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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남진 9회차
언 제 : 2014 .12. 02 (화)
어디로 : 대관령(1.8km)~능경봉(11.15km)~닭목령 : 도상거리 12.95km
누구랑 : 안내산악회와 함께
시 간 : 3시간 59분
날 씨 : 맑음(박무, 강풍)
산행지도 :
11월 9일에 진고개에서 대관령 구간을 끝으로 올해는 대간산행을 중단하려고 했는데 자주 다니던 안내산악회에서 다음 구간인 대관령에서 닭목령까지를 당일로 진행하는 공지가 올라와서 함께하기로 했다.
전날 일기예보에 기온이 많이 내려가고 강풍이 부다기에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밖의 기상을 살피니 장난이 아니다.
바지 안에 얇은 내의를 입고 오리털 잠바와 귀를 덮는 모자로 중무장을 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그래도 몸이 떨려왔다.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고 출발지인 잠실역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으니 07:00가 조금 않되어서 버스가 도착을 하였고 버스는 몇군데 정류장과 휴계소를 거쳐 09:50경에 대관령에 도착을 하였다.
대관령 전경
09:55 대관령(大關嶺:832m) 에서 산행 시작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서울과 영동을 잇는 백두대간의 관문이면서 영동고속도로가 지났으나 2002년 11월 횡계-강릉 구간이 터널로 바뀌었다.
대관령은 예로부터 고개가 험해서 오르내릴 때 "대굴대굴 크게 구르는 고개"라는 뜻의 '대굴령'에서 음이 변해 대관령이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로는 영동지방에서 오는 '큰 관문에 있는 고개'라는 뜻에서 대관령이 유래되었다 한다.
들머리에 있는 이정표 : 제왕산 방향으로 간다.
영동고속도로 준공 기념비
1975년10월1일에 영동고속도로는 개통 되면서 세운 기념비로 "민족의 대동맥 영동 고속도로 준공비"라고 새겨져 있고 100톤의 무게와 10여m 높이로 거대하고 웅장하게 세워져 있다
준공비 뒷면에는 “박정희 대통령 영단으로 경인, 경부, 호남, 남해노선을 완공하였고 오늘로서 영동및 동해노선을 완공하여...” 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이 고속도로는 2001년에 개통된 대관령 터널에 옛 명성을 빼앗기고 지금은 등산객이나 양떼목장을 찾는 탐방객이 들리는 고개가 되어버렸다.
대관령 휴계소 방향 전경
기념비가 있는 곳의 이정표
등산 안내도
능경봉 가는 길에서 좌측으로 가면 제왕산이 있다.
제왕산의 성산면 어흘리와 왕산면 왕산리 사이에 있는 높이 841m의 산이다.
국운이 소진된 고구려말기 27대 축숙왕이 죽고 그의 장남인 천하의 폐륜아 충혜왕이 28대 고려왕으로 등극 하지만 포악한 정치와 향락과 여색에 젖은 행동(부왕의 후비인 수빈 권씨를 강간하고, 역시 또 다른 부왕의 후비인 숙공 휘녕공주를 강간 하는등)과 인륜을 저버린 폭정을 일삼았다.
원나라로 압송과 사면을 되풀이하다 중국의 게양으로 귀양 가던중 사망한다.
뒤를 이어 12세의 충혜왕의 장남 충목이 29대 왕에오르지만 재위 4년여만에 병사하고 뒤이어 이복동생 충정왕이 12살의 나이로 원 나라의 승인하에 30대 고려왕에 오르지만 나라가 왜구의 만행과 왕 측근들의 무능한 정치로 위기에 처하자 이에 원나라는 고려의 안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축숙왕의 차남인 강릉대군을 제31대 왕으로 세우는데 이분이 공민왕이다.
이후 공민왕은 충정왕을 귀양보내고 얼마 후에 자객을 보내어 살해한다 .
공민왕의 왕비는 노국공주인데 노국공주를 수행하여 고려에 온 사람이 바로 곡부 공씨의 조선국 시조 공소이다.
공민왕이 처음에는 원나라 부터 독립하여 자주정치 개혁정치를 펼쳤으나 왕비인 노국공주가 애기를 낳다가 사망하자 이에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그 역시 폐륜적인 행위를 벌이다가 최측근들에 의하여 살해되고 만다.
그후 비록 정비의 자식은 아니지만 처첩(반야)의 자식 우 가 왕위를 이으니 그가 바로 32대왕 우왕이다.
명장 최영장군의 사위이기도 한 우왕은 요동정벌등 과감한 정책을 펼쳤지만 이후 이성계 조민수등 위화도 회군세력에 의해 퇴위되고 아들 창이 그 뒤를 이어 집권하나 그마저 곧 퇴위시켜 귀양보내지고 이후에 이성계에 의하여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즉위하나 위화도 회군파는 공양왕마저 몰아내고 이성계가 이씨조선을 개국한다.
이후 이성계는 정사에는 없지만 우왕 창왕 그리고 공양왕과 세자등을 차례 차례 암살하여 모든 후환을 없애 버린뒤 조선건국의 틀을 마련한다.
그런데 역사에 등장하는32대 왕인 우왕 이성계의 칼날을 피하여잠시 이곳 제왕산에 숨어 들었는데 이후 제왕이 머문곳 이라하여 제왕산이라 불려지고 있다.
잠시 임도를 따라 좌측으로 간다.
임도 옆에는 인풍비(氤風碑)라고 적힌 비석이 서 있다.
한자는 "기운성할 氤"와 "바람 風"인데 무슨 뜻이며, 어떠한 이유로 세워 놓았는지 모르겠다.
대관령에 바람이 드세기 때문에 세웠나?
비석 옆에는 추운 날씨에도 용천수가 흘러나오고 있다.
10:06 산불감시초소 : 임도를 따라 가면 제왕산에 이르고, 능경봉은 초소를 지나자 마자 우측 능선으로 오른다.
눈이 많을까 걱정을 했는데 살짝 뿌리다가 멈췄다.
10:28 헬기장
10:30 능경봉(陵京峰:1,123.2m)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왕산리와 성산면 오봉리,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 사이에 있는 봉우리이다.
백두대간이 동해를 끼고 설악산(1,708)과 오대산(1,563),황병산(1,407)을 일으키고, 선자령을 지나 대관령에서 몸을 낮췄다가 다시 솟구친 산으로 대관령 남쪽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이며, 제왕산의 모산이기도 하다.
山頂에 영천(靈泉)이 있어 기우제를 지냈고 맑은 날엔 이 봉에서 울릉도가 조망된다고 한다.
대관령이나 강릉에서 바라보면 산세가 큰 왕릉이나 활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능정봉(陵頂峰) 또는 소궁음산(所弓音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능경봉 정상석
능경봉 이정표
능경봉 산행안내도
강릉시와 대관령 옛길이 조망된다.
강릉시 전경
선자령 방향은 나무가 가려 조망이 않좋다.
10:39 행운의 돌탑
산에 있는 돌탑, 누가 왜 쌓고, 무슨 의미일까?
우리가 산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돌탑, 그 돌탑을 누가, 왜 쌓을까?
사람들이 돌탑에 돌을 하나씩 쌓으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그 돌탑에 절을 하면서 무슨 내용의 기도를 할까?
돌탑, 그 자체의 의미는 뭘까?
산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돌탑이고, 누구나 한번쯤 가져봤음직한 의문이다.
산에 가서 돌탑을 보고 그런 의문을 가져본 적 없으면 할 말 없음이다.
그냥 ‘아, 이런 것도 있구나’라고 보면 된다.
먼저 돌탑을 쌓고 있는 당사자한테 직접 물어봤다.
충북 속리산 자락 피거산 일대에 돌탑을 쌓고 있는 고승관 교수.
피거산 일대를 전부 사들여 1987년부터 22년째 탑을 쌓고 있다.
그는 홍익대 조형대에서 퇴직했다.
“왜 탑을 쌓느냐”고 물었다. “나도 잘 모른다
내가 왜 살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 이유를 알 때까지 탑을 쌓을 것이다.
죽기 전까지는 알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설령 모른다 해도 무슨 상관인가.
탑을 쌓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속리산 자락 피거산 일대를 돌탑 명물로 만든 장본인이면서도 정작 본인은 돌탑을 쌓는 이유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한다.
마산 팔용산에도 현재 1,000개 가까이 쌓은 돌탑이 있다고 한다.
두 사람 공통점은 남북통일 기원 돌탑 쌓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뭔가 기원하는 건 분명 있다. 기복 신앙의 일종이다.
아니 기복신앙, 그 자체 일지 모르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돌탑은 한국 산신을 모시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라고 한다
조금 더 발전된 형태가 지금 절에 가보면 흔히 볼 수 있는 산신각이다.
한반도에 종교가 들어오기 전 샤머니즘 형태의 신을 모셨다.
그 신은 자연의 모습을 띠다가, 점차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되기 시작했다.
단군, 김유신, 관우, 이성계 등 유명 인물을 형상화 시켜 산신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유명한 인물이면 한국이건, 중국이건 상관없었다.
산신각에 이들 모습이 호랑이와 산삼과 같이 등장한다.
호랑이는 동물의 제왕이고, 산삼은 불멸을 상징하며 악귀를 물리치는 대표적인 것들이다.
돌탑은 서낭당의 한 형태다. 성황당이라고도 한다.
자연신에게 행운을 비는 샤머니즘 풍습이 한민족 본성에 내재된 가치로 돌탑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기를 받기 위해 천상을 향해 쌓아올린 탑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자연신에게 행운을 비는 의미로 보기도 하고, 유명한 신화 속의 인물을 나타내는 동상으로 보기도 한다.
이 모든 의미와 해석이 그 산의 주인인 산신과 직, 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서낭’은 ‘불사신 왕’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 마을 또는 그 지역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신이다.
이름도 산신당, 당산, 당나무, 당집, 국사당, 본향당, 할미당, 성모당 등으로 불린다.
서낭당은 농경마을인 한국의 전통 사당(당산과 유사)과 혼동될 수 있다.
사당은 밧줄로 감아놓은 돌무더기나 아름드리나무의 둥치일 수 있고, 위패가 모셔진 제단이 있는 작은 목조 사당인 경우도 있고, 밧줄로 여러 번 감아놓은 커다란 바위인 경우도 있다.
또 이런 형태가 복합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어쨌든 산에 있는 돌탑은 한국 산신의 기본적인 모습이며, 절에 있는 산신각은 조금 더 발전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제부터 산에 가서 돌탑을 보더라도 함부로 보지 말고, 혹시 산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지 여기저기 둘러도 보고, 복을 구하기도 해봐라.
그러면 얻을 수 있을 지 누가 알랴. - 무사모(무속을 사랑하는 모임)에서 인용 -
고루포기산 방향 전경
능경봉 방향 전경
11:01 샘터까지 0.8km
11:10 횡계치(橫溪峙)에 있는 안내문
횡계치는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제1터널(길이 1,800m) 구간이 지나는 백두대간 마루금이다.
횡계치에서 내려다 본 영동고속도로
나뭇잎이 다 떨어져서 쓸쓸한 등로가 이어진다.
11:14 왕산골 삼거리
왕산골 삼거리 이정표
왕산골 삼거리에는 영천(靈泉)이라는 샘터가 있고 옛날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전망대 방향으로....
11:28 왕산골 갈림길이 또 나온다.
11:41 연리지 나무
11:43 버들골 갈림길
11:48 대관령 전망대
고루포기산 북쪽 능선 마루금에 있는 대관령전망대는 이곳을 찾는 산우들의 포토 포인트다.
데크로 단장하고 벤치까지 갖춰 잠깐의 쉼터로도 제격이며, 이곳에서의 전망은 동.북.서쪽 모두가 가경(佳景)이다.
특히 북쪽의 풍경은 바람의 언덕인 선자령. 곤신봉. 매봉. 소황병산. 노인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마루금은 물론, 대관령 고원목장. 황병산 등이 한폭의 그림으로 펼쳐지는 풍광명미(風光明眉)다.
선자령 풍력발전단지
멀리 황병산의 군부대 건물이, 아래에는 용평GC가 조망된다.
횡계리 전경
대관령에서 황병산까지 이어지는 능선이 한눈에 조망된다.
전망대에 있는 이정표 : 고루포기산까지 1km이다.
11:57 돌탑이 있는 오목골 삼거리
오목골 삼거리 이정표
12:02 지르메 갈림길에서 부터는 임도를 따라서 간다.
12:06 고루포기산(1,238m)
1961년4월 22일 평창군에서는 이산 넘어 명주군 왕산면에 고루포기라는 마을이 있어 산 이름을 고루포기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와 강릉시 왕산면 대기4리 고루포기(안반데기)를 잇는 이 길이 왕산면 대기리 주민들이 횡계로 넘나들 때 이용했던 길이라고 하며, 다복솔이 많아 고루포기산이라 이름 지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고로쇠 나무가 많이 서식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고로쇠나무와 고루포기는 같은 의미라고도 한다.
<동국여지승람 대동여지도>에서‘소은백이산 (所隱栢伊山)’이라 하여 65자로 설명해 놓았는데 강릉의 地方誌중 제일 오래 되었다는 임영지(臨瀛誌) 山川조에 따르면 소은백이산(所隱栢伊山)-소(所)자는 고자로 표기하였다. 소자는 유명한 장소란 의미로 예사로 보지 말라는 의미이다. 은(隱)자는 숨을 은자의 고자로 깊히 숨다란 의미이다.
백(栢)자는 수풀과 나무백자의 고자로 편백 측백 송림등의 빽빽한 숲속을 의미한다. 이(伊)자는 보통사람이 아닌 천하를 다스리는 소문난 이름을 뜻한다. 즉 이름만 보아도 평범한 산의 이름이 아니다. 풀어서 읽어보면 ‘천하를 다스릴 인물이 숲속 깊히 숨어 있는 중심지의 산’이라고 이해 할 수 있다
고루포기산 정상석 : 북진할 때는 없었는데 최근에 설치한 것 같다.
고루포기산 삼각점
고루포기산 안내문
철탑을 지나고....
임도를 따라서 간다.
12:21 두번째 철탑(35번)을 지난다.
중간 중간에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12:27 왕산 제 2쉼터
겨울에는 앉기 싫을 듯한 철제의자
편안한 등로가 이어진다.
겨울철에도 싱그러운 느낌을 주는 산죽지대가 시작된다.
12:52 왕산 제 1쉼터 전경
12:56 산불을 이겨난 낙락장송 안내문
산불의 흔적
산불을 이겨내고 싱싱하게 자란 소나무
고루포기산 전경
안반데기마을과 풍력발전기가 조망된다.
안반데기 마을은 지형이 떡메로 떡을 칠 때 쓰는 넓은 통나무 받침판 처럼 생겼다고 해 붙여진 이름으로, 과거 화전민들이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개간을 통해 전국 최대 규모의 고랭지 채소와 감자 채종단지를 조성한 백두대간 고원마을이다.
13:11 이 근처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출발
맹덕목장과 그 뒤로 다음 구간에 올라야 할 화란봉이 보인다.
맹덕목장으로 가는 임도와 만나서 우측으로...
임도를 따라서 가다가....
U 자로 꺽인 곳에서 좌측 능선으로 들어선다.
채소밭 좌측 임도를 따라서 가야 하지만 수확이 끝난 뒤라 대각선으로 질러갔다.
비포장 임도를 따라간다.
13:54 닭목령(鷄項嶺:706m)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의 닭목(계향동:鷄項洞)에서 왕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강릉과 정선군 임계를 잇는 415번 2차선 지방도로가 이 고개를 지난다.
고갯마루 북쪽 왕산리엔 닭목골, 남쪽 대기리엔 ‘닭목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닭과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풍수지리상으로 천상에 산다는 금계가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지세로 이곳 고갯마루가 천하명당의 길지라고 하는 닭의 목덜미에 해당한다고 하여 “닭목재”라 이름 지었다고 하며, 한자 표기로는 계항령(鷄項嶺)이다.
백두대간 안내문
북진때 보았던 장승이 관리가 잘 되어있다.
닭목령 표지석
오늘 산행을 대관령에서 닭목령까지 남진으로 산행을 하는 것으로 공지가 되었었다.
그런데 산행지로 오는 중간에 산행대장이 북진으로 변경을 하겠다고 하여 백두대간을 남진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하니 나만 홀로 대관령에서 내려주고 나머지 인원은 북진으로 진행을 하였다.
산행을 마치고 닭목령에서 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타고 대관령휴계소로 갔더니 14:35이다.
서울로 16:00에 출발한다고 공지가 되었기에 시간이 넉넉해서 휴계소에서 감자전에 막걸리를 한잔하고 있으니 한명 두명 도착하기 시작한다.
일찍 도착한 산우들과 막걸리를 나누다 보니 16:00가 되어 서울로 출발을 하였다.
추운 날씨와 바람으로 걱정을 많이 했는데 무사히 한구간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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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루포기산ㅡ닭목령
??
이름들이 특이하네요
대장님 산행후기는
철학도 담겨있어 생각을
많이하며 읽어야해요~ㅎ
추운날씨에 고생하셨어요
후기글 쓰면서 저도 공부 많이 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