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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 스크랩 (대림절설교)마리아의 찬가: 대림절 셋째주일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
비바체 추천 0 조회 260 14.12.21 00:30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대림절 셋째 주일 설교)20151214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

마리아의 찬가

1:47-55

   

Rogier van der Weyden(b. 1400, Tournai, d. 1464, Bruxelles), Visitation, c. 1445 Oil on oak panel, 57 x 36 cm, Museum K?nste, Leipzig

 

 

이제 우리는 대림환의 세 번째 초를 밝혔습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특별히 고대 교회에서는 이 날을 Gaudete라고 불러왔습니다. 번역하면,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성탄의 기쁨을 미리 앞당겨 기뻐하라는 뜻이죠. 특별히 오늘 교회력 말씀들을 모두 묵상해보시면, 기쁨이란 주제가 숨겨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의 방문(Rogier van der Weyden, Visitation, 1445)

그 중 오늘 설교본문은 마리아의 찬가로 알려진 눅1:46절 이하 말씀입니다. 이 찬가는 마리아가 친척 엘리사벳 앞에서 부르는 찬송시입니다. 오른쪽을 보시면 1445Van der Weyden, Visitation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2012년에도 제가 이 그림으로 설교를 한 적이 있어서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두 여인이 서로의 배에 손을 올리고 무언가 말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누가 엘리사벳이고, 누가 마리아일까요? 얼굴로 봐도 알 수 있지만, 망토의 색깔로도 구분이 가능합니다. 중세 종교화에는 색깔마다 그 의미를 정해놓고 그리는 도상법이라는 것이 통용되었는데, 엘리사벳이 입은 망토의 빨강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성령강림절에는 빨강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마리아에게는 다른 인물들에게는 쓰지 않는 색을 사용했는데 울트라 마린이라고 불리는 청색입니다. 청색이 의미하는 바는 하늘, 바다, 신의 힘, 절망 속에서 나오는 희망의 힘이라는 뜻입니다.

 

지금이야 염료기술이 발달했기에 어떤 색이든 만들어 낼 수 있는 시대지만 1842년까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가장 구하기 힘든 색이 바로 이 청색이었다고 합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색으로 여겨진 이 청색의 원료는 라피스 라즐리라는 보석이 사용되는데, 구하기도 힘들지만 지금도 1kg의 값이 대략 1,500만원 정도 갈 정도의 고가의 재료입니다. 그래서 이 염료는 오직 마리아의 옷을 그릴 때만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합니다.

마리아가 청색으로 표현된 것은 절망의 세계에 희망을 몰고 오시는 그리스도를 잉태했기 때문입니다.

 

두 여인의 만남 

다시 그림을 보실까요? 이 그림에는 오늘 성경본문의 배경이 되는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두 여인의 옷 색깔 말고도 더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 이 두 여인, 둘 다 임신할 수 없는, 또는 임신해서는 안 될 여인들입니다. 엘리사벳은 이미 나이가 너무 들었고, 마리아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여인입니다. 둘 다 임신할 수 없는 또는 임신해서는 안 될 사람들이지만 아이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둘 다 모두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이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늦은 나이에 잉태한 이 사실일 너무 부끄러워 여섯 달 동안 숨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 때 천사는 또 한 명의 여인을 찾아가 엘리사벳을 만나게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입니다. 마리아 역시 천사의 수태고지를 듣고 당황하게 됩니다. ‘처녀가 아이를 잉태한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임신했다는 것은 공개 처형됨을 의미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육 개월 간 숨어 지내고 있는 친척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 후 마리아는 출생의 비밀을 안고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이제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만납니다. 둘 다 말 못할 사정이 가득합니다. 그렇게 어색한 만남이었지만  뱃속의 아이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후에 엘리사벳의 아들은 주의  길을 예비하던 세례 요한이 되고 마리아의 아들은 바로 예수님이 됩니다.

 

이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임신 비밀을 털어 놓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리고는 서로의 배에 손을 얹고, 엘리사벳이 먼저 어린 조카 마리아를 축복합니다.

 

그러자 곧 이어 마리아가 기쁨의 찬송을 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이 찬송시는 전혀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뻐하는 찬양입니다. 임신해서는 안 될 여인이 임신했습니다. 후에 태어나는 아들의 운명은 더욱 기구합니다. 그 아이는 베들레헴 일대의 어미들이 죽은 영아들의 시신을 가슴에 끌어안고 통곡하던 가운데 태어났고 성인이 되어선 가족과 고향에서 쫓겨날 운명이었고, 평생 집 한 칸 없이 세상을 떠돌 운명이었으며, 종교 기득권자들에게 미움을 사서 십자가에서 죽게 될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한다.”고 찬양합니다. 이유? “그 여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기 때문이라고 마리아는 증언합니다. 또한 이렇게 비천한 여종을 돌아보신 주님이 자기를 만세에 복 있는 자로 칭송받게 할 것이 분명하다고 찬송합니다.

 

아직 그 누구도 마리아를 복되다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리아의 처지가 밝혀지면 돌팔매질 당할 처지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이 비천한 자신을 돌아보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미리 기뻐합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소리 높여 찬송합니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하나님의 시국선언문

이 찬송시를 구절구절 잘 보시기 바랍니다. 이 기쁨의 찬가는 마리아와 엘리사벳 모두에게 아주 특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찬가가 울려 퍼지는 오늘 이 대한민국 땅과 한국의 교회에게는 더욱 특별합니다. 제게 이 찬가는 연약한 여인이 혼자 좋아서 흥얼거리는 콧노래로 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패악한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시국선언문이나 전쟁포고문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

하나님은 힘세고 강한 팔로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를 흩으십니다.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가 누구입니까? 교단과 교회로 말하자면 모든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신뢰하고 사랑’(루터의 소교리문답서)해야 할 교단의 총회장, 목사, 신학자들, 교회의 장로 권사들이고, 대한민국 사회로 말하자면 지성인이라고 불리는 학자들과 지성인 집단들이 바로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 아닙니까?

 

하나님 나라는 안중에도 없고, 세상의 울음과 통곡소리를 잔소리로 여기는 교회와 지성인들, 하나님 나라의 정의 평화 생명을 외쳐야할 목사들이 양심을 돈으로 거래하며 팔아먹고, 머리가 비고 의식 없는 자들과 똑같이 성공을 위해 줄을 서며, 동네 양아치 마냥 패거리가 되어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교회와 총회 골목을 활보하는 자들이 바로 이런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 아닙니까?

 

우리의 꼴이 이런 형편이다 보니, 세상이 교회와 목사, 지성인들이 향해 비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히틀러와 나치에 저항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독일 루터교 목사 본회퍼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귀에는 타락한 자들의 악담이 경건한 이들의 할렐루야 보다 더 좋게 들린다.’ 이 탄식이 오늘, 양심 있는 교회와 성도들의 가슴을 더욱 저미고 들어옵니다.

 

목사는 목회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일이고, 신학자는 학생을 가르치고 연구에 집중하는 것이 정상적인 일이며, 장로와 권사는 자기 교회의 살림살이와 교인의 삶을 돌아보고 위로하며 기도하고 자기 삶의 자리에서 작은 예수로 사는 것들이 지극히 정상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정상적인 일을 하지 않고 있는 모든 교만한 자들을 반드시 자들을 흩으실 것입니다. 

 

권세 있는 자와 비천한 자

마음이 교만한 자만 흩으신다고 하십니까?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시국 선언문에서는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시고 약하고 비천한 자를 높이신다.”고 선언합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의 강하고 능하신 오른 팔로 위에서 후려치십니다.

 

지금 권세 있다는 이들, 관피아, 군피아, 교피아, 목피아들이 영원히 대대손손 잘 살 것이라고 큰소리치지만, 얼마 안가서 그 자리에서 쫓겨난다는 것이다. 보잘 것 없다하여 외면당하고, 무시당하는 작은 자들의 세상이 온다는 무서운 하나님의 시국선언입니다. 요새 같으면 국가보안법에 걸려서 재판 받고 감옥에 갈 수도 있는 선동적인 무서운 선언문입니다. 우리는 2천년전 마리아의 찬가를 이렇듯 우리의 이야기로 구절구절 읽어 내려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출생하던 2천 년 전 베들레헴을 떠 올려 보십시오. 그곳은 헤롯왕의 명령으로 무고한 영아들이 목숨을 잃게 되던 비극의 장소입니다. 그곳엔 어린 아이의 시체를 끌어안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던 어미들의 통곡소리가 가득했지만, 권세 잡은 자들은 그 누구도 그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2천 년 전 비극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2014년 우리 대한민국의 상황이기도 합니다. 지난 4월 수학여행을 떠나던 3백여 명의 아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그 부모들의 원통함이 이 땅에 가득했지만 권세 잡은 누구도 울음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천 년 전 베들레헴에 오신 것처럼 눈물과 비참함이 가득한 이 땅에도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2천 년 전 권세 있는 자를 강하신 오른 팔로 내리치신 것처럼, 하나님은 이 땅의 권세 잡은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땅의 권세는 땅콩봉지를 집어던지고, 사무장을 자기 앞에 무릎 꿇게 하고, 비행기를 돌려 세울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회장 딸이 아니라 회장 할아버지라도 하나님의 강한 팔은 막지 못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권세 있다고 큰 소리 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시국선언이며 전쟁의 선포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당신의 강하신 팔로 심판하실 것이고, 억울하고 비천한 자를 높이고 회복하실 것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

하나님의 시국선언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와 권세 있는 자에게만 향하지 않습니다.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고, 부자는 빈손으로 돌려보내십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재물을 자기 소유로만 여기는 부자들에게도 향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아보십시오. 부자는 계속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가난을 자손대대로 되물림하는 악순환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불평등은 더욱 심해지고, 복지를 철썩 같이 약속했던 대통령이 언제 그런 약속을 했는지 기억조차 못하고 있으며, 세금을 올려서 부자는 더 큰 부자로 만들겠다고 안간힘을 씁니다. 경제 관료들은 세월호의 아픔 때문에 경제가 이 모양이라고 윽박지르며, 신문과 방송을 통해 크리스마스 세일을 홍보하며 잔소리 말고 너희들 지갑이나 열라며 백화점으로 사람들을 내몹니다.

 

대한민국 뿐 만 아니라 전 지구의 상황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70억 인구 중 13억이 하루 1달러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통계가 이미 십 수 년 전 일이지만 이제는 하루 1,500원으로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사람들이 매년 1억 명씩 늘어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글자를 읽지 못하는 문맹률은 전체 인구의 7분의 110억 명이나 됩니다. 그들은 교육받을 돈이 없어서 앎의 권리조차 빼앗겨 버렸습니다. 지금 우리는 착한 자본가’, ‘평등한 분배’,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의로운 나눔이라는 구호조차 환상 속으로 사라져 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세계 총소득의 1%만 투자해도 가난과 빈곤의 문제는 해결된다고 모두 입을 모읍니다. 그러나 아무리 외쳐도 소용이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갑니다.

 

희망의 노래

도저히 희망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고, 노래를 부를래야 부를 수 없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런 절망의 시기에 마리아의 찬가가 울려 퍼집니다. 도저히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이 때, 이 자리에 대림의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마리아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노래하게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주님은 희망의 노래를 주십니다.

 

55절 말씀대로, 주님은 당신의 종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십니다. 신앙의 선조들과 역사를 통해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가 비천한 너희를 돌아볼 것이며, 나를 두려워하는 자에게 긍휼함을 베풀 것이고,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을 것이며, 권세 있는 자들을 강한 오른 팔로 내리칠 것이며, 비천한 자를 높이고, 주리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배불릴 것이며, 부자는 빈손으로 내 보낼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비천한 마리아에게도 희망의 노래를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비천한 우리에게도 희망의 노래를 주십니다. 바라기는 성탄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희망의 노래가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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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4.12.21 00:30

    첫댓글 스크랩합니다. 메리 크리스 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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