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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베드로전서 4강
말씀/ 베드로전서 4:1-19
요절/ 베드로전서 4:13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즐거움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자녀들이 2주 동안 여행을 떠나고 나니 집이 깨끗해졌습니다. 욕실을 아들과 같이 사용했는데, 이리 오랫동안 깨끗함을 유지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허전하고 긴장과 즐거움이 오가는 그런 맛은 사라졌습니다.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고난스럽지만 행복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체험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고난스러운 것들이 주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즐거움이 되기도 합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예수님을 생각함으로서 즐거움을 놓치지 않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갑옷’은 방어무기입니다. 요즘으로 적용하면 방탄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예수님의 고난을 떠올리면, 그것이 마음의 방탄복이 됩니다. 고난은 고통과 함께 의심과 냉랭함을 동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나를 고통가운데 버려두시는가!, 사람들은 왜 나의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가?’ 욥이 욥기에서 절절히 기록했던 것처럼, 고난은 고통과 함께 온갖 의문과 의심과 의구심을 동반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의 고난을 받으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 죄가 없는데도 온갖 모욕과 멸시를 당하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빛이 임하고 안개처럼 몰려오는 어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고난 받는 자는 사랑받지 못한 자, 버림당한 자가 아니라 죄를 그친 자입니다. ‘죄를 그쳤다’는 것을 표준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육신으로 고난을 받은 사람은 이미 죄와 인연을 끊은 사람입니다” 선을 행하기 위해 실제 고난을 받는 것은 죄의 종에서 벗어난 증거, 구원받은 증거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한때 ‘구원받은 증거가 무엇인가’, 구원의 표징을 따졌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방언을 할 줄 아느냐? 회심한 날짜와 시간에 대한 확실한 기억이 있느냐?...’, 그러나 베드로전서적으로 말하면, 구원의 확실한 표징은 선을 행하고자 육체의 고난을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고자 하느냐, 그런는 능력을 가졌느냐입니다.(2) 그것이 예수님이 당신의 피로 사람을 구원하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음란은 불륜이나 성추행처럼 법을 넘어선 성적 욕망, 정욕은 불법은 아니지만 부적절한 성적 욕망을 말합니다.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은 마음껏 먹고 마시는 파티로 그려지는 세상 쾌락입니다. 무법한 우상숭배는 성적 욕망과 술, 두가지를 결합시켜 놓은 것입니다. 세상은 ‘니 마음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즐겨라’를 외칩니다. 마음껏 즐기지 못하는 자들은 향해 무능한 자들, 바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선언합니다.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얼마큼 술 취하고 방탕하게 놀았어야 지나간 때로 족한 것입니까! 어떤 이는 건강을 해칠 정도로 방탕하게 살다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도 있겠지만, 어떤 이는 겨우 맥주 몇모금 마시다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형제는 1학년 입학식 전에 목자의 전도로 UBF에 끌려와서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믿음의 결혼을 했습니다. 가끔씩 아쉬움을 쏟아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떤 2세는 어릴 때부터 부모의 집중 견제(?)로 말미암아 마음껏 놀지 못했다는 손해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지나간 때로 족하다는 말씀은 해당되지 않는 억울한 말씀일까요? 이 말씀은 ‘충분히 질리도록 즐겼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게 시간과 열정을 보낼만한 조금의 가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음란과 정욕과 방탕과 술취함과 우상숭배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음란 대신 경건을, 정욕 대신 이웃 사랑의 세계를 열어주고자 조롱과 멸시를 그 몸으로 담당하셨습니다. 술취함과 방탕 대신 성령 충만의 세계로 인도하고자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이 치루신 끔찍한 고난과 우리가 받은 어마어마한 축복을 생각하면, 욕망을 좇아 살아가는 생활은 지나간 때로 족합니다. 만약 지나간 때로 족한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세상 쾌락에 발목 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하고도 지나간 애굽 시절을 그리워하며 뒤를 돌아보며 원망하다가 광야에서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세상은 자기들과 함께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않으면 이상히 여기고 비방합니다.(4)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되는 날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날에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5) 6절을 보십시오. 그 날을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여기서 죽은 자들이란 복음으로 말미암아 고난받다가 죽은 자들을 말합니다. 나그네같은 도피생활로 늘 긴장하다가 몸과 마음에 병을 얻어 죽은 사람, 형장에서 처형당해 죽은 사람, 혹은 사회적으로 매장당해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것처럼 살다가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그들은 육체로는 심판을 받은 사람들이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이 오면 그들은 영으로 하나님을 따라 살아있는 사람들이었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죄와 죽음의 정죄로부터 살았고 영원한 형벌에서 살아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당시 세상은 로마제국을 세상의 전부로 여겼습니다. 아울러 로마제국은 영원토록 번영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로마제국의 위기를 꿰뚫어 보았습니다. 말기암 환자처럼 죄와 어둠의 암세포가 로마사회 구석구석까지 퍼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도덕과 윤리가 무너지고 가정마저도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경제적 번영 혹은 군사적 승리에 속아 종말로 치닫고 있는 모습이 가려져 있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위기를 만난 것은 박해 받는 신자들이 아니라 로마제국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하며 분별력을 잃지 말도록 권면합니다. 오늘 우리시대도 국내적으로 국제적으로 매우 혼돈스럽습니다. 곳곳에서 전쟁의 위기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 환경 위기, 경제위기, 정치위기가 나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급변하는 가치관과 도덕의 붕괴를 생각하면, 다가올 미래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제정신을 갖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때마다 스스로를 향해 말합니다. “최베드로, 정신줄 놓지 말자. 깨어 기도하며 인내하자!”
그것은 서로 사랑하기에 힘쓰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힘든 시간을 만나면 자기중심적으로 오그라듭니다. 사소한 일에 예민해지고 마음의 날을 세웁니다. 그런 때일수록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도 베드로는 잠언 10:12절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마귀는 허물을 드러내어 정죄하라고 부추깁니다. 그를 통해 관계성을 끊어버리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말세가 다가올수록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으리라 경고하셨습니다.(마24:12) 세상은 이전보다 훨씬 풍요롭고 편리해졌지만, 갈수록 서로 사랑은 식어가고 있습니다. 경제 위기가 핵심이 아니라 사랑이 말라가는 것이 진짜 위기입니다.
세상이 메말라갈수곡 우리는 사랑으로 허다한 죄를 덮기에 힘써야 합니다.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은 횟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에 걸림이 되는 죄까지 감당하는 것이며 참을 수 없는 한계를 넘어 인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베드로에게 좋은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경고하며 조심 시켰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비겁하게 다락방에 숨어있는 제자들을 심방오시고 안심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두려움에 휘둘려 물고기 잡으러 갈릴리 바다로 도망쳤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또다시 찾아오시고 해변에 숯불을 피우고 떡과 생선을 구워 대접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변함없이 제자로 인정하시고 변함없이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허물을 덮는 사랑이 베드로를 배신자의 세계에서 사도의 세계로 이동시켰습니다. 비겁함을 극복하고 복음의 일군으로 다시 살게 했습니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험악한 세상을 이기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9-11절은 사랑의 적용,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의 적용을 말씀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빌리티 커피를 샀는데, 당신은 왜 매머드 커피를 사지?’, 따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준 사람이나 먹는 사람이나 원망이 아닌 감사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선한 청지기같이 봉사하는 것입니다. ‘내 은사가 잘났네, 니 은사는 아무 것도 아니네’, 갑론을박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의 가장 깊고도 간절한 욕망은 자기 과시입니다. 그런 욕망은 자기 은사 자랑에만 모든 포커스를 맞추도록 합니다. 그러나 내 은사만큼 다른 사람의 은사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무슨 봉사를 하든지 하나님의 은혜로 맡은 청지기임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는 것입니다.(11) 그리할 때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으로 공동체를 채우고 나 자신을 채우고자 힘써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을 연단하려고 불시험을 주십니다. ‘불시험’이란 불 가운데를 통과하는 것 같은 고통스런 사건을 말합니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고난을 겪은 적이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사랑하는 자녀에게 불 시험을 당하도록 놔두시는 것입니까! 마치 재벌 부모가 끼니 걱정을 하며 살아가는 자녀에게 돈 한 푼 지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베드로는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께서도 불 속을 지나는 것 같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아무 죄가 없는데도 재판정에 끌려갔습니다. 온갖 수치와 조롱을 당하고 채찍에 맞았습니다. 열렬히 따르던 제자들과 무리들은 외면하고 도망쳤습니다. 마지막에는 발가벗긴 채로 십자가에 못박혔고 온갖 욕설과 저주를 들으며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다 이루었다’ 말씀하시며 모든 것을 하나님 아버지 손에 맡기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죄사함을 주시고 영생을 주시고 성령의 열매를 주시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참여할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축구경기에 참여하지 않으면 축구를 알 수 없듯이, 고난을 겪어보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고난을 알 수 없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그 몸으로 모든 수욕을 당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비난을 당하고 멸시와 손해를 당함으로 알게 됩니다. 루터는 신앙성숙의 3대 요소로서 말씀과 기도 그리고 고난을 꼽았습니다. C.S루이스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쾌락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 오래전 훈련소에서는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훈련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에 ‘어머니’라고 외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때 많은 훈련병들이 어머니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난은 집에서 피자 사주고 치킨 먹이는 것보다 몇 배로 부모의 고마움에 강력하게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남자들은 군대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는 말이 거기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는 고난의 날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거기에 연결될 때, 고난을 넘어실 수 있는 용기와 인내, 즐거움을 얻게 될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였기에, 그의 권면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비겁한 베드로가 어찌 이리도 담대한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을 당했기 때문이며, 고난을 당할 때 예수님의 고난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그리할 때 베드로의 영은 영광의 영, 하나님의 영에 접속이 되었습니다.
며칠 전 어느 선교사 부부가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선교지로 출국했습니다. 아직도 드론이 주거지 앞까지 날라와 폭발하고, 그런 폭발로 인해 밤마다 섬광이 번쩍이는데도 출국했습니다. ‘조금 있으면 휴전될 것 같은데 그때 가는 것이 좋지 않아요?’ 걱정되어 물었습니다. 선교사가 말했습니다. ‘여기는 제가 살 곳이 아니니까요 선교지로 가는 곳마다 고난을 많이 받았는데, 정말 하나님께 감사드려요. 고난을 받아보니 사람이 되고 목자가 되고 예수님을 많이 배우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그는 이미 현지 목자들에게 직분과 권한을 위임했기에 책임질 이유가 없는데도 선교지로 향했습니다. 영광의 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고 있지 않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물론 모든 고난을 무조건 그리스도의 고난과 연결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일로 고난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애통히 회개해야 할 일이며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고난 받을 때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16) ‘하나님 아버지, 나 같은 자가 당신의 고난의 참여할 수 있도록 믿음 주시고 은혜 주시고 인도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다만 당신의 이름을 높이는 자가 될 수 있도록 지켜주시고 도와주옵소서’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이 시작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집은 ‘교회’를 말합니다. 심판이란 죄를 불태우고 성결하게 하는 손길을 말합니다. 구약시대나 지금이나, 하나님 역사의 원칙은 먼저 당신의 백성들을 성결케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와서 성전을 파괴하고 백성들을 포로로 끌어갔을 때, 그것은 이스라엘이 바벨론보다 악질이라는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객관적인 저울로 달아본다면, 바벨론의 죄가 이스라엘의 죄보다 몇 배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바벨론을 승자, 이스라엘을 포로의 자리에 서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철저히 회개하고 겸손해지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통해 우상숭배와 형식주의를 철저히 회개하고 말씀 중심으로 터닝합니다. 그렇게 불시험을 통과한 자들이 거룩한 그루터기가 되어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모판이 됩니다.
초대교회의 박해도 그러합니다. 심판으로 느껴질 정도로 박해받는 아픔은 오직 복음진리를 붙드는 사람들만을 남아있게 했습니다. 우리를 인도하는 신약성경, 사도신경을 비롯하여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신조들,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법과 전통들, 그때 고난의 시간을 견디면서 준비된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심판 받고 성결해질 때, 거기에서 세상을 구원할 능력이 준비됩니다. 목자가 불같은 시련으로 성결해질수록 양들을 구원할 준비가 됩니다. 오늘 한국 기독교의 위기도 하나님의 집을 성결케 하기 위한 손길임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어렵다고 너무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둠만 보고 낙심하지 말고 빛의 손길이 있음을 보고 기도해야 합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고난의 시간을 인내하고 나면 좋은 날은 반드시 옵니다.
진짜 불쌍한 사람들은 고난을 만나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성결이 아니라 멸망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의인이 불같은 시험을 통해 겨우 하나님의 백성으로 준비된다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은 아무리 고난을 받아도 깨닫지 못합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는데, 구원받지 못한 인생, 성결케 되기는커녕 꼬인 마음, 상처받은 영혼으로 남아버립니다. 가장 불쌍한 인생입니다.
마지막으로 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우리 가운데 고난 받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 받고 있음을 영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구나! 믿음으로 견디고 인내하겠습니다. 제게 성령을 부으사 이전보다 더욱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을 공급하여 주옵소서 선을 행하기에 힘쓰겠습니다.” 긍정의 마인드, 두려움 대신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는 믿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게 고난가운데 즐거움을 잃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당신의 빛을 드러내십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