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글
1.옥천의 역사
대천리에서 정착생활을 시작하다
우리 옥천지역에서 사람이 살았을 가능성은 여러 곳에서 수집되는 구석기유물에서 알 수 있는데, 특히 이곳에 농경을 바탕으로 한 정착생활을 시작하였다는 증거는 대천리에서 발굴된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 기원전 6000년~기원전 1000년)의 집터에서 알 수 있다. 비록 1기만 찾아졌지만 집터는 길이 950cm, 너비 510cm의 장방형으로 출입구 쪽은 취사나 난방을 위한 작업공간과 거실공간, 안쪽은 곡물을 가공 또는 갈무리하는 공간으로 구별하였는데 시기는 기원전 3500~3000년에 해당하며, 집터의 바닥에서 벼껍질, 쌀알, 보리, 밀, 조, 삼씨, 도토리 등이 출토되어 당시의 먹거리나 생활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 기원전 1000년~기원 전후)는 간돌칼[磨製石劍], 돌화살촉[磨製石鏃], 반달꼴 돌칼[半月形石刀], 간돌도끼[磨製石斧]등을 생활도구로 사용하면서 고인돌[支石墓]이나 석관묘[石棺墓]를 남기는 시기인데 석탄리(石灘里) 안터 고인돌유적이 유명하다. 그러나 생활도구를 주로 청동기로 만들어서 사용하는 한국식 동검기(韓國式銅劍期)의 유적은 일부 알려져 있으며, 도구를 완전히 철로 만들어서 사용하는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까지의 유적은 현재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고시산군(古尸山郡)에서 상주(尙州) 관성군(管城郡)으로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들어오면서 옥천지역은 고시산군(古尸山郡)으로 불렸는데, 고고학적으로 보면 산성(山城)과 고분(古墳)을 대표적 자료로 들 수 있다. 비록 정상적으로 발굴 조사된 자료가 없어서 단정짓기에는 무리지만 옥천향토전시관에 수집된 자료에서 보면 5세기말 정도부터는 신라(新羅)의 중심지였던 경주지역의 고분(古墳)에서 출토된 유물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아 신라적 성격이 매우 강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인화기법(印花技法)을 중심으로 하는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들어와서도 대체적으로 그대로 이어지는데 통일신라시대에는 옥천지역이 상주(尙州) 관성군(管城郡)으로 재편되어 이산현(利山縣 : 지금의 이원)과 현진현(縣眞縣 : 지금의 안내)을 영현으로 두었다. 이 시기에 속하는 수장자료로는 기와(瓦), 작은 항아리(小壺), 병(甁), 편병(扁甁) 등의 자료가 옥천향토전시관에 소장되어있다.
옥주(沃州)에서 옥천(沃川)으로
고려시대에는 이 지역이 옥주(沃州)로 불리게 되는데, 이 시기는 통일신라의 작은 항아리(小壺), 큰 항아리(長胴甕), 편병(扁甁) 등의 토기문화를 그대로 계승 발전시키면서 청자(靑瓷)라는 새로운 자기문화를 꽃피운 시기로 용암사(龍岩寺) 삼층석탑(三層石塔)이나 마애불(磨崖佛), 두암리 삼층석탑 등에서 불교문화의 단편을 엿볼 수 있으나 남아 있는 전적은 없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옥천향교(沃川鄕校), 청산향교(靑山鄕校)와 같은 관아건물(官衙建物)과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유허(遺墟),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유허(遺墟)를 비롯하여 창주서원묘정비(創洲書院廟庭碑), 이지당(二止堂), 양신정(養神亭), 사마소(司馬所)등과 같은 유학 관련 건조물들이 지금도 옥천지역에 많이 남아 있다.
한편 이러한 건조물과 더불어 벼슬아치로의 진출에 쓰임이 되는 학습과 수신(修身)의 바탕이 되었던 각종 유학서(儒學書)를 비롯하여, 시권(試券), 고신문서(告身文書), 교지(敎旨), 호구단자(戶口單子), 준호구(准戶口), 호패(號牌), 분재기(分財記), 토지매매문기(土地賣買文記), 문집(文集), 보첩(譜牒), 일기(日記), 의학서(醫學書), 사마안(司馬案) 등의 다양한 전적(典籍)과 고문서(古文書)가 있어서 조선시대 사대부(士大夫) 뿐만 아니라 지역민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2.

금강(錦江)은 한반도의 강으로 소백산맥에서 발원하여 전라북도 동부지역과 충청북도 남서지역을 북서류하여 충청남도 남동지역을 지나 황해로 흘러들어간다.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신무산(神舞山:897m)(뜬봉샘에서 발원) 북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진안·무주·금산·영동·옥천·대전·연기·공주·부여·논산·강경 등 10여 개의 지역을 지나 군산만으로 흘러들며, 강 하류는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이룬다. 이 강으로 유입되는 주요지류로는 진안의 정자천(程子川)·주자천(朱子川), 무주의 남대천(南大川), 금산의 봉황천(鳳凰川), 옥천의 보청천(報靑川), 연기의 미호천(美湖川), 공주의 유구천(維鳩川), 그리고 논산의 논산천(論山川) 등이 있다****
금강은 호수처럼 잔잔하다고 호수 같은 강 즉 호강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호남이라는 지명은 호강 즉 금강의 남쪽 지역이라는 뜻이다. 금강의 유역에 대청댐이 있으며 하류에는 금강하구둑이 있다. 백강(白江)이라고도 하며, 부여군 근처에서는 백마강이라고도 부르는데 모두 같은 강이다.국가하천으로 지정되여 있으며 그 구간은 전라북도 진안군 하신천의 합류점부터 금강하구둑이다.
***〈당서 唐書〉에는 금강을 웅진강(熊津江)이라 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금강의 명칭이 지역에 따라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상류로부터 적등강(赤登江)·호강(湖江)·차탄강(車灘江)·화인진강(化仁津江)·말흘탄강(末訖灘江)·형각진강(荊角津江)으로 되어 있으며, 공주에서는 웅진강, 부여에서는 백마강, 그리고 하류에서는 고성진강(古城津江)으로 되어 있다. 금강의 명칭은 웅진(熊津)과 함께 '(곰)' 계열어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감·곰)은 '짐·검·금·가무' 등으로 전음(轉音)되며 '儉·錦·今·金·金馬·蓋馬' 등으로 차음(借音)되기도 하는데 '강' 또는 '나루'는 '강-금강-錦江'으로, '나루-곰나루-熊津'으로 변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
*****강 상류는 지질구조가 복잡하며, 지형도 매우 복잡하여 험준한 산지가 발달해 있다. 이들 산지 사이로 하천들이 감입곡류(嵌入曲流)를 하고 있어 자연경관이 뛰어나다. 중·하류에는 청주분지·보은분지·대전분지 등의 내륙분지와 논산평야·미호평야 등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어 과거 백제문화의 중심지를 이루었으며, 현재도 이 지역의 생활중심지로 되어 있다. 강 하구는 넓고 깊어 하항(河港)의 발달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하구 주변의 조차는 6m 이상으로서 감조하천(感潮河川)의 특성이 뚜렷이 나타난다. 밀물 때에는 하구로부터 약 64㎞에 위치한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까지 조수의 영향이 미친다. 과거에는 큰 배의 경우 강경·부여까지, 작은 배의 경우 충청남도 연기까지 운항될 정도로 내륙수운이 발달했다. 따라서 우리나라 곡창지대인 호남평야·논산평야의 쌀은 주로 이 금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다른 지방으로 수송되었다. 지금은 호남선의 개통과 도로교통의 발달로 그 기능이 거의 사라졌다.
또한 유황(流況)이 매우 불안정하여 홍수시에는 단기간에 약 70%의 물이 바다로 유출된다. 특히 만조시 홍수가 겹칠 때 중·하류 평야지역의 여러 지류들로 물이 역류하여 범람이 잦았다. 따라서 홍수피해의 방지와 안정된 관개용수의 공급을 위하여 1980년에 신탄진 부근에 대청다목적댐을 건설했고, 1990년에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과 전라북도 군산시 성산면 사이를 잇는 금강하구둑이 완공되었다. 유역 내 연평균 강수량은 1,200~1,400㎜로 우리나라의 평균치 정도이나, 지형과 관련하여 지역적 차이가 크다. 대체로 하류지역은 1,100㎜ 내외이나, 상류지역은 1,300㎜ 내외로 다우지를 형성한다. 그러나 여름철 강수 집중률이 60%를 넘고, 하천의 경사가 급하여 하천 유출량의 변동이 매우 심하다. ****
3.정지용
한의사인 아버지 태국(泰國)과 어머니 정미하(鄭美河)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12세 때 송재숙(宋在淑)과 결혼했으며, 1914년 아버지의 영향으로 가톨릭에 입문했다. 옥천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서 박종화·홍사용·정백 등과 사귀었고,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을 펴내기도 했으며, 신석우 등과 문우회(文友會) 활동에 참가하여 이병기·이일·이윤주 등의 지도를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선근과 함께 '학교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고, 이로 인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가 박종화·홍사용 등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다.
1923년 4월 도쿄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입학했으며, 유학시절인 1926년 6월 유학생 잡지인 〈학조 學潮〉에 시 〈카페 프란스〉 등을 발표했다.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이후 8·15해방 때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했고, 독립운동가 김도태, 평론가 이헌구, 시조시인 이병기 등과 사귀었다. 1930년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李箱)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같은 해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여 문학 공개강좌 개최와 기관지 〈시와 소설〉 간행에 참여했다.
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으로 옮겨 교수 및 문과과장이 되었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및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 주간이 되어 고정란인 '여적'(餘適)과 사설을 맡아보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강연에 종사했다. 1950년 6·25전쟁 이후의 행적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월북했다가 1953년경 북한에서 사망한 것이 통설로 알려져 있다.
******정지용의 향수
넓은 들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게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든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러치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4.육영수

아버지 육종관(陸鍾寬)과 어머니 이경령(李慶齡) 사이의 1남 3녀 가운데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42년 서울 배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옥천중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1950년 10월 12일 당시 박정희 중령과 결혼했다. 1963년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대통령 부인으로서 각종 사회활동, 육영사업, 적십자활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회활동으로 양지회(陽地會) 활동과 각 시·도에 여성회관을 건립하여 여성의 사회 참여를 선도하는 한편, 자연보호운동, 식생활개선, 의류혁신, 문화사업의 지원, 자원봉사활동, 적십자활동, 양지진료소의 개설, 불우이웃돕기, 윤락여성의 자활운동, 양로원·고아원 위문, 전몰군경미망인 자활운동 등을 통하여 국민의 의식개혁운동에 앞장섰고, 또한 〈희망의 등불〉이라는 농어촌 여성 계몽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특히 나병환자들을 위한 구라사업(救癩事業)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세계적인 관심을 집중시켰다. 문화면에서는 청소년을 위하여 경로효친사상(敬老孝親思想)을 불어넣는 데 힘썼다. 어린이대공원의 조성 및 1969년 4월 14일 육영재단을 설립하여 어린이회관을 짓고,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꿈나라〉 등을 발간했다. 또한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직업교육을 시킬 목적으로 정수직업훈련소를 설립했다. 1974년 8월 15일 광복 제29주년 기념식장(국립극장)에서 북한의 사주를 받은 재일교포 문세광의 흉탄에 맞아 사망했다. 장례는 19일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