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는 할아버지가 심어놓은 감나무가 많았다.
우선 장독대 뒤의 단감나무는 제일 먼저 먹을 수 있었다.
약간 납작하고 크기도 작은 편이지만 속에는 검은 색이 적당히 박혀있고
떫지 않고 달아서 추석 무렵이면 생감으로 먹는 것이다.
집 앞에 삼사백평 정도 되는 감나무 밭에는 삥 돌아가면서 여러 종류의 감나무가 있었고
밭 중간에는 배 한그루, 복숭아 두그루, 그리고 이런저런 감들이 다양했다.
오월의 따스한 햇살이 퍼지면 나는 일어나자 마자 감나무 밭으로 달려간다.
커다란 감나무 아래에는 하이얀 감꽃이 마치 눈처럼 소복하게 떨어져 있어서
깨끗한 것은 주워 먹기도 하고 손에 담아 와서는 실에 꿰어서 목걸이도 만들곤 했는데,
동네 가스나들은 많았지만 이 목걸이를 선물로 주고 하는 그런 순정은 없었드랬다.
감나무 밭에는 위로 길쭉한 왕감(대봉시), 곶감 깎는 납작감이 많았고,
두리뭉실 엄청 큰 먹감은 곶감을 깎아 말리면 고봉밥 뚜껑만큼 컸다.
감꽃이 지고 한동안 잊고 있다 한여름이 되면 땡감이 수시로 떨어진다.
그 걸 모아서 가져오면 어머니는 아랫목 항아리에 소금물을 넣고 감을 담가둔다.
한 이삼일 지나서 꺼내 먹으면 떫은 맛이 없고 달아서 간식꺼리로 괜찮았다.
추석이 지나고 서늘한 바람이 불면 감나무에는 빨간 홍시들이 몇개씩 보인다.
학교 갔다 와서는 바로 감장대를 들고 커다란 나무에 올라가서 홍시를 조심스레 딴다.
감장대는 대나무 끝에 굵은 철사를 원형으로 만들고 주머니를 달아맨 것인데,
홍시를 주머니에 넣고 잡아당기면 톡 하고 떨어진다.
먼저 익은 홍시는 반드시 꼭지 부분에 벌레가 먹은 것이다.
홍시가 깨진 것은 내가 먹고, 성한 것은 집에 가져와서 저녁에 나눠 먹는다.
홍시는 꼭지를 떼어내고 반을 쪼개면 빠알간 속살이 찰지게 갈라 지면서
엄청난 식감을 자극하게 된다.
그 걸 입안에 베어물고 살살 깨물면 온 세상이 내것인 행복감으로 충만하게 된다.
입안의 감 씨앗도 혀로 말끔히 발라내고 마지막에 퉤엣~ 뱉어내는 쾌감도 즐겁다.
벼 나락이 누렇게 익어가는 시월 어느 날,
나는 혼자 감나무밭의 커다란 납작 감나무에 올라가서 홍시를 따고 있었다.
그러다가 솔밭쪽을 쳐다보니 큰 누나가 옆집 총각과 무슨 얘기를 하고 있어서
거기에 한눈 팔다가 그만 썩은 나뭇가지를 밟아버렸다.
순간 쿵! 하면서 나는 논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잠시 숨쉬기가 곤란하였다.
놀란 누나가 달려와서 괜찮냐고 걱정을 했고 다행히 아무런 상처는 없었다.
논에 떨어진데다 물을 빼낸 상태로 땅이 약간 말랑한 상태였던 것이다.
감나무는 약해서 아주 조심해야 한다는 걸 일찌감치 몸으로 배웠다.
늦가을이면 온 가족이 날을 잡아서 감을 모두 땄다.
남자들은 나무에 올라가서 감 장대로 따서 아래로 내리고
밑에서는 여자들이 받아서 광주리에 담는다.
감이 주렁주렁 많이 달린 가지는 장대끝을 쪼개서 붙들어 맨 장대에
가지를 끼워넣고 장대를 돌려 꺾어서 따기도 한다.
나뭇잎에 가려서 잘 안보이면 아래서는 위로! 옆으로! 하면서 감의 좌표를 찍어준다.
감나무가 워낙 커서 한 나무 따는데도 시간이 꽤 걸리기에 이틀은 따야 했다.
그 다음은 감을 깎아서 채반과 소쿠리에 담아 장독대나 햇살 좋은 곳에 말린다.
몸채와 아랫채 처마밑에 장대를 가로로 매어서 거기에 감을 두개씩 매달기도 한다.
감 껍질도 따로 말리는데 한 사나흘만 지나면 반건조로 달콤해서 좋은 간식꺼리가 되었다.
초겨울까지 잘 말려진 곶감은 항아리에 저장이 되고 하얗게 분이 난 곶감은
일년 내내 제삿상에 오른다.
제삿상 과일은 조율시리(棗栗柿梨) 대추 밤 감 배 순서로 차린다.
안마당 샘 앞에는 아름드리 고욤나무가 있어서 디딜방앗간의 서까래와 긴 빨랫줄을
묶어 두었는데, 이 고욤은 서리가 내린 후에 장대로 두들겨서 따 모은 다음
깨끗이 닦아서 항아리에 쟁여 놓으면 설날 무렵에는 아주 꿀단지로 변신한다.
쫀득하게 된 상태라 숟가락으로 퍼먹는데 완전 꿀맛이지만,
고욤이라 작은 씨가 엄청 많아서 그걸 골라서 뱉어내는 것도 일이긴 하다.
감과 대추 포도 등은 봄에 새 가지가 나오면서 거기에 꽃눈과 잎눈이 같이 나온다.
그래서 나뭇가지는 과감하게 잘라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옛날 감나무는 크기도 엄청 커서 높은 데 있는 감은 딸 수도 없고
까치밥으로 적당히 남겨 두었다.
물론 약도 치지 않았으니 천연 유기농 과일로 백점짜리다.
요즘은 품종 개량이 많이 되어서 나무도 작고 과일도 빨리 열리지만
약을 많이 쳐야하는 단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