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6 주일
순수한 어린이와 탐욕스런 어른을 비교한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여름 밤 … 아이들은 꿈을 꾼다. 아이들은 꿈속에서 잠자리를 잡고, 아이들은 꿈속에서 물놀이를 하고, 아이들은 꿈속에서 하늘을 날아 다니고, 아이들은 꿈속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아이들은 꿈속에서 한껏 뛰어 놀며, 아이들은 꿈속에서 탐험가가 된다. 아이들은 꿈속에서 피터 팬이 된다.”
“여름 밤 … 어른들도 꿈을 꾼다. 어른들은 꿈속에서 해외 여행을 하고, 어른들은 꿈속에서 큰 성공을 하고, 어른들은 꿈속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고, 어른들은 꿈속에서 고급차를 타고 다니며, 어른들은 꿈속에서 부자가 된다. 어른들은 꿈속에서 스크루지가 된다.”
오늘 말씀 전례에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의 협조를 통해 일하신다.’는 것과 ‘그 일꾼들을 막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제1 독서에서는 모세와 그를 돕는 일흔 명의 원로를 뽑아 일하시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원로로 임명받은 두 명은 모임에 참석하지는 못한 채, 그들의 진영에서 하느님의 영을 받고 예언하게 됩니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모세는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민수 11,29)고 말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받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제배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 사도는 다혈질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의미의 ‘보아네르게스’라고 부르셨습니다. 예를 들면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며 사마리아를 들러 가시려고 하셨는데 그곳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자,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라는 과격한 반응을 보인 적이 있습니다.
요한은 마귀를 쫓아내는 이들을 보고는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마르 9,38)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요한은 ‘저희’라는 말을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를 보았고, 그는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고, ‘저희’는 그를 막으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잘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라는 말에는 개인주의를 넘어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우리’에 속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이 말이 무서운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라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그 둘레에 높은 장벽을 만들고 자신들과 ‘다른’ 그 어떤 존재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배타주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 가족, 내 고향, 내 나라는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남의 가족, 남의 고향, 남의 나라는 어찌되도 상관없다는 ‘집단 이기주의’가 나타나기도 합니다.(선거 때만 되면 지역 감정을 조장하는 정치인들의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처럼).
그런데 교회 공동체에 속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양들이지, ‘우리 자신’의 양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유일한 목자는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양떼일 뿐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속해 있는 이유는 목자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해서이지, ‘우리들’만의 일치를 위한 것이 아니며, ‘우리들’이라는 인간에 속해 있기 위함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처럼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하고 말하는 것은, 제자의 본분을 잃은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바로 앞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라고 하시면서,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39)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모든 이를 당신 협력자로 모으십니다. 곧 성직자나 수도자, 세례 받은 신자들만을 당신의 협조자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열려 있도록 요청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 또는 ‘우리’만을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기”(2코린 5,15) 때문입니다. 교회는 독점되어서도 안 되고, 배타적이어서도 안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권고 8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주님께서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시기하면, 모든 선을 말씀하시고 이루어 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시기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남이 나에게 베푼 은혜는 작은 것이라도 바위에 새기고 내가 베푼 것은 아무리 커도 모래에 새겨라.”라는 말이 있듯 받은 것에 감사하고 도와주고 베푼 것에 대해서는 연연하고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