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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정론 제3권
2. 십대봉불편(十代奉佛篇) ①[2]
[진나라의 여덟 왕]
진(晋)나라 제왕(齊王) 대유(大猷)
[아담한 법도(法度)가 맑고 간소(簡素)하였다.]
진나라 진왕(秦王) 홍도(弘度)
[재간과 도량이 넓고 온화했다.]
진나라 안평왕(安平王)
[뜻과 절개가 준엄(峻嚴)했다.]
진나라 의양왕(義陽王)
[이치와 생각이 신묘하였다.]
진나라 하비왕(下邳王)
[돈독하게 경술(經術)에 뜻을 두었다.]
진나라 고밀왕(高密王)
[절개와 검소함이 홀로 뛰어났다.]
진나라 남평왕(南平王)
[믿음이 있고 증빙함이 있었다.]
진나라 건평왕(建平王)
[몸을 세움이 씩씩하고 용맹스러웠다.]
이들 여러 임금은 공적을 돕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넓히고 높이지 아니함이 없었으며, 좌우에 있는 부락들이 다 6재(齋)를 지키고 온 집안의 높고 낮은 이가 다 5계(戒)를 받아 지니었다.
[송나라의 다섯 왕]
송(宋)나라는 임천왕(臨川王) 의경(義慶)
송나라 팽성왕(彭城王) 의강(義康)
송나라 남초왕(南譙王) 의선(義宣)
송나라 임천사왕(臨川嗣王) 도규(道規)
송나라 건안왕(建安王) 휴인(休仁)
위에 든 사람은 송나라의 여러 왕이다. 문재(文才)를 가졌고 아울러 크게 부처님 경전을 익혔으며 매달 6재(齋)일에는 스스로 여덟 가지의 계를 가지는 등 독실하게 단아한 문장을 익히는 데는 의경(義慶)이 가장 우수하여 연구 훈수(薰修)함이 다함 없었고, 안개처럼 밝고 해처럼 명랑하여서 유창한 말재주가 다함 없고 비처럼 흩어지고 연기처럼 날았다.
구역 안의 남자와 여자들이 아울러 계를 가지고 휘하의 장사들이 다 부처님의 경전을 외웠다.
『선험기(宣驗記)』를 저술하여 삼보에 대해 찬술하였다.
제(齊)나라 경릉(竟陵) 문선왕(文宣王) 소자량(蕭子良)
6경(經)을 널리 보았고 7적(籍)에 마음이 노닐어 세상에서 필해(筆海)라고 일컬었으며 당시의 유종(儒宗)이라고 불렸었다.
불교에 회향하여서는 불교의 경전을 따르고 숭상하여서 『성실론(成實論)』을 강하고 『법화경(法華經)』을 외웠으며, 『정주자(淨住子)』 20여 권을 지었다.
나라에서 녹봉을 내리는 것은 다 공덕을 경영하는 데 썼으며 은근한 위엄이 아담하고 불교다운 것은 진나라 임금과 같으나 몸소 예약(藝若)을 설하는 것은 도리어 제석천(帝釋天)과 같았다. 그래서 금언(金言)을 잠깐 여니 이미 전대의 마음을 넘어섰고 옥축(玉軸)을 겨우 펴니 먼저 불타던 것이 뒤에는 불꽃처럼 밝았다.
장막을 동하(東夏)에서 걷으니 월절(越絶)의 풍속이 변하였으며 상서로움은 서하(西河)에서 어루만지니 융중(隆中)의 풍속이 고쳐졌다.
양(梁)나라 소명 태자(昭明太子)
양나라 진안 전하\(晋安殿下)
소명 태자는 도가 나면서부터 아는 것[生知]에 계합하였고 진안 전하는 덕이 천종지성(天縱之聖)에 빛났다. 예악(禮樂)의 동산에서 노닐고 인의(仁義)의 마당에서 달리니 낙수(洛水)가의 칭찬은 옛날에 드날렸는데 짝할 이가 없으며 하수(河水) 가의 글은 따를 이가 없었다.
하나라가 개방한 것도 부끄러운 일이고, 희(姬)의 형제 여덟 분이 임금이요, 열 분의 준걸이 있으며, 아울러 학문은 백씨를 다하였고 글은 아홉 유파(流派)를 통괄하였고, 현란한 기운은 풍운(風雲)에 빼어나고 좋은 말은 해와 달보다 빛났다.
묘한 법을 존중하고 복의 문을 흠경(欽敬)하였다. 그래서 승화(承華)를 아침에 열고 숙성(肅成)을 늦게 열며 이름난 승려와 짝을 맺고 통달한 유학자와 모두 모이며 말과 이치를 토해내고 들이키며 안과 밖을 품평(品評)하여서 능히 석덕(碩德)들로 하여금 말을 꺾게 하고 선현(先賢)들로 하여금 병을 핑계대게 하였으니 경을 끼고 다니는 수고를 하지 아니하고 골목에 들어가며 양(羊)의 수레를 빌리지 아니하고 문에 나아갔다.
[진나라의 여섯 왕]
진(陳)나라 파양왕파(鄱陽王)
진나라 예장왕(豫章王)
진나라 형양왕(衡陽王)
진나라 계양왕(桂陽王)
진나라 의양왕(義陽王)
진나라 신채왕(新蔡王)
여섯 임금은 모두 분전(墳典)을 다스렸으며 편장(篇章)에 유희하였고 불교를 숭상하여 받들어서 미묘한 이치를 정밀하게 연구하였으며 불경을 베껴쓰고 불상을 조성하며 계를 받고 재를 가지며 매양 자비한 복전을 섬기어서 서로 이어 희사(喜捨)하였다.
[진나라의 다섯 현인]
진(晋)나라 팽성후(彭城侯) 유유민(劉遺民)
[5시(時)의 가르침을 짓고 아홉 생각의 시(詩)를 지었다.]
진나라 예장태수(豫章太守) 뇌차종(雷次宗)
[정성된 마음으로 부처님의 법을 사모하여 서령사(捿靈寺)를 지었다.]
진나라 임회령(臨淮令) 주속지(周續之)
[도를 품음이 날로 새로웠다.]
진나라 신채후(新蔡侯) 필영지(畢穎之)
[마음으로 정역(淨域)에 나기를 기대하였다.]
진나라 남양장(南陽長) 종병지(宗炳之)
[간고(懇苦)함을 일삼은 듯하다.]
위의 다섯 현인(賢人)은 직위를 사양하고 영광된 자리를 그만두고 신부(神府)에 이름을 책(策)하며 혜원(慧遠)스님을 따라 거닐고 쉬면서 숨어 지내는 데 뜻을 두고 다 같이 한마음을 펴서 함께 그윽하고 극한 데를 밟았었다.
그래서 부용(芙蓉)을 중간 흐름에 자(藉)하고 경가(瓊柯)를 영언(詠言)으로써 덮었으며 구름 기운을 8극(極)에 나부끼고 향기로운 바람을 백 년 동안 흘렸다. 그래서 몸은 편안함을 잊으면서 더욱 화목하고 마음은 즐거움을 뛰어넘어서 자연스러웠다.
[진나라의 다섯 상서]
진(晋)나라 상서령(尙書令) 하충(何充)
[간략하고 질박한 데 충성되고 소질이 있다.]
진나라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저익(褚翌)
[지조(志操)가 얼음과 서리 같았다.]
진나라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제갈회(諸葛恢)
[도를 밟아 정고(貞固)하였다.]
진나라 상서(尙書) 빙회(憑懷)
[소리와 빛을 피하지 아니하였다.]
진나라 상서 사광(謝廣)
[정성스런 마음으로 직간(直諫)하였다.]
위는 환현(桓玄)과 유빙(庾氷)이 정치를 보조하는 날에 함께 삿된 풍속을 부채질하고 승(僧)을 혐오하여 예에 항거하니, 하충(何充) 등 다섯 현인이 의관(議官)과 박사(博士) 등과 더불어 의견을 세워 말하였다.
‘살펴보니, 한나라와 위나라로부터 진나라에 미치도록 다른 의론은 듣지 못하여서 높고 낮음의 헌장(憲章)을 잠시라도 대체(代替)함이 없었으며 사문(沙門)으로서 계율 지키기를 돈독하게 하는 자는 늘 향을 피우고 주원(呪願)하되 반드시 국가를 우선하여 복되게 돕고자 하였으니 높은 정이 극(極)함이 없어서 임금을 받들고 착함을 높이는 것이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예의의 간략함은 대개 법을 지키는 데 말미암습니다. 그 때문에 선황(先皇)들이 세상을 다스릴 적에 그로 인해 고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른바 그들의 이로움으로 인하여 은혜를 베풀어 주었기에 어진 이나 어리석은 이들이 감히 정을 쓰지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위로는 하늘이 덮고 땅이 실어주는 베풂이 있었고 아래로는 한결같이 착함을 닦는 사람이 있었으니 마땅히 선황들의 옛 일을 따릅시다.’
모두의 의론이 그것을 옳게 여겨서 대중들이 맞지 아니함이 없었다 한다.
진나라 사도공(司徒\公) 왕밀(王謐)
왕밀이 동쪽 궁액(宮掖)의 절문에서 금빛 광명이 땅에 비춤을 보고 가서 땅을 파니 하나의 황금 불상이 나왔는데 그 불상이 머금은 광명이 7척(尺)이었다.
이에 따로 절을 짓고 그 불상을 모셔 종신토록 공양하였으며 또 서응을 느껴 참[眞]을 드리기에 동안사(東安寺)를 지었다.
[진나라의 네 현인]
진나라 호군장군(護軍將軍) 왕묵(王默)
진나라 후장군(後將軍) 유억(劉抑)
진나라 강주자사(江州刺史) 유열(庾悅)
진나라 심양태수(尋陽太守) 완간(阮侃)
위의 네 분의 현인은 다 절을 세우고 불상을 조성하였으며 불교에 귀명(歸命)하였다.
[진나라의 장군 등]
진나라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하무기(何無忌)
[불교를 숭상하고 믿어 끝맺음을 잘했고 기원사(枳園寺)를 지었다.
안제(安帝)가 서쪽에서 돌아온 후부터 나라의 운수가 화락하고 태평하여져서 도인과 속인이 함께 기뻐하였다.
양자강 북쪽에 회창(會昌)의 법난이 있을 적에 하무기는 안제에게 권하여 불교를 일으키게 하고 공덕을 닦았다.]
진나라 옹주자사(雍州刺史) 사극회(史郄恢)
[미타(彌陀) 법회에 나가 놀면서 금상사(金像寺)를 지었다.]
진나라 무창태수(武昌太守) 도간(陶侃)
도간이 광주(廣州)에 간 날에 고기잡는 자가 바다에서 신비한 광명이 열흘이 지나도록 더욱 성함을 보았다.
사치회가 도간에게 그 일을 말하자 도간이 나아가 보니, 이는 아육왕(阿育王)의 상이었기에 도간이 그것을 무창으로 가져 와서 한계사(寒溪寺)로 보냈다. 공덕에 감동하여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 다 발심한 것은 도간의 힘이었다.
진나라 단양윤(丹陽尹) 고회(高悝)
[복을 받들고 영응(靈應)에 감동하여 영응사(靈應寺)를 지었다.
함화(咸和) 연간에 고회가 가다가 장후교(張侯橋)에 이르렀을 적에 포구 안을 바라보니, 오색의 광명이 있어서 물 위로 나왔는데 높이가 두어 자나 되었다.
교회가 가서 보고 이에 황금 불상을 얻었는데 배광(背光)이 없고 결가부좌를 하고 있지 않지만 신령스러운 얼굴은 세상에 드문 것이었고 제조한 것이 보통과 달랐었다. 고회가 크게 발심하여 백성들에게 공덕을 권고하였다.
진나라 청신사(淸信士) 장계세(張繼世)
장계세는 물고기 잡는 것으로 생업(生業)을 삼았는데 어느 날 보니, 물 위에 광명이 있었으니 이는 황금 불상이 꽃위에 결가부좌한 것으로서 간성제(簡成帝)가 안회(安悝)에게 준 상과 같았다.
장계세가 이를 보고 발심하여 그의 본업(本業)을 버리고 종일토록 책근(策勤)하니 성제(成帝)도 회향하여 부처의 위엄과 신령함을 믿게 되었다.
진나라 청신사(淸信士) 동종지(董宗之)
동종지는 본래 합포(合浦)의 물고기 잡는 사람이었는데 매양 보니, 물 밑에 광명이 있기에 나가서 취하여서 이에 부처님의 배광을 얻었는데 문제(文帝)가 도안에게 보낸 상과 배광이 완연히 부합되었다.
동종지는 그로 인하여 점차 참회하고 악을 버리고 착한 데로 돌아와서 종신토록 도를 행하였으며 스스로 『대품경(大品經)』을 베껴써서 달마다 한 번씩 전독(轉讀)하여 30여 년을 오로지 한 뜻으로 업을 삼았다.
진나라 태상경(太常卿) 주응(朱鷹)
주응은 송강호(松江滬)의 뚝 입구에 있을 적에 두 석불상이 물 위로 떠서 옴을 느꼈다. 민제(愍帝)가 이를 통현사(通玄寺)에 맞아들여 공양할 적에 주응이 드디어 법의 다리에서 목숨을 맡기면서 스스로의 임무로 여기었다.
진나라 상시(常侍) 대안도(戴安道)
[학문과 예술이 뛰어났으며 초은사(招隱寺)를 짓고서 스스로 5협(夾) 비단으로 자수하여 상호를 만드니 그 상호가 비길 데가 없었다. 항상 신비한 광명을 놓았다.]
진나라 부새랑(符璽郞) 이통(李通)
[뜻을 지켜 한 마음이었다.]
진나라 팽성후(彭城侯) 황흔(黃欣)
[지극한 믿음이 순수하게 두터웠다.]
진나라 태복경(太僕卿) 왕순(王珣)
[지극한 뜻으로 마침내 석간사(石澗寺)를 지었다.]
진나라 예장태수(豫章太守) 범영(范寧)
[희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뜻을 맺어 지혜를 지켜나가고 곡령산(鵠嶺山)에 서선사(棲禪寺)를 지었다.]
진나라 태상(太常) 은중감(殷仲堪)
[지극한 효성으로 몸을 바쳤으며 신령한 글에 감동되었다.]
진나라 동해(東海)의 하승천(何承天)
[안과 밖을 널리 보고 엄공(嚴公)의 사표(師表)가 됐다.]
진나라 오군(吳郡)의 장공(張恭)
[간절하고 정성되게 계율을 받들었다.]
진나라 연주자사(兗州刺史) 왕공(王恭)
[뛰어남을 공경하고 덕을 중하게 여기며 공경을 늘여 공평하게 가졌다.]
진나라 승상(丞相) 왕도(王導)
[미묘한 이치를 모아서 묶었다.]
진나라 낭야(瑯) 왕민(王珉)
[곧으면서 뉘우침이 없었다.]
진나라 태위(太尉) 유원규(庾元規)
[순수한 성품이 넘치지 아니하였다.]
진나라 정위(廷尉) 환무(桓茂)
[덕이 중생에게 미쳤다.]
진나라 태상(太常) 사유여(謝幼輿)
[어진 것을 나타내고 용(用)을 감추었다.]
진나라 진군(陳郡)의 사혼(謝混)
[풍채가 세속을 비추었다.]
진나라 광록(光祿)의 주백인(周伯仁)
[특달(特達)한 생애에 맑은 바람이 스스로 불었다.]
진나라 중승(中丞) 극초(郄超)
[어진 이를 공경하고 부처님의 법을 중하게 여겨 뜻을 먼 산림(山林)에 두었다.]
진나라 우위장군(右衛將軍) 저숙도(褚叔度)
[풍아(風雅)한 것을 모두 보았다.]
진나라 장광태수(長廣太守) 이의(李嶷)
[믿음을 크게 하고 도를 품었다.]
진나라 상서 대원공(大原公) 왕몽(王濛)
[어질고 후하여 세상을 건졌다.]
진나라 진군(陳郡)의 은융(殷融)
[영준(英俊)하기 짝할 이가 없었다.]
진나라 상서 위개(衛玠)
[돈독하고 아담하기 짝할 이가 없었다.]
진나라 심양자사(尋陽刺史) 환이(桓伊)
[자기를 잊고 중생들을 제도하며 동림사(東林寺)를 지었다.]
진나라 시중(侍中) 원언백(袁彦伯)
[맑은 바람이 온통 떨쳤다.]
진나라 동양태수(東陽太守) 사안석(謝安石)
[신기한 풍채가 높고 고상하였다.]
진나라 상서 은중문(殷仲文)
[풍류가 아담하고 뜻을 하늘에까지 떨쳤다.]
진나라 회계내사(會稽內史) 왕희지(王羲之)
[문필(文筆)이 뛰어났다.]
진나라 익주자사(益州刺史) 모거(毛璩)
[자비를 기울여 정례(頂禮)하고 뜻을 세워 공평함을 가졌다.]
진나라 문학(文學) 왕흡(王洽)과 유회(劉恢)와 은호(殷浩)와 허순(許詢)과 손작(孫綽) 등
이들은 모두 한 대의 이름난 무리요 1천 리를 달리는 준수한 기마(驥馬)로서 학문을 버리는 날이 없었으니 낙수(洛水)의 동쪽에서 그 넓은 문학을 알겠으며, 손에 책을 놓지 아니하니 옆의 사람들도 그들이 병이 날까 두려워했다. 꽃다운 소리는 세속을 뛰어넘었고 아담한 기상은 무리에서 뛰어났다. 원언백과 같은 이는 『후한서(後漢書)』를 지었으며 부처님의 이치를 아름답게 칭찬하여 현궐(玄闕)과 의부(義府)가 도림(道林)을 숭앙하고 사모하였다.
[송나라의 상서 등]
송(宋)나라 상서 종경(宗敬)
[간곡한 지성이 사람을 감동시켰다.]
송나라 중서령(中書令) 심경(沈慶)
[정성을 기울여서 중생을 감득시켰다.]
송나라 광록경(光祿卿) 대옹(戴顒)
[교묘한 생각이 신(神)에 통하였다. 대옹이 손수 한 길 여섯 자의 황금 불상을 만들었는데 상호가 견줄 데가 없었다. 뒤에는 광명을 놓았다고 한다.]
송나라 신정후(新亭侯) 유소(劉紹)
[지극한 원(願)이 은근히 부합되었다.]
송나라 서주자사(徐州刺史) 왕중덕(王仲德)정
[성이 사무쳤다.]
송나라 중서(中書) 범태(范泰)
[물건을 널리 알아 현묘하게 통하였다.]
송나라 어사(御史) 왕홍(王弘)
[맑고 통달함이 세속을 초월하였다.]
송나라 시중 사공 소공(司空昭公) 유면(劉勔)
[왕실 돕기를 꾀하였다.]
송나라 시흥공(始興公) 왕회(王恢)
[공경하고 존중함이 더욱 지극하여 폐백을 가지고 엄한 스승에게 가서 문인이 되었다.]
송나라 의동(儀同) 소사활(蕭思活)
[아들과 아우들이 문(門)에 모이고 몸을 이겨 계를 보호하였다.]
송나라 상서 사장(謝莊)
[총명하고 깨달음이 특달(特達)하였다.]
제(齊)나라 어사 원민손(袁敏孫)
[계율을 받들어 게으르지 않았다.]
제나라 이부(吏部) 사조(謝眺)
[정을 반연함이 세상에서 으뜸이고 공경하여 믿음이 무리에서 뛰어났다.]
[제나라의 태위 등]
제나라 태위 문충공(文忠公) 서효사(徐孝嗣)
제나라 태위 문헌공(文憲公) 왕검(王儉)
위의 두 분 중에 문춘공은 주석(柱石)의 재목이었고, 문헌공은 이윤(伊尹)과 곽광(霍光) 같은 도량이 있어서 경륜(經綸)을 빠짐없이 갖추어 조정과 지방에서 모두 우러러 보았다. 진실하게 믿는 것이 가빈(嘉賓)보다 더 나았고, 알고 깨달음이 영운(靈運)에 비겼으니, 부처님의 법이 빛나게 나타나는 것은 참으로 그 사람에게 달렸었다 하겠다.
제나라 특진(特進) 장서(張緖)
[지극한 이치에 발심하였다.]
제나라 중서령(中書令) 주옹(周顒)
[현묘한 이치를 아는 것이 세상을 덮었다.]
제나라 시중 좌상서 중서령 태자 중서자 국자좨주 징군(中書令 太子 中庶子 國子祭酒 徵君) 하윤(何胤)
위의 사람들은 평소의 행적이 충성되고 은밀하며 풍화(風化)의 힘이 한가하고 넉넉하여서 옥촉(玉燭)의 정기(禎氣)를 안았고 대현(大賢)의 일기(一期)에 응하였다.
학문은 경과 역사를 다하였고 마음은 현묘하고 심오함을 간직하였다. 화천 변서(和天變序)의 음악과 후성 곡대(后成曲臺)의 예로써 직하(稷下)의 의론과 구양수(歐陽修)와 소자(蕭子)의 글을 엄순(淹淳)하였으며, 역(易)은 경(京)과 시(施)를 꿰뚫었고, 시(詩)는 한(韓)과 초(楚)로 나눈 것을 다 훈석(訓釋)하여 반드시 해통(該通)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러기에 업(業)을 간청하고 의심나는 것을 질문하여서 헛되게 왔다가 실답게 돌아가며 무리를 모아 교수함에 배워서 다스림이 무리를 이루었다.
반야사(般若寺)에서 밝은 구슬로 기둥을 세웠으며 불교에 깊이 향하여 내교(內敎)에 아담하고 돈독하였다. 구슬 기둥이 칠일 낮과 칠일 밤 동안 방광(放光)을 하였다.
[양나라의 시중 등]
양(梁)나라 시중 상서 좌복야 중위장군 특진 우광록 간숙자(特進 右光祿 簡肅子) 서면(徐勉)
이 분은 온순하고 아담함이 일찍 소문이 나고 고귀한 인품이 일찍 드러나서 명당(明堂)과 곡대(曲臺)의 전적(典籍)과 좌하(左夏)와 한맹(韓孟)의 글과 풍비(風飛)와 염수(焱竪)의 글과 엄중(淹中) 직하(稷下)의 학문과 용궁(龍宮)과 반주(半珠)의 도와 취산(鷲山)과 화수(華水)의 책들을 그 근원을 궁구하고 심오함을 다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번갈아 가면서 마음을 두었었다.
양나라 시중 호군장군 간자(簡子) 주사(周舍)
이 분은 기의(岐嶷)함이 일찍이 이루어지고 어려서부터 출중함을 발하여서 증증(蒸蒸)한 색의 어려움은 맹무(孟武)의 물음을 수고하지 아니하였고 충성되고 곧게 공경하여 권함은 계강(季康)이 의심함을 기다리지 아니하였다.
일이 집안에 나타나고 이름이 나라와 읍에 전하여져서 9류(流)와 백씨(百氏)의 기록과 6시(詩)와 5례(禮)의 글을 다 널리 전고(前古)에 다하고 당세에 기준이 되었다.
겸하여 부처의 계를 받아 가지고 불교의 문으로 회향하면서 저 기름지고 피비린내 나는 것을 끊고 소식(素食)을 달게 여기며 용궁(龍宮)에서 나온 금첩(金牒)을 연구하고 곡림(鵠林)의 옥지(玉旨)를 다 연구하였다. 매양 비사리성[毘城]의 훌륭한 편집과 마갈타(摩竭陀) 나라의 미묘한 말을 모아서 뿔을 꺾고 턱을 푸는 데 홀로 당시의 이름난 이보다 높았다.
양나라 상서령(尙書令) 심약(沈約)
[문원(文苑)과 한림(翰林)에서 홀로 양자강 밖에 이름을 떨쳤다. 학문은 세상의 모범이 되었고 재주는 당시의 뛰어난 이들을 덮었다.]
양나라 상서 복야(僕射) 주이(朱异)
[임금의 도를 도와 다하고 법의 깃대를 세웠다.]
양나라 시흥령(始興令) 육함(陸咸)
[영특하고 날카로움이 무리에서 뛰어났고 불교에 마음을 기울였다.]
양나라 시중 원찬(袁粲)
[조행이 밝고 곧으며 매양 법의 자리를 세웠다.]
양나라 국자좨주(國子祭酒) 장충(張充)
[크게 배우고 깊이 연구하며 현묘한 도에 뜻을 돈독하게 하였다.]
양나라 태자시독(太子侍讀) 왕엽(王曄)
[세상에서 뛰어나서 짝할 이가 없다.]
양나라 동궁 태자 서자(東宮 太子 庶子) 유증(柳澄)
[현묘한 도리를 말하여 다함이 없었다.]
양나라 중서령 왕승유(王僧孺)
[불교와 유교를 종합하여 배웠다.]
양나라 저작(著作) 소자현(簫子顯)
[품격이 안과 밖을 종합하였다.]
양나라 탁지상서(度支尙書) 소자각(簫子恪)
[현묘한 도에 안심하였다.]
양나라 비서감(祕書監) 하경객(何敬客)
[보통의 윤리에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양나라 이부상서(吏部尙書) 사거(謝擧)
[불교를 위하여 조정에서 항쟁하였다.]
양나라 행군하부(行軍下簿) 유효위(劉孝威)
[안국(安國)의 자세하고 삼가함이 있었고 영운(靈運)의 현묘한 풍도(風度)가 있었다.]
양나라 황문(黃門) 진백지(陳伯之)
[옛 것을 믿고 좋아하였다.]
양나라 중서자(中庶子) 공휴원(孔休源)
[몸을 충직하고 바른 데 세우고 자기를 청각(淸恪)한 데 행하였다.]
양나라 중서자 평서안 북융 소장군 양양령(中庶子 平西安 北戎 昭將軍 襄陽令) 유준(劉遵)
의표(儀表)가 온화하고 윤택하며 풍도(風度)와 자세가 맑고 밝았다. 그래서 종종걸음을 치더라도 빛이 나고 오래도록 공경하게 되니 지초잎[芝葉]과 은 갈고리의 교묘한 것은 장막 가운데에 매달 만하고 거북의 문양과 새 발자국의 기이함은 대 위에 둘 만하였다.
양나라 천관상서(天官尙書) 유효작(劉孝綽)
[명성이 세상을 덮었다.]
양나라 양주 태수(襄州 太守) 유진(柳津)
[맹세코 높은 버슬을 버리고 현묘함을 숭상하여 도를 실천하였다.]
양나라 문학(文學) 왕원장(王元長)
[영준한 기상은 그를 앞서는 이가 없었다.]
양나라 영군장군(領軍將軍) 유효의(劉孝儀)
[평소에 충직하고 주밀하였고 멀리는 출세간의 도리를 숭상하였다.]
양나라 좌승(左丞) 장직(張稷)
[참을 알고 이치를 통달하였다.]
양나라 영만 장사(寧蠻 長史) 서금(徐擒)
[풍아(風雅)가 한가하고 아담하며 맑은 말이 신(神)의 경지에 들어갔다.]
양나라 중서(中書) 안지추(顔之推)
[공손하고 검소하며 독실하고 믿음이 있었다.]
양나라 시중 중서자(侍中 中庶子) 온(溫)의 아들 왕훈(王訓)
[신비한 용(用)이 맑고 밝으며 풍의(風儀)가 한가하고 준수하였다. 나가서는 충성하고 들어와서는 효도하며 용기와 의리가 청렴함을 숭상하였고 분소(墳素)는 반드시 해통하고 유략(流略)은 이를 총괄하였다.]
양나라 산기상시 장후(散騎常侍 章侯) 왕규(王規)
[조정의 의표(儀表)와 재목으로서 앙앙(昻昻)하게 뒤로 나가서 석거(石渠)에 갓끈을 날리고 완완(婉婉)히 오는 모양은 금마(金馬)에 옷을 떨친다.]
양나라 동양군 오양현 쌍림사(東陽郡 烏陽縣 雙林寺) 부대사(傅大士)
항상 법륜(法輪)을 굴리고 세존(世尊)의 지위를 이어서 융성시키면서 몸을 세계에 나누어 여러 중생들을 제도하였다.
혹은 가슴 사이에 잠깐 금빛을 나타내 보이고 주먹 안에서 이상한 향내를 때로 토하며 혹은 몸의 길이가 한 길 남짓한데 팔이 무릎을 넘으며 다리의 길이가 두 자이고 손가락 길이가 다섯 치이며 두 눈은 분명하여 두 눈동자가 빛나게 비추고 얼굴 모습은 단정하고 엄숙하여서 큰 사람의 상호가 있었다.
사신을 보내 글을 써 가지고 양나라 무제(武帝)에게 주기를 ‘쌍림(雙林)의 나무 아래에서 당래에 해탈을 얻을 선혜(善惠)대사가 나라의 임금인 구세(救世) 보살에게 아룁니다. 이제 상의 착함과 중간의 착함과 하의 착함을 조목하여 올리니 능히 받아 지니기를 바랍니다. 그 상의 착함은 대략 생각을 비움으로 근본을 삼고, 집착하지 아니함으로 종(宗)을 삼으며, 상(相)을 잊음으로 원인을 삼고, 열반으로 결과를 삼는 것입니다. 그 중간의 착함은 대략 몸을 닦음으로 근본을 삼고, 나라를 다스림으로 종을 삼으면 하늘에 태어나거나 인간으로 나는 과보를 받아 안락할 것입니다. 그 하의 착함은 대략 중생들을 보호하여 기릅니다’ 하니, 양나라 무제가 이를 맞아 종산(鍾山)의 아래 정림사(定林寺)에 살게 하였다.
부대사는 앉으면 높은 소나무의 그늘에 앉고 누우면 반석을 의지하며 4철(徹)의 가운데 항상 감로를 비내리고 예순 날 안에 항상 하늘 꽃을 비내렸다.
양나라 무제가 화림원(華林園) 중운전(重雲殿)에서 반야(般若)의 법회를 열 적에 홀로 한 탑을 설치하여 부대사로 하여금 임금과 대양(對揚)하게 하고 옥으로 만든 연(輦)으로 전각에 오르게 하였더니 부대사가 안연(晏然)하게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다.
헌사(憲司)가 이를 비난하여 물으니 부대사는 다만 ‘법지(法地)가 만일 움직이면 일체가 편치 아니할 것이다’ 하고, 또 ‘양나라 운수는 장차 마치게 될 것이니 전쟁의 재앙을 구하겠다’ 하고서 이에 팔을 태워 등잔을 만들어서 오는 재화를 물리치기를 바랐다. 태건(太建) 원년 여름에 이르러서 오른쪽 갈비를 땅에 대고 누워서 엄연(奄然)히 열반하였다.
그 때는 더위가 대단하여서 불같이 쪼이는 햇볕인데도 더위와 따스함이 다름 없었으며 얼굴빛이 즐거움으로 폈고 광채가 곱고 고왔으며 향냄새가 가득 차고 몸을 구부리고 펴는 것이 항시와 같았으니 보는 자들이 발심해서 일찍이 있지 않았던 일이라 하였다.
[진나라의 상서 등]
진(陳)나라 상서 우복야 장후(尙書 右僕射 章侯) 서릉(徐陵)
[문장이 관절(冠絶)하였고 공경하여 믿음이 짝할 이가 없었다. 불상 1만구를 만들고 경을 1장(藏)을 베껴썼다.]
진나라 소보상서 좌복야(少保尙書 左僕射) 원헌(袁憲)
[충절을 짝할 이가 드물었고 불교를 독실하게 믿음이 이보다 더한 이가 없었다. 상정림사(上定林寺)에서 협저(夾紵) 불상 10구를 만들었다.]
진나라 상서복야(尙書僕射) 강총(江總)
[정(情)을 반연함이 영발(穎拔)하여 전대(前代)에 나타났다. 광산(匡山)에 미륵상을 조성하니 높이 80척(尺)이다. 일체경 1장(藏) 3천 7백52권을 베껴썼다.]
진나라 이부상서 정위경(吏部尙書 廷尉卿) 모가(毛嘉)
[뜻과 절개가 높고 준엄하며 어질고 두텁고 겸하여 높았다. 글씨는 두 왕씨(王氏)를 운필하고 학문은 세 가씨(賈氏)를 짝하였다. 몸소 스스로 붓을 움직여 『유마경(維摩經)』을 쓰니 양나라 세자 운(雲)이 능히 가필(加筆)하지를 못하였다고 한다.]
진나라 동궁사인(東宮舍人) 부재(傅縡)
[학문은 왕씨(王氏)와 정씨(鄭氏)를 짝하고 재주는 사씨(謝氏)와 육씨(陸氏)를 견줄 만했다. 삼교(三敎)를 모두 열람하고 묘하게 1승(乘)을 이해하여 발췌한 것이 무리를 뛰어났기에 해내(海內)에서 추종하여 높였다.]
이러한 인용한 것들은 모두 기록한 이가 있고 모두 사적(史籍)에 실려 있다.
그러기에 자세히 말하지 아니한다.
사비(謝朏)와 사람(謝覽)과 같은 이는 삶을 버리고 의(義)를 세웠으며,
유강(柳忼)과 유회(柳恢)와 같은 이는 공(功)을 미루어주고 차지하지 않았으며,
강엄(江淹)과 임방(任昉) 같은 이는 끝과 처음에 마땅한 것을 좇았으며,
유묘(劉杳)와 고협(顧協) 같은 이는 저술(著述)이 다 아름다웠으며,
장홍책(張弘策)의 신밀(愼密)함과 여승진(呂僧珍)의 게으르지 아니함과 정소숙(鄭紹叔)의 충성과 왕업과 소영주(蕭穎胄)의 의거(義擧)에 먼저 응(膺)함과 같은 데 이르러서는 다 세상의 보배가 되었다. 또한 전 집안이 다 일대의 큰 선비로서 참으로 온 천하에 이름 있는 자손이어서 아울러 나라를 경영하는 책략(策略)을 쌓았고 모두 군자의 문이라고 일컬으니 사직(社稷)이 이로 인하여 편안하여지고 위와 아래가 그로 말미암아 화목하여졌다.
문(文)이 있고 무(武)가 있으며 세상을 바로잡고 집을 바로잡으니 사람들은 9합(合)의 공을 표시하고 아울러 천추의 업을 세웠다.
그리고 또 그들의 오체(五體)를 기울여서 우리 삼보를 공경하며 인욕(忍辱)과 자비로써 자기를 용서하여 남을 미루어 미치지 않음이 없어서 현황(玄黃) 보기를 꿈과 같이 하고 종고(鍾鼓) 듣기를 귀먹은 이 같이 하며 척벽(尺璧)을 천하게 여기고 한 마디의 말을 귀중하게 여기며 몸을 던져서 반쪽 게송(偈頌)을 빌었으니 몽염(蒙恬)의 붓이 여러 번 다하여도 그들이 행한 것은 능히 기록할 수가 없으며 채륜(蔡倫)의 종이를 한갓 허비할 뿐 그들의 이익됨을 쉽게 펼 수가 없다.
이러한 사례가 매우 많기에 이를 다 말할 수가 없다.
[촉(蜀)과 진(陳)과 수(隋)]
촉(蜀)과 진(陳)과 수(隋)의 세상이 귀하고 시절이 번영할 때에 여염(閭閻)의 사녀(士女)들로서 높은 문이 여합(閭闔)에 연하였고 높은 터가 임금의 뜰에 접(接)하였으니 척리(戚里)의 황친(皇親)이며 제경(帝京)의 부실(富室)이었지마는 옹옹(顒顒)하게 도를 사모하여 각기 불경을 펴서 입에는 금언(金言)을 외우고 손으로는 옥축(玉軸)을 폈다. 그러기에 그 무리들이 마치 풀과 나무가 대지(大地)를 의지한 듯하고 그들의 만남이 마치 비늘달린 것들이 긴 하천에 떠 있는 듯하였다.
그러니 가난한 집의 농사짓는 자와 이름 없는 촌로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 약간이라도 신심을 낸 이들은 그 수효를 헤아릴 수가 없으니, 어찌 다 기록에 남아 있겠는가?
그 때문에 4생(生)에 복과 도움을 주고 3세(世)에 경자(慶資)하여서 진실로 어질고 진실로 용서하며 아들에 미치고 손자에 미치는 그들의 능히 행하는 덕은 지극하지 아니함이 없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