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복 화평케 함의 복,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음
(마 5:9)
오늘도 8복을 계속하면서 일곱 번째 복을 우리가 함께 살펴봅니다. 일곱 번째 복 마태복음 5장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마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복. 제7복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음을 받는 복이 주어집니까?
화평케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
기독교인이 되고 나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듣는 말입니다.
이제는 다분히 추상적으로 느껴집니다. 정말 5복이 내게 주어지는 현실 속에서 느끼게 되는 그런 짜릿함이 없습니다. 돈이 많이 벌릴 때의 기쁨 그런 게 없어요.
그러나 한번 그런 마음으로라도 도대체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음을 받는다는 내용이 무엇인지 오늘 아침에는 말로만이라도 한번 따져보지요. 그러는 동안에 혹시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음을 받는다는 것이 정말로 복이다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 성령님의 강권을 통해서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음을 받는다는 게 엄청난 얘기잖아요?
자,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이 참 특이해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도 아니고 같은 내용이겠습니다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진다. 복의 내용이 그렇다는 거예요.
아들이라고 일컫는 것은 여러분 제가 저의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저의 아버지께서 저를 향해서 너는 내 아들이다 라고 하는 것이 첫 번째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 말고는 그 누가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없어요.
어머니가 아기를 낳았어도 아버지가 내 아들이라고 예를 들어 정말 젊은 사람들이 젊은 시절에 연애하다가 그만 아기를 가졌는데 그걸 모르고 헤어졌어요. 나중에 찾아와서 이 애가 당신의 아들이다 라고 얘기해도 그 사람이 아들이라고 인정을 안 하면 할 수가 없습니다.
요즘은 친자확인이라는 게 있습니다마는 인륜상 그리고 그 옛날에 아버지가 아들이라고 말해주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의 아들인 줄을 몰라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저도 실지로 저의 아버지가 낳는지 몰라요. 못 봤으니까. 그냥 저의 아버지께서 저보고 너는 내 아들이라고 하셨으니까 아들인 줄 아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진다는 것은 그 누가 말하는 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말해주는 게 아니라 목사님이 정말 김집사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렇게 말해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컬을 수가 있다 하나님이 너는 내 아들이다 라고 나를 지명해서 말씀하시는 복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콕 집어 너는 내 아들이라고 해보신 역사가 실제로는 예수님한테밖에 없어요. 예수님 한 분 밖에 안 계십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라는 말씀을 하늘에서 외치십니다.
그런데 몸을 입고 있는 인간 중에 하나님께서 콕 집어 아들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시는데 이 예수님이 아들 되심은 인간 중에서 택하심을 받으신 게 아닙니다. 영원 전부터 아들이셨다는 거예요. 영원 전부터 아들이셨다는 말은 여러분 이런 말이지요.
예수님이 안 계시던 때가 있다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영원한 세계에서 몸의 어머니가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로서의 그 예수님이 영원하신 그 어떤 어머니가 계셔서 예수님을 낳은 다음에 그 어머니가 돌아가신 게 아닙니다. 그냥 원래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이 계셨고 이 두 분의 위격이 성령님을 통하여 연합하시고 사랑하시고 교통하시면서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아들로 계셨다는 거예요. 그분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께서 그 예수님 몸을 입으신 인간을 향하여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영원 전부터 계셨던 그 독생자에게 사용하시던 단어를 피조물 지렁이 같은 하루살이 같은 우리들에게 사용하시겠다는 거예요. 엄청난 사건인데 하나도 안 엄청나게 느껴지잖아요. 그냥 종교가 하는 얘기다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오바마 대통령과 그분이 다스리시는 미국, 푸틴 대통령이 다스리시는 러시아, 일본의 수상, 우리나라 이명박 대통령 이 모든 사람을 만드시고 모든 나라를 관장하는 미국의 캘리포니아주에 사는 모든 사람을 다 주장하고 계시는 그 신이 예수님에게만 사용한 너는 내 아들이다 라는 말을 나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했다 이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에게만 사용한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위해서는 마치 이런 거예요. 예수님을 향해 아들아! 그랬는데 예수님께 붙어 있어서 아들 소리를 같이 듣게 되는 경우 사실은 이게 유일한 길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로선 조금 낯설어요. 늘 마태복음 5장 9절이 성경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낯설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였습니다. 예수님만을 향해 아들이라 부르신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 붙어 있을 때 아들아! 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는 거지요. 예수님과 떨어져 있을 때는 하나님이 다른 데에 부른 적이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연합한다고 아들이 되는 게 아니에요. 이건희씨의 비서실장이 된다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님만을 향해 아들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예수님과 연합할 때만 아들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런데 화평케 하는 자가 아들이라 불린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과 연합한 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 땅에서 화평케 하는 사람이다 이겁니다. 화평케 하는 모습으로만 산다 이겁니다. 예수님과 연합한다는 거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서만 아들이라고 부를 때 같이 있다가 덩달아서 고개를 들게 되는 이 축복, 고개를 들면 그래 너도 내 아들해라! 이러신다는 거예요.
여러분!
제가 언젠가 말씀을 드렸어요. 그리고 저한테는 아주 적절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반복해서 말씀을 드리는데 제가 미동초등학교를 다닐 때입니다. 그땐 국민학교라고 그랬지요.
어머니께서 선생님을 만나 뵈러 와요. 오시면 대부분 차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저의 집은 연희동이었고 미동초등학교는 서대문에 있기 때문에 차를 타고 다니니까 먼 길을 왔다 갔다 하니까 가능하면 어머니가 끝날 때 오셔서 선생님을 만나고 그래서 종례시간을 기다렸다가 저를 데리고 오십니다. 저를 데리고 오시는데 그때는 아주 수지 맞는 날이에요.
왜냐하면 미동초등학교 건너편에 우미예식장이라고 있었어요. 그 예식장 바로 옆에 조그만 중국집이 하나 있는데 자장면 집이 아니라 만두집이에요. 그 고기만두를 제가 좋아했거든요. 어머니가 오셔서 선생님을 만나는 날에는 종례시간 끝나고 가면 배터지게 그 고기만두를 먹는데 얼마나 만두를 좋아하고 원래 어렸을 때부터 뚱뚱하고 대식가여서 제가 4인분 5인분까지 먹었습니다.
그런데요 이런 일이 벌어져요. 어머니기 종례시간에 와서 보십니다. 선생님은 아직 안 들어오셨잖아요. 아이들이 하루 학교수업이 끝났다는 해방감에서 교실 안이 난장이 나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이렇게 보니까 당신의 막내아들 옆에 여러 명의 친구 아이들이 와서 당신의 막내아들을 좋아해서 뒤에서 목을 끌어안고 앞에 책상 위에 앉아가지고 말을 하고 뭐 그렇게 몰려가지고 아들 옆에서 재잘재잘 떠들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게 너무 보기가 좋았던 거예요.
그때 80명씩 있었어요. 80명씩 있는 가운데 내 아들 옆에 와 있던 아이들을 어머니가 기억하셨다가 선생님 종례가 끝나고 갈 때 다 불러 세웁니다. 그리고 같이 만두집에 데리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만두를 먹는 만큼 다 먹이십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5명 데리고 가면 30인분을 낼 때도 있었어요. 좀 과했나요? 하여간 좀 과장된 말이지마는 하여간 먹겠다고 하는 만큼 다 사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아유! 너도 먹어라 너도 먹어라…
아들이 자녀가 맛있게 먹을 때처럼 예쁜 게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그 자녀 옆에 와서 그 자녀를 좋아했던 자녀의 친구들이 먹는 것이 자녀가 먹는 것만큼 예쁜 겁니다. 너도 먹어라 너도 먹어라…
그걸 제가 경험을 해요. 제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선재라는 아이가 있어요. 그 아이는 이상한 거예요. 전화를 해서 꼭 저의 아들과 놀자고 전화를 하는데 둘이서만 놀자는 거예요. 끔찍이 우리 아이를 좋아하는 거예요. 선재라는 아이는 저는 한번 밖에 못 봤지만 제 마음에는 거의 제 아들 수준입니다.
이게 바로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주님에게 주시는 모든 것이 다 내게도 주시게 된다는 거예요.
주님을 좋아해서 주님과 연합하면 주님을 아들이라 일컬으시던 하나님께서 고스란히 주님에게 주시던 모든 그 아들에게 주시던 모든 복을 내게도 다 주시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복 느껴 보셨습니까? 이거 안 느껴보셨으면 저나 여러분이나 기독교인이 아직 아닌 거지요. 정말 하나님의 감동, "야! 내 아들을 그렇게 좋아해? 내 아들 예수를 그렇게 사랑해? 내 아들 예수에게 주는 모든 걸 다 줄게."
이렇게 예수님과 연합해서 예수님을 좋아하는 덕분에 아들이라 일컬어질 때 나타나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 쉽게 말하면 이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다르게 보이냐?
멋진 집 있잖아요. 멋진 집. 그 집이 야! 이젠 내가 집을 이렇게 샀으니까 이 집에서 정말 안정되게 살 수 있겠구나. 전세방 사글세방 전전하던 그런 시절 청산하고 이젠 안정되게 살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을 갖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을 좋아하면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나님 아버지가 내 마음에다 대고 너는 내 아들이거든! 이렇게 말씀해주실 때 나타나는 특징이 뭐냐 하면 그 집이 이제 안정의 생활권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는 집이라는 게 갑자기 텐트로 보이는 거예요. 응? 아니 이게 영원 무궁히 안정되게 살 수 있는 아름다운 튼튼한 집같이 보였는데 내가 이 집의 소유주가 되었으니까 누가 나를 건드려? 그랬는데 아니 이 집이 텐트처럼 보이는 겁니다. 이 세상 전체가 소모품이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걸리는 분들이 계실 거예요. 여성운동 하는 이런 분들, 여성학자들… 왜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냐 이겁니다. 영원 전부터 아들인 걸 어떡합니까? 이 세상에서 남자와 여자의 개념이 있기 전부터 아들이신 걸.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내가 지금 여자의 몸을 입고 남자의 몸을 입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내가 영원히 여자와 같은 마음으로 살고 남자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요. 내가 남자의 몸을 입고 있어서 남성 호르몬이 나오고 여자의 몸을 입어서 여성 호르몬이 나오면서 여성답고 남성답다는 것은 소모품이에요. 이 지구 위에서 다 닳아 없어질 소모품이라는 겁니다. 영원히 여성의 캐릭터로 살아가는 게 아니에요. 내 영혼이. 내 인격이 영원히 여성스러움으로 감싸여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여자의 몸도 남자의 몸도 소모품이에요.
너는 내 아들이라는 말을 하나님이 내 마음에 대시고 할 때 나타나는 일이 그거라는 겁니다. 소모품이에요. 이 몸이 목숨의 근거지 아닙니까. 목숨이 붙어 있다는 건 몸에 호흡이 지금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목숨의 근거지인 몸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너는 내 아들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어떻게 생각되냐 하면 이 몸이 소모품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여러분, 미국이 자동차 산업이 낙후되기 시작했습니다. 70년대부터 일본에 뒤처지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이유를 한번 들은 적이 있어요. 뭐라 그러냐 하면 이 아시아권에서는 자동차가 소유의 개념으로 재산의 개념으로 이 문화가 다가온다는 거예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자동차라는 것을 아예 소모품의 개념으로 접근했다는 겁니다. 소모품의 개념으로 접근해놓으니까 이렇게 우리처럼 심혈을 기울이지 않은 거예요. 우리는 자동차 한 대 있으면 내가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게 아니라 내가 자동차를 이고 다니잖아요. 틈만 있으면 닦고 틈만 있으면 갈고 튜닝한다고 갖다 붙이고. 그런데 아무리 갖다 붙여도 윈도우 브러쉬에다 금칠하는 사람은 없어요. 소모품이거든요.
너는 내 아들이라는 말을 하나님께 직접 들은 심령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 지구 전체를 다 소모품으로 보는 겁니다. 5복을 다 소모품으로 봐버리는 겁니다. 그냥 지금 이 지구는 잠깐 출장 온 거예요. 하루 이틀 밤 출장 오듯이 출장을 온 거고 내 집은 아무리 고대광실 같아도 좀 비싼 텐트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이게 아들의 특징입니다. 아들이니까 지구를 밀어붙이는 지구야 저리 가버려라. 이게 아들이 받는 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 지구에서의 모든 것들이 다 소모품처럼 여겨지는 그런 사람이 있는 힘을 다해서 하게 되는 일이 뭐냐 하면 화평케 하는 거라는 겁니다. 유일하게 가치부여를 할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화평케 하는 일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화평케 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해서 아들 소리를 들은 자들이 이 지구가 이제는 영원히 사는 사람들이 되는 바람에 이 순간적으로 살고 있는 이 지구 전체가 다 5복까지 포함해서 부귀영화 장수 이런 것이 다 소모품처럼 여겨지는 사람들이 유일하게 가치부여를 하고 있는 이 화평케 하는 내용은 도대체 뭡니까?
평화를 만든다는 거예요. Peace-maker라는 겁니다.
'에이레노포이오이' 에이레네(eijrhvnh)라는 말이 평화라는 말이거든요. 구약으로 가면 샬롬을 말합니다.
하여간 인간과 인간이 되었든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이 되었든 하나님과 인간관계가 되었든 거기에 샬롬을 만드는 자들 평화를 만드는 자들이 이게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자들이라는 거예요. 그들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화평케 하신 것은 예수님의 몫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이 유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고 있는 분이니까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특징이 화평케 하신 일에 주력하신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화평케 하신 화평의 대상이 누굽니까?
인간과 인간? 아니에요.
주님은 뭐라 그러십니까? 마태복음 10장 34-36절.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왜? 내가 검을 주러 왔기 때문에. 서로 검을 들고 싸우게 될 걸?
말씀만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님처럼 갈등을 많이 일으키시고 분쟁을 가는 곳마다 일으키시고 특히 그 나라와 민족의 지도자들 급에 대한 존경심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이명박 대통령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우리들이 존경해야 되잖아요. 그저 그분이 잘돼야 우리가 잘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까부술 수가 있습니까? 독사의 새끼들아!
주님이 하신 행동 중에 어디서 평화를 찾아볼 수가 있습니까? 주님처럼 소요와 소동을 많이 일으키신 분이 어디 있어요. 주님처럼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한 개인이 그렇게 온 예루살렘이 난리가 나도록 소요를 일으키신 분이 누가 있습니까?
물론 로마서 12장 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는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를 추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도 예수님이 소요를 일으키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의 빛 아래서 해석을 해야지 더 맞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더 중심이 되어야 되지요.
그리고 사도 바울이 얘기한 그 평화를 사람들 간에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검을 갖고 제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된다고 하는 말씀에 비추어볼 때 뭘 뜻하는가를 생각해야지요. 그냥 인륜이 말하는 도덕론자들이 말하는 박애주의자들이 말하는 그런 평화가 아니지 않습니까? 또 국가와 국가 간에 평화를? 아니요. 반기문 사무총장님의 백분의 일도 나라와 나라 간에 민족과 민족 간에 평화를 위해 애쓰신 것이 없어요.
식민지하에 있는 이스라엘, 로마를 원수로 생각합니다. 로마는 이스라엘을 짓누르고 빨아 먹습니다. 그래도 그 두 민족 간에 화평을 추구해보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이 크도다 라고 칭찬하신 경우가 두 세 경우 있는데 수로보니게 여인도 이방인이고 로마 백부장도 이방인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민족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열불 나는 겁니다.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간에 평화를 위해서 일하신 분이 아니에요.
그러면 이분이 화평케 하신 대상이 누굽니까?
하나님과 인간들입니다.
당신 자신은 하나님과 갈등이 없어요. 예수님이 유일하게 평화를 유지하신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을 이해를 하지 못하고 갈등을 겪어요. 십자가에서 갈등을 겪고 다 떠나지 않습니까? 다 버리는데 거기에 무슨 화평과 평화가 있어요? 화목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유일하게 화평하신 분은 하나님뿐이세요. 하나님과 갈등이 없어요. 따라서 주님이 화평을 위해서 일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을 위한 화평을 위해서 일한 것뿐이에요.
인간과의 화평, 나라와의 화평은 바로 이 빛 아래서 종속적으로 다루어져야 될 문제라 이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뭐가 문제냐?
하나님과 인간은 근본적으로 화평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게 죄악인데 그 죄악에 장악된 게 인간이고 죄악의 노예가 인간입니다.
이게 바로 예레미야 이사야로부터 사도 바울과 사도들을 거쳐서 어거스틴을 통해서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내려가고 있는 우리 기독교의 근본 신앙고백이에요.
노예의지! 의지조차도 뭘 우리가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이미 하겠다는 마음 자체가 죄악에 깊숙이 장악되었다는 겁니다.
아들을 하버드 대학에 보내야지.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죄악에 장악된 뿌리에서 나오는 생각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죄악에 장악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기실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거기에 타협을 하실 수도 없고 그냥 한 발 양보하지 뭐… 양보해서 화평을 이루자. 있을 수도 없다는 거예요. 절충이 있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무조건 타도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승리한다는 것은 죄악이 승리하는 거니까.
그거 좋은 예가 있잖아요. 여러분.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해서 이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이긴 자라는 게 이스라엘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뭐합니까? 광야에서 하나님을 이겨서 멸망당합니다. 40년을 뱅뱅 돕니다. 가나안에서 죄악에 정복된 인간이 또 하나님을 이겨서 가나안에서 쫓겨납니다. 그리고 기어코는 하나님을 이기던 습성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처절하게 죽여 버립니다.
인간이 이기면 안 돼요. 인간이 이긴다는 건 죄악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평은 불가능해요. 하나님이 승리해야만 하시니까. 하나님의 승리가 절대적으로 인정되어야 하니까.
그런데 승리라는 것은 전쟁과 평화라고 말할 때 전쟁과 평화가 대립 개념 아닙니까?
그 평화의 대립되는 개념인 전쟁의 요소가 승리와 패배 아니에요. 승전과 패전 아닙니까? 하나님이 죄악에 장악된 인간에 대해서는 승리하셔야만 하는데 승리라는 것은 평화 대신에 전쟁을 상정하는 개념이라 이거예요. 여기에 무슨 평화가 있겠습니까?
주님이 머리를 쓰십니다. 어떻게 아버지와 인간들의 화평을 이루게 할 것인가?
절대 아버지는 승리해야만 해요. 이 화평은 아버지의 승리가 절대적으로 보장돼야 합니다. 그러니까 화평할 수 없는데 또 인간은 아버지가 승리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멸망과 인간의 패망을 말합니다.
어떻게 죄악에 장악된 인간에 대해 아버지가 승리는 하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패망하지 않으면서 이 둘이 화해가 일어나느냐?
참 묘한 거예요. 여러분. 승리하면 패망하는 자가 있게 마련인데 승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패망해서 없어지지 않고 그 승리하신 하나님과 오히려 화해의 자리로 올라가게 되는 거 어떡하면 있을까?
다 방법이 있다.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가 무혈입성이 되어야 된다. 인간들이 망하면 안 된다. 그러나 인간들은 죄악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무혈입성을 하려면 불가능하다. 반드시 피를 흘려야 된다. 아! 내 피를 흘리면 되겠구나. 내가 멸망하면 되겠구나. 내가 인간들의 멸망을 빨아들이면 하나님은 승리하실 것이고 내가 인간들의 멸망을 빨아들였기 때문에 인간들은 멸망하지 않고 승리하신 하나님과 패배한 인간이 서로 화합할 수 있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게 바로 주님이 하신 화평케 하심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승리를 인정하는데 어떻게 화평케 되느냐?
그래서 여러분, 주님의 화평케 하심은 평화의 용어가 쓰인 게 아니라 전쟁의 용어가 쓰인 겁니다. 그 전쟁의 용어가 뭐예요? 승리. 하나님 승리하세요. 인간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받들어 들인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승리하시려면 인간들이 망해야 되니까 하나님을 승리하게 해놓고는 얼른 달려와서 인간 편에 서가자고 하나님의 승리의 검이 인간을 향하여 인간을 패망시키기 위하여 달려올 때 그 칼을 딱 맞고 죽으신 거예요. 패망의 값을 다 갚고 죽어버리신 겁니다.
자, 그러면 이제 주님과 연합한 자들 어느 포인트에서 주님과 연합합니까?
기적을 행하시는 주님? 말씀을 행하시는 주님? 아니에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에서 연합 사건이 일어납니다.
십자가에 달려 함께 죽는 거예요. 이 연합 사건을 통해서 패망의 죄값이 없어져요.
그런데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 계속 화평케 해야 되요. 우린 생각합니다. 믿는 자로서 사람과 사람 김집사님과 박집사님이 싸우고 있으니까 화평케 하자.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싸우고 있으니까 권사님들이 끼어서 화평케 하자. 이런 걸로 생각을 해요. 천만의 말씀이지요.
내 입장에서 볼 때 내가 화평케 해야 되니까 화평케 해야 되는 주체로서 내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과 인간이 화평해야 되는데 하나님에게 화평해야 할 첫 번째 인간이 누구입니까?
나 자신이에요.
사도 바울이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얘기는 날마다 나와 하나님을 화평케 하는데 주력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내가 김집사님과 하나님과 화평케 하고 이룰 겨를이 없어요.
왜냐하면 죄값은 사해졌지만 나의 죄에 이 왕성한 활동력은 끊임없이 볼 때마다 들을 때마다 냄새 맡을 때마다 누구를 만날 때마다 일을 계획할 때마다 나타나니까. 그러니까 나와 하나님 간에 화평함이 한번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날마다 화평케 해야 하는 과제라 이겁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나와 하나님과 어떻게 화평케 합니까?
절대로 나는 죄악의 힘이 지배하려고 하는 정말 그 막강한 죄악의 힘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용납하실 수가 없어요. 나와 화평하실 수가 없어요.
화평하실 수 있는 방법이 하나님은 승리하셔야 돼요.
내가 이기면 안 돼요. 또 내가 죄악에서 뿌리를 두고 있는 내 이 세상 삶에 대한 소원들 5복에 대한 모든 소원은 죄에서 나오는 겁니다. 사업 잘되게 해주세요, 건강하게 해주세요. 우리 마음을 거기다 지불하면 안돼요. 마음이 가난해야 돼요. 5복에 대한 소원이 다 죄악이에요.
그런데 그걸 이기려고 그래요.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게 말씀드렸잖아요. 40일 금식기도, 강청기도, 강청을 거기다 씁니까? 왜 강청을 거기다 써요? 그 본문은 또 거기서 말씀을 드리고.
그럼 어떻게 화평하라는 겁니까?
죄악이 나를 정복하고 지배하고 있어요. 잠시도 틈을 주면 죄악이 우는 사자와 같이 그러니까 내가 이기면 죄악이 만연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승리를 하셔야 됩니다. 그러나 무혈혁명이 되어야 돼요.
그러려면 어떻게 되어야 돼요?
내 스스로 나의 패망을 자발적으로 미리 인정을 해버리는 겁니다.
마치 1940년 6월 14일 독일군이 한 달 동안 프랑스와 전쟁을 하다가 프랑스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서 이제 파리를 공략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파리가 공격을 받게 되었을 때 파리 시민들이 어떻게 결정을 합니까? 이 파리의 문화유산들이 다 망가지겠구나. 히틀러 나치의 공격을 받아 가지고. 그래서 그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서 손들고 미리 나가서 독일군들을 보고 어서 오세요. 총 하나 파리를 향해 쏘지 마세요. 어서 오세요. 한 것처럼 미리 나의 패망을 선언하고 하나님의 승리를 높여드리는 겁니다.
승리를 높인다는 것은 평화가 아니에요.
전쟁에 승리를 결정하는 거니까 승리라는 단어는 평화와 상관이 없고 대립 개념입니다. 상관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대 극점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평화와 대 극점에 있는 승리라는 단어를 하나님께 적용해서 하나님 이기세요. 누구를 이깁니까? 나를 이기세요. 나를 이기세요 라고 스스로의 패망을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주님께서 저렇게 저주받고 죽으신 저 죽음이 나의 패망이라는 것을 매 순간마다 인정하고 하나님의 승리를 높이는 전쟁 용어를 써야만 하나님과 내가 평화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이 땅에서 주님과는 다르게 아직도 죄악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 그러나 주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평케 하기 위하여 걸어가야 될 길이라는 거예요.
화평케 하기 위하여 전쟁의 용어를 동원해야 합니다. 아이, 아버지니까 뭐 뭉개도 된다 이런 게 아니에요. 나는 죄악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려면 아버지니까 라고 뭉개려고 생각하지 말고 아버지의 승리를 인정하라는 거예요.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신 데도 십자가 앞에서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하는 이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가 뭐예요? 아버지, 내가 몸을 입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과 인격이 있기 때문에 그 수치를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이기세요. 아버지가 나에 대해 승리하세요 하신 내용이었어요.
황차(況且), 죄악들로 장악된 우리들이 무엇에 대해서 아버지께 나의 소원과 나의 의견이 관철될 때까지 기도하겠다는 겁니까?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승리를 인정하고 나의 패망을 받아들이면서 화평을 유지해갑니까?
예를 들어 내가 사업을 합니다. 잘 안 됐습니다. 사업이 안 되는 걸 나도 알지만 나보다 먼저 하나님은 사업이 안 되기 이전부터 이때쯤 사업이 안 될 것도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알고 계시면서 이런 일을 허락하셨습니다.
“왜 그럽니까? 하나님? 나한테 아버지라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 사업 하나 가지고 우리 가족과 적어도 삼사십 명 직원이 먹고 살고 있는데 하나님도 생각이 있으시면 내 사업을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이건 계속 뭐예요?
"하나님 당신의 인도하심이 잘못됐습니다. 당신이 지켜보고 계시는데 조신 것은 아닙니까? 근무를 태만하게 하신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과 싸우고 하나님을 지적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내 마음에 생기는 모든 불평과 모든 불만은 하나님과의 싸움이에요. 현실에 대한 불평불만 내 옆에 있는 사람들 가족이든 이웃이든 친척이든 모든 사람들에 대한 불평과 불만은 다 하나님과 싸우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이기려고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볼까요?
다윗에게 있어서 시므이. 압살롬 아들이 쳐들어와서 궁정을 놔두고 도망갑니다. 사울의 자손 시므이가 다윗을 향하여 돌을 던지며 비난을 합니다. 이때 장군 아비세가 “내가 저 개를 죽이겠습니다.” 그랬더니 다윗이 한 말이 “너와 내가 무슨 상관이냐? 저가 나를 저렇게 비난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이니 내버려 둬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이니 내버려 둬라. 다시 말해서 아들 때문에 지금 정신이 없고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시므이의 비난을 아버지 이기세요. 저 사람이 나를 비난하는 것도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겁니다. 이기세요. 내 아들이 말을 안 듣습니다. 아버지 이기세요. 아들을 지은 것도 아버지시고 아들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된 것도 아버지시고 아들의 인생을 이끄신 것도 아버지신데 지금 내 마음에 안 든다고 어떻게 하겠어요? 아버지 이기세요. 아버지 승리하세요.
기생 라합이 자기 민족을 배반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적 내용이 뭡니까? 아버지가 이 내 민족을 죄악 때문에 심판하셔야 된다면 하나님, 하나님이 이기세요.
아브라함이 한 게 뭡니까? 이삭을 번제로 바쳐라. 25년 만에 약속의 아들로 백 살 때 얻은 아들인데 아버지의 뜻이 이삭이 없어져야 되는 거라면 아버지가 이기세요.
이게 화평케 하는 자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아버지가 아들이라고 일컫는 자들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주어지는 삶 속에서 5복을 넘치도록 받는 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니라 5복이 씨가 마를 때에도 아버지가 이기세요. 내 현실을 주장하시는 아버지의 뜻이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아버지 승리하세요. 라고 승리의 찬가를 부르며 내 의지의 패배, 내 소망의 패배, 내 판단의 패배를 인정하는 자들이 바로 화평케 하는 자들이라 이겁니다.
그러한 나와 하나님과의 화평함 안에서 벌써 이웃에 대한 나의 태도, 나라에 대한 나의 태도 다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나를 둘러싼 이웃과 나를 둘러싼 가정과 나를 둘러싼 나라 전체가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시는 것임을 믿고 하나님 이기세요 하나님 이기세요 했을 때 완전히 이 세상이 소모품인 것처럼 이 세상의 가치부여가 끝나고 죽어버렸을 때 모세에게 찾아온 하나님인 것처럼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또 당신의 특별한 계획을 위해 우리를 사용하실 수도 있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여 가며 인생이 전개되게 되는 거지요?
그러나 우리가 주력할 것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힘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고 한 것처럼 이루어 가실 것이고 내가 신경 써야 될 것은 하나님과의 화평이라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나의 패망 내 의지와 내 소원과 내 판단의 패망을 앞서서 인정해드리고 전쟁의 용어인 하나님의 승리를 높이 높이 치켜 올려드릴 때 하나님과 나는 무혈혁명의 평화가 이루어지게 되고 너는 내 아들이다 라는 일컬음이 계속해서 내 마음 속에 쟁쟁하게 울릴 것이에요. 마치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을 때 주님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음성을 화평케 하는 동안에 들으시고 그런 음성을 듣는 동안에 이 세상을 마치 물 위를 날아다니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소모품인 이 세상을 날아 다니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에서 일어난 나의 패망을 솔선하여 자발적으로 앞서서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승리를 높이므로 화평케 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너는 내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언제나 내 마음에 쟁쟁 울려 퍼지는 복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