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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황금률과 청동률의 혼동>의 줄거리:
신앙인과 불신앙인을 불문하고 전 인류에 회자되는 황금률을 모르는 분은 없습니다. 그리고 공자나 유대의 랍비 힐렐등의 유사 황금률들도 같이 붙어 다니며 명성을 누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치명적인 오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황금률을 청동률쯤으로 강등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겁니다.
황금률과 청동률의 혼동
(마7:1-12)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황금률과 청동률의 혼동>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12절에 나오는 말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을 우리는 흔히 황금률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황금률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참 오랜 세월 동안에 변하지 않는 인간윤리의 총화적인 의미로서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그러한 귀중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만 이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니라 유사 황금률들이 도처에 있다는 것을 찾아냈습니다.
예를 들어, 공자님께서 논어에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
또, 유대의 유명한 랍비인 힐렐도 ‘남이 너희에게 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을 너희도 다른 이에게 행하지 말라’
많은 성경 연구가들이 차이를 발견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렇게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표현하셨다.
그러나 유사황금률들을 보면 공자님께서도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 힐렐 같은 경우도 ‘남이 너희에게 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을 너희도 다른 이에게 행하지 말라’
이렇게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면에서 말을 한 것, 이게 다르다.
여러분, 이게 다른 겁니까?
능동적과 수동적, 적극적과 소극적, 이것이 다른 겁니까?
이것을 다르다고 보는 성경해석이 황금률을 청동률로 degrade 강등시켜버리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황금률이라고 부르려고 한다면 공자님이나 유대학자 힐렐이 말씀하신 이 귀한 것들은 청동률에 불과한 것인데, 기껏 찾아낸 차이가 ‘예수님이 황금률이라고 한다면 유사황금률이다, 금의 순도가 조금 모자란다’ 이런 정도의 차이냐 이겁니다.
예수님의 12절의 말씀을 우리가 인용할 때부터 문제가 있어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렇게 인용하면 예수님의 황금률의 의미를 청동으로 바꿔버리는 겁니다.
‘어? 고대로 했는데…?’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인용했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예수님의 황금률을 청동으로 바꾸는 거라는 거예요.
예수님의 황금률을 황금률대로 인용하려면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무엇이든지…’부터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 앞에 ‘그러므로’가 포함이 돼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 ‘그러므로’가 빠져버린 채로 ‘무엇이든지’부터 시작해버리면 예수님의 황금률을 청동률로 degrade 시켜버리는 겁니다.
그리고는 ‘공자가 하신 말씀과의 차이가 소극적과 적극적의 차이뿐이다, 힐렐과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같은 랍비들이 한 말과 소극적이고 적극적이라는 차이밖에 없다’
이렇게 얘기하게끔 된다는 겁니다.
이거 아니거든요, ‘그러므로’가 빠져버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12절 말씀을 면밀히 한번 살펴봅니다.
먼저 이 12절 말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렇게 이해를 해버리면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에게 대접을 하라’
내가 대접을 받고 싶은 그 내용이 과연 내가 남에게 행하는 것의 기준이 될 수 있느냐 이겁니다.
기준이 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내가 받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해주면 그 사람에게 유익이 되겠습니까? 진짜로? 그리고 그 사람이 기뻐하겠습니까?
유익이 된다는 자신이 있어요?
내가 그 정도로 까지 기준이 될 수 있습니까?
내가 받고 싶은 것은 무조건 남에게 해주면 남에게 다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되고 좋은 것일 수 있습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사자와 소가 사귄다’고 가정했을 때, 소가 사자에게 받고 싶은 대접은 최고급 샐러드 3종 세트입니다.
그래서 내가 받고 싶은 샐러드 3종 세트를 사자에게 선물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황금률을 읽고.
사자가 좋아라 하겠어요?
또, 사자가 자기가 대접을 받고 싶은 것은 소갈비 세트입니다, 그래서 사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소갈비 세트를 소에게 주었습니다.
이게 황금률의 의미를 만족시켜줄 수 있을까요?
과연 내가 대접받고 싶은 그것이 남에게 행하는 행동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내가 엄청난 죄인인데, 내 죄로 묻혀버린 인격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남에게 해주면 되겠느냐 이겁니다.
이거 위험한 것일 수 있어요, 여러분!
전혀 안 좋아할 수 있습니다.
선물할 때의 고민이 뭡니까?
내가 받고 싶은 것은 이거지만 저 사람도 과연 좋아할지를 모르는 것 아닙니까?
이거 행하는 게 쉽지 않아요.
그러니까 공자님이나 힐렐 선생님께서 ‘내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도 행하지 말라’ 이렇게 소극적으로 표현했는지 모릅니다, 내가 원하는 게 기준이 될 수 없으니까.
그러나 최소한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지 않을 때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도 행할 때처럼 위험하지는 않지 않겠어요?
내가 원한다고 그걸 남에게 주는 걸 강요할 수도 있고 더 위험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그런 걸 봤습니다.
여전도회 회장 선거 하는데 추천해 줬다고 추천한 집사님과 말다툼 하는 걸 봤어요.
내가 할 수 없다고 그러는데 왜 내 이름을 추천하느냐고.
추천한 집사님은 자기 이름이 추천되면 좋으니까 다른 집사님 추천했는데 그 집사님은 화를 내는 거예요.
여러분, 이거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대로 행하는 사람도 없고 전부 막연하게 그냥 멋있는 글로 기억하는 거예요.
논설위원들이 글 쓸 때나 가끔 이용하고…
여러분, 이거 아니죠.
본문에 대한 오해는 ‘그러므로’를 뺀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가 뭡니까?
바로 앞에 너무 유명한 구절이지요?
7절부터 11절까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러면 하늘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리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입니다.
‘하늘아버지께서 너희가 강렬하게 무엇인가 부족해서 필요를 느끼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에 너희에게 무언가 좋은 것을 주셔서 만족을 주실 테니까…’
‘자, 이제 하늘아버지로부터 만족을 얻은 너희로서는 만족을 얻기 전에 구하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구하고 있을 때 그 사람들의 필요만을 바라보라’는 이런 뜻입니다.
그 사람들이 요구하고 있고 부족해하고 있고 모자라하고 있고 원하고 있는 그것에만 주의를 집중하라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는 하늘아버지로부터 다른 사람에게서 무엇을 받아서 채워야 될 필요가 없을 만큼 충분히 하늘아버지가 좋은 것으로 너에게 주실 테니까…’ 더 이상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요구하고 바라지 말라는 뜻입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네가 아직도 사람에게서, 그것이 가족이건 친구건 회사동료이건, 사람에게서 무언가 받아서 너의 빈속을 채우려고 하느냐? 너는 아직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전히 받을 것을 받지 못한 것이고 온전한 하늘아버지의 자녀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아니면 하늘아버지의 자녀로서의 신분에서 지금 벗어나고 있다, 이 얘깁니다.
‘아직도 사람에게서 뭔가를 원하고 있다면, 사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 내 마음에 만족을 찾고 기쁨을 찾으려 하고 있고 사람에게서 뭔가 채워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면 넌 아직도 하늘아버지의 자녀가 아니다, 네가 채워질 수 있는 유일한 출처는 하나님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채워진 뒤에 그러므로 이제는 네가 비었을 때처럼 비어서 헐떡거리는 사람들의 부족함에만 관심을 갖지, 그 사람들로부터 무엇을 받으려 하지 말라’
그래서 ‘그러므로’를 빼면 예수님의 황금률은 완전히 깡그리 철저하게 오해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여러분, 그런데 문제가 여기서 끝나질 않는 거예요.
‘그러므로’가 참 좋은 말씀이에요, 네가 무엇인가 부족한 것을 느껴서 사람을 향하여 그것을 채우려고 할 때, ‘아차!’ 하고 깜짝 놀라라, 그리고 하늘아버지께 구하고 찾고 두드려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좋은 것으로 채워서 너의 부족함이 없게 하리라.
아! 기가 막히죠?
그런데 여기에 함정 아니 함정이 있습니다.
‘좋은 것으로 주시리라’
좋은 것은 따로 말할 필요가 없는데 불안합니다.
예수님께서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이 말씀이 무지 불안하다 이거예요.
좋은 것은 내가 다 구하지 않습니까? 뭐가 나에게 좋은지 내가 알아가지고.
그러니까 구하고 찾고 두드린 그것을 주시면 되는데, 아버지께서 좋은 것으로 주시겠다고 합니다.
불안하지 않아요, 여러분?
좋은 것인데 왜 불안할까요?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과 아버지가 나를 자녀로 생각하시면서 자녀인 나에게 아버지의 판단에 좋다고 느끼시는 것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여기에 우리의 불안함이 있는 겁니다.
그냥 내가 지금 갈급해 하는 그 좋은 것으로 주시면 될 텐데 아버지께서 좋은 것으로 여기는 걸 내게 주신다니까 그래야 에덴에서의 타락 이전으로 돌아온 것 아닙니까?
내가 선악을 판단하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내가 판단하는 상태에서 끝나버린다면 타락 이후의 상태로 끝나는 거니까, 내가 돈이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주시겠습니까?
아니에요, 하나님은 돈보다 하나님께서 느끼시기에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데, 여기에 참 우리의 불안이 있다는 거예요.
그냥 돈 필요하면 돈 주시면 되지, 왜 하나님 생각에 나한테 돈보다 더 좋은 걸 주시려고 하느냐 이겁니다.
건강이 좋다고 생각해서 건강 구하면 건강 주시면 되는데, 왜 내게 지금 건강보다 더 앞서서 좋고 필요한 것을 주시겠다고 하시느냐 이겁니다.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아! 참~, 이 ‘좋은 것’이 뭡니까?
말씀드렸듯이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귀결되는 그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첫머리에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인 자들에게 나타나는 천국의 티를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이라는 것은 나는 지금 돈이 부족해서 아버지께 나와서 간구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보시는가 하면, ‘네 마음에 불행하고 마음에 걱정이 있고 마음에 만족이 없는 것은 너는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나에게 돈을 구하러 왔지만, 내가 네 마음에 돈보다 더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해 주겠다’ 해서 십자가를 붙잡는 자들에게 주시는 것이 천국이라 이겁니다.
나는 건강이 부족해서 하나님께 나와서 간구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 ‘네 마음의 불행함은 건강이 안 좋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 없어서이다’ 그러고 주시는 게 천국이라 이겁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천국이 우리에게 available 하게 되었어요.
우리에게 가용(可用)한 것으로 됐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 천국을 이용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거예요, 십자가 때문에.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해서 이 땅에 대해서 죽겠다고 마음먹는 자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는데 그들에게는 그들이 몸을 갖고 있기 때문에 피부로 느끼는 돈의 부족함을 하나님은 천국으로 마음에 채워주심으로써 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부족한 줄 모르게 만드시겠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처럼 말뚝을 박고 살아도 육체적인 결함이 있어도, 아픔이 있어도 그 마음에 천국을 넣어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고 하면서 항상 기뻐하라고 노래를 부르고 다니게 해주시겠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세상의 어떤 것으로 채워서 만족한 상태가 아니라 세상 것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하나님아버지께서 좋다고 여기는 천국을 마음에 불어넣어 주심으로 이 세상을 이기는 만족, 이 세상을 극복하는 행복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이 세상 어떤 것들로 채워져야만 이루어지는 행복, 채워져야만 이루어지는 기쁨이 아니라 세상 것 상관없는 세상을 극복하는 행복과 극복하는 기쁨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른 사람에게 요구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늘에 계신 천지를 지으신 아버지가 너의 마음을 채워주실 텐데 아버지가 채워주시는 것 말고 아내에게서 채울 것이 있단 말이냐? 남편에게 아직도 기대하는 것이 있단 말이냐? 자식을 통해서 채워야 할 부분이 남아있단 말이냐? 내가 생각하기에 너에게 좋은 것으로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럴 수는 없다.’
‘이제는 아내를 만날 때 아내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만 보이면 너는 천국의 아들이 되었다는 증거다.’
‘남편을 볼 때 남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만 눈에 보인다고 그러면 너는 천국의 딸이 된 것이다.’
여러분, ‘돈 안 벌고 살기 클럽’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요.
‘아, 내가 월급을 받는 게 사장님께 받는데… 현실적으로’ 그게 여러분, 현실입니까?
한번 이렇게 여쭤보겠습니다.
사장님의 돈은 사장님 겁니까? 정말 여러분은 그렇게 믿으세요?
이건희 씨의 개인재산이 몇 조라고 합니다.
그럼 여러분은 그게 진짜 이건희 씨의 돈이라고 믿으십니까?
그러면 하나님 믿는 사람이 아니죠.
이건희 씨는 그게 내 돈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 적어도 제가 보는 믿음 안에서는 그건 내 하늘아버지의 돈입니다.
삼성직원들이 월급을 받는 것은 이건희 씨가 주는 게 아닙니다, 왜? 이건희 씨 돈이 아니니까… 그건 삼성그룹의 돈이 아니에요.
아버지가 이건희 씨를 통해서 그 삼성직원들에게 주시는 거죠, 하늘아버지가 먹이시고 입히시기 위해서.
내가 일하는 회사의 사장님이 내게 월급을 주신다고 살았습니까?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들?
그러면 믿는 사람이 아니죠.
그게 어떻게 사장님 돈입니까, 사장님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사장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내게 주시는 거죠.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직장에서 돈 벌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아버지가 그 직장으로 보냈기 때문에 사는 거죠.
사람에게서 뭔가를 얻어 채우려고 하지 마세요, 이건 배반입니다.
하늘나라의 자녀로서 자존심도 없습니까?
하나님아버지가 하나님아버지인데, 창조주가 내 아버지인데 사람이 아버지의 아들딸들을 채워서 만족시킬만한 것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그러고도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도 그럴 때 있어요, 사람에게 원할 때가 있어요. 그때는 저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죠.
아버지가 하나님이신데 이 세상사람 누가 그 하나님의 아들을 만족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 얘기예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딸로 살아갈 때 너희가 기껏 사람들에게 얻어서 채우려고 하는 게 있더란 말이냐? 그게 말이 되겠느냐?’
이게 바로 황금률입니다.
‘그러므로’를 채워 넣어야 돼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거꾸로 올라가면, 앞부분에 개, 돼지 이야기가 나와요.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지 말고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
과연 누가 개, 돼지일까요?
베드로 후서 2장 22절에 보면, 개가 토한 것을 먹는다고 그랬어요.
우리가 토해낸 게 뭡니까?
하나님아버지 모르고 예수님 십자가 모를 때, 우리가 마음속에 담고 있었던 것이에요.
이 세상 것이지요, 아내로부터 좋은 것을 얻으려 하고, 돈 벌어야 하겠다, 이 세상에서 잘 나가야겠다, 이 땅의 것으로 마음속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걸 십자가로 토해낸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로 토해낸 자들이 다시 그걸 집어먹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개와 돼지가 누구냐 하면, 이 땅의 것으로 만족하겠다고 체질이 돼버린 상태입니다.
땅의 것으로 만족하고 싶은 마음이 체질이 돼버린 자들에게 거룩한 것, 이 땅과는 완전히 구분된 그 천국을 던져봐야 받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사람을 향해 개와 돼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사회에서 생각하기에는 개와 돼지가 세리와 창기인 줄 알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가장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겨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바로 앞에 뭐라고 나왔습니까?
사람을 향해 개와 돼지라고 말씀하시기 바로 직전에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사람을 향해 개와 돼지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어떻게 바로 앞에서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십니까? 도대체 이게 웬일일까요?
비판이 무슨 내용입니까? 안에 들보가 있으면서 남의 티를 얘기한다, 여기서 들보가 뭐예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외식하면서 안에 서까래 같이 큰 들보를 담고 있으면서 세리와 창기를 향하여 죄인이라고 비판한다는 겁니다.
왜 세리와 창기들은 티를 갖고 있는 자들이고, 거룩하게 살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들보를 담고 있었을까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세상적인 기준에서 성공한 자들이었고 내가 이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하는 것을 스스로 자아의식 속에 굳건하게 담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것이 안에 들어와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으면서 그것을 어떻게 향유하고 누렸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자들을 보면서 ‘내가 성공한 자요, 형통한 자요, 의로운 자’라고 향유하며 누리고 살았습니다.
반면에 세리와 창기들은 속에 담을만한 이 세상 것들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긍지를 가지고 자랑할 만한 붙잡을만한 지위도 돈도 명예도 아무것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잡아야 될 돈도 많았고, 지위도 있고, 명예도 있습니다, 존경도 받았습니다.
이 세상 것들을 굳건히 붙잡고 있습니다.
이게 들보라는 겁니다.
이렇게 세상 것들을 붙잡고 있는 자들이라야 이 세상에 같이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비판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실제로는 없어도 마음으로라도 뭔가 이 세상 것을 붙잡고 있는 자가 비판을 합니다.
실제로 돈은 없어도 마음으로 돈을 붙잡고 있는 자가 재벌들을 욕하고 다닙니다.
나쁜 놈들이니까 쳐부수자고 얘기합니다.
공산당이 왜 생겨났습니까?
재벌들보다 더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있는 자들을 죽이자고 나타난 게 공산당입니다.
재벌들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재벌이므로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들보를 끼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 것이 마음에 담겨진 자들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에서 마음이 세상을 떠나버린 자들, 하늘나라로 가버린 자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에 세상 사람을 비판할 여지가 없어요.
단지 그들이 보는 것은, 이 사람에게 천국이 있느냐 없느냐, 그래서 비판하는 게 아니라 천국이 없는 자들을 천국이 있는 자리로 끌어올리고 싶어서 분별할 뿐입니다.
사도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 섰을 때, 비판하지 않고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늘에 있는데 아그립바 왕은 땅에서 기어 다니니까…
분별이 있습니다, 천국을 사모하고 천국을 소유하느냐 천국을 소유하지 못했느냐? 분별을 따라서 천국을 소유하지 못했으니까 나처럼 천국을 소유하는 자리에까지 올라오라는 얘깁니다.
비판이 아니고 분별하는 거죠.
분별해서 자기의 처지로 끌어올리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늘을 전해보지만 너무너무 세상 것들이 좋은 자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확고하게 이 세상 것을 마음에 담고 절대로 놓지 않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절대로 이 세상 것을 놓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다 지킨다고 생각해서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고, 자기 의 안에서 주어진 이 부귀를 절대 놓지 않을 것이니까.
그들이 개와 돼지이다, 전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붙잡는 게 있으니까, 붙잡을 만한 것이 있으니까…
반면에 세리와 창기는 온 세상이 죄인이라고 욕하지만 그들은 실제로 마음을 까보면 세상에서 붙잡을 게 없어요.
잘나서 안 붙잡는 게 아니라 없어서 못 붙잡아요, 그러니까 티가 들어있다 이겁니다.
이 연관성 안에서 황금률을 봐야 된다는 거예요.
천국을 갖고 있게 됐느냐,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천국을 주셨느냐?
그러기 위해 십자가사건을 일으킨 것이니까.
돈 없어서 부족하다고 엉엉 울지만 아버지 입장에서 볼 때 돈을 주시면 안 됩니다.
돈 주시면 망해요, 그러니까 진짜 만족할 수 있는 것, 천국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천국으로 만족한 다음에 문 열고 나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제 네가 그 사람에게 얻어서 만족을 채워야 될 게 무엇이 있겠느냐?
그들의 필요만을 봐라, 그들의 요구만을 보아라, 그가 무엇이 필요한지만을 주의를 기울여라.
너는 내가 다 채워줄 테니까, 너의 마음에는 부족함 없는 행복과 기쁨을 내가 줄 테니까.
그러기 위해 내가 십자가사건을 일으킨 것이 아니냐?
라는 말씀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황금률을 인용하시려면 앞에 있는 ‘그러므로’라는 단어까지 같이 인용하셔야 황금률을 청동률로 강등시키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황금률대로 살아가는 하루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그러므로’를 기억하여 사람에게 무엇이 요구될 때마다 내게 부족함이 느껴질 때마다 하늘아버지께 구하고 찾고 두들겨 십자가를 통하여 아버지께로 가고 천국을 갖게 됨으로 이 세상 누구를 만나든지 오직 그들의 필요만이 이슈가 될 수 있는 만남을 계속해서 해나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