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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토성과 김구의 묘
* 지명의 의미
우리나라 동,면 단위의 행정지명을 제시해 놓고 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고르라고 하면 과연 어느 곳이 선정될까. 전국을 무대로 하면 낯선 지명이 많아 아무래도 대부분이 낯익은 고향 지역의 지명을 추천하지 않을까 싶다. 그 의미가 어떻든 익숙한 자체만으로도 정감을 느끼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기에 그 결과는 주관적인 느낌에 좌우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에 비해 멋없고 매력없는 지명을 고르라 하면 누구나 쉽게 고를 것이다. 정감도 없고 부르기도 이상한 이름이 많기 때문이다. 그 중 필자는 동, 서, 남, 북, 중의 오방(五方)을 이용한 지명을 가장 매력없는 지명으로 꼽는다. 남면, 북면, 동면, 서면, 중앙동 등은 관청을 중심으로 한 행정 편의적 결과물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런 지명에서는 그 지역의 역사성이나 문화적 특징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전국 지명에는 그런 류의 지명이 많다.
물 좋은 곳이라는 느낌을 주는 감천, 숯과 관련한 이야기를 안고 있는 탄천, 온천을 생각게 하는 온양이 있는가 하면 안양과 같이 불교적 명칭을 이용한 지명도 있다. 당진(唐津)은 당나라와 활발히 교류를 하던 선진항으로서의 의미를 살린 지명으로 지금의 인천국제공항과 같은 곳이었음을 알게 하고, 안동이나 천안, 팔공산 등은 왕건의 승전과 패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지명은 그렇게 역사와 문화는 물론 지리적 특성까지 담아내는 그릇이다. 주민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음운변화가 일어나는 대로 편리하게 사용하지만 그 속에는 언어 변천사와 함께 인문학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단서 역할을 하는 것이 지명이다. 그런 면에서 남면, 북면과 같이 방향을 이용한 지명은 학술적 가치나 언어적 기품도 느낄 수 없다. 그래도 문화사적으로 평하면 나침반이나 네비게이션이 필요했던 나그네에게 고마운 안내자 역할을 했다고나 할까.
다만 시가지의 중심이라는 중앙동은 5방을 이용한 지명이나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 많아 그 연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각 지방에 객사(客舍)를 두었다. 자료상으로는 1279년에 지었다고 하지만 고려초기부터 있었던 제도로서 왕권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임금의 명을 받은 사신이 지방에 내려가면 그 곳에서 묵으며 교지를 전달하고 국정을 논했다. 객관(客館)이라고도 하는 이 건물에는 항상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 놓고 지방관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대궐을 향해 망궐례(望闕禮)라 하는 예를 올렸다. 객사는 그만큼 권위와 국권을 상징하는 장소였기에 관찰사의 감영이나 지방수령의 동헌보다 규모가 컸다. 그래서 객사는 공간이 넓었다. 이에 일제는 조선인을 교육시킨다는 명목으로 객사를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학교를 지었다. 그것이 ‘중앙국민학교’였으니 지금의 중앙초등학교는 거의가 객사자리였다. 향교가 있던 곳을 ‘교동’이라 하고 객사가 있던 곳은 ‘중앙동’이라 한 것이다. 중앙동은 그렇게 역사성이 있는 지명이다. 그에 비해 황금동은 변두리의 똥통이 있던 곳을 미화한 지명이다. 결국 중앙동은 5방을 이용한 지명이면서도 그 속에 숨은 역사성으로 인해 품위가 다르다.
* 꿈에 얽힌 지명
아름다운 지명을 말하라 하면 나는 주저없이 전라남도 무안의 몽탄면을 꼽는다. 영산강을 끼고 나주의 동강면과 마주한 몽탄으로 가는 길은 쭉쭉빵빵한 메타세쿼이아들이 열병하듯 반겨주어서 더 아름답다. 그 강변길을 걷다가 식영정(息營亭)에 오르면 마치 신선이 되어 꿈을 꾸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 꿈 몽(夢)자가 어울리는 곳이다. 식영정은 광해군 시대에 승문원 우승지(右承旨)를 지낸 한호(閑好) 임연(林煉)선생이 1630년 무안에 입향한 이후 지은 정자다. 영산강과 어울린 경관이 아름다워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토론을 하고 시를 읊기도 했다. 2002년에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237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는데 나주임씨 한호공파 종중 소유다. 한호는 한가로움을 좋아한다는 그의 호처럼 여유를 즐기며 그림자도 쉬었다 가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아 식영정이라 했다.
가사의 고장 담양에서 만나 가슴에 정겹게 담아 둔 식영정(息影亭)을 이곳에서 또 만나니 담양의 느낌과 어울려 그 감동은 배가된다. 무안의 식영정은 휴식을 취하는 의미로 영(營)자를 사용했지만 담양의 식영정은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으로 영(影)자를 사용했다. 임억령은 이 정자에서 많은 시인묵객들이 시를 읊조리기에 쉬었다 가기를 원했는지 그렇게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다.
무안의 식영정에서 내려다 본 영산강의 여울, 그 여울에 꿈꾸듯 흐르는 물줄기, 그 분위기에 몽탄(夢灘)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은 없다. 영산강 하구언으로 흘러드는 여울이 S자를 그리며 흐르기 때문에 감여가들은 산태극(山太極) 수태극(水太極)의 비경이라 한다. 그래서 감히 지명에 꿈 몽(夢)자를 사용했을 것이나 정확한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경덕왕이 전국의 지명을 한자화 할 때 몽탄을 물량군이라 했다. 그 후 조선시대에는 무안군의 박곡면(朴谷面)이라 했는데 어떤 영문인지 1939년 4월에 꿈꾸는 여울이라는 몽탄면으로 바뀌었다. 그 연원은 후삼국 시대 왕건과 견훤의 전쟁 이야기에 있다. 후삼국 시대의 처절했던 전쟁에 얽힌 일화가 전설처럼 구전되어 지명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후백제를 공략하던 왕건이 견훤군에게 쫓겨 동강면으로 퇴각했다. 얼마만큼 쫓기자 영산강이 가로막았다. 더 이상 퇴각하지 못하고 주춤거리자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그곳은 강이 아니라 여울(灘)이니 빨리 건너라는 계시를 내렸다. 이에 왕건은 군사들을 말을 탄 채 지금의 몽탄나루를 건너게 한 후 군사를 재정비하여 승리할 수 있었다.’
그 꿈이야기는 꿈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졌고 그 고려적 이야기는 1939년에 몽탄이라 이름으로 되살아났다. 그 이야기를 지켜온 마을 사람들도 멋있지만 ‘박곡’을 ‘몽탄’으로 바꾼 사람은 더 멋진 사람이다.
꿈과 연계하여 이름을 얻은 지명에는 몽촌(夢村)이 있다.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용몽리에 있는 몽촌 방죽이 그것이다. 용몽(龍夢)이라 하면 용꿈을 꾸었다는 뜻이므로 몽촌 방죽은 분명 그 꿈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1994년에 발간한 『진천군지』에 이 전설이 실려 있는데 용왕의 아들과 선비 사이에 얽힌 이야기다.
‘한 선비가 움막을 짓고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다가 낮잠이 들었다. 이에 흰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서 자기는 용왕의 아들인데 예쁜 여자와 사랑을 하다가 부왕에게 들켜 지상으로 3년 동안 쫓겨나는 벌을 받았다. 그래서 선비에게 찾아와 자기가 살 방죽을 3개월 만에 만들고 그 주변에 마을을 조성하라는 부탁을 했다. 그렇게 하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후환이 두려운 선비는 가족회의를 열어 노인의 부탁대로 석달 만에 방죽을 완성했다. 그 후 선비는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관직에까지 오르고 그 마을은 가뭄과 홍수에도 풍년이 들어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다.’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다. 현몽하여 자리 잡은 곳, 그래서 ‘몽촌’이라는 이름이 탄생했으니 결국 꿈마을이다. 그 꿈마을은 꿈이 있는 마을, 희망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기에 나는 ‘몽탄’처럼 지명에 ‘몽’자를 사용한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이름이라는 느낌이든다. 그래서 문화재 답사를 안내하거나 취재여행을 다닐 때마다 몽자의 지명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러나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꿈과 연관된 지명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 사적지 몽촌토성과 김구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명을 찾으라 하면 어디를 꼽을까. 공부에 싫증난 학생이라면 방학동을, 모유가 부족한 산모라면 수유동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기 위해 고생하는 선수라면 월계동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할 것이다.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굳이 시비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몽촌’을 호로 사용한 인명(人名)은 차치하고 ‘몽촌토성’에서 내 지명수색 작업은 접기로 했다.
1981년 9월 30일 독일 바덴바덴(Baden-Baden)의 IOC 회의에서 서울을 제 24회 올림픽 개최지로 발표하자 황무지로 버려져 있던 몽촌토성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사적지 297호로 지정하여 발굴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이병도 박사가 몽촌토성을 한성백제의 도성일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풍남토성을 사성(蛇城)취급했기 때문에 몽촌토성의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궁궐지와 큰 건물지 등을 발굴하지 못해 그 주장을 뒷받침하지는 못했다. 그 후 10여년이 지난 1997년, 이형구 박사에 의해 풍납토성의 속살이 드러나면서 몽촌토성은 오히려 풍납토성의 보조성일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한동안 학자들의 편견으로 역사의 오류를 뒤집어 쓰고 있던 몽촌토성이 이제는 올림픽 경기장과 어울린 체육공원으로 바뀌어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왔으나 문제가 많다. 공원과 사적지를 따로 구분할 수도 없는 애매한 시설이 되고 말았다. 공원을 산책하다보면 어느 것이 사적이고 성벽인지 구분하기도 어렵고 안내판도 없다. 그저 언덕 같은 구릉의 둘레길을 걷다보면 그것이 성벽이고 터진 길은 성문이었을 것이라는 짐작만 가능하다. 동북방면을 휘돌아 가는 성내천이 해자역할을 하지만 천(川)인지 해자인지 모호하고 공원 안의 호수는 분수대를 만들기 위해 조성한 인공호수인지 해자를 넓힌 것인지 전혀 안내가 없다. 그래서 답사객은 사적지로서 역사보다는 분수대의 물줄기와 주변의 풍광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그것이 오늘의 몽촌토성이다.
몽촌토성은 그 태생적 아픔을 안고 공원으로 다시 태어났지만 그래도 온전히 남아있는 유적이 있다. 도시의 건축물과 아파트들이 즐비한 도심 한가운데 역사를 고스란히 지키고 있는 유적이라서 반가움이 더 크다. 동향으로 자리한 이 유적은 멀리 남한산성을 바라보며 병자호란의 아픔을 새기는 듯 산책하는 인파 속에서도 엄숙하다. 말없이 역사를 안고 누워있는 유적, 그것은 다름아닌 김구의 묘다. 백여 미터 아래에 자리한 신도비는 주인공의 인품과 가문을 말해주는 영조시대의 조영물이다. 몽촌토성에서 사적지다운 면모를 볼 수 있는 곳이다.
김구(金構1649~1704)는 조선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문신이다. 사후 충헌이란 시호를 받았기 때문에 신도비는 "충헌김공신도비”다. 청풍김씨 시조 김대유의 후손으로 부친은 관찰사를 지낸 징(澄), 아들 김재로(金在魯)와 손자 김치인(金致仁)이 나란히 영의정을 지냈다. 즉 3대가 정승을 지냈고 2대가 영의정을 지낸 명문가다. 그의 비문은 영의정 이의현(李宜顯)이 짓고, 글씨는 좌의정이자 둘째 사위인 서명균(徐命均)이 썼으며, 비머리의 전액(篆額)은 영의정 유척기(兪拓基)가 썼다.
한 개인의 신도비에 삼정승이 동원된 것만도 대단한데 명필가로 알려진 서명균과 유척기의 명필을 감상할 수 있으니 그 가치는 그로 인해 더욱 빛난다. 그래서 김구의 신도비는 금석문을 연구하는 사람이나 서예가들에게 더없이 좋은 자료다. 신도비의 지붕돌(옥개석)은 용과 봉황을 올리고 암막새, 수막새를 올려 기와지붕을 연상케 한다. 흠이라면 받침돌이 거북이 모양의 귀부(龜趺)가 아니라 네모난 방형(方形)의 큰 돌이라는 점이다. 이는 숙종이후 나타난 특징으로 귀부의 화려함이 사라진 대신 방형 받침돌의 크기로 비의 품격을 나타내려 한 당시의 양식이다. 김구 신도비의 밑받침돌이 큰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김구의 묘와 인천 남동구 운영동에 있는 아들 김재로의 묘, 시흥 안현동에 있는 손자 김치인의 묘를 보면 특이한 특징이 보인다. 묘의 양식이 모두 문인석 대신 석양(石羊)을 세웠다는 점이다. 묘의 양쪽에 망주석을 세우고 그 하단에 문인석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 양식인데 김구와 아들, 손자의 묘는 문인석 대신에 석양을 세웠다.
왕릉은 석호(石虎) 2쌍, 석양(石羊) 2쌍이 능을 호위한다. 석호는 능을 지키는 수호물로써 땅 위의 잡신이 접근하는 것을 막고, 석양은 사악한 기운의 접근은 물론 땅 속의 잡신을 막는다. 하지만 일반인의 묘에는 석호나 석양이 없고 망주석과 문인석만 세운다. 그런데 그들의 묘는 똑같이 석양을 세웠다. 그것도 고환까지 선명하게 새긴 수컷이며 배 밑에는 풀을 새겨 놓았다. 그 풀은 양이 뜯어먹고 살아야 할 먹이다. 그 먹이를 먹고 살아있어야 잡신의 접근을 막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구는 백범 김구를 연상케 하는 강직한 성품이면서도 정이 많은 인물이다. 김구의 묘지를 답사할 때마다 경의를 표하는 것은 그의 따스한 인품 때문이다. 숙종 8년(1682)에 춘당대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문장력을 인정받은 그가 사헌부와 사간원에 있을 때 노론 소론의 당쟁을 완화하기 위해 1만자에 가까운 시무소(時務疏)를 올렸다. 당쟁의 중심에 있을 법한 인물이 오히려 심한 대립의 조정자로서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더구나 영월에서 억울하게 죽은 노산군 복위를 주청하여 단종으로 복위케 하고, 더불어 단종 비 송씨는 정순왕후로, 묘호는 사릉(思陵)으로 추봉케 했다. 1703년 우의정이 되었지만 그의 인품은 영의정이라 해도 부족할 만큼 후덕하여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전범으로 삼아야 할 인물상이다.
올림픽으로 떠들썩하던 시절에 김구의 묘를 공원 밖 다른 곳으로 옮겼다면 지금의 올림픽 공원은 박제된 사적지처럼 삭막할 것이다. 김구의 묘와 신도비가 있기 때문에 몽촌토성의 가치가 살아나고 산책에 나선 사람에게도 역사의 향기에 느낄 수 있게 한다. 그의 신도비 앞에서 몇 명의 답사객이 모여 역사의 한 장면을 이야기하는 모습은 문화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 신도비는 단순한 돌덩이가 아니라 역사를 안고 있는 문화재로서 백제와 조선을 잇는 고리역할을 한다. 문화재는 그런 의미가 있고 지혜로운 후손에게 역사를 읽을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다.
몽촌, 꿈마을 몽촌. 그 몽촌마을에 있는 토성에서 나는 꿈이 있는 지명으로서 ‘몽(夢)’자를 추출 했고 전국에 망(望)자를 사용한 지명은 많으나 몽(夢)자를 사용한 지명은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런지 몽촌토성은 그 지명만으로도 다정하다. 몽촌토성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단순히 공원으로서 건강 증진을 위한 곳이라는 생각보다는 한성백제 시대에 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중요한 시설이라는 점과 따스한 인품을 지닌 김구라는 인물을 만날 수 있는 역사의 현장임을 알고 답사했으면 좋겠다.
2호선 잠실역 10번출구로 나오면 10분거리에 있다. 8호선은 몽촌토성역에서 내리면 가깝다. 잠실역에서 환승이 가능하다. 가까이에 있는 풍납토성과 방이동 백제고분, 석촌동 적석총, 석촌호수(동호)의 북쪽으로 옮긴 삼전도비, 암사동 선사유적지까지 포함하면 하루가 빠듯하다. 아이들 교육을 위한 소풍과 가족 나들이로도 만족다.
강기옥
한국문인협회회원. 국제펜글럽회원.
내외일보논설위원. 서초문인협회부회장.
월간 아트앤씨 편집주간. 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첫댓글 몽촌토성, 김구의 이야기, 소상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번 방문하여 역사체취를 느껴보겠습니다.
역사가 살이있는 지명이 있는곳에 설명 안내 있었으면 좋으련만.... 감사 합니다
감사히 읽고, 많이 배워 갑니다.^^**
저도 올림픽공원을 가봤습니다만 이곳이 무슨 그 옛날의 백제의 도성이란 말인가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산책하고 자전거 타고, 뛰어놀고 운동하고 하는 그런 곳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서울시에서 신경써서 백제의 도성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