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호른 / 바실리 칸딘스키
하나의 원은 언제나 어떤 것이다.
때때로 많은 것이기도.
때때로-드물게-너무 많게.
코뿔소가 때때로 너무 많은 것처럼.
치-밀-한 보라빛 속에 때때로 그것은-원-앉아 있다. 원은 하얀 원
그리고 무조건 더 작아진다. 더욱더 작게.
코뿔소는 머리를, 뿔을 구부린다. 그것은 위협한다.
치-밀-한 보라빛은 나쁘게 보인다.
하얀 원은 작게 되었다-작은 점은 개미의 눈.
그리고 반짝인다.
그러나 오래 가지는 않는다. 그것은 다시 자란다-작은 점(개미의 눈).
그것은 성장하면서 자란다.
성장에서 작은 점(개미눈)은 자란다.
하얀 원으로.
그것은 한 번 경련한다-오직 한 번.
하얀 모든 것.
치-밀-한 보랏빛은 어디로 갔느냐?
그리고 개미는?
그리고 코뿔소는? (권영필 역)
감상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칸딘스키(1866~1944)는 러시아 태생의 추상미술 선구자다. 법학을 전공한 그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프랑스 미술전에서 모네의 그림'건초더미'에 압도된 이래 화가의 길로 접어든다. 그는 색채와 빛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감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음악의 상상적 우주와 세계가 어떻게 그림의 영역으로 편입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며 본격적인 추상화의 길을 걷게 된다. 여기엔 절친이자 한때 화가로 활동한 음악가 쇤베르크의 영향도 크게 한몫을 한다. 음악과 미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거꾸로 세워 놓은 자신의 그림을 보고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낀 그에게 예술은 사물에서 영혼에 이르는 말이다.
색채는 건반, 눈은 화음, 영혼은 현이 있는 피아노란 칸딘스키의 말은 이 시에서 색채의 대비와 소리의 잔상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환기한다. 하여 인용시를 읽는 것은 하나의 음악이라는 추상화를 듣는 일이 된다. 회화는 통주저음(通奏低音)을 가져야 한다는 괴테의 생각도 칸딘스키와 궤를 같이하며, 음악과 회화의 깊은 연관성을 보여준다. 리듬감 있는 단어의 반복을 통해 의미에서 울림으로 건너가는 거기, '하얀 호른'이 있다. 하얀 호른은 사물의 빛과 소리의 결합으로서, 깊은 울림이다. 곡선과 직선-우주로 뻗어가는 정신의 선, 호른의 음색에는 낮고 웅장하며 공간을 가르는 수평적 울림이 있다. 하얀 원, 하나의 원은 일자와 다자 사이에 있으며, 모든 소음이 사라진 하얀 정적과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어떤 것-진동이다. 내면의 필요와 영혼에서 비롯된 모든 것은 아름답다.
칸딘스키에게 예의 내적 필연성은 릴케와도 통한다. 기하학적 악기로서 하얀 호른의 소리는 우주라는 연속체 위에 던져진 파문. 하얀 호른에 나타난 상상적 세계와 언어는‘하얀 호른’과‘치밀한 보랏빛’에서 보듯이, 공감각적 불협화음을 조성하며 추상적이다. 흰색은 모든 가능성이 잠재된 침묵이자 탄생 전의 공허. 그렇다면 "치-밀-한 보랏빛은 어디로 갔느냐?" 칸딘스키의 주저『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보라는 빨강에서의 파랑의 수동적 요소로서, 인간으로부터 멀어지려는 경향이 있다. 보라색은 일종의 병적이며, 불꽃이 꺼져버린 것 같은 비극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 정신적-정서적 울림의 부조화 상태를 나타낸다. 색의 깊이에서는 목관 악기인 파곳의 저음과 유사하다. 하지만 초월의 보라, 보라의 빛과 신비는 어디에도 없다.
원은 개미처럼 작아진다. 시력이 좋지 않아 어둠 속에 희미한 빛이 전부인 개미는, 개미의 눈은 점점 자라나 다시 원으로 반짝인다. 흰이 모든 것이라면, 말레비치의「검은 사각형」은 무(無)다. 영도(零度)다. 예술의 아름다움과 깊이는 오직 한 번의 경련으로 쓰러짐에 있다. 개미와 코뿔소는 어디에 있는가? 점과 원(각), 소리와 색채, 하얀과 호른 사이엔 또 무엇이 있는가? (김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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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색채는 건반, 눈은 화음, 영혼은 현이 있는 피아노란 칸딘스키의 말은 이 시에서 색채의 대비와 소리의 잔상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ㅡ 간딘스키도 들었듯 사물은 그자체가 악기다 화경이다 연주다 ㅡ 알고 보면 시는 우주란 원고지 위에 별의 피아노를 치다가는 방식이다 ㅡ 이런 시법은 동양의 음양 오행의 리듬과 일치하며 ㅡ 사물 그 자체가 예술임을 상기시킨다. ㅡ 김상환 시인님 공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