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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의 꿈!!
(민주지산 삼도봉 기념비)
♧ 산 행 일 : 2010년 3월 7일(일) 날씨 : 흐리고 안개
♧ 대간코스 : 덕산재 ~ 삼마골재(물한리계곡) 백두대간코스
♧ 산 행 자 : 마눌과 함께
♧ 교 통 편 : 산지기산악회를 따라서
♧ 발 자 국
0. 산행거리 : 총 산행거리 15.2㎞[대간길 도상거리 약 13.65 ㎞, 접근거리 : 3.8㎞]
덕산재 ⇒ 0.8km ⇒ 833.7봉 갈림길 ⇒ 2.65km ⇒ 853.1봉 ⇒ 1.55km ⇒ 부항령헬기장 ⇒ 2.15km ⇒ 백수리산⇒ 2.7km ⇒ 1170.6봉 ⇒ 2.9km ⇒ 삼도봉 ⇒ 0.9km ⇒ 삼마골재 ⇒ 3.5km ⇒ 물한리계곡(황룡사) 0.3km ⇒ 주차장 = 17.45km
0. 소요시간 : 총 7시간34분(들머리 덕산재 09:40분, 날머리 물한리주차장 17:04분)
덕산재(09:40) ⇒ 853.1봉(11:27) ⇒ 부항령헬기장(식사11:48) ⇒ 백수리산(13:12) ⇒ 1170 목장길 합류지점(14:35) ⇒ 1117봉 이정표(15:28) ⇒ 삼도봉(15:41) ⇒ 삼마골재(15:58) ⇒ 물한리계곡 황룡사(17:04) = 7:34
♧ 개 념 도
네 번째 이야기 - 아름다운 동행 ~ 행복한 산행!!
이번 대간산행이야기는 서울산지기산악회의 "아름다운 동행 행복한 산행"이라는 글로 화두를 열어 본다.
오늘은 백두대간의 꿈을 찾아 네 번째로 산지기산악회를 따라서 새벽길을 나선다.
대간산행을 떠나는 날은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똑 같은 시간에 버스에 올라 산행길을 떠난다.
나는 버스에 오르자마자 줄 곳 곤한 몸을 의자에 맡기고 있다가 어디쯤에선가 감았던 무거운 눈을 뜨고서는 차창 밖을 바라다본다.
버스는 이내 무주에 들어서 있었고 주변의 높은 산들은 백발인양 하얀 雪들을 덮고 있었다.
대간팀들이 타고 있는 버스가 무주 나제통문 앞 휴게소 주차장에 잠시 멈춘 채 볼일을 본다.
서울에서 이곳까지 오는 내 내 처음으로 버스에서 내려 이 고장의 공기도 마셔보고 나제통문도 바라다본다.
처음 보는 통문도 아니건만 눈길이 머물고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나제통문 도착 08:58]
자연성벽으로 이루어진 나제통문(일제시대에 뚫렸다고 함)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이자 영토다툼으로 인하여 수 많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무풍은 신라의 땅이었으나 현재는 전북에 속하는 지역으로 언어와 풍습. 생활은 김천과 거창에 가까운 곳이란다.
(사진 : 나제통문 휴게소 앞 덕유정)
(사진 : 나제통문)
[덕산재 도착 09:23]
나제통문을 통과하여 무풍면 소재지를 지나 덕산재에 올라선다.
어제 저녁에 비소식이 있더니만 이곳은 이른 새벽에 눈이 내려 도로와 숲이 온통 하얗다.
상고대로 가득할 기분 좋은 산행길을 예견하며 산속으로 들어서고픈 생각이 마음을 앞선다.
[들머리 입산 09:40]
덕산재 고갯마루 좌측 도로변 앞 공터에서 단체로 준비운동을 하고서는 배낭을 들쳐 메고 무풍방범초소 컨테이너가 있는 곳을 들머리로 하여 숲으로 들어선다.
(사진 : 덕산재 컨테이너방범초소가 있는 곳에서 대간을 입산한다)
삼월 첫 주일이다.
경칩도 지났는데 봄은 고사하고 온전한 겨울을 벗어나지 못하고 영하의 기온으로 머문 채 살갗을 스치는 바람이 차갑다.
일기는 구름으로 잔뜩 흐리고 산중이 온통 안개로 가득하나 덕산재에서 시작되는 산행이 고도표를 보아서는 크게 어려움이 없는 평이한 산행인 듯이 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눈 덮인 대간길을 들어서 피어난 눈꽃을 바라보며 즐거운 시간들을 엮어본다.
(사진 : 덕산재 공터에서 입산준비)
(사진 : 덕산재 방범초소 뒤 대간길로 입산)
(사진 : 어느 정도 숲을 들어서자 새벽에 내린듯한 雪이 눈꽃을 피워내고 있다)
[833.7봉 도착 09:58]
산을 타고 오르면 오를수록 가쁜 숨소리만큼이나 짙어지는 안개 속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덕산재을 올라 833.7봉을 맞이하지만, 오리무중이라 주변의 시야가 가려지고 조망이 없다.
고도를 높이면 높일수록 서서히 들어나는 상고대의 아름다운 자태가 느낌표로 이 숲속에 가득하고 그런 느낌들을 마음속에 담다 담다가 넘쳐 터진 입으로 "하아~~!!"하는 느낌표에 연신 감탄사를 토설(吐說)한다.
(사진 : 고도를 더 할수록 설화의 아름다움도 숲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앙상한 나뭇가지도,,,)
(청솔나무 가지도 온통 하얀 雪로 눈꽃을 피워내고 있다)
(사진 : 833봉을 오르는 목계단)
(사진 : 대간길을 이어가다가 설경을 담아보고)
[815봉 삼각점 도착 10:53]
능선을 따라서 이어지는 대간길은 대원들의 발자국으로 이어지고 그 뒤를 따라서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도 어려울 만큼 시계는 좋지 않다 그런 산행길을 가파르게 오르기도 하고 내려서기도 하면서 열심히 산길을 이어가보다 보니 표지목이 서있는 선황당재를 올라 850봉에 올라보지만, 어느 한곳 툭 터지게 들어나는 시야가 없어 시원스런 마루금이나 주변 산세를 조망할 수 없음에 답답하다 라는 생각도 들기도 하지만 춘삼월에 내린 雪들이 연출하는 설화와 상고대의 아름다운 풍광들을 바라보면서 산지기산악회 대원들은 지금 이 순간 다 같이 자연의 경이로움에 찬사를 보내며 아름다운 생각으로 함께 동행을 하고 있었다.
(사진 : 낙엽송의 雪花)
(비탈진 산을 오르고)
(설화로 가득한 대간길을 이어간다)
[815봉 삼각점 도착 10:53]
잠시 삼각점에서 선두와 후미거룹과의 발폭을 줄이기 위해 숨고르기를 하며 머물다가 다시 부항령으로 발걸음을 이어간다.
가던 길에 표지목이 서있다.
반가움 마음으로 대면해 보니 부항령까지 800m가 남았단다.
(사진 : 삼각점에 서 있는 표지목)
[부항령 도착 11:47]
표지목을 따라서 능선을 이어가다 보니 雪花가 피어난 관목사이의 능선 아래로 지방도로가 들어난다.
자세히 살펴보니 무풍면 금평리 쑥병이마을과 김천시 부항면 어전리 가목마을을 잇는 1089번 지방도로에 있는 부항령(680m)은 삼도봉 터널이 관통되어 있는 곳이다.
바로 그 삼도봉터널 위를 지나고 있었다.
조금 가다보니 헬기장 같은 부항령에 안착을 한다.
이곳에서 라면이나 먹고 가잔다.
좀 이른 시간이지만 대원들이 그룹을 지어 몇몇이 둘려 앉아 점심식사가 시작된다.
뜨거운 라면국물에 서로가 건하는 산주한잔의 맛과 함께 하는 제일 즐거운 시간들을 나누고 있다.
(사진 : 부항령 헬기장)
(사진 : 부항령 헬기장에서 점심식사)
(사진 : 부항령에 서 있는 이정목)
[백수리산 도착 11:47]
부항령을 뒤로하고 백수리산을 향해 목계단을 오른다.
점심식사 후 오는 후유증이 시작된다.
숨이 차오르고 발걸음이 둔해진다.
대원들과 함께해야하는 산행이기에 행보를 멈출 수 없어 소화가 될 때까지 느린 보폭이다.
부항령을 지나 고도가 더 해지며 오르는 백수리산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설화와 상고대는 최고조에 달하는 아름다움으로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와 가느린 넝쿨나무 줄기에 부채살 같은 상고대의 연출과 보잘 거 없어 보이던 마른풀잎 조차도 피워내는 설화들의 향연으로 만화방창하다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못해 무아지경인 숲속의 풍광들을 만들의 내고 있었다.
이런 아름다움과 함께 나눈 즐거운 시간이다 보니 힘든 줄도 모르고 지나는데 백수리산 700m라는 표지판이 반기고 있었고 967m봉의 벤치에 앉아 흔적 한 장을 남기고 백수리산(1034m)을 오른다.
(사진 : 산지기산악회의 아름다운 동행)
(즐거운 산행 행복한 시간들을 함께 하고 있다)
(사진 : 숲속의 설화의 모습도 각양 각 그 아름다움도 들여다 보면서)
(사진 : 대간길을 이어가는 행보는 건더렁 건더렁 거침이 없어 보인다)
(사진 : 덕산재에서 6.7km 백수리산까지 700m 란다)
(사진 : 앞서간 산님 흔적을 따라서 오르다 보니)
(사진 : 백수리산 정상석을 만난다)
(사진 : 백수리산 정상석 뒷면에는 김천산꾼들이 새긴 흔적이)
[목장길 합류 도착 14:35]
백수리산을 지나면서부터 973봉 1170.6봉을 오르면서 서서히 기움이 빠지고 몸은 지쳐가는 듯이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뒤따라오시던 어느 산님이 짜증스런 목소리로 에이구 지겨워하신다.
그러자 한 산님께서 산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란다 하신다.
그러실 만도 하실 거 같은 생각이 든다.
미끄러운 산길을 힘들게 오르면서도 드러나 보이는 전망이라고는 없고 아무리 아름다운 설화요 상고대 일지라도 벌써 몇 시간 채 오리무중(五里霧中) 속에서 같은 그림들을 보면서 산행중인가 싶어 동감스런 생각에 웃음도 나지만, 산을 오르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이니, 곧 자신을 뛰어 넘는 것이기에 인내하며 목적지까지 행보를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며 1170.6봉을 내려서 목장길을 만나며 목교(木橋)가 마치 늪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목판으로 설치된 멋진 계단을 건너 평평한 산길을 이어가는 임도길을 만나고 능선분기점을 지나 산죽사이로 오르다 사면길로 진행하여 내려선 안부에서 오르니 쉬어가기 좋은 공터가 있는 11170봉에 도착했다.
이 봉에 올라서도 안개로 인해 주변을 조망하거나 살펴 볼 수는 없었음이 산행 중 아쉬움으로 남는 듯하였다.
(아름다운 설화가 발목을 잡고 바라보는 눈(目)길은 마음까지 빼앗기는듯 하고)
(실컨 바라보고 탐했는지 가던 걸음 다시 이어간다)
(사진 :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설화에 산님들이 너도 나도 함께 하고자 모습을 담는다)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에 동화되어 가는듯 두분도 어느듯 자연의 모습을 닮듯 합니다)
(사진 : 아름다운 동행 함께 하는 행복한 시간에 즐거운 모습입니다)
(사진 : 목장길에 설치된 멋진 목교에서 흔적을 남깁니다만 안개가 시계를 불량하게 합니다)
(사진 : 목장길에 설치된 목교)
(사진 : 목교 교각에 얼어 붙은 雪의 모습을 담아 보았네요)
(사진 : 목장을 지나는 평평한 대간능선길)
[이정표 도착 15:28]
하지만,
나뭇가지는 가지대로 넝쿨과 잡목, 잡풀은 그 나름대로 멋진 자태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 숲이 가진 하잘것없어 보이던 모든 것들이 雪을 대하여 직품을 만들어 내는 솜씨는 극치를 달하고 있었다.
이번 대간산행에서는 이른 봄에 만들어 내는 풍광들을 지겹도록 탐하며 바라 볼 수 있었던 것은 산행 중 맞이하는 행운이었다.
1117봉에서 내려서 해인리와 중미마을로 내리막길이 좋은 십자안부에 닿는데 이정목에 해인리0.5km,중미마을4.3km,삼도봉0.5km)이 세워져 있다.
(사진 : 가느린 나뭇가지가 피워 낸 설화가 부채살처럼 환상적이다)
(앙상한 나뭇가지도 마른 나뭇잎에도 ,,,)
(마른 풀잎들이 피워낸 雪花도 그 아름다움을 더 하고)
(가느린 넝쿨줄기에도 곡선을 그리는 설화들이 가관이다)
(사진 : 그 숲속을 탐하며 산행을 이어가는 산지기산악회 대원들의 행보가 즐거워 보인다)
(사진 : 참으로 멋진 雪花들을 바라보며 오르는 산행길은 발걸음이 더디고)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머문 발길 마음까지도 내려 놓는 듯 싶다)
(사진 : 1117봉을 내려서서 만나는 이정목이다)
[삼도봉 도착 15:40]
목판을 잇대어 만들어 놓은 길로 오르면 넓은 터에 용이 여의주를 머리에 받쳐 이고 있는 형상의 삼도화합의비(전라북도 무주군,충청북도 영동군,경상북도 금릉군)가 설치되어 있는 1172m의 삼도봉을 만난다.
원래 이곳의 본래 이름은 화전봉이었으나, 조형물을 세우면서 三道峰으로 이름으로 바꿔 버린 것이란다.
삼도가 화합의 장을 마련한 이곳에서 우리가 함께한 산지기산악회 회원들에 아름다운 동행의 모습들을 단체로 담아보고서는 삼마골재로 내려선다.
(사진 : 삼도봉을 오르는 비탈길이다)
(사진 : 삼도봉 정상 세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이 이체롭다)
(사진 : 현재위치 삼도봉에 새워둔 표지목에 황룡사가 4.4km를 표시하고 있다)
[삼마골재 도착 15:58]
삼도봉에서 가파른 내리막을 내려서면 삼마골재다.
주변에는 공원같이 운동기구를 설치해 두기도 하였고 표지막과 이정목이 잘 설치되어 있었다.
하산길인 황룡사(물한리계곡) 길과 해인리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었고 이곳에서 해인리까지는 2.4km 약 1시간이 소요되고 황룡사까지는 3.5km로 약 1시간 30분이 소요 된다고 한다.
이곳에서 마루금을 이어갈 대간산행을 종료하고 황룡사가 있는 물한리계곡으로 하산길을 잡는다.
(사진 : 삼도봉에서 심마골재 또는 황룡사로 내려서는 길목에 산악회 리본들이 만국기 같다)
(사진 : 목계를 밟고 내려서면 삼마골재에 안착한다)
(사진 : 삼마골재 주변의 모습이다 마치 공원처럼 운동기구까지 잘 설치되어 있다)
(사진 : 이정목을 따라서 황룡사로 내려선다)
[삼도봉약수터 도착 16:18]
민주지산과 연계되는 물한리계곡은 용소와 의용골폭포. 음주골폭포 등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여름이면 피서지로 각광받는 곳이라고 한다.
삼마골재에서 물한리로 내려서는 비탈길이 만만찮아 역으로 황룡사에서 삼마골재로 산을 오를 때는 힘겨워 보인다.
그런 비탈길을 내려서다 보면 돌무더기를 쌓아 놓은 곳에 삼도봉약수터라는 작은 푯말이 서 있다.
(사진 : 삼마골재에서 황룡사로 내려선다)
(사진 : 황룡사로 내려서는 비탈에 쉼터도 있고)
(사진 : 돌무더기를 쌓아 놓은 곳에 삼도봉약수터라는 표지목도 있다)
[음주암폭포 도착 16:21]
돌무더기를 쌓아 놓은 약수터를 지나면 청정수 같은 물이 흐르는 물한리 계곡을 만나고 징검다리를 건너 내려서면 규모가 작은 음주암폭포를 만나고 이곳에서부터 본격적인 계곡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물한리 주민들이 물을 관리하기 위해 사람들이 계곡에 들어서지 못하도록 철망을 두른 울타리로 보호하고 있었다.
(사진 : 물한리계곡이 시작되는 징검다리 개울도 건너)
(비탈길을 따라 산길을 내려서다 보면)
(사진 : 작은 음주암폭포도 만난다)
[황룡사 입구 물한계곡 안내비 도착 17:04]
계곡 건너 작은 사찰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황룡사 사찰이다.
사찰을 뒤로하고 마을로 내려서는 초입에 맑은 물살 굽이도는 물한계곡이라고 글귀가 새겨진 안내비가 서있었다.
이곳을 날머리로 하여 덕산재에서 물한리까지 총 산행거리 15.2㎞ 산행시간 7시간 34분간 산지기산악회 대원들이 함께한 아름다운 동행이요 아름다운 시간속에 머물었던 행복한 산행을 마무리 한다.
(사진 : 솔향기 가득한 전나무 숲을 나서면 규모가 작은 황룡사란 사찰이 있다)
(사진 : 물한리계곡 초입에 세워진 계곡비)
함께했던 산행 고마웠고 즐거웠지요.
모두들 수고 많았습니다.
♧ 백두대간 사람들
(산장지기의 꿈이 익는다)
삼도가 만나는 삼도봉에 전하는 화합의 전설, 그리고 고향에 돌아 온 산꾼의 바람
지는 해를 받아 보석처럼 빛나는 억새에 한줄기 바람이 스친다. 억새의 갸냘픈 허리가 춤을 춘다. 백두대간 초록이 억새의 교태에 겨워 빨갛게 수줍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을이 찾아드는 삼도봉(1117m) 정상에 섰다. “맑은 날이면 스키장도 보이는데….” 함께 삼도봉에 오른 해인산장 김용원(53)씨의 흐려지는 말꼬리가 시야를 가리는 가스를 탓한다.
이 깊은 산중의 하늘도 어느새 서울의 하늘을 닮아 있었다. 먼 하늘에 검은띠가 길게 가로로 그어져 있다. ‘손가락으로 튕기면 금방이라도 금이 갈 것만 같은’ 하늘은 그 검은띠 위에서나 만날 수 있었다. 삼도봉에서 굽어볼 수 있는 하늘은 온갖 물감을 뒤섞은 물빛처럼 탁하기만 하다. 남서쪽 하늘에 덕유산이 아스라이 애처로운 것은 스키장으로 파헤쳐진 산자락의 참혹함을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그 참혹함을 감춰내는 탁한 하늘이 차라리 고맙기만 하다.
( 국토의 하단전에 기를 모으는 산들의 행진 )
경상북도와 전라북도, 충청북도가 만나는 삼도봉은 바다의 정수리였다. 사방팔방에서 달려오는 산들은 마치 파도처럼 당당했다. 삼도봉을 사람의 몸에 견주어 하단전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산의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님한테 들은 이야기입니다. 예전에는 이곳 항구에 배를 묶어두는 쇠말뚝이 있었다고 합니다.” 김씨는 발 아래 보이는 골짜기에 있는 자신의 고향 해인(海印)마을의 내력을 더듬어 일러주었다. 산을 오르기 전 가을걷이가 한창인 들녘에서 들은 해인마을의 내력과 맞닿는 이야기였다.
마을사람들은 하늘과 땅이 뒤바뀌던 먼 옛날의 일을 들려주었다. 살아 남은 사람들은 한 척의 배에 의지해 목숨을 부지할 새 땅을 찾아다녔다. 그때 배가 닿은 곳이 삼도봉이었고 바닷물이 빠진 뒤 사람들은 해인마을에 새 삶의 터전을 닦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정감록>에서 들먹거려지는 피난지지라는 곳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낮에는 국군에게 경을 치고 밤이면 빨치산들에게 혼쭐이 났던 기억을 갖고 있는 산중마을이건만 마을자랑에는 <정감록>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삼도봉 어딘가에 만인이 난을 피할 만한 곳이 있다고 적혀있는데 그곳이 해인마을이라는 거였다.
해인마을은 지금도 버스가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오지다. 이 깊은 골짜기에 처음 삶의 터전을 닦은 이들은 아귀다툼을 벌여야 살아갈 수 있는 세상과 등을 돌리기를 원한 <정감록> 신봉자들이었을 것이라는 것은 김씨가 고학으로 공부를 해야 했던 내력에서도 드러난다.
해인마을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부자 집안인 광산 김씨의 후손이건만 김씨의 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을 초등학교에서 끝내려 했다고 한다. “아버지께서는 요즘처럼 어수선한 세상에서는 똑똑한 사람이 살기 어려우니 나랑 같이 여덟구멍을 지고 살자고 하시더니 학교에 보내주지 않더라구요.” ‘여덟구멍’은 지게를 이르는 말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급변하는 세상이 김씨 아버지에게는 어수선하게만 보였을지 모를 일이다. 김씨의 부친이 보았다는 삼도봉의 쇠말뚝도 옛 사람들이, 마을이 세파에 시달리지 않기를 바라며 세웠던 비보풍수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국어사전은 해인이라는 단어가 ‘우주의 일체를 깨달아 아는 부처의 지혜’를 이르는 불가의 말이라 적고 있다. 그 말에는 ‘모든 법을 비추어 보는 것이 바다에 만상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라는 뜻도 함께 들어 있다. 진정 사람이 사는 것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해인의 옛 사람들에게 삼도봉 정수리에서 굽어보는 세상은 만상이 아귀다툼하는 바다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언젠가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이 오면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머물러야 하는 마을이 그 세파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라며 삼도봉 정수리에 쇠말뚝을 박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쇠말뚝은 김씨를 고향에 붙잡아둘 만큼 든든한 것이 아니었다.
(매년 10월10일 김천시,영동군,무주군이 삼도화합제를 연다)
그래도 그는 결국 산으로 돌아왔다
김씨는 15살 되던 해에 외가의 도움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검정고시를 거치고 야간학교를 다니며 뒤늦은 공부를 마치고 서울 장안동에서 자동차 부품상을 경영할 만치 자리도 잡았다. 그런 생활을 김씨는 8년전 버렸다. “어음 걱정하고 가계수표를 한 달에 6권이나 쓰는 생활에 회의가 들더라구요.” 김씨는 자신의 회사를 직원에게 넘겨준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김천에서도 산골이라 말하는 지례 5개면에서도 해인은 첫 손가락에 드는 산골이었다. 그 산골로 김씨를 이끈 게 산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 김씨는 또 몇 년을 보내야 했다. “처음에는 그저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었습니다. 오래 전에 처분했던 고향집 땅을 되샀습니다. 목재가 좋은 탓에 옛집은 이미 헐려 다른 마을로 팔려갔고 집터에는 담배 말리는 창고가 들어섰더라구요. 땅 주인을 찾아 하소연을 했지요. 다행히 흔쾌히 땅을 내주더라구요.” 그 땅에 집을 지었다. 그 집에 종종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이들이 찾아들었다. 갑자기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창고까지 내주고도 모자랄 정도로 사람들이 찾아왔다.
산골에서 태어나 자랐으면서도 등산학교까지 수료한 김씨는 스스로도 인정하는 어쩔 수 없는 산꾼이었다. 월급쟁이 시절에도 퇴근 후에 북한산 인수봉으로, 도봉산 노적봉으로 달려가 달빛을 벗삼아 바위에 매달렸다. 강원도로 출장이라도 가게 되면 신이 났다. 수금한 돈을 배낭에 짊어진 채 설악산을 오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산에 대한 갈증이 만들어낸 꿈이 산장지기였다.
집에 찾아드는 이들을 바라보며 김씨는 산장지기의 꿈을 구체화했다. 산에 가까운 곳에 구입해 놓았던 땅에 지을 집을 설계했다. 그 설계는 지난 여름 아들과 함께 땀을 흘린 덕에 이제 도배만 마치면 되는 29평의 해인산장으로 태어났다. 오래 전 용인 통나무학교에서 익힌 기술로 손수 통나무 기둥을 세우고 상량을 올리고 서까래를 얹었다. 자신의 서울생활의 근거지였던 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에서 찍어온 흙벽돌로 옛집 흙담도 재현했다. 아쉬움이라면 잇고 싶었던 초가지붕을 얹지 못한 것. 이미 산골에는 초가지붕을 제대로 이을 만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애지중지하던 등반장비를 추려 산장입구에 내거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등반과 등산은 다르다는 것을 삼도봉을 찾는 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바람이 크기에 오가는 이들의 손을 탈 것이라는 주위의 염려쯤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삼도봉이라는 산이 그리 유명한 산이 아닌 터라 산장은 생활에 그리 큰 도움이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잘 안다. 29평의 산장은 돈을 벌어줄 만큼 많은 이들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비좁다. “이곳에서 젊은 산꾼들을 만나 삼겹살에 소주 한잔을 나누며 살아갈 것입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면사무소 이전 문제로 부항면이 아랫면 윗면으로 나누어 작은 전쟁을 치른 적도 있었다. 당시 싸움에는 면사무소에서 탈취한 소총이 등장하고 총알이 떨어진 뒤에는 죽창이 들려질 정도로 심각했다고 한다. 결국 마을의 몇 사람들이 유명을 달리하고 현역군인 1개대대가 출동해서야 부항면의 작은 전쟁은 끝이 났다고 한다.
(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돌무더기 전설)
김씨의 아버지가 보았다는 쇠말뚝이 서 있었을 삼도봉에 지금은 세 마리의 용을 태운 세 마리의 거북이 서 있다. 90년에 삼도봉에서 서로 만나는 김천시와 영동군, 무주군이 지역감정을 타파하고 화합하자는 뜻을 담아 세웠다는 삼도화합 기념탑이다. 그 자리에 예전에는 세 개의 돌무더기가 있었다고 한다. 돌무더기를 크게 쌓은 도가 가장 잘살게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통에 돌무더기가 작았던 고장의 사람들이 어느 날 돌무더기를 모두 허물어버렸다는 데서 돌무더기 이야기는 끝난다.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돌무더기는 흔적이라도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삼도봉 어디에도 돌무더기의 흔적은 찾아보지 못했다. 누군가 지역감정을 부추기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돌무더기를 쌓았다는 시절에 경상도 부항면 사람들은 전라도 무풍장에서 부족한 먹거리를 구했고 무주군 사람들은 김천과 지례의 우시장에서 소를 사고 팔았다. 낮이 긴 여름이면 두 마을 청년들이 서로 먹거리를 마련해 부항령 고개를 넘나들며 친구를 찾던 그 시절에는 두 마을간의 혼사도 그리 귀한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