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망제작소 vs 희망환전소
겔 8:14-18
말씀으로 드리는 오늘의 번제 오늘도 에스겔서 8장 마지막 부분 말씀을 통해서 함께 합니다. 에스겔서 8장 16절부터 18절까지 읽습니다.
16.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성전 안뜰에 들어가시니라 보라 여호와의 성전 문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더라
17.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보았느냐 유다 족속이 여기에서 행한 가증한 일을 적다 하겠느냐 그들이 그 땅을 폭행으로 채우고 또 다시 내 노여움을 일으키며 심지어 나뭇가지를 그 코에 두었느니라
18. 그러므로 나도 분노로 갚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희망제작소 vs 희망환전소》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희망환전소라는 말은 문법적으로는 사실 말이 안 됩니다. 환전이라는 말 속에 이미 錢 돈이라는 錢자가 들어있기 때문에 굳이 희망을 바꾸어주는 희망을 exchange해주는 money exchange counter가 환전소 아닙니까? 그런 것처럼 hope exchange counter를 말하려고 했으면 환희망소가 되어야 되겠지요. 그러나 그저 입에 붙은 말의 리듬을 좀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서 희망환전소라고 제목을 붙여봅니다.
희망제작소라고 여러분 다 아실 거예요. 2006년에 세워졌습니다. 박원순 변호사님이 시민운동가이신데 세우신 시민을 위한 단체예요. 그러니까 시민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제공받고 그 아이디어를 공유하면서 장사를 하시거나 개인 사업이나 중소기업을 하실 때 더 밝은 미래를 위한 조언과 아이디어 제공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런 기관입니다.
쉽게 말하면 정말 실업자 삼백만의 시대에 도전정신을 가지고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시민들을 희망으로 격려하는 단체다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어느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어요. 교회가 바로 희망제작소가 아니냐.. 그렇게 말씀하시는 데는 뭐 하루 이틀 생각하신 게 아니죠. 늘 교회 강단은 희망의 메시지라는 정말 중압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설교가 뭐냐? 희망의 메시지가 되어야 된다.. 그래 제목도 소망교회가 다 있지 않습니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라..
그런데 희망제작소에서 바라는 그런 희망을 교회가 희망으로 전달하는 곳이냐?
쉽게 말해 이 세상에서의 밝은 미래를 향한 어떤 희망을 전달하는 곳이냐?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상을 향한 밝은 미래를 갖고 좀더 나아지는 삶을 갈급해하며 오는 교인들에게 완전히 희망을 환전해주는 곳입니다. 전혀 뜻밖의 희망으로 전혀 다른 희망으로 바꾸어주는 곳이 바로 교회지 이 땅에서의 삶이 밝은 미래가 주어질 수 있다 라고 격려하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희망제작소가 아니라 전혀 뜻밖의 희망으로 상상하지도 못했던 희망으로 환전해주는 희망환전소가 교회가 되어야 됩니다.
자, 이 사실을 우리가 좀더 명확하게 비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과 희망을 한번 비교를 해봅니다.
여러분 신앙이 뭐예요?
모세가 구리뱀 장대를 든 것처럼 내가 들려야 하리니 십자가에 들려서 죽은 나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모세가 구리뱀 장대를 치켜들 때 그 구리뱀 장대를 보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불뱀의 독으로부터..
똑같이 주님이 십자가에 불뱀처럼 매달리십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보는 사람이 삽니다.
눈으로는 안 보여요. 십자가가. 마음으로 봅니다.
희망이 신앙과 같은 점은
바로 이렇게 밝은 미래에 있어질 일을 '바라본다'는 것이 같은 것이에요. 신앙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고, 희망도 더 나은 미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것이 또 있다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위에서 돌아가신 주님과 나를 일치시키는 것이라면, 희망도 바라보고 있는 밝은 미래를 나의 상황과 일치시킨 것이 똑같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신앙은 이미 이루어진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질 수 있는 최악의 경우 비참한 저주와 심판을 받고 죽은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희망은 이 세상의 삶에서 내게 주어질 수 있는 한 최선의 삶의 환경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미래에 있을 최선을 바라보고 나간다 그러면 십자가를 바라보는 신앙은 바라보는 것은 똑같은데 이미 있었던 최악의 경우를 일치시키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는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 다른 것이 뭐냐?
희망은 그야말로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도록 꿈꾸고 있는 희망을 향하여 바라보고 있는 밝은 미래를 향하여 나가게 해준다고 하면, 신앙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끝나버리게 합니다. 희망은 세상의 삶을 이어나가도록 하고 지금의 환난과 고통을 희망을 붙잡고 이기도록 해준다고 그러면 주님의 십자가는 지금 이 자리에서 과거의 죽음을 바라보며 죽은 자로 남아 있기를 원합니다.
키케로가 그런 말 했다고 그래요. 삶이 있는 한 희망이 있다. 맞는 말씀이에요.
그런데 신앙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최악의 경우로 비참하게 죽은 주님의 모습을 나와 일치시키는 바람에 죽은 자와 일키시키기 때문에 더 이상 이 세상의 삶이 없습니다. 삶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나의 삶이 밝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습니다.
삶이 있는 한 희망이 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죽은 자이기를 자처하기 때문에 삶이 없는 한 희망도 없다!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삶은 몸이 살아 있는데 어떡하느냐?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한 것이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나니.. 죽었습니다. 삶이 없습니다.
그런 어떡하나?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내 삶이 없다. 내 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성령께서 살고 계신다. 내 삶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밝은 미래를 꿈꾸는 일도 없다. 삶이 없으니까 희망도 없고 삶이 있을 때 희망이 있는 거지요.
그러므로 희망제작소가 말하는 희망, 밝은 미래를 향한 우리들의 희망. 이것은 전혀 기독적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오늘 우리가 다시 보는 8장 16절 말씀에 기가 막힌 표현을 통하여 확증해주고 있습니다.
뭐를요? 희망제작소에서 말하는 그런 희망, 희망제작소가 만들어내는 그런 희망이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그 죽음을 일치시키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날마다 죽는다는 신앙의 핵심을 실천해가는 기독교 신앙이라고는 아무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상극관계에 있다는 것을 본문이 보여주고 있어요.
여러분, 본문의 내용은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는 유다백성들의 우상숭배를 네 가지를 보여주고 있는 가운데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런데 성전이 뜰도 있고 바깥뜰 안뜰이 있고 뭐 전체를 다 성전이라고 하지만 오늘 말하는 이 성전은 지성소가 있는 건물로서의 성전을 말합니다. 그 성전으로서의 건물이 어떻게 만들어졌냐?
지성소가 있고 성소가 있고 성소로 들어가는 현관문이 있습니다. 현관문으로 들어와서 성소를 거쳐서 지성소로 들어가 지성소에 법궤가 있고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이 현관이 어느 쪽으로 나 있냐면 동쪽으로 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관에서 들어오자면 서쪽을 향해 지성소가 놓여져 있는 것이고 그 현관 바깥 쪽으로는 번제단이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제사장들이 현관과 제단 사이에 서서 스물다섯 명의 제사장 그러니까 이십 사 반차 그 계열 혈통이 있거든요? 이십 사 혈통의 대제사장들과 대제사장 그러니까 남왕국 유다의 모든 대표 제사장이 다 모인 거지요? 그 제사장들이 제단과 현관 사이에서 동쪽을 향하여 동쪽에서 뜨는 태양을 향해 절을 합니다. 태양숭배를 하는 것이에요.
이 태양숭배가 도대체 무엇을 뜻합니까?
모은 우상숭배의 특징은 우상 자체의 매력이나 우상 자체의 우수함에 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는 우리들 마음 속에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바알을 숭배한다 그러면 바알 신 자체가 대단하게 살아 움직여서가 문제가 아니라 진짜 살아있다고 믿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왜 바알을 숭배하느냐?
내 마음 속에 풍요와 다산을 원하기 때문에.
또 바로 위에 여러분 담무스가 나오지 않습니까? 담무스를 경배하며 여자들이 고하고 있었다고 그래요. 왜 그럽니까?
담무스가 곡물의 신이니까. 담무스 자체가 대단하고 담무스 자체가 진짜 살아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이 풍성한 곡식을 원하기 때문에 담무스를 숭배합니다.
그렇다면 태양숭배를 왜 하는 것입니까?
태양숭배는 여러분 고대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것이에요.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이라고 하는 것은 동쪽에서 뜨는 해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지금? 서쪽으로 지는 해도 있어요. 중천에 떠 있는 해도 있어요.
그런데 이 동쪽에서 뜨는 해와 서쪽으로 지는 해가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 숭배에서는 어떻게 이해되느냐?
동쪽에서 뜨는 해는 생명과 부활을 상징하는 해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상징하는 어두움을 뚫고 올라와 세상을 밝히는 태양이기 때문에. 그런데 서쪽으로 지는 태양은 죽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죽음을 상징하고 패망을 상징하는 그런 태양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피라미드라든지 무덤을 지을 때 이 이집트 사람이 언제나 나일강을 중심으로 나일강 서쪽에다 무덤을 짓습니다. 태양이 서쪽으로 지기 때문에.
이집트가 아니더라도 태양이 온 인류에게 옛날이나 지금이나 보편적으로 획득하고 있는 비유적 의미가 있어요. 그게 뭡니까? 아주 소중한 존재나 희망이 되는 존재를 우린 태양이라고 얘기합니다. 희망이 되는 존재를 태양이라고 얘기한다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제사장들이 제단과 현관 사이에서 동쪽에 뜨는 해를 향하여 절을 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바로 이 세상의 삶에서 희망을 마음 속에 품고 살았고 번제단에서 번제를 드리고 이제 서쪽에 있는 지성소를 향하여 경배하려는 모든 유다백성들 선민들에게 이 세상에서의 희망의 삶을 살도록 가르치고 있었다는 것이에요. 동쪽에서 뜨는 해를 향하여 경배했다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밝은 미래를 향한 희망을 추구하도록 가르쳤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밝은 태양을 향해 절을 하고 있는 동안에 이 세상에서의 밝은 미래를 향하여 희망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오늘 본문에 「여호와의 성전 문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더라」(16절)
어떻다고요?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반드시 태양을 숭배하려면 성전이 동쪽으로 향해 있기 때문에 현관 문에서 태양을 숭배하고 떠오르는 태양에게 절을 하려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를 등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밝은 미래를 희망하며 밝은 미래를 내다보고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는 그렇게 밝은 미래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을 등져야 하고 하나님을 배반해야만 가능하다 이겁니다.
참 대단한 진리의 말씀이 쓰여 있어요.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성전의 구조가 지성소와 성소 현관으로 되어 있고 현관이 동쪽으로 향해 있기 때문에.
번제단에서 번제를 드리면서 내가 죄악으로 인해서 저렇게 양이 타죽는 것처럼 죽어야 마땅한 자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은 동쪽에서 뜨는 해를 등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에요. 그 장면이 바로 회개의 장면이에요. 진정한 회개의 장면이라는 것이에요.
그 성전 바깥에서 어떻게 살고 있었냐?
바로 떠오르는 밝은 해 동쪽에서 떠오르는 해를 향하여 절하며 살았다는 것이에요. 나의 밝은 미래를 바라보며 살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고 있는 동안에 지성소에 등을 돌리고 살았다는 것이에요. 그러한 죄악을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살았던 죄악을 양을 태워 죽이면서 번제단 옆에서 내가 죽어야 마땅한 자라고 고백하면서 동시에 세상을 등지며 하나님쪽을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바라볼 때에 내가 등지고 있는 세상을 내가 안 바라보고 있는 세상을 누가 바라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바라보고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새로운 번제단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주님과 함께 죽은 상태에서 지성소를 향하여 하늘의 천국을 향하여 눈길을 돌리고 있다. 눈길을 위로 돌리고 있다>.
세상을 등지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소망을 향하는 희망을 향하는 나의 눈길이 꺾여 버리고 환전되어 버리는 겁니다. 위로 향해 버리는 것이에요. 마음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마음은 무엇인가를 바라보지 않으면 마음이 아닙니다. 바라봐야만 마음이에요. 뭔가에 마음을 붙여야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대해서 등 돌리고 이 세상에 대해서 죽어버리고 밝은 미래를 향하는 마음이 없어져 버린 겁니다. 밝은 미래를 향한 마음이 없어져요.
왜요? 내가 죽었으니까. 죽은 자에게는 삶이 없는 자에게는 희망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은 위로 꺾여 버립니다. 희망이 환전되어 버리는 것이에요. 하나님 쪽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내 등 뒤에 이 세상의 삶을 바라보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세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다> 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이제는 내 삶이 아닙니다. 내 삶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이 몸이 살고 있는 삶의 미래에 대해서 절대 밝은 미래를 꿈꾸는 게 아니에요.
밝은 미래를 꿈꾸면 반드시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번제단에서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을 향하는 모든 유다백성들 앞에 가로막고 서서 동쪽의 해를 향하여 절을 하면서 말하기를 “이 세상의 삶에서 너희에게 밝은 미래가 주어질 것이다. 희망을 가져라.” 희망제작소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희망환전소를 희망제작소로 만들어버렸다는 거예요.
하여간 희망이라는 말처럼, 비전이라는 말처럼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 여겨져서 강단에서 외쳐지는 단어가 또 있겠나 싶어요.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오래 살게 될 것이다. 이 세상 일이 형통할 것이다. 이런 희망을 주는 일은 절대로 잘못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잘못된 것이에요.
누가 이 세상에서의 희망적인 미래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가 그걸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마는 성경 말씀은 말합니다. 네가 이 세상에서 더 나은 미래를 원하고 있느냐? 너는 하나님을 등지고 있다.
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희망도 바라보는 것이고 하나님도 바라봐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 눈은 앞면에만 붙어 있는 것처럼 눈이 하나씩 나눠져서 앞에 하나 뒤에 하나 있으면 하나님도 보고 세상도 보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리고 희망의 문제점이 뭡니까?
태양이 떠오릅니다. 왜 그게 희망입니까? 어두움 밤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밝은 미래를 희망한다는 것은 지금을 어두움의 타이밍으로 규정한다는 것이에요. 만족한 미래를 바라본다는 것은 지금은 결핍되어 있다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희망의 문제라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 세상의 모든 희망에 대해 죽습니다. 더 이상 내 삶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지금과 다른 나아지는 미래의 삶을 원하지 않습니다. 죽어버린 거예요. 죽음과 동시에 우리의 기쁨은 우리의 밝음은 위에 있게 돼버려요.
천국은 먼 미래에 죽고 나서 죽음에 이어져서 천국이 주어지는 게 아니라 천국은 미래에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있고 천국은 앞에 있는 게 아니라 위에 있습니다. 위에 있기 때문에 지금 천국을 향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기독교인의 희망이고 소망입니다. 지금 천국 이 자리에서 원하는 것이지요. 이 자리에서 천국에서 내려오는 기쁨으로 취해서 사는 것이지요.
천국은 앞에 있는 게 아니라 위에 있습니다. 천국은 미래에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있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미래를 향한 희망을 밝은 미래를 앞을 내다보는 우리의 시선을 꺾어서 환전시켜서 지금 위에 있는 천국 쪽으로 향하게 하고 천국을 죽음 이후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활성화될 수 있는 사건으로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것이에요. 이게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밝은 미래를 바라보고 계십니까? 눈은 두 개 다 앞에 붙어 있기 때문에.
밝은 미래를 바라보면 하나님을 등져야 하고 하나님을 배반해야 합니다.
바라봄이 신앙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등지고 다른 것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배반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 세상의 밝은 미래를 향한 우리들의 깊은 잠재의식까지 스며들어있는 희망의 성향을 뿌리째 뽑아버리시고 희망이 하늘로 향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위로 향하는 환전된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고 기다리는 가운데 성령이 임하시고 하늘백성답게 하나님께서 내 등 뒤에서 펼치시는 세상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지금 하늘나라로 온전히 만족한 삶을 사실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신앙의 가장 무서운 적이 이 세상의 삶에서의 밝은 미래를 바라보는 희망의 마음인 것을 우리가 꼭 기억할 수 있게 해주셔서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밝은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 그리하여 하나님을 등지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중단할 수 있게 해주시고 우리의 희망이 하늘로 환전되어 하늘의 기쁨을 지금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11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