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선사 탑비에 '遙嗣牧牛和尙(멀리 목우자 지눌 스님의 법을 이었다.)'라고 하였다.
목우화상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은 범일이 세운 사굴산문 스님이고,
보각국사 일연 스님(1206-1289)은 도의가 세운 가지산문 스님이다.
일연 스님은 지눌 스님 입적 후 100년 뒤에 탄생하였기에
정혜쌍수의 선종불교 운동을 주창하여 고려후기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보조국사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일 것이다.
답사 자료집에 실려 있는 영정으로 일연스님의 얼굴이 아니고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영정으로
대구 동화사에 소장되어 있다.
송광사 우화각
송광사 보조국사 탑비
김군수가 보조국사의 탑비명을 찬하였다.
송광사 보조국사 탑비가 세워져 있는 승탑군에 완전히 범종 모양의 승탑이 있다.
송광사 지통(紙桶) -한지 제조 공정에서 불순물 제거, 닥섬유 해체(닥풀을 갬), 표백시키는 용도로 쓰임
한지 제조에 쓰인 지통의 용도를 밥통이라고 잘못 안내하고 있다.
지통은 구유(수조)이기에 이름은 사투리로 구시로 해도 된다.
비사리는 싸리나무로 만들어서 비사리라고 하지만,
싸리나무는 관목이므로 이런 지통 만들기에는 불가능하다.
아뭏튼 비사리구시는 지통을 부르는 사찰의 전통적인 구어체 이름인 것 같다.
조선시대에 백성들이 만들어 세금내어야 하는 종이 공납을 사찰에 부과하였다.
종이 만드는 노역, 지역으로 승려들은 도망하고 절은 폐사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심지어 송광사, 통도사 같은 대찰들도 지역으로 폐사의 위기에 몰렸다.
보경사 지통
보경사에도 지통이 하나 있다. 그러나 보경사의 것도 안내판에는 송광사의 것을 베껴 놓았다.
보조국사 지눌 스님
스님의 법명은 지눌, 법호는 목우자, 속성은 정씨이며 어머니는 조 씨다. 경서 동주, 즉 요즘의 황해도 서흥군 사람이다.
아버지는 당시 국학의 학정 정광우이다. 중국 송나라 고종 임금 소흥 28년, 금나라 해릉왕 정륭 3년 무인, 고려 의종 12년(1158)에 태어났다. 16세 때 종휘 대선사에게서 머리를 깎고 25살 임인년(1182)에 나라에서 시행한 승과에 합격했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남쪽으로 창평 청량사로 가서 주석했다. 또 을사년(1185)에 경북 예천 하가산(지금 학가산)의 보문사에 가서 우거하며 대장경을 열람했다.
금나라 장종 승안 3년 무오년(1198)에 지리산 상무주암으로 올라가 선에 몰두하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승안 5년 송고아산 길상사로 옮겨 11년 동안 주석하니 전국의 스님과 속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울창한 학문의 숲을 이루었다.
희종이 칙명을 내려 송광산을 조계산으로 길상사를 수선사로 고쳐 부르도록 했다. 금나라 동해후 태안 2년 봄 3월 27일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설법을 하고는 앉은 채로 열반에 들었다. 7일이 지나 다비했는데 그때까지 얼굴빛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다비 후 사리 큰 것 30과를 비롯하여 작은 것은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이 나왔다.
송나라 영종 가정 3년(1210), 희종 임금께서 스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불일보조국사라는 시호와 감로라는 탑호를 추증했다. 누려온 나이는 53세이다. 지눌 스님의 법을 이은 이는 무의자 혜심이다.
『정혜결사문』에 이런 기록이 있다. ‘임인(1182) 1월 상도 보제사에서 열린 담선 법회에 참석한 뒤 무신년 이른 봄 서신을 받고 하가산 보문사로 갔다. 금나라 장종 명창 1년(1190) 늦은 봄 곧 남송의 광종 소희 1년 경북 영천군 공산 거조사에 은거하며 목우자 지눌은 『결사문』을 쓴다.
승안 5년(1200) 경신 공산에서 강남의 조계산으로 가서 주석했다. 금나라 장종 태화 5년(1205) 을축에 『계초심학인문』을 지었다. 그 뒤 임자년 1월 월남사에서 대전을 다시 인쇄할 때 송운유정이 교정을 맡아보았다.
지눌의 행장을 새긴 비석과 탑이 전남 순천 송광사와 화순 만연사에 있는데 그것은 김군수가 지었다.
송광사에 매산의 능견난사가 있으며 흥국사와 만연사에 스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조국사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승려의 생활), 2005, 한국콘텐츠진흥원)
첫댓글 기둥이나 구시를 비롯하여 싸리나무로 알려진 나무는 무슨 나무인가? 이 의문을 풀어보기 위하여 현미경으로 세포모양을 조사해 보았다. 예상대로 싸리나무가 아니라 실제로는 느티나무였다.
느티나무가 왜 싸리나무로 알려지게 되었을까? 어디까지나 추정이겠으나 느티나무의 재질이 사리함 등 불구(佛具)의 재료로 매우 적합하여 절에서도 흔히 사용한 것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즉 사리함을 만드는데 쓰였든 느티나무를 처음에 사리(舍利)나무로 부르다가 발음이 비슷한 싸리나무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박상진<경북대 임산공학과 교수>
전영우 교수도 같은 말을 합니다. 사리를 승탑에 모시기 전에 다른 나무가 아닌 느티나무 사리함에 모시던 문화가 있었는지, 그래서 느티나무를 사리나무라고 불렀는지, 사리나무가 왜 비사리나무가 되었는지, 근거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추측에 불과하겠지요. 괴목(槐木, 느티나무)이 무늬가 아름답고, 괴자가 벽사의 의미를 내포한다고 신성한 사리를 괴목함에 담았다고 하지만, 그것도 과연 근거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확실한 것은 용도가 한지제조 공정에 쓰인 도구로서 지통이고, 구시가 구유(槽)의 사투리라는 것입니다. 송광사, 보경사, 동화사, 통도사, 석남사(간월사), 옥천사, 범어사 등에 1~2점씩 전하지만 지통이지 밥통은 아닙니다.
괴목은 느티나무의 한자명으로, 글자 자체가 나무 목(木)에 귀신 귀(鬼)가 붙은 형상처럼 영적인 의미가 있다. 사리함을 만든 나무를 절집에서는 ‘사리나무’로 불렀지만, 불자나 절집 밖의 일반인 사이에서는 된소리가 되어 ‘싸리나무’로 변하게 됐다는 국립산림과학원 정성호 박사의 해석은 새롭다.
이와 관련해 광주에서 숲 해설 활동을 하는 강영란 선생은 송광사의 비사리구시를 ‘사리함이 아닌(非舍利) 밥통(구시)’이라고 독특하게 해석했다. 강 선생이 전하는 송광사의 비사리구시와 관련된 옛이야기도 흥미롭다.
-전영우(국민대 산림자원학과)
<신동아>, 2010.12.01 통권 615호(p.592~604)
[전영우, 절집 숲에서 놀다 | 마지막회]
송광사 들머리 숲길-불국토 앞 수양공간 온기에 몸과 마음은 깃털이 되고
전영우(국민대 산림자원학과 교수)
*절집의 싸리나무와 비사리구시에 관한 글이 있습니다.
네, 인터넷에서 검색한 위의 인용부문이 바로 신동아 마지막회 부분입니다. 전영우가 지통을 밥통이라고 한 것은 헛다리짚은 것이지요. 이 글은 자연과학자의 가벼운 읽을거리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