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단 장 전속 부관으로 있을 당시, 서른 살을 넘기지 말고 결혼을 하기를 원하시던 어머님의 간절한 뜻에 따라 아내와 선을 보고 , 약혼을 하고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24시간 공관에서 근무하는 관계로 신혼살림을 차리지 못하고 전속부관이 끝나고, 항공학교로 고군반 교육을 가면서, 조치원 명동 초등학교 앞에서 문칸방을 얻어서 아내와 같이 신혼 살림을 시작했다. 항공 학교 고등군사반 교육을 마치고 그해 12월 초순에 나는 3군 사령부 본부 비행대로 전입을 갔는데, 부대에 도착하여 일주일 정도가 지난 다음 진급 발표가 있었는데 소령으로 진급을 하였다. 소령 진급이 되고 그 해 5월에 아네스가 태어났다. 처음 용인으로 갔더니 몇개 안되는 부대 관사가 비어있는 곳이 없어서 우선 동기생 박승균이네 관사 옆방을 얻어 짐을 두고 용인 으로 방을 구하러 다니다가 김량장리란 곳에 조귀쇠란 사람집에 방을 하나 얻어서 그리로 짐을 다시 옮겼는데 그 좁은 방에서 살동안에 아네스가 태어났다. 수원의 박산부인과란 곳에서 태어났는데 아이가 너무커서 (4.1Kg) 아내가 고생을 많이도 했다. 복덩이가 태어나서 그랬는지 그해 5월에 나는 종합 행정학교 유학 장교반 시험을 처서 합격하여 종합 행정학교로 공어 공부를 하러 들어갔다. 군에서 영어를 잘한다는 것 또한 상당한 장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종합 행정학교 유학 장교반은 오전 4시간을 영어 이론 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4시간 동안 영어 테이프를 듣고, 퇴근을 하여서도 잠이 들 때까지 계속 영어 테이프를 듣는 나날이었다. 일반 대학 4년간의 영어 공부의 양보다 많은 공부를 집중적으로 하게되었기에 군사 교육 가운데 가장 필요한 교육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 였다. 처음 나혼자 행정학교 비오큐를 얻어서 부대 식당에서 밥을 사먹고 다녔는데 공부하는데 힘도들고 먹는 것도 그래서 애내에게 성남시로 이사를 하자고 하여 성남 태평동 산중턱 으로 방을 얻어서 이사를 하였다. 아내스가 백일도 안되었는데 이사를 가서 그해 10월까지 5개월을 살다가 군영반 교육이 끝나고 바로 도미 교육이 되지않고, 6개월을 기다려야 하는데, 항공학교 직무교육으로 도미 대기하는 중에 다시 또 조치원으로 이사를 하게되었다. 그런데 성남 방 값 보증금을 제때에 받지를 못하여 그 방이 세가 나갈 때까지 보증금을 받으러 여러번 성남으로 오고 가는라고 애를 먹기도 했다. 그러나 아네스가 성남에서 유아 영세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다시 항공 학교로 이사를 했다. 유학 자장교반( ALC)는 한반이 20여명이었는데 도미 경험이 있었던 사람 소령 한명을 빼고는 내가 항상 2등을 하였다. 그리고 미 8군 고문단으로 가서 영어 듣기 시험(E.C.L,)을 치면 항상 90점 이상이 나왔었다. 그 것은 내가 종,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영어 공부를 정말로 열심히 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해 봄에 미공군 통신 전자기술학교로 항공 교통관제 교육을 가게되어 있었으나, 이란에서 미국 대사관 직원 인질 사고가 발생하여 미국의 군원 교육 계획의 변동으로 연초에 가려던 교육이 반년 가량 늦어져서 항공 학교로 파견이 되어 있다가 6월에 다시 도미를 위한 E.C.L.평가를 미 8군 군사고문단으로 가서 다시 보고, 도미 교육을 가게 되었다. 그당시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것이 드문 일이고 내가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가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라서 그랬겠지만, 내가 미국으로 떠나는 날 김포공항까지 여러명의 가족들이 ( 어머님 , 장모님, 동서부부그리고 아내와 아네스까지 ) 배웅을 나오기도 했었다. 그해 연말까지 군사유학을 국비로 가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월급이 그대로 나오고 나는 군원 교육을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미국 정부에서 경비를 지원 받았지만 사실은 우리나라가 미군에게 제공하는 비용중에 일부이기도 했던 것이다.
혼자 배운 영어 실력으로 택사스주 산 안토니오 시의 미 국방 어학원으로 들어가서 다시 영어 공부를 하고, 과정과정마다 시험을 쳐서 합격을 하고나야 다음 단계로 교육이 이어지는 제도 였다 미 국방 어학원( D.L.I defence language institution) 에서 영어 듣기 시험을 다시쳐서 90점 이상이 나와야 다음과정으로 갈 수가 잇었다. 특히 내가 간 교육은 항공 교통간제 교육이었기에 더욱 수준이 높은 과정이았다. 비행장으로 항공기가 착륙 접근을 할 때 영어로 그 많은 비행기를 하나하나 불러서 안전하게 착륙시키는 하는릐 교통 순경 역할 을 하는 것이 항공 관제사의 임무였던 것이다. 일단 영어를 잘해야 그다음과제가 기술적으로 항공 관제 전문 용어를 사용하여 항공기를 유도하고 안내하고 통제하는 모든 정보를 알려주는 일이었다. 택사스에서 다시 미시시피주에 있는 미공군 키슬러 기지로 가서 미 연방 항공 법규 시험과 항공 교통관제사 과정 교육을 받고 있었는데,
나를 도와주던 미공군소령 린더불럼이 한국여인과 결혼한 사람이었다. 그가 교육중에 나를 많이 도와주었고 그의 집에 초대를 받아가서 식사를 같이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나라오산에서도 근무를 했다고했다. 귀국을 할무렵 10월 26일 박정히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나서 교육이 11월 중순에 끝나면 미국여행이라도 하고 올 계획이었지만 교육이 끝나자 바로 귀국하라는 지시를 받고 그해 11월 초에 귀국을 하고, 12월12일 서울에 가서 지인들과 식사를 하고 내려 왔는데, 그 날밤에 12.12 사태가 발생하여 나라가 온통 뒤숭숭한 시기였다.
나는 항공 학교에서 교관생활을 하게 되었다. 귀국즉시 항공 학교 학술학처에 보직되어 항공 영어, 항공 관제, 계기비행 이론등을 가르치다가 다시 회전익 전환반 교육을 받고 계기학과 교관을 하다가 행정처장으로 보직이 되어었다. 1980년 시월에 펠릭스가 태어났다. 아내와 같이 버스를 타고 청주로 가서 낳아는데 아네스가 태어날때보다는 쉬웠지만 아내의 입장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펠릭스가 태어난지 100일이 지난 즈음 나는 병원으로 가서 정관 수술을 받았다. 어느 날밤에 펠릭스가 갑자기 열이 많이나서 밤 열한시가 넘어서 조치원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나이든 그 의사 양반이 나에게 이렇게 밤늦은 시간에 아이를 데리고 오면 오히려 안 걸린 감기도 걸리기 쉽다고 나무랐는데 나에겐 이 아들이 하나뿐일 것이란 걱정으로 그렇다고 말도 못하고 아이가 열이나서 급하게 서둘렀던 것이다.
도미 교육을 받고 귀국하여 항공 학교에서 근무하던 나는 다시 육군 본부 항공 감실 행정 실장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도미 교육을 받고 오면 최소한 2년 이상 교관 보직에 근무를 해야하는데 학교에서는 행정부 편제 개편으로 중령 자리가 소령으로 바뀐 행정처장 자리에 나를 보냈다. 그런데 그자리도 2년은 채워야 하는데 육군본부 항공감실 편제 개편으로 중령과 대위자리를 통합하여 소령 하나로 바뀐 항공감실 행정 실장에 내가 선발되었다. 교관 보직이 다 차지 않아서 육군본부에 재보직 이유서를 제출하고 육본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