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통역안내사 협회와 국제교류
- 목 차 -
1. 출국과 나가사키시내 견학
2. 국제교류회(釜ㆍ長 국제교류회IN나가사키)
3. 국경을 초월한 민간교류(雲仙 獻花) 및 島原견학
4. 도조(陶祖)이삼평의 有田焼
5. 국제교류의 물꼬를 트면서
6월9일(수)
하늘길, 철길로 나가사키에
나가사키 통역안내사 협회와 교류를 위해 떠나는 6월9일은 초여름 날씨답게 따가웠다. 아침 여덟시 정각 공항대합실에서 만난 일행 8명은 다시 한 번 일정을 점검해야 했다.
우선 09:40분 김해발, 10:30분 후쿠오카공항도착, 10:42분발 나가사키행 고속버스시간을 맞추기 위해 갖고 가는 짐 모두를 기내에 싣도록 하였다. 일본은 입국수속 때 외국인은 지문채취 때문에 꽤 수속시간이 걸린다. 12분만에 입국수속을 끝내고 고속버스를 타는 터미널까지 달음질을 쳐야 한다. 만약 놓치게 되면 1시간을 더 기다려야 다음차를 탈 수 있기 때문이다. 승무원에게 부탁하여 제일 앞서 입국수속을 끝낸 나는 차표를 구입하려 하였으나 뒤에 따라오는 일행이 약간의 지체가 있어 결국 10:42분 나가사키행 버스는 놓쳐버렸다. 차선책으로 구상해 둔 택시2대에 분승하여 하카타(博多)역으로 가서 JR특급 ‘카모메’를 타기로 하였다. 당초 예상시간보다 30분이 지연되어 도중에서 나가사키의 아라키 케이코(荒木惠子)씨에게 전화로 상황을 알려 주었다. 나가사키행 ‘카모메’를 탄 일행은 고즈넉한 일본 농촌풍경의 분위기에 젖어 있는 동안 2시간의 기차여행은 종착지 나가사키역에 13:30분 우리 일행을 내려놓았다.
십년지기를 만난 듯
홈에 내리자마자 나가사키 회원 4명이 “반갑습니다. 어서오세요” 라는 커다란 펼침막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서둔 탓으로 다소 피곤함과 짐을 맡기려고 역에서 도보 3분 거리의 숙소이자 회의장인 ‘뉴 나가사키 호텔’로 가서 우선 여장을 풀고 이동하기로 하였다.
나가사키 짬뽕식당 란카이보
이날 점심은 미리 ‘나가사키짬뽕’으로 약속되었기에 택시 3대에 분승하여 중화요리 란카이보(蘭桂坊)에서 나가사키명물 ‘짬뽕’으로 점심을 마쳤다. 일행 모두는 知己라도 만난 듯 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마중 나온 荒木惠子씨를 제외하고 모두 영어통역사였으므로 일본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우리일행과 영어로 대화하여 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원폭자료관
이곳은 3개의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어있는데 제1전시실은 1945년 8월9일을 들려준다. 폭탄이 터지던 11시2분에 멈춰버린 괘종시계를 보면서 제2 전시실로 들어가면 숯덩이가 되어 나뒹구는 시신의 동영상과, 고열로 유리병과 함께 녹아버린 사람의 손, 철모에 달라붙은 머리 뼈 등이 참혹하게 전시되어있다.
원폭투하 때의 장면
여기서 長崎原爆투하과정과 위력, 그리고 피해상황을 잠시 살펴보자. 1945년 8월9일 B29는 고쿠라(小倉)상공에 도달하였으나, 전날 야하다(八幡)폭격으로 연기와 운무로 폭탄투하를 단념하고 제2목표인 나가사키로 날아가 이날 11시2분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뚱보라는 별명의 원자폭탄
사람의 머리뼈가 녹아 엉킨 사진
불덩어리가 방출된 대량의 열선(熱線)은 폭발 3초 정도 후 이상한 고열로 지상을 뒤덮었다. 지표면의 온도는 폭심지에서 3,000도에서 4,000도, 1km 떨어진 곳에서는 대략 1,800도, 1.5km 부근에서 600도 이상에 달한다고 한다. 그리고 폭심지에서 4km떨어진 곳에서도 바깥에 있던 사람은 열상을 입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나가사키 인구 24만 명 중 사상자 약15만 명(사망 7만여 명 부상자 7만 여명)이었다고 하니 그 위력을 짐작할 만하다
고온에 녹아 엉겨 붙은 유리병
사람의 손과 뼈, 유리가 녹아 붙은 사진
우리 일행은 한국인 피폭자의 육성증언을 영상물로 통해 유심히 들었다. 지구상에서 이와 같은 전쟁은 다시는 없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같은 생각이겠지만, 우리는 심심하면 ‘불바다’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 현실이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グラバー園(글로버 공원)
글로버 공원의 표지석
「グラバー園」은 Thomas Blake Glover(1838~1911년)의 일본식 발음 이름이다. 글로버는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1859년 상해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건너와 ‘구라바 상회’를 설립, 무기류를 판매하여 나가사키 굴지의 무역상이 되고, 막부말기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고비마다 관여하였다.
1870년에 ‘구라바 상회’가 파산하였으나 타카시마(高島) 탄광에 손을 댄 후 미쓰비시(三菱)의 고문이 되었다.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여 자녀는 귀화하여 쿠라바(倉場)로 성을 고쳤다. 그는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서양문물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여, 일본의 개화를 이끈 인물들을 영국으로 유학 보내는데 앞장서서 일본을 세계열강으로 만든 일등 공신이기도 하다.
글로버 공원에서 한ㆍ일 단체 기념사진
앞줄 맨왼쪽 荒木惠子, 네 번째 島田 美枝子, 다섯 번 째 田崎 徹, 뒷줄 복판 高木直子
이 공원에는 글로버의 저택(원형)과 그가 사용하던 유물들이 잘 보존되어 귀중한 관광자원으로 잘 활용하고 있다. 특히 이곳은 일본 3대 야경의 하나인 나가사키를 조망하기에 좋은 위치로 야간에는 젊은 아베크족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글로버 저택
데지마(出島)
데지마 입구
나가사키는 항구도시로서 부산과 흡사한 점이 너무 많은 도시이다.
쇄국시대에도 외국과의 창구로 유일하게 교역을 하고 조선시대에는 표민소(漂民所)를 두고 조선의 어부가 표류하여 일본에 기착하면 일단 나가사키 표민소로 보내 그곳에서 일정한 과정을 거친 후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데지마에서 기념촬영
일본은 서양은 물론 중국과의 교역도 나가사키를 항상 창구로 활용하였다. 이와 같은 열린 공간이 데지마(出島)라는 조그만 인공섬이다. 마치 부산의 초량왜관과 거의 같은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문을 연 시기와 폐쇄된 시기도 거의 같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이 조그만 열린 공간(약4천 평)을 통해 서양의 선진문물을 여과없이 받아들여 일본을 근대국가로 만드는데 최대한 활용하였다.
데지마의 미니어처
초량왜관이 10만여 평에 500~600명의 일본인이 상주했는데 비해 데지마는 평소에는 불과 20여명이 상주하면서 이들은 먼 에도(도쿄)까지 막부장군에게 참부(參府)를 했다. 오늘날 일본의 의학, 조선, 제철산업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당시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로부터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양은커녕 초량왜관 안에 가두어 놓고 바깥출입을 못하게 했다. 물론 임진왜란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당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데 너무나 인색했던 것은 감출 수없는 사실이다.
데지마의 수문장
이날 마지막 견학지인 데지마에 도착하자마자 데지마 복원정비실 실장 마미쓰카 쥰지(馬見塚 純治)씨와 학예관 야마구치 미유키(山口 美由紀)씨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마미쓰카 실장과 야마구치 학예관의 설명 장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부산도 초량왜관을 복원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시기가 도래할 것이다. 그때에는 2006년 복원을 끝내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는 데지마에서 많은 자료와 경험을 배워야 할 것이다. 오늘의 견학은 교류회 시간관계로 데지마를 끝으로 마무리 하였다. 19:30분부터 교류회가 개최되기 때문이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