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운동을 갈 때마다 습관처럼 하늘을 올려다본다. 산이 높지 않은 이곳은 장릉이 산처럼 다가온다. 달빛은 물론 눈도 비도 그곳의 나무들로부터 오는 느낌이다. 산에 나무가 좋았다. 재작년인가 시청과 인접한 언덕배기에 중장비 굉음이 요란하더니 붉은 흙이 드러나고 그 많던 나무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멀대 같은 아카시아 한 그루만 을씨년스럽게 남았다. 많았던 벚나무도 남김없이 베어졌다. 가지가 휘영청 늘어져 4월의 꽃샘바람에 흐느적거리던 모습이 애련하여 혼자 ‘능수벚’으로 이름 지었던 벚나무도 흔적 없다.
사라진 벚나무를 위한 영결사를 짓고 그 자리에 홀로 서서 조상했다. 이후 가능하면 나무가 베어진 곳을 비켜 다니고 언덕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나무가 사라진 언덕은 집 나온 강아지들만 몰려다닌다.
비 그친 뒤 화단 백목련 꽃눈이 몰라보게 부풀었다. 해토되기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오늘 아침은 까치소리 요란하다. 봄을 맞는 기미다. 가족을 꾸미고 새끼 키울 둥지를 찾고 있음이다. 생명은 그 어떤 것이든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 텅 빈 공간에 허우대 좋게 홀로 서있는 아카시아나무는 아직 겨울이다. 우듬지에는 얼기설기 만들어져 써고 버린 둥지 두 개가 동그마니 달려있다. 둥지는 잊힌 삶이자 시간이다.
아카시아는 담장이 높게 쳐져 사람들의 접근이 막힌 키다리아저씨네 집 나무같이 껍질이 칙칙하고 어둡다. 햇살이 비치기도 하고 달과 별이 멈칫대기도 했을 테지만 소용이 끝난 들판 허수아비처럼 고적하다. 연초록 잎이 울울하고 흰 아카시아꽃이 눈처럼 날리던 유월에는 주인이 살았을 법한데 정작 그곳에 둥지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사람 살던 터전도 마찬가지다. 유년 시절을 보냈던 고향 마을에는 곰비임비 빈 집만 늘어난다. 추녀는 기울고 돌담은 쓰러졌다. 인적 없는 사립문을 휘돌며 부는 바람은 영락없는 공징이 한탄처럼 괴괴하고 으스스하다. 그나마 해 바른 곳에서 곱송그리고 낮잠을 즐기는 길고양이만 살 판났다. 앞산이 흘러내리다 개울과 만나는 곳에는 시멘트 구조물이 생경하다. 버들개지가 봄을 맞던 곳에도 커다란 돌덩이만 위압적이다. 봄이면 무리진 노랑나비처럼 꽃을 피우던 골담초도 벽돌담으로 바뀌면서 흔적 없다.
복닥복닥하면서도 구순하게 형제자매 자랐던 고향 집이라고 다르랴. 사람 살지 않는 집에는 정겹던 사립문 대신 녹슨 철대문만 마당을 지키고 섰다. 제비가 둥지 틀던 처마 밑에는 낡고 퇴색된 한지로 만든 듯한 왕바다리 집만 매달려 고즈넉하다. 비 그친 아침 햇살에 봄기운이 그윽하다. 도심의 골목길 위에서 건조하게 울어대던 까치들이 다시 둥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숲은 물과 바람 그리고 햇살로 다시 자연을 가꾼다. 뭇 생명이 모여들어 둥지를 만들고 역사를 이어간다. 영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어릴 적 둥지는 언제나 사람들이 돌아올까. 가난의 강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먼바다로 떠내려 보냈다. 고향의 숲정이 둥지에는 아직도 흐릿한 겨울빛이 구중중하다. 경칩이 지나도 아침에는 얼음이 언다. 사람 없는 시골은 올해도 봄이 느직이 올 모양이다.
첫댓글 까치는 알을까면 둥지를 버리지요.. 집하나 사치라고 버리고 마는데 사람은 이십억이다. 오십억이다. 백억이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