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 늪 -
꽃비
오예진
똑, 똑, 똑, 똑
어머 꽃비 온다
바람이 몰고 온 빗소리
꽃도 풀도 새싹 잎들
싱글싱글 깨운다
목련꽃 말아 놓은 하얀 꽃 속 봉오리
꽃비 맞아 달랑달랑 떨어진다
저기 먼 영혼의 꽃들의 향해
* 오예진 : 경남 하동 출생. 힐링그라운드 코칭, 아로마컨설턴트 강사. 현 필봉 문학회 회원.
펜션 마당으로 돌아오니 미란은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혼자만의 행복한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우리가 마당으로 들어서자 본체만체할 만큼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있었다. 모닥불은 그녀 옆에서 염염히 타오르고 가을밤 바람은 마치 봄밤의 그것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뭘 그리 일찍 왔어요? 둘이 그렇게 할 말이 없남?”
“혼자 있기 적적하지 않을까 싶어 빨리 왔답니다.”
나는 그녀의 앞에 앉았고, 유희는 미란 옆에 앉더니 그녀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미란은 그런 유희를 따뜻한 시선으로 보면서 어깨를 감싸주었다. 여자의 우정이란 게 이렇게 아름답구나, 하고 생각했다.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 유희에게는 미란이 그런 존재였다. 자신의 성품과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미란은 현재, 유희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술 한잔해요.”
그녀는 유희를 옆에 두고 내 잔에 술을 따랐다. 그녀와 몇 차례 술을 나누는 동안 유희는 그간의 피로감 때문인지 미란의 어깨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미란이 그녀의 눈앞으로 자고 있는지 손을 흔들었으나, 그녀의 반응은 없었다. 그제야 미란은 아까 나누었던 유희에 관한 말을 재차 꺼냈다.
“개울에서 유희랑 어떤 대화를 나눴죠? 유희 얼굴을 봐선 아까보다 좀 나아진 것 같은데.”
“그게, 생각만큼 잘 안 되더군요. 괜히 옛일을 꺼내다 보니 약간의 입씨름도 있었답니다. 세월이 너무 흘렀나 봐요. 내 마음은 그대로인데, 내 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자꾸 헛나와요. 대화의 단절이랄까. 우린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습니다.”
“유희를 아직, 사랑하고 있는 건 맞죠?”
그녀는 정색하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대답하기 전에 내 가슴에 손을 얹고 골똘히 생각했다. 사랑? 아직도 내가 그때만큼 유희를 사랑한단 말인가.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뚜렷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것까진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굳이 말씀드리면 제가 가진 그녀에 대한 감정은 연민과 슬픔 그리고 함께 있고 싶다는 소소한 것들입니다. 그동안 스스로 치유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제 마음의 밑바닥에는 상처와 배신 등의 감정 찌꺼기가 남아 있습니다.”
“맞을 거예요. 한때, 유희와의 사랑으로 최 시인님은 잃은 게 너무 많았으니까요. 저라도 그렇겠어요. 열렬히 사랑했지만, 절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했던 남자가 어느 날 불쑥, 찾아왔다. 그런데 정작, 저는 그 남자 때문에 남편과 이혼하고 아이까지 빼앗겼다. 이 정도 되면 저라도 정확한 판단이 서지 않을 거예요.”
그때, 미란의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던 유희가 소리를 질렀다.
“그만! 이제 날 놓아줘요. 이렇게 사는 건 아니잖아!”
그녀의 말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는 그녀가 우리 이야기를 다 듣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잠꼬대예요. 어제도 그러더니.”
미란은 유희를 달래더니 그녀의 머리를 들어 자신의 무릎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유희는 편안한지 잠시 눈을 떠 미란을 쳐다보다가 다시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방금 들었죠? 유희는 지금 남편에게서 떠나고 싶은 거예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벗어나고 싶은 겁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아까 말한 대로 친정 부모님의 반대 때문입니까?”
“그런 셈이죠. 유희는 알다가도 모를 만큼 굉장히 복잡한 여자입니다. 강하면서도 약하고, 합리적인고 이성적이면서도 감성에 취약하고. 여러모로 자신이 남편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겠지요. 그 이유가 아까 시인님이 말씀하신 것 외에도 하나 더 있어요.”
“또 다른 이유요? 음, 그녀의 아이 때문?”
나는 아까 개울에서 그녀가 한 말을 기억해내었다.
“맞아요. 유희는 아이에 대한 사랑이 각별해요. 대충 들어서 아시겠지만, 그 집은 남편이 데려온 아이 둘, 그리고 둘 사이에서 낳은 아이 하나, 이렇게 셋을 키워요. 그 집 남편이 비록 알코올 중독에다 유희에게 못되게 굴더라도 경제적인 면에서는 사정이 꽤 좋아요. 돈을 잘 번단 말이죠. 게다가 시댁은 서울에서 꽤 알아주는 알부자인데 건물과 땅이 여럿 됩니다. 만약 유희가 이혼한다 가정해봐요. 남편과 시댁으로부터 돈이야 어느 정도 받겠지만, 유희가 생명처럼 여기는 아이는 빼앗길 게 불 보듯 분명하단 말입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이해가 되었다. 설령, 유희가 작정하고 남편과 갈라선다 하더라도 그녀는 막강한 남편과 시댁을 이길 수가 없었다. 여자이기 이전에 엄마로서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게 그녀의 가장 큰 고민이자 문제였다.
“그런데 더 우스운 건 뭔지 아세요?”
그녀는 자신의 잔을 비우더니 내게 내밀었다. 나는 군말 없이 그녀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남편이란 작자는 자기가 데리고 온 전처의 자식들만 좋아한다는 거예요. 유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그 작자 왈, 유희가 불륜 끝에 낳은 아이라고 아직도 믿고 있다는 거죠. ”
그녀의 말에 기억이 났다. 그때 펜션에 그녀와 남편이 왔을 때, 술에 취한 그를 201호에게 부탁해 방으로 돌려보냈다. 그런데 바로 방에 들어갈 줄 알았던 그와 201호는 술을 더 마셨다. 다음날 201호는 내게 그녀의 남편이 자신은 전처와의 아이 둘 그리고 부인은 어디선가 낳은 아이 하나가 있다며 괴로워했다고 분명히 말했다. 나는 이 기억을 미란에게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잘 되었네요. 이혼하면 남편은 전처 자식 둘만 데리고 가면 되잖아요. 어차피 유희와 낳은 아이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단정하니.”
“그러게요. 그런데도 그 남편이라는 작자는 호적에 자신의 성을 올렸다고 그 아이마저도 이혼하게 되면 자신이 데려간다고 엄포를 놓는 거죠. 그쪽 시댁 어른들도 마찬가지구요.”
“그런데 정말 그 아이가 유희와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아닙니까?”
“아니에요. 남편이라는 작자의 전형적인 의처증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니까요. 유희가 답답해서 유전자 검사를 하자 해도 그자는 끝까지 아니라고 거부해버렸습니다. 하긴, 나도 긴가민가하기는 해요. 그 아이가 그 남편이라는 작자와 별로 닮지 않았으니까.”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탄식이 나왔다. 어쩌다가 유희같이 예쁜 여자가 이런 절망적인 결혼생활을 유지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편, 그 남편의 말이 또렷이 기억났다. 유희는 소설가와 나 그리고 남편 이렇게 세 명의 유부남과 사랑에 빠졌다는 그 말은 생각하고 싶진 않았으나, 나로서도 궁금한 이유였다. 나는 행여, 유희가 어떤 태생적인 결점이 있었거나 아니면 성장 과정이나 학창시절 때 이성에 관한 트라우마가 있지 않았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가족사에 대해 알고 싶었다.
“미란 씨는 유희와 둘도 없는 친구니까 제가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유희의 부모님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일전에 제가 물어봐도 자신의 가족사에 관해서는 일체 별말이 없었거든요.”
그러자 이번엔 그녀가 잠시 침묵했다.
“인제 와서 제가 최 시인님께 말씀드리지 못할 말은 없겠지요. 사실, 유희의 성장 과정은 일반 가정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어머니가 세 번씩이나 결혼하고 이혼하셨거든요. 그러다 보니 유희는 유독 아버지에 관한 기억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정을 많이 그리워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더군요.”
그제야 나는 그녀와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길을 걷다, 젊은 부부 중의 남편이 아이를 안고 있거나, 그 아이를 쓰다듬어 주는 장면을 보면 그녀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 광경만 바라보았다. 어떤 때는 아버지가 중고등학생쯤 되는 자녀와 함께 식당에 왔을 때 그녀는 마냥 부러운 눈치로 그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가 유독 자신 또래의 남자를 찾지 않고 그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소설가와 나, 그리고 현재의 남편을 만난 것이 이해가 되네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 여자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무척 중요해요. 특히 사춘기 때 아버지가 없거나, 자신에게 별 관심이 없으면 성장했어도 언제나 가슴 한쪽이 뻥, 하고 뚫린 기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저 역시 사춘기를 그렇게 보냈더랬어요. 집에 들어가면 늘 술에 취해 폭행과 폭언을 일삼는 아버지 때문에 무척 힘들었죠. 그래서 저는 그때 나만큼은 어른이 되어도 절대 술을 입에 안 댈 것이며, 배우자 역시 술을 좋아하는 자는 절대로 안 된다고 맹세했죠. 하지만 지금 절 보세요. 스스로 술을 잘 마시고 있고 남편도 사실은 술고래예요.”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그녀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내가 그녀일 수 없으나 이상하게도 그림이 그려졌다. 그녀가 어린 시절 상처를 받았다면 보고 듣는 거의 모든 것들이 그 상처 이미지와 연결되어 그녀를 우울한 과거로 되돌아가게 했을 것이다. 그렇게 과거의 이미지와 늘 만나다 보면 두려움, 화, 절망감이 일어날 것이다.
불교에서 이를 ‘잘못된 곳에 마음 두기 (inappropriate attention)’ 라 부른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을 버리고 오랜 고통의 장소인 과거로 되돌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의력이 그 옛 장소로, 옛 이미지로 되돌아가는 순간을 응시하는 순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 그렇게 일어나는 슬픔, 두려움, 고통을 다루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때, 마침 그녀가 깼다. 나는 미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짓했다. 내 눈짓의 의미를 그녀는 알고 있으리라 추측했다. 미란은 그녀를 부축하여 펜션 안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은 나는 꺼져가는 모닥불 옆에 덩그러니 남아 늪을 생각했다. 그녀와 헤어진 후 혼자 경남 창녕의 우포늪에 간 적이 있었다. 우포늪 주변에 높은 산은 없지만 죄다 낙동강 연변의 구릉지이기 때문에 민가도 거의 없고 매우 썰렁했다. 해가 지면 지방도 근처의 몇몇 동리 외에는 인적 하나 얼씬하지 않는 이곳에서 나는 그때 생의 마감을 생각했다.
하지만 나룻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 어부와 재첩을 잡는 아낙의 모습에서 나는 다시금 살고자 하는 마음을 다잡았다. 나에게 닥친 슬픔, 두려움, 고통을 다루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내 안에 내재하여 있고, 무한한 자연에 언제나 있는 자가 치유의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