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오직 마음만 있고 대상은 없다.(唯識無境)
4) 유식 논사들의 주장에 반문해 본다.
유식 논사들의 주장대로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고,
모든 것이 식뿐’이라고 하지만,
세상사 이치를 보면 도저히 그렇지 않다. 앞의 반문을 돌이켜 보자.
마음이 세상을 만들었다면, 또 마음을 떠나서 마음의 바깥에는 세상이 없다면,
마음이 사라질 때 세상도 사라져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가 않다.
마음으로 만든다면 내 마음대로 되어야 하지 않는가?
당연한 생각이다. 당연한 생각.
그런상식에서 의문을 품고 공부는 시작된다.
그래서 일단 워밍업 수준으로 앞서 일체유심조를 꺼내면서 이야기를 전개하였다.
일체유심조의 가르침은
‘마음먹기 나름’, ‘마음먹은 대로’라는 뜻이 아니라는 생각은
이 글을 보기 전에도 했을 수도 있다.
혹시 ‘그럴 수도 있겠구나’ 또는
‘그럴지도 모르겠다’하는 생각도 없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일체유심조를 언급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마음’이 결코 ‘의지’의 의미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 다음 제8식을 언급하면서 ‘마음’ 또는 ‘식’이 ‘인식’이나
‘분별’이라는 의미에 머물지 않고
‘세상을 나타내고 유지시킨다’는 측면까지 언급하였다.
다시 말하면 유식사상에서 말하는 ‘마음’이나 ‘식’이 그렇게
상식에 머무는,만만한 용어는 아니다.
따라서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반문하면서 유식사상에서 말하는
‘마음’ 또는 ‘식’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보자는 의도가 있다.
상식선에서 출발하여 하나씩 반문해 보자.
1) 세상의 일과 유식의 가르침이 서로 어긋나지 않는가
만약 오직 안의 식만 있고 바깥의 대상은 실제로 있지 않고
마음에 의해 바깥의 대상과 비슷하게 일어난다면,
즉 바깥 대상은 마음에 의해 일어난다면, 다음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첫째, 장소가 정해져 있다.
만약 마음에 의해 생겨난다면 어디 가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금강산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처럼 일정한 장소에서만 보이고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않으니,
금강산은 마음 밖에 실제로 있다.
둘째, 시간이 정해져 있다.
만약 마음에 의해 생겨난다면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오직 맑은 날에만 해를 볼 수 있고 비가 올 때나 밤중에는 볼 수 없다.
이처럼 일정한 시간에서만 볼 수 있고 다른 때에는 그렇지 ?으니,
태양은 마음 밖에 실제로 있다.
셋째, 유정(有情)이 한정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하나의 꽃을 감상한다.
만약 오직 마음만 있고 바깥 대상이 없다면 어떻게 여러 사람이 함께 꽃을 볼 수 있는가?
이와 같이 한 사람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여러 사람이 다 같이 꽃을 볼 수 있으니,
바깥에 실로 꽃이 있다.
넷째, 바깥 대상에는 참다운 작용이 있다.
예를 들면 꿈속에서 음식을 먹더라도 배가 부르지 않다.
마음에 의해 드러난 꿈속의 음식은 참다운 작용이 없다.
그런데 꿈과 달리 생시에는 음식을 먹으면 배가 부르다.
이처럼 생시의 음식은 참다운 작용이 있으니, 이는 마음 밖에 실로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상 네 가지 반문을 유식 논서에서는 “처소, 시간은 결정적이고,
유정신과 작용은 결정적이지 않다.” 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상식선에서 분명히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이다.
금강산은 금강산에 가야 볼 수 있고
해는 맑은 낮에만 볼 수 있는데,
만약 마음이 만든다면 어디서나 언제나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만약 마음이 만든다면 내 마음이 만든 꽃이니 나에게만 보여야 하는데,
왜 다른 사람에게도 보이는가?
그것은 꽃이 마음 밖에 실제로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또 전적으로 마음이 만든 꿈속에서는 아무리 밥을 먹어도 배부르지 않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 있을 때는 다르다.
그러니, 마음 밖에 바깥 대상이 실제로 있다.
어찌 마음이 바깥 대상을 만들었다고 하는가?
이것이 반문의 요지이다. 최소한 이 정도 반문은 있어야 한다.
혹시 ‘이런 질문을 하면 어떻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질문해야 한다.
이러한 반문에 과연 어떻게 답변해야 할까?
일단 한 가지는 정리하고 가자.
‘주장A를 증명하기 위해 근거<가>를 내세웠다면, 근거<가>는 주장 A에만 적용해야 한다.
A 와 반대되는 경우에도 적용된다면 주장 A의 근거로서 역할을 할 수가 없다.
’ 다시 한 번 ‘주장A를 증명하기 위해…’ 문장을 잘 읽어두길 바란다.
유식 논사들은 첫째와 둘째 질문에 대해 꿈으로 답변한다.
아시다시피 꿈은 마음이 만든 세상 가운데 전형적인 예이다.
우리 모두 꿈속으로 들어가 보자.
꿈속에서 금강산을 보고자 한다.
그런데 꿈속이라도 금강산이 보고 싶다고 바로 금강산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꿈속에서도 금강산을 보기 위해 나름대로 움직여야 한다.
걸어서 가든, 차를 이용하든, 아니면 수퍼맨처럼 날아서 가든,
꿈속에서도 금강산에 가야 금강산을 보게 된다.
감이 잡히는지?
앞서 반문처럼, 만약 금강산에 가야 금강산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금강산은 마음 밖에 실제로 있다고 주장한다면,
꿈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니 꿈속에 있는 금강산도 실로 있어야 한다.
그런데 꿈속의 금강산은 실제로 있지 않다.
따라서 그 반문은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 힘든 이도 있을 것이다.
‘주장 A를 증명하기 위해…’ 부분을 다시 한 번 살펴보시길.
특정 시간에 태양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셋째 질문,
이 부분 때문에 우리는 바깥세상을 마음이
만들었다는 생각에 동의하기 참으로 힘들다.
나도 그렇게 보고 있고, 너도 그렇게 보고 있는데,
왜 그것이 마음으로 만든 것이지?
유식 논서에서는 공통된 업(共業)으로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인간에게 물로 보이는 것이
아귀들에게는 그들의 공통된 업에 의해 피고름으로 보인다.
아귀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힘든 이들에게 다른 예를 들겠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개 짖는 소리가 ‘멍멍’으로 들리지만
미국 사람들에게는 ‘바우와우’로 들린다.
나도 ‘멍멍’으로 들었고 너도 ‘멍멍’으로 들었지만,
정작 개는 ‘멍멍’이라고 짖지 않았단다.
‘멍멍’은 한국 사람들의 공통된 업이다.
말하자면, 함께 보았더라도 그것이 마음 밖에 틀림없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다.
넷째 질문, 이 역시 꿈으로 답변한다.
예를 들면 가위에 눌려 식은 땀이 흐르기도 하고,
몽정하는 경우처럼 꿈속에서도 참다운 작용이 있다.
따라서 참다운 작용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이 실유하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이상 네 가지는 유식무경을 힐난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이 논쟁은 <유식이십론>에도 언급되는 내용이다.
이것은 유식무경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논리가 유식무경을 반박하는데 근거가 되지 않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첫댓글 일체유심조를 언급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마음’이 결코 ‘의지’의 의미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