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웃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베트남(Vietnam, 비엣 남, 越南)
후당 고 광 창
<베트남의 특징>
o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은 나라 - 현재 정치는 ‘베트남식 사회주의’
o 경제는 ‘도이머이 정책’ 으로 자유세계와 협력
o 남.북 문화의 차이, 북 - 전통베트남 문화, 남 - 서구 유럽 문화
o 하롱 만 - UNESCO에 의해 세계문화유산 등재 - 관광객이 가장 많은 곳
o 한국에는 베트남 며느리 많고, 베트남에는 한국 공장 많다.
<베트남의 기본 상황>
o 국명 :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
o 면적 : 33만 ㎢ (남한의 3배)
o 땅모양 : 남북으로 길게 1,650km 떨어져 있고, 북쪽은 고양이 머리, 중앙부분은 고양이 허리, 남쪽 메콩델타 부근은 고양이 발
o 기후 : 북 - 아열대 기후, 남 - 열대몬순 기후
o 인구 ; 약 8,000만 명 (75% 정도 농촌거주)
o 민족 ; 베트남 족(낀족, 비엣족) 89%, 기타 11%(타이, 크메르, 53개 소수민족)
o 언어 ; 베트남 어(문자는 로마자 차용)
o 종교 : 불교 70%, 카토릭 및 개신교 10%
o 정치 : 당서기장, 주석, 수상, 국회의장, 조국전선위원장 등 5명으로 구성된 정치국 상무위원회서 주요사항 협의 결정
o 화폐 : 단위 동(Dong), 줄여서 D라고 표기, 환율 US$1 = D15,700 1원 = D15.7
<베트남의 역사> ; “끝없는 외세의 침략과 그에 대항한 독립의 역사”
① 1858년 프랑스가 선교사 문제로 ‘다낭’을 포격하고, 무력으로 점령 식민지화
※ 1866년 우리정부가 프랑스 신부 9명을 살해한 사건을 빌미로 프랑스 함대가 우리나라 강화도를 침범(병인양요) 했으나 우리 군이 격퇴시킨 바 있음.
② 저항운동 1927년 베트남국민당, 1930년 인도차이나공산당,
1941년 ‘호치민’중심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단체 越盟 조직
③ 1945.09.02 제2차 세계대전 종료, 베트남 독립선언 (87년 간 프랑스 식민지)
④ 1946.12~54.8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종전의 지배권을 다시 찾고자 프랑스가 일으킴)
⑤ 1954. 7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항복으로 제네바 협정註1) 체결
⑥ 1955~1975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내전 상태
⑦ 1964. 8 미국은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통킹만 사건註2)을 빌미로 베트남 내전에 개입, 국제 전쟁으로 변질
⑧ 1973. 파리 평화 협정註3) - 전쟁 중단, 미군 및 타 국군 철수
⑨ 1975 4, 30 북부군의 사이공 함락으로 베트남 통일
⑩ 1986년 ‘도이머이 정책’ 발표
<베트남의 정치>
옛날 왕조시대에는 중국에 조공을 바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프랑스 식민시대가 끝나고 1945년 독립선언 할 당시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잡았고 제네바 협정 후 남.북간 내전을 할 때에도 사회주의 세력이 강세를 보이자 베트남의 공산화를 저지하고자 미국이 내전에 끼어들었으나 미국내 반전 여론으로 미국군이 철수하면서 결국 사회주의공화국으로 통일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정치체제는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되 ‘베트남식 사회주의’(중국보다 소련에 가까움)라는 이름으로 운영하고 있다.
<베트남의 경제>
‘도이 머이 정책’ (Doi Moi) <베트남 경제 개방 및 개혁정책>
베트남 전쟁 후 미국 및 유럽의 무역 금지 등 고립 정책으로 사회 경제에 문제가 발생한데다가 자연 재해까지 겹치자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여 사회 혼란이 극대화 됨.
1986년 ‘도이 머이 정책’ 발표 - 정치는 공산주의 골격을 유지하되(베트남 식 공산주의) 경제는 정부의 규제보다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이론을 접목하는 방식으로 새롭게 하자는 쇄신안, 이 정책 발표 후 서방국과 외교관계 다시 수립하면서 국제적 고립 탈피(한국과는 1992년 외교관계 복원) 이 정책 발표 후 외국 자본이 베트남에 많이 들어와 새롭게 변하고 있음.
<캄보디아에서 베트남 국경 넘기>
프놈펜 ‘까삐돌’ 게스트하우스와 호치민 여행사 간에 ‘국경수송 서비스’를 하고 있어 국제버스와 택시를 이용하여 쉽게 국경을 넘어 올 수 있었다.
베트남 ‘목바이’출입국관리소에 오니 우리말로 ‘안녕하십니까‘하며 반갑게 맞이해 준다. 우리도 “씬 짜오”(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해 주었고 수속을 다 마친 후에는 ’깜언“(감사합니다)이라고 해 주었다. 어쩐지 가까운 이웃 마을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이곳 베트남은 남북으로 길게 1,650km 떨어져 있고 도로 사정이 좋지 않으므로 남쪽은 호치민, 북쪽은 하노이 중심으로 여행하려고 한다.
1. 베트남 경제, 문화의 중심지 호치민(Ho Chi minh, 사이공(Saigon))
국경도시 ‘목바이’에서 1시간 여 만에 ‘호치민’시에 도착했다. 이곳은 인구 500만의 베트남 제1의 도시로 베트남 경제. 문화 중심도시, 여행 중심도시, 유럽풍의 팻션을 선도하는 도시라 할만 했다.
프랑스령 ‘코친차이나註4)’와 남베트남의 수도 역할을 했던 이 도시는 남베트남이 패망한 후 도시 이름을 베트남 민족의 영웅인 호치민의 이름을 따서 ‘호치민’으로 바꾸었는데 우리에겐 아직도 ‘사이공’이란 이름이 더 친숙하다. 도시 전체가 화려하다. 파리에 온 것 같다. 맨 먼저 눈에 띄는 게 베트남의 대표적 교통수단인 ‘쎄옴”(오토바이)과 ’씨끌로’(자전거)가 거리를 누비는 모습이고 특히 하얀 ‘아오자이註5)’를 입은 여자가 ‘씨끌로’를 타고 가는 모습은 무척 아름답고 한가롭게 보였다. 호치민시에서는 호치민을 ‘호아저씨’라고 불리우는데 시내에 동상도 있고 ‘호아저씨 박물관’도 있었다.
숙소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낫띠엔’ 호텔로 정했는데 한국위성방송 시청도 가능했다.
호치민시 부근과 메콩델타 지역에는 한국 기업이 많이 진출해 있어 호치민 시에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 가게 등 업소가 많은데 특히 공항 근처의 슈퍼볼 지구, 하우장거리 주변, 다이아몬드 플라자에 밀집해 있다고 한다. SOS병원에는 한국인 간호사가 근무하고 있다고 들었다. 우리나라 가수들이 오면 이곳에서 공연한다고 한다.
⦿ 가볼만 한 곳
o‘다이아몬드 플라자’ - 한국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백화점으로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사무실과 한국영화상영관, 초고속인터냇 PC방, 환전소, 액세서리 판매소, 한국 물건을 파는 슈퍼마켓도 입점해 있어 우리나라에 와 있는 느낌이다.
o 벤타인 시장 - 호치민 시내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음식점 코너와 아오자이 원단 및 고급 아오자이 전문점, 베트남 커피 및 수.공예품 가게 등이 있었다.
o 혁명박물관 - 1886년에 지어진 건물로 항불전쟁과 베트남전쟁 당시 활약했던 공산주의자들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자신들의 저항정신을 자랑하는 것 같았다.
o 전쟁증언 박물관 - 미군에 의해 자행된 전쟁 범죄에 관한 자료, 특히 고엽제 피해 상황과 참상을 알리는 사진이 많아 미군의 만행을 널리 알리려는 것 같았다.
o 통일궁전 -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총 관저로 사용되었으며 남베트남 시절에는 대통령관저로 사용되었다. 1975년 북베트남군 탱크가 입성해 베트남전의 종지부를 찍은 곳으로 유명 하다.
o 쩌런(차이나타운) -호치민시에서 가장 활기찬 거리
o 빈떠이 시장과 주변 - 쩌런 지구 최대의 시장으로 화교들에 의해 운영되며 주로 잡화 및 생필품 등을 팔고 있다. ※ 호치민시에서는 가게마다 흥정은 기본이다.
o PHO(퍼) 2000 - 외국인의 입맛에 맞는 다양한 베트남 쌀국수 판매, 클린턴 미대통령 방문으로 유명해진 곳
o 낌카페 - 베트남 대표적인 여행사, 한국인만을 위한 여행정보 책자 비치, 여행정보를 듣기 위해 들렀더니 옛날 베트남 모습을 보려면 북쪽으로 가고 지금 현재 베트남 모습을 보려면 이곳에서 보아야 한다고 일러 준다. 옛날 베트남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아직 남아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o 문화공원 - 통일궁전 옆에 있는 공원인데 밤이면 남녀 데이트 장소, 만남의 장소로 유명하다. 공원에 번호가 매겨진 벤치가 많이 있는데 남자가 먼저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전화로 여자에게 벤치번호를 알려주면 그곳으로 여지가 나와서 만난다음 오토바이 뒤쪽에 여자를 태우고 어디론가 데이트 하러 가곤 한다. 이곳 남자들은 오토바이가 없으면 데이트를 할 수 없는 형편이다.
o 시내 교통 - 이곳 사람들은 쎄옴(오토바이)나 씨끌로(자전거) 타기를 좋아해서 택시나 시내 버스는 몇 대 밖에 없다. 쎄옴이나 씨끌로는 집에 까지 들어오는데 시내버스를 이용하는 경우 집에서 승강장까지 오고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그래서 몇 년 전 일본에서 시내버스 회사를 운영했으나 타는 사람이 없어 폐업했다가 인접한 소도시와 연계해 운영을 재개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광주시의 경우 광주시내에서는 타는 사람은 적지만 화순, 나주, 장성, 담양 등 인접한 도시에서 출발해 오면 광주에 올 사람들이 타게 된다는 것이다.
광주신세계백화점 셔틀버스는 이곳에서 관광버스로 이용하고 있고 우리나라 중고 택시도 여기에서 볼 수 있었다. 택시를 타는 사람이 별로 없으므로 새 차를 구입하지 않고 중고택시를 사다가 운영하는 것 같았다.
<호치민 시 밤거리>
퇴근 시간이 되니 각 산업체에서 쏟아져 나온 한국 등 서양 근로자들로 거리가 붐볐다. 길거리는 네온사인 등으로 화려하게 변신해 不夜城을 이루었고 짧은 치마를 입은 호객꾼들의 소리가 ‘맛있다’ ‘딜리셔스’(영어), ‘유미’(영어), ‘하오츠’(중국어), ‘오이시이’(일본어)등 요란했다. 다인종이 모여 사는 혼잡함을 느낄 수 있었다. 커다란 음식점은 손님들로 붐비지만 작은 음식점들은 아예 술집으로 바꿔 손님을 받고 있었다. 식당에서 서빙하는 사람들 중에는 키가 크고 예쁜 러시아 여자들이 더러 있었고 종업원 모두 영어회화 솜씨는 능숙했다. 벽면의 메뉴표는 베트남어에 영어가 병기되어 있었고 음식 값은 우리나라 돈도 받고 있었다. Tip이 일상화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우리나라 근로자와 만나 잠깐 몇 마디 물어 보았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곳 주민들은 30년 전 우리나라가 베트남 전 파병 했을 때의 옛날 안 좋았던 기억은 잊고 지금 현재 많은 한국 기업체가 베트남에 진출해 일자리를 많이 마련해 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젊은이 들은 한국을 동경하고 있다. 한국어로 몇 마디를 할 수 있는 것과 한국 노래를 알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또 한국 기업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물론 이곳 학생들도 한국어를 배우려고 하기 때문에 이곳 대학에서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곳에서 한국 전자 제품, 화장품 등 한국 상품이 인기가 있어 잘 팔리고 있다. 또 여행 시 주의 사항은 옛날 한국군의 주둔지나 격전지는 가지 않는 게 좋다고 한다. 가족을 잃은 그곳 주민들의 한이 아직도 가시지 않고 남아있어 이곳 우리 근로자들도 가지 않는다고 한다. 더 좋은 말을 듣고 싶었으나 다음 손님을 위해 자리를 비워주어야 할 것 같아 할 수 없이 깜언! 깜언! 하면서 헤어져야만 했다. 오늘밤은 고맙고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마음에 품고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o 구찌(Gu Chi)터널-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저항의 거점으로 25년간이나 걸려 축조된 곳으로 베트남전쟁 당시 호치민 루트와 사이공을 연결하는 지하요새로 ‘강철의 땅’이라고도 불렸다. 총 길이 250km, 넓이 3~8m 인데 터널 입구의 크기나 터널의 높이를 몸집이 작은 베트남인에 맞추어 만들어 놓아서 나도 겨우 들어가 볼 수 있을 정도였다. 터널 안에 여러 군데 갈림길, 샛길이 많아서 한 번 들어오면 출구를 몰라서도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가이드를 따라 요리조리 다니면서 베트콩 터널 체험을 했다. 베트콩註6)의 전략적 요새지였다고 한다. 북한이 파 놓은 땅굴 생각이 났다.
o 과일 채소 시장
열대 과일이 많은 곳이다. 꽁가이(여자)들이 햇볕가리기용 삿갓 모자를 쓰고 앉아 대나무로 만든 둥그런 바구니에 과일과 채소를 담아 놓고 팔고 있는 광경은 좋은 볼거리였다. 또 과일 바구니를 대나무 양쪽에 걸고 그 가운데를 어깨에 둘러매고 가는 모습도 베트남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꽁가이의 부지런함을 엿볼 수 있다.
o 음식 :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음식요리가 발달한 ‘식도락의 천국’이라 말할 수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쌀국수 ’펴’와 밥‘껌’이고 바게뜨 속에 야채와 햄을 넣은 ‘반미팃’은 아침 식사대용으로 많이 먹는다. ‘고이 꾸온’은 우리가 먹는 ‘월남 쌈밥’과 거의 비슷하다.
2.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원 왕조의 수도였던 ‘후에'(Hue)
베트남에서 기차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호치민’과 ‘하노이’ 간을 운행하는 기차 중 가장 빠른 것은 E1/E2, 그리고 S1~S8의 순서이다. 좌석과 침대칸으로 되어 있는데 식사 때마다 무상으로 식사와 물이 제공되었다. 우리는 E2를 타고 ‘하노이’ 가는 도중에 ‘후에’에서 내려 하루 동안 구경하고 그 다음날 똑 같은 차를 타고 ‘하노이’로 가겠다고 하니 그렇게 표를 끊어 주었다. 이런 면에서는 인터넷 기술이 잘 발달되어 있었다.
‘후에’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황궁으로 향하는데 택시 기사가 우리들 대화내용을 듣고 한국에서 왔느냐고 우리말로 물어서 깜짝 놀랐는데 알고 보니 그 기사가 2~3년 전 우리나라에 취업왔었다고 한다. 돈을 많이 벌었겠다고 했더니 이런 말을 한다. 구미공단에 있는 염색공장에서 일했는데 사장님이 자기에게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 게으르다! 멍청하다! 고 때리면서 월급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고 한다. 무척 많이 맞았다며 허리 부분을 가리킨다.
악덕 기업주 한 사람이 나라의 위상을 이렇게 떨어뜨리는 구나 생각하니 화도 나고 부끄러웠으나 우리가 대신 죄송하다고 말하고 택시비 거스름돈을 받지 않고 내렸지만 뒷맛이 안 좋다.
‘원 왕조 황궁’은 베트남을 통일하고 ‘웅우옌’ 왕조를 세운 ‘자룽’ 황제에 의해 1804년에 건축되기 시작했는데 미군이 철수 하면서 폭격을 가해 전각의 70%가 소실되었다 한다. 폭격으로 소실된 탓인지 황궁이 새까맣고 음습해 보였다. 우리나라 부여의 고적을 보는 것 같았다. 황궁 정면에 세워졌다는 ‘블랙타워’는 이름대로 검은색의 3층탑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후에 궁전 미술 박물관’은 ‘웅우옌’ 왕조에서 사용하던 물건과 가구 등을 전시하고 있다. 황궁을 벗어나 시내 쪽으로 가니 야외 시장인 ‘동바’시장’이 나왔다. 가게는 없고 넓은 들녘 여기저기에 농산물을 갖다 놓고 파는데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사고파는 사람들이 대부분 꽁가이(여자)들인데 모두 햇볕 가리개용 삿갓 모양의 모자를 쓰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베트남에서 여자의 활동이 두드러져 활기차게 보였다.
3.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 수도 하노이(Ha noi)
고대로부터의 전통과 역사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베트남의 역사적 도시이고 현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의 수도다. 호치민에서의 서구 유럽식 흥청거림은 찾아 볼 수도 없어 하노이에 와서야 우리가 베트남에 왔음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호텔 부근 과일가게에 갔더니 우리들 말을 듣고 있던 가게 주인아주머니가 중국어로 우리에게 한국 사람이냐고 묻는다. 이곳은 중국과 가까워서 중국어를 많이 쓴다고 한다. 우리 팀장이 베트남에서 군 생활하면서 베트남어 통역으로 복무한 사실이 있어서 베트남어로 우리 일정을 소개하고 베트남어로 과일 주문을 해 주니까 깜언!, 깜언! (고맙다)하면서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 시내 교통
o 시내 버스 - 시내 주요 노선을 20분 간격으로 운행, 한때는 대우자동차에서 만든 대우차만 시내버스로 운행된 적도 있었다 한다.
※ 대우자동차 - 1993년 외국기업으로는 최초로 하노이 근교에 베트남 현지 법인, 공장설립 인수 합병, 생산시설 확보, ‘대우자동차’를 생산하고 현지 베트남인을 고용함으로써 베트남 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했었으나 그룹 해체로 문을 닫은 상태다.
o 쎄옴(오토바이)과 씨끌로(자전거)는 주로 도심 투어용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 볼거리
o 호안끼앰 호수 - 호안끼앰은 베트남어로 ‘검을 돌려주다’라는 뜻으로 거대한 거북이가 준 보검으로 중국 명나라 군대의 침략을 물리친 ‘레’ 왕조의 시조 ‘타이 또’가 다시 나나타난 거북이에게 검을 돌려주었다는 호국 전설에서 유래하는데 호수 안쪽에는 거북 탑이 세워져 있다. 하노이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으며 호수 주변은 고급 상가와 레스토랑 등이 위치하고 있다.
o 옥산 사당(玉山祠堂) - 중국 ‘원’의 침략을 무찌른 ‘쩐 꾸옥 뚜언’을 모신 사당이다. 또 1968년 호수에서 잡힌 거북이를 전설의 거북이라고 생각하고 이 거북이를 박제하여 전시해 놓았다. 사원 입구에는 풍요의 상징인 福자와 錄자가 씌어 있다. 매일 20:00~21:에 베트남 전통공연을 한다고 한다.
o 호치민 묘 -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이자 민족의 영웅 호치민이 유리관 속에 잠들어 있는 데 지금도 참배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묘 뒤편에는 1969년 까지 거주하던 가옥이 잘 보전되어 있다.
o 호치민 박물관 - 호치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내부에는 호치민 생가의 모형과 소장품들 그리고 베트남의 과거, 현재, 미래를 표현한 예술 작품이 잘 전시되어 있다.
o 미술 박물관 - 소수민족 관련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또 베트남 민족의 저항정신을 자랑하기 위해 ’베트남전‘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다. 특히 미국의 무자비한 폭격으로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잃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는데 베트남 전쟁에 우리도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 관계로 우리가 보기에는 좀 껄끄럽고 부끄러웠다.
o 민족학 박물관 - 베트남에 살고 있는 50여 소수민족에 대한 영상정보를 비롯해 의복 생활도구 등을 수집해 놓았다.
o 탕룽 수상 인형극장 - 베트남의 대표적인 공연인 수상인형극을 볼 수 있는데 주로 베트남의 전설이나 설화를 배경으로 한 연극인데 내용은 잘 모르지만 몸 동작이 재미있어 재미있게 보았다.
4. 삼천 여 개에 달하는 기암괴석들이 솟아있는 하롱 만(하롱 베이)
1994년 UNESCO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으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3,000여개의 섬들이 바다에 빼곡이 들어 차 있는데 이 섬들은 베트남을 지키기 위해 내려온 龍들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영화 ‘인도차이나’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다.
⦿ 드나들기
o 하노이 ⇒ 하롱 만 (소요시간 3시간 30분)
깜마 버스터미널, 자럼 버스터미널
o 하롱 만 ⇒ 하노이
바이짜이 버스터미널, 홍가이 버스터미널
o 시내 교통 - 홍가이와 바이짜이간 페리가 10분 간격으로 운행
⦿ 볼거리
o 하롱 만
하롱 만은 크게 서쪽의 ‘바이짜이’와 동쪽의 ‘홍가이’로 나뉘는데 여행객들은 주로 ‘바이짜이’에 머무르지만 은행이나 그 밖 여러 시설들은 ‘홍가이’ 쪽에 더 많았다.
섬이 많은 곳까지는 배를 타고 1시간여 걸리는데 중간의 섬에 내려 동굴을 구경하기도 하고 수영할 수 있는 시간도 주지만 하롱 만의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일몰이다. 섬들의 숲 사이로 해가지는 장관을 보고 있으면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이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별이 보일 때 쯤 육지로 돌아온다.
이곳은 11월에서 4월까지의 건기가 가장 좋은 시즌으로 이때가 바다도 잔잔하고 에메랄드빛으로 예쁘다고 한다. 하롱 만을 둘러보는 투어 요금은 D30,000인데 하노이 여행사 투어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저렴하고 편하다.
o 깟바 섬 - 하롱 만에서 가장 큰 섬이자 국립공원이다. 이곳에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바닷바람이 시원하고 밤풍경이 아름다워 즐거웠던 밤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5. 우리나라의 베트남 전쟁 참전 상황
o 1961년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 케네디 대통령에게 먼저 파병을 제안,
o 케네디 대통령 우리 제안 거부 - ‘베트남 내전에 미군 파병하지 않겠다.’
o 1965. 미국 존슨대통령, 한국에 파병 요청, 남베트남정부도 파병 요청
※ 미국이 파병을 요청한 이유 -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대처하기 어렵고 미국 내에서 전쟁 반대 여론이 확산되고 있어 전쟁을 빨리 끝내야 했음.
o 우리나라 파병 명분 - ‘6.25 전쟁 시 참전한 우방국에 대한 보답’
o 야당 반대 - 우리 안보 위험, 미국 용병傭兵註7) 우리 젊은 피를 돈 받고 판다.
⦿ 베트남 참전 협상 내용(65. 5. 한.미 정상회담)
① 참여 인원 상한선 5만 명 이하
② 한국군 장비 현대화 지원
③ 북한 침공 시 미군 즉각 출병, 한.미 방위조약 보완 개정
④ 전쟁에 사용할 군수품 우리 기업체가 공급, 한국기업의 베트남 시장 진출 보장
※ 전투 장비지원, 장병 월급 및 전투수당, 미국에서 지급키로 함
⦿ 한국 베트남 전쟁 파병 상황
① 파병 부대
o 64년 의무중대 파병, 건설공병단 비둘기 부대 파병
o 65 이후. 전투부대 파병 - 청용부대, 맹호부대, 백마부대
비 전투부대 - 십자성, 백구, 혜산진
② 파병 현황 (65년 ~ 72년 까지 8년간)
o 총 파병 병력 32만 8천여 명
o 사망자 - 5,099명
o 부상자 -1만 1천여 명
o 고엽제 피해자 - 다수
⦿ 미국 등 우방국 베트남 전쟁 참여 상황(참고 자료)
국가 | 참여인원 | 사망자 수 | 부상자 수 |
미국 | 150만 | 58,315 | 303,605 |
한국 | 328,000 | 5,099 | 11,000 |
호주 | 50,000 | 520 | 2,400 |
뉴질랜드 | 500 | 37 | 187 |
타이 | 11,570 | 1,351 | 1,358 |
필리핀 | 10,450 | 9 | . |
⦿ 베트남 전쟁의 어려움
① 남베트남 지도자 국민 신뢰 못 받고, 북베트남의 지도자 국민의 신뢰를 받음.
② 베트콩의 게릴라 전 - 아군 적군 구별 못함, 민간인 군인 구별 못함, 낮에는 우리 편 밤에는 반대편, 일반국민들 베트콩은 우리 편, 외국군은 남의 편이라고 생각
③ 남.북 군사력의 차이 - 북베트남 강하고, 남베트남 약함
④ 국제 전쟁이 되어 버림
남베트남 지원국 - 미국, 한국,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타이
북베트남 지원국 -중국, 소련, 라오스, 캄보디아, 북한
※ 남한과 북한은 장소를 베트남으로 옮겨 다시 남북전쟁을 한 결과가 되었음.
⑤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설치된 호치민 루트註8)를 통하여 북측이 남쪽 베트콩에게 군수 물자를 공급해 주고 있어 미국은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공격해야 했음.
⦿ 남베트남 ‘응오딘 지엠(고 딘 디엠)’ 정권이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이유
① 1954년 제네바 협정에 따라 선거를 실시해야 하는데 북측은 선거를 했으나 남측은 선거를 하지 않고 지엠 정권이 친족과 더불어 독재 정치를 함.
② 남베트남에 불교 신자(70%)가 많았는데 지엠이 자기가 믿고 있는 카톨릭을 편애하여 불교신자들을 투옥하고 처형함으로서 불교신자들의 원망을 사게 되었음.
③ 도시에 사는 지주들이 소작인들을 착취해서 토지 개혁이 절실했는데 북측은 토지개혁을 했으나 남측은 토지개혁이 형식에 그쳐 소작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④ 북측 지도자 호치민은 공산주의자인데 베트남 국민들 모두가 그를 독립운동의 아버지, 민족주의자 등 좋은 이미지로만 받아들이고 있고 ‘지엠’은 지지를 못 받음.
⦿ 베트남전 미군 철수
미국 여론 - 전쟁 반대, 철군 - 닉슨 독트린註9) 발표 - 파리 평화 협정 - 철군
미국 여론 ① 늘어난 세금 ② 군인희생 많음 ③ 승패를 알 수 없음 - 전쟁 반대
파리 평화 협정에 따라 73, 3 미군, 한국군, 기타 우방국군 철수
⦿ 베트남 전 특수(特需)
① 전투수당으로 우리 정부가 미국에서 2억 3,600만 달러를 받음
② 우리나라 GNP 성장 - 파병 전보다 5배 성장
③ 베트남 특수기대하고 산업자본 민간인 진출 - 월남 한국기업인 29만 명
※ 베트남 전 일본 특수(特需) -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 생산을 대부분 일본에 의뢰함으로써 일본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베트남 전 특수를 톡톡히 봄, 한국전 특수에 이어 베트남 전 특수까지, 그리고 전투장비 생산기술 향상까지 --
※ 베트남에서 우리는 피를 팔고 일본은 물건을 팔아 돈을 번 결과가 되어 버림.
⦿ 베트남 전쟁 후유증
① 전투수당 ; 개인에게 지급하지 않고 국가에서 경제개발 사업 추진에 써 버림
미국에서 전투수당을 매월 1인당 5,000불을 받았는데 1/10(50만원 정도)만 개인에게 돌려주고 나머지 9/10(450만원)는 국가에서 경부고속도로 건설 및 경제개발 5개년계획 추진자금으로 사용하고 국가 경제가 좋아지면 나중에 개인에게 돌려주겠다고 했다는데 아직껏 ---
전투수당을 정부에서 돌려줄 생각이 있었다면 당시 국채를 발행해서 개인별로 나누어 주었어야 했다. 정부가 전투수당을 그 당시 아무리 좋은 곳에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미국 정부가 파월장병에게 준 전투수당을 우리 정부가 가운데서 가로채 버렸고 지금껏 되돌려 주지 않고 있으니 국가가 개인 재산을 橫領한 것이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데 보호하기는커녕 횡령해 버렸으니 ---
호주 정부는 전투수당을 개인에게 모두 지급해 주었다고 한다.
※국내에 있는 ‘대한민국 월남전참전자회’와 해외에 있는 ‘월남전참전자회’에서 정부를 상대로 전투수당 되돌려 받기 운동을 현재 전개하고 있는데 그 분들 주장은 1년 동안 받지 못한 전투수당이 5,400(450만x12) 만원 이었고, 월남전 당시 서울 중.저가 아파트 한 채가 5,000만원 정도였으니, 그 당시 물건 가격을 지금 현 시가로 계산해서 배상해 주라고 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생존 시 요구를 했거나 아니면 월남 파병 당시 연대장이었던 전두환 씨가 대통령 시절에 요구를 했어야지 기차도 떠나고 버스까지 떠난 후에 이제 손을 들면 어떡하나? 참 딱하다.
② 라이 따이한 : ‘라이’란 베트남어로 ‘혼혈아’를 말하는데 양국 민간인끼리 결혼하여 태어난 ‘라이 따이한’은 많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군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2세의 부양책임인데 아버지인 한국군이 나타나지 않아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우리 정부는 라이 따이한이 5,000명 정도일 거라고 추정은 하고 있지만 정부 차원의 대책은 없는 상태다.
※ 미국은 미군 주둔지역에서 태어난 2세들의 이민을 받아 주고 있다고 함.
※ 일부 일본 언론이 논설을 통해 한국군이 베트남 전에서 양민을 많이 학살하고 부녀자를 성폭행 하였으며 라이 따이한이 15만 명이 넘는데 왜 한국은 베트남에 사과하지 않고 일본 전쟁 위안부에 대해서만 사과하라고 하느냐고 보도했다는데 이 일본 언론의 보도를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보도한 우리나라 보수 언론사에 대해서 ‘대한민국월남파병자회’의 항의가 있었다고 한다. 다른 것도 과장되었지만 우리나라 총 파병 인원이 32만 명인데 라이 따이한이 15만 명이라는 것은 너무 지나친 억측이라고 --
③ 전쟁 범죄인 양민 학살 및 부녀자 강간 문제
1999년 김대중 대통령 베트남 방문 시 민간인 피해에 대해서 사과를 했고, 2017년 문제인 대통령 베트남 방문 시 유감표명을 한 정도 ---
⦿ 한국과 베트남 외교관계 복원
1964년 남베트남과 외교관계 수립
1975년 북베트남이 남베트남 점령 후 외교관계 끊어 짐
1992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과 외교관계 수립
⦿ ‘92년 외교관계 복원 후 변화
① 베트남 여성 한국 농촌 남성과 결혼하여
o 농촌 총각 배필, 출산율 증가, 부족한 농촌 노동력 보충 등 一石 三鳥
o 베트남과 사돈 관계, 젊은이들 처가, 라이 따이한은 외가
② 베트남 이주민 부지런 함 - 우리나라 노동력 부족 현상 해결
③ 한국 대기업 베트남에 대거 진출
o 1993년 대우자동차를 비롯하여 중국 산동성에 있던 많은 기업들이 베트남 호치민 시 주변과 메콩델타 주변으로 공장을 옮김
o 삼성 LG등 대기업 베트남에 진출 - 값싼 노동력으로 제품 생산
④ 베트남에 있는 한국인 124,000여 명, 한국에 있는 베트남인 128,000여 명
<글을 마치며>
우리는 1975년 미국의 요구로 베트남 전에 참가했는데 우리가 지원했던 남베트남군이 북베트남군에 패배하고 국교가 단절됨으로서 우리와 베트남은 멀고 먼 나라가 되었었는데 총성이 멈춘 지 20여 년이 지난 1992년에 국교가 다시 정상화 된 후 양국의 노력으로 서로 총 뿌리를 겨누던 적군의 사이가 이제는 어깨동무하는 다정한 친구 사이로 변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베트남이 우리가 자기들 내전에 끼어들었을 때의 잘못을 용서한 것인데 ‘容恕’가 말로는 쉽지만 그 전쟁에서 형제자매나 자식을 잃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용서’가 무척 어려운 게 사실이다. ‘恕’자는 心+如(같을 여)로 ‘남을 자기와 같이 생각하는 마음’이란 뜻으로 ‘易地思之’와 같은 의미이다. ‘용서’란 결단을 내려 준 베트남에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앞으로 더 가깝게 지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자기들도 우리와 외교관계를 맺어야 할 필요가 있었겠지만 --
베트남 여성의 이주 결혼으로 이제 우리 농촌은 노총각이 없어지고 농촌 일손 부족 문제도 해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도 출산율을 높여주는 등 긍정적인 측면이 많이 생겼다. 또 베트남 며느리가 시부모님을 잘 보살펴드릴 뿐만 아니라 집안일이나 농사일도 잘하고 오토바이나 자전거도 잘 타고 부지런하고 무엇보다도 시부모님에게 귀여운 손자를 낳아 주기 까지 하니 베트남 며느리가 들어온 집은 집안에 복덩이가 굴러들어 왔다고 웃음꽃이 만발했다. 다른 나라에서 시집 온 며느리도 있었지만 ‘베트남 며느리가 최고다’는 말이 입소문을 타 우리나라 농촌에서는 가급적 베트남 며느리를 얻으려 하게 되었고, 또 베트남에서도 한국으로 시집간 딸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자 많은 베트남 여성들이 한국으로 시집오기를 바라기 때문에 자연히 양국 간에 혼인이 많이 이루어져 한국과 베트남은 다정한 친구 사이 보다 더 가까운 사돈지간이 되었다.
우리나라 기업체는 베트남 정부의 편의 제공과 저렴한 인건비를 고려하여 다른 나라에 있던 공장을 베트남으로 이전하여 이제 베트남은 곳곳에 한국 제품의 생산 공장이 들어서 있다. 우리나라 기업체 입장에서는 생산 단가를 줄일 수 있어서 좋고 베트남 입장서도 우리 기업들이 세금을 내주고 일자리를 많이 마련해 주니 고마울 것이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에 걸맞게 국가 간, 개인 간 관계 유지를 잘 해야 한다는 건, 베트남 전 참전을 통해 알아낸 값진 교훈이라 해야 할 것이다.
미국 내 여론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중소국가들이 공산화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전쟁 불가피론과 다른 하나는 이유야 어떻든 전쟁은 해서는 안 된다는 전쟁불가론이다. 이 여론은 그때그때의 세계정세에 따라 달라지는데 ‘쿠바’가 공산화 되어가던 때와 미국 뉴욕 9.11테러 사건 때에는 첫 번째 여론이 지배적이었지만 지금은 두 번째 여론이 압도적이다. ‘전쟁 반대’ ‘미군 철수’여론에 따라 ‘캄보디아’, ‘베트남’, ‘아프카니스탄’ 등에서 ‘미군 철수’라는 미명으로 물러났지만 미국은 사실상 패전투수가 되었다. 미군이 해외에 참전한 전쟁에서 승패는 언제나 미국 여론이 결정해 버린다.
미군 해외주둔은 일본, 독일, 한국, 이태리, 영국 등 20여 개 국가인데 미국내 여론에 따라 주둔 기간이나 주둔 병력이 변경될 소지가 많으므로 우리나라도 ‘자주 국방 능력’을 기르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할 것 같다.
--------------------------------
<註>
1) 제네바 협정
제 1차 인도차이나 전쟁 결과 프랑스가 패하고 베트남이 승리하자 서구 열강들이 제네바에 모여 회담 - 베트남을 북위 17°선을 경계로 북측은 호치민 정권, 남측은 응오딘 지엠(고 딘 디엠) 정권 책임하에 자유선거를 실시하고 선거 결과에 따라 정부를 수립하도록 결정
2) 통킹만 사건
64년 8월 2일~4일 두 차례 북베트남군이 미국 구축함을 공격한 사건으로 미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빌미가 되었다. 미국이 베트남 참전을 위해 조작한 것으로 다음에 밝혀졌다.
3) 파리 평화 협정
‘73. 1 파리에서 미국, 북베트남,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 4자 회담
“베트남에서 전쟁 중단하고 평화 회복하자“ ‘외국군 60일 내 철수하자.’
4) 코친차이나
프랑스 식민지 시절, 베트남 남부 지역을 유럽인들이 부르던 이름
5) 아오 자이
‘긴 옷’이란 뜻, 베트남 여성의 전통의상으로 명절, 행사, 일상생활, 교복 등으로 입는다.
6) 베트콩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의 약칭 ‘베트남 공산주의 자’의 뜻
o 성격 - 베트남 전쟁 중 미국과 연합한 남베트남에 대항하기 위한 무장 투쟁 조직
o 구성 - ① 북측에서 공산주의 교육을 받고 고향 찾아 남측으로 내려 온 공산주의자
② 남베트남 응오딘 지엠 정권의 정책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자
③ 강대국 몰아내고 북베트남 중심 통일국가를 세우려는 단체
o 투쟁 방법 - 지하 땅굴과 밀림지대를 이용한 게릴라 전
7) 용병(傭兵)
지원자에게 일정한 봉급을 주고 병역에 복무케 함, 봉급을 받고 병역에 복무하는 병사
8) 호치민 루트(Route)
북측이 베트콩을 지원하기 위해 라오스, 캄보디아를 경유해서 병력과 군수품을 이동시키는 경로
9) 닉슨 독트린 (69. 7)
미국내 여론이 전쟁종식, 미군철수 쪽으로 기울자 69.7 미국 닉슨 대통령 선언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의 힘으로 한다.”“베트남 전쟁 같은 군사적 개입은 하지 않는다.“
※ 6•25 전쟁 후 우리나라 식량 사정이 어려울 때 ‘알라미 쌀’ 또는 ‘안남 쌀’이라는 이름의 길쭉한 모양의 쌀을 먹은 기억이 있는데 ‘안남’이라는 이름은 베트남 사람들은 중부지방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서양 사람들은 베트남 나라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방국에서 보내준 쌀이므로 ‘알라미 쌀’ 또는 ‘안남 쌀’은 ‘베트남 쌀‘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