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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고통을 당하는 자들의 비참
1. 저주 받은 자들이 잃는 즐거운 시간들
1)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뻔뻔스러운 믿음을 잃게 된다.
2) 모든 소망을 잃게 된다.
3) 양심의 모든 평강을 잃는다.
4) 모든 정욕적인 쾌락을 잃는다.
5) 모든 감각적인 즐거움을 잃는다.
2. 저주 받은 자들이 당하는 너무나 큰 고통들
1) 지옥의 고통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다.
2) 고통의 장소 또는 상태
3) 하나님의 보응의 결과로서 고통을 당할 것이다.
4) 그들을 처벌하시는 하나님의 기쁨
5) 사탄과 죄인들은 자기 자신 때문에 처형당할 것이다.
6) 이 고통은 지옥에서 보편적일 것이다.
7) 형벌의 어떠한 완화도 없을 것이다.
8) 영원한 고통이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 (딤전 4:8). 만일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주께서 모든 것을 더하신다” (마 6:33). 하지만 불경건한 자들은 영적인 복과 이 땅에서의 복을 잃게 될 것을 경고 받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둘을 잃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 땅에서 추구했던 것마저 다 빼앗기게 된다. 만일 그들이 이 땅에서의 즐거움을 유지할 수 있다면 천국을 잃어도 별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잃었다면 그들은 주 안에서 그 모든 것을 다시 얻게 되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주께서 그들에게 만유 가운데 모든 것이 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다른 것들을 위해 그리스도를 버렸으며 따라서 그리스도를 잃게 될 것이다. 그들이 주를 버림으로 말미암아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게 되며 나아가 모든 즐거운 시간들을 잃을 것이다.
1. 저주 받은 자들이 잃는 즐거운 시간들
1)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뻔뻔스러운 믿음을 잃게 된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로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뻔뻔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들은 그 믿음을 잃을 것이다. 이 거짓 믿음은 지금 그들의 영을 붙들고 있으며 이 거짓 믿음은 그들의 공포로부터 그들을 보호한다. 그러나 그들이 믿는 것들이 거짓으로 드러나고 아무 것도 더 이상 믿을 수 없을 때 무엇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가장 위험한 재난을 당할 위기에 있는데도 오히려 자신은 안전하다고 확신하고 있다면 그 순간만은 모든 것이 평탄한 것처럼 즐거워 보일 수 있다. 만일 그런 헛된 믿음으로 행복을 느끼고 있다면 그 행복은 참된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믿음이 중생한 자들에게 가장 앞서는 은혜인 것처럼, 거짓 믿음은 중생하지 못한 자들에게 가장 앞서는 악이다.
왜 그렇게 많은 무리들이 자신들이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이미 자신들은 용서를 받았다고 믿으며 그 기회를 놓치는 것일까? 만일 당신이 지옥에 있는 수천수만의 사람들에게 왜 그곳에 가 있냐고 물을 수 있다면 그들 대부분의 대답은 “우리는 저주 받는 그 순간까지 구원을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중생과 경건의 능력을 간절히 추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진짜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었다”라고 말할 것이다.
독자들이여, 내가 진실로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은 진실은, 무관심하고 더럽고 교만한 수많은 무리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다 자신들은 좋은 상태에 있게 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의 거짓된 믿음은 결국 영혼을 저주하는 기만으로 입증될 것이다. 지옥에 떨어지면 그제야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거짓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는 사탄의 작전으로써 인간들의 영혼의 눈을 멀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더 과감하게 자기를 따르도록 만들고자 함이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열릴 때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와 있는지 보게 될 것이다.
2) 모든 소망을 잃게 된다.
그들은 모든 소망을 잃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의 삶 가운데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경고를 받았었다. 그러나 자신들은 그 진노를 벗어날 것이라는 소망에 그들의 마음은 든든했다. 우리는 지금 가장 사악한 주정꾼들, 거짓 맹세하는 자들,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들에게 회개 없는 구원의 소망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악함을 붙들고도 구원을 받을 것으로 소망한다. 오, 구원이 그들의 소망처럼 흔한 것이라면, 그러한 세상은 과연 행복한 세상이 될 수 있겠는가!
오, 사람들의 헛된 소망이 너무나 강해서 그들은 심판대 앞에서 그리스도와 따질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었다”(마 7:22)고 주장할 것이다. 나아가 자신들은 배고프고 헐벗고 감옥에 있던 그리스도를 모른 채 한 적이 없다고 당당하게 우길 것이다. 하지만 주께서는 그들에게 정죄를 선포하실 것이다.
오, 자신들의 모든 소망을 영영 떨쳐 버려야 하는 그 비참한 신세는 얼마나 슬픈 것인가!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 (잠 11:7). “그러나 악한 자들은 눈이 어두워서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하리니 그들의 희망은 숨을 거두는 것이니라” (욥 11:20). “그들의 희망이 숨을 거둔다”라는 표현은 악한 자들이 자신들의 모든 소망을 포기하게 되는 사실을 적절하고 무시무시하게 표현한 것이다. 영혼이 가장 큰 고통을 느끼는 때는 그 영혼이 몸에서 떠나는 때인 것처럼 악한 자에게서 소망이 떠날 때 그들은 가장 큰 고통을 느낄 것이다. 사람의 영혼이 그렇게 오랫동안 즐거이 함께 하던 몸으로부터 갑자기 찰나의 순간에 떠나는 것처럼 악한 자들의 소망도 그렇게 떠날 것이다. 몸을 떠난 영혼이 이 세상에서 다시 몸과 살려고 그 몸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악한 자들의 소망은 그들의 영혼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부활의 기적으로 영혼과 몸은 다시 합쳐지지만, 저주받는 자의 소망은 다시 부활하여 그들에게 돌아오는 일이 없다.
내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가련한 장면은 불경건한 사람이 죽는 장면으로써 그 영혼과 소망이 떠나는 것을 생각할 때 가장 가련하여진다. 그는 저 세상에서 얼마나 슬픈 처지가 되어 있을까! 저 세상에서 이미 소망을 잃는 사람에게 가서 “당신은 과거처럼 당신 자신의 구원을 확신합니까?”라는 질문하면 그는 얼마나 슬픈 답변을 할 수 밖에 없을까! 오, 무관심한 죄인들이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정신을 차리고 이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독자들이여, 성경의 약속에 근거하여 당신의 모든 소망을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안심하지 말라. 성경이 말하는 소망들은 당신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며 경건에 힘쓰게 하며, 더 소망할수록 죄를 멀리하게 하며, 소망이 분명할수록 더욱 주를 순종하게 만든다. 만일 당신의 소망이 이러한 소망이라면 주의 힘으로 계속 앞으로 나아가 당신의 소망을 꼭 붙들라. 그 소망은 결코 당신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의 소망이 당신의 영혼에 건전한 은혜의 효력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 소망을 당장 내다 버리라. 거듭나지 않고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든지, 거룩함이 없이도 하나님을 볼 수 있다든지,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신의 생명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함이 없이도 그리스도 안의 기업을 받을 수 있다든지 하는 그러한 소망이 있다면 당장 버리라. 그러한 헛된 소망에 실망을 하는 것이 바로 천상을 향하는 첫 걸음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길에서 벗어나면 그를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제일 먼저 어떤 과정이 필요한가? 먼저 그는 그가 서 있는 길이 잘못된 길로써 그의 여정의 목표를 절대 이룰 수 없음을 깨닫고 좌절하는 것이다. 집은 동쪽인데 서쪽으로 향하면서 자신이 가는 길이 옳다고 기대하는 한 그는 더욱 멀리 빗나가게 된다. 하지만 그 길로는 그가 집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실망하면, 그는 돌아서게 될 것이며 그때야 그는 바른 소망을 갖게 된다.
죄인들이여, 당신의 영혼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태어나자마자 천상으로 향하는 길에서 벗어났고 벌써 그 길을 여러 해 동안 달려왔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악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구원을 받을 것으로 소망하고 있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그러한 소망을 떨쳐 버리고 당신이 줄곧 천상을 향하는 길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당신은 절대로 돌아서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마 이 세상에 있는 것 중에 가장 천국을 막는 것이 있다면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 있으면서도 자신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거짓 소망일 것이다. 저주 받은 자들이 후에 천상을 잃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붙들고 있던 소망들이 다 거짓인 것을 알 때 그 비참이 얼마나 심하겠는가!
3) 양심의 모든 평강을 잃는다.
그들은 현재 그들의 삶을 매우 편하게 느끼도록 해주는 양심의 거짓 평강을 다 잃게 될 것이다. 수없이 많은 불경건한 자들이 조용하게 살아가는 것을 볼 때 누가 그들이 이제 얼마 후에 영원히 타는 불못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들은 순종하는 신자만큼이나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며, 구원을 받게 될 신자들과 다름없이 그들 대부분은 마음이 평안하다. 만일 그들의 평강이 영원한 것이라면 그들은 얼마나 행복한 자들이겠는가! 하지만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할 것이다” (살전 5:3). 오, 이런 멸망으로 끝날 잔인한 거짓 평안이여!
모든 사람의 영혼은 본성상 사탄의 수비대 역할을 한다. 그런 사람의 영혼은 그리스도가 찾아오셔서 심판과 지옥의 무서운 경고를 알려주시고 경고와 공포의 규례로 그 영혼을 때리실 때까지는 헛된 거짓 평안을 누린다. 하지만 주님은 강한 자로 오셔서 “사탄을 굴복시키시고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신다” (눅 11:22). 그러면 그 영혼은 거짓 평안을 다 잃고 주를 영접하고 주를 통치자로 모신다. 그 후 주님은 든든하고 영원한 평강을 그의 영혼 속에 세워주신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첫 번째 종류의 평강에 있다면 그것이 오래갈 것이라고 절대 생각지 말라. 당신의 영혼이 그리스도와 원수로 있으면서 지속적인 평강을 누릴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전쟁을 선포하시는데 과연 당신이 평안을 느낄 수 있겠는가?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태평스러운 마음에 들이닥치셔서 당신을 흔들어 거짓된 평안에서 나오게 하여 당신이 그리스도의 발 앞에 꿇어 엎드려 “주여, 제가 무엇을 하여야 하리이까?”라고 말하게 되는 가장 큰 복을 누리게 되길 바란다. 그때 당신은 주님으로부터 더 좋고 안전한 평안을 받게 될 것이다. 그 평안은 영원한 안식의 시작으로서 절대 부서지지 않으며, 당신이 망할 때 함께 무너지는 세상의 평안과는 달리 당신이 죽더라도 그 평안은 멸하지 않는다.
4) 모든 정욕적인 쾌락을 잃는다.
그들은 모든 정욕적인 쾌락을 잃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웃음에 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에 대해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전 2:2) 말할 것이다. 그들의 쾌락으로 인한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다” (전 7:6). 즉, 그들의 정욕적인 쾌락은 잠깐 타오르더니 곧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죽음과 심판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의 쾌락을 당장 망쳐놓기 때문에 그들은 그 이야기들을 진저리가 나도록 싫어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와 위험에 대한 생각을 참을 수 없어했는데, 그 이유는 그런 생각을 하면 기분이 망쳐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죄 때문에 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으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팔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들은 웃음으로 슬픔을 쫓아낼 수 있었고 노래로 우울함과 염려를 멀리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말씀 묵상과 기도를 생각하면 비참을 느끼거나 또는 미칠 정도로 짜증이 났다.
가련한 영혼들이여! 그곳에는 슬픔 밖에 없을 텐데, 당신은 얼마나 비참을 느끼게 될까? 그 슬픔은 강렬하게 가슴을 찌르는 엄청난 슬픔일 것이다. 당신에게는 성도들이 누리는 기쁨도 없고 당신이 과거에 누리던 쾌락도 이제 없으니 무슨 낙이 있겠는가! 지옥에는 즐거움을 누리거나 밝은 얼굴을 하거나 또는 우스개 농담을 하는 단 한 영혼도 찾아볼 수 없다. 당신은 그곳에서 “작은 쾌락이 너무나 큰 슬픔을 가져왔구나”라며 절규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작은 경건한 슬픔이라도 마침내 영원한 기쁨을 가져올 것을 잊지 말라. 그 기쁨은 당신이 누릴 수 있었던 모든 어리석은 쾌락보다 무한하게 값질 것이다. 하지만 쾌락의 끝은 언제나 슬픔이다.
5) 모든 감각적인 즐거움을 잃는다.
그들은 또한 모든 감각적인 즐거움을 잃을 것이다. 그들은 참 하나님을 잃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으뜸 되는 선과 자신들의 신으로 여기며 좋아했던 것들과 자신들의 천국으로 여겼던 것들을 잃게 될 것이다. 교만하며 야심적인 사람이 높은 영광의 자리에서 떨어질 때 그 비참은 대단하다! 그의 시체의 먼지와 뼈는 가장 가난했던 거지의 먼지와 뼈로부터 구별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영혼도 거지의 영혼보다 더 명예롭거나 특혜를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대단히 많은 위대하고 고상하고 학식 있는 자들이라도 그리스도 앞에서 쫓겨날 것이다! 그들에게는 화려한 집도, 부드러운 침대도, 안락한 소파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진기한 정원과 유쾌한 초원과 풍부한 추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식탁에는 음식도 없고 오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곳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는”(눅 16:19) 부자가 없고, 구경꾼들의 감탄의 소리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운동과 오락으로 시간을 보낼 수 없고 오직 슬픔 가운데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들은 과거와는 너무나 변화된 자신들의 신세를 발견하고 혀를 찰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의 정욕의 열기가 누그러질 것이다.
그곳에서 서로의 얼굴을 볼 때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갈가리 찢어지겠는가? 서로 얼굴을 보면서 그들은 그들이 이 땅에서 서로를 만났던 그 날을 저주할 것이다! 오, 죄인들이 지금 이 땅에서 이 사실을 기억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즐거운 만남이 그 때에 우리를 천상으로 인도할 것이 확실한가? 그 때에 그들을 기억할 때 그 기억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아닐까? 그 때에 지금 우리가 악에 동참한 사실을 우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왜 쾌락을 맛보기 위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을 팔아먹어야 하는 것일까? 오라. 우리가 함께 죄를 지었으니,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며 용서를 구하자. 서로 속이며 서로 망하는 것을 위해 돕지 말고 함께 천상을 향해 갈 수 있도록 서로 돕자.” 오, 육체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모든 것을 추구하는 때에, 정작 그들이 원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만 한다면! 오, 지금 당신은 당신의 정욕 때문에 계속 유혹을 받는다. 한편 당신을 잡으려는 덫은 점점 세력을 얻고 있다. 속지 말고 당장 정욕을 버리고 주 예수를 붙들라.
2. 저주 받은 자들이 당하는 너무나 큰 고통들
성도의 안식을 상실한다는 것은 모든 즐거운 시간을 다 잃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지옥의 고통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의 내용은 지옥의 지독한 고통이 어떠할지를 말해준다.
1) 지옥의 고통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다.
지옥의 고통의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 그분이다. 죄인들이 모독한 대상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범죄에 대해 벌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그의 원수들에 대해 지옥의 고통을 예비하셨다. 주의 계속되는 분노가 끊임없이 그들을 괴롭힐 것이다. 주의 성난 숨결이 지옥의 불꽃을 타오르게 할 것이다. 주의 진노는 그들의 영혼이 감당하기에 견딜 수 없는 짐이 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피조물을 상대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전능자의 공격을 당하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히 10:31).
온 세상이 그들을 대적한다고 해도, 혹은 모든 피조물들이 힘을 모아서 그들에게 형벌을 가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진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지금 이 땅에서 그들은 과거에 집 주인이나 고객, 상관, 친구, 이웃, 그리고 자신의 정욕을 즐겁게 하기 위해 감히 하나님을 기분 나쁘게 하는 편을 택하였다. 그러나 그때가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호의를 잃기보다 온 세상을 미워하였더라면’ 하며 수천만 번 후회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얼마나 무서운 소멸하는 불이신지!
만일 이곳에서 주의 진노가 잠깐이라도 나타나면 우리는 당장 풀처럼 시든다! 얼마나 신속하게 우리의 힘이 무너지고 연약하여지던가! 우리의 아름다움은 얼마나 급히 추함으로 바뀌던가! 불길이 마른 그루터기에 붙으면 오래 타듯이 하나님의 진노는 이 철면피 같은 악한 자들 위에 오래 오래 머물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감옥이나 교수대나 화형을 견딜 수 없었고 나아가 작은 조롱마저 참지 못했던 그들이 이제 어찌 하나님의 타오르는 진노의 화염을 견딜 수 있을까?
2) 고통의 장소 또는 상태
고통의 장소와 상태는 하나님의 공의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실 때 주께서 세상을 지으셨다. 주의 모든 피조물들은 적절한 질서를 유지하며 주의 지혜를 선포한다. 주의 섭리는 만물을 유지하는데서 드러난다. 주의 진노의 불꽃이 이 땅에 불붙으면 여덟 명을 제외하고는 온 세상이 물에 잠긴다.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은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불로 타 버렸다. 바다가 입을 열어 어떤 사람들을 먹어 버리고 땅이 갈라져서 다른 사람들을 삼켜 버리며 염병이 수천수만의 사람들을 멸절시켰다. 현재 유대인들의 비통한 상태야말로 하나님의 진노의 산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의 최대 영광은 다음 세상에서 각 사람들에게 주어질 삶을 통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맛보는 성도들에게 상상을 초월하여 주의 자비를 맛보게 할 것이며, 마찬가지로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그 날에 하나님의 공의를 완벽하게 드러내실 것이다. 하나님은 지옥의 영원한 화염을 반란자들에게 마땅한 것으로 여기실 것이며 심지어 더 뜨거워야 한다고 생각하실 것이다. 또한 그들이 수백만의 세대를 지옥에서 보낸다고 해도 주께서는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으실 것이다. 화염으로 타지만 결코 소멸하지 않던 떨기나무처럼 질투하시는 전능자의 진노는 끝이 없을 것이다. 이 진노의 대상이 된 영혼들에게 화가 있을 지로다!
3) 하나님의 보응의 결과로서 고통을 당할 것이다.
저주 받은 자들의 고통은 하나님의 보응이기 때문에 극심할 것이다. 진노는 무서운 것이지만 복수는 인정사정이 없다. 크신 하나님께서는 “내게 반항하던 피조물은 이제 나의 인내를 모독한 대가로 그 값을 치러야 한다. 내가 얼마나 너를 기다렸는지 기억하라. 그러나 나의 기다림은 헛되었다. 내가 너를 설득하고 네게 애원하기 위해 얼마나 허리를 숙였는지 너는 기억할 것이다. 너는 내가 언제나 그렇게 경멸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느냐?” 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 후 주께서는 그리스도와 은혜를 무시하며 주의 자비를 업신여긴 모든 자들에게 보응하실 것이다. 오, 그들이 이 사실을 미리 알고 그러한 화가 자기에게 임하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면!
4) 그들을 처벌하시는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자비를 받아들이기를 바라시지만 그들이 계속 반항을 고집할 경우 주께서는 기꺼이 그들을 처벌하신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나는 노함이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곧바로 “찔레와 가시가 나를 대적하여 싸운다 하자, 내가 그것을 밟고 모아 불사르리라”고 더하신다(사 27:4). “그들을 지으신 이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며 그들을 조성하신 이가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 것이다”(사 27:11).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지 않으실 때, 그들을 조성하신 주께서 그들에게 호의를 보이시지 않으실 때, 그들은 얼마나 가련하겠는가! 주께서는 그들에게 선을 베푸시면서 기뻐하셨듯이 이제 주께서는 그들을 멸망시키시고 망하게 하시면서도 즐거워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벌하시기를 기뻐하실 대상들에게 화가 있도다! “그들이 재앙을 만날 때에 주께서 웃으실 것이며 그들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주께서 비웃으리라” (잠 1:26).
주께서는 “그들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할 때, 그들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를 때, 그들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할 때” (잠 1:27) 기뻐하실 것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 외에는 하늘과 땅의 그 누구도 그들을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이며,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들의 재앙에 기뻐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비웃음과 조롱을 말할 때는 사실 그대로이기보다 사람의 방식을 따라 표현한 것이겠지만, 아무튼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고통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뜻이며 달리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다.
5) 사탄과 죄인들은 자기 자신 때문에 처형당할 것이다.
사탄과 죄인들은 자기 자신 때문에 처형당할 것이다. 이 땅에서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가지 못하도록 유혹했던 사탄과 사탄에게 속아서 그리스도를 멀리했던 그들 모두 벌을 받을 것이다. 그 벌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고, 그리스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권면을 받지 않도록 유혹한 사탄과 그 유혹에 빠져 죄를 범한 영혼들이 얻게 되는 보응이 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사탄에게 속지 않고 그리스도를 충성스럽게 섬겼더라면 좋은 보상을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사탄에게 속았으니 그때에 완전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은 가장 타당하다. 그러니 그들이 자신들 외에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6) 이 고통은 지옥에서 보편적일 것이다.
지옥의 고통은 그곳에 들어온 모든 자들에게 보편적일 것이다. 그들 모두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들 모두 반드시 고통을 당할 것이다. 죄를 짓는데 주체였던 영혼은 고통을 받는 주체가 될 것이다. 영혼이 몸 보다 훨씬 뛰어난 본질을 가진 것처럼 영혼의 고통은 몸의 고통보다 훨씬 심할 것이다. 영혼의 기쁨이 모든 감각적인 기쁨들을 훨씬 능가하는 것처럼 영혼의 고통 또한 육체의 고통들을 능가할 것이다.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은 그냥 영혼이 아니라 죄 많은 영혼이다. 불은 탈 연료가 없으면 탈 수 없다. 그러나 마른 나무가 있으면 불은 맹렬하게 탄다! 화약이 성냥불에 붙는 것 같이 지옥의 화염은 맹렬하게 저주 받은 영혼의 죄책감에 붙을 것이다.
몸도 그 나름대로의 고통을 당한다. 조심스럽게 돌봄을 받고 귀중하게 다루어지고 호화스럽게 옷을 입던 몸도 이제 고통을 당해야 한다! 그 교만한 자태가 이제 땅바닥으로 떨어져 낮아졌다! 지옥의 화염은 몸의 잘생긴 모습이나 아름다움을 전혀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진기한 물건들에 익숙해져 있는 눈들은 그때에는 끔찍한 장면들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볼 것이며 그들이 조롱했던 성도들이 자신들이 잃은 영광을 즐기는 것을 볼 것이다. 그들 주변을 보면 오직 마귀들과 저주 받은 영혼들만 보일 것이다! 얼마나 그들은 뒤를 돌아보며 “우리가 즐기던 모든 잔치들과 놀이와 향연이 결국 이를 위한 것이었던가?”라고 말할 것이다. 음악과 노래에 익숙해져 있던 귀들은 저주 받은 동료들의 비명 소리와 절규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어린이들은 그들의 부모들을 향해 악을 장려하고 악의 본을 보여준 사실에 대해 울고불고 난리를 칠 것이다. 남편과 아내들, 주인과 사환들, 관리와 백성들, 장관들과 신하들은 그들에게 임한 재앙을 서로 탓하며 서로에게 의무를 행하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에 대해, 죄악을 묵인한 것에 대해, 다가오는 위험을 분명히 알려주지 않고 침묵한 것에 대해 서로 비난하며 끝없이 외칠 것이다. 이와 같이 영혼과 몸은 둘 다 지옥의 고통 가운데서 통곡할 것이다.
7) 형벌의 어떠한 완화도 없을 것이다.
지옥의 고통은 완화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지옥에 대하여 들을 때는 양심 때문에 불편하였지만 쉽게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세속에 물든 정욕적인 친구들이나, 사업이나, 동료, 쾌락 등이 가까이 있었다. 또한 그들의 슬픔을 술과 놀이와 잠으로 떨쳐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모든 강구책은 사라졌다. 그들의 강퍅하고 건방지고 믿으려 하지 않는 마음은 사실 그들의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을 막는 방어벽이었다.
사탄이 인류의 첫 어머니의 위로자였듯이 그들의 위로자였다. 사탄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네게 먹지 말라 하시더냐? 네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네게 네가 지옥에서 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더냐? 절대 그럴 리 없다. 하나님은 훨씬 자비로우시다. 그러니 혹시 지옥이 있다한들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자비롭지 않겠느냐? 네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냐? 그리스도의 피가 너를 위해 뿌려진 것이 아니냐?”라고 위로하였다. 성령이 성도들의 위로자인 것처럼 사탄은 악한 자들의 위로자다. 도둑이 집을 털 때는 사람들이 깨어나지 않게 대단히 조심하는 것처럼 사탄은 죄인들이 깨어나지 못하도록 조심한다. 그러나 그 죄인이 멸망하면 사탄은 더 이상 그에게 아첨하거나 위로하는 일이 없다. 지옥에 떨어진 버림 받은 죄인은 이제 어디서 위로를 찾을 수 있을까? 그를 함정에 빠뜨리고 안전을 약속했던 친구들은 다 그를 저버렸으며 그들 자신들도 버림을 당하였다. 그의 위로자들은 다 사라지고 없다. 이제 그가 우습게 여기던 끊임없는 경고를 하셨던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조그마한 착오 없이 그 경고대로 그대로 행하실 것이다.
8) 영원한 고통이다.
지옥의 고통이 가장 무서운 이유는 영원하다는 사실이다. 수천만 년이 지나도 지옥의 고통은 언제나 처음과 똑같다. 만일 그 고통에 끝이 있다면 저주 받은 자들은 그나마 바랄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고통이라니, 그 생각을 하면 감당할 수가 없다! 그들이 죄를 짓는데 지치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형벌하시는데 지치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이 진심으로 죄를 회개한 적이 없듯이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형벌하심을 후회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였기 때문에 영원한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거절한 것이 영원한 나라였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 나라에 영원히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불멸의 영혼들은 죄를 지었으므로 정죄 선고를 받아 불멸의 고통을 당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일 무덤에 누워있거나 다시 무덤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한다! 그들은 소리 질러 외치길 “오 죽음아, 너는 어디로 날아가 버린 것이냐? 이제 와서 이 서글픈 삶을 끊어주렴. 오, 이 고통이 나를 무너지게 하고 나의 존재를 끝낼 수만 있다면! 오, 마침내 내가 사라져 없어져 버린다면! 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라고 외칠 것이다. 이러한 신음들은 그들이 어쩔 수 없이 고통의 영원함을 떠올릴 때마다 터져 나올 것이다. 그들은 늘 설교와 기도가 길다고 생각했었다. 하물며 이 끝없는 고통을 당할 때 그들은 얼마나 그 고통이 길다고 생각하겠는가! 그들이 누린 쾌락의 길이에 비교하여 그들의 고통의 길이는 얼마나 긴 것인가! 하나는 순간이었지만 다른 하나는 영원히 이어진다.
죄인들이여! 때가 거의 다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당신은 영원의 문 앞에 서 있다. 죽음은 그 문을 열고 당신을 잡으려고 기다리고 있다. 가서 몇 밤을 더 자라. 이 땅에서 몇 날을 더 즐기라. 그러다 보면 당신의 밤과 낮은 끝이 나게 될 것이다. 당신의 생각과 세상 관심들과 쾌락은 영원에 의해 삼킨바 될 것이다. 당신은 영원히 변함없는 저주의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 천상의 기쁨을 우리가 다 알 수 없듯이 지옥의 고통도 마찬가지다. 영원한 고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다.
그러나 나는 완고한 죄인들이 결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심을 하는 것을 본다. “내가 저주 받은 자라는 것이 확실하다면 내게는 다른 방도가 없다. 이제 성경이 요구하는 대로 살기 보다는 성경에 대항하겠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성경에서 벗어나서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내 멋대로 하겠다.” 아아, 가련한 피조물이여. 당신이 그런 결심을 하기 전에 내가 당신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내가 던지는 몇 가지 질문에 주목하여 따져보라.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겠다는 당신은 누군가? 당신의 힘은 무엇인가? 당신은 고작 불에 대항하려는 양초나 마른 장작에 불과하지 않는가? 강한 폭풍 앞의 먼지나 겨가 아닌가? 당신의 힘이 철 같고 당신의 뼈가 놋쇠 같고, 당신의 기초가 땅 같고, 당신의 힘이 하늘같다고 해도 주의 분노의 입김에 당신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 하물며 당신은 기껏해야 주의 지지와 호의에 의해 벌레에게 먹이지 않고 며칠밖에 버틸 수 없는 호흡하는 작은 진흙덩이인데 하나님을 대항하겠다는 것인가? 사실 당신은 전능자의 능력과 진노의 표시만 보아도 두려워 떨지 않는가? 당신은 천둥소리와 번개, 또는 힘센 떡갈나무를 산산조각으로 만들어 놓고 가장 강력한 건물을 무너뜨리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두려워 떨며, 염병이 당신 주변에서 유행할 때 떨지 않는가? 만일 당신이 이집트의 재앙들을 보았다면, 땅이 갈라져 다단과 아비람은 삼키는 것을 보았다면, 엘리야가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아하시야 왕의 장군들과 그들의 부하들을 멸망시키는 것을 보았다면 겁을 먹지 않겠는가? 하물며 당신이 지옥의 재앙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왜 당신은 이 땅에서 작은 고통들을 당하면서도 낙망하는가? 치통이나 통풍, 우박이 내리는 날씨, 사지의 절단, 거지가 되거나 수치를 당할 때는 절망하지 않던가? 그러나 이 모든 재앙들을 다 합쳐도 지옥에서 고통 받는 하루에 비하면 행복한 상태라고 치부할 것이다.
죽음이 다가오면 당신은 왜 그렇게 놀라는가? 오, 죽음이 당신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드는가? 하지만 죽음의 장소인 무덤은 고통의 장소인 지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않는가? 불에 몸의 한 부분이 탈 때 견딜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옥에서 수천만 배로 뜨거운 불에 영원히 탈 때는 어떠하겠는가? 지옥에 대한 생각이나 언급마저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데 하물며 지옥을 실제로 체험할 때 당신은 감당할 수 있겠는가? 부자가 왜 지옥에서 아브라함에게 고통을 원망하였겠는가? 왜 죽음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잃고 교만한 자세를 바꾸는가? 지옥은 당신이 그렇게 우습게 여길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당신은 절망에 빠진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가? 그와의 대화는 얼마나 불편했던가! 그의 삶은 얼마나 무거웠던가! 그가 가진 그 어떤 것도 그에게 효과가 없었다. 그는 고기를 먹으며 술을 마셔도 즐겁지 않았고 친구를 만나는 것을 불편해 했다. 그는 삶에 지쳤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만일 저주 받은 자의 지옥의 고통이 참을 만한 것이라면 왜 사람들은 지옥을 약간이라도 맛보면서 그렇게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인가? 당신에게 마귀가 흉측한 모양으로 나타나면 당신의 심장은 멎고 머리카락은 쭈뼛한다. 하물며 마귀들과 저주 받는 자들 외에는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에 의해 고통을 받으며 영원히 사는 것을 당신은 감히 견딜 수 있겠는가?
내가 한번만 더 물어 보겠다. 만일 하나님의 진노가 사소한 것이라면, 왜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친히 그 문제를 그렇게 중요한 문제로 삼으셨던 것일까? 이 문제 때문에 “그의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 (눅 22:44). 생명의 주께서 절규하시길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막 14:34)라고 하셨고 십자가 위에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라고 하셨다. 분명히 이러한 고통을 쉽게 감당할 수 있는 분이 있었다면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셨을 것이다. 그분은 당신과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있으셨다. 그럼에도 지옥의 고통에 대해 주께서 절규하며 신음하지 않으셨던가?
헛된 망상 가운데 안전을 기대하는 죄인인 당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당신은 그리스도께도 그렇게 무거웠던 것을 당신이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 율법의 저주 하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지독한 고통과 피 같은 땀을 흘리셨거늘, 하물며 연약하고 어리석은 당신이 감히 훨씬 더 엄중한 형벌을 요구하는 복음의 저주를 감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선하신 주께서는 당신이 제 멋대로 속아서 그렇게 비싼 값으로 지옥을 사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당신이 회개하고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독자들이여, 이제 나는 당신의 결단을 요청한다. 당신은 이 모든 진리들을 어떻게 이용하겠는가? 다 갖다 버리겠는가? 아니면 진실하게 고민해 보겠는가? 당신은 하나님께서 하신 수차례의 경고들을 무시해 왔다. 이번에도 그렇게 하려는가? 조심하라. 하나님께서 항상 경고와 위협을 알려주시는 것은 아니다. 보응의 손이 들려 내려치시면 그때 주의 경고를 가볍게 여기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당신은 이 책이 지옥과 저주만 말하는 책이라고 하며 이 책을 집어 던지겠는가? 마찬가지로 당신은 경고의 메시지를 외치는 목사에게 불평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당신이 우리에게 이러한 경고들을 말하지 못하게 하더라도,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리라고 한 것을 알리지 않고 침묵하면 우리는 당신의 영혼의 피 값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된다. 당신은 우리가 당신에게 진리를 말함으로써 불편을 느끼게 하기 보다는 조용히 편안하게 멸망하며 또한 우리도 진리를 말 못하고 당신과 함께 멸망하기를 원하는가? 만일 당신이 그러한 비인간적인 잔인함으로 죄악을 고집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리를 말 못하는 그러한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것을 금하신다!
이러한 종류의 설교나 글은 미움 받기 십상이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칭찬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러한 불편한 내용에 대해 아무도 즐거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러한 경고들이 옳고 경고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틀린 것이 아닌가! 만일 그들이 틀리다면 나는 무조건 온 마음을 다해 그 흉악한 사람들로부터 당신을 꺼내오기를 원한다. 만일 이러한 경고들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당신이 이 경고를 생각하지도, 듣지도 않는다면 당신은 결국 가장 가련한 존재가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 가르침은 당신에게 공포가 아니라 위로가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아직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면 지옥에 대한 내용은 물론이고 천국이나 구원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걱정과 함께 두려움이 몰려올 것이다. 하지만 당신에게 천국과 자비를 설교하는 것은 당신이 천국과 자비를 거부하지 말고 구하라고 부탁하려 함이며, 지옥을 설교하는 이유는 당신이 단지 그것을 피할 수 있도록 설득하려 함이다. 만일 당신이 지옥을 피할 가망이 전혀 없다면 내가 당신에게 지옥을 말하는 것은 헛수고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아직 이곳에 살아있는 한, 당신이 회복할 수 있는 기회는 아직 있다. 따라서 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당신을 당신의 무감각 상태에서 깨우려고 하는 것이다.
아아! 하나님의 진노 하에 있는 영혼들의 고통을 지금 이 땅의 사람들이 어찌 알 수 있겠으며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죄인들이여, 그때에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 외칠 것이다. “오, 이 가련한 영혼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왜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지금 당장 당신의 영혼을 위해 자비를 받으라. 긍휼을 얻으라”고 외치겠는가! 그러나 긍휼을 원치 않는 당신에게 어떻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실 수 있겠는가! 만일 당신의 말(horse)이 앞에 있는 구덩이를 본다면 당신은 그 말을 구덩이에 떨어뜨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 앞에 위험이 훤히 보이는데도 고집스럽게 지옥으로 떨어지려는가?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나 1:6). 이제 당신에게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것 같다. 당장 결심을 하여 영혼을 망하게 하는 죄악들을 멀리하고 그리스도께 당신 자신을 전부 드리도록 하라. 그러면 당신의 얼굴은 성도 중에 한 사람이 되어 당장 천상의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 당신의 마음이 주께 설득되어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복음의 언약을 붙들기를 바란다! 만일 당신이 죽기까지 마음을 강퍅하게 하면, 그때는 회복이 있을 수 없다. 다른 날로 미루지 말고 지금 당신에게 진실하게 경고하는 이 친구의 말을 들으라. 그러면 당신에게 저주가 임하는 것을 기꺼이 막으려 하는 친구 하나를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