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구두의 관계
안도현
나는 새 구두를 한 켤레 사면 적어도 4, 5년은 신고 다닌다. 나한테 한번 걸린 구두는 참으로 고생이 많다. 구두로서의 생을 마칠 때까지 처절하게 끌려 다녀야 한다.
굽이 닳으면 수선 가게에 가서 갈아주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남들처럼 자주 구두약을 발라 윤이 나게 닦아주는 것도 아니다. 밑창에 구멍이 나서 빗물이 스며들지 않을 정도라면 죽자사자 신발로서 그저 묵묵히 고된 노역을 감당해야 한다.
내가 구두한테 이렇게 인색하게 구는 것은 나의 검소한 생활 따위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나는 구두를 애지중지 아껴가면서 신어본 적이 별로 없다. 내 구두는 늘 꾀죄죄하고 우중충하고 우글쭈글하다. 그러니까 나한테 오는 구두는 미리 몸을 망칠 준비부터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와 쉽게 친해질 수 없다. 구두 가게의 진열대에 놓여 있을 때 구두의 광은 왜 그렇게 뻔뻔스러울 정도로 번쩍거리는가? 길들지 않은 새 구두는 얼마나 어색하고 불편한가?
새 구두를 한 켤레 장만했다고 치자. 나는 구두를 사자마자 집으로 돌아와서 우선 뻣뻣한 구두 뒤축을 발바닥으로 지근지근 눌러 밟는다. 구두 주걱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만큼 새 구두의 성깔이 누그러질 때까지 말이다. 그 다음에는 약을 묻혀 구두를 솔로 닦는다. 광을 내기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번쩍거리는 광을 죽이기 위해서다. 마치 오래 전부터 길 위를 걸어 다닌 구두처럼 얼렁뚱땅 위장을 시키는 것이다. 그래야 마음이 편해진다.
누구나 한번쯤 구두를 사서 구두한테 당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새 구두가 버릇없이 새 주인의 발뒤꿈치를 함부로 물어뜯던 기억 말이다. 그러면 물집이 생겨도 아픈 기색 없이 신고 다녀야 한다. 새 구두를 신었을 때 사람들은 그런 고통을 감내하면서 스스로 구두를 길들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사람이 구두를 길들이는 게 아니다. 구두가 사람을, 사람의 발을 길들이는 것이다.
발과 구두가 불편하게 지내다가 그 불편한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는 시기는 아주 모호하다. 그것은 슬며시 이루어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슬며시 스며드는 것’. 그것을 우리는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래 전에 음식점에 갔다가 구두를 바꿔 신은 적이 있었다. 뒤엉킨 신발들 속에서 누군가 내 구두를 먼저 꿰어 신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분명히 내 구두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그 ‘누군가’의 구두만이 오도카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억울하고 슬픈 생각이 들었다. 그 못된 ‘누군가’를 향해 욕을 퍼붓지 않을 수 없었다. 제 신발 하나 못 찾아 신는 놈, 어디 나타나기만 해봐라 하고 나는 연신 툴툴거렸다. 하지만 점잖은 체면에 맨발로 걸어 다닐 수도 없었다. 나는 울며 겨자 먹는 기분으로 낯선 구두를 신어 보았다. 디자인과 크기는 내 구두와 엇비슷했지만, 낯선 구두를 신었을 때의 어색함이 내 발을 휘감아왔다. 내 발은 낯선 구두에게 스며드는 것을 꺼렸고, 낯선 구두도 내발 보다는 이전 주인의 발을 그리워하는 모양이었다. 그 불화가 지속되는 동안 나는 내내 그 ‘누군가’를 원망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그 ‘누군가’를 향한 원망이 내 머릿속에서 말끔히 사라졌다. 바로 내 발과 낯선 구두가 나도 모르게 서로에게 스며들었던 것이다. 아마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그러하리라. 서로에게 슬며시 스며드는 것, 스며들어서 그이의 숨결이 되는 것!
구두가 내 몸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 몸의 밑바닥인 발바닥보다 더 밑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몸이 구두다. 발가락 사이의 질척한 땀과 고약한 고린내를 껴안고 구두는 내가 걸어 다니는 길은 어디라도 따라간다. 아니, 나와 함께 간다. 동고동락이다. 내가 기쁘면 구두가 먼저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껑충 뛰어오르고, 내가 아파 누우면 구두가 미리 알아채고 현관에서 숨죽인 채 나를 기다린다.
내가 늙어가는 만큼 구두도 늙어간다. 그래서 스스로를 망가뜨리면서 늙어가는 내 구두를 나는 미워할 수 없다. 구두를 신고 길을 걸을 때, 왜 그가 따각따각 소리를 내겠는가? 그것은 우리가 걸어갈 길이 아무 이상이 없다고, 마음 놓고 발걸음을 떼도 된다고 구두가 친절하게 안내하는 소리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들으면 나는 또 내 구두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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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려니 손택수 시가 생각나서 갖다 붙입니다. 같이 감상해 보소서~~~!!!
구두 밑에서 말발굽 소리가 난다
손택수
구두 밑에서 따그락 따그락 말발굽 소리가 난다
구두를 벗어보니 구두 뒷굽에 구멍이 났다
닳을 대로 닳은 구두 뒷굽을
뚫고 들어간 돌멩이들이 부딪치며
걸을 때마다 창피한 소리를 낸다
바꿔야지, 바꿔야지 작심하고 다닌 게 몇달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 체념하고 다닌 게 또 몇달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광주로
마산으로, 다시 부산으로 떠돌아다니는 동안
빗물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던 구두
빙판길에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엄지발가락에 꾸욱 힘을 줘야 했던 구두
걸을 때마다 말발굽소리를 낸다
빼고 나면 다시 들어가 박히고
빼고 나면 또다시 들어가 박히는 소리
따그란 따그락 지친 걸음에 발자를 맞춰주는 소리
닳고 닳은 발굽으로 열 정거장 스무 정거장
빈 주머니에 빈손을 감추고 걸어가는 동안
그만 주저않고 싶을 때마다 이럇, 뒷굽을 치며 갈기를 휘날린다
첫댓글 구두에서 얻는 참된 깨달음. 좋은 시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