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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17년 6월 1일로 동유럽 자유여행을 출발한지 여드레가 되는 날이다.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말수가 줄어들었다.
도전에 적응해가고 있기때문일 것이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종교개혁의 성지 타보르(Tabor)로 이동했다.
프라하 시에서 E50번 고속도로를 따라 이동하다가 다시 3번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태양의 열기가 활활 타오르고 있다.
우리나라의 한 여름 과도 흡사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태양의 열기가 덩달아서 상승하고 있다.
갈수록 몸을 주체할 수 없는 것은 더위때문인 것 같다.
열기는 쉽게 수그리지 않을 것 같다.
렌트 카 속도 무더위는 마찬가지다.
타보르(Tabor)는 체코 남보헤미아 주의 도시로 프라하 시와 체스키 크롬로프(Česky Krumlov) 시 사이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도시 이름은 체코어로 “진지"라는 뜻이다.
진지는 부대를 배치해 둔 병영을 말한다.
얀 후스(Jan Hus)는 체코의 신학 자이며 종교 개혁가다.
1400년부터 대학교에서 교양 학부와 신학 부의 교수로 재직하다가 로마 가톨릭 교회 사제가 되었다.
대학교 재직 중 라틴어로 되어있는 성경을 체코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교회의 재산권을 박탈하여 청빈한 교회를 만들어야한다고도 주장했다.
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공개적으로 비난 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프라하 대학 교수들 뿐만 아니라 왕실이나 일부 귀족들, 그리고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교황의 권위는 절대적 이었다.
왕도 교황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일개 대학교수가 교황에게 반박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교황청은 그의 주장을 교황 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당시 로마 교회는 교리문제로 격론 중에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얀 후스(Jan Hus)의 주장은 묵인될 수밖에 없었다.
1410년 피사종교회의가 개최되었다.
이곳에서 알렉산더 5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알렉산더 5세는 얀 후스에게 그 동안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얀 후스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후임의 교황 들도 선대 교황 들처럼 얀 후스에게 반 가톨릭적인 언행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교황청은 얀 후스를 로마로 소환시켰다.
그의 저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단사상을 철회 하라고 요구하기위해서다.
얀 후스는 이것마저도 거절했다.
얀 후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 왕인 지기스문트황제의 안전통행증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15년 콘스탄츠교외에서 화형에 처해 지고 말았다.
이것은 체코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후 후스파들은 타보르에 집결했다.
교황청에 저항하기위해서다.
조그마한 시골마을에 촛불이 켜지기시작했다.
촛불은 광장을 가득 메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파는 늘어났다.
기도소리도 울려퍼졌다.
누가 지시한 것도 아니었다.
촛불행사는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저항은 10년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체스키크롬로프 성문
촛불행사로 인해 무언의 압력이 엄습해왔다.
가톨릭교측의 압력이었다.
어떻게든 단결해서 위기를 모면해야 했다.
그래서 마을 주변에 방어선을 구축하기시작했다.
그리고 결사대를 조직했다.
결사대의 지도자는 얀 지스카 장군이었다.
얀 지스카 장군의 지휘하에 얀 후스 지지파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저항군은 농민 들로 구성된 오합지졸이었다.
결속력이 흔들리고 내부로부터 와해되기시작했다.
이 순간을 가톨릭교측은 기다리고 있었다.
희망이 사라지고 있는 듯했다.
결국 가톨릭교 측 군대는 직업군인이다.
체스키크롬로프 성에 도착하다.
얀 후스 지지파가 밀리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얀 후스파의 저항이 패배 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얀 후스의 사상이 타보르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때문이다.
지금도 이곳 사람들은 교황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던 얀 후스를 열렬히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는 교황의 권위가 절대적인 시기다.
얀 후스 지지파가 성공할 수 없는 이유다.
얀 지스카 장군을 포함해서 많은 후스 지지파 들이 교황청에 반기를 들었지만 그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그러나 얀 후스의 사상은 이후 종교개혁에 밑거름이 되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이 있다.
중세시대 농민은 영주나 기사에게 예속되었다.
노예 보다는 신분이 자유로왔으나 영주나 기사에게 아부를 해야 하였다.
토지를 임대받기위해서다.
토지를 임대받지 못하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혜성과 같이 등장한 사람이 얀 후스다.
그는 생활이 쪼들리는 농민을 늘 대변했다.
이것이 농민들이 얀 후스를 지지한 이유다.
이러한 얀 후스를 교회측은 화형을 시켜버렸다.
농민들이 무장하고 저항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직업군인이 아니다.
가톨릭교는 왕을 통제했다.
왕은 직업군인을 거느리고 있었다.
교황의 명령을 수행했던 왕은 군대를 파견했다.
농민 들로 구성된 저항군은 무너지기시작했다.
농민들의 꿈도 사라지기시작했다.
도시의 성도 파괴도기시작했다.
이후 타보르는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하로 들어갔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는 타보르에 자치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1452년 타보르는 또다시 보헤미안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타보르(Tabor)는 가톨릭교의 개혁을 주장하며 싸운 후스 운동의 중심지다.
도시는 얀 후스의 추종자인 얀 지슈카 장군에 의해 건설 되었다.
타보르 시는 성채로 둘러싸여 있었다.
후스파 지지자들이 쌓은 성이다.
그래서 진지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30년 전쟁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파괴되고 말았다.
건설 당시에 세워진 베히네문이 당시 성채를 말해주고 있었다.
얀 후스는 보헤미아 남부 후시네츠주 타보르에서 출생했다.
프라하대학교에서 신학과 문학을 배우고, 1398년 프라하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신학을 강의했다.
1401년 철학부장, 1402∼1403년 학장, 1409년 총장직 등을 역임했다.
프라하대학교 학장 시절 베들레헴 성당 주임신부로 부임받아 일반 시민들 과도 얼굴을 읽혔다.
그는 옥스퍼드대학교 교수인 존 위클리프의 학설을 수용했다.
그것이 예정 설이다.
예정 설에 “인간은 누구나 구제받을 수 있고 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라고 표기돼 있다.
또한 성서만이 유일한 권위라고 했다.
얀 후스는 체코 민족주의 지도자로서 보헤미아의 독일화 정책에도 반대했다.
교회의 세속화와 성직매매도 반대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교황청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얀 후스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교수인 위클리프와 함께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위클리프는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하고 모교 신학교수를 거쳐 국왕 에드워드3세의 궁정 사제로 서임받았다.
신앙과 구원에 대한 최고의 권위는 성서에 있다고 주장하고 반 교황정책에도 선봉에 섰다.
1381년에 영국에서 발생한 W.타일러 난은 그의 설교로 기인했다.
그러나 그의 농민지지는 대학당국과 귀족의 반발을 샀다.
결국 이들로부터 외면받게 된 것이다.
대학교 동료들과 귀족의 지지를 잃은 위클리프는 실의에 빠지고 말았다.
라타워스에서 명 설교로 한때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으나 재기는 무위로 돌아갔다.
그후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 되면서 그의 유해는 저서와 함께 불태워 지고 말았다.
한 시대를 풍미 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사상과 꿈은 물거품으로 돌아간듯 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을 계승한 사람이 있었다.
얀 후스다.
옥스퍼드대학교 교수인 위클리프와 보헤미아 출신 얀 후스는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 등재된 인물들이다.
종교개혁을 학생들에게 설명했던 기억이 생각났다.
그래서 얀 후스의 출생지를 그냥 지나칠 수없었다.
그의 출생지가 타보르다.
타보르가 가까워져가고 있다.
도로가는 산과 구릉만 이어지고 있다.
목가 적이고 평화로왔다.
베네쇼프라는 도시의 간판이 보였다.
베네쇼프(Benešov)는 체코 중앙보헤미아 주에 위치한 도시다.
프라하에서 남동쪽으로 4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3번 고속도로에서 다시 603번 지방국도로 이동했다.
보이는 것은 농촌 풍경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체력이 떨어져 나락에서 뒹굴고있었기때문이다.
“나호트” 라는 시골 마을이 나타났다.
주택이 우리나라 하고는 달랐다.
이국 적이며 낯설었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호수가 왼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코신스키 호수다.
호수 앞 도로가에 주차장이 있었다.
주차를 하고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메뉴는 다양하지 않았으나 와인은 잘 분류되어 있었다.
이곳이 타보르다.
타보르시 얀 지스카 광장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뒤엉켜있었다.
얀 지스카 광장 까지가 먼 거리가 아닌것 같은데도 골목길 앞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어느 골목길로 들어서야 하는지 막막 했기때문이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갔다.
여기서 망서리고 있는데 현지 주민이 다가와 친절하게 길을 안내했다.
세상은 착한사람도 많았다.
그 중의 한 사람이 타보르 시민이었다.
구세주같은 생각이 들었다.
지스카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은 굉장히 넓었다.
광장 중앙에 얀 지스카 장군의 동상이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른 손에 칼을 들고 저항 군을 지휘하는 모습이었다.
그의 얼굴 표정과 지휘하는 동작으로 보아 상황이 절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얀 지스카 장군은 강한 의지를 소유한 인물이다.
그리고 임기웅변 에도 뒤어났다.
그러한 그가 당황하고 있었다.
광장에 집결한 군중 들도 덩달아 웅성거리기시작했다.
가톨릭군대가 파죽지세로 공격해왔다.
방어선이 무너지기시작했다.
얀 지스카 장군의 호령은 절규에 가까왔다.
방어가 무위로 돌아갔기때문이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것은 곧바로 비탄으로 변했다.
현실의 장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얀 후스 지지파들은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교회의 개선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광장에서 사방을 돌아보았다.
“진지” 라는 말이 빈말이 아닐 듯 싶었다.
호수와 강이 시가지를 감싸고 있었고 주민들 또한 얀 후스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이것이라면 가톨릭군대를 충분히 방어할 수 있었다.
그래서 15년동안이나 적군과 대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광장을 중심으로 원형의 탑과 시청사 그리고 고딕 양식의 교회가 있었다.
박물관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유물은 발견할 수 없었다.
모두가 파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 이었다.
우연히 박물간에 위치한 지하터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암벽을 뚫어 2중·3중으로 개설한 터널이었다.
가톨릭 군대의 침공에 대비한 것이다.
터널을 제외하고는 당시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당시 흔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그러나 자연 풍경은 압권이었다.
왕실정원에서
타보르(Tabor)는 우리나라의 면단위 정도의 소 도시다.
마을 앞으로 코신스키 호수가 있었다.
그리고 옆으로 흐르는 강물이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가톨릭군대가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이유다.
강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풍경은 절경이었다.
탄성을 연발했다.
얀 후스의 흔적을 찾아보기위해 구시가지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얀 후스의 자취를 찾아볼 수없었다.
오래 세월이 지난 탓일 것이다.
다시 체스키 크롬로프(Cesky Krumlov) 이동했다.
3번 고속도로로 진입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체스케부데요비체 이정표가 보였다.
체스케부데요비체는 체코 남부에 위치한 도시다.
남보헤미아 주의 주도 이자 남 보헤미아 주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현재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교 좌가 있는 곳이다.
체스케부데요비체 시를 관통하여 39번 지방국도로 진입하고 있다.
태양의 열기가 작열하는 기후에도 불구하고 렌트 카는 계속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체스키 크롬로프가 점점 가꺼워지고 있다.
체스키 크롬로프는 프라하에서 남서쪽으로 200km 떨어진 오스트리아 국경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체스키 크롬로프는 S자로 완만하게 흐르는 블타바 강변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붉은 지붕과 둥근 탑이 어우러져 있는 도시는 동화속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낙후된 도시에 불과했던 체스키 크룸로프가 1992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되면서 세상의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
300여 개 이상의 건축물이 세계문화 유적으로 등록 되어 있으니 도시 전체가 유적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체코에서 체스키 크룸로프 성은 프라하 성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성이다.
성은 영주가 살던 궁전과 예배당, 조폐 소, 바로크식 극장과 정원이 재현되어 있었다.
구 시가지의 중심지는 스보르노스티다.
중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으로 중앙광장 이라고도 부른다.
체스키 크룸로프 구시가지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혀있다.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곳이다.
이 좁은 길에도 아기자기한 수공예품을 파는 상점과 카페가 늘어서 있다.
해마다 6월이 되면 이곳에서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옷으로 갈아입고 중앙광에서 공연을 하는 중세시대 사람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체스키 크롬로프에 도착하기전까지만 해도 이곳 방문이 회의 적이었다.
그러나 체스키 크롬로프에 도착 하고서 부터 생각이 반전되었다.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기때문이다.
체스키 크롬로프 성으로 이동하고 있다.
볼타바 강가 높은 언덕위에 체스키 크롬로프 성이 사뿐히 앉아있었다.
멀리서도 바라볼 수 있는 원형의 흐라테크타워 전망탑이 성의 기준점이 되고 있었다.
성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성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평범한 성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아치형 성문이 나타났다.
그리고 매표소도 보였다.
입장권을 구입한 후 체스키 크롬로프 성으로 들어갔다.
성 아래에 있는 건물의 붉은 지붕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주민들이 거주하는 주택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천상 에서나 감상할 수 있는 곳이었다.
탄성이 연발했다.
호흡을 멈추게 했다.
압권이었다.
무아지경 속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붉은 색깔이 매혹적이고 현란했다.
모양도 다양했다.
흔히 볼 수있는 광경은 아니었다.
천상의 어느 곳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는 없었다.
S자 모양의 볼타바 강 절벽위에 위치한 체스키 크롬로프 성은 길게 늘어서 있었다.
볼타바 강(Vltava River)과 어우러지고 스보르노스티 광장(중앙광장)을 가슴으로 품고 있었다.
이곳은 분명 천국이었다.
성을 넘어 계속 올라갔다.
이곳에 왕실 정원이 있었다.
정원은 각가지 화초가 만발하고 있었다.
정원은 삼각형 사각형 마름모꼴 등 여러가자 모양으로 되어있었다.
일사불란하고 흩으러짐이 없었다.
정형 화되어 있었다.
조경사의 정성어린 손길이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
아름드리 수목은 세월을 말해주는 듯 독야청청 하고 있었다.
화초와 수목은 사람들의 혼을 흔들고 있었다.
다시 구 시가지로 이동했다.
이스라엘 시나고가
이발사의 다리를 걸어가고 있다.
다리 아래로 파란 강물이 넘실거렸다.
다리위에서 흐라테크타워 전망탑과 수도원 첨탑은 바라보았다.
첨탑은 날카로운 송곳처럼 하늘로 치솟고있었다.
하느님 곁으로 가기위해서일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추천 하라고 한다면 기꺼이 이곳을 강추 하고 싶다.
다시 스보르노스티 광장(중앙광장)으로 이동했다.
이곳에 시청사와 분수대가 있었다.
그리고 광장 가장자리에 선물가게와 카페가 줄 지어 있었다.
혹자는 밴치에 앉아 아름다운 경치를 찬미하고 있었다.
크롬로프팬션 숙소
광장 바로 아래는 성 비트성당이 있었다.
체코 어디를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성당이다.
그러나 유독 이곳 성 비트성당이 가슴을 설래게 했다.
성호를 그은 뒤 다시 유대인 회당인 시나고그(Synagogue)로 이동했다.
시나고그(Synagogue)를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동안 방황했다.
현지 주민에게 물어보아도 모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회당이 있을 법한 곳을 모두 살펴보았다.
그러나 쉽게 시나고그(Synagogue)를 찾을 수 없었다.
숙소가 있는 마을
다시 구시가지로 이동했다.
그런데 도로가에 시나고그(Synagogue) 간판이 보였다.
화살표가 표시되어 있었다.
화살표 방향을 따라 걸어갔다.
주택이 보였다.
시나고그(Synagogue)였다.
시나고그(Synagogue)는 유대인들의 집회장소다.
메소포타미아지방을 최초로 통일한 나라가 앗시리아 다.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숙소 사장
그러나 앗시리아 는 단명했다.
앗시리아 가 멸망하고 이 지역은 4등분되었다.
그 나라거 메디아, 리디아, 신 바빌로니아, 이집트 다.
유다는 그 중 신 바빌로니아의 침공을 받았다.
이때 유다는 멸망하고 말았다.
유다 인도 앗시리아의 포로로 붓잡혀갔다.
포로생활을 하는 도중에 또 세상이 바뀌었다.
페르시아가 이 지역을 다시 통일 한 것이다.
유다 인은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고국은 없어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유다 인은 세계 각처로 유랑의 길을 걸었다.
이것이 널리 알려진 디아스포라 다.
체스키크롬로프 관광지
유대인은 나라를 잃은 설움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유대인은 그들이 살고 있는 곳에 회당을 지었다.
이것이 시나고그(Synagogue)의 유래다.
그러나 시나고그(Synagogue)를 찾기위해 투자한 노력만큼 감명을 주지못했다.
날씨가 어두워지기시작했다.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래서 도착한 곳이 크롬로프 펜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