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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권. [고대] 그리스 시대, Période Hellénique 35
제4장 아리스토텔레스와 뤼케이온 Aristoten et le Lycée 151
4A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논리학)과 형이상학(자연배후학)
4B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철학과 자연학
4C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론과 정치학
제10절 세계 X. Le monde 200
따라서 전 우주는 천체의 운동이 현존할 수 있는 조건들의 집합이다. 이렇기 때문에 만일 원운동이 마땅히 있어야 한다면, 그 중심에서 대립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은 채 있는 한 물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구이다. 따라서 지구중심주의와 지구의 부동성은 증명되었다. 더욱이 만일 지구[토(土)]라는 것이 있다면, 다시 말하면 중심에서 이탈되어서 지구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는 무거운 물체가 있다면, 필연적인 대립에 의해서 불[화(火)]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며, 다시 말하면 높은 곳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는 가벼운 물체도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한 반대자가 현존한다면, 그의 다른 반대자도 현존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들이 그 요소가 그것의 고유한 장소와 갖는 근친성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성질들을 통해 그것의 능동성과 수동성이 드러나게 되는 그 본질적인 성질들을 고려한다면, 사람들은 물과 공기와 같은 매개적인 요소들의 현존이 동일한 규칙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차갑고 건조한 속성들을 지닌 흙에 대립시켜, 덥고 건조한 속성들을 지닌 불 뿐만 아니라 차갑고 축축한 속성들을 지닌 물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덥고 건조한 불에는 땅 뿐만 아니라 덥고 축축한 공기가 대립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네 가지 요소들이 연역된다.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의학자들이나 자연학자들에게서 통용되는 개념작업에 따라서, 뜨거움과 차가움, 건조함과 축축함과 같이 두 가지로 서로 대립되는 기초적인 네 가지 활동 성질들을 인정했다는 것을 보게 된다. 만일 사람들이 대립자들이 통합되는 조합들을 배제하면서 하나의 주체에 맞게 둘씩 짝으로 네 가지 속성들을 조합한다면, 네 가지 가능한 조합들, 즉 건조하고 차가운, 차갑고 축축한, 축축하고 더운, 덥고 건조한 같은 조합들이 남을 것이다. 이 조합들의 각각이 한 요소를 특징 지울 것이다. 즉 땅(흙), 물, 공기, 불이다. 이제 사람들이 각각의 요소가 다음 요소로 이행하는 것을 보는 것도 쉽고, 짝의 한 성질 대신에 이 성질의 대립자로 대체하면서 넷째 요소[불]로부터 첫째요소[흙]로 되돌아오는 것을 보는 것도 쉽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흙이 형성한 짝 속에서 건조함 대신에 축축함으로 대체하면서, 흙으로부터 물로 이행한다. 따라서 규정된 질서 속에서 한 요소에서 다른 요소로 연속적 이행의 가능성이 있으며, 흙은 물로, 물은 공기로, 공기는 불로 변화될 수 있다. 일단 한 요소의 붕괴는 다른 요소의 생성이다. 게다가 이 생성은 순환적인데, 왜냐하면 제4요소는 동일한 방식으로 제1요소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게다가 이 순서는 사람들이 선택했던 순서의 역방으로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생성은 끊임없이 이루어질 수 있다. 원환의 변환이라는 끊임없는 운동은 단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실재적이다. 만일 요소들이, 마치 이것들이 낮음과 높음을 향하는 운동들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실제로 스스로 변화되지 않았다면, 각각은 자기의 고유한 장소에 머물렀을 것이고, 운동은 달 아래 영역에서 그만 두었으리라. 변환의 원은 천체의 원운동을 자기 방식으로 모방한다. 다른 한편, 이 원운동이 가능하기 위하여, 하늘에는 순환이동의 운동보다 더 많은 것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고정된 별들의 운동과 같은 유일한 운동은 요소들을 동일한 연관 속에 내버려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각이 부여받은 고유한 운동에 대해 동심원적인 여러 구체(球體)들이 있어야 하고, 구체들의 축은 고정된 별들의 하늘의 축을 향해 기울어져야 한다. 황도의 기울기 덕분에 계절들이라 불리는 다양한 효과들이 생겨나고, 이 계절들의 각각은 요소들의 근본적 성질들 중의 하나가 - 더위 또는 추위, 건조 또는 습기 - 우위를 차지하여 일어나는 특징이 된다. 이들 중의 하나가 태양과의 상대적 위치에 따라 다른 대립자에 대해 시기적으로 승리를 차지한 것이다. (202)
요약하자면, 이러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이다. 일체의 우주론이 모든 세부 사항들을 지배한다. 달아래 사물들에 대한 자연학의 틀은 이렇게 규정되어 있다. 자연학은 요소들 사이에서든지 이미 형성된 물체들 사이에서든지, 일어나고 있는 능동들과 수동들 상호간의 연구이다. 능동들과 수동들은 모든 혼합물들과 변화물들을 생산한다. 이 덕분에 물체들이 새로이 생겨날 수 있다. 새로이 실체적 형상들이 질료 속에 개입된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들은, 그 변화들이 요소적인 힘들 속에서 물질적 조건들을 지니고 있다할지라도, 변화들의 목적인을, 또 변화들이 방향을 잡게 되는 형상 속에 진실한 원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 치료제는 변화작용들의 계열에 의해서 살아있는 실체에 대해 작용한다. 그러나 이 변화작용의 진실한 원인, 그것은 건강이다. 새로운 물체의 생산은 이것의 조건들일 뿐인 조합들과 변질작용들에 기인하다고 믿는 것은 누구나 경계해야 한다. (202)
또한 이 조건들은 조건들 그 자체로 연구 되어야 한다. 물체는 어떤 힘의 영향을 감수 한다. 왜냐하면 물체에는 질료적인 것, 다시 말하면 밑바탕에서 변화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기는 차거움의 영향으로 물로 변할 때, 수동적으로 감내했던 것은 공기의 뜨거움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뜨거움은 하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질료 없이 불은 불가능하리라. 불이 실재적으로 뜨거움의 질료이다. 사람들은 전적으로 비규정적인 변화의 잠재태를 제1질료라 부르고, 이것은 요소들의 변질작용을 함축하고 있다. 반대로 예를 들어 조각상의 청동과 같은 제2질료는 그 자체로 규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그 제2질료는, 그 자체가 아직도 감당할 수 있는 변화에 관련하여 보면 상대적으로 비규정적이다. 따라서 이 질료 덕분에 능동자는 활동하면서 수동자와 동화된다. 예를 들어 불은 활동하면서 더워진다. 능동이 있기 위해서는 따라서 이 능동자는 현실적으로 자기와 다르지만, 잠재태에서 자기와 닮은 수동자를 만나야만 한다. 특수하게 중요한 한 경우로는 혼합이 있다. 이것은 두 물체 사이에 능동들과 수동들의 상호 연속으로 형성된다. 혼합은 소위 원자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병치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부분이 아무리 작을지라도 일체로서 동질적이 되는 실재적 통합이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똑 같은 절대적 신뢰를, 즉 분석하지 않고 투박한 감각을 그대로 믿는 신뢰를 발견한다. 이 신뢰는 아리스토텔레스 정신의 특징이다. 혼합[물]의 차이들은 그것에 들어가 있는 물체들의 본성과 정량에 동시에 의존한다. 혼합된 물체는, 그것이 너무 작은 양이라면, 바닷물 속에서 물발울 처럼 사라질 수 있다. 또한 다른 것보다 훨씬 더 수동적이라면, 예를 들어 주석과 구리의 합금에서, 주석은 합금에서 색깔로만 남는다. (203)
자연학의 이런 초기 적용은 기상학에도 있다.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불규칙한 현상들 일체를 생겨나게 하는 다양한 작용들을 규정하려고 애쓴다. 현상들이란 은하수, 혜성들, 달의 천체 아래서 일어나는 별똥별들뿐만 아니라, 대기의 일반적 현상들, 바람들, 지구의 지진, 벼락, 폭풍 등이다. 제4권 즉 마지막 권에서는, 그는 특히 더위와 추위라는 두 능동적 원인들의 영향으로 사람들이 물질의 다양한 상태들이라고 불렀을 것에 대해 연구하는데 전념한다. 익힘과 얼림이라는 현상들은 마치 몰랑함, 굽기 쉬움, 부서질 수 있음, 깨질 수 있음 등과 같이 혼합에 기인한 상태들을 특수하게 다루었다. (203)
이 모든 연구는 이 마지막 장에서는 살아있는 존재들의 다양한 부분들, 뼈, 근육 등을 형성하는 혼합들에 대한 연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203) (48OKJ) (57VLA)
제11절 살아있는 존재: 영혼 XI. L'être vivant: l'âme 203
요소들은 살아있는 섬유질들의 형성과정을 위해서만 현존한다. 이 섬유질들은 눈 또는 팔과 같은 기관의 형성과정을 위해서만 현존한다. 이 기관들 자체는 눈들을 위한 시각 또는 팔들을 위한 운동과 같은 매우 복잡한 몇 기능들을 완수하기 위해서만 현존한다. 따라서 수행 중에 있는 생명적 기능들은 중요한 목적들 중의 하나이다. 그 목적들을 위해 자연은 살아있는 존재를 살 수 있게 하는 조합들과 혼합들에 작용하고 조작한다. (204)
그러나 생명은 조합들과 혼합들의 생산물이 아니다. 기관으로 된 물체만이 잠재태로서 생명이다. 그 물체가 영혼이라 불리는 실체적 형식을 받은 이후라야 만이 그 물체는 현실태로 살아있을 것이며, 다시 말하면 그 물체는 살아있는 물체의 기능들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은 “잠재태로서 생명을 갖는 자연적 물체의 제일 완전태”이며, 다시 말하면 생명적 기능들 수행할 고유한 기관들을 자연적 물체의 제일 완전태이다. 따라서 영혼이 신체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마치 철의 예리한 날이 도끼와 연결되어 있는 방식과 같다. 영혼은 신체 활동성의 무매개적 조건이며,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과학자가 소유하는 과학은 그가 진리를 관조하는데 소용되는 무매개적 조건이다. 마찬가지로 영혼은 항상 작동하는 것이 아니고 영혼에는 잠의 주기가 있다. 그러나 영혼은 항상 무매개적으로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 (204)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영혼은 무엇보다 생명적 활동성의 원리, 이 활동성의 부동의 원동자이다. 심리학은 살아있는 존재에 대한 연구의 입문이듯이, 신학은 우주에 대한 연구의 입문이다. 이 영혼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의 전통에서처럼 고유하게 분리된 대상이 더 이상 아니다. 영혼은 자신에 숙명을 완수하기 위해 한 신체로부터 다른 신체로 가는 여행자가 더 이상 아니다. 영혼이 신체에 연결되어있듯이 시각은 눈에 연결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초기 저작들 속에서 수용했던 거 같은 플라톤의 신화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도덕론의 문제는 심리학과 독립적이듯이, 도덕론의 문제는 신학과도 독립적이다. 영혼과 신체는 함께 태어나고 사라진다. (204)
이러한 결과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플라톤이 믿었던 것과 같은 영혼 일반의 연구가 없다. 그 철학자는, 기하학자가 도형들을 연구하는 방식으로 영혼을 연구했다. 기하학자는 어떠한 본질도 지시하지 않는 도형일반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삼각형, 다각형 등과 연속하여 가장 단순한 것에서 가장 복잡한 일련의 도형들을 연구하는데, 각각의 도형은 앞선 것을 함축하고 있지 다음에 오는 것을 함축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그 철학자는 영혼의 기능들 또는 역량들 또는 잠재태의 계열들을 연구했다. 영혼의 각각은 앞선 영혼들을 함축하지만, 다음 영혼들을 함축하지 못한다. 그 계열들이란 영양기능, 감각기능, 사유기능, 운동기능이다. 예를 들어 감각 기능을 소유하는 영혼은 영양기능을 소유한다. 그러나 거꾸로는 진실이 아니다. 그리고 예를 들어 식물은 스스로 영양을 섭취하는 역량만을 갖는다. 이 기능들은 그 영혼으로서 가능들의 여러 가지를 소유하지만, 그 만큼 다른 영혼들을 구성하지 못한다. 영혼들은 논리적으로 다르지만 실체에 의해서 국지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영혼들이 다른 현실태에 이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각각은 유일한 영혼을 갖는다. (영혼론, II, 2) (205)
영혼의 기능들에 대한 이론은 살아있는 존재들의 분류작업으로, 즉 식물, 이성없는 동물, 이성적 동물과 같은 분류작업으로 매우 분명하게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절단된 분류작업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본질적으로는 연속론자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상위의 생명 속에서 순수하고 단순한 첨가가 아니라 오히려 하부생명 속에서 초벌로서 어떤 것의 실현화를 잘 보았다는 것을 잊게 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다른 동물들에서, 인간에게서와 아주 명증하게 구별되는 특성들의 흔적이 있다. 즉 사회성과 야생성, 부드러움과 강건함, 용기와 비겁, 망설임과 확신 등이다. 마찬가지로 많은 동물에서도 반성적 지성의 이미지들이 있다. 이 동물들이 인간과 차이 있는 것과 인간이 동물들 중의 많은 것들과 차이 있는 것은 더 많고 더 적음에 의해 구별된다. 자연은 조금 조금씩 영혼없는 존재들로부터 동물들로 이행하는데, 그 연속성의 경계들이 우리에게 잘 나타나지 않고 또 둘 중에서 어느 것에게 매개물들이 속하는 지 우리가 알지 못할 정도이다. 바다 존재들의 몇몇에 관하여 사람들은 그것들이 동물인지 식물인지 물어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엠페도클레스의 진화론과 같은 진화를 선호했던 최소한의 경향성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이와는 전혀 반대로 그에게는 절대적 규칙이 있다(이 규칙은 생명의 영역에서 전 자연의 영역으로 이전하는 것이다). 그 규칙은 한 종이 다른 종으로 이행할 수 없다는 것, 유사한 것은 항상 자기와 유사한 것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의사의 건강성과 의사가 환자에게서 생산하는 건강성 사이에는 종적인 동일성이 있는 것처럼, 생성자와 생성된 자 사이에는 항상 종적인 동일성이 있다. 살아있는 존재들은 변질할 수 없는 고정된 종들로서 분배되어 있다. 이 종들의 형상은 세대를 통하여 소멸할 수 있는 개체로부터 다른 개체로 이전된다. 단지 이런 방식으로 살아있는 것은 천체의 영원한 과정을 모방할 수 있고, 영속성에 도달할 수 있다. 이처럼 종들의 고정성의 주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속 깊은 경향성에, 즉 생성 속에서 고정된 점들의 탐구에 연결되어 있다. 그에게서 연속성은 진화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 하등한 것에 의해 상등의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는 아주 반대로 상등의 것에 의해 하등한 것을, 동물에 의해 식물을, 인간에 의해 동물을 설명한다. 완전한 것과 성장한 것만이 우리에게 불완전한 것을 이해하게 해 준다. (206)
이것이 영혼의 역량들 연구의 지배적인 생각이다. 이때 그 생각은 두 가지 측면으로 검토되었다. 첫째로, 역량들 각각의 연구는 섬유질을 묘사하는 해부학의 장에서 도입부가 있고, 그 역량이 실행되도록 허용해 주는 기관들 즉 섬유질들로 형성된 기관들이 있다. 이리하여 영양적 기능은 신체에 의한 영양의 동화이며, 이는 마치 성숙의 상태로 증가되고 또 그렇게 유지하는 신체와 같은데, 그 기능은 신체들의 작용들의 메카니즘을 전체에게 요구하며, 이 작용들이 없으면 그 기능은 알려질 수도 없다. 우선 삼켰던 음식이 내부의 열에 의해 소화되어서 심장에서 발산되는 것은, 열의 원리처럼 동물에서 첫째로 생성되는 것이다. 그 열에 의해 액체화된 또는 고체화된 영양분은 혈관들 속에서 순환하며, 그리고 마치 물이 천연의 진흙 화병을 통과하듯이, 영양분이 혈관을 통하여 걸러진다. 차거움의 효과로 압축되는 수용성(水溶性)있는 부분들이 살(육 肉)을 형성한다. 약간의 습기와 열기를 포함하는 흙의 성질을 띤 부분들은 차거움의 작용으로 습기와 열기를 상실하고 뼈와 뿔과 같은 딱딱한 부분들이 된다. 게다가 각각의 살아있는 존재는 이 효과에 알맞은 만큼이나 내재적인 열기를 지닌다. 마찬가지로 감각적 기능은 감각기관들의 해부학적이고 생리학적 연구를 요구한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생식과 인식] 역량들은 나태한 설명들이 전혀 아니라, 오히려 실험적 탐구에서 방향의 중심들과 같다. (206)
둘째 국면에서 각 기능의 연구는 마치 상위 기능의 연구로, 특히 이것들보다 모든 기능에서 상위인 것의 연구로, 즉 지적 사유의 연구로 방향을 잡은 것 같다. 특히 이 특징은 인식하는 역량들 또는 진리와 거짓을 분간하는 역량들의 연구에서 보여진다. 이 분간이 이루어지는 것은 감각의 도움으로든지 사유의 도움으로든지 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구별방식에 온전히 충실하게 남아 있으면서, 사유를 감각에 환원시키는 자연학자들을 아주 생생하게 비판한다(영혼론, III, 3). 그러나 의미 작업은 그것을 바뀌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대립보다는 연속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미 감각작용 속에서 그는 안정적이고 고정적인 것이며 효과적인 인식이 있다는 것을 보게 하려고 애썼다. 감각작용은 순수히 수동적인 변질이 아니며, 그 속에서 기관이 연속적으로 변하면서 움직이는 감각적 성질들의 작용을 감당한다. 확실히 느낀다는 역량이 작동으로 이행한다는 것은 단지 감각기관에 미치는 감각적 대행자의 영향 하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작용이 전적으로 감각적 대행자 혼자서 만이 작동으로 환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식물은 연속적인 열기에 의해 변질들을 감당하지만, 식물이 열기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말해야 할 것은 감각작용이란 느끼면서도 느껴지는 공통 작용이며, 예를 들어 색깔과 시각, 소리와 청각의 공통 작용이다. 그리고 또한 감각작용은 위 두 역량을 따로 하나하나씩 부여하는 것에 관하여 공통성과 공통 불가능성을 강조해야 한다(영혼론, III, 2). (207)
이런 작동은 이미 사유에 대한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가 지성적인 것들의 분간에 있는 것처럼, 감각적인 것들의 분간에 있는 감각작용은 진실로 자기 고유한 대상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감각작용을 현실 작동으로 이행하게 하는 감각적 성질을 감각의 고유한 대상이라 부른다. 시각을 위한 색깔, 청각을 위한 소리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 고유한 감각적 대상에 관하여 각 감각은 완전한 진리를 말한다. 시각은 흰색에 속지 않으며, 오류란 흰색을 이러저러한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경우에만 생긴다. 이 감각적 성질들에 대해 다양한 종류의 감각들이 전체적 인식을 제공한다. 이 때문에 접촉에 의해 일어나는 감각적 성질들에는 촉각적 성질들과 미각적 성질들과 같은 성질들 같은 성질들 이외 다른 것들이 전혀 없으며, 공기와 액체의 환경을 통해 일어나는 감각적 성질들에는 색깔들, 소리들, 향기들과 같은 감각적 성질들 이외 다른 것들이 전혀 없다(영혼론, III, 1). (207)
인식의 한 축에서 이 감각적 인식은 지적 인식으로 방향이 잡혀있는데, 왜냐하면 이 인식은 사물들의 질료 없이도 사물들을 파악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영혼 속에 있는 것은 돌 그자체가 아니며”, 사람들이 그것을 깨달을 때는 단지 그것의 형상일 뿐이다. 비록 감각작용이 개별 사물들의 인식 속에 파묻혀 있다하더라도, 감각작용은 이 사물들을 그것들의 질료로부터 분리한다. 게다가 다섯 감관의 다양성은 그 존재 근거로서 모든 감각할 수 있는 것에 공통적 성질들의 인식을, 즉 운동, 크기, 수와 같은 인식을 편하게 한다. 공통적인 특성들에 대한 지각작용은 하나의 감관으로는 불가능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지각작용은 감각할 수 있는 고유성을 분간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다양성은 모든 성질들을 파악하고 분간할 수 있게 하는 공통 중심을 가정하는 것이다. 그 중심 없이, 마치 낯선 인격들이 따로 있는 것과 같이 우리 속에 각 감관의 감각작용들은 하나하나 따로 떨어져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공통 감각은 닮음들과 차이들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일반적으로 감각적인 것들 사이에서 모든 연관들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208)
사유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감각적이고 현실적인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인식하는 모든 작동들을 포함한다. 다시 말하면 기억의 이미지들만큼이나 과학의 견해들과 판단들을 포함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식의 사다리의 두 끝에서 단지 진실할 수 있을 뿐인 직관을 인정한다. 심층에서 감각작용에 의한 고유한 감각적인 것에 대한 직관 있고, 상층에서 개별적 본질들에 대한 지적인 직관이 있다. 이 둘 사이에 나머지 모든 것이 펼쳐진다. 말하자면 진리 또는 거짓을 허용할 수 있는 것이, 또한 다시 말하면, 과거, 현재, 미래로서 주어와 속성의 관계를 확정하는 명제 전체가 펼쳐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매개적인 역량들을 가지고서 체계적으로 잘 갖추어진 연구를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는 이 역량들 중의 각각의 역량을 그 자체로서 세 가지 다른(차이) 관점들로, 하등역량과 상위역량의 관계에서 고려한 것 같다. 이러한 것이 표상 또는 이미지(image, 즉 판타지아, φαντασία)이다. 그 자체로서 표상은 감각작용의 바깥에서 영혼에 나타난 모든 것이다. 표상은 실재적인 것과 상응함이 없이 일반적으로 거짓이다. 그러나 표상은 마치 진실처럼 주장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견해처럼 신념을 동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태양은 우리에게 직경 1피트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지구 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안다. 감각기관과 연관하여 표상은 과거에 감각될 수 있었던 대상의 이미지이며, 일종의 회화이다. 이것은 감각적 대상이, 마치 밀납 위에 도장을 찍은 것처럼, 그 각인을 남긴 것으로부터 온다. 이 이미지는 대상의 추억이다. 이미지가 있는 거기에 기억이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플라톤이 말했던 것과 반대로 순수히 지적인 진리들로부터 추억[회상]되지 않고, 사람들은 진리들을 사유할 때마다 새로이 진리들을 관조한다. 결국 이미지가 지성과 연관 속에서, 이미지는 사유의 조건이다. “이미지 없는 사유는 없다” 왜냐하면 이미지는 물질이며 그 속에서 지성이 보편적인 것을 관조하기 때문이다. 기하학자는 삼각형의 성질들을 증명하기 위하여 한정된 차원들로 된 삼각형을 그려야만 한다. 그러나 기하학자들은 차원들을 사유하지 않는다. (209)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저들은 회상 또는 판단과 같은 보다 복잡한 지적 사실들에 관하여 흩어져 있는 증표들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회상은 영혼이 추억을 탐구하는데 마치 영혼의 방향정립과 같다. 회상은 현실적 상태로부터 출발하여, 첫째 상태에 연결된 다른 계열들 상태들로 연결된다. 왜냐하면 이 상태들을 그 사실들과 닮았기 때문이든지, 이것들이 그것들과 반대이기 때문이든지, 이것들이 그것과 이웃하고 있기 때문이든지 간에, 회상은 추구되었던 추억에 도달한다. 사람들이 나중에 관념들의 연합이라고 불렀던 것은 이렇게 추억을 수단으로 해서 표상된다. (209)
인식의 다른 한 축에 지성이 있으며, 그 지성의 작동(l’acte)은 그 자체로서 불가분적인 지적 본질들에 대한 불가분의 사유이다. 지성의 확실성 상으로, 고유한 감각적인 것을 감각하는 감각작용과 비교하여, 지성은 그래도 감각작용과 훨씬 더 다르다(차이 있다). [우선] 이와 같은 이유로 지적인 것(l‘intelligible)과 지성(l'intelligence) 사이에는, 감각적인 것(le sensible)과 감각(le sentant) 사이에 있는 연관과 유사한 연관이 있다. 지성은 마치 빈 서판처럼 있으며, 이 서판은 모든 지적인 것을 잠재태로 포함하고 있고 또 그것이 지성의 행동을 감당할 때만 현실태로 이행 한다. 그러나 예를 들자면 눈부신 빛에 의해서처럼, 감각하는 기관은 너무 강도 있는 감각적인 것에 파괴되는 반면에, 지성은 지적인 것의 밝음이 보다 클수록 그 만큼 더 밝게 사유한다. 더욱이 감각의 공통적인 작동(l’acte) 속에서 감각은 감각적인 것과 항상 구별되어 있는 비해, 관조의 지적 작용에서 지성은 지적인 것과 완전히 동일화 되어 있고, 사람들은 지성이 사유할 때 지성 속에서 그 대상 이외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감각작용이 기관들로 나누어져 있어서, 각각의 기관이 특별한 종류의 감각적인 것만을 포착할 수 있는데 비해, 지성은 지적인 것들 모두를 예외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세 가지 분명한 특징들은 하나의 이유에 귀착한다. 지성은 질료 없이 형상들 또는 본질들을 지각하며, 감각적인 것 속에 형상들을 동반하는 모든 개별성들로부터 분간된 그것들을 지각한다. 예를 들어 지성은 코에 곡선이 있는 들창코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곡선을 그자체로 사유한다. 추상작업에 의해서 지성은 감각적인 것들 속에 잠재태로 있었던 지성적인 것들을 현실태로 통과하게 한다. 그런데도 질료 없는 사물들의 학문은 필연적으로 사물들과 동일하다. 기하학적 또는 산술학적 개념들 속에는 우리가 거기에 대해 사유하는 것 이외 아무 것도 없다. (2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지성은 사유하는 역량일 뿐이다. 지성은 모든 인식 가능한 것들이다. 그러나 지성은 잠재적으로 지성적인 것일 뿐이다. 지성이 항상 사유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지성이 현실태로 이행할 수 있는가? 분명한 것은 감각적 이미지들의 영향 하에 즉 아마도 추상적 조작과 독립적인 이미지들의 영향 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사람들은 이미지 없이 사유하지 못한다), 오히려 거기에서부터는 현실태로서 지성적인 것들을 자발적으로 생겨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성적인 것들은 단지 잠재적으로 이미지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존재가 이미 현실태로 된 존재의 영향 하에서만 잠재태에서 현실태로 이행할 수 있다는 일반적 규칙에 맞추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항상 사유하지 못하는 우리 지성의 그 위에 영원히 현실태로 있는 지성을, 즉 더 이상 이행할 수 없는 지성을, 인정하는 데로 나아갔다. 왜냐하면 이 지성[영원지성]은 고정되고 쇠퇴하지 않는 사유이며, 변화를 전혀 감당하지 않은 사유이며, 색깔들을 현실태로 이행하게 하는 빛과 같은 방식으로 다른 모든 사유들의 생산자이기 때문이다. 이 지성의 지위는 정확히 어떤 것인가? 그 지성은 수동적 또는 잠재태 지성처럼, 인간의 영혼의 일부인가? 그건 그럴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수동적 지성이 사라질 수 있는데 비해, 이 지성을 소멸하지 않고 영원한 것으로 선언했기 때문이다. 만일 이 지성이 인간 영혼과 분리되어진 실체라면, 이 지성은 천구들의 운동자와, 즉 영원히 현실적인 사유인 신과, 동일하지 않을까? 우리 속에 있는 지성이 우리 존재의 가장 신적인 부분인것 만큼이나 그럴 것 같다. 그 신적인 부분의 활동성은 우리를 인간 본성보다 그 위에 놓고, 신들의 삶을 나누어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점에 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식으로 표현하지 않았으며, 해석자들을 당황하게 내버려 두었다. 사람들은 조금 후에 그 당황하는 귀결들을 보게 될 것이다. (210)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인간 영혼 속에다가 이 지성에게 부여했던 특별한 지위이다. 만일 지성이 질료 없는 사물들을 지각한다면, 그것은 지성 그자체가 질료 없이 있다는 것이다. 즉 지성은 어떠한 신체적 기관도 필요로 하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만일 유기화된 신체의 완전태로서 영혼의 유적 정의가 아직도 유효하다면, 그것은 영양적인 또는 감각적인 능력에도 유효하다는 것과 전적으로 동일한 의미에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유기체화된 신체가 하나의 조건임에 틀림없이 잘 알고 있고, 지성이 이미지 없이 사유할 수 없기에 그 조건 없이 지성은 사유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성이 그 자체로 기관의 기능 작업에 대해 그리고 이미지 자체들에 대해 독립적이라 하더라도, 지성은 일종의 후성설에 의해 영혼에 첨가되었다고, 또 지성은 외부로부터 “문을 통과하여” 거기에 들어간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211)
이에서 영혼은 세계와 유사한 방식으로, 그리고 사람들이 말할 수 있다면, 동일한 체계에 따라서 생각되었다. 유기체화 된 신체에 지지를 받는 역량들의 발달은 하나의 끝으로, 즉 그 역량들에 속하는 지성으로, 어떤 관점에서는 초월적인 지성으로 방향이 잡혀있다. 플라톤에서는 개별성을 영혼에서 창조했다는 숙명의 신화 덕분에 심리학과 우주론이 약간 느슨하게 둘 사이가 연결되어 있는데 비해, 여기서는 심리학과 우주론이 어느 때보다 더 강하게 통합되었다. 이 철학에서, 사람들이 말할 수 있다면, 영혼이 실재성의 정신적 이미지가 되기 위해서 만들어져 있을 뿐이다. “영혼은 어떤 방식으로 보면 존재들 전체이다. 왜냐하면 존재들은 감각적이기도 하고 지성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은 어떤 방식으로서는 알려진 것이고, 감각은 감각적인 것이다.” 영혼의 이러한 종합적 관점에서는 두 개의 축이, 즉 감각과 지성이 분명해진다. 이 중간, 다시 말하면 우리 자체가 포함되어 있는 사유의 모든 운동들, 반성, 견해, 상상 등은 두 고정된 축의 하나 또는 다른 하나와 관계 속에 흡수된다. 그 축들에서 영혼은 순수하게 실재성의 표상과 직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211) (48OLE)
제12절 도덕 XII. Morale 211
플라톤의 모든 사유는 도덕적 삶과 지적인 삶 사이에서 완전히 내밀하게 이루어진 통합에 근거했다. 과학을 통한 철학은 도시국가를 다스리는 덕목과 역량에 도달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해체된다. 도덕적 선 또는 실천적 선, 다시 말하면 인간이 자기 행위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선은, 변증법이 존재들의 정상에 놓았던 온선의 이데아와 더불어 보아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도덕론은 수학과 같이 정확한 과학이 아니나, 인간들을 최상으로 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가르침이며 또한 탐구하거나 벗어나야 할 사물들에 관한 올바른 견해들을 그들에게 부여할 뿐만 아니라, 효과적으로 탐구하고 벗어나게 하는 것을 그들에게 목표로 하는 가르침이다. “덕이 중요하다고 할 때, 그 덕성은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그래서 그것을 소유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 가르침의 범위에 관하여, 도덕론자는 스스로 착각들을 너무 과도하게하지 않아야 한다. 단순한 담론들만으로 착함에 영감을 얻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담론들 고상하고 자유로운 성격의 젊은이들에게 전달될 때, 그것들은 결실을 맺을 것이고, 세속인에게는 덕성으로 잘 인도할 수 없다. 따라서 도덕론은 좋은 가르침이며, 귀족정체의 교육이다. 이것은 군중을 위한 설교가 아니고, 최상의 천성을 부여받은 자들을 위하여 반성으로 초대이다. 다른 자들에게는 습관과 벌을 받을까라는 두려움을 겪을 것이다. 심지어는 덕성은 유복한 계급에서만 완전히 발전될 수 있는 것 같다. “아름다운 행위를 하는 것은 초라한 자에게는 불가능하거나 아주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친구들, 재산, 정치권력 등을 도구들처럼 이용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매우 추하고, 출신 신분이 낮고, 고독하고, 자식이 없는 인간은 완전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용기, 관대함, 정중함, 정의와 같은 귀한 덕목들은 어떤 사회적 수준에서만 실행될 수 있다. “가난한 자는 훌륭한 이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편안하게 쓸 수 있는 무엇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그는 멍청이 이다”. (212)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사회적 이익들을 교묘하게 이용할 정도로 부유하고 확실한 부르주아의 윤리학이다. 사람들은 이 윤리학에서 소크라테스와 같은 의식의 각성자가 행하는 인민의 숨결도, 플라톤에서 영혼의 활성화와 같은 확실성도 느끼지 못한다. 이 윤리학은 철학의 나머지들과 충분히 조화를 이룬다. 도처에서처럼 이 윤리학에서도 목적을 정의하는 것, 그리고 이 목적에 도달하기 할 고유한 수단들을 규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이고 실천적 목적이다. 다시 말하면 행위에 의해서 인간에게 접근할 수 있어야만 하는 목적이다. 이것을 알기 위하여, 따라서 관찰과 귀납법을 이용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사실상 인간들이 행위 하려는 그 무엇의 관점에서 탐구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행복을 탐구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스럽지 않다. 즐거움, 과학, 재산 등은 다른 어떤 목적에도 종속되지 않는 이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들이다. 따라서 목적은 행복이며, 우리의 행위에 의해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행복, 생애의 대부분 동안에 지속할 수 있는 인간 행복이다. 그러나 목적처럼 행위에게 방향을 잡게 하는 행복은 행위의 부분도 결과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더구나 지적 직관도 정신적 작업의 결과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직관은 오히려 이 작업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행위와는 다른 범주 속한다. 행복은 절대치이며 현실태이다. 행위는 한 목적에 상대적이다. 행복은 신들의 선물처럼 또 우리 덕행의 보상처럼 우리에게 온다. 선함들의 원리는 신적인 어떤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인간들의 보편적 견해이다. 인간들은 행복을 모든 것들 가운데서 값진 것으로써 생각하지 칭찬할 만한 것으로써 생각하지 않는다. 당시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것과 매우 다른 행복주의의 전형에 반대하여 투쟁했다고 믿었다. 그의 것은 그 행복주의 이후에 우세했고, 그것은 그 자신이 구별하고자 애썼던 것을 - 칭찬할 만한 것과 값진 것, 행위와 목적을 - 훨씬 뛰어 넘어서 재통합하려는 애쓴 것이다. (213)
이것은 보편적 규칙인데, 한 존재는 자기에 고유한 기능을 완성하는 경우에만 자기의 고유한 목적에 도달한다. 이 기능의 완수에서 탁월함은 이 존재의 덕성이다. 따라서 덕성 일반의 용어는 도덕의 영역을 훨씬 넘어선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한 존재에 대해, 심지어는 생명 없는 대상의 덕성 또는 제작된 도구의 덕성에 대해 말할 수도 있다. 이 단어는 특수화된 도덕적 성질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한 존재의 덕성은 습득된 어떤 것이며, 본질에 덧붙여진 어떤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본질 속에는 더할 것도 모자랄 것도 없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너머로 환원할 수 없다. 사람들은 인간이기도 하고 또는 아니기도 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간 이상이거나 또는 인간 이하일 수 없다. 그러나 한 존재의 본질로부터, 삼각형의 속성들이 그것의 본질로부터 연역되는 것과 똑같은 필연성으로 그 존재의 성질들 모두가 연역되지 않는다. 동일한 본질을 지닌 한 존재에는 여러 다른 완전함의 정도들이 있다. 질 좋고 질 나쁜 도구들이 있다. 좋은 또는 나쁜 성질은 본질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질(qualité)이란 범주 속에는 덕성이 있고, 더욱 특별하게 습득된 질들 속에서도 덕성이 있다. (214)
이 원리들을 인간에 적용해 보자. 인간의 고유하고 구별적인 기능은 이법에 부합하는 활동성이다. 착하거나 나쁘거나 간에 인간의 모든 활동성은 합리적이다. 인간의 덕성이란 이 활동성의 완전함 또는 탁월성에 있다. 이 정식의 의미를 실현하는 것, 그러한 것이 덕성들의 목표이다. 그런데 이 의미는 유별나게 복잡하고 풍부하다. 만일 사람들이 그것을 인간적 삶의 개별적인 모든 세부사항들에서 작업하고 있는 것을 보고자 한다면, 또 그것이 필요로 하는 경우가 있다면 말이다. 왜냐하면 윤리학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가르쳐야 하고 그 귀결로서 모든 개별적인 경우들에까지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행위를 소재로 해서 보면, 일반 용어들은 빈 것이다. 그리고 개별 용어들은 더 많은 진리를 포함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행위를 개별적 것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학은 일종의 매우 구체적인 서술이다. 이 방식에서 이법이 모든 인간적인 활동성에 침투하고 인도할 수 있다. 그래서 개인적이고 수동적 삶의 어떠한 세부사항도 사회적 관계의 어떠한 세부사항도 빠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법이 감관을 취급하는 것은 이 세부사항 덕분이기 때문이다. 윤리학은 자연히 정념들의 서술로 방향을 잡는데, 이것은 마치 좀 더 나중에 나올 메난드로스(Ménandre, Μένανδρος, 전343-292)의 새로운 희극이 인물들의 미묘한 분석을 통해서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 Ἀριστοφάνης, 전450-386)의 맹렬한 독설들을 대체하는 것과 같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그것의 모든 값어치를 부여한 것은 이런 분석들이다. 중요한 것은 일반적인 규칙들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 누구의 관점에서, 무엇을 위하여, 어떤 방법으로” 행위 해야 할 때를 탐구하는 것이다. (214)
덕성이란 안정된 성향이며, 이로부터 덕 있는 행위가 나온다. 이 성향은 자연적이 아니고 태생적이다. 인간은 몇 가지 정념들을 지닌, 예를 들어 분노, 두려움 등과 같은 정념들을 지닌 성향들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이 성향들은 악도 아니고 덕도 아니며, 칭찬도 비난도 나오지 않는다. 덕성은 하나의 습득된 성향인데, 의지에 의해 습득되면 그 덕성은 칭찬받는다. 그 덕성은, 그것이 습관이 될 때만, 다시 말하면, 그것이 습득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태생적 성향과 마찬가지로 용이하게 행위들을 산출할 때만, 실재적으로 있는 것이다. 인간이 어떠한 고통도 받지 않고, 심지어는 정당한 행위를 하는데서 즐거움을 갖는 경우에만, 그 인간은 진실로 정의롭다. 이 습관은 의지로부터 태어나는 것과 동시에 그 행위를 더욱 확고하게 한다. 따라서 그 인간에게 있는 모든 덕성은 의지적 선택으로부터 온다. (214)
그러나 합리적이고 덕성 있는 존재에게서 이 선택은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가? 이 중요한 점에 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이 방식은 그의 도덕론의 특징인데) 한편으로는 유비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 공통적 견해에 호소했다. 우선 덕 있는 작동을 자연과 기예의 작업들과 유비에서 찾는다. 이 작업들은 무엇보다도 너무 많음 또는 너무 적음과 같은 초과함들을 회피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의사들은 건강 또는 신체의 탁월함이 신체에게 영향을 주는 더위와 추위라는 두 반대된 활동적인 힘들의 정당한 비례이라는 것을 안다. 조각가와 건축가들도 또한 몇 가지 정당한 비례들을 목표로 한다. 이들이 두 과도함의 중간에 도달했을 때, 자연과 기예[예술]는 이들의 탁월성을 발견한다. 이런 이상적인 것의 물질적 조건은 이 양자가 가장 많음과 가장 적음을 허용하는 연속성들의 하나에 작용하는 것이다. 이 하나란 플라톤의 필레보스편에서 말했던 무한한 다자들 중의 하나인데, 다자들에서는 더 많은 뜨거움 더 많은 차가움, 더 많은 무딤과 더 많은 날카로움이 짝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물질적 조건은 도덕적 삶 속에서 실현된다. 의지가 행위[능동]들과 정념[수동]들에 관해 작업하는데, 능동들과 수동들은 부족함과 넘쳐남, 많음과 적음을 허용하기도 하고, 또한 걱정과 무모함, 욕망과 반감과 같이 짝들로써 표현되는데, 여기서는 항들의 한쪽이 증가하면 다른 쪽이 감소한다. 덕성이란 연속체들에서 정확한 중간에 도달하는데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또한 공통적 견해가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착한 것은 하나의 방식인데, 나쁜 것은 수천가지가 있다. 그러나 중간의 문제는 도덕적 대상들에 마땅한 개별적인 특성들과 더불어 또한 자체적으로 표현된다. 덕성의 대상을 발견하기 위하여, 마치 사람들이 두 극단들 사이에서 산술적 평균을 정의하는 것처럼 정확하고 절대적인 방식으로 중간을 정의하는 것은 사실상 중요하지 않다. 도덕론은 그러한 엄격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도덕론은 반대된 정념들의 경향을 자연적으로 지닌 인간들에게 모든 정도차로도 또 모든 자연으로도 호소한다. 도덕론은 덕성의 이론적 정의(une définition)를 이 인간들에게 부여하기보다, 그들 사이에서 이 이론적 정의를 생산해야 한다. 그런데 자극이 필요한 소심한 자에게서 와 억제를 필요로 하는 과감한 자에게서 동일한 방식으로 용기를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경우들에 따라서 중간은 한 극단 또는 다른 극단에 더 가까울 수 있을 것이다. 그 중간은 우리와 연관해서 중간이지 사물 자체에 따를 중간이 아니다. 따라서 중간을 생산하기 위한 수단들과 분리할 수 없는 중간의 규정은 임기응변과 신중의 문제이다.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 산술적 평균치에서 중간은 극단들 이후에 있고, 극단들에 의해 규정된다. 도덕적 삶에서, 두 극단들은 적어도 이상적으로는 중간 이후에 있지만, 중간에서 보면 상대적으로 극단들일 뿐이다. 불완전은 완전과 연관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써 생각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중간은 진실한 극단이며 다시 말하면 완전의 가장 높은 영역이다. (216)
따라서 덕성은 요약하면 의지로 습득된 성향(une disposition, ἕξις 배치), 즉 어떤 중간으로, 즉 우리들에게 상대적인 중간으로 있으며, 이법으로 정의된 성향이며, 다시 말하면, 요령 있는 인간이 그것을 정의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도덕적 경험은 일반적인 틀을 채우러 올 것이다. 정념들의 짝들이 대립되어 있는 것만큼이나 그만큼의 대립되는 덕성들도 있고, 악덕들 자체 사이에서 대립되기도 하고 덕성과도 대립되는 악덕들의 짝들도 그 만큼이나 많이 있다. 예를 들어 두려움과 과감함에 상대적으로 용기라는 덕목이 있고, 또무모함과 비겁함이란 두 가지 악덕이 있다. 쾌락의 탐구와 상대적으로, 덕목은 절제이며, 반대되는 악덕들은 무제절제와 무감각성이다. 우리들이 서로 대립되는 행위들의 짝을 발견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부유함의 증여에 상대적으로, 덕목은 후함이고 반대되는 악덕들은 한편으로 인색이고 다른 한편으로 낭비이다. 이런 예들이, 어떻게 덕목이 우리 인간의 조건에서 심지어는 우리 사회적 조건에서 아주 상대적으로 중간인지를, 우리에게 더 잘 알게 해준다. 이처럼 중류의 재산도 갖지 못한 인간의 덕목인 적선은 그 도시에서 자비로운 거부(巨富)인 자의 덕목인 관후함과는 아주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는 관대함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인색함일 것이다. (216)
사람들은 이것을 안다: 만일 아리스토텔레스가 덕목을 의지적 성향에 의해 정의 하려고 한다면, 거기에서 의도와 같은 어떤 것을 보려고 하는 것과 매우 거리가 멀다. 이런 성향은 행위의 성향으로서만 생각되었다. 행위의 물질적 조건들이 없으면, 덕성은 더 이상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다. “자유로운 자는 자유롭게 행위 하기 위하여 부유함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정의로운 자는 사회적 교환들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의도들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불의한 자도 또한 자신의 정의로운 의지라고 허풍을 떤다.” 또한 이것은 사회적 환경과 떨어질 수 없는 인간적 덕목들 즉 정치적 덕목들인데, 신들은 전혀 그것들을 소유하고 있지 않고 있다. “어떻게 이 덕목들이 정의로울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은 신들이 서로 계약을 맺고, 그리고 맡긴 것을 되돌려주는 것을 웃지 않고 보는가?” (216)
어디에서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의지 분석이 나오는가? 의지는 그 자체로 고려되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생산하는 행위의 연관 속에서 고려된다. 그래서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교육의 문제이다. 입법가가 칭찬들에 의해서 선호할 수 있거나 또는 비난들에 의해서 그만두거나 할 정도로 유익하게 행할 수 있는 행위들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거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행위들이 의지적인 경우이다. 이 조건은 행위들의 다양한 원인들에 관한 것이며, 다시 말하면 행위들의 기원, 목적, 수단에 관한 것이다. 어떤 행위의 출발점이 그것을 완수하는 존재의 내부에 있을 때, 가장 일반적 의미에서 그 행위는 의지적이다. 현실적 작동을 의지적이게 하는 것, 그것은 물질적 강요, 또는 도덕적 강요, 또는 결국 무지인 경우가 있다. 전자의 강요는 마치 바람과 함께 휩쓸려가는 것과 같은 경우이고, 후자의 강요는 참주의 강요와 같은 것이다(그러나 여기서는 위협이 행위 작동을 비의지적이게 하는 점을 분간하기 위한 어떠한 규칙도 없다). 결국 무지란 선과 악에 대한 무지가 아니라, 상황들에 대한 인식이 우리 행위를 변형시킬 수도 있는데, 그런 개별적 상황들에 대한 무지이다. 일반적 의미에서 의지적 행위는 그 인간에게 전혀 고유한 것이 아니다. 그런 행위는 동물에서도 또한 발견된다. 소위 말하는 인간적 행위 작동은 반성적 선택(προαίρεσις)에 의해, 다시 말하면 숙고(βούλευσις)의 절차를 거친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행위 작동이다. 숙고라는 것은 행위 작동의 목적에 근거하는 탐구가 아니라, 이 목적에 도달하려는 가능한 다양한 수단들에 근거하는 탐구이다. 따라서 숙고는 비결정성과 우연이 있는 거기에서만 일어난다. 이 숙고는 실천영역에 해당하며, 이론 영역에서는 추론적 사유에 해당한다. 이 숙고는 실천적 삼단논법들을 파괴하며, 그 삼단논법들의 대전제는 어떤 규약과 어떤 목적을 함축하고(연한 소고기는 건강에 좋다), 소전제는 감각적 지각에 의해 이루어진 확정을 함축하고(이 소고기는 연하다), 결론이란 행위 할 것인지 또는 그만둘 것인지를 직접적으로 이끄는 실천적 격률을 함축한다. 사실들의 개별적 인식이 없는 일반적인 격률은 결코 행위에로 끌어가지 못한다. 이것이 “실천적 지성”의 고유한 역할이며, 이 역할은 소전제들 속에 표현된 개별적 사실들을 발견하는 것이다(여기서 감각적 지각작용은 실재로 지성적이다). 반면에 “이론적 지성”은 제일의 원리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숙고는 목적에 항상 관계한다. 목적의 의지는 그것이 의존하는 숙고(βούλησις)와는 전혀 다른 것이며, 그 의지는 선을 지향하는 의지이며, 또는 적어도 우리에게 선으로 나타는 것을 향하는 의지이다. (217)
의지에 대한 이러한 분석의 귀결로서 덕성의 두 종류의 구별이 나온다. 윤리적 덕성들과 심사숙고의 덕성들이다. 전자들은 성격과 연관이 있고 다시 말하면 덕성들을 성향들의 정당한 한계로 축소하기 위하여, 이런 또는 저런 정념을 자연적 성향들과 연관에 둔다. 후자들은 반성의 덕목들이기도 하며, 행위에 이를 실천적 사유의 성질을 정하는 것이다. 전자들과 후자들을 혼동하는 것, 다시 말하면 정념들을 지배하는 의지의 힘과 올바른 길을 탐구하는 지성의 분명함을 혼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크라테스가 자기 지배와 반성 사이에서 정립하고자 원했던 것으로 보이는 이 통일성은 파괴되었다. 영혼의 비합리적 부분은 환원할 수 없는 요소로서, 이법이 지배할 수 있으나 흡수할 수 없는 요소로서 남게 되었다. 용기 또는 정의화 같은 윤리적 덕성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거의 우리 속에 있다. 심사숙고의 덕성들은 마치 신중함처럼 기나긴 경험에 의해 습득되는 것일 뿐이다. 또한 심사숙고의 덕성들과 과학 또는 지혜와 혼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성질들은 신중(la prudence, φρόνησις)이다, 이 신중은 목적에 도달하려는 가능한 한 최상의 수단을 잘 숙고하는데 있는 것이고, 다시 말하면 반성하면서 목표로 잘 가는데 있는 것이고, 또 이 수단을 권장하는데 있다. 이 성질들은 통찰(la pénétration σύνεσις)이다. 이 통찰은 덕성들이 선택 한 것들 중에서 다른 성질[덕성]들을 정확하게 판단할 줄 아는데 있는데, 이는 양식이며, 알맞은 것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능력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과학은 보편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에 근거하는 반면에, 사람들이 그렇게 알다시피, 모든 실천적 반성은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상황들에만 관련시킨다. 우리 목적에 도달할 다양한 수단들의 복잡한 인식은 보편적 진리에 도달할 수 없을지 모른다(제6권). (218)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생각이 통합했던 것을 분리하려는 이런 경향성은 정의의 학설에서도 발견된다(제5권). 플라톤에서 정의는 덕성들의 통일의 기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는 정의는 따로 있는 하나의 덕성이 된다. 그렇다고 그가 정의가 덕성의 전체이라는 생각을 전적으로 포기한 것은 아니다. 이런 이유에서 정의란, 법에 의해 권장되는 어떤 것이며, 특히 플라톤이 생각했던 것처럼 법은 덕성을 함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많은 도덕적 규율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의는 절제, 용기, 부드러움(la douceur, 신중)을 주문한다. 명한다. 그러나 여기서 덧붙여야 할 것은, 입법이 덕성 있는 [법]조문들을 제정한다면, 그 입법은 개인의 완전함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완전함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매우 일반적인 형식 하에서는 이처럼 정의가 도덕적 삶의 한 측면을, 즉 우리와 타인과 연관의 측면을 포함한다(제5권, 1장). 그러나 정의는 또한 보다 특수한 경우에 즉 세부 항목들로 갈라지면서 이차적 형식이기도 한다. 이것도 덕성인데, 즉 시민들 사이에서 명예와 부의 분배들 주제하는 덕성이다. 이 덕성은 판매, 구매, 차용 등과 같은 모든 종류의 계약들을 존중하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임의적인 것과 폭력적인 것의 조문들을 옹호하는 덕성도 있다.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판명하고 또 환원할 수 없는 지위를 갖는 것으로써 세 가지 형식들 하에서 권리가 있다고 간주했다. 세 형식들의 용도는 시민들 사이의 공통재산들의 분배, 계약법, 형법이다. 이 세 가지 권리(법령)에서 그는 유일한 원리, 즉 평등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는 평등을 세 가지 경우들에서 달리(차이있게) 이해했다. 분배적 권리에서 비례적 평등이다. 이것은 각각의 가치에 따른 각자의 몫이 비례라는 것이다. 계약법과 형법은 산술적 평등이다. 재판관의 업무는 보상, 손실, 이익을 따지는 방식으로, 계약의 위반이거나 폭력적 행위 등에 의해 손상당한 인격을 위하여 평등을 확립하는 것이다. 상품들의 교환에서 평등은 공통척도 즉 화폐의 발명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다. (219)
이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론 속에서 각각에게 고유한 원리들을 갖추고 있는 구별된 영역들을 창조하려 했다. 그러한 이유는 또한 모든 덕성들이 공통의 조건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우애(φιλία)에 관해 매우 길게 썼을 때(제8권과 제9권), 그 이유는 그가 우애를 덕성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써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롭고 평등한, 그리고 선에 대한 사랑을 각자가 활성화시킨, 인간들 사이의 우애가 그것의 가장 높은 형식이다. 이 우애는 이것이 생겨나게 하는 상호봉사에 의해서 인간들에게 모든 가능한 완전성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고, 서로 서로에게 작용하면서도 또한 서로 서로에게 교정하는 것이다. 물론 우애의 열등한 형식들도 있지만 중요하지 않다. 예를 들어 노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이익에 의한 우애, 젊은이들에게 관련이 있는 쾌락의 우애도 있다. (219)
아리스토텔레스가 쾌락을 연구할 때(제8권 11장에서 14장, 제10권 1장에서 5장), 그것은 또한 쾌락의 가장 높은 형식을 규정하기 위해서이고, 그리고 그 형식에서 도덕적 탁월함의 조건을 보기위해서 이다. 이 덕성에 필수적인 것은 사람들이 행해야 할 것에 끌리고, 행하지 않아야 할 것을 배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쾌락으로 향하지 않는 것을 불가능하며, 스페우시포스(전407-전339)처럼 모든 쾌락이 나쁘다고 선언했던 자들은 보편적 경험에 의해 반박되기 때문이다. 보편적 경험은 모든 감각적(느끼는) 존재들이 쾌락을 마치 선처럼 찾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 준다. 그것은 인간들을 위험한 쾌락들로부터 멀리하려고 하고 유용한 쾌락들로 이끌리는 것은 외관상의 금욕주의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 현실태가 어떤 것이든 간에 현실태 전부가 완성될 때, 쾌락이 동반된다는 것은 진리이다. 마찬가지로 한 존재의 완전한 전개가 아름다움 없이 진행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쾌락은 현실태에 보태어진다. 게다가 쾌락은, 그 현실태를 선호하는 한에서, 그 현실태를 완성한다. 현실태의 효과는 현실태의 완성의 원인이 된다. 이때부터 쾌락은 목적의 자격으로 조건없이 탐구되도록 허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내쳐서도 안 된다. 현실태가 가치있을 만큼이나 쾌락도 그만큼 가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덕성이 현실태로 이행할 때, 그 덕성이 쾌락을 생산할 정도로 발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완전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220)
따라서 우애와 쾌락은 각각이 자기 방식에 따라서 덕성을 완성한다. 그러나 이 둘은 하나의 통일성으로 이루어지 못한다. 덕성은 여러 형식들로 흩뿌려져 있다. 이 형식들을 하나로 환원할 수 없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체의 이론에서 실체를 외연적으로 많은 다양한 실체들을 포함하면서 일반 용어의 자격으로 규정했던 것처럼, 그 다음으로 이 일반 용어로부터 신이라는 하나의 개별적 실체의 용어로 이행했던 것처럼, - 이때 신은 매우 유비적인 운율에 맞추어 도덕적으로 탁월한 실체인데 – 신은 일반적 용어의 덕성으로부터 하나의 탁월한 덕성으로 이행한다. 전자의 덕성은 인간적이고 윤리적이며 심사숙고적인 덕성들의 공통적 자격으로써 간주된 덕성이며, 후자의 덕성은 인간적 덕성들을 초월한 덕성이며, 지적 관조의 능력이라 할 신적 덕성이다(제10권 6장에서 8장). 다른 덕성들은 영혼이 신체와 사회적 삶과의 통합을 함축하고 있는 반면에, 진실한 것의 관조상태에 있는 지성은 따로 떨어져서 스스로 자족하고 있다. 도덕적 삶의 나머지 부분은 끊임없는 임무들로 가득한 삶인데 비해, 관조적 삶은 여가(le loisir)의 삶이며, 따라서 여가가 행위의 목적이지 행위가 여가의 목적이 아닌 만큼이나 보다 더 높은 삶이다. 따라서 이 후자의 삶은 인간 속에 진실로 신적인 것이 있는 삶이며, 인간이 신들과 나누어가질 수 있는 삶이며, 무엇보다도 사유하는 활동성들이며, 결국 자신 속에서 가장 높은 쾌락을 생산하는, 그리고 모든 다른 것보다 더 지치지 않고서 계속 이어갈 수 있는 행복을 생산하는, 삶이다. (220)
정치가들 보다 더 높은 위상을 차지하는 관조하는 자의 또는 연구하는 자의 도덕론은 플라톤의 아주 확고하게 통합시키고자 원했던 것의 해체를 함축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적인 삶과 나머지 사회적 삶 사이를 분리할 필연성을, 그리고 지적인 삶을 그자체로서 목적으로 만들 필연성을, 강하게 느꼈다. “모든 인간들은 자연적으로 알기를 욕망한다” 그리고 안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과도 연관이 없는 하나의 절대적인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이상적인 것에 대해 진실한 이중성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실천적과 관조적이라는 두 개의 삶 사이에는 하나의 위계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전자 질서가 후자 질서에 종속된다. 그리스 도시에서 사회적 삶이란, 그 도시가 허용하는 모든 질서와 더불어, 관조하는 학자의 여가가 거기에 있는 것으로써 조건이다. 따라서 신과 세계를 분리할 수 없다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거기에서는 두 가지 삶도 분리할 수 없다. (221) (48OMB) (57VLD)
제13절 정치학 XIII. La Politique 221
“하나의 도시국가, 그것은 분명히 있지만, 서로 과오들을 피하기 위해서이거나 봉사들을 서로 교환하기 위하여 단순히 모인 것은 아니다. 바로 거기에는 필연적인 조건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하나의 도시인 것만은 아니다. 하나의 도시란 의미는 잘 살기 위한 가정들과 집들의 모임이며, 다시 말하면, 독립적이고 완전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모임이다.”이 이행의 첫 부분은 플라톤을 목표로 삼고 있는데, 플라톤이 도시국가를 노동의 분할과 물물교환으로서 정의하면서 진실한 본성 즉 도시국가 목적인으로서가 아니라 물질적 조건들만을 지적하는 잘못을 범했다는 것이다. 사회는 단지 살아가는 데 쓸모 있을 뿐만 아니라 잘 사는 데도 쓸모 있다. 말하자면 사회는 도덕적 삶의 조건이기도 하다. 정치학이라는 과학은 무엇보다 이 목적이 도달할 수 있는 조건들을 검토하는데 있을 것이다. 이 검토가 이론적 구축에 있는 것이라기보다 관찰들과 경험들의 사용에 있다. 이것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여러 도시들의 법제에 관해 깊이 있는 역사적 탐구들에 의해 다양하게 다루고 확장하였던 관찰들과 경험들이다. 소피스트들이 도시국가들의 법률들에 대해 목록들을 이미 만들었다. 그 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들의 작업을 계승했으며, 그리고 그는 여러 다른 헌정법제들에 대한 역사를 그 자신 스스로 쓰거나 또는 쓰게 되었다. 그러나 이 역사는 평가를 준비하기 위해서만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 방법은 생물학에서와 동일한 방법이다. 경험적 사실들이 몇 가지 방향에 따라서 묶어 다발로 만드는 것이다. (222)
게다가 그가 도시국가에게 지정한 목적은 어느 정도로는 자기 경험의 결과물이며 또한 정치적 자기 형성과정의 결과물이다. 그는 라케다이몬[또는 스파르타]처럼 농본주의 권력의 경제적 독립에서 도시국가의 도덕적 생명성의 조건을 보았다. 한 도시국가의 독립은 이방인과 경제적 연관들의 배제에서 토대가 이루어진다.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가 그렇게 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 나라가 외국과 상업에서 자기 재원들을 충당하려하자마자, 그 나라는 밀을 생산하는 나라들과 그 생산물을 구매하는 나라들에 의존한다. 여기에서부터 상업이 거대해지면서, 고리대금과 은행의 필연성이 나온다. 전쟁들로 이끌었던 이 새로운 문명 전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난했다. 그는 자연경제로 회귀를 원했으리라. 경제의 단위는 가정이다. 이 경제적 단위는 가족 구성원들의 소비에 필수적인 것을 생산하기 위하여 필요로 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이 단위는 이 소비의 잉여만을 교환할 뿐이다. 따라서 어떠한 자유 임금 노동자도 없다. 노예제의 조직화는, 주인이 노예에게 절대적 힘을 가지고 있기에, 경제적 조직화의 한 조건이다. 노예는, 주인의 의지와는 다른 의지를 갖지 않고 또한 도덕적 덕성에 참여하지 않는, 살아있는 도구이다. 노예는 “베틀 북이 완전히 혼자서 움직일 때(정치학, 제1권 2절)” 소용없는 것이 될 것이다. 주인과 노예로 인류의 분할은 임의적이지도 폭력적이지도 않다. 목적성에 복종하는 자연은 아시아의 더운 기후에서 재능 있고 섬세하지만 에너지가 없는 정신의 인간들을 창조했으며, 그 인간들은 노예가 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리스의 온화한 기후만이 인간들을 지성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인간들을 생산할 수 있다. 이 인간들은 자연에 의해서 자유롭지, 계약에 의해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의 틀에 매우 잘 맞는 이 이론에서 사람들은 그리스와 야만인들(les Barbares) 사이에 오랜 투쟁의 반향을 느낀다. 그리고 아마도, 그 당시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시도되었던 그리스의 보편지배라는 거대한 기획을 정당화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일 수 있다. (222)
가정은 경제적 목적 그 이상의 것이다. 가정은 가장에 의해 부인들이나 아이들과 같이 불완전한 영혼들의 방향을 잡게 해 준다. 이 불완전한 영혼들은 노예의 영혼은 아니다. 또한 가정에서는 절대적 권력은 중요하지 않다. 남편이 부인에게 지시하는 것은, 집정관이 행정가들에게,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왕이 신하들에게 하는 것과 같다(제1권 5장). (223)
이렇게 가정은 도시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구성될 수 있기 위한 모든 필수적 조건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노동자와 장인들과 같은 생산의 기능들을 실행하는 모든 자들을 시민의 구성으로부터 떼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바로 고상하지 못한 직업들인데, 이 적업들에는 “덕성을 실천하고 정치에 참여할 필수적인 여가”가 없다. 거기에는 다른 종족의 사람들을 사용해야 하며, 이 종족들은 그들의 노동만을 생각하고 혁명들을 생각하지 못한다. 소위 말하는 도시국가에서는 무엇보다도 군사적이고 법제적 기능들이 있고, 이 기능들은 여러 연령 차이에 속하는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여기에 성직 기능들을 첨가해야 한다(제7권, 7절). (223)
여러 헌정제도들은(제4권, 4장과 5장) 수천가지 방식으로부터 나온다. 이 방식들의 기능들은 항상 동일한 기능들일지라도 시민들 사이에 여러 정체성으로 배분될 수 있다. 우선 민주정체가 있다. 이를 특징 지우는 것은 자유와 평등이다. 여기에서는 자유롭고 재력 없는 인간들로서 대다수를 형성하며, 이들이 시민 업무들을 지휘한다. 또한 두 가지 민주주의를 구별해야한다. 하나는 지시하는 것이 법률인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변화하는 선거권을 가진 군중이다. 그리고 과두정체가 있다. 여기에서는 부자들과 귀족들이 권력을 차지한다. 이 정체는 재화가 더욱 더 집중화됨에 따라서 군주정체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다양한 정부형태들은 본질적 조건들 중의 하나로서 재산들의 균등에 있다. 재산의 큰 차이들이 필연적으로 과두정체 생겨나게 한다. 도시국가의 최종 목표는 법률들의 지배에 의해서 시민들의 행복과 덕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배는 중간 계층들의 발달을 통해 몇 가지 경제적 조건들에 의해 조장된다. “노동자들의 계층과 평균적인 재산을 소유하는 자들이 도시를 지배할 때, 법률에 의한 통치가 된다. 노동함으로써만 살 수 있고 여가가 없는 그들은 법률에 복종하고 필수적인 민회를 유지한다.” 반대로 한가한 시민들이 많이 있는가? 그러면 민주정치는 선동정치로 변형되고, “투표가 법률을 대체한다” 누군가 그 방법을 알게 된다. 필요로 하는 것은 도시 국가를 정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효과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실현된 조건들 안에서 무한히 다양한 수단들을 찾는 것이다.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이 수단들이 사회적 선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주어진 경우에서 최상의 법제를 찾기 위하여 심지어는 지리적 조건들에까지 나가야 한다. “아크로폴리스는 과두적이고 군주적인데, 평원은 민주적이다(제7권, 10장).” 헌정제도가 안정적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조건들이 있고, 몇몇 조건들은 변화에 매우 종속적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평등하거나 우월하고자 하는 욕망,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욕망, 야망, 재산들의 증가 등은 혁명을 일으키게 하는 중요한 동기들이다(제5권 2절). (224)
이 조건들 가운데, 자연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조건들이 있고, 인간이 그 조건들에 대해 주인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또한 어떤 조건들은 반성과 의지로부터 온다. 이 조건들로부터 인간은 교육을 수단으로 주인이 된다. 이 교육이 어린이에게서 공공의 덕성을 마땅히 준비하게 해야 한다. 선한 시민들을 만드는 이 교육은 다른 기능들을 희생하여 한 기능을 발전시키는 것을 경계하는 교육이며, 기능들의 위계질서와 그 기능들의 고유한 가치를 유지 할 줄 아는 교육이다. 예를 들어 전쟁을 도시국가의 목적으로 삼는 스파르타의 전쟁 교육은 위험한데 비해, 전쟁과 노동이 평화와 여가를 위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테베 인들에서처럼 모든 시민을 운동선수로 만드는 체육교육의 남용, 즉 음악가들을 만드는 음악교육의 남용도 또한 위험하다. 실제로 영혼을 위하여 신체를 발전시키는 것, 즉 영혼의 상위부분인 의지를 위하여 영혼의 열등한 부분인 정념을 발전시키는 것, 결국에는 관조적 이성을 위하여 상위부분을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제7권, 12절). (224)
따라서 지적 관조의 발전은 유일한 최종 목표이다. 그 나머지는 조건이자 귀결일 뿐이다. 인간 영혼에서, 우주에서처럼 사회에서, 모든 사물들은 사유를 향한다. 철학은 아마도 인간을 넘어서는 사유 자체의 연구라기보다, 우리가 경험을 통해 배우는 굉장히 많이 다양한 경향들의 연구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심정적 우주는 하나의 도표인데, 조건들의 다양한 근사치들을 나타내는 도표이다. 표의 가장 높은 곳에는 이론과학들, 즉 제일철학, 자연학, 수학이 있고, 이 과학들은 사물들이 현재 있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있을 수 없는 어떤 것들을, 그리고 과학들은 그 완전함이 그 사물들의 필연성 속에 있는 어떤 것들을 연구한다. 보다 낮은 것에서는 실천과학들과 시적 제작과학들이 있다. 다시 말하면 그것들의 대상들이 행운에 의해 제공된 자연적 조건들에 의존하는, 그리고 동시에 인간의 노력에 의존하는, 것과는 다른 것일 수 없는 것들을 연구한다. 전자의 학문들로서 도덕론과 정치학은 행위들에 이르고, 후자의 학문들로서 모든 종류의 시적 제작들은 인간에 의해 제작된 창작물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작업은 완전한 연속성을 지니는 것을 전혀 막을 수 없다. 이 완전한 연속성은 인간 행위가 마치 수학적 공리처럼 삼단논법의 결과가 되게 하고, 수사학과 시학은 정념들에 또한 영감을 부여하는 합리적 사유 덕분에서만 정념들에 영향을 미치게 한다. (225) (48OME) (57VLD)
제14절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소요학파철학 XIV. Le péripatétisme après Aristote 225
소요학파는 도시국가의 합법적인 인정을 받은 학문집단으로서, 재외 거류민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설립된 것이 아니라 테오프라스토스(Θεόφραστος, 전372-287)에 의해 세워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테오프라스토스에게, 아직도 우리가 소유하는 유언장에서, 자신의 재산을 유증으로 넘겼다. 이 학파는 그 당시 문화적 학문집단이며, 무사이[뮤즈] 여신들에게 헌신하는 집단이며,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물려받은 집들과 정원들은 양도할 수 없는 공동 소유로서 가지고 있었다. 이 집단은 학파의 장을 선출하는 나이 많은 구성원들과 학파에 처음 오는 자들을 초대하여 공동 식사를 매달마다 조직하도록 책임지는 젊은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철학적 작업은 집단적이다. 게다가 이 학파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마케도니아 사상으로 의심받았고 또 아테네인들에게 공감이 적었던 이 학파는 여러 번 위협을 받았다. 마케도니아인 데메트리오스(Δημήτριος, 전360경-전282)가 기원전 307년에 아테네를 [마케도니아에게] 양도해야만 했을 때, 마케도니아 옹호파들에게 반대한 데모카레스(Δημοχάρης, 전355경-전275경)에 의해 - 그는 데모스테네스(전384-322의 조카인데 - 행해진 보복이 시작되었다. 이 보복은 처음으로 소요학파학자들에게 가해졌다. 그리고 테오프라스토스는 아테네를 떠나야 했다. 이 순간부터 소요학파 철학과 아테네 사이의 연결은 더욱 느슨하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은 아테네의 광채를 창백하게 만들기 시작한 새로운 도시로 공부하러 기꺼이 떠났다. 그 도시의 이름이 알렉산드리아이다. (225)
소요학파 학자들의 박학다식한 도시와 친근함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 이유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이 이끌었던 것은 실험적 탐구 작업들의 방향에서였기 때문이다. 식물학자들, 동물학자들, 역사학자들인 그들은 전문적인 탐구를 향해 그 스승에 의해 주어진 잠재적인 충력을 따랐다. 이들은 에우데모스(Εὒδημος, 전370경-300경), 타란티노스 출신의 아리스톡세노스(Ἀριστόξενος ὀ Ταραντίνος, 전4세기), 특히 에레소스 출신의 테오프라스토스(Θεόφραστος, 전372-287) 등이다. 이 후자의 형이상학의 단편은 내밀한 접촉의 확인에 의해, 그리고 지적인 실재성들과 자연의 대상들 사이에 일종의 소통의 확인에 의해 시작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의 과장들을 경험과 대립시켰는데, 그 과장들이 또한 그를 놀라게 했던 것 같다(320, 12 이하). 그의 식물학 총서는 보존되어 있다. 그의 수많은 전문적인 자연학은 폭풍, 바람, 물 등의 표시들에 관한 것이기도 하고, 일종의 지질학에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유명한 그의 성격론(전319?))은 세부적 관찰을 향한 소요학파 도덕론의 경향을 잘 표시하고 있다. 자연학의 견해들에 대한 그의 역사는 그리스 학설가들의 중요한 원천자료의 하나가 되었다. 결국, 그의 것으로는 에레소스의 최고위자들에 관한 상세한 역사적 탐구들도 있다. 이 모든 것은 학파의 방향설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단지 역사가와 인류학자의 방식으로만 종교에 전념할 뿐이다. 때로는 정신 속에서 때로는 하늘과 별들 속에서, 그가 보는 신성(神性)의 자연에 관하여 거의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그에게 실증적인 세부사항들이 풍부하다. 예를 들어 피의 희생제의들에 대해 행한 비평에서도 그러하다. 그는 그 제의들을 나중에 나온 특성이라고 하는데, 인간과 동물 사이에 친족성 때문에 그 제의들을 초기에는 배척하였다는 비평이다. 이 비평은 독단에 의해 제기된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동물들에서 생식질들의 실증적 관찰에 의해 확립되었다. 우리는 동일한 경향을 퀴프로스 섬의 솔(도시) 출신인 클레아르코스(Κλέαρχος)(전4세기경)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는 순전히 역사적인 목표에서 미래 삶에 관한 미신들을 모았다. (226)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여러 세기를 지나면서 가장 경직된 독단주의가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학파들 중에서 가장 자유로웠다. 사람들은 클레아르코스가 천문학에서 주전원들의 이론 때문에 공들의 이론을 포기했다는 것을 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의 근본적 원리들은 스트라톤(Στράτων, 전338-270?)에 의해 타격을 입었다. 스트라톤은 기원전 300에서 전294까지 이집트 궁정에서 프톨레마이오스 2세(Ptolémée II, Πτολεμαίος, 전309-전246)의 가정교사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과는 정확하게 반대인 정식으로 그는 우연이 자연을 앞선다고 가르친다. 사실상 자연적 장소들의 학설과 목적인의 학설을 젖혀두고서 그는 오직 능동적 힘으로서 무게만을 인정했다. 게다가 스트라톤은 새롭게 낙하의 운동을 신중하게 관찰하였다. 그는 애써서 장애물에 마주치는 무거운 힘이 공간을 더 많이 지나가게 한다는 것을 보게 함으로써 운동의 가속도를 증명했다. 또한 무게만으로 그는 낮은 것에서 높은 것으로 4원소들의 상대적 지위를 연역해냈다. 열등한 요소는 압축되어 있어서, 압박을 가하는 스폰지처럼, 이처럼 표면에 머물러 있던 우월한 요소를 배출하게 한다. 물론 에테르는 없으며, 하늘은 자연[본성]상 불로 되어 있다. 물체들 사이에 있는 무게라는 차이들은 이것들을 포함하고 있는 다소간의 빈 것들에 기인한다. 빈 것들이란 또한 비물질적 환경들에 의해서만 전달되는 빛과 열의 전달에 의해 증명된다. 이리하여 자연적 질서(아마도 영원히 동일자인)는 단순한 기계적 인과성으로부터 태어날 수 있다. 낙하, 응축, 끌기로 모든 것을 설명한다. 자연이외 다른 신은 없다. 자연은 어떠한 감정도, 어떠한 형태도 없으며 모든 존재들 생산하고 생성한다. 형태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가지고 있다고 여긴 부동성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 운동의 시작점과 최종점은 운동 그자체로서 태어나고 소멸한다. (227)
또한 역사가 디카이아르코스(Δικαίαρχος, 전347경-285경)를 인용하자. 그는 자신이 쓴 그리스 민족의 요약사에서 실증적 방법으로 역사의 기원들에 대한 헤시오도스 옛이야기를 다시 한다. 그도 연속적인 시대를 구분하는데, 황금의 시대, 노마드 시대, 농업의 시대이다. 첫째 시대에서는 인간은 여가와 평화 속에서 살았다. 둘째 시대에서 동물들을 길들이며 소유, 약탈, 전쟁이 시작되었다. 셋째 시대에서 이 특징들이 강화되었다. (227)
보다 더 이후에 뤼케이온 5대 학장인 크리톨라오스(Critolaos de Phasélis, 전240경-150경)(활동 전200경부터)는 기원전190년에서 전150에 이 학파를 이끌었으며, 간신히 소요학파 학자로 분류된다. 최고신은 무감동한 에테르로부터 나온 이법이다. 영혼도 또한 이성적인 에테르이다. 그는 도덕론에서 소요학파의 학설처럼 다음 세기들에 고려될 학설을 정확하게 제시했던 것 같다. 그에 따르면, 자연에 부합하는 삶은 세 종류의 선함들에 의해서 완수된다. 즉 영혼의 선함들, 신체의 선함들, 외부의 선함들이다. (227)
합리주의로 나가는 전문화의 경향성은 은연중에 종교에는 적대적이다. 따라서 그러한 것들은 늙어가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특성들이고, 대중들과 동 떨어진 철학이며,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에 이어서 생겨나는 독단주의들의 보편적 성공 앞에서 재빨리 양보한 철학이다. 이 독단주의들은 플라톤으로부터도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도 유래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아주 다른 종류의 학파들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소크라테스주의로부터 나온 학파들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우선적으로 말해야 할 것이다.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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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1
# 참고문헌 Bibliographie 228-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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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 비데(Joseph Marie Auguste Bidez, 1867-1945), 벨기에 고전 문헌학자, 고대에서 독특한 문학적 난파선: 소실된 아리스토텔레스 유실물들의 탐구(Un singulier naufrage littéraire dans l'antiquité : À la recherche des épaves de l'Aristote perdu, 1943
1869 브룅슈비끄(Léon Brunschvicg, 1869—1944), 프랑스 과학 철학자, 철학사가. Qua ratione Aristoteles metaphysicam vim syllogismo inesse demonstravit, 1897.
1875 질레(Martin Stanislas Gillet, 1875-1951) 프랑스 신부, 주교. 도덕론 (Du Fondement intellectuel de la morale[1905]
1875 쿠퍼 (Lane Cooper, 1875-1959) 미국 성공회 신학자, 문헌학자. 구데만(Alfred Gudeman, 1862–1942)과 함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참고문헌(A Bibliography of the poetics of Aristote, 1928)(New Heven)
1877 데이비드 로스(William David Ross, 1877–1971) 스코틀랜드 철학자. 윤리학전공, 주저 The Right and the Good, 1930).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Aristotle's Metaphysics, 1924).
1877 랄로(Charles Lalo, 1877–1953), 프랑스 철학자, 미학전공,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1922).
1877 망까(Régis Louis) Maurice Manquat, 1877–1964(?), 낭시출신, 동물학 교수, 박위논문 « La théorie des tropismes dans le comportement animal, 1924 ». Aristote naturaliste 1932,Le monde des microbes, 1950.
1878 베르너(Charles Werner, 1878–1969), 스위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관념론(Aristote et l'idéalisme platonicin, 1910)
1878 드푸르니(Maurice Defourny, 1878–1953), 벨기에 정치경제학자, 꽁트의 실증주의로 철학박사, 경제이론과 사회(Théorie économique et société, 1914)(Louvain), 아리스토텔레스와 교육(Aristote et l'éducation, 1919), 아리스토텔레스와 사회진화(Aristote et l'évolution sociale, 1924)
1879 비그노네(Ettore Bignone, 1879–1953), 이탈리아 고전문헌학자, 번역가. Aristotele perduto e la formazione filosofica di Epicuro (1936)(Firenze)
1881 꼴(Gaston Colle, 1881-1946), 벨기에 철학자, 고대철학사 전공, 형이상학(I-III) 번역(1912-1922)
1885 수이에(Joseph Souilhé, 1885–1941), 제수이트. 철학사 교수, 「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과 2권」
1888 예거(Werner Jaeger, 1888-1961), 독일철학사가, 헬레니스트.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발전사 연구(Studien zur Entstehungsgeschichte der Metaphysik des Aristoteles, 1912), 아리스토텔레스: 그의 발달사의 기초(Aristoteles. Grundlegung einer Geschichte seiner Entwicklung, 1923(trad. ang. 로빈슨(Richard Robinson, 1902–1996))
1891 까르뜨롱(Henri Carteron, 1891–1929)[서른여덟], 프랑스 고대 그리스 전공, 번역가 대학교수.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서 힘의 개념(La Notion de Force dans le Système d'Aristote, 1923,
1893 트리꼬(Jules Tricot, 1893-1963), 프랑스 문헌학자, 아리스토텔레스 번역가, 오르가논번역(1936-1939)
1898 페스뛰지에르(André-Jean Festugière, 1898-1982), 프랑스 철학자, 도미니크 수도승, 문헌학자, 네오플라톤 전공,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트렙티코스(설교)”편의 새로운 단편(Un fragment nouveau du Protreptique d'Aristote」 Revue philosophique, 1956.
1899 르블롱(Jean-Marie Le Blond, 1899-1973) 프랑스 신부, 제수이트. Parties des animaux, livre I, tr. J.-M. Le Blond (1945)
1900 왈쩌(Richard Rudolf Walzer, 1900–1975), 유태계 베를린 태생 영국 그리스 철학 전문가. Aristotelis Dialogorum fragmenta, 1934
1900 모로(Joseph Moreau, 1900-1988), 프랑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학파(Aristote et son école, 1962)
1901 크뤼숑(Georges Cruchon, 1901–1980), 제수이트, 프랑스 심리학자, 철학자. 「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과 2권」(번역),
1901 브르제(Louis Bourgey, 1901–1979), 프랑스 역사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관찰과 경험(Observation et expérience chez Aristote, 1955)
1902 로빈슨(Richard Robinson, 1902–1996) 영국 철학자(대중화 작업),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번역.
1902 쉴(Pierre-Maxime Schuhl, 1902-1984), 프랑스 철학자, 고대철학교수. 지배자와 가능성들(Le Dominateur et les possibles 1960).
1902 베를리(Fritz Wehrli, 1902-1987), 스위스 그리스 학자. 아리스토텔레스 학파(Die Schule des Aristoteles)(1944-1959)(10권)
1902 보헨스키(Joseph Maria Bocheński 1902-1995), 폴란드 도미니크 수도사, 철학자, 논리학자. 테오프라스토의 논리학(La Logique de Théophraste, 1947)(프랑스어로)
1902 이타르(Jean Itard, 1902-1979) 프랑스 수학사가. 16세기와 17세기 전문가이다. 유크리드의 산술학 책들(Les livres arithmétiques d'Euclide, s.d.)
1903 뒤링(Hans Ingemar Düring, 1903-1984), 스웨덴 문헌학자, Aristotle’s Protrepticus. An Attempt at Reconstruction, 1961(Elanders, Göteborg, 1961).
1905 뮈니게(René Mugnier, 1905-1972) 프랑스 철학자, 터키에서 젊은 시절 보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Parva Naturalia 번역. 박사논문: La théorie aristotélienne du premier moteur et l’évolution de la pensée aristotélienne,
1906 닐(William Calvert Kneale, 1906–1990), 영국 논리학자. 부인 마르타 닐(Martha Kneale, 1909–2001)과 함께, 논리학의 발전(The Development of Logic, 1962)
1906 빌페르트(Paul Wilpert, 1906–1967), 독일 철학자, 고전 문헌학자. 이데아 학설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초기 두작품(Zwei aristotelische Frühschriften über die Ideenlehre, 1959)
1907 알랜(Donald James Allan, 1907–1978), 영국 철학자, 글래스고 대학 그리스 철학 교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philosophe, 1963).
1908 누이엔스(François Nuyens, Franciscus Johannes Christiaan Jozef Nuyens, "Frans" Nuijens, 1908-1982), 벨기에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심리학의 진화(L'Evolution de la psychologie d'Aristote, 1948)(Louvain)
1913 고띠에(René-Antoine Gauthier, 1913-1999), 프랑스 도미니크 신부, 문헌학자, 철학사가.
1917 데까리(Vianney Décarie, 1917-2009), 카나다 퀘벡 철학자, 교수. 아리스토텔레스에 다른 형이상학의 대상(L'objet de la métaphysique selon Aristote, 1961)
1919 모로(Paul Moraux, 1919-1985), 벨기에 고전 문헌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저술들의 옛 목록들(Les listes anciennes des ouvrages d'Aristote, 1951,
1919 브룅(Jean Brun, 1919-1994), 프랑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뤼케이온(Aristote et lycée, 1961).
1919 라비노비츠(Wilson Gerson Rabinowitz, 1919-1998) 미국 철학사가, 고전문헌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트렙티코스(설교)”와 그것의 재구성의 원천들(Aristotle's Protrepticus and the sources of its reconstruction, I, 1957
1920 바르보땅(Edmond Barbotin, 1920-2014), 프랑스 카톨릭 신부, 신학자, 헬레니스트. 테오프라스토스에 따른 지식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 이론(La Théorie aristotélicienne de l'intellect d'après Théophraste, 1954(Publications Universitaires de Louvain, 312 p.)
1921 사프레(Henri Dominique Saffrey, 1921-), 프랑스 철학자, 신플라톤주의 전공,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관하여(Sur la philosophie)”와 수의 이데아들에 대한 플라톤의 이론(Le Περὶ Φιλοσοφίας d'Aristote et la théorie platonicienne des Idées Nombres, 1955)
1923 죨리프(Jean-Yves Jolif, 1923–1979), 프랑스 신학자, 대학교수, 번역가.
1923 베이유(Raymond Weil, 1923-1995), ENS, 1946년 문학으로 수석졸업, 그리스 문학과 언어 전공, 「아리스토텔레스 문제들에 대한 현재 상태(Etat présent des question aristoteliciennes」, Information littéraire(1959, pp. 20-31).
1929 브룅슈비그(Jacques Brunschwig, 1929-2010), 프랑스 철학사가, 문헌학자, 번역가, 토픽편(1967).
1929 오방끄(Pierre Aubenque, 1929-2020), 프랑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전공,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존재의 문제(Le problème de l'être chez Aristote, 1962).
1930 론고(Oddone Longo, 1930–2018), 이탈리아 그리스어 학자, 고전철학자. 그리스 문학박사.
?-? 포브스(F. H. Forbes, s.d., Claire Forbes, s.d.), 프린스턴 대학과 연결된 유명한 서적상. 대를 이어서 하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로스(1877–1971)와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번역을 편집했을 것이다. 이 책에서 Fobes로 되어 있는데 오타일 것이다.
?-? 루이(Pierre Louis, s.d.), 문학박사, 클레르몽과 리용 아카데미 총장을 지냈다는데(1954-1976), 아리스토텔레스 번역이외 다른 기록이 없다. 신부? Pierre Louis, Aristote. Les parties des animaux. Texte établi et traduit. Paris, Les Belles Lettres, 1956. 1 vol. in-8°, xli- 194 pp.
?-? 오보네(Jean Aubonnet, s.d.), 정치학번역, Introduction à la Politique d'Aristote, édition des Belles Lettres, p. XC à XCII.
?-? 쮜르헤(Josef Zürcher, s.d.), Aristoteles Werk und Geist, 1952)
?-? 뛰로(Carol Thurot, s.d.), 알수 없음, 아리스토텔레스 연구(Etudes sur Aristote, 1861)
?-? 롤랑-고슬랑(Miguel Roland-Gosselin, s.d.), 신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정의의 방법들(Les Méthodes de la définition d'après Arisotote)」, Revue des sciences philosophiques et théologiques, 1912. (12:19, 57VK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