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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한천>
1. 개 요 우뭇가사리, 꼬시래기 등 홍조류의 한천성분(다당류)을 물리 또는 화학적 방법으로 추출 및 응고, 건조시켜 분쇄한 제품 ○ 품질이 균일하고 순도 및 용해도가 높아 식품, 화장품. 의약품, 공업제품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됨 ○ 일본 수출품은 우 리나라 우뭇가사리, 내수품은 인도네시아 꼬시래기를 원료로 사용함 ○ 제리강도는 용도에 따라 C급(색택) 과 J급(제리) 2종 이 있음 - C급 : 100 - 300g/cm2이상 / - J급 : 100 - 250g/cm2이상 제하여 얻은 아가로스(agarose)는 생화학 및 의약분야의 정밀분석 시약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밀양=연합뉴스) 김동민 기자 = 추운 날씨를 보인 13일 경남 밀양시 산내면에서 농민들이 지역 특산품인 한천(寒天) 말리기 작업을 하고 있다. 한천은 바다에서 나는 우뭇가사리의 가공품으로 밀양지역은 낮과 밤의 일교차가 커 우무를 반복하면서 말리는 동결건조 과정이 자연상태에서 이뤄져 최상의 한천을 만들 수 있는 적지다. 2018.1.4
밀양시 밀양한천에서 생산된 한천, 양갱 등이 지난 11월부터 본격적인 수출길에 올랐다. 밀양 산내면 '밀양한천테마파크'는 한천 생산시설을 기반으로 체험장과 판매장, 레스토랑, 박물관까지 갖춘 곳이며, 밀양에서도 자연환경이 좋기로 유명한 산내면에 자리하고 있다. 한천은 식이섬유가 풍부해 배변을 원활히 돕고 칼로리가 낮아 다이어트 효과에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다이어트 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테마파크 2층에 있는 '마중'은 영남알프스를 조망하며 다양한 한천요리를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이다.
색택은 유백색으로 광택을 띄며 투명함 - 모먕은 세로가 긴 나무토막 모양을 띔 - 손으로 만졌을때 망상구조를 하고있어 부스러지지않고 복원성을 가짐
원래 한천이라고 하면 천연적으로 만드는 것을 지칭했으나 요즘은 기계적으로 제조하는 것도 있어 공정상 양자의 큰 차이점은 우무의 탈수방법에 있다. 젤리모양의 우무는 동결이 되면 한천질과 얼음의 결정으로 분리되며, 이것이 녹을 때 한천질은 남게 되고 수분은 점차 증발하게 된다. 이와 같은 탈수공정을 천연적으로 한 것이 자연한천이고 기계화한 것이 공업한천이다. 성분은 수분 13∼24%, 무질소물(당질) 70∼85%, 조단백질 1.5∼3.0%, 에테르(ether)추출물 0.2~0.3%, 조섬유 0.5∼0.8%, 회분 1∼3%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조된 제품은 자기무게의 20배 가량 되는 물을 흡수한다 한국한천의 유래 기호식품으로서의 우무
시장상인들은 땀이 나거나 속이 출출할 때 우무콩국을 사서 마시는데 시원하면서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행상들이 우무콩국을 넣은 동이를 이고 거리를 누비면서 "콩국 사이소!"라고 외치는 모습은 부산 같은 해안지방의 여름철풍속도였다.
김정은 33세 때 대사헌을 거치고 형조판서로 있다가 1519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1520년 8월에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며, 이듬해인 1521년 10월 이곳에서 사약을 받고 36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특히 1653년(효종 4년) 제주사 이원진 엮은 「탐라지」는 해산물과 진상품목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는데 어패류(전복 등)와 생선(상어 등), 소금과 함께 해초로는 미역과 우무 등이 진상품으로 열거되어 있다. 이 책에는 매년 2월부터 9월까지 조정에 바친 일정량의 진상해산물 가운데 전복이 1만 4,000여 개로 가장 많았고 우무(牛毛)는 7근(斤)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원진보다 49년 후인 1702년(숙종 28년)에 이형상 목사가 쓴「남환박물」에도 제주도 해산물 가운데 우무가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탐라지」 등 각종 사료에 우무가 중요한 해산물로 기록되어 있고 진상품목에도 끼어 있다는 사실은 당시에도 우무가 매우 가치 있는 해산물로 취급받았음을 의미하고 있다. 다만 우무가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상세한 기록이 없음은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바닷가 사람들이 우뭇가사리로 우무를 만들어 먹듯이 오랜 옛날에도 우무를 식용으로 썼으며, 특히 우무가 진상품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은 궁중에서도 우무를 가지고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 임금님의 수라상에 올렸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한편 조선실록에는 "백제 문주왕(476년) 때 탐라국에서 해초류를 진상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예나 지금이나 제주도에서 우뭇가사리가 많이 난다는 사실로 비추어 볼 때 당시의 진상해초류 가운데 우뭇가사리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한국한천의 탄생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한천이 등장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우무에서 더 발전된 한천과 같은 제품은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 한천이 처음 선을 보인 것은 일제시대인 1912년 대구 신암동에 조선총독부의 한천제조시험소가 세워지면서라고 하겠다. 지금부터 꼭 89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의 논문이나 자료에는 일본에서 개발된 한천이 도입된 연도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다른 자료의 인용을 잘못했거나 착오를 범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42년 일본 상공성 오사카공업시험소 기사였던 柳川鐵之助(공학박사)가 쓴 「한천」에는 "대정 원년(1912년)에 조선총독부가 대구 신암동에서 한천제조를 시작했다. 그 후에 전남 장성군에서 한천시험을 하여 좋은 결과를 얻었다. 대정 2년(1913년)에는 향추(香椎)씨가 경남 밀양에서 대규모로 한천제조를 시작하여 경제적으로 성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51년 일본 대판부 경제부 수산과에서 발간한 「한천의 역사지리학 연구」에는 "조선지방의 한천제조는 총독부가 조사하여 1912년 12월에 경상북도 신암동에 제조공장을 설치했다. 그후 1914년에 제2공장을 전라남도 장성군에 설치했다"고 쓰여 있다. 1975년에 발간된 일본의 「기후한천의 50년사」에는 "대정 원년(1912년)에 조선에서 한천업이 일어났다. 조선의 한천은 蒼蒲治太郞기사가 대정 초년에 지도했지만 그 후로는 별로 발전하지 못했다"고 적혀 있고 1954년 일본인 학자 吉田敬市교수가 편찬한 「조선수산개발사」에도 "대정 원년(1912년)에 조선에서 한천제조시험을 개시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조선수산업」(1941년판) 제조업편에는 "대정 원년(1912년) 한천제조시험장을 처음으로 하여"라고 해놓고 시험조사편에는 "대정 4년(1915년) 경상북도 대구 및 전라남도 장성에 한천제조시험장을 설치했고, 일시적 시험소로서 1917년(대정 6년)에 민영으로 이관했다"고 되어있다. 1970년 일본학자 林金雄박사와 행정관료 岡岐彰夫가 공동으로 펴낸 「한천핸드북」에는 "조선에서는 大正 원년(1912년)에 당시 총독부가 경상북도 대구 신암동에서 한천제조를 개시했고 그 후 전라남도 장성군에서 한천을 제조했다. 대정 2년(1913년)에는 향추씨가 경상남도 밀양에서 제조에 성공했다"고 적혀 있다. 한편 1963년 한국의 공업한천 제조업체인 원동산업과 일본 한천 판매 주식회사가 공동으로 펴낸 「한국 한천의 자료」에는 "1924년(大正 13년)에 대구시 신암동에서 한천공장을 신설했고 1926년(大正 15년)에 전남 장성군에 또 하나의 한천공장이 설치되었다"고 되어 있다. 또 일본의 기후대학 농학부 농업화학과 林金雄교수가 1970년에 펴낸 「한천핸드북」에도 "총독부직영공장이 1924년 대구시에, 1926년 전라남도 장성군에 세워져 시험조업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한천의 창시 일본 한천업계에서는 천평시대 때 당나라에서 우뭇가사리로 우무를 만드는 방법이 전해졌고, 이를 한 단계 발전시킨 한천은 1,100년쯤 뒤인 17세기에 그 제조법이 개발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에는 한천의 발명에 관한 문헌기록은 없고 구전으로 내려오는 설이 몇 가지 있는데 내용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구전에 따르면 지금부터 340여 년 전인 명력 3년(1657년) 어느 겨울날 島津이라는 지방군주가 江戶(지금의 도쿄)에 참근교대(제후가 자기 영토를 떠나 江戶에 가서 일정기간 근무하는 일)를 하러 가는 도중에 산성국(현재의 교토현)에 있는 여인숙에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집주인(太郞左衛門)은 벼슬 높은 사람의 숙박을 매우 영광으로 생각하고 여러 가지 요리를 대접했는데 그 가운데 일미라 할 수 있는 우무도 끼어 있었다. 그런데 집주인은 그가 먹고 남은 심태를 문밖에 내버려 두고는 이를 잊고 있었다. 때는 겨울철인지라 심태는 저절로 밤에는 얼고 낮에는 녹기를 여러 날 되풀이하다가 결국은 우무를 건조시킨 말랭이와 같이 바싹 마른 상태가 되었다. 여러 번의 동결과 해빙의 과정을 거쳐 건조되면서 지금의 한천과 같은 모양으로 변한 것이다. 이를 뒤늦게 발견한 집주인은 기이하게 생각하여 물에 삶아보니 자연스럽게 녹으면서 다시 우무로 변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다시 문밖에 내놓고 냉각시켜 보았더니 맨 처음의 심태보다 더 희고 투명한데다 해조냄새도 거의 나지 않는 상태로 되는 것을 확인했다. 아주 우연한 계기였지만 이것이 일본인들이 즐겨먹는 한천의 제조방법이 발명되는 순간이었다. 집주인은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를 단순한 자연현상이라는 생각에 머물지 않고 나름대로 연구를 거듭한 끝에 현재 널리 쓰이는 것과 같은 한천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름도 우무를 건조시킨 것이라는 뜻인 「우무를 말린 것」으로 불렀다. 우리말로 표현하면 우무를 말린 것, 즉「우무말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다량의 수분을 포함하고 있는 심태를 동결·융해·탈수·건조라는 처리방법에 의하여 건제품으로 만든 것은 太郞左衛門의 큰 공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그를 두고「한천 발명의 조상」이라고 부른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말하면 그의 아버지가 美濃國(지금의 기후현) 출신으로 豊臣秀吉을 따라 산성국 伏見에 와 살고 있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에 출병했다가 전사했는데 그의 장남이 아버지의 출신지 이름을 따서 옥호를 미노야라고 붙였다. 한천을 처음 발명한 곳은 교토이지만 발명자 太郞左衛門의 아버지 고향인 기후현이 일본 제1의 한천생산지가 된 것은 매우 특별한 인연이라고 하겠다. 한천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처음에는 그냥 「우무를 말린 것」이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승응 3년(1654년) 중국에서 귀화하여 산성국 宇治마을에 만복사를 세운 고승 은원선사(1592∼1672년)가 이것을 시식해보고 "불가의 식용으로 이것을 능가할 것은 없다"고 극찬하면서 이름을 「한천(寒天)」으로 명명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겨울철 추운 옥외에서 하늘의 한기를 이용해서 만들었다는 뜻에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일본한천산업의 발달 한천이 상품으로 이용된 것은 1650년대 말에 太郞左衛門이 한천제조법을 개발한 직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한천을 만들어 보관하고 있다가 손님이 오면 물에 끓여 녹여서 만든 한천요리를 손님상에 내놓았으며, 한꺼번에 많이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300여년 전인 원록 4년(1691년)에 만들어진 「만구전각」에 보면 오사카의 天滿 시장에서 거래된 마른 농수산물에는 다시마, 표고버섯 등 28가지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한천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그 당시에 한천이 상품으로 거래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한천의 거래량이나 품질정도 등은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한천제조업이 확립된 것은 天明年間(1764∼1771년)에 섭진국(현재의 오사카) 사람인 宮田半平에 의해서였다. 그는 伏見에서 한천을 제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美濃屋利兵衛를 찾아가 간곡히 사정하여 그 제조방법을 상세하게 배웠다.
이것이 점차 인근 마을로 확산되었으며 한천제조가 성행하면서 상품으로서의 기업화를 이룩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관서한천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개발한 제조방법은 소화시대 초기인 1920년대까지 이어져 왔다. 이때까지는 온도계도 없이 경험이나 감에 의지하였고 약품류는 사용하지 않았다. 美濃屋太郞左衛門이 「한천의 발명자」라고 한다면 宮田半平은 한천을 상품으로서 기업화한 「한천진흥의 선조」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생산되는 한천은 현재 신주한천, 기부한천, 관서한천 등 생산지방의 명칭을 붙이고 있다. 그 중에서도 관서지방의 한천이 宮田半平 덕분으로 가장 빨리 발달했다. 현재 일본에는 2곳에 한천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하나는 오사카에 문력사 경내의 「宮田半平翁碑」이고, 또 다른 것은 나가노에 있는 「小林 左衛門の 寒心太業元祖之碑」이다. 이 두 사람은 각 지역에서 한천산업을 발달시킨 공적 때문에 후세사람들이 비를 세워 공덕을 기리고 있다. 宮田半平翁碑는 대정 3년(1914년) 5월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에는 「日本特産 寒天巧製之祖 宮田半平翁」이라고 적혀 있다. 또 다른 비석의 주인공 小林 左衛門은 신주한천의 원조로 홍화 원년(1884년) 추방시(지금의 모야시)에서 한천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천보 12년(1841년)경에 관서에서 2년 동안 한천제조기술을 배운 뒤 신주한천을 창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小林 左衛門은 가족과 함께 겨울에는 한천을 만들고 봄에는 심태를 팔았으며, 이후 다른 사람과 한천제조업을 공동으로 경영하게 되면서 기업화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자료인용> 밀양한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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