갬성 제주 09
이중섭 미술관
중섭 仲燮이 제주 서귀포에 살아 숨쉰다는 것은 큰 위안입니다
한라 영봉과 서귀포의 푸른 바다를 누리며 1956년 이 땅을 떠난 한 화가의 영혼이 머무는 아름다운 공간을 찾았습니다
이중섭 미술관
1996년 이중섭 기념관을 서귀포시에서 개관하고 이중섭 거리를 조성하고
1997년 그가 살았던 집을 사들여 복원하고
2002년 이중섭 전시관을 개관하고
2003년 2종 미술관으로 등록하고
2004년 1종 미술관으로 등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기념 전시 미술
용어의 변천은 곧 관련 법규의 내용을 충족시키기 위한 역사일 것입니다
어엿한 1종 미술관이 되는데는 가나아트와 현대화랑이라는 굵직한 중앙 미술계 두 거인의 협력에 크게 힘입었던 것입니다
소장 작품의 명성을 1급 수준으로 끌어올려준 쾌척 기부는 미술관 1층의 상설전시장 이중섭관의 전시내용을 빛나게 했으며
아울러 2층의 기획전시가 가능하도록 하여 후속 기증자가 늘어나는 선순환을 주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가의 연보를 읽습니다
세상에나
40년만 살고 돌아갔습니다
1916년부터 56년까지
그 사이에는 일본 강점기와 광복과 전쟁이 들어 있군요
1950년 12월 원산에서 부산으로 후송되었고
피란민 분산정책에 따라
51년 1월에 제주로 왔군요
3일을 걸어 서귀포로 왔고
이장네 부엌방 1.4평 좁은 데서 4식구가 근 1년을 지내고 다시 부산으로 들어 갔습니다
미술관에 앞서 들른 살던 집에서 부엌 안쪽의 공간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오글오글 콩나물 시루가 자연스레 연상되더군요
그래도 이장 송선생에게 고마움을 담아 초상화를 그려주었고
반찬에 보태려고 서귀포 바닷가에서 뜯어온 해초와 잡아온 게들과
아이들이 나무를 타고 노는 서귀포의 추억 등등이 작품으로 남았다
이런 연보를 들여다보며 콧등이 시큰해졌습니다
미술관에 걸린 그의 작품은 유화 소품 3점과 은지화 2점이 전부이고
아내 마사코 씨에게 보낸 그림이 곁들여진 엽서와 편지들이 주를 이룹니다
그는 1956션에 돌아갔는데
아내 마사코 씨는 생몰 연대가 비어 있군요
살아 있다면 100세는 넘었을 것인데
장수하는 나라 일본인지라 가능성도 있겠다 싶습니다
남덕 南德 님
중섭이 일본 유학시절에 친구의 소개로 만난 마사코 씨는 일본 패전 후 마지막 송환선을 타고 원산으로 건너와 결혼에 이릅니다
그 때 조선식 이름을 중섭이 지어주는데
남쪽에서 온 덕스러운 분
의미를 담았답니다
아들을 셋 낳았는데 첫째는 백일해로 잃어버리고
두 아들과 함께 1952년 일본으로 들어갔습니다
정치인은 미워해도
일반 시민들이야 인연따라 사연따라 지극히 인간적인 사랑의 대상일 뿐입니다
저는 중섭을 시인 구상 선생님 댁에서 작품으로 처음 만났습니다
구상 선생님이 대학 시창작 강의를 가르쳤는데 인간 존경의 대상이 되어 수 차례 여의도 시범아파트를 찾아갔었거든요
두 작품 중 하나는 서귀포의 추억 인가
아이들이 나뭇가지를 타고 짙푸른 바다가 있고 낡은 베니아 합판 몇 올이 뜯겨져 나간 채 호름한 액자에 갇혀 구 선생님 댁 거실의 피아노 위에 걸려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은지화로
천도복숭아 하나가 가득찬 손바닥 만한 아크릴 액자에 들어 있었지요
은지화는 당시 열악한 창작환경에서 등장한 화구일진대
못이나 딱한한 필기구로 선묘를 한 후에 담뱃진으로 선을 살려내는 일종의 상감기법이 도입된 중섭 만의 독특한 재질입니다
구 시인은 이 은지화를 설명하면서 중섭이 자신을 문병오면서
이보게 상준이 신선들이 먹는다는 천도를 줄 테니 이 거 먹고 얼른 낫게
했답니다
지금 두 작품이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도 시인과 화가의 인연을 연보 읽기로 되짚는 일이 여간 살뜰하지가 않았습니다
일본 유학시절에 처음 만나고
원산에서 문집 응향 을 꾸며주고
일본으로 건너간 아내를 만나볼 수 있게 주선해주고
전쟁 후 서울 등지의 화단 활동에 배경이 되어준 구상 시인
그는 5.16군사혁명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간청으로 하와이 주립대학 교환교수로 떠나 딴 세상을 살죠
중섭은 여러 부지런한 활동과는 정반대로
긒기야 행려병자 신세가 되어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타계합니다
그의 죽음이 격동의 좌우 대립과 반목이라는 시대상에 가려지고
시간은 한참 흘러갔습니다
은지화 3점이 미리 대구미문화원 책임자의 감식안에 들어 뉴욕 미술관에 기증 소장되어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고
사후 20년이 넘어 화단의 새로운 집중조명을 받게 됩니다
전시회가 여러 곳에서 열리고
서귀포시가 중섭을 껴안게 되었지요
구 시인도 그 무렵 서울로 돌아와 중앙대 예술대에 재직하게 되었고요
제가 서귀포 이중섭 미술관을 찾았던 3월2일에 2층 기획전시관은 전시 교체중이었습니다
그래서 7일에 또 갔습니다
이중섭 친구들의 화원 畵園
40밖에 못 산 중섭보다는 조금 길게 산 동년배 동시대의 작가들 작품들이
이 미술관 소장품 중심으로 걸려 있었습니다
물론 앞서 언급한 가나아트와 현대화랑 이후의 여러 기증자들의 선심에 의해
작지만 야무지고 알찬 진본들을 감상하는 재미가 특별했습니다
모두 24명의 작품 24점이었습니다
대학에서 만났던 이제는 고인이 된 교수님들의 이름도 찾아 뵈었습니다
기록을 위해 그림 동산에 함께한 중섭의 친구들 이름자를 옮겨적어 보았습니다
권옥연 김병기 김영주 김환기 남 관
박고석 이대원 백영수 장두건 이중식
이봉상 전혁림 도상봉 박래현 박수근
박 돈 백남준 황규백 이성자 손응성
박영선 이응노 이경성 유영국
미술관 3층 옥상은 이중섭 미술관에서는 특별한 공간입니다
그가 자주 찾았다는 바다가 내려다 보입니다
그의 시선으로 코앞에 떠있는 문섬이며 섶섬을 끌어당겨 봅니다
미술관 마당도 거닐어봐야 합니다
그의 얼굴이 새겨진 소의 말 조각상도 돌아봅니다
소가 그의 힘이 되었던 가난한 유년이 우뚝 뒷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듯 조형된 그 자리에 우뚝합니다
미술관을 나와
그가 머물다간 초옥을 다시 들여다 봅니다
엊그제 활짝 피었던 목련이 황망히 지고 있습니다
일찍 피고 서둘러 지는 봄꽃은 중섭의 생을 대변합니다
널찍한 마당이 울적한 심정에 위안이 됩니다
저 아래 주차장까지는 이중섭 공원입니다
들어섰던 민가의 흔적을 그대로 살린 꽃밭과 나무들 사이로 중섭의 좌상과 벤치가 있습니다
사진 찍기 좋은 곳입니다
고개 하나를 죽 이어 꾸며진
이중섭 거리를 배회합니다
중섭의 삐뚤빼뚤 선들을 살린 부조물 보도블럭이며 벽화며
문화상품으로 개발된 중섭표 디자인물건들을 파는 가게며
사진 찍을 자리 등등
재미를 많이 주는 특화된 거리입니다
사진과 함께
살아 있는 중섭의 이곳저곳을 스케치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