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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부활 메시지 제 2 강 (아산 UBF)
홀연히 다 변화되리라
말씀 / 고린도전서 15:35~58
요절 / 고린도전서 15:51,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우리는 대부분 가족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심각하게 경험합니다. 자신이 죽음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이 주는 슬픔과 절망을 체험합니다. 큰 사고를 우연히 겪을 때가 아니라면 대부분은 나이가 많아져야 죽음이 나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염려의 근원이 죽음이고, 걱정의 바탕도 죽음입니다. 죽음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 두려움은 자라나고 죽을까봐 놀라고 죽으면 어떻게 하나 절망을 갖습니다.
오늘 말씀은 죽음과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죽은 후 어떻게 되는지, 부활의 구체적인 과정과 부활의 모습이 어떻게 진행되고 이루어지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학생들과 대화해 보니, 대부분 학생들은 죽음에 대한 인식보다는 장래에 대한 염려와 고민이 훨씬 더 크고 진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배워서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 찾아올 죽음의 공포, 죽음에 대한 자각과 인식이 있을 때, 소망과 확신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죽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나는가? 다시 살아난다면 어떠한 몸으로 부활할 것인가? 사도 바울은 먼저 질문을 제기 합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면 죽은 사람의 몸이 온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죽은 그 몸이 그대로 다시 일어나는 것을 부활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죽은 사람이 다시 생명을 받아 일어난다면, 시신이 온전히 보전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죽음과 함께 죽은 그 몸이 보전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6.25 전쟁 때, 죽은 우리나라 군인과 경찰이 대략 14만(137,899) 명입니다. 포로로 잡혀갔는지 혹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실종자도 3만3천명에 달합니다. 국립묘지에 묻힌 분들은 2만 명에 미치지 않습니다. 12만 명이 넘는 전사자들은 어디에 누워 있는 것일까요? 국군유해발굴단이 있는데 전국의 산과 들을 다니며 이분들의 유해를 찾고 있는데, 어떤 분은 발목뼈만 있고 어떤 분은 허리 아래 뼈만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부활한다면 신체 일부분만 다시 살아난다는 것일까요? 이렇게 시체 자체가 상실되었거나 아주 없기도 하는데 죽은 몸이 부활할 수 있는 것인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의문을 품는 사람에 대하여 ‘어리석은 자’라고 말합니다(36a).
부활의 원리와 부활의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리석다고 합니다. 자연에는 부활의 진리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씨를 뿌려 씨가 자라는 것을 비유로 듭니다.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립니다. 이 씨가 싹이 트는 과정이 진행됩니다. 배젖이 양분으로 분해되어 주어 배아에서 싹이 트고 줄기가 나는 것입니다. 배젖이 양분이 되어 분해되는 것과 같이 지금의 우리 몸이 배젖 역할로 죽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우리 몸은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합니다(36b).
37,38절을 보십시오.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부활을 죽은 몸의 일어남으로만 생각한다면 발생할 수 있는 문제가 많습니다. 저의 외할아버지는 회갑 전 50대에 돌아가셨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78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이 두 분이 부활하여 만난다면 나이 많은 사위가 훨씬 젊은 장인더러 ‘아버님’이라 불러야 합니다. 우리가 죽을 때의 모습 그대로 부활한다면 상당히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여기에도 씨 뿌리는 것으로 원리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씨를 뿌릴 때 장래의 형체를 뿌리지 않습니다. 사과씨나 배씨는 검고 작습니다. 복숭아는 딱딱한 속 껍질 안에 조금 길쭉납짝한 모양으로 예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을 심으면 사과나무가 나오고 배나무가 나오고 복숭아나무가 나옵니다. 씨와 씨에서 나와 자라난 성체는 전혀 다른 모양입니다. 부활도 이와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밀이나 쌀 알갱이를 심을 때, 씨의 모양과는 전혀 다른 잎이 나고 줄기가 듯이 지금 우리의 몸이 심겨질 때, 완전히 새로운 형체를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사과 씨와 사과나무가 다르듯이 부활하기 전의 몸과 부활한 후의 몸이 완전히 다릅니다.
39~41절을 보십시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사도 바울은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몸과 부활하여 입을 몸을 설명할 때, 하늘에 속한 형체와 땅에 속한 형체가 큰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뉴튼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의 운동을 F=ma로 설명하였습니다. 맥스웰은 우리가 보는 물결파와 같은 파동을 맥스웰 방정식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반도체는 평소에는 전자가 튀어나가지 않다가 어떤 조건을 가하면 전자가 튀어나가는 물질입니다. 최외곽 전자가 자유롭게 튀어 나가는 것을 우리는 전류가 흐른다고 표현합니다. 이와 같이 반도체에서 평소에는 자리를 지키다가, 원자의 주위를 돌고 있다가 어떤 조건에서 갑자기 튀어 나가주는 전자 하나의 질량은 9.109 X 10(-31승)킬로그램입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먼지 알갱이 하나의 지름이 10 X 10(-6승)m입니다. 원자 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처럼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금성의 질량은 4.867 X 10(24승)킬로그램, 화성의 질량은 6.39X 10(24승)킬로그램, 목성의 질량은 1.898 X 10(27승)킬로그램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거대한 목성조차 이 은하계 전체에서 보면 먼지 하나보다 작습니다. 완전히 차원이 다르지 않습니까? 이런 지식들은 차원이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 것을 조금 실감할 수 있게 합니다.
육체가 다 같은 육체가 아닙니다. 하늘에 속한 형체가 있고, 땅에 속한 형체가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양광이 따로 있습니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별의 영광이 다른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습니다.
42~44절을 보십시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의 지금 몸은 앞으로 썩을 몸이며, 욕된 몸이요, 약한 몸입니다. 이것이 우리 육체의 실존하는 모습입니다. 20대에는 몸은 건강하지만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제발 이런 몸의 습관은 내가 통제하거나 조절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것이 안 됩니다. 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생각도 그러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마음과 생각은 늘 그 자리를 돌고 돕니다. 나이가 들면, 좋은 점이 있습니다. 젊을 때 통제하고 싶었던 몸과 마음이 조금씩 통제가 됩니다. 이래서 나이 들면 좋구나 생각하지만, 문제는 이런 나이에 이르면 몸이 강하지 않습니다. 약해지는 곳이 하나 둘 생깁니다. 친구들은 제가 혈압약 먹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놀랍다고 합니다. 혈압약 먹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어떤 분은 제가 안경없이 생활하는 것도 놀랍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의대교수님들과 어울렸을 때, 성형외과 교수님은 저의 눈 주위 지방을 제거해야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비인후과 교수님에게 요즘 전보다 자주 음식 먹다가 사리 들린다고 하자, 그럴 나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이 몸은 땅에서 살기에 적합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살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은 이 땅에서 보내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늙어가고 병들어가고 결국에 죽음을 맞이하여야 합니다. 우리나라 토질은 강한 산성토양이라서 땅에 묻히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옛날 무덤에 왕관이나 허리띠 같은 부장품만 있고 묻힌 시신은 머리카락 하나도 남아있지 않는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이와 같습니다. 약하고 병들고 쓰러져 아무 것도 없이 사라지는 흙일 뿐 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십니다. 강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십니다.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하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새 몸입니까!
45-50절을 보십시오. 아담은 처음으로 생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담은 죄를 지어 생명 받은 인생이 죽음을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담은 흙으로 빚어졌으나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첫 사람 아담의 허리에서 나와 아담처럼 육의 몸을 입고 흙으로 돌아가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우리 안에는 영생 얻을 부활의 생명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아담의 몸을 물려받은 것처럼 이 땅에 속한 몸을 벗은 후에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새 몸을 입습니다. 부활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신 영광스러운 새 몸을 입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습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썩지 아니하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기 위해서 썩을 몸을 가진 이 몸이 썩지 아니할 몸으로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죽음의 강을 넘어 영광스럽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언제 이렇게 변화됩니까? 51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재림의 날, 천군천사들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면, 먼저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부활하여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때 살아 있는 성도들의 몸도 홀연히 다 변화하여 영광의 주를 맞이합니다(52). 이와 같은 모든 변화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리스도인들에게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이 썩을 몸이 썩지 않게 되고 이 죽을 몸이 죽지 않게 됩니다(53).
54절을 보십시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이때까지 사망이 모든 사람들 위에서 왕 노릇하였습니다. 죽음이 가장 강한 세력으로 모든 사람을 죽음 앞에 무릎꿇게 하였습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빠짐없이 사망에 지고 사라졌습니다.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시황제는 죽음을 피해보려고 늙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하는 약초를 구하라고 한반도에까지 사람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의 몸은 흙으로 돌아갔고 그의 모습은 썩어 없어졌으므로 후대의 사람들은 시안에 큰 돌 모양으로 세웠습니다. 그 돌도 시간이 흐르면 부서지고 무너질 것입니다. 인간은 죽음이 두렵습니다. 인간은 죽을까봐 두렵습니다.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쳤지만 죽음의 권세 앞에 어쩔 수 없이 굴복 당하고 고통스럽게 죽었으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죽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자들은 살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처럼 허무감에 시달리며 인생무상이라 탄식합니다. 죽음은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죄를 무기로 삼아 사람들을 살아 있는 동안에도 계속 공격합니다. 죄를 짓게 하고 율법으로 죄의 심각성을 깨닫도록 합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 과연 죽어서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죄를 지어서 죽음의 벌을 받지 않을까? 죽은 후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는 절망에 빠집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와 같이 사망이 무수한 사람을 이겨버리는 것을 끝내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사망은 더 이상 이길 수 없습니다. 그날 사망 권세가 멸하여 집니다. 자연히 죄의 세력과 율법의 세력도 힘을 잃고 맙니다.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사25:5, 호13:14).
그리하여 우리는 부활의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얻는 최후의 승리를 기뻐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55,56). 율법은 죄를 드러내며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는 기준을 보여줍니다. 율법이 정한 기준은 사람이 노력으로 도달 할 수 없었습니다. 죄는 율법의 힘을 업고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러나 57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죽음에 대한 승리를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음에게 먹히지 않습니다.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합니다.
썩을 몸을 버리고 장차 영광스러운 부활의 새 몸을 받을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58a).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 부활의 영광, 부활의 승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아야합니다. 장차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는 부활의 소망을 굳게 하고, 믿음이 흔들리지 말아야합니다.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던 한 어른이 혈압이 상승하고 밤에 갑자기 심방박동이 급히 불안정해지는 증상을 겪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이대로 죽는 것인가?” 죽음의 공포가 찾아오더랍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심각한 고민이 더하여졌다고 합니다. “지금 내가 죽으면 나는 천국에 과연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고 여러모로 가르쳐왔지만, 막상 죽음의 공포를 맛보고 육체의 연약함을 실감하자 ‘과연 내가 지금 죽는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심난한 고민을 하였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제가 대학 신입생 때, 교양국어 첫 단원이 “어떻게 살 것인가?” 였습니다. 교양국어 교재 첫 단원에서는 실존주의 철학자가 묘사한 삶의 모습을 소개하였습니다. 어떤 사나이가 광야를 걸어가다가 굶주린 사자를 만나 피할 곳이 없어 다급히 우물 안으로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우물 바닥에 무서운 독사들이 우글거려서 아래로 내려갈 수 없는데, 사자는 밖에서 계속 울고 있습니다. 올라가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하고 우물안으로 중간에 삐져나온 나뭇가지 하나를 겨우 붙들고 있는데 나뭇가지를 쥐들이 사각사각 갉아대고 있답니다. 이제 곧 나뭇가지가 끊어질텐데, 올라가도 사자에게 죽고 내려가도 독사에게 죽을 상황, 이 때, 우물안 돌틈에서 꿀물이 떨어지는데 그것에게 혀를 갖다대는 사나이, 이것이 우리 인생의 실존하는 모습이랍니다.
올라가도 죽고 내려가도 죽습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도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나뭇가지는 끊어집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당장 어디선가 떨어지는 즐거움을 맛보고 있는 신세가 부활이 없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죽음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누구에게나 다가옵니다. 때로 죽음은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은 파장을 일으켜서 절망의 에너지, 낙심과 슬픔의 파문을 주위에 전달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일시적으로 실감하지 못하며 살 뿐, 때가 되면 죽음이 주는 공포와 죽음이 쏘는 죄에 시달리다가 저마다 각자의 때에 죽음을 직접 만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부활의 새 몸을 가장 먼저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에게 져서 죄를 지으며 괴롭고 비참하게 된 우리 인생을 사망에서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사망에서 건지시고자 그 무서운 십자가를 다 지셨습니다. 죽음을 향해 가는 우리의 이 괴롭고 슬프고 처절한 인생을 구하시려고 예수님께서 그 아픈 채찍을 다 맞으셨고 갖은 모욕과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 맞으시고 예수님께서 버림받으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괴로우셨겠습니까? 이렇게 우리를 위하여 대신 고난 받아 죽으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그대로 머물러 계실 수 없었습니다. 그대로 죽으시면 그저 슬프고 처절하게 같이 죽음 아래 있는 눈물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 부활의 주, 죽음을 이기신 승리의 주가 되셨습니다. 이로써 죄에 져서 죽음에게 잡히고 늙고 병들고 연약하여 죄와 사망에게 눌려 있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완전히 해방해 주셨습니다.
사각사각 내가 붙들고 있는 나뭇가지가 끊어져 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떨어지는 세상의 꿀물을 맛보면서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으려고만 하고 달래기만 하겠습니까? 현실 자각만 실감나게 하면서 두려워하고 근심하고 낙심하기만 하겠습니까?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우리에게 새 몸을 주시는 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썩지 않은 몸을 주시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예수님과 같은 영광스러운 몸을 주시는 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에게 썩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고 더러워지지 아니하는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하게 하시는 주 예수님을 감사하며 찬양 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육체 안에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쇠하고 약하고 부족함에 상관없이 부활의 생명을 받은 자답게 살고 주님 오시는 날 완전히 새로운 몸을 입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새 몸을 받기를 소망하며, 이 땅에서 주시는 고난을 잘 참고 견디며 부지런히 열심히 주의 일에 힘써나가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신앙은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행함이 이루어져 만들어가는 우리의 삶이 부활에 대한 확신 가운데에서 희생과 헌신과 용기 있는 충성으로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아산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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