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흠시조 049
내 언제 무신하여
황진이(黃眞伊) 지음 1/6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하리요
무신(無信) - 신의가 없음. 미덥지 못함.
월침삼경(月沈三更) - 달이 가라앉은 한밤중에.
온 뜻 – 올 것 같은 느낌. 올지 모른다는 기대.
지은이 황진이(黃眞伊)는 송도기(松都妓)로서 본명은 진(眞), 일명 진랑(眞娘), 기명은 명월(明月)이었다.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여류시인이다. 스스로를 일컬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의 하나라 했으니, 화담 선생과 박연폭포와 견주었던 것이다. 생년도는 미상이나 몰시는 1530년이라 전한다. 송도(지금의 개성) 황진사의 서녀(庶女)였다고 한다. 그녀가 기생이 된 사연을 시인 구상(具常)은 시극(詩劇) ‘황진이’에서, 그녀를 짝사랑한 사내가 죽어 상여가 나가는데, 진이네 집 앞에서 꿈쩍을 아니해 결국 진이의 술 한 잔 받고서야 나아갔다고 설정, 일단 훼절했으니 기생이 되려고 마음을 먹었다고 설정했다.
이 시조 작품은 정을 주는 입장에서 상대가 밤이 깊도록 저를 찾아올 기미가 거의 없음을 알고, ‘내가 저에게 무신(無信)한 적이 없음’을 되돌아보는 내용입니다. ‘언제’의 연속이 운율도 만들고, ‘전혀’를 강조해 줍니다. 사랑의 근본 토대는 유신(有信)임을 깨우쳐 줍니다. 종장은 반어법으로 읽어, 낙엽 지는 소리가 인기척이 아님을 알면서도 마음이 쏠리는 형편임을 솔직하게 드러냈습니다.
흠흠시조 050
어져 내 일이야
황진이(黃眞伊) 지음 2/6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더냐
있으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情)은 나도 몰라 하노라
어져 내 일이야 – 아뿔사 내가 치러야 할 일이로구나. 다 내가 행한 탓이로구나.
그릴 줄을 모르더냐 – 그리워하게 될 줄을 몰랐더란 말이냐.
중장의 ‘제 구태여’가 도치(倒置)로 놓임으로써 종장과 훨씬 긴밀하게 연결되었고, 장의 구분에도 상관없이 하고픈 말을 다 했습니다.
떠나보내고, 그리워하고. 기녀의 흔한 일이었을지라도 이런 따순 감정을 글로 남겨 노래하였으니 황진이의 속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흠흠시조 051
청산은 내 뜻이오
황진이(黃眞伊) 지음 3/6
청산(靑山)은 내 뜻이오 녹수(綠水)난 님의 정(情)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變)할 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 예어 가는고
변(變)할 손가 – 변하겠느냐. 변하지 않는다.
울어 예어 가는고 – 울면서 가고 가는가.
청산과 녹수, 내 뜻과 님의 정이 절묘하게 대(對)를 이룹니다. 사내가 푸른 물이고, 나 진이는 청산입니다. 변함이 없는 청산에 걸어 두는 자존심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녹수도 흐를 때 흐를망정 잊을 수는 없으리라. 만나고 헤어지고가 상사(常事)인 기녀에게 이런 정도의 아량(雅量)이 있다니요. 가히 불세출의 시인입니다.
이 시조는 벽계수와 관련 있나요?
예찬건
황진이 시조 6수 중 4번째에 벽계수가 등장합니다
바로 그 앞이니
그리고 청산과 시냇물 대조이니
전초전이었을 것일 수가 있다고 봅니다
시상의 전개 구도가 물은 사내요 산은 저이니 동일하니까요
최이해
요즘 목요일마다 인천운서초등학교에 가서 1학년 3반 학생 22명 대상으로 시조 지어서 노래 부르는 계란 바위치기 중입니다. 근데 40분 만에 시조를 지어 내더군요.
공부 많이 해야 시조 짓는다는 교육은 다 뻥이요 라고 해야 할까요?
비밀 병기는 곡조속에서 짓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찬건
흠흠시조 052
청산리 벽계수야
황진이(黃眞伊) 지음 4/6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청산리(靑山裏) - 청산 속. 마을 리(里)가 아닙니다.
벽계수(碧溪水) - 푸른 계곡물.
수이 – 쉬. 쉽게. 빨리.
일도창해(一到滄海) - 푸른 바다에 한 번 도착함. 창(滄)은 창(蒼)과 통함.
명월(明月) - 밝은 달. 지은이의 기명(妓名)이기도 함.
만공산(滿空山) - 빈 산에 가득 참.
벽계수(碧溪守)라는 왕손(王孫)을 만나 잠시 쉬었다 가라고 추근대며 부른 노래입니다. 수(守)는 작위입니다. 제 이름도 들어 있어 작품 전체가 하나의 비유 덩어리입니다. 논리도 아퀴가 착착 맞아서, 한 번 바다로 가면 언제 만날 수가 있을까 보냐고 어릅니다. 황진이가 벽계수를 불러내어 노래를 부른 곳이 만월대(滿月臺)라고 하니 전하는 이야기 속에서도 자연명, 인명, 지명이 잘 맞아 돕니다.
흠흠시조 053
동짓달 기나긴 밤을
황진이(黃眞伊) 지음 5/6
동지(冬至)ㅅ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둘에 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한 허리를 둘에 내어 – 하나의 허리를 둘로 나누어. 밤이 길어서 절반을 잘라내어.
춘풍(春風) 이불 – 봄바람이 감도는 듯한 따스한 새 각시의 이불.
서리서리 – 의태어(擬態語). 잘 굽혀지는 긴 물건을 포개어 휘감아 올리는 모양.
어룬님 – ‘어론님’으로 쓴 곳도 있음. 정든 사람. 정든 서방님. 혹자는 ‘얼은 님’으로 보아 따스한 이불이 필요한 ‘얼어서 온 님’으로 보기도 한다.
밤이어든 – 밤이거든.
굽이굽이 – 구불구불 굽은 곳마다.
겨울 밤, 님도 없고. 이 긴 시간을 어찌 보낼까. 명기 황진이는 과감하게 가위질하여 긴 겨울밤을 두 동강내어 버리는군요. 그래 잘 놔두었다가 님 오신 밤에 길이길이 늘여 붙여 다정 곱빼기로 활용한답니다. 오롯한 시간의 마술사, 언어의 마법사입니다.
흠흠시조 054
산은 옛 산이로되
황진이(黃眞伊) 지음 6/6
산(山)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거든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人傑)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
주야(晝夜)에 – 밤낮으로.
인걸(人傑) - 특히 뛰어난 인재(人材).
황진이 시조 여섯 수 중 마지막입니다.
인걸이 물과 같아서 한번 가더니 다시 오지 않는답니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고, 자신도 노기(老妓)가 되고 보니 함께 시간과 공간을 나누었던 이들이 안 보이더란 말인데, 극히 공감하는 바이긴 해도 황진이의 소박하지만 완벽한 비유, 곧 변하지 않는 산과 흘러가 버리는 물 등은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은 또한 흐른다는 점에서 만인에게 공통으로 주어진 시간과도 같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다가 늙은 여류시인의 생생한 인생 노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