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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철학 - 인도철학개론 - 종합시험 석사
[질문] Vedānta학파와 타학파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서술하시오.
[답안]
인도철학에 있어서 제학파라 하면 베다(Veda)와 이슈와라(Īśvara, 自在神), 그리고 빠라로까(paraloka, 來世)의 세 가지를 절대적으로 “있다”고 하여 그 존재성을 부여하고, 그에 대한 권위를 받아들이는 유파(āstika)와 그렇지 않은 무파(nāstika)를 포함한다. 유파는 정통파, 무파는 비정통파로도 불린다. 정통파에는 샹키야(Sāṃkhya), 요가(Yoga), 니야야(Nyāya), 바이쉐시카(Vaiśeṣika), 미망사(Mīmāṃsā), 베단따(Vedānta)가 있으며, 비정통파에는 불교, 자이나(Jaina), 유물론학파인 짜르와까(Cārvāka) 등이 있다. 이들 제학파에 대하여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자.
[공통점1] 첫째, 해탈에 대한 목표이다. 비정통 학파의 짜르와까(Cārvāka) 등 일부를 제외하면 베단따 학파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인도철학 학파는 궁극적으로 해탈(mokṣa/mukti)을 그 목적으로 삼는다. 또한 해탈의 전제가 되는 윤회와 그 윤회의 원인이 되는 업(karma)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각 학파에서 해탈에 대한 정의와 도달하는 방법, 즉 수행론적인 부분에서는 상이점이 발견된다.
[공통점2] 둘째, 자아에 대한 관심이다. 베단따 철학은 기존의 유일무이하고 우주창조의 주이고 무인격의 중성적 신인 브라흐만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작하여 그 브라흐만과 자아(Ātman)의 합일인 ‘범아일여’사상의 탐구로 이어지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을 인식론적 주체로 확증하기 시작했다. 개개인에 내재된 주체, 개아에 대한 사상을 전개시켜나가며, 논의의 초점을 초월적 존재인 범(梵)이 아닌 실재적 개체인 아(我)로 돌린 것이다. 이러한 ‘자아’에 대한 관념을 내세우는 학파들은 베단따 이외에도 있었고,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크게 불교의 무아설과 대비되지만 구체적으로는 각 학파마다 정의하는‘자아’의 개념이 조금씩 다르다.
둘째는 자아에 대한 관심이다. 베단타 철학은 범아일여(梵我一如)로 불리는 일원론을 천명한다. 여기서 보편적 자아인 Brahman(梵)과 개체적 자아인 Ātman(我)은 동일하고, 둘이 아닌 이 하나의 원리로부터 세계는 다양한 양태로 현출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원론에서는 유일하고 순수한 원인으로서의 자아와 다양하고 불결한 결과로서의 세계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는 것이 관건이다. 베다에서 성찰한 인격의 세 층위 중 aja는 베단타의 자아 개념과 더욱 부합하고, tanū는 상키야의 미세신과 더욱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베단타의 일원론에서는 영혼 개념에 물질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지만, 상키야의 이원론에서는 여기에 물질성을 고려한다. 그러나 자아에 관한 베단타와 상키야의 인식이 현저하게 다르다고는 말할 수 없다. 양측의 차이는 반영설에 의해 인식론 차원에서 희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반영설에 의해 베단타의 자아(Ātman)는 개아(영혼)인 양 활동할 수 있으며, 상키야에서 개아에 상당하는 Buddhi는 자아(Puruṣa)인 양 인식할 수 있다. 결국 베단타와 상키야 사이의 공유 관념으로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Buddhi이다. 이 Buddhi는 양측에서 활동성의 의식인 개체적 사이비 자아를 대변한다. 영혼의 역할을 담당하는 주체도 이것이며, 인식아와 내아와 명아 등도 이것의 별칭으로 간주할 수 있다. 여기서 자아와 영혼은 의식의 비활동성과 활동성으로 차별되므로 윤회(활동)하지 않는 영혼이 자아라면, 윤회(활동)하는 자아는 영혼이다. 한편 상키야의 미세신은 자아 개념에 관한 한 베단타와 차별할 수 있는 관념을 대변한다. 그러나 베단타 불이일원론을 적용하면, 미세신도 무지의 소산이요 자아의 upādhi일 뿐이다. 베단타에서 해탈은 이 upādhi를 자아로 착각하는 무지에서 벗어남으로써 실현된다. 상키야의 경우에는 Buddhi를 자아로 착각하는 무지에서 벗어남으로써 Puruṣa의 독존이라는 해탈을 실현한다. 베단타든 상키야든 해탈의 논리는 동일하다. 양측의 차별적 관념은 동일한 해탈의 논리로 회귀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차별 관념이 아무리 격렬할지라도 그 이면의 공유 관념으로 진화(鎭火)될 수 있는 것이 인도 철학의 자아 개념일 것이다. 이처럼 베단타 안에서도 일원론과 이원론으로 나눠질 정도로 자아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다. 이는 비정통파인 무파에서도 마찬가지로 불교의 경우는 무아설을 펼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무아(無我)를 천명하는 불교에서 조차 인식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다. 결론적으로 베단타던 아니던 그 내용에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자아와 인식에 대한 사색과 연구는 모든 인도철학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
[공통점3] 세째, 주석적 연구의 전통이다. 베단타 학파와 타학파 간의 또 다른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바로 주석적 연구의 전통이다. 대부분의 인도의 철학학파는 소의경전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다양한 주석에 따라, 하위분파로 나뉘기도 하고 다른 주석적 견해 상호간의 대립, 차용, 보완 등의 과정을 거치며 자신들의 이론을 보다 정교하게 발전시켜갔다. 모든 학파가 개조를 인정하지만, 실로 한 학파는 한 인물의 일관된 사상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석적 연구 방식을 통해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견해와 그 상호 교류를 통해 오랜 세월에 걸쳐 발전하였다.경전(sūtra)는 대개 교리의 이해를 돕거나 암기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간단명료하게 쓰여진 경우가 많고, 그 깊고 심오한 의미를 파악하고 각 시대에 필요와 요청에 따라 경전의 내용을 후대 또는 동시대인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키 위해 쉽게 풀어쓰는 주석적 연구 방법이 활용되었다. 경전에 대해 논(śāstra), 주(tīka)는 물론 소(bhaṣya), 讚(stotra)로 이어지는 복주, 복복주의 전통은 그 주석의 내용에 따라 각 학파가 다양한 분파로 나뉘기도 하고, 보완, 확충되어가며 발전되어가는 방식은 인도철학의 대표적인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공통점4] 넷째, 인식방법에 대한 연구이다. 각 학파마다 인식방법에 대한 연구가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모든 인도철학의 학파들은 자신들의 교리를 스스로 해명하고, 상대의 이론을 타당하게 비판하며, 자신들의 이론을 다른 이들에게 효과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한 방법/수단으로 논리학, 인식식론에 관심을 두며 발전시켜왔다. 인도철학에서의 대표적인 바른 인식방법에는 다음과 같은 6가지가 있다.
ⓐ현량(pratyakṣa-pramāṇa, perception, 現量) : 지각. 직접 지각. 직접적인 지각을 통한 경험으로 아는 것. 감각기관(indriya)과 그 대상(artha)과의 감각작용(saṇikarṣa)에 의한 인식을 말한다.
ⓑ비량(anumāna-pramāṇa, interence, 比量) : 추론. 보이지 않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여 아는 것. 추론. 여기에는 서양의 삼단논법에 해당하는 삼지작법이 있는데, 삼단논법이 연역적 추리라면 이것은 귀납적 추리에 해당한다.
귀납적 패턴에 의한 추록적 지식 추론적 지식은 본성의 제일성(齊一性)과 인과관계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다. 귀납적 패턴에 의한 추론적 지식 추론적 지식은 본성의 제일성(齊一性)과 인과관계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다. “현상의 지식을 구성한다. 오랫동안 보고 경험하고 지식을 획득하여 이러한 현상을 탐구함으로써 그는 다음과 같은 과거와 미래에 관한 추론(nayamneti)을 이끌어 낸다. 쇠퇴와 죽음의 본질(고제), 쇠퇴와 죽음의 원인(집제), 쇠퇴와 죽음의 절멸(멸제), 쇠퇴와 죽음의 절멸을 이끄는 길(도제)을 철저하게 이해한 속세를 떠난 현자들과 바라문들은 내가 지금 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렇게 했던 것이다. 미래에서 쇠퇴와 죽음의 본질을 철저하게 이해할 속세를 떠난 현자들과 바라문들은 내가 지금 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렇게 할 것이다. 이것이 귀납적 지식을 구성한다.”(Samyutta Nikāya) |
예를 들면,
주장(宗)-저 산에 불이 있다.
근거(因)-저 산에 연기가 난다. 연기가 있는 곳에 불이 있다.
예증(喩)-마치 아궁이에 결이 있는 것처럼.
ⓒ비유량/비교량(upamāna-pramāṇa, compatison, 比喩量/比較量): 비교. 두 가지 사이의 유사성을 상정하여 알게 되는 것, 유추. 닭-오리, 말-소 등의 비유를 설명. 현재 경험한 것과 과거에 경험한 것을 기억에 의해 비교해서 양자의 유사성을 아는 지식
ⓓ의준량(arthāpatti-pramāṇa):가정. 함축된 의미에 근거하여 알게 되는 것. 즉 무아를 이야기함으로써 무상이 이해되듯.
ⓔ무체량/무량(abhāva-pramāṇa) : 비인식.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되는 것. 존재의 부재를 통해 존재의 향방을 결정하는 것.
e.g.)빈방에 들어가 주인이 없음을 보고 그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앎.
ⓕ성언량/성교량(śabda-pramāṇa, 聖言量): 믿을 만한 권위적 교증에 의해 알게 되는 것. 성인의 말씀, 가르침에 의지하여 인식하는 것.
유파철학 각각에서 인정하고 있는 인식방법은 다음과 같다.
샹키야(Sāṃkhya) : 현량, 비량, 성교량
요가(Yoga) : 샹키아와 같음 / 현량(pratyakṣa), 비량(anumāna), 성언량(āgama)
니야야(Nyāya) : 현량, 비량, 비유량, 성교량
바이쉐시카(Vaiśeṣika) : 현량, 비량
미망사(Mīmāṃsā) : 일부 미망사 6가지, 일부 무량을 제외 5가지, ⓐⓑⓒⓓⓕ
베단따(Vedānta) : 6가지 모두 인정
인식방법=인식근거=(量)=pramāṇa=척도, 표준, 규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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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브라흐마 수뜨라(brāhma sūtra)의 해탈론
[답안]
veda경전의 구성은
“본집(samhīta)-신에 대한 예배와 찬탄”과
“브라흐마나(brāhmaṇa, 梵書)-제사에 대한 방법과 의미설명”과
“아란야까(Aranyaka)-숲에서 전수된 비법을 모은 삼림서(森林書)”와
“우파니샤드(Upaniṣad)-우주의 창조적이고 궁극적인 물음에 대한 철학서”
로 구성되어있다. 그 중 베다의 끝이라고 불리는 vedānta 즉, Upaniṣad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는 것이 베단따 학파이다. 이들 베단따 학파들이 의지하는 경을 바로 vedānta sūtra 혹은 brāhma sūtra이다. 이러한 brāhma sūtra에 대해 샹카라는 불이일원론, 라마누자의 한정불이일원론, 마드바는 불일이원론의 주석서를 남기며 견해를 달리하며 베단따의 제분파가 나타나게 된다.
브라흐마 수뜨라에 따르면, 해탈을 위한 수행은 예비수행과본수행의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예비수행단계로 본수행에 임하기 전 veda경의 업품에 설해진 자신의 과업에 충실하여 임무(dharma)를 다하는 것이다. 제사를 행하고 보시과 고행 등 바라문의 행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수행에 들어가기 전 준비단계로써 중요시 되는 과정이다. 둘째, 본수행으로yoga즉명상/선정의 실수행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비음인 oṁ을 염송하는 방법 등이 포함된다. 이를 통해 해탈을 성취하게 된다.
수행의 단계를 거쳐 성취하게 되는 해탈도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고 브라흐마 수뜨라는 설한다. 즉 현신해탈(Jīva-mukti)과 최종해탈(atyanta-mukti)이 그것이다. 전자는 살아있는 동안, 더 이상의 업의 과보를 짓지 않게 된다는 생해탈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해탈단계에는 여전히 과거세로부터 쌓아온 업이 모두 해소되지 않은 상태이다. 현신해탈단계에 남은 업이 모두 해소되어 브라흐만에 완전히 합치되는 것은 후자인, 최종해탈단계이며, 이는 죽어서만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다시 말해 개아가 초월적, 절대적 존재인 브라흐만과 합일 되었을 때, 해탈한 개인은 소원을 성취한다거나, 타인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유로이 살아갈 수 있는 능력, 자재력 등이 생기지만, 브라흐만과 같이 세상을 창조, 소멸할 수 있는 능력은 가지지 못한다.즉, 아무리 개아와 범의 합치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개아적인 특수성은 그대로 가지는 한계점이 있는 것이다.
brāhma sūtra에 따르면 첫째로 브라흐만이 현상세계의 존재는 다양성과 차별성을 지니며 함께 존재하게 되는데, 브라흐만은 그 현상세계를 지배, 조절하게 된다. 둘째로 절대절명의 유일무이한 절대자아의 주체 브라흐만은 현상세계의 물질로서 현현되어진다. 셋째로 브라흐만에 의해 나타난 현상세계는 ‘개인자아의 무명(avidyā)로 둘러쌓인 환(maya)에 의해 나타난 거짓의 세계이다.’라는 인중유과론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브라흐만 경에 따르면, 해탈이란 철학의 궁극적 목표이며, 이는 진아를 획득하여 개아가 초월적 존재인 브라흐만에 완전히 합일되는 것이다. |
크게 다음의 세가지-①가정을 떠나 출가유행자로서 브라흐만을 염송하는 방법, ②가정에 머무르며 제사를 드리며 브라흐만을 염송하는 방식, ③바른 행위를 항상 실천하여 브라흐만을 염송하는 방식-로 나뉘며, 이 가운데 후대 베단따 철학이 주력했던 방식은 ③의 방법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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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dharma의 개념을 사상사적으로 논술하시오.
[답안] 82점
다르마의 개념을 사상적으로 논술.
인도철학에서 다르마의 개념은 크게 정통파와 비정통파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르마의 어원은 dhr-이다. ‘유지하다’,‘지지하다’, ‘지탱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dhr-에서 파생된 명사가 바로 dharma이다. 이런 의미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힌두교에서는 힌두이즘이라 불리는 자신의 종교를 다르마라고 일컫는다. 여기에서 다르마의 의미는 인륜의 질서나, 관례, 규범, 사회적 질서로써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인생의 네가지 단계, 즉 아쉬라마 다르마와 사회적 측면에서의 와르나 다르마(사성계급)가 있다. 베다에서는 지식의 실행을 중시여기고, 올바르게 행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행위에 대해 자신의 이기적 집착없이 신에 대한 헌신과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것에 「바가바드기따」에서 강조하는 다르마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깨달음)이 곧 법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법의 의미가 교리의 발전전개와 함께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즉 초기불교에서는 사성제와 연기를 법을 지칭하고 있으며 대승불교의 기신론에서는 진여를 그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일체 현상을 체용상으로 관찰파악해서 불신의 체용을 법신으로 보고 응신과 보신을 상으로 전개시켰다. 용수는 일체이 현상세계는 분별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연기를 무자성, 공으로 해석함으로서 궁극적 진리인 법을 결국 공(空, sunyata)을 체득하는 것이라는 이론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에서 다르마의 개념을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법의 의미가 교리체계의 전개와 진전에 따라 조금씩 상이해진 것을 알 수 있으며 힌두교에서는 다르마란 개념이 일상생활의 경험에서의 일치와 결부되어 설명되고 있고, 불교에서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조금씩 상이하지만 결국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궁극적 목표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 정통파/ 비정통파 * 다르마 어원 : dhr-의 파생명사로써 ‘유지하다’ ‘지탱하다’는 의미 => 변하지 않는 것 * 힌두교의 다르마 : 힌두이즘=자신의 종교=> 인륜의 질서나, 관례, 규범, 사회적 질서. 의무, 규범, 질서. 1) 인생의 네가지 단계 : 아쉬라마 다르마(aśrama) 2) 사회적 측면 : 와르나 다르마(varna dharma, 사성계급) * 베다의 다르마 : 지식의 실행 중시. 올바르게 행하는 것 강조. * 「바가바드기따」의 다르마 : 자신의 이기적 집착없이 신에 대한 헌신과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것. 의무. * 불교의 다르마 : 부처님의 가르침(깨달음) 법의 의미가 교리의 발전전개와 함께 조금씩 달라짐. 1) 초기불교 : 사성제, 연기를 법을 지칭 2) 대승불교 기신론 : 진여 - 용수 : 일체는 무자성, 공 해석, 궁극적 진리의 법, 공(空, sunyata)의 체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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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이제설(二諦說)을 사상사적으로 논술하시오.
[답안] 82점
우빠니샤드에서는 최고의 궁극적 목표에 이르는 방법에 있어서 지식을 강조하고 있다. 「문다까우빠니샤드」에서는 지식을 낮은 지식과 높은 지식의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높은 지식(parāvidyā), 즉 진제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지혜(jñāna)의 눈으로 보는 것으로서 언어를 초월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며, 낮은 지식(aparāvidyā), 즉 속제란 범부 중생의 눈으로 보는 세계로서 진리가 가리워진(saṃvṛti) 세계이다. 또한 높은 지식은 브라흐만을 깨닫는 것이고, 낮은 지식은 4베다, 제식, 문법서등에 대한 지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지식의 이중성 즉 이제설은 문다까 우빠니샤드에서 정형화되고, 기따에서는 더욱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베단따 철학자인 상카라에 와서는 그 사상의 절정에 이른다고 볼 수 있다. 상카라는 세계관과 인생관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세속제와 승의제의 둘로 구분하였으며, 그 지식 또한 상지와 하지로 나누어 세계관을 전개시키고 있다.
이러한 이제설은 중관파(Mādhyamika)의 개조인 용수의 사상에도 잘 나타난다. 반야의 공사상을 조술(祖述;선인이 말한 바를 근본으로 하여 서술하고 밝히는 것)하고 있는 「중론」에서는, 공이란 비유(非有) 비무(非無)이고, 실재를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파사(破邪)의 의미를 가지며, 중도(中道)란 이러한 유무의 두 극단을 떠나 모든 사물의 실상을 깨닫는 것으로 이것은 실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현정(顯正)의 말인 것이다. 범부 중생들은 현상적 차별의 세계를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유무 등의 지견에 집착하여 고통을 받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용수는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파사현정하기 위하여 팔부중도(八不中道)라는 말로 공의 의미를 밝힌 것이다. 이 중관학의 기초원리도 이제의 입장에 서 있다. 「중론」에서는 “제불은 이제에 의거하여 법을 설하신다. 세속제(世俗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가 바로 그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다.
이 이제설은 정통파의 주류인 아드바이따 베단따(Advaita Vedānta)에 영향을 끼쳐 인도의 최대 철학자인 상까라의 일원론적 실재관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또한 정통파, 유파(āstika)와 비정통파, 무파(nāstika)의 최대의 철학자인 상까라와 용수의 일원론적 존재론을 세우는 인식론의 틀이 되었다.
인도철학 - 인도철학개론 - 종합시험 박사
[문제] pradityasamutpāda를 사상사적으로 논술하시오
[답안] 3. 연기를 사상사적으로 논술.
연기는 초기불교에서는 부처님이 깨달은 법으로써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기고 저것이 생기면 이것이 생긴다는 상관관계를 말하고 있다.
이것이 소승불교에서는 일체현상인 만물이 다름 아닌 중생의 업인에 따라 생기하게 된다는 업감연기로 전개된다. 즉 마음에 누군가를 미워하는 생각이 들어 그것이 신체의 업을 만들고 이러한 업의 악이 고통을 낳는 생사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업감연기는 나중에 12연기관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것이 유식학파에 와서는 알라야연기설로 전개되기에 이른다. 알라야 연기를 일체의 주관과 객관이 종자 알라야식의 변화로 생긴다는 것이다. 이는 상대적인 연기설로서 보다 보편적인 주체를 필요로 하게 된다.
따라서 기신론에 이르러서는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일심진여에서 나온 것이라는 진여연기로 전개되고,
화엄경에서는 법계진리로서 설명하기에 이른다. 즉 하나의 사물은 단독으로서 하나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그것 그대로가 우주라는 것으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바꿔말하면 화엄에서 말하는 일즉일체 일체즉일은 현상세계와 궁극적 세계가 결국은 다르지 않고 나와 너의 대립등도 없는 우주 그 자체라는 것으로서 법계연기를 설한다. 이상과 같이 연기는 업감연기설,유식의 알라야 연기설, 기신론의 진여연기를 전개로 결국 화엄의 법계연기로 최고의 연기법을 설하고 있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① 2지~12지, 정형화, 괴로움-감각접촉 ② 유파 ③ 무파 -------------- 4종 연기설 ------- ④ 초기불교 업감연기(業感緣起), 12연기 ⑤ 유식불교 아뢰야식연기(阿賴耶識緣起) : 종자식 ⑥ 기신론 진여연기(眞如緣起)=여래장 연기 :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일심진여에서 나온 것 ⑦ 화엄 법계연기(法界緣起) : 화엄(華嚴)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
인도철학 - 인도철학개론 - 2010. 종합시험 석사대비
[문제] 인도철학개론/인도철학에 대한 비판 중의 하나(혹은 인도철학의 입장에서 보면 해결해야 할 난제 중의 하나에 출가/산냐신(sannyasin)의 문제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을 갖는 인도철학에 대하여 그 비현실성이 지적되면서 비판되어 오고 있다. 그러한 비판/문제제기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혹은 비판, 혹은 반론)할 수 있을 것인가.
출가(sannyasa), 출가자(sannyasin)
[답안] 베다시대부터 인도의 브라만들은 인생을 학습기, 가주기, 임서기, 유행기의 4주기로 나누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 즉 가족의 형성과 후손의 교육 등의 의무를 다했고, 또한 수행자로서의 출가생활과 유행으로 그들의 정신적 해탈을 위해서 노력했다. 하지만 우파니샤드의 지식지향과 불교의 부흥으로 인해 개인의 해탈을 위한 지적 탐구와 수행에 대한 욕망이 높아져 가주기를 건너뛰어 바로 출가하는 수행자들이 많아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 바가바드기타에서 크샤트리야로서의 의무와 친족과의 우애, 불살생 등의 도덕적 양심 사이에서 고민하는 아루주나에게 크리슈나가 사회적 의무를 강조하고 도덕적 양심에 대한 고민은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설득하는 내용들이 나온다. 크리슈나라는 비슈누신의 화신이 인간에게 이러한 가르침을 전하는 상황은 바로 출가를 서둘러 자신의 사회적 의무를 다하지 않는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본다.
우파니샤드에서 제시되는 해탈을 향한 길은 크게 2가지이다. 지혜를 통한 것과 행위를 통한 것이다. 베다시대에 강조된 것을 제식 등을 통한 행위의 길이었지만, 우파니샤드이후에는 지혜의 길이 강조되었다. 이것은 기타철학에 이르러 다시 의무를 행하는 것을 통한 행위의 길로 설득되어간다. 표면적으로 지혜의 수행과 행위의 수행은 다른 길이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전제조건이 성립된다고 생각한다. 행위의 길을 올바르게 가기 위해서는 신과 나, 세계에 대한 지식이 먼저 성립되어야 한다. 지혜가 따르지 않는 행위란 장님의 눈으로 산 정상에 오르려는 것처럼 위험하다. 또 지혜만 있고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면 혹은 행위가 필요 없는 지혜라면 그야말로 절름발이가 된다. 따라서 사회의 정의나 중생의 해탈을 위한다면 올바른 지혜와 행위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지혜와 행위의 주체가 문제이다. 사람은 각각의 성향이 다르다. 인도사회라면 계급에 따라 이것을 나누려고 했겠지만 지혜가 우위에 있는 것도 행위가 저급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향에 따라 좀 더 지혜를 추구하고 또 획득할 능력이 되는 사람은 출가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싯다르타처럼 사회적인 의무는 저버렸을지 몰라도 그의 지혜로 인해 많은 제자와 중생들이 밝은 지혜의 세계에 머물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철인정치가 말 그대로 이데아일지 몰라도 올바른 가르침 아래에는 정의를 향한 더 정확한 길이 제시될 수 있다고 본다. 또 독창적이고 뛰어난 지혜를 갖지 못하더라도 여러 가지 사상 중 옳은 것을 가려내는 판단력과 그것을 올바르게 습득할 수 있는 정도의 지혜를 갖추고 배운 가르침대로 행한다면 이것 또한 깨달음의 길이다. 물론 사회가 흔들릴 정도로 많은 사람이 출가 생활을 한다면 걱정일 수 있겠지만 더 크게 보면 그만큼 지혜의 길에 맞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 아니겠는가? 인도의 수많은 각자들로 인해 지금 배우고 올바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정리하자면 필자는 출가전통에 대해 그들이 사회에서 촛불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보며 사회존속에 대한 걱정은 기우라고 생각한다.
인도철학 - 인도철학개론 - 2010. 종합시험 석사대비
[문제] 인도철학개론/인도철학의 많은 이론/교설/내용 중에서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는 윤회설일지도 모른다. 지금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윤회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도대체 윤회설의 현대적 의미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답안] 인도철학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가 윤회설일는지 모른다. 윤회설은 초기불교시대나 우파니샤드에 있어서도 업보설과 더불어 전개되어 나오고 있는 것 같다. veda시대나 브라흐마나 시대에 제사행위에서도 이러한 윤회의 사상이 보여지는데, 올바른 제사를 행함으로써 천도를 통한 태양의 세계 신의 세계와 연결되고, 그렇지 못한 제사행위를 통해서는 조도를 통해서 달의 세계로 가서 인도로 간다는 윤회의 사상이 나온다. 이러한 윤회의 사상은 선인선과 안인악과라고 하는 인과에 대한 업보설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본다. 올바른 제사 행위가 무엇이냐에 대한 견해는 jñānasm중심이나 karma중심이나 겸수냐에 따라서 여러 가지 설이 나오지만 veda나 브라흐마나 시대에는 karma의 문제가 제사, 즉 제식행위와 연관되어 이해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제식이 신을 향한, 신을 위한, 그리고 신의 후의를 입으려는 사람들의 바람이었다가 나중에는 제식 자체에 의미를 두게 되어서 제사행위를 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급기야 제사의례가 없으면 신 또한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브라흐만이라는 절대적 통일적 원리 하에 자신들의 위상을 신과 동일시하려는 사제들에 의해서 더욱 체계화되고 심화되어진 것 같다. 결국 선악에 대한 가치의 기준이 행위 즉 제사의 문제라든가 지혜의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어진 것 같다. 업보와 인과 그리고 윤회의 문제는 초기불교 시대에 와서는 더욱 구체화되고 체계화되기에 이르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연기설이다. 무명에 연하여 행이 행에 연하여 식이 식에 연하여 명색이 명색에 육처가 육처에 연하여 촉이 촉에 연하여 수가 수에 연하여 애가 애에 연하여 취가 취에 연하여 유가 유에 연하여 생이 생에 연하여 노사가 일어난다. 그리고 반대로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에서 보여지듯이 우리가 무명에 머물러 있는 한 끊임없이 생사의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 십이연기설은 사제설에서의 고집멸도의 과정과 더불어 윤회의 바탕이 무명이며 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무명이 고의 근본이유라면 집에 해당하는 갈애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불교나 인도의 사상 중 윤회의 사상이 내재된 경우를 제외한 여타 다른 종교에서 보면 선인선과는 인정하지만 윤회는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선인선과를 인정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사후의 세계에 대한 보장을 하고 있으나 윤회는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또한 어느 부류의 사람들은 이러한 윤회니 업보니 하는 데에 관심 자체도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있어서 공통적인 것은 욕망과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끊임없이 간절한 갈애와 여기에서 유래하는 취사선택과 거기서 오는 고통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예가 많다고 본다. 어느 경우이든지 생노병사와 애별이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음성고 등의 고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벗어나서 해방되고자 하는 바람 또한 없지 않다고 본다. 석가모니 당시에나 여러 시대의 성인들이 그러했듯이 인과와 여기에 따르는 업보가 어떻게 전개되어 삶에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대한 설명과 노력이 필요하리라고 본다. 제일 좋은 방법이 의사가 환자를 진단할 때의 방법처럼 병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병의 원인을 안 연후에 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알아서 환자에게 병을 치유하는 방법에 해당되는 사제설과 이에 해당되는 팔정도를 잘 알 수 있게 노력하는 것이며, 삼법인에 해당되는 무아설에 대해서 많은 이해와 실천이 있을 때 현대인들에게 윤회에 대한 이해가 있을 것이다. 또한 연기를 보는 자는 부처를 본다라고 하는 말이 있듯이 연기의 이법에 대해서 충분한 이해가 주어진다면 현대인들이 안고 있는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결국 윤회설의 현대적 의미는 날로 황폐화되어가고 있는 인간정신의 문제와 물질만능의 사조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뿐만 아니라 환경 생태계의 문제 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 인과 업보 연기의 관계 속에서의 윤회의 의미를 깨우치지 않는다면, 지금보다 더욱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윤회의 의미를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며, 이는 인간 대 인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문제 더더욱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관계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라는 연기의 핵심을 파악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이 원활한 삶을 영위해야 할 것이다.
몇 년 전 정신과 의사 김영우 박사의 전생퇴행 체면을 다룬 책이 유행했다. 그리고 tv에서도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에 대한 다소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성향의 프로그램들이 가끔 나온다. 그리고 귀신체험이나 영혼을 다룬 소재의 퇴마록 같은 소설도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고, 엽기코드가 유행하면서 공포 장르의 영상물이나 출판물들이 많이 나와서 일종의 대중적인 문학적 기호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심지어는 인도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조차도 귀신을 보거나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단지 자신의 무의식에서 나온 현상이 아닌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지만 설령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무의식에서 나온 현상일 것이라고 예측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말들 중엔 인생 별거 있나라는 말도 있고 money talks 라는 좌우명을 가진 사람도 잇고, 영혼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추종하게 되는 듯 한 황금만능주의와 배금주의, 물질주의 등이 자극적인 대중문화에 익숙해져 진지한 사고를 짐처럼 여기는 꽤 많은 현대인들을 사로잡고 있는 듯하다. 생각을 많이 하면 우울해진다는, 기분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그들의 행태는 곧 짜르바카(인도유물론)와 다를 것이 없고, 이는 획일적인 암기위주와 입시위주의 교육제도의 탓도 큰 듯하다. 성적이 아니면, 대중문화의 영향으로 연예인들을 숭배하기에 여념이 없는 청소년들에게 종교의 자리는 드문 듯하다. 혹은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혹은 비교적 건전한 이성교제를 꿈꾸며 교회로 몰려다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찬송가를 배우고 교회밴드를 하며 멋진 청춘시절을 가꾸기에 바쁜 그들에게 교회는 놀이터일 뿐이요, 그들이 자라서도 교회는 인맥형성을 위한 터전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현대인들에게도 영혼을 믿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은 몸이 약해서 가위눌려서 귀신을 보거나, 혹은 돌아가신 조상님이 꿈에 예언을 하는 등 수행으로 인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영혼의 현상을 체험하게 되는 일이 그리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쉽게 귀신을 접하고 혼나는 경험을 하는 것은 중고등학생들은 한번쯤 해볼까 생각해보는 분신사바(초령행위)일 것이다. 이는 빙의 등 부작용이 많은데, 이렇게 영혼의 세계에 관심을 느끼는 이들조차 수행을 통한 좋은 영적체험이 아닌 저질적 체험을 하는 것은 부모나 교사 등 어른들이 정신적, 종교적인 가르침보다는 현세적인 가르침과 억압밖에 줄 수 없는 정신적 여유의 부재 때문일 것이다. 이미 외국에서는 초심리학 등 영혼의 존재 여부부터 각종 실험을 통한 전생의 존재여부까지 밝혀내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무튼 사람들은 인정하기 두려운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이들에게 윤회설이나 영혼의 존재를 최대한 실증한다고 해도 속임수일 거라고 치부해버리거나 그 현대인들이 가장 신봉하는 심리학의 일반론을 들어 환각이거나, 무의식의 작용일 것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윤회를 믿고 싶지 않아하는 이들에게 굳이 윤회를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윤회설을 믿게 되면 업보를 믿게 되고 선악의 업에 대해 유의하게 된다. 절대경지에서는 선과 악의 구별이 없거나 악의 반대개념이 아닌 절대격 선이라고 하지만 역시 선이란 개인에게 복을 짓게 해주고 이를 원동력으로 깨달음의 길로 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윤회설을 외면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도 이를 설명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과학이나 심리학을 신봉하는 현대인이라면, 과학이나 심리학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즉, 최근 물리학 분야에서 물질은 전자와 양자, 중성자 등으로 이루어지고, 그러므로 움직이는 이 구성요소들에 의해, 고정된 물질이라도 한없이 유동적인 일종의 에너지의 흐름이라는 것을 권위 있는 물리학자의 연구결과를 자료로 제시하고, 이 전자 역시 최근에는 더 작은 요소로 분리 가능하다는 실험결과로 그들이 믿고 있는 물질에 대한 신뢰를 흔들리게 한 후에 그들이 신봉하는 심리학, 즉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무의식의 작용 같은 것이라면, 이 무의식은 무엇인지 불교의 심리학이라 할 수 있는 유식사상으로 알기 쉽게 설명하면 좋을 것이다. 즉, 심리학에서는 무의식보다 심화하여 집단 무의식 등으로까지 밝혀내고 있는데 이는 유식의 공업 등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아뢰야식 이론 등을 유사한 과학이나 의학용어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과학, 의학, 심리학, 불교철학 등 다방면에 박식한 자들이 사용할 수 있을 방법일 것이고, 윤회설을 믿는 사람이 흔히 설명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까 고심해 보게 된다. 아마 그 다음으로 쉬운 방법은(일반인이 사용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주변의 가까운 사람이 내가 전생에 누구였고 세세한 기억까지 하는데 그것이 사실인 것이 증명된다면 가까운 사람은 믿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것이 영상매체로 혹은 서적으로 나오면 다시 속임수일까 의심하게 된다. 자신이 체험한다면 믿을 수도 있겠지만, 간접적인 체험으로는 그러려니 지나칠 수 있다. 그러므로 윤회설을 외면하는 이들에게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과학, 의학, 심리학, 불교철학 등을 회통해서 설명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이것이 노력이 필요하고 먼 길이지만 정설이 될 수 있는 확실한 길이다. 감동시키는 것으로는 소수의 순수한 사람들만 믿을 것 같다. 그리고 감동시킬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 흔하지도 않다. 윤회설이 현대인들이 수긍하는 각 학문들과 회통된 정설이 된다면 세상은 복 지으려는 사람들로 넘칠 것이고, 복을 탐하지 않는 어떤 사람들도 눈먼 제자의 바늘에 실을 꿰어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중생구제를 위해 복을 짓는 데 애쓰거나, 수행에 힘쓰거나 어떤 모습으로든 더 좋은 세상이 될 것이고, 현대인들의 끝없는 물질에 대한 탐욕과 상대적 불행과 자기소외감, 만성적인 공허감 등도 개선될 것이다.
인도철학 - 인도철학개론 - 2010. 종합시험 석사대비
[문제] 다음문제를 상술하시오.
1.인도철학의 전통적 2대분파 / 2.satkaryavāda / 3.주석적 연구방법 / 4.현대사회에서의 인도철학의 역할
[문제1] 1.인도철학의 전통적 2대분파
[답안(0~4합본)]
인도철학은 크게 두 분파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나눔의 기준은 베다(Veda)와 이슈와라(Īśvara, 自在神), 그리고 빠라로까(paraloka, 來世)의 세 가지가 존재한다고 인정하고 그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받아들이는가의 여부가 된다. 이 3가지에 대하여 존재와 권위를 받아들이는 쪽을 유파(sāstika/astika)라고 하고, 3가지를 모두 부정하거나 일부를 부정하는 쪽을 무파(nāstika)라고 한다. 유파(有派)는 정통파라고도 하며 비교적 유신론적, 정통적, 전통적, 보수적인 학파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무파(無派)는 무신론적, 비정통적, 이단적, 혁신적인 학파라고 할 수 있다.
유파는 첫째, “베다는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는 견해(vedāsti)를 갖는다. Veda를 절대적 진리가 담긴 성전으로 여겨 그 내용의 모순점이나 합리성 여부를 막론하고 모두 진리로 받아들인다. 둘째, “Īśvara(자재신)가 존재한다.”는 견해(Īśvarāsti)를 지지한다. 세상 모든 것은 절대자인 자재신이 현현한 것으로 본다. 궁극적 목표인 해탈마저도 신의 은총으로 이뤄지는 것이며, 여타 모든 존재가 자재신의 창조에서 비롯한다고 본다. 셋째, “내세(paraloka)가 있다.”는 견해(paralokāstika)를 지지한다. 현세가 다한 후에도 과거와 현재의 온갖 업의 작용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며, 각각의 업에 따라 축생, 귀신, 천인, 인간 등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윤회(saṃsāra)하며 이는 끊임없이 반복된다고 본다.
유파는 본집(samhita)로부터 Upaniṣads에 이르기까지 Veda의 권위를 천계서로서 받아들인다. Saṁkhya, Yoga, Nyāya, Vaiśeṣika, Mīmāṁsā, Vedānta의 육파철학과 아리안의 침투와 더불어 전래되었던 고대의 브라마니즘(brāhmanism), 그리고 후대에 보편성과 대중성을 지니게 된 힌두이즘(hinduism)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육파 철학 중 Saṁkhya, Yoga, Nyāya, Vaiśeṣika는 베다를 절대적으로 수용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으면서 독립적으로 기원하였기 때문에 엄격히 구분한다면 정통파도 비정통파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Veda에 반대되지 않는 정도이며, Veda를 근간으로 성립한 학파는 Mīmāṁsā, Vedānta학파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Veda의 말씀을 절대적 교령(敎令, codanā)로 인정하는 것은 Mīmāṁsā 학파 뿐이다. 그러나 나머지 학파들 역시 천계서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실재론적 형이상학을 지니고 있는 등 공통점 등을 공유한다.
무파는 유파가 절대적이라고 여기는 세 가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부분적으로 존재하지 않다고 보는 입장이다. 무파에는 대표적으로 사성의 계급을 강력히 부정했던 불교, 고행주의 Jaina, 인도유물론의 대표인 Cārvāka가 포함된다. 이들은 veda에 명시되어 있는 말이라 하더라도 합리적이지 못하거나 논리적으로 맞지 않을 경우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꺼렸으며, 이 세상에 대해서도 창조신이나 자재신이 만든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자연 그대로를 받아들이려 하였고 직접지각을 하거나 논증하기 어려운 것에 대해 맹목적인 믿음을 갖지 않아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성격을 지녔다. 오히려 Upaniṣads적인 사유에 반기를 들고, 논박하면서 발전·성립되었다. 특히 자이나교나 불교에서는 바른 실천방법과 그 완수가 이뤄지면 윤회로부터 벗어나 다시는 고통스러운 생을 시작하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도철학의 역사는 정통적, 전통적이라 볼 수 있는 유파와 이단적, 혁신적인 무파가 대립하면서 변증법적으로 서로의 사상을 포용, 비판, 조화시켜 나가며 발전해 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완전히 대립되는 주장을 내세우는 학파들도 서로의 교리를 신랄하게 비판해가는 도중에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는 서로 영향을 받아 자신의 사상, 교리를 수정, 보완, 확충해 가는 양상을 자주 볼 수 있다. 이질적인 요소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척이 아닌, 타당한 근거와 바른 인식수단을 도구삼아 자신을 옹호상대를 비판하면서 발전해 나가는 인도철학의 정통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는 현대사회의 갈등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해소해 나갈 방안을 제시해준다고도 여겨진다.
인도철학 - 인도철학개론 - 2010. 종합시험 석사대비
[문제] 다음문제를 상술하시오.
1.인도철학의 전통적 2대분파 / 2.satkaryavāda / 3.주석적 연구방법 / 4.현대사회에서의 인도철학의 역할
[답안2] 2.satkaryavāda
[답안2] Satkāryavāda(인중유과론)는 원인 속에 이미 결과가 내재되어 있다는 이론으로 인도철학의 인과론 중 하나다. 이 인과론을 지지하는 학파에는 대표적으로 Sṁkhya가 있으며 궁극적 유일 실재를 인정하는 Vedānta도 인중유과론을 받아들인다. 반면, Nyāya, Vaiśeṣika, 불교, Mīmāṁsā는 원인 속에 결과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asatkāryavāda(인중무과론)를 지지한다. Saṁkhya는 Puruṣa와 Prakṛti라는 이원의 실재를 상정하며 Pradhāna, 근본원질인 Prakṛti속에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 즉 24원리(25-1:Puruṣa를 제외하여 24원리가 된다.)가 내재되어 있다가 현현하는 것이라 본다. 이 때 근본원인인 prakṛti와 마지막 현현물인 5大는 prakṛti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따라서 이러한 인중유과론은 ‘전변설(pariṇamavāda)'이라고 한다. 반면 상카라의 불이론베단따의 경우 Brahman의 가현(vivarta)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근본원인인 Brahman과 세계는 동일하면서도 동일하지 않은 것으로 말해진다. 따라서 이러한 인중유과론은 ’가현설(vivartavāda)'이라고 한다. 그러나 샹카라의 베단따의 경우에도 학자들에 따라 Brahman전변설이라고 보기도 한다. 가현설은 샹까라 이후의 불이론베단따학자들의 견해이며 Brahman과 Ātman의 동일성을 설명하며, 실제로 생해탈자였던 그는 세계자체와 Brahman을 동일시했던 전변론자였다는 것이다. 한편 불교, Mīmāṁsā 등은 이러한 전변설을 Saṁkhya학파를 표적으로 해서 직접적으로 비판하는데, ‘우유에서 응유가 나왔다’고 주장하는 상키야에 대해 응유의 원인은 바로 전단계의 원인인 발효유일 뿐이라고 논박한다.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우유 → 발효유 → 응유 | |||
Satkāryavāda | 원인 | 결과 | 결과 |
asatkāryavāda | 발효유의 원인 | 응유의원인 /우유의결과 | 다음단계의 원인 /발효유의 결과 |
인도철학 - 인도철학개론 - 2010. 종합시험 석사대비
[문제] 다음문제를 상술하시오.
1.인도철학의 전통적 2대분파 / 2.satkaryavāda / 3.주석적 연구방법 / 4.현대사회에서의 인도철학의 역할
[문제3-1] 3.주석적 연구방법
[답안3-1] 3. 인도철학은 지적인 유희나 호기심의 충족 따위에서 시작되는 단순한 사변이 아니라 삶에 대한 실존적 고민과 자신에 대한 냉철한 탐구,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통해 해탈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추구한다. 따라서 단순한 사유나 지식을 떠나 진리(satya, tattva)를 발견, 추구한다. 인도철학의 바로 이러한 특징이 종교적이면서도 철학적이고 철학적이면서도 종교적인 학문적 정체성을 형성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인도철학은 진리의 발견 또는 성취로부터 시작된다. 각 학파들의 시작은 자학파의 사상에 걸맞는 이론과 실천으로 깨달음을 얻는 개조로부터 시작된다. 하늘의 계시를 담고 있는 성전으로 불리는 Veda역시 깨달음을 얻은 성인들의 가르침이 집성되어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같은 길을 추구하는 수행자 및 학자들은 이미 발견된 진리를 들여다보면서 그 진의를 탐구하는 것으로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해탈지의 입장에서 논해진 것이라 볼 수 있는 그의 경전들은 아직 깨닫지 못한 자들이 이해하기에는 지나치게 함축적이고 난해한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철학적 탐구와 수행을 통해 진리에 가깝고, 본의에 가까운 내용을 담아 주석을 다는 전통이 생겨나게 되었다. 주석은 제자에서 제자로 이어져 복주가 더해지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사상이나 학설이 생겨나기도 한다. 현대에 인도철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의 작업역시 이러한 주석적 연구방법의 맥을 잇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문제3-2] 3.주석적 연구방법
[답안3-2] 인도철학의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주석적 연구방법이다. 이는 일종의 해석학이라고도 할 수 이으며 인도철학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생각된다. 동일한 문화적 토양 속에서 나타난 original thinking은 이미 오래전부터 성인의 입을 통해 전해졌는데, 자아나 진리와 같은 문제들에 대한 성인들의 생각은 경으로 먼저 전해지게 된다. 언어(vāc)로 전해진 이러한 성인들의 생각을 얼마나 여실히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는 후대 학자들의 몫으로 남았고, 여기에 주석을 달아 자신의 이해한 바를 오롯이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 생각은 sūtra에 주석을 단 논(śāstra), 여기에 다시 주석을 한 疏(bhāṣya)로 이어지게 되었고, 하나의 전통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해석의 방법적 차이는 같은 경전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을 낳았고, 여러 분파를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철학하는 자로서 자기 철학의 중요성이 막대한 만큼, 이러한 주석적 전통은 좋은 본보기로서 해석학적 발전방향을 제시해 줄 것으로 보인다.
[문제3-3] 3.주석적 연구방법
[답안3-3]
인도철학의 특색 중 하나는 종교적 성향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인도철학에서 종교와 철학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어떤 대상의 존재여부, 즉 지적탐구 그 자체만을 목표로 삼는 서양철학과는 달리 인도철학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점, 고의 해결로부터 출발하여 이로부터 벗어나 궁극적 목적인 해탈에 이르는데 그 주안점을 둔다.
다시 말하면, ‘고는 반드시 있다.’, ‘고를 벗어나 해탈에 이른 성인 또는 각자들이 반드시 있다’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전개해 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성인, 각자들이 깨달은바, 진리를 성전, 경전(śūtra)의 형식으로 남겼다고 본다. 인도철학의 거의 모든 학파가 소의 경전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교리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나 경전은 심오한 깨달음의 경지를 언어로 표현한 까닭에 해석이 필요하기도 하고, 교리의 이해를 돕거나 암기의 편의성을 위해 간단명료하게 쓰여진 경우도 많아서 해석적 방법이 필요할 수 있다. 깨달은 자에 대한 믿음과 그들이 언어로 구체화한 성전의 가르침에 대한 신뢰는, 이 성전을 성현들이 깨달은 바 그대로 완전히 이해할 때 해탈할 수 있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따라서 인도철학은 시대에 필요와 요청에 따라 경전의 내용을 후대 또는 동시대인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키 위해 쉽게 풀어쓰는 주석적 연구 방법이 두드러지게 된다. 인도철학에서는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교리를 내세우는 것보다는 기존의 교리에 입각해 다양한 방식으로 주석을 하는 연구 방법론이 더 가치 있게 여겨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 경전에 대해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주석을 단 것이 논(論,śastra)이 되고, 이 논에 대해 주석을 달아 주(注, tīka), 또 주를 주석하여 소(疏, bhaṣya), 이를 다시 주석을 달아 찬(讚, stotra)로 이어져 복주, 복복주의 전통이 인도철학의 하나의 특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러한 해석의 방법적 차이는 같은 경전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을 낳았고, 여러 분파를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이들 주석의 내용에 따라 육파의 각 학파가 좀 더 다양한 분파를 형성하기도 하고, 상호보완, 확충되어가며 발전되어가는 인도철학의 대표적인 양상을 이루고 있다.
인도철학 - 인도철학개론 - 2010. 종합시험 석사대비
[문제] 다음문제를 상술하시오.
1.인도철학의 전통적 2대분파 / 2.satkaryavāda / 3.주석적 연구방법 / 4.현대사회에서의 인도철학의 역할
[문제4] 4.현대사회에서의 인도철학의 역할
[답안4] 4.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과학문명 발달의 가속화로 인한 고도의 물질문명화라고 생각된다. 감관(indriya)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환경 속에서 육체와 정신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 깊이 반성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보다 편리하고 안락한 생활을 위해 물질을 얻고자하는 욕망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그 속에서 인간의 특성으로 그러한 욕망이 과부화되어 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실재론을 인정하든 아니든, 인도철학의 궁극적 공통점은 바로 인식적·유심적이라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객관적 이해 역시 나의 인식주관을 벗어나서는 불가능하며, 그렇기에 자아의 고통과 오류를 해소하였을 때만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얻을 수 있다.
Saṁkhya나 Vedānta의 실재론적 형이상학 역시 결국에는 관념의 창조 혹은 가탁을 통한 인식의 창조를 의미하며, Cārvāka와 같은 단멸론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학파들은 개인적 수행을 통해 해탈을 얻는다고 보는 것에 의견을 같이한다. 현대사회의 문제는 마치 머리가 너무나 무거워 걸을 수 없는 가분수처럼 물질문명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워서 정신이 설 곳이 없는 상태와 같다. 인도철학의 관점에서 현대사회의 문제를 진단하자면, 인간의 행복을 위한 제1원인인 정신이 병들어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편리함과 안락함이 정신적인 여유와 함께하지 못한다면, 반성 없고 발전적이며, 쾌락(감각적)주의적인 가치관을 형성하기 쉽다. (마치 인도의 Cārvāka와 유사한 입장이 될 것이다.) 미래에 대한 직관적 사유를 차단하고 감각을 벗어나 자신의 깊은 내면과 타인, 나아가 세계에 대한 탐구가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대사회의 많은 문제들에 있어, 인도철학의 역할은 정신과 육체(감각)를 조화할 수 있는 가치를 제공하는 것이다. 정신이 피폐해 질수록 자유로운 정신에 대한 갈망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심화되기 마련이다. 현대의 광적인 대중문화나 신종 종교집단들이 이를 증명해준다. 따라서 인도철학은 보다 대중적인 언어로 현대 사회에 다가가고 친구이자 의사와 같은 입장으로 사회에 관심을 가지면서, 사회전반의 문제와 대화하고 공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인도철학 - 인도철학개론
[문제] syāvāda(부정주의)
[답안] syāvāda(부정주의)는 자이나의 논리학, 지식론에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정하는 것이 없다는 것인데 그 내용상 자이나의 지식론을 상대주의라고 평가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syāvāda의 대표적인 예, 혹은 정형구로서 “어떤 면에서”라고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을 적용한 7종의 지식론은 어떤 지식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어떤 면에서”라는 단서가 붙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옳다 혹은 옳지 않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그르다 혹은 그르지 않다...는 식의 판단이다. 사실 “어떤 면에서”라는 말은 그 참과 거짓을 모두 허용하는 부사이다. 예를 들어 장님이 코끼리다리를 잡고 코끼리는 ‘기둥같다’라거나 귀를 만지고서 ‘넓고 크다’라고 한다면 일반논리학에서 그것은 그릇된 견해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라는 말이 붙으면 그것은 모두 참이다. 논쟁 속에서 이러한 부사는 자신의 의견을 모든 경우에 적용하지 않고 한정한다. 타인의 의견도 모두 옳고 나의 주장도 모두 성립한다. 비슷한 예로 중관의 공이나 진제의 논리를 들 수 있다. 모든 논쟁은 결국 진제적 차원에서 무의미한 것이다. ‘일체는 공이다’라는 진리로 귀결되어버리고 만다. 자이나의 syāvāda는 그들의 다원적인 실재론과도 관계가 있다. 일체의 것은 다양한 측면을 갖는다. 어떤 한 가지를 그것이 속한 본체와 동일시 할 수는 없다. 하나의 속성을 갖는 하나의 원자는 실재이며 무수히 많다고 인정된다. 쟁점 또한 마찬가지이다. 반대론자의 의견은 그 자신의 논리 내에서 성립되는 것이고 쟁점 또한 마찬가지이다. 반대론자의 의견은 그 자신의 논리 내에서 성립되는 것이고 인정되어야 한다. 무턱대고 자신의 의견을 전개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의견의 단서인“어떤 면”을 설득시켜야 한다. 결과적으로 논쟁상의 의견은 모두 가치 있고 참인 것이 된다. 논쟁상 서로 이해해야 할 부분은 상대자가 주장하는 “어떤 면”이며 그것에 대한 전환을 꾀할 때 인신공격이나 궤변이 아닌 이해와 설득이 가능할 것이다. 자이나의 syādvāda는 이상과 같이 서로의 다양한 견해를 인정하고 그 전제가 되는 바탕을 이해함으로써 화합과 회통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인도철학 - 인도철학개론 - 종합시험 석사
[문제A] 요가와 dhyāna의 공통점과 차이점.
[답안A-1] 인도철학의 모든 학파들은 단순히 사변적인 철학이 아닌 실천체계를 갖추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yoga는 공통적인 명상방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yoga는 ‘붙들어 매다’라는 뜻의 어근 √yuj에서 파생되었으며 이미 인더스문명에서 그 뿌리가 보이는 오래된 명상의 실천체계이고, 종종 dhyāna, 즉 선정과 비견되곤 한다. 둘의 공통점은 모두 정신을 오롯이 하는 명상의 실천이라는 점이며,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7.6.1에서는 dhyāna가 yoga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둘은 방법론적인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yoga가 정적, 구심적, 직선적인 인식론적 방법이라면 dhyāna는 동적 원심적인 존재론적 방법이라는 점에서 둘은 큰 차이를 보인다. yoga가 일직선상에서 일어나는 점진적인 것이라면 dhyāna는 동시 다발적이고 순간적이며 모든 방향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yoga와 dhyāna 모두 명실상부한 실천적이며, 공통적인 뿌리를 지니고 해탈(mokṣa, mukti)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문제A] 요가와 dhyāna의 공통점과 차이점.
[답안A-2] 인도철학의 여러 다양한 학파들은 궁극적인 목표(mokṣa,해탈)를 성취하는 실천방법이나 실천수단으로서 명상(冥想, yoga)이라는 요소를 어떠한 형태로든 가지고 있다. 어원적으로 보면 yoga가 선정(dhyāna)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고, 역사적으로는 yoga에서 dhyāna가 발전되어 나온 것이라고 볼 수 도 있다. yoga가 원초적 형태의 dhyāna를 내포한다고 하더라도, 그 발전시기가 후대인 만큼 dhyāna는 명상보다 한층 심화발전 된 요소를 가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A] 요가와 dhyāna의 공통점과 차이점.
[답안A-3] 요가와 dhyāna는 우선 고도의 정신 집중 상태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내적으로만 정신을 오롯이 하여 적정하고 고요한 상태에 머무는 인식론적 차원의 해탈인 요가와는 달리 dhyāna는 내적인 집중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외부로 다시 의식을 돌려 보다 입체적이며 존재론적 차원의 해탈이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미망사학파에서 강조하는 의식의 정확한 거행을 통해 내면으로 오롯이 집중, 성찰하여 자신이 본래 지닌 참된 진리에 다가서는 것, 또는 보시든 수행이든 일상생활의 잡다한 일, 어느 것에라도 정신을 집중하여 몰입하는 것이 요가라면 요가적 방법으로 검술을 연마한 사람이 바로 앞의 적을 향해 오롯이 칼을 겨누고 있더라도 실제로는 자신의 앞뒤전후의 모든 상황과 경우의 사태에 대비하여 철저히 깨어 있는 것이 dhyāna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A] 요가와 dhyāna의 공통점과 차이점.
[답안A-3] 요가는 그 어원인 √yuj로 ‘결합한다’혹은 ‘제어한다’는 의미를 지닌 인도 육파철학의 한 학파를 이룬 수행체계이다. 특히 바가바드기타의 한 사상의 축이 되기도 했던 세 가지 요가, 즉 jñāna-yoga지혜의 요가와 kārma-yoga행위의 요가 그리고 bhākti-yoga신애의 요가와 더불어 심신의 조복을 이루는 하타요가, 요가의 총괄서라 일겉는 rāja-yoga 그리고 mantra요가 등이 있다. 한편 ‘집중하다’라는 뜻을 가진 dhyāna는 후대에 의역과 음역을 합해 선나, 혹은 선으로 우리나라에서 불리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선의 특징상 기실 요가와의 비교는 상당히 어렵다. 불교의 수행체계를 대표하는 선과 육파철학의 한파를 담당하는 요가의 비교는 어쩌면 정통과 비정통의 비교가 될 수도 있다. 인도철학과 불교의 대표적인 학자 원의범에 의하면, 요가는 내성적이고 구심(求心)적이며, 직선적이며, 정적인 상태 집중을 행하는 인식체계이며 그 내성적이고 구심적인 축 위에서 동적인 원형의 확대해 나아가는 곧 전방위적인 인식체계가 선이다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선은 요가의 역사적 흐름 뒤에 발생된 부산물이다. 한국의 수많은 승려들은 간화선의 맥락 아래서 수많은 수행을 행해왔고 수많은 경험체계를 선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해왔다. 분명한 것은 지금도 한국의 전통선원에서 승려들의 좌법(asana)의 준비과정으로 요가가 실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선과 요가가 보완 발전 존재한다는 예일 것이다.
인도철학 - 인도철학개론 - 2010. 종합시험 석사대비
[문제] 인도철학개론/인도철학은 종교와 일치하는 철학이라고 말해진다. 그렇다면 인도철학을 한다고 말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인도철학적으로 인도철학을 하는 것이 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또 어떻게 철학일 수 있을 것인가
[답안] 오늘날 우리가 인도철학함에 있어 마주하게 되는 가장 큰 문제는 ‘정체성’이다. 실상 ‘인도’라는 한정수식어가 붙는 ‘철학’을 함에 있어, 이방인의 입장에서 이를 논한다는 것은 분명 어려움이 뒤따른다. 이미 1세기 이전부터 서구나 이웃 일본의 학자들이 놀라운 식견으로 ‘인도철학’을 고구해 나갔지만 이것은 일단의 한계점에 봉착하게 되었다. ‘인도철학 곧 종교이다.’라는 전제하에 접근을 하고 있으나, 이는 결국 ‘종교’라는 이름을 가진 ‘인도철학’을 함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히 인도의 철학사는 종교사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미 염두에 두고 있는 대전제가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의 시작은 분명 다른 곳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영국의 식민지배를 겪던 인도가 결국 당시의 제국주의적 학문성향에 의해 열리게 된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종교’란 ‘특수’이지 ‘보편’일 수는 없다. 비록 세계종교라 불리는 여러 종교가 존재하고는 있으나 그 각각의 본질은 시대와 장소, 그리고 상황에 따라 변모된다. 이는 지금 우리가 신앙으로 또 학문으로 접근하고 있는 불교만 보아도 극명히 드러나는 문제이다. 기원전 6세기에 창시된 철학으로서의 불교와 이미 2천여 년 이상이 지난 지금의 여기 한국에서의 불교는 분명히 다르다. 철학적 사연이나 주의는 시공을 달리하여도 그 맥이 이어지지만 종교로서의 면모는 지극히 다양한 변화를 겪어왔다. 이웃한 중국 일본의 불교와 우리의 불교는 비교해 볼 경우 이 사실은 여실히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에 기인할 것인가? 논자는 이를 신자의 측면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믿는다. 인간이라는 동일한 개체이지만 우리들 각각은 그 나름의 문화적 거리를 갖는다. 이 거리의 멀고 가까움은 분명 종교와 철학의 측면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일례로 인도철학을 하는 우리에게 있어 불교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종교가 철학과 동일시된다면 철학역시 문화적 거리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우리 이방인들이 하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문화를 기층에 둔 종교가 아닌 오직 종교라는 이름의 철학일 뿐이다. 앞서의 언급은 이를 염두에 둔 것이다. 사변적으로 스스로를 길들일지라도 이는 자기만족의 일종일 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인도철학을 하여야 하는가? 우선 시급한 것은 정체성의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나 철학이라는 타이틀에 얽매인 지금의 상황을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일환으로 문화적 사적 접근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철학이든 종교든 삶의 저변에서 성숙하는 것이고 그 삶의 질적 양적 변화에 분명히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현실과 괴리된 사변을 한갓 허울일 뿐이다. 제아무리 고도로 정교한 지적 틀을 수립해 본들 수용의 측면에서 외면당할 경우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역으로 수용의 측면을 무시한 사변의 재검토 역시 분명 무용한 것일 뿐이다. 이 경우 문화수용과 종교철학의 양측면을 동시에 뿐만 아니라 각각의 경우에서 나름의 가치를 갖는다. 철학은 종교와 같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문화와는 동전의 양면적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결국 어떠한 것이 철학함인지는 이상에서 분명히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 뭔 소리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고 논리적 비약이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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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인도철학개론/인도철학은 종교와 일치하는 철학이라고 말해진다. 그렇다면 인도철학을 한다고 말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인도철학적으로 인도철학을 하는 것이 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또 어떻게 철학일 수 있을 것인가?
[내 답안] 인도철학의 특징 중 하나는 종교적이라는 것에 있다. 인도철학은 인도 종교사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그렇기에 인도철학이라는 말을 붙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것이 과연 철학이라고 보아야할 대상인지에 대한 의문이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인도철학에 대해 “철학으로서의 정체성”에 회의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인도철학은 단순한 철학적 사변으로 흐를 수 있는 사고실험이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 고의 해결, 해탈의 성취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실용적인 학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 학문의 체계로서의 독특한 종교성와 철학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결국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나의 이 현실적 문제는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인가?, 세계의 창조와 우주의 저 깊은 존재의 사색 등을 거쳐 그러한 질문의 답들이 쌓이고 그것들이 종교적 세계관을 형성하며 동시에 철학적으로 타 학파와의 논쟁에서 견고한 논리의 성을 쌓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학파간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의 논리적 취약부분을 공격하고 그에 대응하는 논리를 개발하거나 상대방의 논리를 수용하여 받아들임으로써 보완 발전하는 변증법적 관계성이 각 학파간에 수백에서 몇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속되고 있다. 이것을 종교로만 이해할 수 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도철학은 인도철학만의 독특한 세계로 이해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예를 들어 사막이 없는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모래의 유사성을 이야기하며 바닷가의 모래와 같다고 설명할 수는 있지만 사막의 모래와 동일한 형성과정, 생태환경, 지질학적 구조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서구 그리스 유럽 중심의 철학적 체계, 변천과정, 학파형성 등을 말하며 인도철학과의 유사점을 확인 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기실 있는 그대로의 인도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인도철학이라는 범주 안에서 인도의 종교적, 철학적 사상의 변천사를 조망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한 접근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세계시원과 그 존재 및 존재 방식, 개아의 타당한 인식수단에 대한 연구, 올바른 해탈을 위한 체계 등을 철학이 아니라면 그 어떤 범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물론 서양에서 종교적 입장의 교부철학이라는 분야도 있다. 그러나 인도철학이라는 용어에는 인도에서 발생한 제 학파 내지 종교의 한 구성원으로서 종교를 신봉하는 관점에서 접하는 관점이 아닌 여러 학파의 학설을 비교대조 검토하는 입장을 내포하고 있다고도 본다. 그러한 부분이 교부철학과는 입장을 달리한다고 생각된다.
(↑내가 써도 역시 뭔 소리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고, 논리적 비약이 심하다. 문제가 그렇다보니 답이 그렇게 나갈 수밖에 없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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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1] 택일하여 논술하시오. 인도철학에서의 ‘철학’개념은 서양철학에서의 ‘철학’개념과 어떻게 다른가?
[답안1] 서양철학의 어원이 ‘지혜에 대한 사랑’이며, 이에 반하여 인도철학에서 철학의 개념으로 쓰이는 darśana의 어원을 살펴보면 √dṛṣ 보는 것을 뜻한다.
어원의 차이에서 느낄 수 있듯이 서양철학이 학문적인 개념에 가깝다면, 인도철학은 사물 그대로의 본성을 그대로 불 수 있는 통찰력을 지칭한다. 인도철학은 종교가 될 수 있고, 인도에서 종교는 철학이 될 수 있다. 학문적인 개념을 초월하여 일상생활에서도 그들의 삶에 영향을 주고, 삶의 지침이 될 수 있는 것이 인도의 철학이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철학의 개념은 그리스의 ‘서양철학’의 개념이 대부분이다. 철학의 개념이 관념적이며, 손에 잡을 수 없는 이론적인 논쟁과 대립이 있다. 물론 그들의 철학이 삶을 보다 윤택하고 지성을 풍부하게 하여, 생활과 사람을 풍요롭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서양철학과 인도철학의 특성을 살펴본다면 개념의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인도철학은 기본적으로 영성을 기본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들의 철학이 삶을 살아가는 네 가지의 목적인 다르마, 아르타, 까마, 모크샤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단지 말뿐인 필요 없는 철학으로 간주한다. 그만큼 실생활에 그 철학이 얼마나 유용하고,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를 관건으로 한다. 서양인들의 관점에서 인도철학에 대해 놀란 점은 철학자들이 그들이 철학을 함에 있어서 그 이론과 그들의 삶의 일치에의 노력을 감탄한다. 위대한 철학자는 위대한 성자인 것이다. 인도철학의 학파들이 주장하는 그들의 이론과 그들의 이론을 받침으로 실수행적인 수행법이나 행동서들이 존재한다. 인도철학의 샹키야의 예를 들면, 샹키야의 철학을 바탕으로 요가철학이라는 실수행적인 학파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파가 그러하듯이 그들의 철학을 형성시키고 발전시킴에 있어서 이론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뒷받침할 수 있으며 그것들을 고양시키는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수련이나 명상법들이 각기 존재하게 된다. 서양철학은 근본적으로 ‘신’이라는 최고의 상위개념을 지니고 그 상위개념을 전제로 철학을 전개시킨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도철학은 ‘신’이라는 개념을 인도철학의 최고의 개념인 브라흐만으로 대치시킨다고 할 때, 최고의 자유와 해탈은 브라흐만과 아트만을 합일시킴으로써 가능하다는 일원론을 따르는 경우가 샹카라의 일원론인데 인간을 하위개념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의 본성을 중시하고 표면적인 자아가 아니라, 영성을 통한 본질적인 자아를 찾는 인간을 중심개념에 두고 있다. 따라서 현세에서 행복할 수 있으며 현생에서 해탈할 수 있는 실용적인 철학을 하게 된다. 서양철학이 인간을 신의 하위개념에 두는 까닭에 인간의 고통을 원죄설에 기인하여 바라본다면 인도철학은 인간의 현생적인 고통은 근본적으로 삶은 고통이라는 염세적인 관점과, 그러한 고통은 인간의 무지라는 것에 원인을 둔다. 인간의 무지란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동일임을 알지 못하는 무지이며, 이러한 무지는 그것이 동일함을 알 때 해탈하게 되고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서양철학이 원죄설에 기인하여 종국에는 신의 부름을 신의 용서를 바란다면, 인도의 철학에서 구원은 본인 스스로의 노력으로 그러한 무지를 타파하고 깨닫는 것에 있다. 삶이 고통이라고 보는 염세적인 관점이지만,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인정하고 믿는 것은 오히려 낙관주의적이라 할 수 있으며, 현생에서의 삶을 고통 없이 가기 위한 철학들이 철학으로 인정받는 인도의 철학은 실용적이며 현실적이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서양철학의 개념이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풀기 위한 학문이라면, 인도의 철학은 삶에서 삶의 대상들을 본인의 편견이나 아상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게 하는 삶 자체에서의 지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인도철학 - 인도철학개론 - 2010. 종합시험 석사대비
[문제2]정통 인도철학에서 최고의 원전인 ‘베다’가 갖는 위상과 불교철학에서의 최고의 원전인 ‘아함경/니까야’가 갖는 위상이 어떤 점에서 차이를 보이는가.
인도철학 - 인도철학개론
[문제] 인도철학의 특징에 대해서 상술하시오.
[답안] 인도의 고대철학에서 현대철학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특징을 개괄적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철학과 종교의 일치이다.인도사상에 있어서는 종교의 이론이 철학이요, 철학의 실천이 곧 종교이다. 종교와 철학이 부즉불리(不卽不離)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도의 종교와 철학은 철학적인 종교이며, 종교적인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사상과 실천의 일치이다. 인도철학은 인간이 삶의 진실을 자각해 현실 속에서 삶의 질과 양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여 전인적 삶을 살게 한다.
셋째는 주석적 연구방법이다. 인도철학에서 진리(tattva)는 경전(sūtra) 안에 있고, 그것은 모든 것들의 가치 기준이 된다. 그러나 이들 철학적 경전들은 그 내용이 지극히 함축적이고 문구가 간결하여 그것만으로는 의의와 내용을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주해를 필요로 하였다. 이들 주석서들은 어떤 독자적 학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경전의 내용을 다시금 자세하게 확충시킨다든지, 좀 더 간단명료하게 요약하는 이른바 논(Śāstra), 소(Bhāṣya), 주(Tīkā), 찬(Stotra) 등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인도철학의 이론적 발전은 이러한 주석적 연구방법에 의해 이루어졌다. 말하자면 서양철학이 개인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던 것과는 달리 인도철학은 자기가 속한 학파를 중심으로 하여 학파의 경전이나 주석을 해석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발전하였다. 때문에 인도철학의 연구방법을 주석적 연구방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경전을 바르게 해석하고, 주를 올바르게 달며, 그것을 정확히 실천하는가 하는 것이 인도에서 철학하는 기본적 태도였던 것이다.
넷째는 진리탐구의 방법이 명상(yoga)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요가, 즉 명상은 아주 오랜 옛날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도의 모든 학파의 수행방법으로 보편화되어 있다.
다섯째는 절대자의 성격이 합법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점이다. 힌두교나 불교에서의 절대자는 모든 진리를 자기의 내면에서 깨달아 그 내용을 정형화시킨 다음, 절대자 자신도 항상 그 진리 안에 있으면서 그 진리의 지배를 받는다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실로 법(연기, pratītyasamutpāda)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느니라’고 한 것이 그 예이다. 또 법구경에서는 ‘출신이나 가문을 묻지 말라. 다만 그의 몸가짐이 어떠한가를 물어라. 사람은 출생이나 가문에 의하여 브라흐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진리와 다르마에 의해 브라흐만이 된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도철학의 특징을 가장 잘 체계화한 것이 아드바이따 베단따와 대승불교, 그리고 간디의 철학이다.
인도철학 - 인도철학개론 - 2010. 종합시험 석사대비
[문제] 인도철학에서의 ‘철학’개념은 서양철학에서의 ‘철학’개념과 어떻게 다른가?
[답안] 서양철학에서의 ‘철학’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어지는 ‘philosophy'는 “사랑한다”라는 의미의 “philo”와 “지혜”라는 의미의 “sophy”의 합성어이다. 이는 “지혜를 사랑한다”라는 의미이다. 인도철학에서는 서양철학에서의 “철학”이라는 개념에 상당하는 적당한 말은 없다. 가장 근접한 말로 'darśana'와 ‘ānvikśīki’를 들 수 있다. ‘darśana’는 어원적으로 ‘drś-보다’에서 파생된 명사로 인생과 그 기반을 이루는 세계에 대한 통찰을 의미한다. ‘ānvīkśiki’는 대상에 대한 개념과 그 개념을 논증하는 논증식이란 의미도 포함되며 서양철학에서의 ‘세계관’에 해당한다. 서양철학은 이성(理性)에 의해 감각으로부터 생성된 개념들을 사유하고, 분류하고, 지식에 대한 즐거움을 충족시키는 데 반해, 인도 철학에서의 ‘철학’이라는 의미는 인생과 그 기반을 이루는 세계에 대한 단순한 지식의 즐거움이 아니라 삶과 결부시켜 현실에서의 불만족스러운 삶을 극복하는 실천적인 행위로까지 나타났다. 이것은 종교와 철학이 분리된 서양인들의 시각으로 보면 어쩌면 인도에서는 ‘철학’이란 없고 단순한 미신이나 종교로밖에 취급될 수 없을지 모르나, 철학이 곧 종교요, 종교가 곧 철학인 인도인들에게 있어 철학이란 곧 현실을 바로 보고(prajña), 이 바로 본 것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극복하고 궁극적인 해탈로 나아가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인도철학의 특징은, 유물론을 제외한 모든 학파가 인생을 苦로 보며, 그 궁극적 목적을 해탈(mokṣa, nirvaṇa)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실천적인 방법으로 어느 정도의 요가 수행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해탈은 먼 미래나 내세의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도철학이 현실을 부정하거나 도피하는 것은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다.
인도철학 - 인도철학개론 - 2010. 종합시험 석사대비
[문제] 베다/베다는 내용적으로 보아서 크게 제사부(karma-kaṇḍa)와 지식부(jñāna-kaṇḍa)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이들 두 부분이 베다 이후의 인도철학사에서는 어떻게 전개되어 갔던 것인가?
[답안] karma-kaṇḍa와 jñāna-kaṇḍa로 구분되는 veda는 브라흐마나시기와 우파니샤드 시기를 거치면서 그 위상과 내용면에서 변모를 보이게 된다. 양자 중 시기적으로 빨리 성립되었던 ‘제사부’의 경우, 우선 ‘karma’의 의미상에서 변화가 나타난다. veda시기와 브라흐마나 시기에 ‘제사와 관련된 행위, 즉, 제식’을 의미하였던 이 말이 이후 ‘보편적인 개인의 행위’로 사용되기에 이른다. 이것은 veda, 브라흐마나 양시기에 중대하게 여겨졌던, ‘제식’, 즉 물질적 행위가 우파니샤드의 영향 하에서 점차 그 위상이 낮아져 결국 후반의 지식부에 역전되어 ‘정신적 측면’의 우세라는 결과가 도출된 것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적절한 제사의식을 통해 원하는 모든 것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제사적 신비주의가 물질 이외의 다른 것으로도 그 공능을 대신할 수 있다는 사고 체계의 발달로 인하여 ‘단순 제식행위’ 보다는 ‘올바른 행위’라는 보다 고차원적인 체계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 제사부는 이후 미망사에 의해서 계승되지만 그 위상은 이것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jñāna-kaṇḍa와의 관련 속에서 근대에 이르러 재조명되기 때문이다. 한편 대우주와 소우주(我)를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상승하게 된 ‘지식부’는 샹카라의 불이일원론 베단타로 계승된다. 이 시기에 이르면 제사부, 지식부 양자는 샹카라에 의해 이제설로 재배치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정신적 측면의 강조에 의해 더욱 중요시 된 지식부는 이처럼 샹카라에 힘입어 확고한 승의의 진리로서 자리하게 된다. 물론 Ātman과 Brahma과 같은 중요한 술어들의 관계적 측면도 여기에 한 몫을 하였다. 이렇듯 뒤바뀐 위상은 또한 Gīta에서도 발견된다. 이에 따르면 제사 자체의 중요성은 여전히 인정되지만 jñāna에 의한 제사가 더 우월한 것임이 분명해진다. 하지만 Gita에서는 이 두 kaṇḍa가 서로 절충되는 듯 보여진다. 지식에 의한 이라는 술어에서 보듯이 제상에의 봉납문 자체만 바뀌어 있을 뿐이다. 바로 이점이 후대의 사상가들에 의해 karma-yoga로서 부각될 수 있었던 한 잔초일 것이다. 독립과 국민계몽이라는 목표에서 고뇌하던 그들에게 있어서 물질적 대상성을 탈피한 이 구절들은 동일한 맥락 속에서 적극적으로 개변시킬 수 있는 한 근거를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부칭을 보이며 전개되어 간 듯해 보이는 양자는 실상 일정한 관계 속에서 인도철학사 저변에 흐르고 있었다. 제사가 곧 범이며 아가 곧 범. 또한 지혜가 곧 범지를 의미하는 이러한 상등관계는 동일 관념의 발전적 재해석 과정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개론 끝 -
-초기불교 시작-
인도철학 - 초기불교 - 2010. 종합시험 석사대비
[문제] 연기의 정의와 십이연기설을 상술하여라.
[답안]
연기(pratītyasamutpāda, 緣起)라고 하는 것은 ‘연하여 일어난다.’는 뜻으로 불교의 핵심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란 보편적 법칙으로써 dhamma라고도 한다. 연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표현들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此生故彼生)”,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此無故彼無)”,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此滅故彼滅)”,
“연기의 법은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항상 상주하는 법으로써 시공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부처를 본다.”이와 같은 표현들은 연기가 불교사상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모든 것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며, 불이(不二)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인도 정통철학파(āstika)에서는 궁극적이고 유일무이한 근원인 범(梵, Brahman)으로부터 아(我, ātman)등의 일체가 전개된다고 본다. 그런데 불교사상에서는 그러한 존재의 근본적인 그 무엇도 별도로 없으며 모든 것은 상호관계 속에서 존재한다고 보고 있는데 그 사상의 핵심이 바로 연기인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무아설과 공사상으로 전개되는 단초가 된다.
십이연기설 혹은 십이지연기설은 연기설이 정형화된 패턴의 완성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초기경전에는 2지, 3지, 4지, 5지, 6지, 7지, 8지, 9지, 10지, 11지, 12지 등 다양한 연기설이 등장한다. ‘괴로움’과 ‘감각접촉’이라는 두 개의 연기로 구성된 2지 연기도 등장한다. 다양한 패턴의 연기는 각각의 상황에 적합한 대상들로 이해할 수 도 있고, 초기경전의 화자와 청자간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구체화되고 상술됨으로써 12지의 정형화된 체계를 갖추어 가게 되었다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십이연기설은 무명에 연하여 행이 있고, 행에 연하여 식이 있고, 식에 연하여 명색이 있고 명색에 연하여 육처가 있고, 육처에 연하여 촉이 있고, 촉에 연하여 수가 있고, 수에 연하여 애가 있고, 애에 연하여 취가 있고, 취에 연하여 유가 있고, 유에 연하여 생이 있고, 생에 연하여 노사가 있다라고 하며, 이렇게 전개되는 연기를 유전연기(流轉緣起)라고 하여 끊임없는 고의 수레바퀴에서 윤회함을 설명하고 있다. 반대로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므로 식이 멸하는 식으로 설명이 되는 것을 환멸연기(還滅緣起)라고 하며, 고로부터의 해탈을 설명하고 있다.
(1)여기서 무명(無明, avidyā)이란 무지한 것이고, 경전에 의하면 사성제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며, 보편적 진리인 연기, 무상, 무아 등을 모른다는 뜻이다. (2)행(行, saṃskāra)이란 ‘해온 것들(kāra)이 쌓인다(saṃ)’는 뜻이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해온 것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업(業: 카르마)을 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잠재적 형성력, 잠세력이라는 의미이며, ‘만들어지는 것(有爲)을 만들어내는 힘’을 말한다. 보통 무명 때문에 신, 구, 의 삼업이 생기며, 이들에 따른 행위가 축적되어 인격내용이 결정되는 것이고, 이러한 행위를 여력으로 하는 습관력이 바로 행이다. (3)식(識, vijñāna)은 ‘구분해서(vi-) 안다(jna)’는 뜻이다. 감수 또는 의식의 정신적 과정일 뿐만 아니라, 인격성의 구성요소이다. 연기설에 있어서 식의 중요성은, 행은 식의 원인으로서 식 그 자체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식이 모체의 자궁 속으로 진입함’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4)명색(名色, nāma-rūpa)은 '물질(rūpa)에 대한 정신(nāma)의 작용'이다. ‘식이 모체의 자궁 속으로 들어간 뒤에 거기에 연결되는육체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유기체’이다. 명과 색이라는 표현은 그것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들에 있어서 현상적 인격성을 규정하는 것이 되었다. 현상적 인격성을 오온이라는 구성요소들이라고 규정하고 그 오온에 한정하기 위한 사상은 이미 있어 왔다. 색은 색온과 상응하고 명은 나머지 수온, 상온, 그리고 행온의 세 가지와 동일시되었다. 여기서 식온은 분리된다. (5)다음 육입/육처(六入/六處, ṣaḍāyatana)은 안이비설신의의 여섯 가지 감각 기관들이다. (6)촉(觸, sparśa)은 접촉이다. 감각기관과 대상과 감각작용의 접촉(근경식의 삼사화합)을 말한다. (7)수(受, vedanā)는 접촉하였을때의 느낌이다. 대상의 인상을 받고 생긴 고․락․사의 느낌이며 이 감각적인 자극에 의해 애가 발동하는 것이다. (8)애(愛, tṛṣṇā)는 갈증, 갈애라고도 번역된다. 목마른 사람이 오로지 물을 찾아 멈추지 않는 것처럼, 항상 능동적으로 만족을 구하는 인간의 본능적 맹목적 충동적 욕망이다. (9)취(取, upādāna)는 ‘연료가 불탄다.’, 집착을 의미하며, 강력한 취사선택이다. 인간의 미망은 생존에 대한 집착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경전에서는 욕취, 견취, 계금취, 아어취 등이 있다고 했으며, 집지 선택의 작용을 하는 집착하는 마음이다. (10)유(有, bhava)는 태어나고자 하는 의지이다. (11)생(生, jāti)이란 ‘태어남’이다. 이것으로 인해서 (12) 노사(老死, jarā-maraṇa)가 생기는 것이다.
식은 안이비설신의의 육식이고, 명색은 색성향미촉법의 육경이라 하고, 육처는 육입이라고 하여 육근이라고도 한다. 이것을 모두 합하여 18계라고 하며, 6근과 6경을 합해서 12처라고 하며, 무명은 지혜가 없다는 말로서, 연기에 대한 지혜 삼법인, 사법인에 대한 지혜가 없다는 말이며, 십이 단계의 생기하는 업을 수행을 해서 벗어나지 못하면 생사윤회의 고리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함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행이라고 하는 것은 무명에 의하여 일어나는 언-의-신의 활동과 거기서 윤회하는 업을 설명하는 것이다. 촉이라고 하는 것은 육근과 육경과 육식이 접촉하는 것을 말하며, 수라는 것은 그로 인한 고락 등의 감수작용을 말하며, 애라고 하는 것은 갈애를 말하며, 취라고 하는 것은 강한 취사선택의 행위이다. 유라고 하는 것은 앞의 모든 부분들이 연결되어 일어나는 종합적인 업의 존재이며, 여기서 생이 나오고 노사가 나오는 것이며, 여기서 노사라고 하는 것은 노사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로 인한 고뇌를 말하는 것이다. 무명이 연기의 근본적 원인이라면 애는 직접적 원인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인도철학 - 초기불교 - 종합시험
[문제] 초기불교의 특징, 불교의 無我說을 우파니샤드의 아트만(我)과 대비해서 논하시오.
[답안] 석가모니 붓다가 생존할 당시 사상계는 크게 두 가지 그룹 즉, 정통 바라문과 이들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사문(沙門, sramana)으로 나뉘어 있었다. 붓다는 결국 이들 양자의 사상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특유의 연기·중도설을 제창하였다. 그렇다면 불교의 무아설과 우파니샤드의 아트만 사상은 어떤 점에서 대비되는가?
먼저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사상에 대해서 살펴보자. 범이란 세계 즉, 인간과 자연의 이면에 존재하는 하나의 절대적 동일성인 최고의 브라흐만을 가리킨다. 그것은 우주의 근본이며 보편적인 원리로서 모든 자연에 내재해 있다. 브라흐만은 상일·주재성을 갖는 실체이다. 아트만은 호흡하다(at)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 생기, 신체를 뜻하는데, 점차 자아,영혼을 의미하게 되고 마침내 가장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자기 본질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처럼 우주의 근원인 동시에 보편적 원리로서의 브리흐만과 인간 내면의 핵심인 아트만은 동일하다는 것이 범아일여 사상이다. 우파니샤드 사상가들은 이같은 보편적 자아와 개체적 자아가 동일하다는 존재의 통일성을 체득하기 위해 스승의 지도를 받고 요가 등의 수련을 병행하기도 하였다.
불교는 초기 경전인 아함경에 정형구로 많이 나타나는 무상,고,무아라든가 제법무아에서 보이듯이 無我(anātman)설을 천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무아의 아는 물론 우파니샤드에서의 아트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브라흐만이나 아트만의 상일주재성(常一主宰性)을 비판한다. 불교는 영원하고 불멸하는 존재인 실체 또는 본체는 없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제법무아란 ‘모든 존재에는 고정 불변하는 실체적인 아가 없다’는 뜻도 된다. 모든 것은 의존되어 발생한다는 연기사상에서 보면 모든 것은 생ㆍ주ㆍ이ㆍ멸의 과정에 있으며 독립되어 상주, 실재하는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을 구성요소로 분류한 오온 가운데서나 일체를 뜻하는 12처와 18계어느 곳에서도 아트만은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붓다는 경전에서 아트만을 진짜로 본 사람이 있는지 되묻고 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살펴볼 것은 anātman을 非我로 번역하여, 그것은 ‘실체적인 아가 아니다’라는 뜻으로 보면 다른 얘기를 할 수 있게 된다. 오온과 관련하여 ‘색은 내가 아니다. 수는...상은...행은...식은 내가 아니다’라고 하는 가르침이 아함경과 팔리 니카야에는 많이 나오는데 이는 ‘실체적인 아가 없다’는 뜻과는 사뭇 다르다. 실제로 초기의 무아설에 의하면 어떤 것을 ‘나의 것’ ‘나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관념을 배척한다. 아집을 배척하는 뜻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나카무라 하지메는 <원시불교-그 사상과 생활>에서 ‘아트만이 아닌 것을 아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배척되고 있으니 아트만을 아트만이라고 보는 일은 올바른 일이 아니겠는가’ 라고 서술하고 있다. 나카무라는 그러면서 불교는 자기를 추구하는 일이 권장된다고 주장한다. 율장에 보면, 붓다는 노는 데 빠져 있는 청년들에게 ‘여자를 찾는 것보다 자기(아트만)를 찾는 것’을 권장하고 그들을 출가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카무라가 얘기하듯 붓다 자신이 그런 아트만을 찾으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붓다가 상일ㆍ주재성을 가진 아트만을 인정하였다면 인도 정통사상과 무슨 차별성이 있을 수 있겠는가? 분명히 붓다는 정통 브라만 사상에 반대하는 사문 계열에 속했으며, 따라서 브라흐만인 아트만의 존재를 부정하는 측에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주의할 것은 불교가 무아라고는 하지만 현상적인 존재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부정하는 것은 ‘고정불변하는 실체적인 아’일 뿐이다. 붓다가 입멸하기 직전 말씀한 ‘자귀의 법귀의’(attha-dīpa dhamma-dīpa)에서도 보이듯이 이는 주체성을 강조한 말씀이다. 무한책임성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이니 그 어떤 외부의 창조주에게 자신의 운명을 의지할 필요는 없다. 자기는 자기의 주인이 되어 자기를 구제해야 한다. 그러한 자기는 이기적 욕망의 주체가 아닌 지혜와 자비의 주체란 점에서 불교의 무아는 연기. 중도적 삶을 이끌어 나가는 창의적이고 도덕적인 주체성으로 다가온다. 이와 같이 볼 때 불교의 무아는 형이상학적실재성에 갇힌 우파니샤드의 아트만과는 전혀 다르다고 하겠다.
인도철학 - 초기불교 - 2010. 종합시험 석사대비
[문제] 초기불교의 업보설이 회통으로의 사제설을 상술하여라
[답안] 초기불교의 업보설은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를 기본 내용으로 하는 것으로써 업보설은 인과응보나 업설연기를 부정하는 외도들의 사상에 경각을 주면서, veda나 우빠니샤드를 비롯한 고대 인도에 있던 사상들을 받아들이면서 전개되어 나온 것 같다. 이 업보설은 연기설과 더불어 사제설로 발전되는데 사제설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현실세계의 현상태-과
집-현실세계의 원인이유-인
멸도-이상세계-과
도-이상세계의 원인이유-인
고의 원인이 집착에 있고, 멸하는 방법이 도제인 8정도라고 볼 수 있다. 8정도는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으로써 계정혜 삼학과도 연결된다. 정견 정사는 혜에 해당되고 정어 정업 정명은 계에 해당되며 정념 정정은 정에 해당된다. 그리고 정정진은 모두에 다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초기불교의 업보설은 선악에 대한 인과에서 사제설로 발전하여 업과 연기의 관계를 인과 과의 연쇄적 상황으로 설명하고 있다. 12연기법이 자내증의 법이며 정론에 치우친다면 사제는 가르치기 위한 실천적인 면모를 지닌다고 볼 수 있겠다. 이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과도 같은 것이다. 병의 원인을 찾고 방법을 찾아서 병을 치료하는 의사의 치료방법과도 같은 것이어서 석존께서는 중생의 병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치료하려고 하셨던 것이다.
* 초기불교 업보설 : 선인선과 악인악과/ 선인락과 악인고과/ 인과응보 인과가 없다는 류의 사상가들에 대한 견제 * "업보설 => 연기설 => 사성제" 발전 * 고(苦聖諦) : 현실의 상태(결과) 집(集聖諦) : 현실의 이유(원인) : 무명, 갈애, 탐진치 3독심 멸(滅聖諦) : 이상의 결과(결과) 도(道聖諦) : 이상의 이유(원인) - 8정도 *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 / 계정혜 3학 * 계 : 정어, 정업, 정명 + 정정진 정 : 정념, 정정 + 정정진 혜 : 정견, 정사유 + 정정진 正見 : 바르게 보고 (혜) 正思惟 : 바르게 생각하고 (혜) 正語 : 바르게 말하고 (계) 正業 : 바르게 행동하고 (계) 正命 : 바른 수단으로 목숨을 유지하고 (계) 正精進 : 바르게 노력하고 (계-정-혜) 正念 : 바른 신념을 가지며 (정) 正定 : 바르게 마음을 안정시키는 (정) * 12연기법 : 자내증의 법 사성제 : 실천적 면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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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반야의 지혜와 무아의 실천을 상술하여라
[답안1] 반야의 지혜란 다름 아닌 바로 연기와 사제에 대한 깨달음으로써 반야의 지혜가 있으면 바로 무명이 멸하고 모든 것이 다 멸하게 되어 해탈을 이루게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아란 방법인 가운데 제법무아의 극복과 관계되며 오온이 모두 공임을 아는 데서 무아행의 실천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오온이라고 하는 것은 색수상행식으로서 색이란 물질로서의 육신이요 수란 여기서 오는 고락 등의 감수작용이며, 상이란 심의 작용이며, 행이란 정신, 의지의 작용이며, 식이란 인식작용으로서, 이 오온이 ‘나’가 아니고 ‘내 것’이 아니고 ‘내가 존재하는 바탕’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서 독립적으로 영원불멸 항존하는 실체인 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집착할 만한 아가 없다는 것이 무아설의 근본 취지이다. 이렇게 무아행은 반야의 지혜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제행무상과 제법무아 열반적정, 일체개고의 사법인과 더불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기에 의하여 철저한 무아의 실천으로 말미암아 반야의 지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답안2] ‘반야의 지혜’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불교의‘마하반야바라밀’이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은 mahā-prajñā-pāramitā를 소리나는 대로 음사한 것이다. 여기서 mahā는 ‘크다’, ‘ 뛰어나다’는 뜻을 가지며, prajñā는 ‘지혜’, pāramitā는 ‘완성’의 뜻을 가진 산스크리트어이다. 마하반야바라밀은 ‘위대한 지혜의 완성’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반야’는 prajñā의 음사라는 것이다. 뜻은 지혜이다. 인도불교사의 역사와 맥락을 제외한다면 ‘지혜의 지혜’정도가 되므로 동어반복이라고 볼 수 도 있다. 마치‘역전 앞’과 같은 동어의 반복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도 당시의 불교사와 문화의 전파 속에서 차지하는 가치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지혜 중에서도 인도불교사에서 전하는 연기설, 6근, 6경, 6식, 오온, 12처, 18계, 사성제 등을 깨달아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지혜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불교에서의 지혜는 연기에 근거한다. 불교 경전 상에는 ‘연기를 보는 자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 연기를 본다.’, ‘연기를 보는 자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부처를 본다.’, ‘연기의 법은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항상 상주하는 법으로써 시공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다.’와 같은 표현이 등장하고 있다. 불교의 가장 근간이되는 법칙이 바로 연기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연기는 어떠한 존재가 항존불변하여 변함없다는 것을 부정한다. 항존불변하여 변함없는 그 어떤 것에 대해 인도철학계에서는 유파(āstika)에서는 세계 존재의 근원인 브라흐마(brāhma)를 상정하며, 개아로서의 아트만(ātman)과 브라흐마의 합일을 이루는 것이 해탈(mokṣa)을 성취할 수 있는 길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계에서 말하는 반야의 지혜는 그러한 불변의 ātman은 무지의 소산이며 고통을 야기하는 근간이 된다.
12연기설(saḍāyatana)에서는 .... 이와 같이 무명이 멸함으로써 무아의 경지를 깨달게 되는 것이다. ‘무아의 실천’에 대해서는 2가지 의미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1) 이미 무아가 참다운 진리고 한다면 무아라고 하는 가치는 실천하지 않아도 이미 실천되고 있는 것이고 더하거나 뺄 것이 없이 시행되고 있는 것이므로 또 다시 실천하고자 애쓸 필요가 없는 것이 된다. 그 어떤 존재도 무아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난 상태에 놓여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2) 그러나 본래적인 차원, 승의제(勝義諦)에서 일체만유가 언제나 무아에서 벗어난 바가 없다고 하더라도 일반 중생들의 입장에서는 무아를 깨달기 이전까지는 ‘유아(有我)’적인 사고에 입각하여 세계와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될 것이며 그에 따라 진리에 어긋난 가치관이 형성되고 고통을 겪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아직 무아를 깨닫기 이전이야말로 오히려 무아의 실천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아직 세상을 보는 눈, 견해, 견처는 유아적인 상태에 놓여있지만 무아의 차원에서 현재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속제의 상태이지만 제일의제의 가치를 통해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과 같다. 제행무상과 제법무아 열반적정, 일체개고의 사법인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나를 둘러싼 고통의 문제를 재인식하는 것이 무아의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인도철학 - 초기불교 - 2010. 종합시험 석사대비
[문제] 초기불교의 특징을 상술하여라
[답안] 초기불교는 육사외도를 비롯한 잡다한 사상들이 난무하던 때에 정통 바라문이 갖고 있던 사상 중의 하나인 범아일여의 사상에서 말하는 ātman의 개념에 대한 반대의 견해로 시작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제법무아로 설명되는 무아설이며 항존하는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의설로 불리는 신의 의지대로 모든 세계가 결정되고 존재한다라고 하는 설과 숙명에 의해 즉, 과거세에 이미 지은 숙세의 업에 의해 다 결정되어 있다라는 설, 적취설이라고 하는 여러 원소들의 결합에 의해 세계가 형성되었다라고 하는 등의 여러 사상들이 공통적으로 업을 부정한다든가 연기의 이법을 몰랐으므로 정통 바라문과 외도들의 사상에 경각을 불러일으키면서 당시의 여러 수행자들의 사상이나 철학적 사유에 일침을 놓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시 성행하던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에 치중하도록 하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도 일조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인도의 대부분의 사상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를 고를 전제로 하고 그로부터의 해설을 설정한 부분에서는 같다고 할 수 있으나 형이상학적 사변에 대해서는 독화살의 비유를 통해서 부정하고 있음이 보여진다. 독화살을 맞은 사람이 빨리 치료를 하려고 생각하지 않고 독화살의 원인을 분석하려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며 설령 형이상학적으로 이치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로부터의 해탈에)고 하였다. 초기불교의 특징은 형이상학을 부정하고 연기법을 통해서 기존의 사상을 부정, 정리했다는 것과 무아설의 기본이 되는 제법무아의 사상으로 기존의 ātman 사상에 대해서 anātman의 체계를 세웠다는 것이다.
인도철학 - 초기불교
[문제1] 緣起說을 바탕으로 초기불교의 無我說에 관해 논하시오.
[답안1-1] 석존의 깨달음은 결국 緣起의 자각이 그 중심이 된다. 사성제든 8정도든 무상ㆍ무아든 초기불교 교설들은 모두 緣起說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는 것이며, 緣起의 의미를 아는 것이 초기불교의 사상 그 자체를 아는 것이다. 초기불교의 사상은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그 모든 교설은 바로 緣起說에 근거하고 있다.
緣起(pratītyasamutpāda)라고 하는 것은 ‘~을 緣하여 일어난다’고 하는 것으로, 일체의 사물은 다양한 원인과 조건을 緣하여 성립한다고 하는 말이다. 연기법에 의하면 세계 속의 모든 존재는 전적으로 상호의존적인 것이며, 고정불변하고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각각의 존재를 발생시키는 각 요소들은 조건에 의해서 생기고, 그것은 동시에 다른 요소들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緣起法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떤 고정불변적 실체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 변화, 소멸 중에 있을 뿐이다. 초기불교에서 緣起의 일반적인 정의로서 보통 다음 글귀를 들 수 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
(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주
‘~을 緣하여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과 서로 관계하여 존재한다는 것으로, 모든 것은 그 자체로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변하지 않고 항상 존재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초기불교에 있어서 無我說은 불교를 다른 철학ㆍ종교와 구별시키는, 불교의 근본적인 입장을 나타내는 교설로서, 연기설에 의해 설명되어지고 있다. 모든 것의 존재는 연기된 것이기 때문에 일체의 존재는 항상 生하고 滅하는 것으로, 어떠한 실체적이고 고정적이며 영원불변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모든 현상이 상의상존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고정불변하고 영원한 고립적인 실체는 없다고 부정하는 것이 무아설이다.
無我라고 하는 말의 원어는 팔리어로 보통 anatta(아낫타)라고 쓰는데, 이는 ‘我가 아닌 것’이라고 하는 의미와 ‘我를 갖지 않은 것’이라고 하는 의미의 말이다. 또 넓게는 불교 전반에 걸쳐 ‘어떤 사물이 실체적 자아를 갖지 않은 것’이라든지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며, 또는 ‘나의 것이 아닌 것’이 無我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불교를 신봉하고 실제로 수행하는 자에 대하여 실천상의 이유로서 無我說을 설하고 있다. 숫타니파타에서 나타나고 있는 無我說은 무엇보다 먼저 ‘나의 것이다’, ‘자신의 소유이다’라고 하는 생각에 대한 부정이다. 무엇인가를 나의 것이라 하고 자신에게 속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에 대한 망령된 집착이라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자신의 것이다’라고 보는 것은 일체의 사실을 잘못 파악하는 것으로, 진실로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것’이라고 하는 아집을 버리는 것은 所得ㆍ所有의 관념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나의 것’이라고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그것은 모든 것의 존재가 緣起된 것이기 때문에, 일체의 존재는 항상 生하고 滅하는 것으로, 자신의 소유라 해도 영원히 자신의 것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인도철학 - 초기불교
[문제1] 緣起說을 바탕으로 초기불교의 無我說에 관해 논하시오.
[답안1-2] 연기(pratītyasamutpāda)는 ‘연하여 일어나다’, 즉 어떤 조건들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을 가리킨다. 연기법에 의하면 세계 속의 모든 존재는 전적으로 상호의존적인 것이어서, 고정불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각각의 존재를 발생시키는 각 요소들은 조건에 의해서 생기고, 그것은 동시에 다른 요소들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연기법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떤 불변적 실체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 변화, 소멸 중에 있을 뿐이다. 초기불교의 연기설을 설명하는 간결한 문장은,상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
(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존재는 전적으로 상대적이고 상호의존적으로 조건지워져 있기 때문에 고정불변적이고 실체적인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존재는 무아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연기설은 무아적인 측면도 있지만 윤회설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여 모순되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어떻게 무아이면서 윤회할 수 있는가는 불교철학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큰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 초기 경전의 불꽃의 비유를 보면 이러한 문제에 대한 붓다의 견해를 알 수 있다. 매 순간의 불꽃은 다른 불꽃이지만 선행하는 조건에 의지하여 끊어지지 않는 연속성을 가지게 된다. 즉 인간 속의 동일한 실체의 연속성은 부정할지라도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상태의 연속성은 부정하지 않는다. 윤회란 다른 육체 속에 동일한 영혼이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현생과 내생의 인과 관계일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기에 윤리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오온이론 역시 우리의 존재가 여러 가지 요소들의 결합체로서 불변적인 자아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지하고 있다. 오온이란 인간과 사물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존재요소로서 색(육체), 수(감수 작용, 느낌), 상(지각 작용), 행(의지 작용), 식(의식 작용)을 뜻한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등의 실체적 본질성에 대한 물음을 오온이론으로 접근할 경우에는 부정적인 답을 얻을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는 그 어떤 부분이나 부분들의 총합도 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온이론은 비아설(非我說)이라는 형태로 무아설에 접근해 가고 있다. 물론 오온이론은 현상적 존재분석에 충실한 이론이고, 따라서 그 현상존재들의 배후와 근거에 어떤 초월적 계기가 존재하는 지에 대해서는 무기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나선비구경」에서 밀린다왕은 나가세나에게 ‘나가세나란 무엇인가’, 즉 나가세나의 인격적 정체성에 대해 묻고 있다. 밀린다왕은 나가세나의 인격 주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신체의 구성부분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오온이론을 통한 존재 분석을 시도하게 되고, 그때마다 나가세나의 부정적인 대답에 직면하게 된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얻은 공통된 결과는 여러 부분들에 대한 이름들과 공통적인 개념, 그리고 일상적인 표현으로부터 어떤 특정한 존재자에 대한 이름이 형성되지만 실제로 그것에 대한 인격적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오온이론은 어떤 것의 존재가 실제로 무수한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영원불변하는 실체 존재와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인도철학 - 초기불교
[문제] 무아설(無我設)
[답안]
불교의 출발점은 지금 당면하고 있는 고(苦)에 대한 자각이다. 어떻게 고가 발생하며 어떻게 고를 끝낼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다. 고는 나와 타를 분리시키는 자아의식에서 발생하는데 그러한 의식의 분열이 곧 고이다. 자아의식이 일어나는 배후에 영원불변의 실체가 있다고 여긴다.육신의 죽음과 상관없이 상주한다는 그릇된 견해, 즉 아견이 욕망과 집착을 일으켜 고를 초래한다. 이렇듯 고를 야기하는 아견을 부정한 것이 無我이다. 我에 대한 그릇된 집착과 견해는 모든 분쟁과 문제의 근원이 되며, 이 我라는 생각은 오온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오온설은 색수상행식 다섯요소로 구분하여 파악하고 관찰하여 자아라는 관념을 논파한다. 我見은 아를 오온과 동일시하거나 관련지어 생각하는 대표적인 邪見이다. 그러나 오온을 분석해 보면 固定不變性이나 常一主宰性을 가진 我는 없다. 오온 그 자체는 생로병사하는 無常法이다. 색수상행식의 오온의 결합에 집착함으로써 자아관념이 형성된다. 오온을 여실히 관찰(正見)하지 못하고 집착하여 고에 빠진다. 각각이 무상한 오온의 참된 속성을 이해하여 고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해야 한다. 고의 원인이 되는 아견을 바로 보게 하는 것이 무아의 가르침을 체득하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이 무아설은 연기설과 오온설등에 의해 설명되어지고 있다. 일체의 현상은 인연에 의해서 생멸하는 것으로 그 중에 어떠한 실체적이고 고정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연기관에 근거하여 무아를 설명 할 수 있다. 결국 모든 현상이 상의상존의 관계에 있어 고립적이고 고정적인 실체는 없다고 부정하는 것이 무아설이다. 연기설은 일체의 존재 현상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는데, 모든 현상은 서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나타나기도 하고 맺은 관계가 변화함으로써 사라지기도 한다. 초기불교의 연기설을 설명하는 간결한 문장이 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여기서 이것과 저것은 서로 별개의 존재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고는 자신의 본질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인간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는 끊임없이 변한다. 부파불교시대에 저술된 나선비구경에는 수레의 비유가 논의되고 있다. 수레의 제 부분이 집합하여 수레가 성립하며, 수레를 구성하고 있는 제 부분과 관계하지 않는 수레 그 자체는 어디에도 인정될 수 없는 것처럼 인간도 그와 같이 32개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고정불변의 실체는 어디에서도 인정할 수 없다.
12연기를 보면, 무명 행 식 명색 육입처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로 이루어져 있다. 무명에 인연하여 행이 있고 행에 인연하여 식이 있고..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기 때문에 식이 멸하고.... 우리존재는 이와 같은 과정을 따라 생사를 되풀이한다. 연기법에 의하면 우리 존재는 전적으로 상대적이고 상호의존적이고 조건지어져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고정불변적인 我라고 부를 만한 것은 어떤 것도 없다.
연기설에 의해서도 오온에 대한 요소적 분석에 의해서도 아와 같은 것은 찾을 수 없다. 우리 존재는 여러 가지 요소들에 의해서 연기적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집합체이며 이들 각 요소들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이들 배후에도 실체와 같은 불변적 我는 없다. 무아의 가르침은 어디에서 나라는 존재가 독립된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생각(아견)은 성립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인도철학 - 초기불교
[문제] 연기법과 사성제(四聖諦)의 관계에 대해 서술하시오.
[답안] 십이연기에서 현실의 고가 일어나는 순서를 나타내는 측면을 유전문 또는 순관이라고 하고, 현실의 고를 소멸시켜가는 순서로 관하는 측면을 환멸문 또는 역관이라고 한다. 사제설에서는 앞의 둘이 유전문, 뒤의 둘은 환멸문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고제는 현실의 생존을 고로 보는 것이고, 집제는 그 고가 일어나는 원인을 아는 것이므로, 십이연기로 말하자면 무명에 연하여 행이 있고, 행에 연하여 식이 있고, 생에 연하여 노사가 있다고 보는 관법이다. 또 멸제와 도제는, 이 현실의 고가 소멸한 열반의 세계와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팔정도가 제시된 것이므로, 무명이 멸함으로 행이 멸하고 마침내 생이 멸함으로서 노사가 소멸하는 환멸문을 나타내고 있다. 고집의 이제는 후자가 원인이고 전자는 그 결과이며 인간의 미혹한 세계를 나타내고, 멸도의 이제는 후자가 원인이고 전자는 결과로서 깨달음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여, 십이연기와 사제는 모두 어떻게 해서 현실의 고를 없애고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며, 여러 모습으로 발전해가는 불교사상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후에는 악의 마음작용인 번뇌의 고찰이 진행되고, 또 열반을 목표로 하는 실천도가 조직되어 가지만, 그것은 모두 십이연기와 사제로 표현된 불교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불교 끝-
- 미망사 시작 -
* 미망사 학파
□개조 : 자이미니(jaimini: BC 2경)
□성립 : BC 2세기경 확립
□주요 주장 내용 : 베다 성전(聖典)에 규정된 제사의례(祭祀儀禮)의 연구와 실천은 인간의 보편적 의무(Dharma)이며, 이 보편적 의무를 추구하고 행함으로써 종교상의 이상이 실현된다고 강조함. 제사(祭祀)를 실행하는 주체(主体, Subject)로서의 아트만(ātman)이 실재한다고 주장함.
□주요 문헌 : 미망사 수트라(Mīmāṃsā-sūtra, BC 2경)
미망사 수트라 주석서(AD 6C 샤바라스바민의 주석)
육파철학 - (5) 미망사 학파
미망사 학파는 베다의 제식 규정을 취급하는 부분을 전적으로 탐구한다.
직접추리와 논증을 통해서 제식의 올바른 규범을 찾으려는 노력에 의해 니야야 학파가 성립되고 제식의 규범과 의식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정돈하는 작업에 의해 미망사 학파가 성립되었다.
*인식론*
● 근본 관심사 : 베다가 명하는 행위의 의무(Dharma)를 이론적 뒷받침, 의무수행, 수행이 선한 업보를 동반하는 이유
● 신의 존재의 여부와 상관없이 제사 행위가 자동적으로 결과를 가져온다는 생각을 낳음, 최고신의 존재를 부정
오직 베다 자체의 권위에 의거하여 제사 행위의 의무와 그 보이지 않는 결과에 대한 믿음만 받아들임
● 미망사 철학에서 인정되는 올바른 지식 수단: 직접지각, 추론, 유비, 가정(의준량), 무의 인식(부존량)
① 직접지각: 감각기관(indriya)과 대상의 접촉에 의해 직접적 지식을 얻는 인식방법
감각기관(indriya)과 그 대상(artha)과의 감각작용(saṇikarṣa)
무분별적 지각(대상에 대한 의식이나 판단없이 존재만 주어지는 인식),
분별적 지각(대상의 의미를 파악하고 이해)
② 유비: 현재 경험한 것과 과거에 경험한 것을 기억에 의해 비교해서 양자의 유사성을 아는 지식
③ 가정(의준량): 설명을 요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그러나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필연적이고 유일한 가설로 세움. 이러한 가설은 진리로 받아들여져야 함, 이런 의준량을 통해 무전력(無前力)의 존재를 알 수 있음. 미망사 철학에서 제물을 받고 복을 주는 것은 신이 아닌 제물을 바치는 행위, 이 행위는 보이지 않는 힘(샥띠)를 산출. 이 힘은 필연적으로 업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오는데 이는 무전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설명 불가
* 무전력: 행위로 인해 자동적으로 자아에 생기는 보이지 않는 힘.
④ 무의 인식: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추론이나 지각을 통해서 알 수 없음(추론 - 부지각과 부존의 변층관계를 요함)
부지각 자체를 부존을 아는 하나의 독립적 인식방법으로 인정함, 그러나 부지각이라고 해서 다 부존을 알려주는 것 X
지각 될 수 있는 상황에도 지각되지 않는 경우에만 부존량이 성립
Ex) 밝은 방의 꽃병이 안보임: 꽃병이 없네 -> 어두운 방,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할 수 없음
● 다섯가지 인식수단은 다르마(dharma)를 아는 인식방법은 되지 못함, 오직 베다 성전을 통해서만 다르마 인식이 가능함
*형이상학*
● 영원하고 무한한 영혼들이 개인의 수만큼 존재하며, 물질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형성되는데 업의 법칙 작용
영혼이 과거 업의 결과로 태어난 생명체, 업보를 감수하는 도구 감각기관들, 감수되어야 할 업보의 대상으로 구성됨
● 바이쉐이까와 비슷하지만 바이쉐이까는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하는 반면, 미망사는 그런 존재의 필요성을 부정함
● 영혼은 오직 자기의 업에 따라 육체를 가질 분 최고신 같은 것은 없음, 육체는 그것을 다스리는 자아를 위해 존재함
*해탈*
● 제사와 이에 따른 업보를 궁극적 관심사로 함, 구원이나 해탈은 올바른 제식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천상의 복락
나중에는 다른 학파의 영향을 받아 자아의 해탈(육체와 윤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인정함
● 해탈이란 자아가 좋고 나쁜 행위와 육체를 떠나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 -> 인식, 경험, 희열, 고통 등 아무것도 없음
Why? : 자아는 식이나 희열같은 것을 본질적 성격으로 갖고 있지 않기 때문
● 해탈에 이르는 방법은 ① 자아를 아는 지식 ② 의무적인 행위를 순수하게 행하는 것 (바가바드기타 - 까르마요가)
미망사 철학은 '베다의 명령 및 제식 행위에 대한 의무', '해탈에 대한 요구'를 동시에 충족시키고자 함
인도철학 - 미망사 철학
[질문]미망사 철학 / 미망사와 베단따의 차이점에 대하여 상술하시오.
[질문]미망사 철학 / 미망사와 베단따의 차이점에 대하여 상술하시오.
[답안1]
육파철학 가운데 상키야, 요가, 니야야, 바이쉐시까는 단지 명목적인 의미에서 정통사상일 뿐이다. 이 네 학파는 적극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단지 베다에 반(反)하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의미에서 정통사상의 범주에 들 뿐이다. 이들은 베다에 의거하여 세계관을 정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베다를 해석한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또한 이들은 베다가 자신들의 교의를 정당화하는 근거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엄격히 말하여 육파철학 가운데 베다에 직접 의거하는 정통사상은 오직 미망사와 베단따 뿐이다. 이 두 학파는 처음부터 베다에 직접 근거를 두는 정통사상으로 출발했으며, 따라서 처음부터 지극히 종교적인 특성을 보인다.
넓은 의미의 베다는 만트라, 브라흐마나, 아란야까, 그리고 우파니샤드를 포함한다. 이 중에서 앞의 둘은 제사편(karma-kaṇḍa)이라 불리며, 뒤의 둘은 지식편(jñāna-kaṇḍa)이라 불린다. 제사편과 지식편은 논리적인 순서에서 전pūrvaㆍ후uttara의 관계를 지니기 때문에, 제사편에 근간을 둔 철학을 푸르바 미망사Pūrva-Mīmāṃsā라 하고, 지식편에 의거한 철학을 웃따라 미망사Uttara-Mīmāṃsā라 한다. 나중에 웃따라 미망사가 베단따(Vedānta)라는 이름으로 더욱 널리 알려지면서, 푸르바 미망사는 간단히 미망사라 칭하게 되었다.
미망사 철학은 베다의 제의서에 대한 직접적인 계승자로 출발했으며, 베다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보장하는 것이 이 학파의 주된 관심사였다. 이를 위하여 미망사는 해석의 일반적인 규범(nyāya, 이 말은 나중에 논리학만을 가리키는 말로 정착됨)들을 확립했다. 베다를 해석하는 미망사의 기본적 입장은 베다의 명령들이 인간의 완전한 의무(dharma)를 구성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명령들을 체계적으로 해석하고 외견상 비체계적으로 보이는 베다의 텍스트들에 대한 일관된 적용을 위하여 논리적인 원리들을 연역해내는 것이 미망사의 역할이다.
미망사가 표방한 목표는 다르마의 본질을 논구하는 것이다. 이 학파의 관심은 사색적이기보다는 실천적이다. 다르마의 완전을 위하여, 영원한 존재로서 영혼의 실재를 인정한다. 미망사가 아트만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만일 그것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천계 등으로 가기 위하여 제사를 수행하는 자들에 대한 베다의 언급들이 무의미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육체는 사후에 화장되므로, 천계를 향수할 어떤 독립적인 실체가 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미망사에 의하면, 베다는 이론적으로 권위의 유일한 원천이며, 성전서와 여타의 전통적인 자료들이 지니는 권위는 모두 베다로부터 나온다. 베다는 오류가 없으며, 우주의 변화나 생멸을 초월하여 그 자체로 영원하다. 미망사는 말과 그 의미 그리고 그 둘의 관계가 영원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고심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망사는 단어들을 해석하는 두 가지 방법, 즉 어원에 의한 방법과 실제적인 용법에 의한 방법을 구분했다. 이 중에서 항상 실제적 용법에 의한 방법이 선호되어야 한다는 것이 미망사의 입장이다. 무엇보다도 미망사는 규범이나 명령을 설명구와 구별하는 것에 큰 관심을 보였다.
미망사는 주로 제사 행위를 다루며 근본적으로 브라흐마나 문헌에 의거하고 있음에 비하여, 베단따는 인간의 내적인 통찰, 사물의 진실에 대한 지식에 관심을 지니며, 그 교의들은 우파니샤드에 의거한다. 그러나 베단따 역시 베다의 권위에 의존하므로 미망사의 연구가 그 자체의 철학에 대한 예비지식이 된다고 본다. 베단따는 미망사에서 확립된 인식방법을 인정하며, 베다와 말에 대한 견해에서도 미망사와 공통된다.
인도철학 - 미망사 철학
[질문]미망사 철학 / 미망사와 베단따의 차이점에 대하여 상술하시오.
[답안2]
인도철학에서 6파철학은 불교나 자이나교와 달리 베다(veda)의 권위를 인정하는 인도철학의 정통학파로 간주되어 왔다. 그런면에서 볼때 미맘사(Mīmāṃsā) 와 베단따 (Vedānta) 학파는 베다문화의 직접적인 계승자로 가장 정통적인 학파라고 할 수 있다.
vedānta라는 말은 veda의 끝 이라는 말인 veda-anta로 된 말이다. 바로 베다의 내용으로서의 끝이라는 뜻이 있어, 우빠니샤드(upaniṣad)를 가리키는 말이다.
베단따학파는 본래 미망사학파에 상대하여 일어났으나 이 두 학파는 서로 보완하면서 정통 바라문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미망사는 주로 제사 행위를 다루며 근본적으로 브라흐마나 문헌에 의거하고 있음에 비하여 베단따는 인간의 내적인 통찰, 사물의 진실에 대한 지식에 관심을 지니며, 그 교의들은 우빠니샤드에 의거한다. 이러한 큰 골자를 가지고 좀 더 세밀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베다 성전은 제사부(karma-kāṇḍa)와 지식부(jñāna-kāṇḍa)으로 나누어진다. 제사부는 바라문교의 제사(祭祠)를 설하는 부분이니, 주로 베다 本集(saṃhitā) 과 브라흐마나(brāhmaṇa, 梵書)가 이에 해당한다. 지식편은 우주 만유에 관한 철학적 고찰을 설한 부분이니 주로 우빠니샤드가 이에 해당한다.
미망사와 베단따는 각각 이 두 부분을 탐구하고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파로서 미맘사Mīmāṃsā란 말은 <심구(尋究)>라는 뜻을 지녔다. 미망사학파는 제사부, 行爲篇을 고찰한다 하여 뿌르바 미망사(pūrva-mīmāṃsā)라 부르며, 베단따학파는 지식부분을 연구한다 하여 웃따라 미망사(uttara-mīmāṃsā)라 불러왔다. 그래서 미맘사라 하면 pūrva-mīmāṃsā를 지칭하며 uttara-mīmāṃsā는 베단따라 부른다.
추리(推理)의 활동을 nyāyā라 불렀으며 이것이 나중에 가서는 제식의 문제와는 별도로, 올바른 사고의 규범을 다루는 독립적인 형식논리학파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미망사의 개조는 자이미니jaimini, B.C. 200-100로 추정되며 근본 경전은 Mīmāṃsā-sūtra 로서 기원 1세기 전후에 현재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미망사 최초문헌은 jaimini의 <미망사 수트라>이다. 5-6세기 경에는 샤바라에 의해 최초 주석이 나왔으며, 꾸마릴라와 쁘라바카라의 출현으로 7세기경에 미망사는 둘로 나누어지며, 각기 샤바라의 주석에 대한 복주를 써서 학파를 형성해 나갔는데 그 두 분파가 바로 Guru파 와 Bhāṭṭa파 이다.
미맘사 학파에다 철학적인 이론을 부여한 것은 거의 전적으로 이 둘의 공헌으로 간주되며 그들 이후 미맘사철학은 별로 발전을 보지 못했다.
미맘사는 올바른 지식의 수단으로서 지각 pratyakṣa(現量), 추론 anumāna(比量), 비교 upamana(譬喩量), 증언 śabda(聲量), 가정 arthāpatti(義準量)등을 인정한다.
미맘사 학파와 베단따 학파는 대부분 6가지 인식수단을 인정한다. 일부 미맘사 학파는 무량(無量)을 제외한 5가지 인식수단을 인정한다. |
미맘사의 형이상학은 물질세계의 실재성을 믿기에 다원적이고, 실재적이며, 원자와 영혼과의 관계를 성립시키는 창조신 Īśvara의 존재를 인정은 하지만 필요성은 부정한다. 왜냐하면 영혼은 오직 자기業의 功過에 따라 육체를 차지하게 될 뿐이라는 인중유과론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베다가 감각 경험보다도 더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하며, 베다의 권위를 믿기 때문에 경험주의가 아니다.
베단따 철학은 샹카라와 라마누자의 주석서를 통해 발전하였다. 베단따의 관심사는 jiva 와 brahman 사이의 관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베단따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개의 서로 다른 실체들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려는 다원론적인 견해를 배척하고 다양한 현상세계의 배후에 단 하나의 궁극적이고 통일적인 실체가 있다는 일원론적인 세계관을 따른다. 인간의 무지는 베단따를 배움으로써 제거되며 인간은 감각과 의지를 조절하고 대상에 대한 모든 집착을 놓아야만 한다. 그리고 깨달은 스승 밑에서 베단따를 배우고 이성과 명상을 통해 진리를 자각(tad tvam asi)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면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완전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후대의 사상가들로는 샹카라, 라마누자, 마드바 등이 있다. (샹카라의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 라마누자의 제한 불이일원론(制限不二一元論)/제한불이론(制限不二論), 마드바의 이원론/불일이원론(不一二元論))
인도철학 - 미망사 철학
[질문] 미망사 철학 / 미망사 철학의 2대분파에 대하여 상술하시오.
[답안1] 미망사 외 다른 정통학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해탈의 문제가 자이미니의 《미망사 수트라》나 샤바라의 주석에서는 논의되지 않으며, 다만 바른 제사를 통하여 천계에 태어나는 것이 주된 관심사였다. 그러나 후대의 학자들은 이 문제를 비껴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해탈은 다른 학파의 사상가들의 주요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사후의 세계에 대한 견해에서, 미망사에 있어서 해탈의 개념이 받아들여진 것은 미망사가 둘로 나누어지는 7세기경에 이르러서이다. 이 두 분파의 창시자들은 쿠마릴라와 프라바카라로 각기 샤바라의 주석에 대한 복주를 썼다.
쿠마릴라는 지식이 자아의 행위에 의하여 야기되며, 자아의 행위는 대상적인 것들에 대한 의식을 생성하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한다.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은 그 인식에 대한 더 이상의 어떤 인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인식됨으로 종결된다. 인식 행위는 그 속에 네 가지 요소, 즉 아는 자, 알려지는 대상, 인식의 도구, 인식의 결과인 대상의 인식됨을 지닌다는 것이다. 인식은 직접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인식에 의하여 생성되는, 대상의 인식됨으로부터 추론된다. 모든 인식 행위는 지각자와 지각되는 대상 사이의 어떤 관계를 의미한다. 인식은 아는 자와 알려지는 대상의 관계로부터 추론되며, 아는 자와 알려지는 대상의 관계는 내적인 지각에 의하여 파악된다. 인식되는 것은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대상과 인식 사이에 존재하는 특수한 관계일 뿐이다.
프라바카라는 모든 인식에서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과 앎이 동시에 주어진다는 이론을 옹호한다. 모든 인식에서 자아는 작인(作因)과 마나스manas의 접촉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알려진다. 인식은 직접적 파악에 의하여 스스로 인식되지 대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인식은 대상이 아니라 인식으로서 인식된다. 비록 인식이 자기 인식적이라 할지라도 인식의 존재는 추론을 통하여 알려진다. 이 인식은 바른 지식의 대상이지만 완전히 파악되지는 않는다. 인식은 형태를 지니지 않으므로 지각될 수 없다. 인식의 존재는 단지 추론될 뿐이다.
쿠마릴라는 자아와 육체는 다르고, 자아는 육체를 통제하고 행위할 수 있으며 영원ㆍ편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자아의 에너지는 육체의 움직임을 야기한다. 자아는 의식 자체일 뿐만 아니라 인식의 토대이다. 자아의 존재는 ‘나’라는 개념을 통해 추론되며, 자아는 그 자체에 의하여 현시된다. 자아는 인식의 대상이고, 정신적 지각의 대상이며, 지식의 대상인 동시에 주체다.
프라바카라는 자아와 육체를 다른 것으로 간주하여, 자아를 지식, 행위와 경험, 혹은 즐거움과 고통 등과 같은 속성들의 토대로서, 의식 없는 어떤 것으로 이해한다. 자아는 편재하는 것이고 변하지 않으며, 스스로 자기를 비추어 드러내지 않는다. 자아는 인식의 행위에 의하여 현시된다. 자아는 그 자체로 지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언제나 인식의 행위자ㆍ향수자로 알려진다. 자아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이고, 지각의 주체인 동시에 대상이며, 의식의 대상이라 주장한다.
쿠마릴라는 운동이 지각된다고 주장하는 반면, 프라바카라는 운동이 단지 추론의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쿠마릴라는 실체, 속성, 운동과 보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반면에, 프라바카라는 뒤의 두 가지, 운동과 보편들의 존재를 부정한다.
쿠마릴라와 프라바카라는 둘 다 보편의 실재를 인정하며, 보편을 지각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결정적 지각과 비결정적 지각의 구분을 수용하며, 이 두 지각 모두가 타당한 것으로 인정한다. 쿠마릴라는 비결정적 지각이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지각, 어떤 대상이 단지 개체로 우리에게 주어질 뿐이며, 유적 측면 혹은 특수한 측면을 지니는 대상으로 파악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하여 프라바카라는 비결정적 지각이 유적 성질들과 특수한 측면들 모두를 인식하지만, 다른 대상들이 아직 그 인식 속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그 대상이 분명한 어떤 부류에 실체로 속하는 것으로 파악되지 않을 뿐이라고 믿는다.
인도철학 - 미망사 철학
[질문] 미망사 철학 / 미망사 철학의 2대분파에 대하여 상술하시오.
[답안2] -꾸마릴라 와 쁘라바카라의 대해-
꾸마릴라와 쁘라바카라의 출현으로 각기 샤바라의 주석에 대한 복주를 써서 사상적으로, 철학적으로 발전하며 학파를 형성해 나갔는데 이를 계기로 미망사는 二大分派로 나누어지게 된다. 그 두 분파가 바로 Guru파 와 Bhāṭṭa파 이다.
쁘라바카라prabhākara miśra(7세기)와 꾸마릴라 kumārila(8세기)는 미맘사철학의 양대학파인 구루Guru파와 밧따Bhaṭṭa파를 각각 형성하게 된 거장들이었다.
두 학자는 각기 샤바라의 주석에 복주를 펴내고 철학적 이론을 부여하며 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미맘사학파에다 철학적인 이론을 부여한 것은 거의 전적으로 이 둘의 공헌으로 간주되며 그들 이후에는 별로 이론적인 발전을 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쁘라바카라는지식을 타당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한다. 대상에 대한 이전의 비인식은 타당한 지식에 대한 판단의 척도로 사용된다. 모든 지식은 타당하며, 우리가 행위하도록 자극한다. 또한 모든 인식에서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과 앎이 동시에주어진다는 이론을 옹호한다. 모든 인식에서 자아는 작인(作因)과 마나스manas의 접촉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알려진다. 인식은 직접적 파악에 의하여 스스로 인식되는 것이며 대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뱀:새끼줄) 인식은 형태를 지니지 않으므로 지각될 수 없다.
인식의 존재는 단지 추론될 뿐이다.
꾸마릴라는 지식에 대해 자아의 행위에 의하여 야기되며, 자아의 행위는 대상적인 것들에 대한 의식을 생성하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한다.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은 그 인식에 대한 더 이상의 어떤 인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인식됨으로 종결된다. 인식 행위는 그 속에 네 가지 요소, 즉 아는 자, 알려지는 대상, 인식의 도구, 인식의 결과인 대상의 인식됨을 지닌다. 인식은 직접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인식에 의하여 생성되는, 대상의 인식됨으로부터 추론된다. 모든 인식 행위는 지각자와 지각되는 대상 사이의 어떤 관계를 의미한다. 인식은 아는 자와 알려지는 대상의 관계로부터 추론되며, 아는 자와 알려지는 대상의 관계는 내적인 지각에 의하여 파악된다. 인식되는 것은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대상과 인식 사이에 존재하는 특수한 관계일 뿐이다.
꾸마릴라는 자아와 육체는 다르고, 자아는 육체를 통제하고 행위할 수 있으며 영원ㆍ편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자아의 에너지는 육체의 움직임을 야기한다. 자아는 의식일 뿐만 아니라 인식의 토대이며 의식 자체이다. 자아의 존재는 ‘나’라는 개념을 통해 추론된다. 자아는 그 자체에 의하여 현시된다. 자아는 인식의 대상이고, 정신적 지각의 대상이며, 지식의 대상인 동시에 주체다.
쁘라바까라는 자아와 육체를 다른 것으로 간주하여, 자아를 지식, 행위와 경험, 혹은 즐거움과 고통 등과 같은 속성들의 토대로서, 의식 없는 어떤 것으로 이해한다. 자아는 편재하는 것이고 변하지 않으며, 스스로 자기를 비추어 드러내지 않는다. 자아는 인식의 행위에 의하여 현시된다. 자아는 그 자체로 지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언제나 인식의 행위자ㆍ향수자로 알려진다. 자아는 인식의 주체이지 대상이 아니고, 지각의 주체인 동시에 대상이며, 의식의 대상이라 주장한다.
쁘라바까라는 운동이 단지 추론의 대상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에 비하여 꾸마릴라는 운동이 지각된다고 주장한다.
쁘라바까라에 의하면, 우리가 공간상의 점들과 결합 및 분리를 볼 때, 우리는 움직임을 본다고 말한다. 이 접촉들은 공간에 있는 반면에, 운동은 그 대상에 있다. 꾸마릴라는 운동이 오직 대상에 존재할 뿐이라고 한다. 대상에 있는, 공간에서 결합과 분리를 야기하는 운동을 본다고 주장한다.
꾸마릴라는 실체, 속성, 운동, 보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반면에, 쁘라바까라는 뒤의 두 가지, 운동과 보편들의 존재를 부정한다.
쁘라바까라와 꾸마릴라는 둘 다 보편의 실재를 인정하며, 보편을 지각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쁘라바까라와 꾸마릴라는 모두 결정적 지각과 비결정적 지각의 구분을 수용하며, 이 두 지각 모두가 타당한 것으로 인정한다.
꾸마릴라는 비결정적 지각이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지각, 어떤 대상이 단지 개체로 우리에게 주어질 뿐이며, 유적 측면 혹은 특수한 측면을 지니는 대상으로 파악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하여 쁘라바까라는 비결정적 지각이 유적 성질들과 특수한 측면들 모두를 인식하지만, 다른 대상들이 아직 그 인식 속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그 대상이 분명한 어떤 부류에 실체로 속하는 것으로 파악되지 않을 뿐이라고 믿는다.
쁘라바까라는 비교upamāna와 가정arthāpatti을 바른 지식의 수단으로 인정하며, 꾸마릴라는 비교와 가정에 추론anumāna을 부가한다.
꾸마릴라kumārila는 샤바라스바민(Śabarasvāmin)의 주석에 삼부(三部)의 해설서를 저술했다. 즉, Ślokavārttika, Tantravārttika, Tupṭīkā의 三部이다. 꾸마릴라는 본래 불교를 공부했으나 나중에 바라문교로 전향했다고 하며, 그의 저서를 통하여 불교의 공사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꾸마릴라는 샹카라와 더불어 인도 불교사상의 쇠퇴에 큰 역할을 한 철학자로 평가되고 있다.
쁘라바까라 | 꾸마릴라 | |
분파 | Guru 학파 | Bhaṭṭa 학파 |
지식 | 타당한 것과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구분 | 지식은 자아의 행위에 의해 발생. |
인식(지각)행위 | * 아는자/알려지는 것(대상)/앎이 동시에 직접파악된다는 이론 옹호. * 인식은 직접적 파악에 의하여 스스로 인식되지 대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 인식은 형태를 지니지 않으므로 지각될 수 없다. 인식의 존재는 단지 추론될 뿐이다. | 4가지 요소 : 아는자/알려지는대상/인식의도구/인식의결과(대상으로 인식됨) .... 직접지각×, 추론됨○ 모든 인식행위는 대상과 인식사이에 존재하는 특수한 관계일 뿐. |
자아 | * 자아는 육체와 다르며, 편재하고, 영원하며, 인식행위에 의해서만 드러난다. * 모든 인식에서 자아는 작인(作因)과 마나스manas의 접촉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알려진다. * 자아는 언제나 인식의 행위자ㆍ향수자로 알려진다. | * 자아와 육체는 다르고, 자아는 육체를 통제하고 행위할 수 있으며 영원ㆍ편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 자아는 인식의 대상이고, 지식의 대상인 동시에 주체이다. |
운동 | * 운동은 단지 추론의 대상이다. (운동 지각 불가) * 공간상의 점들이 결합 및 분리를 볼 때 우리는 움직임을 본다고 말하는 것.운동은 대상에有 | * 운동은 지각된다. * 오직 대상에 존재할 뿐, 공간에서 결합과 분리를 야기하는 운동을 본다. |
* 실체, 속성의 존재 인정 * 운동, 보편의 존재 부정 | * 실체, 속성, 운동, 보편들의 존재인정 | |
보편적 실재 | * 인정 * 보편을 지각의 대상으로 간주 * 결정적 지각과 비결정적 지각의 구분 * 비결정적 지각이 유적 성질들과 특수한 측면들 모두를 인식하지만, 다른 대상들이 아직 그 인식 속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그 대상이 분명한 어떤 부류에 실체로 속하는 것으로 파악되지 않을 뿐이라고 믿는다. | * 인정 * 보편을 지각의 대상으로 간주 * 결정적 지각과 비결정적 지각의 구분 * 비결정적 지각이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지각, 어떤 대상이 단지 개체로 우리에게 주어질 뿐이며, 유적 측면 혹은 특수한 측면을 지니는 대상으로 파악되지는 않는다고 주장 |
바른인식의수단 | 비교, 가정을 인정 (무량 외 5가지 인정) | 비교, 가정, 추론을 인정 (6가지 인식수단 인정) |
해탈 | 자아가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유지하는 상태/후기;행복의 경험 | |
저술 | 샤바라스바민(Śabarasvāmin)의 주석에 삼부(三部)의 해설서를 저술했다. 즉, Ślokavārttika, Tantravārttika, Tupṭīkā의 三部 | |
기타 | 본래 불교 공부했으나, 바라문교로 전향. 저서를 통해 불교 공사상 비판. 꾸마릴라는 샹카라와 더불어 인도 불교사상의 쇠퇴에 큰 역할을 한 철학자로 평가됨. |
[질문] 미망사 철학 / 미망사 철학의 해탈론에 대하여 상술하시오.
[답안1] 미망사 외 다른 정통학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해탈의 문제가 자이미니(jaimini, B.C. 2C)의 《미망사 수트라(Mīmāṃsā-sūtra)》나 샤바라의 주석서에서는 논의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이미니와 샤바라는 해탈의 문제를 정면으로 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다만 바른 제사를 통하여 천계에 태어나는 것이 주된 관심사였기 때문에 천계의 삶에 이르는 길을 지적했을 뿐이며, 윤회로부터의 자유, 해탈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을 피했던 것이다. 그러나 후대의 학자들은 이 해탈의 문제를 비껴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해탈은 다른 학파의 사상가들의 주요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사후의 세계에 대한 견해에서, 미망사에 있어서 해탈의 개념이 받아들여진 것은 미망사가 둘로 나누어지는 7세기경에 이르러서이다. 이 두 분파의 창시자들은 쿠마릴라(Kumārila Bhāṭṭa)와 프라바카라(prabhākara)로, 그들은 각기 샤바라의 주석에 대한 복주를 썼다.
쿠마릴라에 의하면, 해탈은 모든 고통에서 자유로운, 아트만 그 자체의 상태이다. 파르타사라티 또한 해탈의 상태가 지복의 향수가 아니라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주장한다. 자아는 지식에 대한 가능력이다. 대상들에 대한 인식은 마나스와 감관들의 작용에 기인한다. 이 기관들은 해탈상태에서 전혀 존재하지 않으므로, 자아는 어떤 유형의 현현도 없는, 그 자체의 순수본질상태로 존재한다. 해탈은 즐거움이나 고통 등과 같은 어떤 특성도 없는, 무속성의 상태이다. 해탈은 대상적 인식이나 어떤 종류의 느낌도 없는 의식의 상태이다. 그러나 쿠마릴라는 해탈을 적극적인 상태, 즉 아트만의 실현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는 해탈이 지식과 결합된 행위를 통하여 얻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프라바카라에 의하면, 해탈은 재생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공덕과 죄과의 완전한 절멸에 놓여 있으며, 모든 공덕과 죄과의 사라짐에 의하여 야기되는 육체의 완전한 소멸로 정의된다. 단순한 지식은 우리에게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줄 수 없으며, 자유는 오직 행위의 완전한 소멸을 통하여 얻어질 수 있을 뿐이다. 만일 해탈에 이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윤회의 순환을 끊어야 한다. 해탈은 고통뿐만 아니라 즐거움의 지멸이다. 해탈은 지복(至福)의 상태가 아니다. 해탈은 단지 영혼의 본래 형태일 뿐이다.
[질문] 미망사 철학 / 미망사 철학의 해탈론에 대하여 상술하시오.
[답안2] 미망사학파는 본래 제사의 행위와 이에 따른 業報를 궁극적인 관심사로 한 철학이다. 따라서 구원의 개념에 있어서도 본래는 올바른 祭式의 행위를 함으로써 얻어지는 天上의 福樂을 이상으로 하는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타학파의 영향을 받아 자아의 해탈, 즉 육체와 윤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최고의 삶의 이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해탈이란 자아가 좋고 나쁜 행위와 육체를 벗어나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자아의 상태에는 희열도 없고, 아무런 인식이나 경험도 있을 수 없다. 고통과 즐거움을 떠나서 자아가 본래적인 상태(svastha)에 들어갈 뿐인 것이다.
미망사에서 해탈에 이르는 방법으로서 자아를 아는 지식과 의무적인 행위를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순수하게 행하는 것을 강조한다. 까르마요가를 통해서 미망사철학은 베다의 명령 및 제식행위에 대한 의무와 해탈에 대한 요구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것이다.
- 미망사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