성을 바라보니 안온하고 풍요로우며 즐거워 보여 매우 기뻐하며, 사람마다 서로 보면서 희한한 생각이 들어,
‘이 성은 실다운 것인가, 아니면 이전처럼 허망한 것인가?’라고 말했다.
길라잡이는,
‘이 성은 참으로 실다운 것이며, 일체가 훌륭하여 안온하고 풍요로우며 즐거울 것이오’라고 대답하고,
곧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이 큰 성에 들어가십시오. 이곳은 으뜸가는 더할 나위 없는 큰 성입니다. 이곳을 지나면 다시 남은 성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성에 들어가자 희한한 마음이 들어 기뻐하며 길잡이를 찬탄하여,
‘참으로 좋습니다! 진실로 큰 지혜를 지니신 이여, 큰 자비의 방편으로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라고 하였다.
가섭아, 잘 알아두어라. 그가 처음에 가짜로 만든 성은 이른바 성문ㆍ연각승의 청정한 지혜이며,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해탈 지혜이다.
그리고 진실한 큰 성은 여래의 해탈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3승을 열어 보이고 2가지 열반을 드러내며, 또 1승을 말씀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가섭아,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이 없다고 말한다면 나의 제자가 아니며 나는 그의 스승이 아니다.”
[공의 뜻]
가섭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대승의 경전은 공(空)의 뜻을 말하는 것이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공에 대한 모든 경전은 미진함이 남는 말씀이다.
오직 이 경만이 가장 좋은 말씀으로, 미진함을 남기지 않은 말씀이다.
또 가섭아, 바사닉왕이 항상 11월에 큰 보시의 모임을 베풀어 먼저 아귀 중에 고독하고 가난하게 구걸하는 이를 먹이고, 다음으로 사문과 바라문에게 베풀되, 맛있는 반찬과 여러 가지 맛으로 그들이 바라는 바를 들어준다.
여러 부처님 세존께서도 이와 같이 중생의 가지가지 욕심과 즐거움을 따라 가지가지 경법을 설명하신다.
만일 어떤 중생이 게으름을 피우고 계를 파괴하며 부지런히 닦지 않고, 여래장 상주의 묘전(妙典)을 버리고 가지가지 공(空)의 경을 배우기 좋아하여, 혹 글귀와 글자를 따라서 말하거나 글귀와 글자를 더하고 달리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일체의 불경이 모두 무아(無我)를 말씀하셨다’라고 말했으나,
그는 공과 무아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그는 지혜 없는 사람이므로 멸진(滅盡)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과 무아의 설법 또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무량한 티끌과 모든 번뇌의 창고[藏]가 항상 공한 열반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열반을 일체구(一切句)라 한다.
그것에 늘 머물러 편안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부처님께서 얻으신 큰 열반(涅槃)의 글귀이다.”
[단견과 상견]
가섭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면 단견과 상견[斷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가섭아, 중생은 생사의 바퀴를 돌고 돌아 아(我)가 자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무아의 뜻을 말하였다.
그러나 여러 부처님들이 얻으신 큰 열반은 항상 머무르며 편안하고 즐거워 이 뜻을 가지고 단견과 상견을 끊었다.”
[무아]
가섭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다시 ‘무아’의 수레바퀴를 굴려 주십시오. ‘아(我)’의 수레바퀴를 굴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세간의 ‘아’를 깨뜨리기 위하여 ‘무아’의 뜻을 말하였다.
만일 이와 같이 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저들이 대사(大師)의 법을 받게 하겠는가?
여래가 ‘무아’를 말하니 저 모든 중생이 기특한 생각을 내어 듣지 못한 것을 들었다 하고 여래의 처소에 나아온 것이다.
그러한 뒤에 백천(百千)의 인연으로써 불법에 들어가게 한다.
불법에 들어간 뒤에는 신심이 더욱 자라나 부지런히 정진하며, 공의 법[空法]을 잘 배울 것이다.
그러한 뒤에 상주하고 안락하여 색이 있는 해탈이 있게 된다.
또 어떤 세속에서는 유(有)가 해탈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깨뜨리기 위하여 해탈은 모두 없 다고 말한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저들이 대사의 법을 받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백천의 인연으로써 해탈과 멸진(滅盡)과 ‘무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뒤에 내가 다시 저 중생들을 보니 ‘끝내 멸진하는 것[畢竟滅]’을 해탈이라 여기니, 그 지혜 없는 사람이 멸진에 나아갔다.
그러한 뒤에 내가 다시 백천의 인연으로써 해탈이 유(有)임을 말하였다.”
가섭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해탈 자재함을 얻은 사람은 중생이 반드시 항상됨이 있음을 알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연기를 보면 반드시 불이 있는 줄 아는 것처럼,
만일 ‘아’가 있으면 반드시 ‘해탈’이 있습니다.
만일 ‘아’가 있다고 말해도 곧 해탈에 ‘색(色)’이 있다고 말한 것이니,
세속의 신견(身見)이 아니며, 또한 단견과 상견을 말한 것도 아닙니다.”
[열반]
가섭은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여래께서는 열반에 드시지 않고 열반에 드신 것을 보이시며, 태어나지 않고 태어남을 보이십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중생들이 항상된 것이라 착각하는 망상을 깨뜨리기 위해서, 여래는 열반에 들지 않았으면서도 열반에 든 것을 보이며, 태어나지 않았으면서도 태어난 것을 보인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중생들은 ‘부처님조차도 마지막[終沒]이 있어 자재하지 못하시는데, 하물며 ‘아’와 아소(我所)가 있는 우리 범부들은 어떻겠는가?’라고 말한다.
비유하자면 어떤 왕이 이웃 나라에 체포되어 항쇄와 족쇄를 쓰고,
‘내가 지금도 왕인가? 주인인가? 나는 이제 왕도 아니고 주인도 아니다. 무엇 때문에 이러한 여러 가지 곤란을 겪고 있는가? 방탕하게 살았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생은 생사의 윤회에 빠져 자재하지 못한다.
자재하지 못하는 까닭에 무아의 뜻을 말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도적에게 쫓겨 칼에 맞아 죽으려는 찰나에,
‘내가 지금 힘이 없으니 이 죽음의 재난을 모면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생ㆍ노ㆍ병ㆍ사 등 가지가지 괴로움으로 이루어진 중생은 제석ㆍ범왕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여래는 그 생각을 깨뜨리기 위하여 죽음이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여래는 하늘 가운데 하늘이니, 만일 열반에 들어 모두 사라진다면 세간도 당연히 없어질 것이다.
만일 사라지지 않는다면 상주이며 안락이니, 상주이며 안락이라면 반드시 ‘아’가 있을 것이니, 마치 연기가 나는 곳에 불이 있는 것과 같다.
만일 ‘무아’이면서 아가 있다면, 세간에도 당연히 가득할 것이다. 진실로 ‘아’가 있고 ‘무아’가 아니라면 또한 파괴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진실로 ‘무아’라면 ‘아’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유와 비유]
가섭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유(有)’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유’란 25유 중생의 행이며, ‘비유(非有)’란 생각[思] 없는 물건이다.
만일 ‘비유’가 중생이라면 마땅히 다른 것에서 왔을 것이다.
만일 생각 있는 물건이 파괴된다면 중생은 당연히 줄어들 것이다.
만일 ‘비유’가 중생이라면 당연히 가득 찰 것이다.
중생은 나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기 때문에 줄지도 않고 가득 차지도 않는다.”
[무엇이 번뇌와 모든 때를 낳는가]
가섭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에 ‘아’가 있다면 무엇이 번뇌와 모든 때[垢]를 낳습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참 좋은 질문이다. 당연히 이런 물음을 여래에게 던져야 할 것이다.
비유하자면 어떤 금사(金師)가 금의 성분을 발견하고,
‘이와 같은 금의 성분에 무엇 때문에 때가 생겼을까? 이제 때가 생기는 근본 원인을 찾아야겠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저 사람은 근본 원인을 얻을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가섭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얻지 못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죽을 때까지 생각하여 처음의 인상(因相)이나 무시(無始)를 찾는다면 본제(本際)를 얻겠는가 얻지 못하겠는가?
이미 근본 원인을 얻지 못한다면 또한 금을 얻지 못할 것이다.
만일 묘한 방편으로 부지런히 게으름 피우지 않고 저 금의 때를 제거하면 마침내 금을 얻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아’라는 것은 객번뇌(客煩惱)를 낳는다.
‘아’를 보고자 하는 이가,
‘이제 ‘아’와 때의 근본을 찾으리라’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근본을 얻겠는가, 얻지 못하겠는가?”
가섭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얻지 못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만일에 방편에 힘써서 번뇌의 때를 제거하면 마침내 ‘아’를 얻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이 경전을 듣고 깊은 마음으로 믿고 즐기며, 느리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게 훌륭하고 좋은 방편으로 3업을 청정히 하면, 이 인연으로 마침내 ‘아’를 얻을 것이라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