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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시조 57/75 – 어부사시사 31/40
동사(冬詞) 01/10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지음
구름이 걷은 후(後)에 햇볕이 두텁거다
천지폐색(天支閉塞)하되 바다는 의구(依舊)하다
가 없은 물결이 깁 편 듯하여 있다
걷은 – 거둔. 걷힌.
두텁거다 – 두텁구나. 두텁다.
천지폐색(天支閉塞) - 온 세상이 닫히고 막힘. 추위로 꽁꽁 얼어붙었다는 말.
의구(依舊)하다 – 여전(如前)하다. 그다지 변함이 없음.
가 – 끝.
깁 – 비단(緋緞).
겨울 노래로 왔습니다.
겨울이 되면 온 세상이 죄다 얼어붙습니다. 그런데도 어촌은 그다지 위축되지 않는군요. 구름만 걷히면 그런대로 햇볕이 두터워서 견딜 만하답니다.
사실 세상의 판단은, 어부들을 여름에는 ‘뱃양반’이라 치켜 세워 더위 모르고 산다고 하다가도, 겨울에는 ‘뱃놈’이라고 급전직하 추워도 참고 고기를 잡아 올린다는 걱정을 잎세웁니다. 그런데 전혀 아니올씨다네요. 비단 물결이 안온하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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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걷힌 뒤에 햇볕이 두텁다
배 떠라 배 떠라
천지가 얼어붙었으되 바다는 의구하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끝없는 물결이 깁 비단 편 듯하다
고산시조 58/75 – 어부사시사 32/40
동사(冬詞) 02/10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지음
주대를 다스리고 뱃밥을 박았느냐
소상동정(瀟湘洞庭)은 그물이 언다 한다
아마도 이 때에 어조(漁釣)하기 이 만한 데 없도다
주대 – 줄과 대. 낚싯줄과 낚싯대.
다스리고 – 준비를 단단히 하고.
뱃밥 – 배의 판자 틈 사이로 물이 못 들어오게 대나무를 얇게 저며 붙인 것.
소상동정(瀟湘洞庭) - 중국의 지명으로, 소상강과 동정호.
이 때에 – 요즘 같은 계절에. 추운 겨울에.
어조(漁釣) - 고기잡이와 낚시질.
중국은, 특히 소상동정은 보길도보다 위도가 높아서 겨울에는 얼 수밖에 없겠으나, 다행히 겨울에도 개의치 않고 낚시질을 할 수 있으니 준비만 잘했다면 어디 평소처럼 바다로 나가보자고 합니다. 겨울 노래의 첫 수인데 어로(漁撈)가 가능한 사정을 행복으로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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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싯줄이며 낚싯대 손질하고 뱃밥을 박았느냐
닻 들어라 닻 들어라
소상강(瀟湘江)과 동정호(洞庭湖)는 그 물이 언다 한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이때에 고기 잡기 이만한 데 없도다
고산시조 59/75 – 어부사시사 33/40
동사(冬詞) 03/10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지음
옅은 갯고기들이 먼 소에 다 갔나니
적은덧 날 좋은 제 바탕에 나가보자
아해야 미끼 꽃다우면 굵은 고기 문다 한다
옅은 – 수심이 얕은.
갯고기들 – 개의 고기들. 개는 바다, 강물 포구(浦口)나 연안(沿岸).
먼 소 – 먼 바다.
적은덧 – 잠시 동안. 덧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제 – 때.
바탕 – 바다. 먼 소. 어부의 일터, 어장. 제주 지방어에 살아 있음.
꽃다우면 – 좋으면. 물고기들을 꾈 수 있다면.
겨울철 어로 환경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수온이 낮아진 관계로 우선 낚싯밥을 잘 마련하고 조금은 먼 바다로 나가야 씨알이 굵은 물고기들을 낚아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 쉬운 걸 모르랴’ 싶지만, 작가가 어지간히 물가 생활에 적응했음을 감안한다면 솔직함이 묻어나는 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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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은 개의 물고기들이 먼 소에 다 갔나니
돛 달아라 돛 달아라
잠깐 날 좋을 제 낚시터에 나가 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미끼가 좋으면 굵은 고기 문다 한다
바탕의 번역을 낚시터라고 해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고산시조 60/75 – 어부사시사 34/40
동사(冬詞) 04/10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지음
간밤에 눈 갠 후에 경물(景物)이 달랐고야
앞에는 만경유리(萬頃琉璃) 뒤에는 천첩옥산(千疊玉山)
아해야 선계(仙界)ㄴ가 불계(佛界)ㄴ가 인간(人間)이 아니로다
간밤에 – 지난밤에.
경물(景物) - 풍경과 물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
달랐고야 – 달라졌구나.
만경유리(萬頃琉璃) - 만 이랑의 유리창. 윤슬한 바닷물.
천첩옥산(千疊玉山) - 천 겹의 옥 같은 산들. 설경.
선계(仙界) - 신선들의 세상.
불계(佛界) - 부처의 세상.
인간(人間) - 인간의 경계. 이 세상.
겨울인지라, 눈이 내렸고, 고기잡이는 쉬나 봅니다. 그래도 강촌에는 설경이 그림 같아서 맑아진 정신으로 설경을 대하는 눈이 휘둥그레 작가의 마음을 들뜨게 합니다. 비인간(非人間)이라는 데야 수긍할 수밖에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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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눈 갠 후에 경물이 다르구나
이어라 이어라
앞에는 유리 같은 만경창파요 뒤에는 옥 같은 천 겹 산이로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선계(仙界)인가 불계(佛界)인가 인간 세상이 아니로다
만경유리에 창파는 없는 듯한데, 아쉽네요.
고산시조 61/75 – 어부사시사 35/40
동사(冬詞) 05/10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지음
그물 낚시 잊어두고 뱃전을 두드린다
앞개를 건너고자 몇 번이나 헤어본고
어디서 무단(無端)한 된바람이 행(幸)여 아니 불어올까
뱃전 – 배의 양 옆 가장자리.
헤어본고 – 헤아려 보았던가. 헤다 – 헤아리다, 생각하다의 옛말.
무단(無端)한 – 까닭없는. 이유 없는 무고나 횡액. 당쟁의 피해라고 해석도 가능하다.
된바람 – 거센 바람. 매섭게 부는 바람. 높바람. 뱃사람들의 말로, ‘북풍’을 이르는 말.
행(幸)여 – 어쩌다 혹시나.
겨울이라 낚시나 어로의 기대나 걱정은 아예 접고, 바람 걱정이 앞섭니다. 앞에 보이는 개를 넘어갈 수 있을까 몇 번이나 재고 또 쟀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건너갈 수도 있겠는데, 노파심일는지 몰라도 된바람이 꼭 덮칠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행간을 읽다보니 이 바람은 곧 중앙 정계의 피바람인 당쟁과 사화도 되겠습니다. 숨어 사는 노 정객도 이 바람 만큼은 피하고 싶습니다.
겨울의 강촌 풍경과 은사의 심사는 안과 밖이 딱 맞아 떨어졌습니다.
고전번역원 현대어 번역본을 끌어옵니다.
그물이며 낚시 잊어 두고 뱃전을 두드린다
이어라 이어라
앞 개를 건너려고 몇 번이나 헤아려 보았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공연한 된바람이 행여 아니 불어올까
고산시조 62/75 – 어부사시사 36/40
동사(冬詞) 06/10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지음
자러 가는 까마귀 몇 낱이 지나거니
앞길이 어두우니 모설(暮雪)이 잦아졌다
그 좋은 아압지(鵝鴨池)에 초목참(草木慙)을 씻돋던고
까마귀 – 소인배, 간신의 상징. 좋지 않은 일의 징조.
낱 – 개(個).
모설(暮雪) - 날이 저물어 가는 무렵에 내리는 눈.
잦아졌다 – 자욱하게 끼어 있다.
아압지(鵝鴨池) - 거위와 오리가 몰려 사는 곳.
초목참(草木慙) - 초목까지도 부끄러움을 당한 치욕.
씻돋던고 – 씻어주려는고.
고전번역원 각주를 옮겨옵니다,
아압지(鵝鴨池)를 …… 씻었던고 : 당(唐)나라 원화(元和) 연간에 절도사 오원제(吳元濟)가 채주(蔡州)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소(李愬)가 황제의 명을 받고 채주를 공격하였다. 이소의 병사가 적지에 도착해 보니 채주의 성루는 험고한 데다 밤이 되니 눈마저 펑펑 내렸다. 이에 옆에 있는 아압지에 병사를 보내 오리 떼를 놀라게 하여 그 울음소리를 틈타 공격하였다. 적은 성의 험고함만을 믿고 태평하게 있다가 함락당했다. 《舊唐書 卷133 李晟列傳》 초목의 치욕이란 초목들까지도 치욕을 당할 만큼 온 나라가 수치를 당한 것을 가리키는데, 병자호란을 비유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중국의 고사를 가져다가 자신의 한스러움을 누가 씻어줄 것인가, 기대 아닌 기대를 노래했습니다. 당(唐) 시절에 오원제(吳元濟)가 회서(淮西)에서 난을 일으켰는데, 이소(李愬)가 설야(雪夜)에 채성(蔡城)을 칠 때 오리떼를 놀라게 해 그 소음을 이용했다는 고사를 불러내고, 아압지를 설정한 후 초목까지 당한 부끄러움 속에 자신의 귀양을 빗대면서 누군가 자기의 부끄러움을 씻어줄 날이 오리라 기대했던 것입니다.
겨울 강촌의 모설 풍경이 참 고울 듯한데, 여기에 작가의 처지를 비유하였으니 문학이 지니는 ‘텍스트의 힘’이 오늘날 작품을 대하는 후인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군요.
고전번역원 현대어 번역본을 끌어옵니다.
자러 가는 까마귀 몇 마리나 지나갔는가
돛 내려라 돛 내려라
앞길이 어두우니 저녁 눈발이 잦아드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압지(鵝鴨池)를 누가 쳐서 초목의 치욕을 씻었던고
고산시조 63/75 – 어부사시사 37/40
동사(冬詞) 07/10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지음
단애취벽(丹崖翠壁)이 화병(畫屛) 같이 둘렀는데
거구세린(巨口細鱗)을 낚으나 못 낚으나
만경파(萬頃波) 고주사립(孤舟簑笠)에 흥(興)겨워 앉았노라
단애취벽(丹崖翠壁) - 단풍진 낭떠러지와 푸른 절벽. 가을 풍경의 표현일진대 겨울 노래에 쓰였으나 문학의 미사여구(美辭麗句)로 보아줌직하다.
화병(畫屛) - 그림 병풍.
거구세린(巨口細鱗) - 꺽저기의 딴 이름. 입이 크고 비늘은 가늘다. 쏘가리와 비슷함.
만경파(萬頃波) - 잔잔한 파도.
고주사립(孤舟簑笠) - 외로운 배, 도롱이와 삿갓.
흥(興)겨워 – 흥에 못 이겨.
한자어가 난무하니 먹물 깨나 든 자임을 금방 알겠습니다. 고기야 낚든 말든 흥에 겨워 좋다는데야 읽는 입장에서도 ‘아하 그렇구나, 나도 또한 좋구나.’ 하면 그만입니다. 때는 겨울이며, 연중 가장 한가한 때이며, 세밑에다가 정월이 이어지니 억지로라도 뱃전을 두들기며 농부들의 함포고복(含哺鼓腹) 흉내라도 내보는 것이 좋습니다.
고전번역원 현대어 번역본을 끌어옵니다.
붉게 물든 벼랑 푸른 절벽이 병풍같이 둘렀는데
배 세워라 배 세워라
크고 작은 물고기를 낚으려나 못 낚으려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쪽배에서 도롱이 걸치고 삿갓 쓴 채 흥에 겨워 앉았노라
거구세린(巨口細鱗)의 풀이가 조금 의외로군요.
고산시조 64/75 – 어부사시사 38/40
동사(冬詞) 08/10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지음
물가의 외로운 솔 혼자 어이 씩씩한고
머흔 구름 한(恨)ㅎ지 마라 세상(世上)을 가리운다
파랑성(波浪聲) 염(厭)ㅎ지 마라 진훤(塵喧)을 막는도다
머흔 – 험한. 머흘다 – 험(險)하다.
한(恨)ㅎ지 – 원망하지.
파랑성(波浪聲) - 물결 치는 소리. 파도 소리.
염(厭)ㅎ지 – 싫어하지.
진훤(塵喧) - 티끌과 시끄러움. 세상사 잡다함.
물가의 늠름한 소나무와 나누는 대화입니다. 겨울날 저 혼자 푸르른 솔을 보고 작가의 속마음이 쏟아집니다. 너 참 씩씩하다고 먼저 치켜세웁니다. 그러고는 하늘에 나타나는 험상궂은 구름을 탓할 일도 아니고, 종일 끊이지 않는 파도 소리도 미워할 게 못된다고 말합니다. 모두 다 바깥 세상 인간사의 잡다함을 가려주는 역할도 한다고 일러줍니다. 제가 제 처지를 말하니 강촌에 은자로서 답답함이 조금은 가셔졌을까요.
고전번역원 현대어 번역본을 끌어옵니다.
물가의 외로운 솔 혼자 어이 씩씩한고
배 매어라 배 매어라
궂은 구름 한하지 마라 세상을 가리운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물결 소리를 싫어하지 마라 속세의 시끄러움 막는도다
고산시조 65/75 – 어부사시사 39/40
동사(冬詞) 09/10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지음
창주오도(滄洲吾道)를 예부터 일렀더라
칠리(七里) 여울 양구(羊裘) 옷은 어떠한 이런고
삼천(三千) 육백(六百) 낚시질은 손꼽을 제 어이턴고
창주오도(滄洲吾道) - 창주(滄州)는 강호(江湖)와 같은 뜻으로 은사(隱士)의 거처를 뜻함. 오도(吾道)는 우리의 도, 우리가 즐겨하는 일.
칠리(七里) 여울 – 칠리탄(七里灘). 중국 엄자릉(嚴子陵)의 고사.
양구(羊裘) 옷 – 양 가죽으로 지은 옷으로 엄자릉이 입었다고 함.
어떠한 이런고 – 어떠한 사람이던고. ‘~런고’는 의문형 종결어미의 옛말.
삼천(三千) 육백(六百) 낚시질 – 10년간의 낚시질. 강태공(姜太公)이 주(周) 문왕(文王)을 만날 때까지 걸린 시간.
손꼽을 제 – 손꼽을 적에. 손꼽아 가며 나날을 보낼 적에.
어이턴고 – 어잇던고. 어찌 있다는 말인가.
고전번역원 각주를 옮겨옵니다,
창주오도(滄洲吾道) : 창주는 신선 세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신선 세계와 같은 초야에서 자신의 뜻을 품은 채 은거하여 사는 삶을 가리킨다. 두보(杜甫)의 〈강창(江漲)〉 시에 “가벼운 돛배는 쾌히 떠나기에 편리하니, 나의 도를 창주에 붙이리라.〔輕帆好去便 吾道付滄洲〕”라고 하였고, 주희(朱熹)가 무이산(武夷山) 창주정사(滄洲精舍)에서 지은 악부시(樂府詩)인 〈수조가두(水調歌頭)〉에 “영원히 인간 세상일 버리고, 나의 도를 창주에 붙이려 하노라.〔永棄人間事 吾道付滄洲〕”라고 하였다.
칠리(七里) …… 옷 : 한(漢)나라 때의 엄광(嚴光)을 말한 것으로, 엄광은 자기 학우(學友)였던 무제(武帝)가 제위(帝位)에 오르자 이름을 바꾸고 양피로 된 옷을 입고 칠리 여울 가에서 고기를 낚으며 일생을 마쳤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嚴光》
삼천 육백 날 낚시질 :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의 고사를 가리킨다. 강태공이 70세에 위수(渭水) 가에서 낚시질을 시작해서 80세에 문왕(文王)을 만났는데, 그 사이의 기간이 10년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史記 卷32 齊太公世家》
어부사시사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의 마무리로 치닫습니다. 결국 자신의 유배 기간이 늘어져 가고 해배(解配)는 기약할 수 없으니 딱할 뿐입니다. 엄자릉과 강태공의 고사가 자신을 조금이나마 위로해준다고 노래했습니다. 초장의 ‘예부터 일렀더라’에 낙담과 희망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고전번역원 현대어 번역본을 끌어옵니다.
창주오도(滄洲吾道)를 예로부터 일렀더니라
닻 내려라 닻 내려라
칠리(七里) 여울에서 양피(羊皮) 옷은 그 어떠한 이던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삼천 육백 날 낚시질은 손꼽을 제 어찌하던고
고산시조 66/75 – 어부사시사 40/40
동사(冬詞) 10/10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지음
어와 저물어 간다 연식(宴息)이 마땅토다
가는 눈 뿌린 길 붉은 꽃 흩어진 데 흥(興)치며 걸어가서
설월(雪月)이 서봉(西峯)에 넘도록 송창(松窓)을 빗겨 있자
어와 – 아! 감탄사. 어부사시사 40수의 마지막 수인지라 탄성이 나옴직합니다.
연식(宴息) - 안식(安息). 편히 쉼.
붉은 꽃 – 눈 위에 비친 석양(夕陽)빛을 붉은 꽃으로 봄.
설월(雪月) - 눈 내린 밤의 달빛.
서봉(西峯) - 서쪽 봉우리. 서산(西山).
송창(松窓) - 소나무를 볼 수 있는 창. 설월과 잘 어울립니다. 추위를 견디는 모습이 작자와 닮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빗겨 있자 – 비스듬히 기대고 있고져.
날이 저뭅니다. 이제 쉬는 것이 정해진 이치입니다. 석양빛에 귀가하여 편히 쉽니다. 그런데 창밖의 한송(寒松)이 마음을 끄는군요. 자신의 처지를 빗대기에 딱 맞습니다.
어부사시사 마지막 수의 끝맺음도 절창(絶唱)입니다. 과연 고산이요, 시조의 대가입니다.
고전번역원 현대어 번역본을 끌어옵니다.
어와 해 저물어 간다 쉬는 것이 마땅하도다
배 붙여라 배 붙여라
가는 눈 뿌린 길 붉은 꽃 흩어진 데 흥청이며 걸어가서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설월(雪月)이 서봉(西峯)을 넘어가도록 송창(松窓)에 기대어 있자
<고산유고>에 실린 작자의 해설을 고전번역원 번역문으로 옮겨옵니다,
동방에 예로부터 〈어부사(漁父詞)〉가 있는데, 누가 지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시(古詩)를 모아 곡조로 만든 것이다. 이 〈어부사〉를 읊조리노라면 강바람과 바다 비가 얼굴에 부딪히는 듯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훌쩍 세속을 떠나 홀로 서려는 뜻을 가지게 한다. 이 때문에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선생도 좋아하여 싫증 내지 않았고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도 칭탄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음향이 상응하지 못하고 말뜻이 잘 갖추어지지 못하였으니, 이는 고시를 모으는 데 구애되었기에 국촉(局促)해지는 흠결을 면치 못한 것이다. 내가 그 뜻을 부연하고 언문을 사용하여 〈어부사〉를 지었는데, 계절별로 각 한 편씩이며 한 편은 10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곡조며 음률에 대해서는 진실로 감히 함부로 의논하지 못하며 창주오도(滄洲吾道)에 대해서는 더욱이 감히 내 뜻을 가져다 붙일 수 없으나, 맑은 강 넓은 호수에 조각배를 띄우고 물결을 따라 출렁일 때에 사람들에게 한목소리로 노래하며 노를 젓게 한다면 또한 하나의 쾌사(快事)일 것이다. 또 훗날 창주(滄洲)에서 거처할 일사(逸士)가 반드시 나의 이 마음과 뜻이 부합하여 백세의 세월을 넘어 느낌이 일지 않으리라고는 못할 것이다.
신묘년(1651, 효종2) 가을 9월 부용동(芙蓉洞)의 낚시질하는 노인이 세연정(洗然亭) 낙기란(樂飢欄) 옆 배 위에서 적어 아이들에게 보인다.
고전번역원 각주를 옮겨옵니다,
강바람과 …… 한다 : 모두 소동파(蘇東坡)의 시구절을 차용한 표현이다. 소동파의 〈화채경번해주석실〔和蔡景繁海州石室〕〉 시에 “강바람 바다 비 얼굴에 부딪히니, 석실에서의 호금 소리 들리는 듯하여라.〔江風海雨入牙頰 似聴石室胡琴語〕”라고 하였는데, 이 표현의 연원은 당(唐)나라 때 시인인 피일휴(皮日休)가 육귀몽(陸龜蒙)의 〈어구시(漁具詩)〉에 쓴 병서(幷序)에 “노망 육귀몽의 시를 읊조리며 그 풍취를 상상하면 강바람과 바다 비가 스르륵 입 안에서 생겨나니, 참으로 세속 밖 어부의 재주이다.〔如吟魯望之詩 想其致 則江風海雨槭槭生齒牙間 眞世外漁者之才也〕”라고 한 것이다. 또 소동파의 〈전적벽부(前赤壁賦)〉에 “일엽편주가 가는 대로 만경창파를 타고 가니 호연한 기상은 마치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타고 가는 듯하여 그칠 바를 모르겠고 표연한 마음은 속세를 버리고 홀로 서서 학이 되어 신선이 되는 듯하였다.〔縱一葦之所如 凌萬頃之茫然 浩浩乎如憑虛御風而不知其所止 飄飄乎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라고 하였다.
세연정(洗然亭) 낙기란(樂飢欄) : 고산이 보길도에 가꾼 원림(園林) 안에 있는 정자가 세연정인데, 세연정의 남쪽 편액 이름이 낙기란이다. 세연정은 정자의 중앙 편액이며 동쪽은 호광루(呼光樓), 서쪽은 동하각(同何閣)이다.
어부사여음(漁父詞餘音)
강산(江山)이 좋다한들 내 분(分)으로 누웠느냐
임군 은혜(恩惠)를 이제 더욱 아노이다
아무리 갚고자 하여도 해올 일이 없세라
이 작품은 만흥(漫興) 06과 같은데, 작자가 <고산유고>에서 ‘어부사여음’으로 쓰는 게 맞춤하다하여 재수록했기에 다시 실었습니다.
고전번역원의 해석문을 가져 옵니다.
강산이 좋다 한들 내 분수로 누운 것이겠는가
임금님 은혜를 이제 더욱 알겠노이다
아무리 갚고자 해도 해 드릴 일이 없어라
이것은 바로 〈산중신곡(山中新曲) 만흥(漫興)〉의 제6장인데,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의 여음(餘音)이 되겠기에 여기에 거듭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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