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병신 이였다
병신
1.
가지를 흔들어
잎을 떨구고 싶었다
마지막 잎사귀 되기 전에
단풍의 물을 쏟고 싶었다.
2.
어쩌다 찾아온
길 잘못 찾은 철새에게
총을 쏘고 싶었다
녹슬어버린 총에 맞아줄까
두려움의 늪으로 가는 마음
3.
철새는 보였지만
방아쇠를 찾지 못했다
손가락이 방아쇠의 감촉을 잊었었다
결국 쏘질 못했다
병신!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라라
성 삼문 어른이 형장으로 끌려가시며 남긴 글입니다
죽어서 무엇이 될까?
죽는 건 어떻게 죽어야 멋질까?
언제 쯤 죽을까?
죽겠지
언젠가는........
그건 그렇고 사후 세계에서 무엇이 될까?
꿈을 꿨다
내가 죽었다
소원대로 화장이 되었으니 묘비 없는 거야 당연했다
풀밭에 뿌려진 육신의 찌꺼기가 거름이 되어 나의 영혼이 풀이 되었고
목동이 소를 몰고 풀이 된 나를 삼켜 안창살이 되었다가
어느 날 강남 땅 휘황찬란한 불빛 아래서 어여쁜 처자의 입에서 살살 녹았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얼떨결에 정착 한곳이 그녀의 입술이 되었는데
살아생전에도 술에 절어 살았는데 죽어서도 늘 술잔에 입을 맞춰야 했다
어찌나 생전의 나와 취향이 같은지 매운 음식이 닿을 적마다 쓰라림으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여자의 입술도 입술 나름 이였다
잠을 깨어 사후 소원을 바꾸기로 하였다
외롭고 쓸쓸하고 찬바람에 시달려도 나도 낙락장송이 되기로 하였다
입술은 마냥 달콤하리라 했던 꿈이 깨진 이상 미련 버리기로 했다
형장으로 가시면서 남긴 저 글이 이제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풀이 나지 않고 소가 없는 곳 여자의 입술도 지겹다
지금부터라도 낙락장송이 되고 싶은데 솔잎이 되어야 할 머리가
자꾸 희여 지니 틀려먹을 것 같다
살아생전 인간 됨됨이하고 분수라도 알고 살아야 하는데
요즘 이도 저도 아니니.........
봉래산 찾아가 낙락장송 뵈옵고 절이라도 해야 하는데
길조차 모르니 다 틀렸다치고 이 몸을 천년 쯤 살게 해주면 안되나
남들이 그러드만
개똥밭에 굴러 댕겨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고
오늘밤부터 염라국에가서 대왕님 뵙고 아양 부려 보렵니다
생명 연장을 위하여..........
댕겨 오리다
멋대가리는 없지만
멋대가리 없이 사는 인생도 인생이다
멋대가리 없을 것 같아도 진솔한 멋은 그 속에 있다
자유였다
조금 모자란 사고이었을까?
허기는 나만 생각해서야 아니 되는 건데
남의 눈도 만족을 시켜주고 볼거리도 장만 해 주는 게
타인을 위한 자원 봉사인데
흰 머리 염색도 안 하지
쪼글쪼글한 얼굴 관리도 안했지
일하다 급하면 거름냄새 대충 씻어 냄새 풍기며 돌아다니지
도대체 남을 의식하고 살아갈 생각을 하지 않으니
직장이라고 끈질기게 다녀도 높은 자리는 다 남 줘
밀리고 밀려 말단이고
친구들이라곤 어쩌다 오랜만에 만나는 놈들이래야 양주병 구경이나 하지
자주 만나 허물없는 녀석들은 막걸리나 소주
기껏 해야 흉내 낸다는 폭탄주는
소주에 맥주
그것도 폭탄주라고 위장이 거부하여 다음날은 변기 올라타고
세상 원망은 혼자 다 한 불쌍한 주인공이 배역으로 떨어지니
절간의 불상들이 불쌍한 나의 친구들이라우
집안에서는 늘 그런 가장이거니 하여 신경이 무뎌져 가꾸던지 입던지
간섭이라곤 안하니 큰애가 8년 전에 해준 양복이 한 번 입고 잠들어 있어
이젠 깨우기도 겁나지만 깨울 일도 없습니다
엊그제 산행 중에 산우님들이
바지는 펑퍼짐하고 허리에 걸린 건지 궁둥이에 걸린 건지하며 우습디다
보기에 영감 티가 넘쳐흐른다는 뜻인데
이젠 그래야 쓰것구나!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맞다 맞아!
남들도 즐거워야지
집에 도착하여 집사람 얼굴을 보다가 갑자기 불이 들어옵니다.
아니다
그냥 그렇게 살자
갑자기 멋쟁이가 된다면 바람났다고 의심 할 것 같다
남들 땜에 내가 사는 날까지 고통스러움으로 고생은 싫으니....
안락하고 편하게는 살고 싶습니다.
그래
펑퍼짐하게 입고 펑퍼짐하게 살자!
이렇게 생각하니 속이 편안 합니다
멋대가리는 없지만 살맛납니다.
쓸데없는 위장을 하느니 아무 곳에나 주저앉았다 일어나 툭툭 터는
근심 없고 걱정 없이 사는 것도 살맛나는 인생 아닐런지...
남들 눈에 불편을 느껴 죄송하지만
e~편하고 좋은 세상 구속만큼은 피하고 싶다
당신이 고맙소!
빠끔히 열어놓은 창문사이로 장대비처럼 내리는 빗소리와
작게나마 들리는 나뭇잎 아픈 비명소리에
새벽 일찍 잠이 깨었소.
이젠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 전자 시계가
네 시를 채우려고 초침이 바삐 돌고 있는 것을
아무 의미 없는 짓인 줄 알면서 한 참을 쳐다보았다오.
그것이 내 마음속의 빈자리를 채워 주리라는 건 생각 못했고
차츰차츰
바늘 끝에 매달린 형상들이 보이기 시작 했지요
공허했던 날
날 위로 해준 사람들이 보였소.
당신이나 나나 사는 동안 늘 빈 곳이 수두룩했으니
그 공간을 공허라고 해 둡시다.
초침 끝에 당신의 형상이 보였소이다.
당신이 나의 빈 공간을 채워 준 사람이란 말이요
고맙소!
내가 당신 때문에 배우고 깨닫고 느꼈으며
그로 인해 후회도 하며 절망도 하며 미워도 하며
비극적이고 고통스럽게 산 날도 있었지만
사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소
그것들이 공간을 채워 준 선물이 아니겠냐 말입니다
당신이 고맙소.
당신이 내방 시계의 초침을 밀어 준 사람이니까요
갑자기 당신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기더니
빈 곳 없이 충만 해졌습니다
빗소리도 귀에 익숙해지고 낙수 소리도 그렇고
나뭇잎 아픈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당신의 형상을 보고 난 후 그렇습니다.
당신은 고마운 사람
오늘은 제가 당신의 공허를 채워 드려야 하는데
제가 보이시나요?
내소사 산행 일기
달리는 창 밖에는 붉은 진달래 노오란 개나리 하얀 벚꽃
서울에서도 경기도 땅에도 충청 전라도 땅에도 피어나
젊은 아이 엄마의 환성소리가 귀가 울더라.
봄은 남쪽에서 오래 머문 듯 보리밭에는 이삭이 오르고
배추꽃 유채꽃이 벌과 나비가 유혹에 못 이겨 지쳐 울고
농부는 이른 봄 채비를 마친 듯 한가롭고
이랑마다 비닐이 이불을 덮고 모종이 심어 질 날을 기다린다
남여치 골에 흐르는 물에 봄이 가득 실려 내리고
한껏 자라난 풀잎에서 가슴으로 파고드는 푸른 냄새는
찌들고 죽어 시들어 가던 육신이 가볍고 산으로 들어서는 마음이 풍요롭다
월명암 연 잎차 향에 숨을 고르고
늙은 보살의 고마움을 찻잔에 담았을 때 더운 차에 육신의 고통이 잠들고
쉬엄쉬엄 부는 바람 속에 편히 쉴 수 있었으니
잠시나마 부처가 되어 있었는가보다
새벽잠을 잊은 그대들이
누구를 위하여 배낭을 꾸렸는지는 모르나
한 알의 토마토 쪼개진 과일의 나눔이 아름다워 누구인가 기억하지는 못하나 감사하고
정오의 만찬에 즐거움이 아직도 배낭에 들었으니
고맙구려!
내가 왜 내소사를 찾아 가는가
달마의 흉측한 화상을 보고 싶어 가는가?
부처는 누구며 어디 있는가?
어제 또 늦은 과음이 괴로운 고행의 길을 택하였으니
오늘이나 내일이나 미련한 행자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사는가보다
직소폭포 앞에서 기운이 다하고 말았으니....
고인 물은 잔잔해도
봄은 물속에도 숨었는지 푸르다 못해 짙푸르다
용궁의 아이들은 양지바른 곳에 모여들어 그 고운 모습을 보여 줘
보고 싶어 그리워했던 임을 본 듯이 반가웠고
버들치 놀음에 한세월 시름을 잊었으니 지나고 나니 다시 그립네
산이 그린 그림은 빼어난 미모는 아니었으나
힘찬 폭포 하나만으로도 한 줄기 내려치는 물소리만으로도
자꾸 잊어버리는 삶의 욕심을 붙잡고 싶고
오늘은 하얗고 힘찬 섬광처럼 스친 빛 하나만으로도 즐겁다
고개이름도 가물가물
관음봉 오르는 언덕이 밉다
날개 푸덕거리다 죽어가는 나방처럼
바위에 누워 잠시 이승을 구경 하였으니 후회의 눈물이 땀으로 흘러내리고
엊저녁 과음한 죄를 자꾸 떨군다
내소사 품안에 들어있는 늙은 나무들의 비명은 극락전의 부처가 아시려나
몸통이 찢어져 울고 살붙이 도려낸 사이에 짙은 아픔이 곳곳에 있어도
틈새마다 새살 찢고 하얀 꽃망울로 울어
고목이라는 이름으로 질긴 생명을 부처님 마당에 펼쳐 놓고 희고 고운 꽃을 피워
아픔의 꽃도 때론 아름다울 때가 있으니 .....
늙은 벚나무아래 일백 여덟 번 고개 숙이고 기도도 하였고
꺼벙하게 늘어선 전나무 거리에서 일행은 잊어버렸어도
참선하며 기도하는 도량의 늙은 느티나무 그림자의 영상으로 가득 채우고 말았으니
등에 진 삶의 벼랑이 가볍기도 한듯하고
누구라 할 수 없는 동행해준 인연들
부처의 마음 같은 배품으로 감싸주어 고마우니
짧은 하루, 인연의 고리가 감사하다
여인들의 입맛 덕택에 죽 한 그릇에 소주 한 잔
그저 달콤하기만 했던 저녁
한 번 더 인연들에게 감사하며
스치는 듯 생각나는 여인네의 농담소리를 집사람이 들었을까 두려워
대문 앞에서 모두 다 버리기는 했지만
긴 여행의 피로를 털어버리기엔 그만인 밤
오늘도 역시
굿!
2008.4.13
에레나
카페 글방에서 역전다방 순이라는 제목을 보니 숫하게 흘러간 옛 생각이 난다
에레나, 수잔 ,메리, 한때 내가 불러야 했던 누이들 이름인데 기억에서 멀어진
그 많던 누이들은 어디서 사는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부터 금요일 오후나 토요일엔 미 8군 게이트를 찾아가
양색씨 누이들 입만 쳐다보고 살았다
지금의 짐작으론 미군들이 주말 퇴근 때 일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게이트 앞엔
누이들이 누군가를 마중 나와 있었다
츄잉껌 이라든가 과자 나 사탕을 먹으며 기다리다 팔짱을 끼고 가는 걸 보면
먹다 남은 것을 달라고 따라 다니며 보챘던 기억
미군들은 나올 땐 큰 봉지 여러 개씩 들고 나오곤 했는데 미제 물건이었다.
계급이 높은 미군들은 아리랑 택시를 타고 나오곤 하였는데
미군들과 사는 누이들이 꽤 있었다
평일 오후엔 미군들이 운동하는 연병장 철조망을 붙잡고
헬로 짭짭!을 외치며 무엇이든 얻어먹으려는 욕심으로 소리소리 질렀던
그 시절이 어제 같기만 하다
재수가 있던 날은 미군 군복을 얻기도 해 어머니가 밤새 뜯어고쳐 입기도 했고
꿀꿀이죽을 한 사발 얻으면 사남매가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나마도 못 얻은 날은 해병대 취사반에 매달려 군인들 밥도 얻어먹고
남산에 올라가 무당이 굿을 하고나면 남은 찌꺼기를 친구들과 나눠 먹고 살았기에
지금도 그 친구들과는 정이 각별하다
이럴 즈음에 슬픈 에레나 슬픈 수잔도 있었지
미군 사병들과 동거하며 미제 물건 장사를 하다가 해외로 전근을 가게 되면
이별을 해야 하는데 미제 물건 장사는 둘째 치고 새로운 미군을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니 이별이 얼마나 아쉬웠겠는가.
아이가 있는 수잔도 있었으니 아이가 있으면 생계가 더욱 어려웠으니
헤어지기 싫어 술에 절어있던 누이들을 보았다
튀기라하여 놀림감이 되었는데 백인 튀기보다 흑인 튀기 아이들이 깜둥이라고
더 놀리고 더 구박 하였다
초등학교 동창 중에도 서너 명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찌 사는 줄은 모르나
녀석들은 다행히 본토로 넘어가 미국인이 되어 살고 있다
미군이 되어 돌아 와 만난 녀석도 한 놈 있는데 이 녀석은 몇 년에 한 번씩 어머니와
배 다른 동생들 보고 싶다고 와서는 친구들 호주머니를 털고 가긴해도
오기만하면 반가운 녀석인데 그의 어머니가 서너 해 전에 한 많은 세상을
떠나셨다 어찌 보면 그 어머니가 에레나였다
양색씨라고 불렀고 뒤 돌아서면 창녀라고 수군거리던 누이들이었지만
쵸코릿과 사탕이나 껌 우유가루를 쪄서 나눠주던 맘 좋았던 사람들이다
숫한 세월이 흘러갔지만 처음 배운 영어 한마디 헬로우 짭짭!, 멋진 까만 차
아리랑 택시, 코큰 미군, 꿀꿀이 죽
철조망에 매달려 소리 지르던 나
에레나 누이 소매를 붙잡고 미군을 쳐다보며 헬로우 짭짭!
그랬던 에레나의 동생인 내가 벌써 수염이 허옇다
오징어와 나
회사 동료였으며 타 부서라도 그녀는 과장급 이였으며 평직원 이던
스물일곱 가을에 나와 그녀가 만났다
뚝섬에서 서울역까지는 출 퇴근이 같은 방향이어서 동행하는 날이 많았으므로
스스럼없는 대화는 나눌 수 있었지만 연정이 생기기엔 직책의 벽이 있었다
그래도 퇴근 무렵이면 가끔 만나서 데이트를 즐기곤 하였는데
난 참 으로 눈치도 없는 숙맥 이였는지 상대방 의견은 묻지도 않은 체
포장마차에서 먹는 삶은 오징어를 좋아해 1차는 삶은 오징어를 먹었다
그녀가 단 한 번도 싫다는 소리를 안 하는 바람에
그녀도 삶은 오징어를 좋아하는 줄 알로만 알았지
그녀는 회사의 영양과장 이였다
회사가 직접 운영하는 식당 이였고 하루 천명분의 식단을 관리 하였는데
전엔 나오지 않던 삶은 오징어가 가끔 반찬으로 나오기에 의아하여
포장마차에서 삶은 오징어를 먹던 날 그녀에게 말했다
요즘 내가 좋아하는 삶은 오징어가 식단으로 꾸며 줘 고맙습니다. 했더니
빙긋이 웃으며
식사하실 때 꼴찌로 오시면 남는 오징어 몽땅 준다는 말에 웃었던 기억이 난다
어영부영 만나다 보니 정이 쌓이는 바람에 그녀 없으면 공허한 날이 생기기 시작 하였다
시름시름 아파 병이 깊어 질 즈음 용기를 내어 손을 잡고
저한테 시집오십시오! 했더니 긍정도 부정의 대답도 없이 웃어 주기에
긍정으로 착각하고 좋아라 했더니 세월이 가고 또 가도
가는 정은 있는데 오는 정은 날로만 멀어지는 것이었다
그래도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찍고 찍었더니 고개를 끄덕여 주는 바람에
첫 만난 날로부터 백 일째 되는 날이 마침 일요일 이여서
남들 다 꺼린다는 정월 초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 초엔 먹고만 싶다면 밥상에 삶은 오징어가 가끔씩 올라 와 맛나게 살았는데
세월이 30여년 훌쩍 넘어 자식들이 곁을 떠나고
둘만 남아 식탁에 앉으니 젊은 시절 맛나던 삶은 오징어도 맛이 없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런 건지 요즘은 다투고 나면 밥상에 삶은 오징어가 올라오고
기분이 상해도 삶은 오징어가 올라오는데 오징어가 징그럽기까지 하다
오징어에 한이 많은 집 사람이 서운하거나 다툼 뒤엔 오징어를 삶아 놓는데
항의 표시이며 내가 꼴도 보기 싫다는 뜻인 것이다
말로 하자니 또 싸울 것 같으니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오징어를 삶아 내 놓는 것이였다
오징어 때문에 만났을 때는 좋았는데...............
오징어가 올라오는 날은 내가 미운 날이 되었으니 어쩌면 좋을까?
오징어 때문에 만나서 말년엔 오징어처럼 비비꼬이는 우리 둘의 사랑 이야기가
오징어의 변천사와 함께 우습기만하다
영수 엄마
그 당시 후암동 종점엔
원형 로터리가 있었는데 가운데엔 지게꾼 리어카꾼들의 휴식처였고 일터 였다
용산고등학교 담장을 끼고 해방촌 올라가는 길엔 오징어 튀김, 호떡, 해삼 멍게 장수들이
생계를 유지 하였고 나의 부모님도 이곳에서 리어카에 야채를 파는 야채 장수 였으며
생선장수, 과일장수, 옷이나 신발 파는 이들이 구청에서 나오는 단속반에게 쫓기며
힘든 생활을 하던 때에 영수엄마는 허름한 집이지만 종점에서 물 국수 장사를 하였던 분인데
삶이 어려운 사람들이 한 끼 때우려 많이들 먹고 가곤 하였다
맛이라면 야 지금처럼 좋은 재료를 쓰질 않았지만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마셨던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없던 시절에 그나마 국수 한 그릇도 행복 이였다.
지금 생각에 멸치 부스러기, 다시마, 무, 파를 넣은 것 같기도 한 것은
우려 낸 보자기를 풀러놓으면 골라먹는 재미가 있었는데 성한 멸치는 없고
간혹 지푸라기도 나오고 멸치 대가리만 보일 뿐이었는데 무는 간이 베어 먹을 만 했다
이때가 열 살 쯤 되었을 땐데 국수가 얼마였는지 기억은 없으나 한 그릇 사 주길 바라며
부모님을 쳐다봐도 국수 사 줄 여력이 없었으니 남들 먹는 것 쳐다보는 재미도
쏠쏠 하였을 나이였다
간혹 영수 엄마가 불러서 가면 부자들이 먹다가 맛이 없다고 남긴 것을 주곤 했는데
그걸 얻어먹는 재미로 누가 들어가나 남겼나하여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소금에 절인 김치인데 고춧가루도 들어갈 뚱 마는 둥 허연 것을 썰어 고명처럼 얹어주고
종지에 김치 몇 조각 주는 게 고작 이였는데 그땐 내게 최고의 음식 이였다
단속반들이 하도 설쳐대는 바람에 골목으로 쫓겨나는 날엔 야채장사는 생물장사인지라
못 팔면 버려야 할 판이니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 속이 오죽 했을까
장사가 힘들어 일숫돈을 얻고 매일 돈을 갚고 도장을 찍으니 일숫돈 갚는 걱정을 했던
그 시절에 영수 엄마는 구세주였다
쫓겨 다니며 장사하지 말고 처마 밑에 좌판을 놓고 장사 하라는 배려를 해준 것이다
영수 엄마는 은인 이였고 지금껏 어머니는 그 공을 못 잊어 하신다
야채가 시들면 다듬어 김치를 만들어 팔게 해주고 생선장수들이 잘라 버리는
대가리며 꽁지며 얻어다 찌개를 끓여 보리밥을 해 나누어 먹던 정이 많으신 아주머니
엊그제 어머니가 비오니 심심하다며 영수네 집엘 가고 싶다고 하셔서
비 맞으며 밭에 나가 호박잎, 호박, 청양고추 약 오른 놈, 어린 들깨 잎, 노각오이,
챙겨서 어머님 모시고 후암동엘 갔더니
두 달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수술하시고는 사람도 몰라보시게 되어 누워 계시는데
들고 있던 보따리 풀지도 못하고 소리 내어 우시는 모습에 눈물이 글썽거려
비 맞으며 후암동 거리를 배회 하였다
그래도 해방촌과 후암동 도동이나 양동 남대문시장은 나를 키워 준 곳이다
이태원은 국민학교를 졸업했으니
날 낳아 준 고향보다 더 애착이 가는 곳
그곳에서 살 비비며 머리 쓰다듬어 주고 불어 터진 국수라도 챙겨 주던 어른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씩 이별을 한다
이제 다시 못 볼 거라며 차속에서도 우는 어머닐 보니 한참을 힘들어 하실 것 같더니
한 사흘 음식조차 거르시려한다
어제 오후엔 억지로 모시고 가 병원에서 영양제를 주사 하였다
물 국수의 옛 추억이 새롭고 영수 엄마의 옛 모습이 떠오른다.
생선찌꺼기 잡탕 그릇도 눈에 선하고.......
복 없는 형수
행촌은 형이 한 이십여 년 전에
다리를 절며 형수의 허리를 붙잡고
개울 건너갔다
복잡한 도시에서 어수룩한 사내는
식구는커녕 제 앞가림조차 힘들어하다
무면허 오토바이에 골절상을 당한 장애인
어쩔 수 없어 양계장 문간방에 정착하였다
이를 악문 형수는 몇 해만에 논밭 장만하고
형도 양계장일로 소일하여 그럭저럭 살다가
신도시 들어 올적에 마지막까지 버티다
울며 겨자 먹기로 보따리 쌋다
난다 긴다 하는 세상에 나온 어수룩한 인생
오갈 데 없어 한 잔술 한 잔술 하더니
시름시름 병들어 황천 갔다
형수가 울다가하는 말이
큰 애가 보상금 다 털어 먹었다고
울며 그러네
참말로
형수도 지지리 복없는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