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자의 윤리1(고린도전서 9 : 22-27) 24년8월7수요일
올림픽 선수중에 탁구신동 신유빈 선수가...초등학교때 국개대표..
사람이 자기 자기 정체! 현재적인 정체만이 아니라 미래적인 이상적 자기 정
체를 어떻게 규정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라봅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을 담배 연기와 같다고 한다던가, 안개와 같다,
혹은 나그네요 방랑자와 같다,
아니면 자기 자신을 학대하면서 쓰레기 같은 인간으로 평가하고 있다면 오
늘의 생이 어떻게 전개되겠습니까?
그런고로 정체성이..곧 나의 생을 결정적으로 지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고로 내가 세운 내 이상, 목표, 그 정체는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주시하며 그리로 치닫는 인생을 살아가야 됩니다.
그래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3장 8-9절에서 사도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를
배우고 얻고, 따르며 마침내는 그리스도안에서 발견되는 자기 자신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자기 자신으로서의 자기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자기로 자신
의 정체를 세웠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그리스도의 사도로 평생
을 살아갔습니다.
그것은 또한 자기 인생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목적이요 그에게만 충성을 다하며 십자가만을 높이고, 십자가만
을 알며,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그런 선택된 인간으로
자기 자신을 생각했습니다.
한때는 핍박자요 훼방자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래그는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자신은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받았
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빌립보서 3장 12절에 의하면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러 좇아가노라"는 말을 합니다.
쉽게 말하면...."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었다"는 그것을 내 이상..., 나의 목표로
하고 오직 그것을 향해 좇아가는 하나의 경주자가 되는 말입니다.
고린도라고 하면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중요한 헬라의 도시입니다.
상업 도시인 이 고린도는 아덴과 멀지 않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아덴은 올림픽 경기장이 있는 곳이요
올림픽 경기의 발상지입니다.
거기로부터 서쪽에 고린도라고 하는 이 도시가 있습니다.
당시에 운동 경기가 최고이었기 때문에 이 고린도 사람들은 아덴에서의 올
림픽 경기를 자주 구경했읍니다.
그래 사도 바울은 지금, 운동 경기에 아주 익숙한 고린도 교회의 성도를 상
대로 운동 경기를 하나의 상징으로 하여 그리스도인의 생활 모습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제 운동 경기자가 적어도 승리자가 되려고 할 때에 그 승리자의 윤리 제
1호는 목적이 분명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싸우며, 무엇을 위해 싸우고, 왜 싸우느냐?
그리고 내가 지금 어느 지점, 어느 방향으로 뛰고 있느냐 하는 이것들이 분명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저들은 썩어질 면류관을 얻고자 한다고말합니다.
챔피언도 되어보고 유명도 했었지만 마지막에 보면 한갖 썩어질 면류관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 가지고 그렇게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 영원한 면류관을 얻기 위해 달음질하는 하
나의 경기자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달음질하라, 뛰라, 상을 얻도록 뛰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방향 없는 자 같거나 방향 감각이 없는 그런 흐리멍텅한
생을 살아서는 아니 될 것이며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하여 직선
적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허공을 치는 것 같은 헛된 수고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수고는 했는데...헛수고 라면 ..충성은 했는데...봉사는 했는데...헌금은 했는
데..열납되지않고 땅에 떨어졌다면 헛수고한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권투에서 허공을 치는 경우가 많은데 선수들의 말에 의하면 그
것처럼 힘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번 허공을 치고 나면 몸에 힘이 다 빠지는 것 같다고 합니다.
일단 내가 치면 상대방이 맞아주어야 하겠는데 맞아주지도 않는 주먹을 휘
두르는 것처럼 힘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진정 목표가 분명하여야 합니다.
저는 권투선수생활을 조금했습니다
권투라는 종목은 상대를 때려서 이겨야 합니다
싸우다보면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고 때리며, 죽일 것처럼 그러다가도 일단
땡하고 종이 울리면 그대로 스톱(stop)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정말 피투성이가 되어 싸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누구를 위한 싸움이며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입니
까? 도대체 왜 때리고 왜욕하고 싸웁니가???
성경은 말씀하시길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아니요...
여러분! 목표라는 것은 결코 현재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미래적인 것이요 여기가 아니요 저기란 말입니다.
보다 더 멀리 멀리, 결국에는 최종 승리자입니다.
마라톤 경기를 보면 처음 뛸 때 1등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계하는 아나운서는 아무개가 선두를 달리고 있다고 말해 줍니다.
이제 중간 지점에 가서도 아나운서는 아무개가 서두임을 알려 줍니다.
그런데 웬걸 5분전에 쓰러지고 말았다면 지금까지의 선두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마지막 결승점에서 1등한 사람이 1등이지, 처음의 것도, 중간의 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최종 목표, 최종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뚜렷한 목적을 세우고, 그리고 줄달음치는
그러한 경기자, 그러한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음 두 번째 윤리를 반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불법적으로 해서는 아니 됩니다. 이에 디모데후서 2장 5절에 보면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법대로 하여야 하고 파울(foul)이 많으면 아니 됩니다.
경고장을 많이 받으면 실격이 되고 맙니다.
미안하지만 경고를 너무 많이 받아서 실격 직전에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아슬아슬합니다.
이제 한 번만 더 반칙하면 실격이요.
끝나는, 그러한 위기에 사는 인격들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대로 더 버티고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신창이가 되었고 이제 마지막 경고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정 코스로 반칙 없는 생을 살아가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반칙이 많고, 왜 이렇게 바로 살아가기가 힘드느냐? 하면
여기에는 먼저 목적만 생각하고 그 과정과 코스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
을 것이니라"(마 16:24) 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의 영광을 바라거든 골고다의 길로 가야 합니다.
이것이 정 코스입니다. 지름길로 갈 생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상 받을 것에만 급급하고, 승리 자체에 너무 관심을 많이 두게 되면
반칙이 많아진다고 해설자는 말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최선을 다한 자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면류관입
니다.
그런데 승리 자체에 너무 신경을 쓰고 집착하게 되면 그 운동 경기는 반칙
으로 끝나게 되고 마침내는 실격이 되고 맙니다.
너무도 조급한 나머지 반칙만 계속하다가 실격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간혹 어떤 경기의 해설자가 저 선수가 저렇게 반칙을 많이 하는 이유가 있
는데 그것은 운동을 처음 배울 때에 잘못 배웠기 때문이라는 해설을 하는
것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 말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처음부터 철두철미한 정 코스의 훈련을 받았어야 하는데 처음에 적당히 배
웠다는 말입니다.
그러자니 반칙 투성이요, 되는대로 훈련을 받은 실력으로 막상 경기장에 나
가서 법칙대로 시합을 하자니 손발이 말을 들어주어야 말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은 처음부터 정 코스로 달리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만사는 정 코스로 훈련을 쌓아 나가야 합니다.
원칙대로 법을 지켜서 그 법이 아주 몸에 익숙하여야 합니다.
이는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익혀야만 반칙 없는 생을 살아갈 수 있겠다는 말입니다.
또한 셋째 윤리는 승리는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승리란 요행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연습량의 결과로 심판 받는 것이 경기라고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건의 생활에도 바른 코스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명백한 말씀으로 지시하기를 "이기기를 다투는 자 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절제한다"는 말을 어떤 영어성경에는 "엑스싸이즈 셀프 컨츠로울
"(exercise self-control), 즉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훈련으로 번역한 곳이
있습니다. 잘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패한 자는 경기에 나갈 자격이 없습니다.
어떤 때에 보면 상당한 수준의 챔피언이 자기를 다스리지 못하고 방탕해 하
다가 그 다음 경기에서 어이없이 참패하고 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가 없는 자는 경기에 나가 보나마나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기나긴 자기와의 싸움에서의 승리가 결정적인 시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올림픽 경기장에 나가서 경기하는 사람들도 보면 어떤 경기는 3분밖에 안
하는데 그 3분 동안에 승리자가 되어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것을 보게 됩니
다. 여기에서 우리는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3분! 그것을 위하여 10년이 넘게 공을 들인 것입니다.
한 젊은이가 10년이 넘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결과로 오늘의 영광을 누
리기에 칭찬할 만하고 박수를 보낼 만한 것입니다.
이 날이 있기까지 그 얼마나 많이 젊음의 정욕과 유혹으로 더불어 싸워야
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 많은 시험을 이기고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영광이 어디 하루아침에 된 것이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3분 동안의 경기입니까?
그런고로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싸움! 여기에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이기고, 감정을 이기고, 타성을 이기고, 게으름을 이기고, 나약함을 이기고, 과거로부터의 가책을 이기고, 뿐만 아니라 이기심과 허영심, 교만, 정욕, 이러한 것들을 모두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는, 자기 자신의 승리자가 될 때에 비로소 마지막 싸움에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깊이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27절에서 자기 경험에 의한 심각한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하노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다 예수 믿어 구원받게 하고는 정작 자기는 버림이 될까 두렵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승리를 구경하면서 자기의 승리로 착각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남편이 잘 믿는다고 해서 나까지 잘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가 훌륭한 신앙 생활을 했다고 하여 내가 따라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구원은 나의 구원이요 나의 경건은 나의 경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구원을 얻게 하였지만 그러나 나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힘써야겠다고 말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실격자가 될테니까 말입니다. 이 얼마나 심각한 말입니까? 그런고로 승리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입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경건을 요구합니다. 그 때문에 사도 바울은 마침내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 합니다. "쳐서 복종하게 한다"는 말은 원문상으로 보면 매우 처절한 이야기입니다.
'두라고고'라는 이 헬라말은 "종을 삼는다", "종을 길들인다"는 뜻의 말입니다. 옛날에는 노예를 붙잡아 왔는데 이 우락부락한 젊은이가 붙들려 왔다고 하여 쉽게 노예로 순종해 주겠습니까? 그런고로 쇠사슬로 묶어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쇠사슬을 풀어 주고도 양순한 종이 될 때까지 엄격한 훈련을 가한다는 바로 그러한 뜻의 말입니다. 사나운 말을 길들이듯이 이 더럽고 삐뚤어진 자기 인간성을 길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리에로! 자기 몸을 쳐서 복종케 하여야 합니다. 이 몸이라는 것이 참으로 이상합니다. 새벽기도에 나오시는 분들과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해봅니다만 이상한 것은 4시 30분에 일어나도 피곤하고 어떤 때는 6시 30분에 일어나도 피곤하고, 10시에 일어나도, 일어날 때 피곤한 것은 꼭 같습니다. 괜히 조금 더 자고 덜 잤다는 기분뿐이지 많이 잘수록 몸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무거워집니다. 아무튼 이 몸이라는 것이 고약해서 잘 길들여야지 그냥 놓아두면 엉망이 되고 맙니다. 24시간을 다 자도 모자라니까 하자는 대로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그만큼 살았으면 내몸이 어떤 존재라는 것은 알만큼 알지 않습니까? 똑바르게 길들여야 합니다. 별로 좋은 육체가 없습니다. 하나같이 나약하고 다 못된 것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하겠다던 바울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나의 몸, 이 나를 다스려서, 강하게 훈련을 시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길들여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리스도를 향하여 중단 없는 경기를 할 때에 경기자는 바른 자세에 있어야 하고 그리고 최후에 이기는 자가 승리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앞에서 최후에 영광을 얻을 수 있는 매일의 승리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