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시각 나는 손목에 보란 듯이 채워져 있는 스위스제 “티쏘(TlSSOT)”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면서 흐뭇하면서도 미묘한 웃음을 짓는다. 딸이 사다준 시계니 물론 기분이 각별하다. 하면서도 머릿속에 이젠 모두 옛말로 되어버린 이왕지사들이 떠오르면서 마음 한구석이 어쩐지 짠해진다.
나는 철이 들어서부터 아버지의 손목에 시계가 채워져 있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하였다. 한생을 교단에 몸을 담았던 분, 또 평생 술이나 담배와는 인연이 없었던 분이었는데도 말이다. 그저 낡은 회중시계 하나가 아버지의 괴춤에 매달려 묵묵히 아버지를 동반했을 뿐이었다. 우리 6남매를 낳아 키우신 아버지께서 손목에 시계를 찬다는 건 자신에게 있어 일종 사치로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대학을 졸업하고 부대농장에서의 실천단련을 거쳐 처음으로 용정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까지 손목에 시계가 없었다. 그저 집에 탁상시계 하나를 갖춰놓고 처와 함께 보면서 출근시간을 보장하였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교단에 오를 때에는 어림짐작으로 시간을 배분하여 수업을 진행하였고 벨소리와 함께 수업을 끝냈다. 그러다보니 수업계획이 엉뚱하게 흐트러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의 이런 사정을 알아차린 누나가 나에게 자기의 손목시계를 풀어주었다. 나는 극구 사절하였다. 누나도 교원이여서 시계가 필요했고, 더구나 그 시계는 누나가 시집을 가면서 매형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누나는 한사코 그 시계를 나의 손목에 채워주었다. “나는 이젠 경험이 있어 괜찮다. 너는 갓 교단에 오른 몸이니 시간을 제대로 장악하기가 쉽지 않을 거야. 또 학생들 앞에서 빨리 교사로서의 위신도 세워야지…… 앞으로 네가 시계를 갖춘다면 그때 다시 돌려 달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리하여 나의 손목에는 처음으로 시계가 채워졌다. 비록 여자용의 “소상해(小上海)”였지만 그런대로 나의 체형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상황으로 볼 때 나절로 손목시계 하나를 갖춘다는 것은 과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백수로 셋집을 맡아 일떠세운 살림에, 내 월급 42원과 아내 월급 36원으로 연달아 태어난 딸애 둘을 키워야 했다. 게다가 동생들마저 모두 수입이 거꾸로 서는 생산대 지식청년으로 내려가다 보니 그들의 생활비도 결국 나와 처의 얇은 월급봉투에서 야금야금 흘러나가야 했던 상황이 아니었던가.
셋집살이를 하고 있는 우리의 어려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한 지인이 위치가 좋고 반듯하여 꽤 살만한 자기의 외통집을 처리한다면서 “만약 선생이 이 집을 산다면 170원에 넘기겠소.”라고 하였어도 당겨오지 못하였던 나였다(후에 그 집은 200원으로 남에게 넘겨졌다). 그러니 어느 천년에 적어도 100원을 넘겨야 살 수 있는 손목시계를 갖출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나는 누나의 손목시계를 몇 년 잘 착용하였다.
그러다가 나의 손목에 내 이름으로 명명된 시계가 채워지게 된 것은 그로부터 5, 6년이 지나서인 1977년이었는데 지식 청년으로 세린하와 백금향에 하향했던 두 동생이 노동자모집으로 손잡이트럭공장과 지질대로 각각 옮겨 앉으면서였다. 그들은 연말 장려로 받은 돈으로 나에게 “동풍”표 남자용 손목시계를, 아내에게 “상해”표 장방영의 깜직한 손목시계를 사다주었다. 그때까지 공장이나 기업에 있는 일꾼들의 수입은 학교 교원들의 수입보다 퍽 높았던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차례진 시계를 퍽 오랫동안 착용하였다. 그 시계를 차고 용정중학교로부터 용정고중으로 전근했고, 그 시계를 차고 연변문학예술 연구소로 옮겨 왔으며, 또 그 시계를 착용하면서 늦깎이공부 차 한국 강원대학 대학원의 유학길에도 올랐다. 20년을 넘게 착용했다는 말이 되겠다.
그런데 내가 한창 긴장하게 강원대학 대학원의 학습생활을 하던 도중 문제가 생겼다. 나에게 항상 정확하게 시간을 알려주어 고맙던 그 손목시계가 그만 딱 멈춰버렸던 것이다. 용두를 틀어 봐도 움직이지 않았고 흔들어 봐도 끄떡하지 않았으며 손바닥으로 탁탁 쳐봐도 감감하였다. 수리를 맡겨야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춘천에서 내 손목시계를 수리할 수 있는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어지간한 시계는 고장이 나면 그대로 버린다는 게 그곳 사람들의 인식인 듯싶었다. 나도 부득불 그곳 사람들의 관례를 따라 아까운 시계를 그대로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따져보면 그 시계도 결국은 오랫동안 착용한 “어지간”한 시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작 그 “어지간”한 시계가 없어지니 당시 정해진 시간에 맞춰 대학 강의실로, 도서관으로, 또 아르바이트하러 매일 출근을 해야 하는 회사와 일주일에 한 번씩 특강을 해야 하는 유봉여고 등으로 분주히 뛰어다녀야 했던 나의 생활에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항상 여기저기 기웃기웃 눈동냥을 하면서 정확한 시간을 알아보노라 신경을 써야 했다. 경제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어떻게든 손목시계 하나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가 한창 이처럼 망설이고 있을 때 마침 강원도 춘천에 있는 “이북5도 도민위원회”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이름으로 특제하여 각 행 정구역과 유관부서에 배분한 손목시계 하나를 나에게 선사하였다. 지천명을 넘긴 나이에 유학생이라는 특수한 신분으로 한국에 나와 열심히 생활하고 있는 나를 배려한다는 의미에서였다. 실로 고맙고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을 일러 “가뭄에 단비”라고 해야 하겠지! 그 시계는 태엽을 주지 않아도 저절로 돌아가는 전자시계였는데 세상에 전자시계라는 것이 나타나 태엽을 줘야 하는 기계시계를 대체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도 나의 손목에 전자시계가 채워지기는 그것이 처음이었다. 먼저 착용했던 그 시계처럼 매일 명심하여 태엽을 주지 않아도 정확하게 시간을 알려주어 매우 편리했다. 나는 그 손목시계를 착용하고 한국에서의 학습생활을 끝내고 귀국하였고 연구소에 돌아온 후에도 꽤 오랫동안 그 시계를 착용하면서 출근을 하였다.
그 후 나에게는 또 어찌어찌하여 누가 진황도의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물속에 빠진 것을 주어왔다는 꽤나 묵직한 손목시계가 공짜로 생겼는데 그 시계는 손목의 맥박을 비롯한 진동으로 작동하는 고급스런 기계시계였다. 뒤엎어 보면 그 바닥이 투명하여 시계의 치륜이 찰칵찰칵 돌아가는 것이 환히 들여다보여 재미가 있었다. 이 시계를 잃은 사람은 얼마 가슴이 아팠을까!
그런데 공짜로 쉽게 생긴 그 시계는 나와는 별로 인연이 없었던지 얼마 후 너무도 아쉽게 잃어버리고 말았다. 보아하니 그 시계는 돌아가면서 사람들의 가슴만을 아프게 하는 시계인 듯싶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한동안 다시 손목에 시계가 없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랬어도 괜찮았다. 손목시계는 물론 시간을 장악하기 위해 착용하는 것이지만 남자에게 있어서는 일종 품위를 챙겨주는 역할도 한다. 하지만 나는 다시 손목시계를 갖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이미 경제적인 원인에 의하여서가 아니었다. 필요성과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왜 꼭 손목시계를 갖춰야 한단 말인가. 나는 정년퇴직을 하여 엄격한 시간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는 몸이었고 밖에 나갈 일도 별로 없었던 데다가 집에는 화장실을 제외하고 칸칸마다 모두 모양이 각기 다른 멋스런 벽시계들이 아쉽지 않게 결려있지 않는가. 또 어쩌다가 밖에 나간다 해도 핸드폰 속에 시계가 장착되어있기에 시간을 몰라 걱정할 일이 전혀 없지 않는가. 그리고 지금은 또 손목시계 따위로 품위를 과시하던 시기도 지나가지 않았는가. 시계를 차면 오히려 부담스럽고 불편하기만 한데……
그러다가 2008년 9월부터 나는 청도에 있는 한 사립대학에 가 교편을 잡고 학생들 앞에 서게 되었다. 그랬어도 다시 손목시계를 갖출 생각은 나지 않았다. 손목에 시계가 채워져 있다면 물론 두 말 없이 좋겠지만 없어도 핸드폰 속에 장착되어 있는 시계로 응부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마침 청도로 가는 길에 북경에 들렸는데 중앙인민방송국에 근무하고 있는 사위가 자기는 불편해서 손목에 시계를 차지 않는다고 하면서 손목시계를 나에게 내어주었다.
그 시계는 한국에 있는 나의 조카가 마음먹고 사위에게 특별히 선물한 브랜드 금시계였는데 나는 그 시계를 착용하고 청도에 갔고, 그 시계를 착용하면서 사립대학에 임직하여 교수의 신분으로 교단에 섰다. 그러던 어느 날 백화상점 손목시계매장에 찾아가 둘러보았다. 사위가 자기의 처형으로부터 선물 받은 귀중한 금시계를 내가 계속 착용하는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마침 매장에 마음에 당기는 것이 있었다. 비록 전자시계이긴 하지만 외국제품들이었는데 가격이 생각 밖으로 너무도 저렴하여 주저 없이 “바두스(Badus)” 손목시계를 하나 골라 손목에 찼다. 그리고는 사위가 선물로 받은 그 금시계를 다시 돌려주었다. 나는 그렇게 손수 마련한 손목시계를 착용하면서 교단에 섰다가 4년 후에 돌아왔다.
지금 나에게는 실로 손목시계가 필요 없다. 청도에서 산 그 손목시계도 지금은 주인의 냉대를 받아 방치된 채로 책상서랍의 한구석에서 부지런히, 정확하게, 그리고 또 외롭게 홀로 뛰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북경에 있는 딸이 나에게 생일선물이라 하면서 세상이 다 알아주는 스위스제의 명품시계를 사다가 나의 손목에 채워주었다.
언젠가 내가 공짜로 얻었다가 잃어버렸던 그 시계처럼 뒷면 바닥으로 치륜의 움직임이 환히 들여다보이고 또 손목의 맥박과 손의 움직임으로 돌아가는 그런 시계였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칸칸마다 벽시계가 걸려있는 집에서도 매일 필요이상으로 꼭 이 시계를 착용한다. 전자시계처럼 방치하였다간 멈춰버리겠으니…… 어찌 보면 이 시계는 지금 나더러 철모르기의 멋, 철모르기의 사치를 부리게 하고 있다. 그러면서 노년에 오게 되는 나태함과 게으름을 몰아내게 하고 있다.
물론 세상에는 이보다 품질이 훨씬 더 좋고 가격이 훨씬 더 비싼 시계들이 많겠지만 이 시계는 내 마음속의 눈금과 마음속의 자를 충분히 넘어서는, 너무도 분에 넘치는 사치품으로 되고 있다. 분명 사치품이다. 박절히 필요할 때에는 그처럼 얻기가 힘들었었는데 별로 필요하지 않을 때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곱으로, 너무도 쉽게 얻어지면서 사치를 누리게 하는 이것, 이것이야말로 정녕 일종 생활의 희롱,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