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문화 원고
누운 시혼을 깨우다(9)
여주 땅에서 북벌 숙의는 계속되고
이완(李浣) 장군의 유택을 찾아
글 사진 구능회 ․ 최성균
봄볕이 따사로운 5월 중순 경, 경기도 여주(驪州)에 있는 ‘이완(李浣)’ 장군의 묘소를 찾았다. 공(公)은 1602년(선조 35년)에 태어나서 1674년(현종 15년)에 별세하였다.
자(字)를 징지(澄之), 호(號)를 매죽헌(梅竹軒)이라 하였고, 시호는 정익(貞翼)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아버지 이수일(李守一) 장군의 뒤를 이어 호국(護國)의 간성(干城)으로 크게 활약한 어른이다.
공은 1624년, 무과에 급제하여 만포 첨사와 숙천 부사 등을 거쳐 무장(武將)으로서의 고위직인 평안병사에 올랐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도원수인 김자점(金自點)의 별장(別將)으로서, 정방산성을 지키다가 적들을 ‘동선령(洞仙嶺)’으로 유인한 뒤에 복병(伏兵)을 일으켜 적들을 크게 물리쳤다고 한다.
효종(孝宗)께서 보위(寶位)에 오른 뒤에는 북벌(北伐) 선봉부대인 어영청의 대장으로 임금을 보좌하면서, 군기 확립과 신무기 개발, 성곽의 수축과 개·보수, 둔전(屯田)을 통한 식량 확충 등의 중요한 시책을 주도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대청강경책(對淸强硬策)의 상징인 북벌을 시종일관 추진하던 효종께서 재위 10년 만에 별세하자, 북벌정책도 선장을 잃은 배처럼 표류하다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를 몹시 안타까이 여기며 애통해 했던 공은 아래와 같은 시조를 남기며, 그 아쉬운 마음을 달래야만 하였다.
군산(群山)을 삭평(削平)턴들 동정호(洞庭湖) 너를랐다
계수나무 버혀 내면 달빛 더욱 밝을랐다
뜻 두고 이루지 못하니 그를 슬허 하노라
만년에는 조정의 부름이 더욱 잦고 연거푸 대임(大任)을 맡게 되어, 형조와 공조의 판서와 군무를 총괄하는 병조판서도 여러 차례 제수(除授) 받았으나, 이를 여러 번 사양하며 나아가지 않았다. 마지막 관직으로 우의정(右議政)을 잠시 맡았으나, 이 또한 곧 물러났다. 공의 성품은 강직하고 깨끗하였으며, 결단력과 함께 용기도 출중하였다. 공과 사를 분명히 하였으며, 시시비비를 엄정하게 하여 때로는 임금 앞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 면모를 보였다. 일찍이 부친의 뒤를 이어 무장(武將)으로 입신하여, 어려운 시절에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공은 어린 나이에 시재(詩才)도 보였는데, 공의 묘소 입구에는 15세에 지은 시 구절을 다음과 같이 비석에 새겨 기념하고 있었다.
鴨 水 傾 爲 酒 (압수경위주) 압록강 물로는 술을 빚어서 마시고
遼 山 擧 作 肴 (요산거작효) 요동의 산들로는 안주를 만들리라
대단히 호방하고 기상이 넘쳐나는 시이다. 일생을 나라위해 헌신한 공의 묘소를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저물어 가는 5월의 햇살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여주는 역사 유적이 많이 있다. 그 중 특별한 것이 세종대왕 영릉이 있고, 또한 한글로는 같은 영릉이지만 편안할 녕(寧)자 영릉이 있다. 이 영릉은 효종의 능이다. 아비 인조가 겪은 국치 병자호란의 항복 수습책으로 세자(소현)인 형과 함께 이국의 심양에서 8년이나 인질생활을 했던 봉림대군으로 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왕위에 올랐던 분이다. 효종의 재위 10년은 북벌(北伐)의 계획과 실행에 뜻을 둔 기간이었다.
심양(瀋陽)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중국의 새 왕조가 된 청국(淸國)에 국치의 한을 되돌려주는 일, 그 일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이가 문관으로서는 송시열이요, 무장으로서는 이완 장군이었던 것이다.
묘하게도 여주에는 이 세 분의 유적이 모여 있어 흥미롭다. 효종의 영릉이 있고, 정조 때 세워진 송시열을 모신 사당 겸 서원인 대로사가 있고, 오늘 이야기하는 경주 이문의 빛나는 조상 이완 장군의 유택이 그것이다. 마치 구수(鳩首)회의를 하듯이 가까이 머리를 맞대고 숙의(熟議)하는 모양새이다.
효종 영릉을 참배하고, 이 영릉을 우러르듯 서향(西向)으로 모셔진 송시열의 대로사 영정을 돌아보고, 북별의 실제 실행역인 이완 장구의 묘역을 돌아보노라니 이런 잘 짜진 역사탐방 길이 더 없이 의미 깊었다.
이완 장군은 나중에 우의정에 올랐다. 정승을 지낸 자들에게만 허용했다는 신도비(神道碑)와 유택 사이에는 100여 미터 상간에 전답이 펼쳐져 있었고, 마을 입구에는 앞에서 언급한 15세 어린 나이에 장군이 지었다는 호기찬 한시 한 구절을 새긴 시비가 서 있고, 그 맞은편에는 자그마한 주차장도 마련되어 있다. 이정표 팻말이 가리키는 대로 조금 널따란 논둑길을 건너 산그늘에 들면 곧장 장군의 유택이 나온다. 그러나 잠깐, 처음 만나는 묘소는 장군의 아드님 것이고, 이 위편에 계신다.
유택은 다른 분들의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손길을 덜 받은 듯했다. 떼도 잘 안 살고, 약간씩 드러난 흙에 할미꽃이 허연하게 피어나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장군의 모습일까. 묘역 바닥은 이끼가 잔뜩 끼었고, 응달에 잘 나는 조개나물 보라색 꽃이 널려 피어 있구나. 너무 응달져서 그런 것 같았다.
그런데 말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을 보게 되었다. 석물(石物)에 새맛이 돈다. 장군의 유택임을 설명하는 설명판을 읽어보고 그 옆의 자그마한 오석의 기념비를 읽어본다. 기존의 망주석이며 장명등 동자석 등을 도난당해 새로 마련했다는 내용이다. 어쩐지 우거진 소나무 숲이 밖에서 보기엔 묘소가 있을 것 같지 않을 정도이더니만 그런 불경스런 일이 있었구나. 명패에 해당하는 비석만은 훔쳐가 봤자 쓸모가 없으니 손을 안 댔구나. 세상에 영의정을 지내고, 북벌 책임자로서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에 실명의 등장인물이기도 한 어른의 유택을 누가 손을 댔단 말인가.
어떤 억하심정이나 원한을 샀던 것일까? 경주 이문의 후손들은 얼마나 안타깝게 여겼을꼬. 생각하니 한심했다. 역사를 우습게 가볍게 보는 현실에서 이런 묘소 훼손행위를 당연시 아니면 가볍게 여기는 풍조를 동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반성했다. 도굴범이나 문화재 훼손범으로 엄벌할 방법이 강구돼야 할 것이다.
이런 느낌을 시조 한 수로 적어본다.
이완 장군 유택
우상에 대장인데 석물에 손을 댔나
가깝다 효종 녕릉 이끼 낀 북벌의 꿈
봉분에 할미꽃 가득 슬픈 웃음 짓는다
장군의 유택은 영동고속도로 여주IC에서 가깝다. 명성황후 생가에서 4킬로미터 거리. 내비 주소는 상거동 산 19-18이다. 비단 후소들의 발길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의 잦은 발길이 이끼와 응달을 지워내기를 기원해 본다.
글 ․ 사진
구능회
방송인, 수필가. KBS충주방송국장과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방교수 역임. (현) 노량진문화원장
최이해
여행작가, 시조시인,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