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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공의 연금술사 원문보기 글쓴이: 연금술사
영혼을 지휘하는 리더십
- 마셜, 맥아더, 아이젠하워, 패튼 -
에드거 F. 퍼이어 지음 / 이민수ㆍ최정민 옮김
책세상 / 2005년 4월 / 596쪽 / 25,000원
초창기 : 사관생도 시절의 리더십
조지 S. 패튼
패튼 집안에는 노처녀 고모가 한 사람 있었는데, 어린 시절 패튼의 고모는 매일 그에게 책을 읽어주곤 했다. 그녀가 읽어주던 책은 대개 유명한 모험 소설들이었다. 그런 모험담들과 목장의 야외 생활 외에도 대대로 무관이었던 집안 내력도 어린 패튼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린 패튼은 집안 어른들이 말해주는 생생한 전쟁터 이야기를 항상 열심히 듣곤 했다. 군인이 되고자 하는 모든 미국의 청년에게 웨스트포인트의 육군사관학교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어린 패튼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육군사관학교 신입생이 된 패튼은, 훈련 규정 과목에서는 전체 2등을 했지만 수학에서 낙제를 면하지 못했다. 그가 그렇게 훈련 규정에 몰두했던 것은 규정에 완벽한 것이 군인으로서 큰 의미를 지니고, 앞으로 군인으로서의 생활과 생도로서 높은 직책을 얻는 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도 시절 패튼이 보였던 군인 기질은 급우들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플레처 대령은 1962년 11월 28일자의 편지에서 이렇게 밝혔다. "아직도 나는 그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큰 키에 반듯한 체격, 딱 맞는 제복에 티 한 점 없는 장식을 달고 있는 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는 외모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빈틈없는 군인이었습니다." 또 다른 이는 "그는 전체적인 외모, 행동, 말투 그리고 그가 했던 모든 일, 그중에서도 특히 군사적인 일에 대해 보여준 강한 열의는 생도 시절 많은 이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라고 말한다. 패튼의 교우 관계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그다지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임무를 수행할 때 너무 위압적이거나 거칠게 했기 때문이 아니라, 고지식하리만치 임무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그는 약삭빠른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에게 지적당해 보고 된 생도는 몇 시간 동안 방 안에서 근신을 해야 했기에 그를 좋게 생각할 리 없었다. 또한 그는 보통은 대충 봐주고 넘어가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호감을 얻기 힘들었다.
그는 언제나 활동적이었지만 육군사관학교의 모든 교육 과정을 다 즐기지는 않았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공부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훌륭한 군인이 되기 위해 필수적이라 생각한 과정과 폭넓은 독서에는 시간을 아끼지 않았고, 체육 활동에도 지독하게 열중했다. 그는 모든 일에서 실천적인 생도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자주 띄었다. 그는 항상 자기 책임을 완수했고, 어느 누가 일을 맡겨도 안심할 수 있게 처리했다. 어떠한 역경도 어려서부터 군인이 되고자 결심한 그를 좌절시킬 수 없었다. 그는 목표를 높게 세우고 시종일관 목표 달성을 위해 열심히 나아가는 생도였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성장 배경이나 군인이 되려고 한 동기에서 패튼과 가장 대조적인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바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패튼과는 달리 어린 시절에 사관학교나 군인이란 직업에 흥미를 갖고 있지도 않았고, 별다른 지식도 없었다. 그런 그가 사관학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해군사관학교 입학을 꿈꾸던 스웨덴 출신의 친구 해즐릿 때문이었다. 아이젠하워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에 진학할 만한 형편이 되지 못해서, 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곧 무상으로 교육받을 수 있고, 졸업 후의 진로까지 보장된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고, 입학시험에서 주 전체 수석을 했음에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입학이 좌절되었다. 결국 그는 친분이 있던 한 상원의원의 추천으로 연령 제한에 걸리지 않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아이젠하워는 패튼과는 대조적으로 육군사관학교의 군사 훈련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듯하다. 생도의 군사 임무 수행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 중 하나는 생도 계급인데, 그는 몇 가지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계급을 따냈지만 제대로 유지하지를 못했다. 그는 패튼과 달리 생도 계급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이젠하워는 모범생도와도 거리가 멀었다. 성적이야 어찌되었건 아이젠하워는 인기 있는 생도였다. 그는 외향적이었고, 사람들과 잘 어울렸으며, 모든 사람과 친하게 지냈다. 잘생긴 얼굴에다 호감 가는 미소의 아이젠하워는 항시 쾌활한 모습을 보였지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사려 깊은 행동으로 또 다른 면모를 보였고, 친구들을 돕는 데도 빠지지 않았다.
군 생활 초반의 아이젠하워의 행적을 깊이 살펴보는 일은 그가 리더십을 성공적으로 발휘할 수 있었던 배경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그는 모든 사람의 의견에 생각 없이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생도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사실 군 생활을 할 때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으면 인기를 얻기 힘들다. 하지만 수많은 인터뷰와 편지들을 통해 우리는 그가 설득력이 있었으나, 결코 따지기 좋아하지 않았고, 항상 질문의 양면을 살피는 긍정적인 성격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 동기생은 편지에 "그는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였으며, 원칙에 충실하고자 했지만 결코 자신의 신념을 다른 이들에게 강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 그가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동기는 '성실성'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라고 썼다. 그는 어떤 주제의 토론에서건 결코 남에게 강제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표현하고 변호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의 인기 비결은 그러한 외향적이며 쾌활한 성격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글러스 D. 맥아더
더글러스 맥아더의 아버지 아서 맥아더는 남북전쟁과 스페인전쟁에서 큰 명성을 떨친 장교였다. 어린 시절 그는, 전장에서의 뛰어난 지휘관이자 군인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일하는 부친의 가르침 속에서 점차 아버지를 닮아갔다. 그러나 그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간에, 이름난 육군 소장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배경이 생도 생활에 걸림돌이 되었다. 당시 필리핀에서 세운 공으로 큰 명성을 떨치고 있던 아버지로 인해 그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몇몇 철없는 상급생도들은 아버지의 후광을 입고 있다는 이유로 그를 괴롭혔다. 신입생도 시절 그와 같은 막사에서 생활했던 프레더릭 H. 커닝엄 생도는 맥아더가 당했던 일에 혐오감을 느껴 자퇴를 했을 정도였다. 커닝엄이 자퇴한 직후,〈뉴욕 선〉지에는 웨스트포인트에서 일어나는 상급생도의 하급생도에 대한 가혹 행위를 고발하는 편지가 공개되었다. 1899년 여름, 가혹행위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지만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처벌된 상급생은 아무도 없었다. 장군의 아들에게 그것은 쓰라린 경험이었지만, 그는 가혹 행위까지도 참고 이겨낼 수 있는 근성이 있었다. 요령을 부리거나 동정을 구하지도 않았으며, 아버지의 후광을 입으려고도 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히 해야 하는 힘든 훈련이 과장 보도되었다면서 분개했다. 맥아더는 가혹 행위를 신입생도의 훈련 과정 정도로 여기고 끝까지 참으며 이겨냈다.
생도로서 맥아더의 경력은 한마디로 '화려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깨지지 않은 사관학교의 최고 성적을 기록하며, 수석 졸업의 영예를 안았다. 연대장 생도의 계급으로 수석 졸업의 영예까지 차지한 생도는 웨스트포인트 100년 역사상 그를 포함해 오직 세 명뿐이었다. 그가 성공적으로 사관학교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총명함과 책임감, 결단력, 성실성과 최고가 되고자 하는 열정 때문이었다. 학업에 집요하게 몰두했지만, 또한 책벌레라는 별명이 붙지 않을 정도로 군사 분야에도 뛰어났으며 운동에도 열성적이었다. 또한 그는 근무 중에는 과묵했지만, 그 이면에는 따뜻하고 친근한 인간적인 모습이 숨어 있었다. 이처럼 다방면에서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그 능력들을 균형있게 조율하며 모든 일에 열의를 갖고 임했던 그가 머지않아 큰 성공을 거두리라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조지 C. 마셜
대학에 진학할 나이가 되자 조지 C. 마셜은 큰 형을 따라 버지니아 주립사관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입학할 당시 버지니아 주립사관학교의 생도 생활은 엄격한 스파르타식이었는데, 요즘의 생활에 비추어보면 아주 원시적이었다. 융통성 없는 엄격한 규율로 인해 1897년 입학했던 100명 이상의 생도들 중에서 오직 34명만이 1901년 6월 졸업에 성공했다. 생쥐라고 불리는 신입생들은 선배들이 가하는 참혹한 고통에 시달렸다. 후에 마셜은 이렇게 말했다. "생도 생활의 일상은 금방 자연스럽게 익숙해져 갔습니다. 되풀이되는 일상에 대해서 전 다른 수많은 아이들보다 더욱 철학적이었죠. … 그때 당한 일도 늘 있는 일들과 같은 하나의 사건일 뿐이었고, 제가 해야 할 유일한 것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쉽게쉽게 그것을 받아넘기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당시 저는 그렇게 하려 했을 뿐이었고, 스스로 판단하기에 전 상당히 잘 해냈던 것 같습니다."
군대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하고자 하는 마셜의 야망은 생도 생활 초기부터 나타났다. 퍼레이드를 할 때면, 구두를 거울처럼 번쩍거리게 닦아놓는 바람에 훈육관에게서 에나멜 가죽구두를 신었다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의 소총은 진급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생도에게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것이었다. 그는 한 부사관에게 2달러를 주고 총 개머리판을 번쩍번쩍 빛나게 닦아놓도록 했다. 한편 그의 군사 훈련 성적에는 어느 누구도 필적할 수 없었다. 그는 4년 내내 한 번의 벌점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마셜이 모든 일에서 그처럼 모범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연대장 생도이면서도 종종 복귀 시간이나 식사 집합 시간 이후에도 허가 없이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곤 했다.
마셜은 생도 시절 군사 교육 부분에서는 뛰어났으나, 일반 학업 성적에서는 중간 정도였다. 당시 버지니아 주립사관학교의 교육과정은 일반학과 과목보다는 군사 훈련에 중점을 두고 있어서 학과 교육 때문에 군사 훈련이 방해받지 않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그가 일찌감치 학과 과목을 열심히 공부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2학년이 되자 그는 미식축구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라인맨이라는 중요한 포지션을 맡게 되었는데, 왜소한 몸집으로 인해 밀리는 부분은 그의 결단력과 배짱으로 메웠다. 그러나 당시 버지니아 주립사관학교에서 미식축구를 하는 것은 상당히 괴로운 일이었다. 연습은 오직 하루 중 유일한 자유 시간인 세시부터 네시 사이에만 있었기 때문에, 다른 생도는 모두 쉬는 그 시간이 다가기 전에 그는 연습복을 착용하고, 연습하고, 씻고, 정비하는 모든 일을 마쳐야 했다. 그리고 그 후에 그는 다른 생도들과 같이 한 시간 동안 제식훈련을 해야 했다. 그러나 운동을 뒤늦게 시작했음에도 그는 뛰어난 미식축구 선수로 발전했다. 그 당시 버지니아 주립사관학교의 미식축구 경기에 대해 어느 기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수비벽을 뚫어내는 마셜의 태클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버지니아 대학의 유명한 한 선수는 마셜이 남부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태클 선수라고 말했다."
학창시절의 비교
후에 지휘관으로서 큰 업적을 남긴 이 네 명의 생도 시절 생활과 그 속에 나타난 리더십을 비교해 볼 때, 몇 가지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계급 성취도 면에서 볼 때, 마셜과 맥아더는 매년 생도로서 획득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계급을 따냈고, 패튼 역시 졸업할 때까지 그가 제일 선망하던 부관생도의 계급을 유지했다. 아이젠하워는 세 번 계급을 따내고도 두 번이나 박탈당했지만, 유일하게 생도들이 직접 선출하는 응원 단장이 되었다. 비록 군사 훈련은 다소 등한시했지만, 훈육관들이나 동기생들이 그를 지도자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마셜, 맥아더, 패튼은 어린 시절부터 군인이 되겠다는 꿈을 지니고 있었고, 그 결심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이들은 군인으로서 빼어남은 물론 성실성까지 두루 겸비하고 있었고, 타고난 총명함과 재능을 지닌 맥아더조차도 태만한 법이 없었다. 이 세 지휘관들과 조금 다르게 아이젠하워는 처음에는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하려 했다가 더 좋은 교육 혜택의 기회 때문에 웨스트포인트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교육 혜택 때문에 그는 미 육군 장교로 임관되어 복무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졸업 후의 복무 기간 중 그가 보여준 헌신적인 모습은 단순한 의무 이행을 넘어선 것이었다.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은 단지 전투에 승리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전쟁의 위협 속에서 국민들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도록 키워졌다.
웨스트포인트의 교훈은 '의무, 명예, 조국'이다. 육군사관학교의 생도 생활은 바로 이 세 단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웨스트포인트에서 가치 있는 생도 생활을 경험한 이가 '의무, 명예, 조국'이라는 세 단어를 말할 때, 그것은 다른 어떤 직업의 사람들보다도 군인에게 더 큰 의미를 지닌다. 모든 군인은 '의무, 명예, 조국'이라는 세 단어가 그의 삶에 제시하는 바를 외면할 수 없다. 그들에게 명예보다 더 훌륭한 덕목, 조국보다 더 큰 전율을 느끼게 하는 것, 의무보다도 더욱 고귀한 마음은 있을 수 없다. '의무, 명예, 조국'. 이것은 그저 생도 시절을 마감하며 잊혀지는 젊은 시절 한때의 이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더 넓은 세계에서 경험을 쌓고, 전쟁을 겪어나가며 군인으로서의 삶을 계속할 때 그들의 가슴에 더욱 깊이 새겨지는 것이다.
박애-인내-헌신 : 조지 C. 마셜 장군의 리더십
어떤 장교들은 지휘관에 적격이고, 또 어떤 장교들은 참모장교의 자질만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지휘관의 직책에는 특권이 따르기 마련이다. 부대가 임무를 잘 수행했을 경우에는 지휘관의 명예도 높아지지만, 임무에 실패하거나 일이 잘못될 경우에는 문책 등의 달갑지 않은 결과가 기다린다. 한편 부대를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세부적이고 일상적인 행정 업무를 비롯해서 지휘관이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정보수집 등은 모두 참모장교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그럼에도 참모장교는 자신이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인정받기 힘들다. 참모장교에게는 고되고 단조로운 업무만 되풀이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마셜 장군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미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하면서 참모장교로서의 역량을 널리 인정받고 있었다. 참모장교로서 마셜은 단연 뛰어났다.
포트 베닝 보병학교 시절 : 1927~1932
포트 베닝 보병학교 부교장으로서 부임 기간은 마셜 장군의 군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 동시에 미 육군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가 장교 육성에 기여한 바는 미국의 국방력에 폭넓고 지속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는 군인을 전문 직업으로 인식하도록 가르쳤고, 고되고 힘든 일도 감수할 수 있는 인내심을 가진 훌륭하고 유능한 장교가 되도록 독려했다. 후에 2차 세계대전에서 큰 공을 세운 장교들 중에는 마셜의 참모였거나, 그가 포트 베닝에 있을 때 보병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이들이 많다. 물론 뛰어난 장교였기에 포트 베닝에 선택되기도 했겠지만, 마셜의 호의적인 관심을 끈 것이 그들에게 해가 되지 않았다는 것만은 명백할 것이다.
포트 스크리븐 시절
마셜 중령은 포트 베닝에서의 임기가 끝나자 포트 스크리븐의 대대장으로 가게 되었다. 포트 스크리븐에서의 부임 기간에도 그는 이전에 있던 부대에서 해왔던 것과 같은 일에 집중했다. 그것은 바로 부대의 원활한 운영을 위한 일상적인 업무와 더불어 장병들을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부임한 후, 그가 처음으로 느낀 문제점은 부대원들의 사기가 마치 경제 침체로 타격을 입은 일반 시민들처럼 무척 낮다는 점이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그는 매일 아침 말을 타고 산책로를 돌아다니며, 병사나 그 가족들과 이야기해 개인적인 문제나 가족의 고민거리를 알아내고자 했다. 그리고 그런 대화를 통해서 그는 바꿔야 할 것과 바뀔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았고 오래지 않아 문제 해결에 자신감이 생겼다. 그는 곧 전 부대원들의 이름을 외우게 되었고, 그런 지휘관을 부대원들은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마셜은 부하들의 정직한 실수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었다. 그것은 실수를 통해 더 큰 것을 배워나갈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카고, 주방위군 선임 교관 시절 : 1933~1936
일리노이 주 방위군에서의 보직 역시 마셜에게는 도전해 볼만했고 그의 미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리노이주 방위군의 한 선임 지휘관은 마셜의 재임 기간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몇 년이 지나도 방위군의 훈련을 개선하려는 그의 노력은 지칠 줄 몰랐습니다. 내가 일리노이 주 방위군에서 37년간 복무해 오면서 마셜이 선임 교관으로 있었던 1933년에서 1936년까지의 기간만큼 부대의 역량이 크게 향상된 적은 없었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마셜 밑에서 근무했던 모든 사람들은 다 이 말에 동의했다. 그는 아무리 화가 난다 하더라도 인내하여 항상심(恒常心)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든 어떤 사람들이라도 상담해줄 수 있었으며, 용병술을 포함한 그가 가진 많은 전문적 지식으로 모든 장병들에게서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종종 부하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업무를 익히고, 지식과 경험에서 나오는 판단을 활용하여 결정을 내리며, 결정한 일에는 헌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재등용
마셜 장군은 유능한 장교에게는 대단한 신뢰를 보였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는 이들에게는 냉정했다. 그는 자신이 도움을 주던 사람이 실패하게 되면 바로 모든 도움을 끊을 정도로 철두철미했다. 마셜 장군의 인재 등용은 미군의 성공적인 전쟁 수행에 막중한 역할을 했다. 북아프리카 공격이 성공하자, 스팀슨 장관은 이 작전의 성공은 완전히 마셜 장군 덕택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마셜은 "내가 한 일은 승리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선택한 것 뿐이었다."라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스팀슨 장관 역시 그 말에 동의했으나, '최고의 사람들을 선택한 공적' 자체가 마셜 장군에게 있다며 치하했다. 스팀슨은 후에 마셜에 대해 이렇게 썼다. "마셜 장군은 때가 되었는데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좌천시키는 데서는 냉철하고 현실적이었다. 그는 임무를 수행하는 데 뛰어난 사람들만을 선발할 뿐이었다." 마셜은 직접 결정을 내릴 능력과 의지가 있는 사람을 원했고, 그만큼 많은 부분을 부하들에게 위임했다. 자기 한 사람에게만 너무 과중한 업무가 부담되었기 때문에 그는 조금이나마 자신의 부담을 덜 수 있도록 부하들이 자기 임무에 좀더 세심하고 적극적으로 임하기를 바랐다.
의회와의 관계
마셜 장군이 군대에서 거의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는 육군 참모총장의 위치에 있긴 했지만, 전쟁 중에도 의식해야 하는 많은 상관이 있었다. 전군 최고사령관인 대통령과 지휘 체계에서의 직속상관인 국방장관 스팀슨, 거기에다가 언제든 이견을 제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의회 의원들이 있었다. 마셜은 의회에서 어느 때, 얼마만큼 말해야 하는지를 잘 판단했다. 그리고 특히 의원들에게 자신도 그들과 같은 구성원임을 확신시키기 위해서 채찍보다는 당근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마셜은 의원들에게 군이 가진 문제점들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럼으로써 그에 대한 의원들의 신뢰는 깊어졌고, 의원들은 그가 군에 불필요한 것을 요청하지는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의회의 회기가 시작되기 전에 마셜은 상당한 시간을 준비에 투자했기 때문에, 군사위원회에 출두했을 때 미리 준비한 계획과 작전의 요점을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겸손하고 참을 줄 알았으며, 돋보이는 지성으로 항상 명료하게 질문에 답변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절대 먼저 강요하거나 요청하지 않으면서도, 마지막에는 항상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의회에서 얻어낼 수 있었다.
언론 및 대중과의 관계
필리핀에 대한 일본의 급작스러운 침공이 있은 후, 맥아더 장군 일행이 마닐라만에 있는 작은 섬 코레히도르로 갔을 때, 현지의 사정은 미군에게 좋지 않은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은연중에 참모총장 마셜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던 것이다. 각 언론은 곧바로 마셜에게 기자회견을 요청했다. 기자회견장에서 마셜 장군은 과연 자기 분야의 진정한 전문가다웠다. 언론은 꾸밈없는 그의 진술로 인해 그를 신뢰하게 되었고, 그를 의심하던 많은 사람들은 그의 후원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 마셜 장군의 능력에 대한 불만의 소리는 완전히 사그라졌다. 그 이후의 전쟁 기간 동안, 마셜은 일주일에 한 번 내지 두 번 기자회견을 정기적으로 가졌다. 그는 전에 했던 대로 모든 질문을 처음에 몰아서 받았고, 그 질문을 한 특파원에게 하나씩 직접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는데, 하나하나의 사건과 이름을 기억하는 그의 능력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의 답변은 솔직했을 뿐만 아니라 믿음직스러웠다.
그의 리더십은 단연 돋보였고, 2차 세계대전 시 육군 참모총장의 직위에 올랐을 때 그 리더십이 최고조에 달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는 군의 모든 장병을 비롯해 언론과 의회, 미국 국민과 대통령, 그리고 연합군에게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는 자신을 위하기보다는 언제나 조국에 헌신적으로 충성하는 사람이었고,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를 존경했다. 그러한 성공은 40여 년간 끊임없이 연구하고 모든 일에서 철저하게 준비했던 노력의 결과였다. 트루먼 대통령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의 뛰어난 리더십에 대한 최고의 찬사로 기억될 것이다. "수백만의 미국인들은 조국에 대해 충실한 의무를 다했습니다. 그리고 마셜 원수는 그 헌신적인 노력을 값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의무-명예-조국 : 더글러스 D. 맥아더 장군의 리더십
1964년 4월 5일, 간과 신장 질환으로 투병 중이던 육군 원수 맥아더 장군은 84세를 일기로 월터 리드 육군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서거가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고, 곳곳에서 그의 업적에 대한 찬사가 터져 나왔다. 맥아더 장군의 군인으로서의 삶은 '최고, 최초, 최대, 유일'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유례없는 높은 성적으로 육군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했고,1차 세계대전 시에는 최연소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또한 최연소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되었다. 이후 최연소 4성 장군이 되면서,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로 참모총장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 그는 타국의 원수가 된 최초의 미국인이었으며, 장성이 된 후 세 번의 전쟁에 참여한 유일한 군인이었다.
초임 장교 시절
육군성 군 검열관으로 임무를 수행하던 시절의 일화는 어떤 상황도 장악해낼 수 있는 그의 능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미국 언론을 상대하는 것은 대부분의 군 인사들이 피하고 싶어하는 일임이 사실이다. 검열관이 되자, 곧바로 그는 기자들을 불러 모아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전 제가 맡은 일이나 당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단지 저는 제 자신을 시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언제나 여러분을 데리고 다니면서, 어떤 거리낌이나 장애물 없이 모든 것을 보여줄 셈입니다. 당신들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어떤 것을 게재하고 어떤 것을 게재하지 말아야 할지 명확히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단지 한 마리의 약한 양일뿐이고, 전 당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맥아더의 탁월한 역량은 유례없는 극찬을 받았다.
참모총장 시절
독립전쟁 이래 100년이 넘도록, 미국의 전쟁 준비는 각 부서에 역할이 제대로 부여되지 않고 계획성 없이 진행되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항시 전쟁에 직면하게 될 때면, 참모 업무의 비효율성이나 병원 설비의 불충분함, 보급 물자 부족 그리고 부적합한 부대 운용 등의 문제점이 발생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고, 결국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의회는 근대적인 일반 참모 제도를 태동시키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일반 참모 제도에 새롭게 부여된 임무에는 타 병과간의 협조체계를 조율하며, 각종 계획을 발전 및 시행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참모 본부의 창설은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1930년까지의 일반 참모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낡고 부적절한 체제에 매달려 전쟁을 수행해왔기 때문이다. 더 이상 지난 전쟁에서 사용한 무기와 작전 계획을 그대로 써먹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의 리더십하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맥아더처럼 대통령과 의회, 그리고 국민에게서 군에 필수적인 것을 얻어내는 능력이 뛰어났던 참모총장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참모총장 자리에 앉자마자, 오랫동안 지속되어왔던 육군 항공대와 육군 해안 경비대 사이의 대립을 가라앉혔다. 해결책은 간단했다. 그들의 임무를 모두 육군에게 떠넘기는 것이었다. 재직 기간동안 맥아더는 옛 향수에 싸여 말(馬)을 계속 존속시키기를 원하던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동성을 늘리고 이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 말을 기계화된 장비로 대체했다. 그는 무장 차량과 크리스티 전차 그리고 차량으로 이동하는 기관총 분대로 이루어진 '기병사단'을 만들었다. 기병사단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맥아더 장군이 전투에 필수적인 기병대 정신만은 보존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기병대 정신'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튼 장군이 지휘한 제3군에서 아주 명확히 나타났다.
맥아더는 늘 있을 수 있는 전쟁의 위협에 대해, 항상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군비 증강을 주장하자,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를 "공공의 지갑을 터는 탐욕스러운 약탈자", "도둑", "전쟁상인"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는 그런 비난에도 자신의 주장을 고수했다. 1931년 지금은 폐간된 「월드 투모로우」지는 1만 9,372명의 성직자들에게 전쟁의 시대에 그들 나라를 위해 무기를 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묻는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그 잡지에 따르면, 조사에 응한 성직자들 대부분은 미국을 보호할 목적으로 무장을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는 맥아더의 주장에 방해가 되는 결과였는데, 「월드 투모로우」의 편집장 커비 페이지는 이 설문 조사 결과에 대한 그의 의견을 부탁했다. 그의 답변은 그 성직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국가 방위를 위해 무장하는 것을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많은 우리나라의 성직자들이 다른 사람과 똑같이 시민권을 누리면서도 당연히 행해야 할 헌법상의 의무를 기피하려 했다는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자신이 응당 행해야 할 의무는 생각하지 않고, 민주주의가 부여하는 특권에 기대어,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기보다는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그저 쳐다보고만 있겠다니 한심스럽습니다!"라며 그들을 책망했다. 그는〈누가복음〉11장 21절을 인용해서 답변의 끝을 맺었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도다."
맥아더 장군은 참모총장으로 있으면서 임기 내내 국가의 방위 태세를 완벽히 하고자 헌신했다. 그리고 그의 리더십과 철저한 국방 예산 준비, 명연설과 뛰어난 문장력, 그의 전문적인 역량에 대한 대통령의 높은 존경, 국민에게 얻은 좋은 이미지 등이 합쳐져 그는 기적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그 일이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1930년대 초, 그는 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에 나는 물이 새고 불결해서 빈민 소굴처럼 되어버린 병사들의 막사를 옮기기 위해 특별 수당을 요청하다가 창피를 당한 적이 있었지. 게다가 육군의 자동화와 기계화를 위해 기금을 모으러 다닐 때, 어떤 신사의 구두를 핥게 될 뻔도 했다네." 2차 세계대전 초기에 미국이 다소 불충분하기는 하지만 잘 정비된 군대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참모총장 임기 동안 그가 보여준 인내와 헌신, 그리고 결단력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모 및 부하 지휘관들과의 관계
부하들이 그에게 충심을 다하길 원했던 것처럼, 그 역시 자기 참모들을 깊이 신뢰했다. 그는 참모가 과오를 범해도 결코 내쫓는 법 없이 자신이 책임을 졌지만, 지휘관이 실수를 하면 바로 방출시켰다. 그는 불충분한 것은 도저히 참지 못해서,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장교는 그 즉시 해임했다. 만약 장교가 전체의 임무를 위태롭게 하면서 자기 병과의 이익을 위해 편파적인 행동을 보일 때는 다른 부서로 보직을 이동시켰다. 그는 새로운 전략 계획을 개발해서 작전을 맡을 지휘관들과 투입될 부대, 장비들을 지정하고, 목표물을 설정하는 등의 지시만 했다. 그는 구체적인 전술적 결정은 부하 지휘관들에게 일임했는데, 이것이 그가 지휘관으로서 성공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했다.
맥아더가 부하에게 신경 쓰는 모습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다. 케미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충성을 다하는 부하들에 대해 그는 남다른 배려를 했고, 그렇게 해서 부하들이 그를 믿고 따르게 했습니다. 비능률적으로 보이더라도 그는 성실한 동료를 다치게 놔둘 수 없다는 생각으로 부하들을 위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그에게 쏟아진 비난도 대부분 부하들 대신 받은 거였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신뢰하며 그의 곁에 남아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쇼맨십
맥아더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영웅처럼 떠받들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잘생기고 당당했으며, 놀라운 쇼맨십을 보여준 반면 동시에 은둔자처럼 살았다. 그는 좀처럼 병사들에게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직접 방문했을 때는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해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도록 만들었다. 그는 무척 소박했다. 2차 세계대전 내내 그는 언제나 목이 드러나는 셔츠와 잘 다림질한 바지로 이루어진 단순한 카키색 제복을 입었다. 그는 오직 4성 장군의 계급장만을 달고서 챙 끝에 금줄이 둘러진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다녔다. 군복 외에 그가 지니고 다니는 유일한 치장품은 옥수숫대 파이프와 대나무 지휘봉이었다. 이따금 구부러진 손잡이가 달린 갈색 지팡이를 돌리면서 까맣고 긴 담뱃대에 담배를 위로 꽂아 피우곤 했다.
그는 부하들 앞에서나 언론에서 연설한 적이 드물었지만 한번 하면 항상 최고 수준의 연설을 했다. "조국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자야말로 삶의 자격이 있다"는 어구나, 2차 세계대전 시 한 전투에서 죽은 미군 병사에게 "나는 그의 탄생이 존엄했음은 잘 알지 못하지만, 그의 죽음이 영광스럽다는 건 정말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한 표현은 정말 뛰어난 것이었다. 그의 연설은 즉석에서 그냥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그는 연설하기 위해서 글을 쓰고, 만족할 때까지 다시 편집을 계속했다. 이처럼 그는 연설로 청중에게 감동을 주려 노력했고,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대화에서조차 그의 말솜씨는 부하들을 이끄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의 화려한 표현력은 진지한 독서의 반영으로, 특히 고전과 군사 분야 권위서를 읽은 것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우리는 그의 연설과 글에서 나폴레옹에게서 인용한 말, 브로드웨이에서 본 멜로드라마에서 따온 구절, 링컨의 연설에서 발췌한 글, 플라톤의 이야기와 성서에서의 인용구 등을 찾아볼 수 있다. 맥아더는 지휘관으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의사소통 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군인-정치가-외교관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의 리더십
아이젠하워는 동기생 164명 가운데 61등으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이들 1915년 졸업생 중 58명이 준장 이상으로 진급했는데, 그 결과 '별이 쏟아진 기(期)'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들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생도는 바로 61등을 한 아이젠하워였다. 우리는 이런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그는 그처럼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그는 어떻게 최고사령관으로 선출될 수 있었는가?
2차 세계대전 이전의 군 생활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겠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1914년 12월 전쟁기획부에서 일하게 된 것을 꼽을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전까지의 그의 활약이 그에게 그 직위를 부여하게 했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가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자마자 처음 지정받은 부임지는 텍사스 샌안토니오에 있는 샘휴스턴 요새였다. 아이젠하워가 전쟁기획부에 가게 된 것은 어느 한 사람의 덕이라기보다는 확실히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된 결과였다. 필리핀 상황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그의 능력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높은 평가, 그리고 그의 화려한 전적 모두가 유리하게 작용한 결과였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된 데는 행운도 한몫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겠지만, 그의 승진가도는 뛰어난 임무 수행 능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합군 지도자로서의 아이젠하워
몽고메리 원수는 그의 회고록에서 아이젠하워 장군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난 아이크를 진정한 의미에서 위대한 장군으로 규정짓고 싶지 않다. 그가 사단과 군단, 군을 직접 지휘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면, 정말 그는 위대한 장군이 될 수 있었을 테지만, 불행히도 그에게는 그런 인연이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그는 위대한 최고사령관이자 군 정치가였다. 어느 누구도 그처럼 연합군이 멋진 전투를 수행하도록 단결시킬 수 없었을 것이며, 함께 탄 배를 침몰시킬 수 있는 수많은 분쟁과 방해 요인들 사이에서 그처럼 균형을 잡아줄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젠하워 장군이 연합군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데는, 단순히 그의 능력뿐만 아니라 그가 가진 성품이 큰 역할을 했다. 정말 일을 뛰어나게 하는 사람을 그 일을 쉽게 하기 마련이다. 매력적이고 따뜻한 미소, 신념과 확신에 찬 태도와 조심스럽고 정직한 성격은 냉정한 영국인들의 의심에 찬 눈초리를 누그러뜨렸다. 처칠은 그를 "세계에서 가장 낙천적인 사람"이라고 불렀다. 아이젠하워는 패배와 후퇴로 4년 동안 찌든 영국인들에게 신선한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최고사령관으로서의 정치적 리더십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아이젠하워 장군은 동시에 두 개의 전쟁을 치르는 셈이었다. 하나는 군사적 전쟁이요, 또 하나는 정치적 전쟁이었다. 정치적인 전쟁에도 군사적인 전쟁만큼이나 리더십이 필요했다. 1942년 11월, 클라크 장군과의 담소 기록에서처럼 그 둘은 작전(북아프리카 침공 작전)이 시작된 이후로 계속해서 자신들이 그처럼 중대한 정치적 문제를 어쩔 수 없이 다뤄야 한다는 것을 유감스러워했으며, 둘 다 차라리 일개 사단을 맡아 움직이는 것이 행복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는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전쟁을 지휘하면서 막중한 책임이 부여되는 역할을 맡게 된 것과 자신이 역사에 남을 만한 기회를 갖게 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그처럼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게 된 사람에게는 고통의 시간이 더 많게 마련이었다.
정치철학
아이젠하워는 1942년 7월에, 영국에 있는 미국 대사가 전략적 폭격을 할 지역을 선택하기 위해 위원회를 세울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의 전문을 워싱턴에 보냈다는 사실을 듣고서 몹시 놀랐다. 이런 것은 군사적 영역에 대한 간섭이었기 때문에 그는 매우 불쾌했다. 그는 즉시 이 상황과 관련하여 자신과 대사 사이에서 어떠한 충돌도 야기하지 않으면서 대사가 폭격 지점을 선택하지 않도록 했다. 아이젠하워는 군사적 문제에서는 지휘 체계를 넘어서려는 어떠한 것도 참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치적 측면의 임무에 관한 아이젠하워의 철학은 그가 군사적인 성공을 거두는 데 한 요인이 되었다. 최고사령관의 역할에는 독특한 자질이 요구되었다. 명령을 하고 무조건 복종을 하도록 훈련된 군인은 종종 문제들을 흑백논리로만 보며, 세워진 규정에 따라서 수행한다. 하지만 외교관이나 정치가는 상충하는 국가적 이익 사이에서 설득과 타협을 하며, 그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유연하고 열려 있는 생각을 가져야만 한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이런 점에서 때때로 군인과 정치가 양자의 특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참모들과의 관계
그는 좀처럼 야전 사령관들을 자기 앞에 오도록 명령하지 않고, 직접 그들에게 다가가 전장에 머물면서 겪는 불편한 사항들을 덜어주는 걸 더 좋아했다. 전선을 순시할 때면, 그는 언제나 자신의 임시 본부를 전투 사령관의 본부에서 멀리 떨어뜨려 세웠는데, 그것은 실제 전투를 치르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장교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였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사령부를 조직하면서, 참모들을 고르는 데 매우 신중했다. 사령부를 세운 후, 그는 참모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각 분야에서 정선된 전문가들입니다. 내 감독을 받지 않아도 당신들의 임무를 해주기 바랍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내가 인사 과정에서 실수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참모들이 그에게서 행정적인 일들을 덜어 주리라 믿었다. 아이젠하워의 지론은 '모든 명령에서, 상급 지휘관의 성공 여부는 자의적 명령을 내리며 독단적인 생각에 집착하는 능력보다는 병사들을 이끌고 설득하는 능력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론은 자신감을 심어주는 일이 필요한 몇몇 특정한 부대에 큰 힘으로 작용했다.
언론과의 관계
아이젠하워 장군은 언론과 군 당국이 완전하게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은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그는 언론과의 원만한 관계를 확립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그는 사무실에서 개인적이고 비공식적으로 기자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했지만, 100여 명이 넘는 기자들을 사령부에 다 들여놓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기자들이 찾아오게 하기보다는 직접 기자들을 찾아갔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언론과 미국 국민에게는 철저히 정직하고자 했다. 심지어 그는 선전을 목적으로 하는 보도에서도 거짓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정직했기 때문에 언론을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이들이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자들 역시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편 기자들은 아이젠하워 장군의 권위와 애국심, 훌륭한 판단력과 더불어 그들에게 보여준 신뢰와 확신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는 보도진들을 언제나 사려 깊게 배려했다. 뉴스 보도진들은 대개 거칠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그런 껍질들은 아이젠하워에 의해 벗겨졌다. 그는 기자들에게 비공식적이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전쟁의 승리에 기여할 수 있는 미국의 군인과 같은 사명을 띠고 있다고 느끼게 했다. 언론에 대한 정직함과 자연스러운 태도가 그에게는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부대원들에 대한 배려
아이젠하워는 가능한 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평상시의 모습을 보려 했고, 방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종종 예고없이 부대를 방문하곤 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때로는 정부 최고 관료를 포함한 상관의 그런 방문들이 병사의 사기 진작에 크게 도움이 된다. 군인들은 가까운 거리에서 매우 높은 상관을 보면 희열을 느낀다." 병사들과의 만남은 아이젠하워가 결정을 내리는 데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그가 유럽 공격 작전을 지휘하는 최고사령관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런던으로 옮겨가기 직전 그는 안치오(이탈리아의 도시. 2차 세계대전이 치열했던 1944년 1월 연합군이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하고 로마로 진격하였다)의 작전 계획에 다소 불안함을 느꼈다. 그는 카세르타의 공군사령부에 전력을 집중하려는 계획이 생략되었다는 말을 듣고 불안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결정은 최고 사령관으로서 상황과 역할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의미했다. 여러 가지 문제들이 이미 존재하고는 있었지만, 절대로 병사들에 대한 관심을 끊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최고사령관이란 전술상의 의무를 앞세우고, 부하에 대한 권위를 피해야만 하지만, 또한 부하들과 실질적이고 정신적인 교류를 유지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지휘관은 실패한 것이다. 이러한 접촉은 부대를 자주 방문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정열과 인내 : 조지 S. 패튼 장군의 리더십
패튼 장군에 대한 한 문헌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지도자로서 패튼의 가장 위대한 자질이란 병사들에게 자신이 가진 군인으로서의 열정을 불어넣는 능력이다. 그는 부대원들에게 자신의 성격을 각인시켰다. 때로는 병사들이 그를 싫어한 적도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패튼 장군이 했던 대로 행동하고 생각하며 전투에 임했다." / "제 3군은 그 지휘관의 거칠고 자신만만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 "패튼의 천재성은 병사들로 하여금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능력에 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보인 리더십
그는 병사들이 훈련 중이건, 작전을 시행하기 전이건, 전투 중이건, 작전이 끝난 뒤이건 간에 직접적으로, 혹은 지휘관과 일직(日直) 사령을 통해 간접적으로 병사들에게 이야기했다. 그 대상은 보병, 기갑병, 공군 요원, 장교, 하사관, 운전병에서부터 전선의 이면에서 활약하는 군수병, 통신병, 취사병에 이르기까지 군에 몸담은 모든 병사들이었다. 항시 패튼은 부대원들에게 연설하곤 했지만, 두 가지 경우에는 특별히 더 연설에 신경을 썼다. 하나는 어려운 공격을 감행하기 직전에 있는 부대를 방문해서 그 부대원들에게 연설할 때였다. 또 다른 경우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난 부대에서 연설할 때였다. 그가 장병들에게 목청 높여 연설할 때면, 고성의 목소리가 거칠게 터져 나왔다. 그는 전쟁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전쟁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야, 저 녀석들의 피를 보지 않으면, 자네들의 피를 보게 될 걸세. 그 자식들의 배를 찢어버리거나 총알을 박아서 창자를 끄집어내야 해!" 그의 이러한 저속한 언행은 계속 되었고, 놀라움의 대상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중 패튼 밑에 있었던 지휘관들은 그의 불경스러운 말투가 모두 올바르다고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이 그가 가진 리더십의 큰 부분이라는 데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그리고 사실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는 왜 그런 말을 사용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제기랄, 당신도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군대를 이끌 수 없을 거요."라고 답했다. 비록 일부에게는 좋지 않게 보일지 모르지만, 중요한 건 전체였다. 전투에서 군인에게 필요한 성격은 집에서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전쟁에서 싸워야 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언어가 그의 거친 내면을 자극해 싸움에 필요한 성격을 개발하도록 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그것을 받아들였고, 자신의 거친 성격 -그것이 정말로 있던 것이든, 아니면 가장된 것이든 간에- 을 고취시켰다. 패튼에게는 군을 가능한 한 강하게 만들어야 할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을 위해 불경스러운 언행은 하나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훈련과 군기
1941년, 패튼을 비롯한 미군 지휘관들이 직면한 최대의 난제는 평범하고 온건한 시민들을 어떻게 호전적인 싸움꾼으로 단련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패튼은 이런 변화를 훈련을 통해 성취해냈다. 군기를 서서히 주입시키면서 살인 본능을 이끌어내려는 의도의 훈련이었다. 필요하다면 극도의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감수하고서라도 그들이 기계처럼 싸울 수 있을 정도에 이르기까지 몸과 마음과 영혼을 희생시키며 훈련시켰다. 군사 훈련의 본질적인 바탕은 군기에 있다.
패튼의 말에 따르면 군기가 깊이 들어 있으면, 그것은 전투에 대한 긴장감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더욱 강하게 인간에게 작용한다. 그는 군기란 군인이라는 자긍심과 임무에 대한 신중한 관심, 상호 존경과 신뢰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패튼 장군이 부하 지휘관들에게 배포했던 지시 사항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군기에는 오직 한 가지만 있을 뿐이다. 완벽한 군기! 군기를 강화시키거나 유지시키지 못하는 지휘관은 잠재적인 살인자다!" 그가 이토록 군기를 강조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생각하는 군기란 병사들의 사기 진작에 필수적인 요소였고, 또한 그에 따라 잠재적인 최상의 전투력을 발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 리더십
패튼 장군이 부하 지휘관들과 장교에게 내렸던 최우선의 지시 사항은 "각자가 자신에게 알맞은 영역에서 직접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모든 전장에 있으면서 몸소 부하들을 지휘했다. 몇몇 군 지휘관들은 부하들이 자신을 찾아와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패튼은 "지위가 높을수록 더 많은 시간이 있다. 따라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전화해서 오라고 하는 것보다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방문하러 나가는 것이 옳다"고 말하곤 했다. 패튼 장군은 개인적인 리더십이 과용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너무 자주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발생할지 모르는 관심과 효과의 감소를 방지하기 위해 그는 조심스럽게 균형을 유지했다. 패튼은 군단과 사단 사령부를 자주 순시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활동에 간섭하지는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주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부하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일러주지 마라, 그저 무엇을 해야 하는지만 명령하라. 그러면 그들은 자기 힘으로 당신을 놀라게 할 것이다." 한편 그는 아첨하는 사람들을 주위에 두지 않으려 했는데, 그 덕에 부하들은 그에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병사들의 복지
'제대로 보살핀 병사가 잘 싸우는 군인이 된다'는 것이 패튼의 리더십에서 기본 전제가 된다. 그는 부하 지휘관들에게 이러한 원리를 주입시키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을 들였다. 그는 젊은 장교들에게 전술을 익히는 것보다 부하들을 다스리는 방법을 아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종종 말하곤 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목숨보다는 탄약을 낭비하는 편이 나으니 절대 탄약을 아끼지 말라고 말하곤 했다. 군인을 만들어내는 데는 적어도 18년이 걸리지만, 탄약은 단지 몇 달이면 만들어낸다는 것이 요지였다. 패튼의 리더십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크게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병사들에게 그들이 잘 해왔다고 인식시켜주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병사들이 자신을 몰아칠 수 있도록 하려면, 그들에게 자신의 임무를 지각하고, 인식하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한편 그가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시킨 방법 중에는 언론을 이용한 것도 있었다. 그는 작전이 끝나면 부대에 항상 붙어 다니는 종군기자들에게 작전의 상세한 내용, 즉 그 작전에 참가한 모든 사단, 부대, 지휘관의 이름을 포함한 것을 발표할 수 있게 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정책이었다. 그는 즉각적으로 뉴스를 발표하면 병사들의 사기가 진작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전투력이 증진되리라고 믿었다.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고, 공로는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장군이 부하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에 기인한 이런 원칙은 전쟁 내내 고수한 패튼의 행동 방침이었다.
전진, 전진하라!
패튼 장군은 전진을 맹신했다. 그는 부대를 빠르게 전진하게 하는 일은 무엇이든 했다. 진군하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행동 철학이었다. 막무가내인 듯하지만, 공격적 전진이라는 방식에는 패튼의 철학이 담겨 있었다. "장병들은 두 가지 이유로 싸운다. 지휘관에 대한 영웅적 숭배, 그리고 영광을 위한 염원, 모든 훌륭한 장병들은 그런 것들을 갖고 있다. 단지 애국심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이다. 친구들에게 남기고 싶은 영웅적인 행동에 대한 염원에서 군인들은 죽음도 불사하는 것이다. 애국자들과 함께 우리 진지를 지켜낼 순 있지만, 그들과 함께 적진을 빼앗을 수는 없다. 나는 방어에는 관심이 없다. 전투에서 나의 모토는 '진군하라'이다." 이 말은 항상 공격적인 상태에 머물려는 데는 뭔가 특별한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부가적인 것은 바로 패튼의 리더십이다. 패튼은 병사들로 하여금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그에게 바치도록 만들었다. 그들이 할 수 있다고 믿는 능력 이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어떤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평범하고 평화로운 시민들을 훈련과 군기를 통해 호전적으로 조련했다. 그 결과, 더 많은 병사들이 살아서 집으로 돌아갔다. 병사들은 전투에 임하면서 그의 엄격한 훈련의 가치를 느낄 수 있었다.
군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인격
인격이란 말처럼 인간을 대변하는 속성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된 리더십의 요건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인격이라고 할 수 있다. 리더십이란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성품과 인격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리더십에서 인격의 역할에 대해 "아주 중요한", "근본", "기초적 요소", "절대로 필요한 것"이라는 표현을 썼고, 특히 아이젠하워 장군은 인격이 리더십의 "모든 것"이라고 요약했다. 인격이란 개별적인 지도자들의 행위를 결정하고, 그가 이끄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따르도록 모범을 제시한다. 그것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고, 그가 명령 내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감을 고취시킨다. 그리고 인격은 중대한 위기의 순간에 자신을 고무시키고,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순간에 직면하게 되면 본능적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옳은 일을 하도록 만든다. 또한 그것은 명령을 받는 사람에게 복종할 욕구를 불어넣는다. 왜냐하면 인격을 갖춘 지도자를 따르는 부하들은 자신이 받을 명령이 정당하고, 건전하며, 필요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인격이라는 말은 정의하기가 힘들지만, 만약 정의를 내려야 하거나 평가하도록 강요받는다면, 웨스트포인트의 역사적인 교훈인 '의무, 명예, 조국'을 상기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결단과 용기
전시에 지도자는 고독하다. 삶과 죽음, 성공과 실패, 승리와 패배를 좌지우지할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보다 더 깊은 고독을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원치 않을 만큼 중대한 책임이며, 이런 심각한 결정을 내리는 자질을 타고나는 사람도 거의 없다. 리더십에 일정한 유형이 있다는 이론에 강력히 반대하는 사람들조차도 진정 뛰어난 군 지휘관들 모두에게 어떤 '느낌'이라든가 '육감'이 있었음은 인정하고 있다. 이런 감각이나 육감은 태어날 때부터 있는 것일까? 패튼은 이런 감각을 "군사적 반응"이라고 했는데, 그는 1944년 6월 6일에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그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거둔 그런 큰 성공은, 언제나 내 군사적 반응이 옳다는 확신을 가진 데서 온 것이란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동의하지 않지만, 그들이 틀린 거야. 우리 둘이 죽고 나서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씌어질 역사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 줄 거야. 내가 '군사적 반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라. 홍역을 앓으면서 태어나는 사람이 없듯이, 군사적 반응을 지니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단다. 올바른 군사적 반응을 할 수 있는 영혼이나 커다란 근육을 사용할 수 있는 신체를 갖고 태어날 수 있지만, 이 두 가지는 고된 노력을 통해 개발되어야 하는 것이란다."
준비와 행운
웨스트포인트나 버지니아 주립사관학교를 비롯한 어느 군사학교도 그곳에서 완벽한 장교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대신 뛰어난 장교로 빚어질 수 있는 훌륭한 자질들을 가르친다고 강조할 뿐이다. 한 작가는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역사적 리더십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비록 전쟁을 경험했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호전적이지도 않고 전쟁 준비를 하고 있지도 않았던 미국 같은 나라에서 어떻게 그토록 많은 훌륭한 지휘관을 배출했는지는 정말 설명하기 힘든 기적 같은 일이다. 그들은 어디서 왔고,〔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20년 동안 무얼 하고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던 준장 이상의 100여 장군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그들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보병학교와 포병학교에서 시작해서, 레번워스의 지휘참모대학, 그리고 육군대학 과정을 거치는 체계적인 군사학교 제도 덕분이었다는 것이다. 군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훈련하고 연구하는 기간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두각을 나타낸 모든 지휘관들은 그들이 우수한 군사 교육기관에서 20년 동안 배워왔던 것을 연구하고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성공이란 인간의 천부적 능력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하지만 성공은 맡은 일에 헌신적인 모든 사람들, 즉 기꺼이 오래 일하고, 자신을 준비하는 데 열심인 사람, 리더십에 필요한 특성을 깨닫고 개발하는 사람, 부하를 사랑하고 그들의 복지에 관심을 갖는 사람, 임무에 대한 자신감과 헌신을 함께 가질 수 있도록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